철학의 세계/과학철학

[스크랩] (10) 기술과 정치 : 그 해변에 백인만 있었던 까닭은 - 홍성욱

ddolappa 2008. 8. 20. 02:55

기술도 정치적’ 애매모호한 논쟁 정리한 위너
흑인 버스 못오게 설계한 해수욕장 진입로처럼
인종차별·자본·엘리트 같은 정치적 요인 예시
기술이 ‘양날의 칼’ 되는건 주변 상호작용에 달려
한겨레
»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뉴욕의 유명한 건축가 모지스가 자신이 설계한 존스비치공원을 백인들만의 쾌적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공원으로 진입하는 고가도로를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가 지날 수 없도록 낮게 설계했다고 주장했다. 이때 기술은 당시 미국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를 담는 식으로 디자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술 속 사상/⑩ 기술과 정치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말은 논쟁적이다. 그렇지만 기술사, 기술철학, 기술사회학과 같은 기술학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다른 전공자들이나 심지어 엔지니어들도 어떤 특정한 기술이 정치적일 수 있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핵무기, 정찰 인공위성, 지뢰와 같은 살인 병기, 감시카메라가 정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과학이 가치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고 서슴없이 주장한다.

 

그런데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명제를 조금 뜯어보면 그 의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분명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공물인 기술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을까? 정치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 아니 넓게 보아도 사람들 사이의 행위를 의미하지 않나? 핵무기가 정치적 기술이라고 했는데, 핵무기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들 중에 (핵탄두, 미사일유도장치, 로켓, 발사장치, 운반장치, 제어 시스템, 통신 시스템 등) 어느 것이 정치적인가? 기술 디자인을 잘게 쪼갤수록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호해진다. 그렇다면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얘기는 기술을 수단으로 사람들의 정치적 행위가 강화(혹은 약화)되거나, 변형되거나, 매개되는 것만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Langdon Winner)에 의해서 주어졌다. 그는 기술의 사용만이 아니라 기술 그 자체가 정치적일 수 있다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주장한다. 첫 번째는 발명이나 디자인이 특정한 그룹의 이해를 대변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다. 미국의 건축가 모제스(Robert Moses)는 뉴욕의 존스비치 공원 진입고가도로를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가 지나다닐 수 없도록 낮게 설계했는데, 이런 경우는 기술이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를 담는 식으로 디자인된 경우다.

 

핵발전 독재적·태양열 민주적 기술




» 뉴욕의 유명한 건축가 모지스가 설계한 존스비치공원.

이런 예는 기술사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기술사학자 데이빗 노블(David Noble)은 2차대전 이후에 MIT(매사추세츠 공대)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수치제어 공작기계가 특정한 정치적 이해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공작기계는 숙련노동자의 작업을 테이프에 입력해서 작동되는 방식과 숙련노동자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수치제어 방식이라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개발 가능했는데, 숙련노동자들의 노조를 무력화하길 원했던 GE(제너럴 일렉트릭)사와 기계가 인간보다 훨씬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MIT 엔지니어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서 공작기계가 전자동 방식인 수치제어 쪽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수치제어 공작기계는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들의 이해를 충족했다고 할 수 있다.

 

기술이 정치적일 수 있는 두 번째 경우는 “선천적으로 정치적인 기술”이다. 위너는 이를 다시 두 가지로 나누는데, 그 첫 번째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 기술이며, 두 번째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과 더 잘 부합하는 기술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은 반드시 중앙에서 이를 통제할 “과학기술자-군인”이라는 강력한 엘리트 그룹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경우가 전자의 예다. 반면에 태양력 발전이라는 기술은, 비록 분산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이런 사회와 더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예가 위너의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기술이다. 기술철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1960년대에 기술을 민주적 기술과 독재적 기술로 나누었고 현대사회가 점점 독재적 기술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개탄했는데, 위너가 예로 든 핵발전소와 태양열 발전은 각각 멈포드의 독재적, 민주적 기술에 해당하는 것이다.

