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의 사진의 메세지 | |
번호 : 60
글쓴이 : 리스 |
조회 : 441 스크랩 : 0 날짜 : 2001.08.11 18:59 |
롤랑바르트의 "사진의 메시지"
롤랑 바르트 보도사진은 하나의 메시지이다. 이메세지의 총체는 송신원,전달경로,수신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송신원은 신문의 편집으로 전문가 집단의 일부가 사진을 찍고 일부는 사진을 선별하며 구성하고 처리하며 또다른 일부는 인화, 설명, 논평, 한다. 수신처는 신문을 읽은 독자들이다. 그리고 전달경로는 신무 그자체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주변은 원고 제목 설명문 조판형태로 구성되는 경젱 메시지들의 복합체이며 보다 추상적인 그러나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닌 것으로 신문의 제명 자체다 (왜냐하면 이 제명은 엄밀한 의미로 메시지 해독을 강력하게 방향전환시키는 앎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진은 오로르[l'aurore]에서 [위마니테 l'Huma-nite]로 옮겨 가면서 그 의미가 바뀔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검증작업은 사소한 것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메시지의 전통적 3부분은 동일한 연구방법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인다. 메시지의 송신고 수신은 둘다 모두 사회학의 영역에 속한다. 즉 인간 집단을 연구하고 동기 태도를 정의하며 이 집단의 행동을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 전체에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지 그 자체에 있어서는 방법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메시지의 출처와 용도가 어떤 것이든 사진은 단순히 하나의 산물이거나 수단일뿐만 아니라 하나의 대상으로서 구조적인 자율성을 부여 받고 있다. 이 대상을 그의 용도로부터 차단할 것을 조금도 주장함 없이, 여기서는 사회학적 분석 그 자체에 선행하며, 사진이라는 이같은 독창적인 구조의 내재적 분석일 수 밖에 없는 특수한 방법을 예측해야만 한다. 물론 순전히 내재적 분석에 비추어 보아도 사진의 구조는 고립된 구조는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경쟁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보도사진에 동반되는 텍스트(제목, 설명문 혹은 기사인 또 다른 하나의 구조와 소통하고 있다. 정보의 총체는 라서 상이한 두개의 구조에 의해 지탱된다.(그중 하나는 언어학이다) 이 두 구조는 경쟁적이며 그들의 단위가 이질적인 까닭에 혼합될 수 없다. 이(텍스트)속에서는 메시지의 실체가 말로 구성되고 있고, 그 (사진)속에서는 선이나, 표면 혹은 점으로 구성된다. 게다가 메시지의 두 구조는 제한되고 인접한 그러나 균질적이지 않은 공간을 점유한다. 마치 그림 수수께끼에서 말고 이미지의 독서가 하나의 선상에 융합되어 있듯이 말이다. 더구나 기술된 논평없이 실린 보도사진은 없지만, 분석은 각각의 분할된 구조를 우선 다루어야 한다. 즉 각 구조의 연구를 이끌어낸 연후에댜 그들이 서로 보완하고 있는 방법을 알게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각각의 구조에 대한 연구를 철저하게 규명할 때 뿐이다. 이 두구조에서 언어구조 하나는 이미 알려져 있고(그러나 사실상 신문의 말을 구성하는 <문학>의 구조는 그렇지 않다. 이분야에는 상당한 작업이 남아 있다) 또하나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진의 구조다. 여기서는 사진 메시지의 구조분석에 있어서의 첫 어려움들을 정의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사진의 역설 사진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사진은 무엇을 송신하는가? 정의상으로, 장면 그자체,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다. 대상에서 그 이미지까지에는, 문명히 비율 원근 색채의 축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축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용어의 수학적 의미에서의) 변형이 아니다. 현실에서 사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이현실을 단위체들로 절단할 필요도, 이 단위체들을 그것들이 읽게 해주는 대상의 실질적으로 단른 기호들로 구성할 필요도 전혀 없다. 이 대상과 이미지 사이에는, 중계, 즉 ‘코드’를 배치하는 일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분명히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지는 적어도 유사물 analogon이며 또한 사진을 정의하는 것은 상식선에서 바로 유사적 완벽함이다. 