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삶과 죽음/이미지의 사유, 사유의 이미지

[스크랩] 시뮬라크르 미학

ddolappa 2008. 12. 5. 23:41

 

 

 

시뮬라크르의 미학

- 진중권 님의 글입니다.  2003 11 27 -

 

노베르트 볼츠

 현대인의 지각이 두 가지 상반되는 경향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무대상성을 향해 모든 가시적 형상을 지워버리려는 경향과

가시적인 대상을 복제하여 언제, 어디서나 제 곁에 두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회화가 인간의 지각을 표현한다면,

현대회화에서 전자를 대변하는 것은

모노크롬이나 컬러필드 페인팅과 같은 색면추상,

후자를 대표하는 것은 레디 메이드, 팝 아트, 하이퍼리얼리즘 등

 대량생산된 사물이나 대량복제되는 영상을 사용한 미디어 아트일 것이다. 이론적 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전자가 '숭고의 미학'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시뮬라크르의 미학'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시뮬라크르는 '복제의 복제'라는 뜻이다.

그것은 '원본 없는 복제', '원본과의 일치가 중요하지 않은 복제',

나아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을 제일 먼저 사용한 것은 플라톤으로,

그는 이 개념을 정치인들과 연인들 중에서

진짜(복제)와 가짜(복제의 복제)를 가리는 맥락에서 도입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양자를 구별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음을 깨닫고,

"시뮬라크르의 심연"을 들여다 보는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된다.

들뢰즈는 이 인식을 새로운 맥락에서 철학과 미학에 도입한다.

 

벤야민은 들뢰즈보다 앞서서

사진과 영화의 '시뮬라크르'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다.

원본 없는 복제인 사진과 영화는 그저 원본을 반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본을 능가하는 새로운 힘을 가지고 원본의 창작에 거꾸로 영향을 기치고, 나아가 원작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 사진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원작을 복사하는 데에 제 역할을 한정했지만, 곧이어 사진은 원작의 창작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가령 드가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사진을 활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진의 등장은 회화에 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때부터 이 복제영상은 전통적인 회화를, 그것의 고유한 임무,

즉 가시적 대상을 재현할 의무에서 해방시키게 된다.

아울러 사진은 전통적인 회화로 하여금

자신을 모방하는 전도 현상을 낳게 된다.

가령 드가는 무희들을 묘사할 때 전형적인 카메라 워크를 연상시키는

 특이한 앵글을 사용한 바 있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는

에띠엔느 쥘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래피를 활용한 것이다.

 

매체에 시간이 선사되었다.
찰나의 조각들이 동시에 전시되어지면서

 화면은 우리 눈에 과거, 현재, 미래로 편집되어 보여진다.

정지된 화면에 나부가 계단을 끝없이 내려온다.

 마치 잔상을 남기듯, 찰나속의 나부는 멈춰진 동시에 흐른다.
필름은 정지했고 그림은 움직인다.

시간의 유연성, 사고의 재구성, 두 작품이 서로를 포옹하는 그늘이다.

 

이탈리아 미래파들도 속도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진의 연속촬영의 효과를 활용한 바 있다.

앤디 워홀과 같은 팝 아티스트들은

가령 '25개의 색으로 이루어진 마릴린 먼로'에서 볼 수 있듯이

 사진을 복제하여 계열적 작품을 만들어낸다.

하이퍼리얼리즘 계열의 예술가들은

클로즈업된 사진을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언젠가 아트제가 사진으로 했던 효과를 사진을 통해 추구하려 한다.

언뜻 보기에 사진처럼 보이는 이들의 극사실주의 작품에서,

 원본과 가상의 관계는 뒤집힌다.

 과거에는 사진이 원본을 복제했다면,

이제는 원작 페인팅이 사진을 닮으려 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시뮬라크르적 지각은

대량생산으로 이루어진 현대의 사물세계를 반영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더 이상 유일물의 생산이 아니라,

하나의 코드에 따른 대량생산의 체계다.

여기서 생산은 곧 코드에 따른 재생산, 즉 복제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뒤샹이 유일하게 원작의 생산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던

 예술창작의 영역에 대량생산된 변기를 도입했을 때,

그는 사진이 아닌 실물로써 시뮬라크르의 미학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작품에 사진을 사용한다고 모두 시뮬라크르의 미학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프랜시스 베이컨 과 같은 화가는

사진을 파괴하기 위해 사진을 사용했다.

그의 작품의 바탕에는 신문, 잡지, 사진첩에서 발췌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깔려 있지만, 그는 사진이 참칭하는 그 사실의

 기록적 성격을 파괴하기 위해 사진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사진으로 포착할 수 없는 더 근원적인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사진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모네는 루앵 성당의 모습을 여러 장의 계열적 작품으로 표현함으로써

회화의 영역에서 변화된 현대적 지각의 특성을 드러낸 바 있다.