 

노블이 분석한 수치제어 공작기계는 군산학복합체의 산물이었다. 이를 도입한 GE사는 숙련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길 꾀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의도가 생각대로 관철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계가 도입된 뒤 매니저들은 기계공들의 임금을 삭감하였는데, 그 결과 기계공들은 일할 동기를 잃었다. 또한 기계의 속도에 따른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예기치 못했던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생산라인의 비효율이 초래되었다. 그리하여 GE사는 고참 공작기계공들에게 기계와 프로그램을 조작, 통제,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수치제어 공작기계는 이 기계를 조작하고 통제하는 고급 숙련 노동자들을 낳았고, 이들은 오히려 그 이전의 노동자들에 비해서 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기술사의 곳곳에서 나타난다. 핵전쟁을 대비해서 만든 미국 고등군사연구국의 아르파넷(Arpanet)이 세상을 이어주는 인터넷으로 발전한 것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핵전쟁을 대비한 분산적 네트워크가 포스트모던 세상에 적합한 통신수단이 된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

 

» 랭던 위너.

노동자들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작업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이, 노동자들에 의해서 매니저들의 사적인 판단을 감시하는 역감시의 기제로 발전된 역사적 사례도 있다.

 

이렇게 기술은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정치적 영향을 낳곤 한다. 그 이유는 기술의 궤적이, 기술이 새롭게 열어주고 힘을 부여하는 사회세력들과 동시에 그 기술 때문에 힘을 잃는 사회 세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때그때 형성되는 불안정한 균형에 따라 불규칙하고 가지치기 식의 경로를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기술이 특정한 궤적을 그리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를 들어 정보기술은 반드시 감시기술을 낳는다는 식의) 자칫 비관적인 결정론으로 귀결되기 쉽다. 기술의 궤적에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세력들 사이의 힘의 관계이지, 기술의 초기 디자인에 각인된 발전 방향성이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백하게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적이지 못한 정치적 기술을 놓고 이 기술이 가져올 수도 있는 미래의 역설적인 결과만을 기다리는 것 또한 위험한 태도이다. 이럴 경우 기술의 궤적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항상 기술과 사회세력들의 다양한 개입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 기술이 매개하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자. 기술에는 양날의 칼 같은 기술이 있다. 즉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선한 결과를 낳기도 하고 해로운 결과를 낳기도 하는 기술이다. 라디오와 TV는 민주주의 미디어가 될 수도 있으며, 전체주의를 강화할 수도 있다. 그 기술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사용되는가가 중요한 경우다. 이런 기술은 “정치적인 해석 유연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기술의 사용과정에 대한 시민들의 각성과 참여가 기술의 정치성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틀어준다. 그렇지만 모든 기술이 양날의 칼 같은 기술은 아니다. 정치적인 해석 유연성이 크지 않은 기술도 많이 있다. 통제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소수 엘리트들에게 더 큰 권력을 부여하는 기술도 존재한다. 이런 기술의 경우에는 대안 기술을 개발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시민 각성·참여가 방향 길잡이

 

»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기술의 정치화에 대한 논의는 기술결정론을 피할 수 있는 한 가지 인식적 토대를 제공한다. “기술은 양날의 칼이다”는 주장은 보통 “기술은 가치중립적이다”는 얘기로 이어지는데, 이미 보았듯이 이는 기술에 대한 단순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기술은 자동적으로 양날의 칼이 되는 것이 아니며, 가치중립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면 기술은 그것을 디자인하고, 개발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의 의도대로 발전하기 십상이다. 기술의 발전방향을 두 갈래로, 아니 여러 갈래로 만드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그룹의 개입과 실천이다.

 

기술의 궤적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기술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발전의 경향성과 그 기술을 둘러싼 사회집단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며, 이는 “시민 참여의 기술정치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기술이 어디에 속하는가를 밝혀내고 그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기술사회를 살아가는 ‘기술시민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출처 : Freiheit in mir
글쓴이 : 김문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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