이와같이 해서, 사진 이미지의 특수한 본질규정이 명백해진다. 그것은 코드없는 메시지이다. 이는 곧 바로 중요한 필연적 귀결을 끌어내야만 하는 명제이다.그것은 사진 메시지는 연속적 메시지라는 것이다. 코드없는 또다른 메시는 존재하는 것인가? 언뜻보기에는 그렇다. 그것은 소묘, 회화,영화,연극과 같은 바로현실의모든 우사적 재생들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각각의 메시지들은 유사적 내용 그 자체(장면, 대상, 풍경) 이외에 즉각적이며 분명한 방식으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재생의 스타일이라고 부르는것인 보충의 메시지를 발전시킨다. 거기에서는 이차적 의미가 문제되는데 그 시니피앙은 제작자의 영향으로 이미지의 어떠한 <처리>이며 그 시니피에는 미적이든 이데올로기적이든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어떠한 <문화>를 가리킨다. 요컨대 이모든 모방적 <예술들>은 두가지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유사물 그 자체인 外示的시지와 어느정도까지는 하회가 생각하는 것을 읽게 해주는 방식인 共示的 메시지이다. 메시지들의 이같은 이원성을 사진이 아닌 모든 재생들 속에서 명백한 것이다. 아무리 <정확하다>하더라도 그 정확성 자체가 <진실주의적> 스타일로 바뀌는 소묘의 경우나, 그 객관성의 기호 자체로 읽히는 영화촬영된 장면이 또 그렇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공시된 메시지에 대한 연구는 차우에 해야 할일로 남아 있는 것이다.(우리가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의 의미작용의 체계로 환원될 수 있느냐를 특히 결정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모든 모방적 예술들에 있어서 그것들이 공통적인 것일때, 공시된 체계의 코드가 십중팔구 보편적 상징체계에 의해서 혹은 시대의 수사학에 의해서, 즉 스테레오 타입의 저장(도식, 색채, 필적, 몸짓, 표현, 요소들의 집합)에 의해서 구성되는지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원칙적으로 사진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절대 <예술적> 사진이 아닌 보도사진에 대한 것이다. 사진은 자신을 현실의 기계적 유사물로 생각하고 그 첫 번째 메시지는 말하자면 그 실체를 가득 채우며, 이차적 메시지가 전개될 여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다. 요컨대 모든 정보구조들 중에서 사진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고갈시키는 <외시적>메시지에 의해서만 독점적으로 구성되고 점유되는유일한 것일수 있다. 사진 앞에서는 <코노테이션>의 느낌 혹은 달리 말해 유사성의 충족이 매우 강해서 , 어떤 사진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기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술은 바로 외시적 메시지에 중계 혹은 2차적 메시지를 부가하게되며 이는 언어라는 코드속에 끌려온 것으로 정확히 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사진의 유사물에 비해 코노테이션을 불가피하게 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은 단지 부정확하다거나 불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것이며, 보여진것과는 또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의 이같은 수수한 <외시적> 법규, 그유사성의 완벽함과 충실함, 요컨대 그 <객관성>등, 이모든것들은 신화적으로 되는 (이는 상식이 사진에 빌려준 특성이다)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사진의 메시지(적어도 보도사진의 메시지)가 그것에 EH한 공시이게 하기 위한 강력한 개연성(거시에 작업의 가설이 있을 것이다)이 있기 때문이다.코노테이션은 반드시 메시지 자체의 층위에서 즉각적으로 포착되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다.(그것은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동시에 활동적이며 명료한 동시에 함축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메시지의 생산과 수신층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들을 귀납시킬 수 있다.한편으로 보도사진은 그 만큼 코노테이션의 요인들인 전문적, 미적, 이데올로기적 기준들에 의거해 작업되고 선별되고 구성되고 제작되고 처리된 대상물이다. 다른한편 이동일한 사진은 단지 인지되고 수신되는 것이 아니라 읽혀지는 것이며, 그것들 소비하는 대중들에 의해 다소간 의짓적으로기호들의 전통적인 저장소에 연결된다. 그런데 모든 기호는 하나의 코드를 전제로 하며, 확립하려고 애써야만 하는 대상은 바로 (코노테이션의) 코드인 것이다. 