이렇게 예술에 도입된 시뮬라크르적 지각에는

두 가지 상반된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하나는 르네 마그리트 의 연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계를 늘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주는 창조적 가능성 (니체, 푸코, 들뢰즈), 다른 하나는 앤디 워홀 의 작품이 증언하는 것처럼

 동일자의 무한증식과 같은 현대사회의 소모적 가능성(보드리야르)이다.

 

한편,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

시뮬라크르적 영상의 세계를 '기술적 형상'이라 부른 바 있다.

자연의 적대성을 극복하기 위해 주술적 수단으로 그림을 그리던 시대,

주술적/신화적 세계관을 인간이 낯설게 여김으로써

이를 선형적인 알파벳으로 세계를 기술하려던 시대, 이 두 시대에 이어

 현대는 더 이상 세계의 기술로 여겨질 수 없는 알파벳의 위기를 맞아

이를 다시 영상화하려는 기술적 형상의 시대라는 것이다.

 시뮬라크적 지각은 이제 회화만이 아니라

글쓰기에까지도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시뮬라크르

 

'시뮬라크르.' 이 개념은 '복제의 복제', 즉 '원본이 없는, 혹은

원본과의 일치가 중요하지 않은 복제'를 가리킨다.

원래 복제의 생명은 원본과의 일치 여부에 달려 있다.

원본과 일치하는 한에서 사본은 진리 혹은 진정한 것이고,

원본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거짓 혹은 허위가 될 것이다.

가령 관공서에 사본을 제출할 때 사본이 원본과 틀릴 경우 법적 처벌을 받을 수가 있다. 이렇게 '복제'라는 말 자체가 원본의 존재를 함축하고,

또한 그것과의 최대한의 일치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제까지 철학은 인간의 사유라는 복제를

현실이라는 원본에 가능한 한 가깝게 가져가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더 이상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남은 것은 오로지 원본은 아무래도 좋은 복제들뿐이라면?

 

 시물라크르, 존재론적 함의

 

시뮬라크르는 존재론적 함의를 갖는다.

그것은 '모던'이라는 시대의 징후다.

 그 최초의 이론적 표현을 우리는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기술적 대량생산의 체제, 기계로 생산된 산물들은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거기에는 '진품'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첼리니'라는 이름을 상표로 사용해도,

그것은 거장 첼리니가 만든 명품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이다.

이런 사회에서도 과거처럼 장인의 손으로 유일물을 제작하는 분야가 있다. 그곳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작품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의 사회에서 제작되는 유일한 진품이었다. 그런데 영화예술은 어떠한가?

 여기 저기에서 상영되는 필름들 중 어느 것이 진품일까?

거기에는 진품이 없다. 시물라크르뿐이다.

말하자면 기술복제는 유일한 진품이었던 작품마저

시뮬라크르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벤야민 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거기에서 혁명적 의미를 보았고,

아도르노 는 그의 지나친 낙관을 비판했다.


미디어 이론적 함의

 

시물라크르.

미디어 이론에서 그것은 복제기술이 초래한,

 '현실'의 존재론적 위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 변화의 본질은 현실감의 상실에 있다.

사실 복제기술은 근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령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그것으로 대량 복제된 소설은 일종의 시뮬라크르다.

벤야민이 <기술복제의 예술작품>을 쓴 것은

복제기술이 그 당시에 처음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대에 비로소 복제기술이 예술을 베끼는 수준에서 벗어나

예술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그는 '아우라의 파괴'로 특징지었다.

 

한편 귄터 안더스 시뮬라크르는 텔레비전이었다.

가령 TV에서 영상 편집된 뉴스. 그것은 현실인가? 허구인가?

잘라 대답하기 힘들다.

 TV와 함께 이렇게 현실과 허구의 존재론적 구별은 약화된다.

 심지어 허구가 현실을 닮는 게 아니라

현실이 허구를 따라가는 경향까지 발생한다.

오늘날 TV 쇼프로의 인터뷰는 대부분 매체의 특성에 맞게 연출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현실'인가?


시물라크르, 정치경제학적 함의

 

시물라크르.

그것은 독특한 정치경제학을 구성하는 원리가 되기도 한다.

가령 과거에는 지폐를 들고 은행에 가면 금으로 바꿔주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지폐는 금의 등가였다.

