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세계/과학철학

[스크랩] (7) 자전거 기술은 치마길이가 좌우했다 - 홍성욱

ddolappa 2008. 8. 20. 02:54

고무 타이어의 속도감·여성에 맞는 작은 앞바퀴
‘안전 자전거’ 보편화에 결정적 영향 줬듯
기술 발전은 사회집단간 이해관계 따라 결정
기술 자체 논리보다 사람들 합의과정 중요하다
한겨레
» 초기에 남성 스포츠 자전거 애용자들이 선호했던 앞바퀴가 큰 자전거. 이 자전거는 치마를 입은 여성들을 위해서 변형된 모델을 만들어야 했다.
기술 속 사상/⑦ 기술의 사회구성론
 

‘기술의 사회 구성론’은 기술변화의 과정에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문화적 요소가 개입하는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기술이 사회과정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기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왜 150볼트가 아닌 110볼트 또는 220볼트 전기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한때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가 발전해서 결국 누구나 소형 자가용 비행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비행기의 크기는 커졌는가? 자전거가 처음 만들어진 19세기 말에는 다른 형태의 자전거도 많이 있었는데 어째서 다이아몬드 형태의 틀과 고무 타이어를 쓰고 두 바퀴의 크기가 비슷한 안전자전거(safety bicycle) 모델이 지금은 보편적이 되었는가?

 

핀치와 바이커의 ‘자전거’ 연구

 

이런 문제에 대한 상식적인 답은 대체로 지금 우리가 쓰는 모델이 다른 모델보다 편하고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지금 살아남은 기술이 다른 기술보다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이란 좋은 것, 합리적인 것, 추구해야 할 것, 심지어 운명지어진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런 관점은 논쟁적인 기술을 분석할 때 문제를 발생시킨다. 핵무기와 독가스도 효율적인 기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인간복제 기술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가 가진 기술이 다 효율적인 것이라면, 왜 재앙에 가까운 기술적 실패가 종종 발생하는가?

 

기술 결정론에서는 기술의 발전은 물론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이미 기술 속에 결정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기술의 사회구성론은 기술 발전의 궤적이 이미 기술 내에 결정되어 있다는 식의 ‘본질주의’(essentialism)를 비판하면서 기술의 발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사회 집단들을 강조한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연구를 한 과학기술학자 핀치와 바이커는 자전거의 변천에 관한 사례연구를 통해 기술의 구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자전거의 발전 과정을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전거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집단이다. 여기에는 자전거를 만든 기술자, 남성 이용자뿐 아니라 여성 이용자, 스포츠 자전거 이용자, 심지어 자전거 반대론자도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자전거 디자인에 대해 그들 나름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스포츠 자전거 이용자들은 56인치짜리 커다란 앞바퀴가 달려서 페달을 밟아 격한 운동을 할 수 있는 모델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앞바퀴가 큰 자전거는 여성 이용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설계된 모델을 개발해야 했는데, 당시 여성들은 보통 긴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앞바퀴가 작은 자전거를 선호하던 여성들은 자전거의 모델이 지금의 안전자전거로 종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식으로 자전거의 발달을 이를 둘러싼 사회 집단의 맥락 속에서 분석해보면, 자전거의 초기 발전단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자전거로의 단선적 발전을 반영한다기보다, 오히려 자전거라는 기술과 여러 사회집단, 그리고 풀어야 할 기술적 문제들의 분산된 네트워크를 반영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공기 타이어가 자전거에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초기에는 아무도 공기 타이어가 자전거 설계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지 않았다. 기술자들에게 공기 타이어는 매우 골치 아픈 문제였고, 스포츠 자전거를 즐겼던 사람들에겐 쿠션을 제공하는 공기 타이어가 오히려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회집단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일한 기술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서로 다르게 파악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도 다르게 제시한다. 따라서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회집단들 사이에는 그 기술이 가진 문제점과 해결책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이 사법적, 도덕적, 정치적 성격을 띠는 복잡한 협상을 통해 해소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하게 되면 안정적인 기술적 인공물의 형태가 선택된다. 그런데 사회 구성론자들은 이 합의의 과정이 다시 ‘사회적’ 과정임을 강조한다. 자전거 변천 과정에서도 자전거 경주와 같은 사회적 요소가 논쟁의 종결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자전거 경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공기 타이어를 장착한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빠르다는 것이 경주를 통해 입증되었다. 이 과정에서 초기 자전거 설계에서 중요하지 않던 속도가 자전거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새로이 부각되었는데, 그 결과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안전 자전거 쪽으로 경쟁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큰 앞바퀴 치마입고 타기에 불편

 

기술 디자인을 종결하는 데 중요했던 또 다른 요소는 여성 자전거 애호가들이었다. 자전거를 격렬한 스포츠로 여기던 남성들은 큰 앞바퀴가 있는 자전거를 선호했지만, 여성들은 치마라는 복장 때문에 앞바퀴가 작고 타이어가 쿠션 기능을 해주는 안전 자전거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은 기술적 논리(가령 효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 집단, 이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자전거라는 인공물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여러 가지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담론은 논쟁이 종결된 후에 그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 사회 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조금만 일반화시켜보자. 기술적 인공물을 둘러싼 사회집단에는 이를 만들고 판매하는 엔지니어와 기업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소비자도 있다. 이 각각의 사회집단은 어떤 한 가지 기술과 관련해서 자신들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러한 문제 각각에는 다양한 해결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한 가지 문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기술적 유연성’(technological flexibility)이라고 부른다.

 

‘기술의 영향에 무관심’ 비판도

 

이런 다양한 유연성들은 기술을 둘러싼 사회집단들 사이의 해석차와 갈등으로 나타난다. 갈등은 핵심적인 문제가 새로운 기술에 의해서 해결됨으로써 해소되며, 그 결과는 특정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논쟁의 종결은 기술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일종의 합의과정이다. 즉 기술의 방향, 내용, 그 결과가 사회 그룹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이 모든 과학기술학자들을 설득한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은 우선 사회구성론이 기술의 출현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영향에는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하곤 했다. 즉 기술이 선택된 이후에 그것이 개인의 경험이나 사회관계를 바꾸는 양식은 기술의 사회구성론에서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자들은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와 관련된 몇몇 사례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포드가 생산한 자동차가 처음에는 운송수단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농촌지역에 확산되면서 다른 기계를 작동시키는 동력의 역할도 담당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들은 기술변화에 수반되는 사회구조나 권력관계를 무시하며, 기술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즉 기술의 사회구성론은 기술변화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있으며, 기술변화의 방향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비판이다.

 

» 홍성욱/서울대학교 교수·과학기술사

이러한 비판자들은 기술철학과 기술사회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기술이 어떻게 구성되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기술중심적인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술의 사회구성론이 이러한 문제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은 기술이 가진 유연성을 드러냄으로써 기술결정론을 비판하고 “기술이 지금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회구성론자들은 이러한 이론적 틀을 논쟁적인 기술을 평가하는 ‘기술평가’나 엔지니어를 위한 교육의 개혁에 적용하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사회구성론자들이나 비판자들 모두는 기술결정론이 지배하는 기술사회의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더 바람직한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는 기술철학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Freiheit in mir
글쓴이 : 김문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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