산진의 역설은 따라서 하나는 코드없는 메시지(그것은 사진의 유사물일 것이다), 다른하나는 코들릴 지닌 메시지(그것은 <기술>, 혹은 처리, 혹은 <글쓰기> 혹은 사진의 수사학일 것이다)라는 , 두메시지의 공존이다. 구조적으로 역설은 외시적 메시지와 공시적 메시지 간의 결탁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그 결탁에 모든 대중매체의 아마도 숙명적인 그 본질규정이 있는 것이다. 역설은 공시된 (혹은 코드로 된) 메시지가 여기에서는 코드없는 메시지로부터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구조적 역설은 윤리적 역설과 일치한다. 우리가 <중립적, 객관적>이고 싶을때 마치 유사한 것이 가치의 충당에 저항하는 요인인 것인 양, 우리는 현실을 면밀하게 복제하려고 노력한다.(적어도 그것이 미학적 <리얼리즘>의 정의이다) 따라서 어떻게 사진이 <객관적>인 동시에 <충당적>이며, 자연적인 동시에 문화적일 수 있는가? 우리가 아마도 이 질문에 언젠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외시적 메시지와 공시적 메시지의 중복양식을 포착하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사진 속에서 외시적 메시지는 완전히 유사적인 것인 까닭에, 즉 코드에의 의지를 잃었기에, 즉 연속적인 것이기에, 첫 번째 메시지의 의미있는 단위들을 연구할 여지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반대로 공시적 메시지는 표현의 국면과 내용의 국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해독이 필수적이다. 이해독은 현재로서는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왜냐하면 의미있는 단위들과 의미를 띠고 있는 주제들(혹은 가치들)을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형식의 변화가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아마도 테스트에 의해) 사진의몇몇 요소들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지향된 독서를 행해야만 한다. 적어도 이제부터 우리는 사진의 코노테이션(함축) 분석의 주요한 계획을 예상할 수 있은 것이다. 1.코노테이션의 방식들 코노테이션 즉 엄밀한 의미에서 사진 메시지에서의 2차적 의미부가는 사진 제작의 여러 다른 층위들(선택, 기술적 처리, 지면배치, 페이지 조판)에서 완성된다. 그것은 결국 사진적 유사물의 코드화이다. 따라서 코노테이션의 방식을 끌어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방식들이, 의미론적 유형의 최종분석이 아마도 언젠가 그 방식들을 정의하는 것을 허락하게 될 그대로의 의미작용의 단위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환기시켜야만 한다. 그 방식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사진의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알려진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은 알려진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구조적 용어로 번역하는데 만족할 것이다. 엄밀하게, 앞의 세가지 (트릭,포즈,피사체)는 뒤의세가지(포토제니,유미주의,통사론)와 분리시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앞의 세가지 방식들 속에서 코노테이션은 현실 그자체, 즉 외시된 메시지의변형에 의하여 생산되기 때문이다.(이같은 준비는 물론 사진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사진으 코노테이션 방식들 속에 그것들을 포함시킨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것들 역시도 디노테이션의 위력의 혜택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은 사진가로 하여금 그가 포착하려고 하는 장면에 미리 손대는 것을 피할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종국적인 구조적 분석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방식들이 인도하는 소재들을 고려할 수 있음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1.트릭1951년 미국의 신문지상에 너릴 배포된 한 장의 사진이 상원의원 밀래드 타이딩즈에게 의석을 사임하게 한 바 있었다. 이사진은 문제의 상원의원이 공산주의지도자 였던 얼브라우더와 대화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상 이것은 두얼굴의 인위적 접근에 의해 구성된 조작된 사진이었다. 트릭의 방법론적 장점은 예고없이 디노테이션의 국면 내부로까지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강력하게 공시된 한 메시지를 단순히 외연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단지 디노테이션의 예외적 힘일 뿐이인 사진의 특별한 신뢰성을 이용한 것이다. 그 어떤 다른 처리에서도, 디노테이션의 <객관적>인 가면을 그처럼 완벽하게 쓸 수는 없다. 물논 의미작용은 기호의 저장고 코드의 시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시니피앙은 두 등장인물의 대화의 태도이다. 그런데 이태도는 일정한 사회에 있어서만이 즉 단지 일정한 가치들의시선에서만이 기호로 된다는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대화장들의 몸짓을비난할 만한 친숙함의 기호로 만드는 것은 미국 선거의오만한 반공주의이다. 그것은 코노테이션의 코드가 (실제의 언어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것도 자연수러운 것도 아님을 말한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다. 2.포즈 여기, 미국의 지난번 선거에 널리 배포된 보도사진이 한 장있다. 그것은 측면에서 보여지고 눈은 하늘을 향해 있고 두손은 모아져 있는 케네디 대통령의 상반신 사진이다. 여기에서 젊음 경건함 순수함이라는 코노테이션의 시니페에들의 독해를 준비하는 것은 포즈 자체이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작용 요소들(하늘을 향한 시선, 모아진 두손)로 구성된 스테레오타입화된 태도의 저장고가 존재하기 때문만으로 사진은 명백히 의미있는 것이다. 초상화적 코노테이션의 <역사적 문법>은 따라서 그 재료들을 회화, 연극, 사고의 연합, 일상적 은유등 즉 정확하게는 <문화>속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포즈는 특수하게 사진의 방식이 아니지만 사진을 기초짓는 유사적 원리에서 그효과를 도출하는 이상, 거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메시지는 여기에서 <포즈>가 아니라, <기도하는 케네디>이다. 독자는 사실상 외시되고 - 공시된 이중구조인 것을 마치 단순한 디노테이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3.피사체 여기에서는 피사체들의 포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특별한 중요성을 인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공시된 의미는 사진찍혀진 피사체들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사진사가 충분한 여유가 있어 렌즈 앞에 이 피사체들을 인위적으로 배치하거나 여러장의 사진중에서 페이지 조판자가 그 어느 피사체의 사진을 선정하거나) 흥미로운 것은 이 피사체들이 사고들의 연합(도서관=지적인 것)의현행 유도체이거나 혹은 더 막연한 방식으로는 진정한 상징들 이다.(체스먼의 개스실문은 옛날 신화 속의 음산한 문을 떠올린다) 이 피사체들은 의미작용의 탁월한 요소를 구성한다. 그리고 기호에 있어서는 물리적 특성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피사체들은 분명하고 알려진 시니피에를 가리킨다. 그것들은 따라서 통사론에서 쉽게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진정한 어휘의 요소들이다. 여기에 예를 들어 피사체의 한 <구성>이 있다. 벽돌지붕으로 열려진 창문, 포도 재배지 풍경, 그 창문 앞에는 사진첩, 돋보기, 꽃병이 있다. 우리는 따라서 르와르 강 남쪽(포도와 벽돌)에 있는 시골, 고령으 l주인(돋보기)이 자신의 추억을 더듬고 있는(사진첩) 부르조아 주택(탁자 위의 꽃)에 있는 것이다. 그는 말라가르에서의 프랑스 모리악이다. -마치 [Paris-Martch]에 실린). 코노테이션은 말하자면 마치 즉각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즉 평범한 장면인 듯 포착된 이 모든 의미적 단위체들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코노테이션을 모리악의 토지에 대한 애착이라는 주제를 상술하고 있는 텍스트 속에서 분명하게 발견한다. 피사체는 아마도 더 이상 힘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하나의 의미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4포토제니 우리는 이미 포토제니의 이론을 만들었으며 ([명화혹은 상상적인간}에서의 에드가르 모랭) 또한 이방식의 일반적인 의미작용에로 되돌아갈 장소도 아니다. 포토제니를 정보적 구조의용어로 정의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포토제니 속에서 , 공시된 메시지는 이미지 그 자체속에 있으며 조명, 감광, 인화의 기술에 의해 <미화된다>. (즉 일반적으로 승화된다) . 그들 각각이 기술적<효과> (예를 들어 時 -空을 의미하기 위해 슈타이네르트 박사팀에 의해 시도된 움직임의 연조 혹은 패닝)의 문화적 어휘에 합병되기에 충분히 항구적인 코노테이션의 한 시니페이에 일치하는 한 이 기룻ㅇ은 검토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 검토는 게다가 미적 효과와 의미적 효과를 구별하는 탁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아마도 사진에서 전시회으 사진작가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사진에는 결코 예술은 없고 항상 의미만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을 제외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의미는 바로 정확한 규칙에 따라 매우 구상적인 훌륭한 회화를 사진에 대립시킬 것이다. 5. 유미주의 누군가 사진에 있어서 유미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애매모호한 방식으로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진이 회화, 즉 구성이나 반죽한 그림물감 속에서 고의로 처리된 시각적 실체라고 할 때 그것은 그 자체<예술>(이는 세기초의 회화주의의 경우이다) 로서 의미되거나, 보통 코노테이션으 lekfms 방식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보다도 더 섬새하고 보다 복잡한 시니피에를 부과하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리지유Lisieux의 신자들에 의한 파첼리 추기경의 접견을 옛날 거장의 그림처럼 구성했었다. 그러나 이사진은 결코 회화가 아니다. 한편으로 그의 짓궂게 과시된 유미주의는 (모든 진정한 회화와는 반대로) 그림의 사고자체를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 구성은 여기에 공표된 방식으로 객관적 스펙타클의 용어로 정확하게 번역된 어떤 법열경의 구도를 의미한다. 우리는 게다가 여기에서 사진과 회와의 차이점을 보게 된다. 르네상스파 직전의 화가의 어떤 회화에서 구도는 전혀 시니피에가 아니며, 말하자면 , 이미지 그 자체인 것이다. 분명히 어떤 회화에는 코드의 요소들 수사학으 형상들, 시대의 상징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의미있는 단위체도 존재방식이지 구조화된 메시지의 대상이 아닌 구도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6,통사론 우리는 여기에서 한 장의 같은 사진의 내부에서 피사체-기호의 담론적 독해에 대해서 이미 말한바 있다. 물론 많은 사진들은 시퀀스로 구성될 수 있다. (이는 사진이 곁들인 잡지들에서는 흔한 경우이다.) 코노테이션으 시니피앙은 따라서 시퀀스의 어떤 단편의 층위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언어학자들이 초분절적이라고 말하는) 연쇄의 층위에서 발견된다. 여기, 랑부이예에서의 대통령이 주최한 사냥대회에 대한 4장의 스냅사진이 있다. 각 장면에서 유명한 사냥꾼 벵상 오리올은 몸으 피하거나 납작 엎으리 이Y는 경호원들을 무릅쓰고 총구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시퀀스(단지 시퀀스만이) 잘 알려진 방식에 다라 태도의 반복과 변화에서 비롯되는 희극을 읽게 해준다.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한장의 사진은 회화에서와는 반대로 매우 드물게(즉 매우 어렵게)희극적이라는것에 주목하게 된다. 희극은 움직임 즉(영화에서는 손쉬운) 반복이나 (그림에서는가능한 )전형화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두 코노테이션은 사진에서는 금지되어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 이러한 것들이 사진이미지의 코노테이션의 주요 방식들이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문제되는 것은 테크닉이지, 단위체가 아니다) 우리는 거기에 한결같은 방법으로 보도사진을 동반하는 텍스트자체를 결합시킬수 있다.여기에 세가지 지적할 사항이 있다. 우선 텍스트는 이미지를 공시하게끔 되어 있는, 즉 메시지에 하나 혹은 여러개의 이차적 시니피에를 <불러 일으키는 >, 기생적인 메시지를 구성한다. 달리 말해서 ,그런데, 이는 중요한 역사적 전복인데 이미지는 더 이상 파롤을 삽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이미지의 기식자인 것은 파롤인 이다. 이 전복은 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삽화>으 전통적 양식 속에서 이미지는 바로 삽화를 필요로했기 때문에 공시된 것으로 느껴졌던 주요한 메시지(텍스트)에서 출발하여, 디노테이션으로으 삽화적인 회귀로 기능한다. 현재의 관계 속에서 이미지는 파롤을 명확하게 하거나 <실현>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승화하고 비장화하거나 합리화한는 것은 파롤이다. 하지만 이조작은 부수적으로 이루어 지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적 집합은 파롤이 거의 일관성 있는 일종의 이차적 진동인, 객관적(외시된)메시지에 주로 기초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예전에는 이미지가 텍스트를 삽화로 보여주었으나 (텍스트를 명확하게 해주었으나) 일종의 이차적인 오늘날에는 이미지에서 택스트로의 확대가 있다.코노테이션은 마치 사진적 유사에 의해 구성된 근본적인 디노테이션의 자연스러운 반향처럼 더 이상체험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적인 것의 순화라는 특정적인 과정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지적은 코노테이션으 효과가 아마도 파롤의 소개양식에따라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파롤이 이미지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미지는 파롤을 덜 공시한다. 말하자면 도상적 메시지에 의해 붙잡혀서 언술적 메시지는 사진의 객관성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며 언어체의 코노테이션은 사진의 디노테이션으 통하여 <자신의 무고를 증명한다> (한쪽은 書寫的 다른 한쪽은 도상적) 두 구조으 실체는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에, 진정한 합병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마도 혼합의 정도는 있을 것이다. 설명문은 대개 커다란 타이틀이나 기사보다는 덜 명백한 코노테이션의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타이틀과 기사는 이미지에서 두드러지게 분리된다. 타이츠은 그 활자의 크기에 의해 기사는 그 간격에 의해서 말이다. 그것은 타이들은 이미지의 내용을 단절시키고 기사는 그 내용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명문은 반대로 그 배치 자체에 의해 독해의 중간 정도에 의해 이미지를 추월하는 것처럼 즉 이미지의 디노테이션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텍스트에 관한 마지막 지적이 될 것인데 ) 파롤이 이미지를 <추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구조에서 또 다른 하나의 구조로의 이동 속에서 불가피하게 이차적 시니피에들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대한 이코노테이션으 시니피에들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십중 팔구는 설명 즉 어느정도느 과장된 말투가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대체로 텍스트는 이미 사진 속에 포함된 코노테이션의 전체를 부연하게 만들 따름이다. 그렇지만 텍스트는 종종 완전히 새롭고 외시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미지속에 말하자면 소급하여 투영된, 시니피에를 생산한다. 엘리자베스여왕과 필립공이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는 사진의 커다란 타이틀은 <그들은 하마터면 죽을 Q뻔했다, 그들의 표정이 그것을 증명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히는 순간에 이 두사람은 그들이 방금 모면했던 비행기 사고에 대해 아직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한 이따금씩 , 파롤은 보상적인 코노테이션을 생산해 내도록 이미지에 항변하는 데까지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거브너 의 한 분석 [연애 기사의 사회적 해부:커버-걸으 lrhqor]은 몇몇 연애잡지 속에서 표지으 커다란 타이틀의 언술적 메시지(어enq고 마음아프게 하는 내용)가 항상 밝디 밝은 모습으 lvy지 모델의이미지를 동반한다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두 메시지는 여기에서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코노테이션은 조절 기능을 갖고 있으며 투영-동일화의 비합리적 작용을 예방한다. 사진의 무의미 우리는 코노테이션으 코드가 십중 팔구 <자연적>이지도 <인위적>이지도 않고 역사적 혹으 더 좋다면문화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기호들은 거기서 어떤 사회의 용법에 의하여 어떠한 의미들을 부여받은 몸짓 태도 표현색깔 혹은 효과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관계 즉 엄밀하게 말하자면 의미작용은 동기없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완전히 역사적으로 남는다. 따라서 현대적 인간을 사진의 독법 속에 감정과 성격적인 혹은 <영원한> 즉 하부 -혹은 通 -역사적 가치를 투영한다고 의미작용을 명확하게 한다면 그것은 한사회와 하나의 정의된 역사에 의해 항상 돤성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의미작용은 요컨대 문화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사이의 모순을 해결해 주는 변증법적 움직임이다. 코노테이션의 그 코드 덕분에 사진의 독해는 따라서 항상 역사적이다. 독법은 오직 우리가 거기서 기호들을 배운다로 한다면, 진전하고 알기쉬운 언어가 문제되는것과 마찬가지로 독자의 <지식>에 의존한다. 결국 사진의 언어체는 어떤 표의의언어체를 환기시키기 마련이다. 표의가 기호로서 체험되는것과 달리 그속에서 유사한 단위체와 인상적 단위레는 융합되고 사진적 <복사>가 현실의 순순하고 단순한 디노테이션으로 인정받을EO 코노테이션의 코드를 되찾는다는 것은 EK라서 사진의 모든 <역사적> 요소들을 독자의 어떤지식에서 혹은 그의 문화적 상황에서 그 불연속 자체를 끄집어내는 사진적 표면의 모든 부분들을 고립시키고 검토하고 구조화하는것일 게다. 그런데 이같은 작업속에서 아마도 보다 더 멀리 가야만 할 것이다. 사진에는 중립적인 부분이 있을 수가 없다. 혹은 적어도 사진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전적으로예외적인 경우일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독법의 메카니즘(용어의 의밈론적 이 아니라 물리학적 의미에서) . 혹은 그럴지도 모른다면 사진의 지각의 메카니즘을 완전하게 밝혀내여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점에 관해 우리는 대단한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사진을 어떻게 읽는가? 우리는 무엇을 인지하는 것일까? 부르너와 피아제의 가설에 따르면 만일 즉각적 범주화 없이는 지각이 없다고 한다면 사진은 그것이 인지되는 순간 자체 속에서 언어화 될 것이다. (혹은 만일 언어화 작용이 뒤늦어진다고 할때, 코앙-세아의 가설에 EK르자면 지각의 혼란이나 의도, 주체의 불안이나 외상성 질활등이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 속에서 언어인 내부의 메타 언어체에 의해 즉각적을 포착된 이미지는 결국 현실에서 어떤 외시된 상태도 전혀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지는 사회적으로 적어도 언어의범주 자체인 첫 번째 코노테이션에 가라앉아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언어는 사물들에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을 언어는 현실을 절단함 으로써만 공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진의 코노테이션은 따라서 대체적으로 언어체의 코노테이션의 거대한 국면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가설적이지만 있을 수 있는 지각의 코노테이션 이외에 이번에느 보다 특수한 코노테이션의 양식을 만난다. 우선 그 시니피앙이 유사물의 어떤 부분 속에서 선택되고 탐지된 인식의 코노테이션이 있다. 도시의 어떤광경 앞에서 나는 내가 북아프리카의 어느나라 속에 있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왼쪽에는 아랍문자로 된 간판이 보이고 중앙에는 소매없는 아프리카식 옷을 입고 있는 남작 보이기 때문이다. 독법은 여기에서 내 문화 세계에 대한 내 인식에 긴밀하게 의존되어 있다. 그리고 뛰어난 보도사진 (그런데 보도사진은 항상 뛰어난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선택된 것들이 기 때문이다)은 상정된 지식을 십중팔구 용이하게 사용함으로써 이 장르의 가능한 한 가장 커다란 양의 정보들을 독서에 만족을 주는 방법으로 포함하는 시험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파괴된 아가디르를 사진으로 찍는다면 비록 아랍풍이 내난 그자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지라도 앏풍의 몇몇 기호들을 배열하는 편이 더 나을 듯 싶다 왜냐하면 지식에서 비롯된 코노테이션은 항상 안심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호들을 좋아 하고 그것들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지각의 코노테이션 인식의코노테이션 그리고 이미지의 독법에 이유와 가치를 도입하는 (용어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혹은 윤리적 코노테이션의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강력한 코노테이션이며 매우 공들여 만들어진 시니피앙이다 그것은 우리가 트릭에 대하여 보았던 등자인물들의 만남, 태도으 전개, 대상물들의 배치와 같은 보통 구문론적 질서의 시니피앙을 요구한다. 이란의 왕자가 방금태어났다. 우리는 사진에서 와의(아기를 둘러싸고 있는 일군의 하인들에 의해 절받고 있는 요람 富 (여러명의 보모들) 위생(하얀 블라우스, 안전유리처럼 투명한 합성수지로 된 요람 뚜껑)등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와으이 인간적 조건(아기가 운다)과 같은 우리가 오늘날 있는 그대로 소비하고 있는 즉 왕자 신화의 모든 모순적 요소들 또한 있다. 여기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비정치적 가치들이며 어휘는 거기에서 풍부하고 명료한 것이다. 반대로 정치적 선택이 말하자면 자기기만이라고 항상 말할수 있는 한에서 ,정치적 코노테이션이 텍스트에 가장 자주 의뢰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하지만 이것은 가설일 뿐이다) 그 같은 사진에 대해서 나는 우파로도 좌파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주제에 관해서는 1955년도 현대Les Temps modernes에 실렸던 프랑스 여론 연구소 IFOP의 조사를 볼 것) 디노테이션 혹은 그 외양으 정치적 선택을 변형시키는데 무력한 힘이다. 그 어떠한 사진도 정치적 의식이 아마도 로고스의 밖에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어떠한 사람을 설득하거나 반박할 수는 없다.(그러나 그것을 확인 할 수는 있다) 정치는 모든 언어체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몇몇 주목사항들은 일종의 사진의 코노테이션들이 차이를 보여주는 도표를 개략적 그리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코노테이션이 매우 멀리간다는 것으 f본다. 그것은 순수한 디노테이션 언어체의 이 편에는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현행 언어체가 무의미 중립적 객관적인 것을 부르는 것의 층의에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본래 외상적인 이미지들의 층위에 존재할 것이다.정신적 외상 그것은 명확히 언어체를 연기시키는 것 의미작용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확실히 보통대로라면 외상적인 상황들은 사진적 의미작용의 진행과정속에서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거리를 두고 스화시키고 진정시키는 수사학적 코드를 통해서 그 상황들이 표시되는 것은 바로 그때이다. 본래 외상적인 사건들은 드물다. 왜냐하면 사진에서 외상은 장면이 실제로 일어났던 확실성에 완전히 종속하기 때문이다. 사진작가가 거기에 있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디노테이션의 신화적 정의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기되면 (사실인즉 이미 코노테이션인)외상적 사진 (현장에서 찍혀진 화재 난파 내난 변사)은 아무런 할말이 없는 사진이다. 쇼킹한 사진은 구조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그 어떤 가치 그어떤 지식 최소한 그 어떤 말의 범주화도 의미작용의 제도적 과정을 책임질 수 없다. 우리는 일종의 법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보다 외상이 직접적일 수록 코노테이션은 더욱 어렵다. 혹은 더 나악사 사진의 신화적 효과는 그것의 외상적 효과에 반비례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잘 구조화된 모든 의미작용과 마찬가지로 사진의 코노테이션은 제도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전체사회의 규모에 대해 그기능은 인간을 통합하는 것 즉 인간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모든 코드는 자의적인 동시에 이성적이다. 따라서코드에의 전적인 의지는 이 인간이 이성과 자유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스스로 체험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드 분석은 아마도 그 시니피에 분석보다 쉽고 보다 확실하며 사회를 역사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시니피에들은 진정한 역사보다 더 인류학적 토대에 속해 있는 통-역사로 종종 나타날 수 있기 떄문이다. 헤겔은 그 주제에 관한 고대 그리이스인의 <감정과 믿음>의 전체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다 그들이 자연을 의미하게 만드는 방법을 스케치 함으로써 자연을 더 잘 정의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시대의 이데올로기적 내용들을 직접적으로 검토하는 것 이상으로 아마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도사진 만큼 광범위한 커뮤니케이션의 코노테이션의 코드를 특수한 구조속에서 재구성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우리사회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정교한 형식을 되찾기를 희망할 수 있고 그 노력의 범위 우회 심오한 기능을 파악할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망을 매력적이다.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사진에 관해서는 역설적 형태로 움직이지 않는 대상을 언어체로 바꾸며 <기계적인>예술의 비문화성을 가장 사회적인 제도로 변화시킨다는 역설의 형태로 전개되기 때문에 더 한층 매력적인 것이다. |
출처 : 굳모닝
글쓴이 : wyskek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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