그런데 불환화폐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이제 화폐를 들고 은행에 가도 금으로 바꿔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갓 기호에 불과한 화폐가 실제로는 금과 같은 가치를 갖고

현실에서 통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자본주의 화폐경제가 일종의 거대한 시물라크르인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우리 사회에서 자동차 혹은 핸드폰은

그 사용가치가 다 하기 전에 버려진다고 한다.

10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실은 2-3년만 사용되고

 나머지 7년의 사용가치는 그냥 버려지는 것이다.

오늘날 상품은 더 이상 그 사용가치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따라붙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가치 때문에 소비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용가치를 소비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따라 붙는 기호를 소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소비사회는 거대한 시뮬라크르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시물라크르, 그리고 예술

 

시뮬라크르는 예술의 원리가 되기도 한다.

과거의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었다.

복제해야 할 원본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상파 회화로부터 서서히 이 원리가 깨지기 시작한다.

가령 모네가 성당의 모습을 각각 아침, 점심, 저녁에 걸쳐 그렸을 때,

그 각각의 그림은 자기가 성당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묘사라 주장하지 않는다. 성당이라는 현실의 대상은 세 장의 시뮬라크르로 분산된다.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흐늘거리는 그림들 속에서

현실은 중량감을 잃고 사라진다.

 

현대 회화는 이 시물라크르의 경향을 급진화한다.

가령 마그리트의 '파이프' 연작(푸코), 아다미의 연작 회화(데리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연작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들뢰즈)를 생각해 보라. 원본과 일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뮬라크르들의 놀이다.

마그리트를 다룬 푸코의 책은 "캠벨, 캠벨, 캠벨..."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시물라크르,

즉 대량생산된 상품들을 곧바로 작품 속에 끌어들인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작품세계를 암시한다.


시물라크르, 인식론적 함의

 

시물라크르. 그것의 인식론적 함의는 무엇인가?

과거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사유'가 "자연의 거울"(리차드 로티)이라 믿었다. 자연은 원본, 사유는 그것의 충실한 복제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인간의 눈으로 원본을 보는 것의 난점은

 이미 근대철학 내부에서 제기되었다.

즉 인간의 '사유'라는 그림과 '자연'이라는 원본의 일치여부를 확인하려면

인간이 자기 의식의 밖, 자기 사유의 바깥으로 나가

 신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 누가 신을 참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오늘날의 철학자들은

 '사유'로써 원본을 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했다.

이로써 원본은 사라진다.

그럼 남는 것은? 인간의 사유,

그것을 적은 텍스트는 더 이상 원본의 복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한갓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사유의 바깥, 언어의 바깥, 텍스트의 바깥을 거울처럼 비치기를 포기하면,

남는 것은 현실을 지시하지 않는 기호들의 자유로운 유희뿐이다.

굳이 현실의 그림이기를 강변하지 않는 해석들의 놀이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해석들을 만들어내는 미적 창조력에 대한 찬미뿐이다.

오늘날 철학이 문학에 가까워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암호해독, 그리고 책읽기

 

이 '시물라크르'는 자본주의적 소비 사회를 읽는 코드가 되기도 한다

- 보드리야르 -

 

그것은 그 안에서 작동하는 미디어의 세계를 읽는 코드가 되기도 한다.

- 벤야민, 안더스 -

 

아방가르드 예술의 세계를 이해하는 코드가 되기도 한다.

- 푸코, 데리다, 들뢰즈 -

 

나아가 오늘날의 정신세계를 문학적 문화로 읽는 코드가 되기도 한다

- 로티 -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시물라크르는 현대문화의 어떤 주요한 경향,

혹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어떤 세계감정을 해독하는 열쇠가 된다. 이렇게 책읽기에도 자기만의 전략이 필요하다.

그 전략은 열쇠가 되는 낱말을 찾는 것이다.

전략이 없으면, 그리하여 이 열쇠를 찾지 못하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놓고 온갖 신비스런 해석을 내놓았던

샹폴리옹 이전의 사람들처럼 텍스트를 놓고 뜬구름을 잡게 된다.

텍스트를 읽는 것.

 그것은 단지 텍스트의 글자를 읽고

죽은 요약문을 만들어내는 수동적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암호를 풀어 텍스트의 힘을 해방시키는 적극적 활동이다.

 '황금벌레'를 읽고 암호를 만들며 놀던 아이는

자라서도 똑같은 짓을 하면서 논다. 

 

시뮬라크르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계는 원상, 복사물, 시뮬라크르로 되어 있다.

즉 이상의 세계인 이데아, 그것의 불완전한 모방인 현실,

그것의 불완전한 모방인 가상의 3원구조.

플라톤의 <정치가>를 보자.

거기에는 의사, 상인, 농부 등 여러 신분의 사람이 나와서

저마다 자기가 "인민의 목동"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인민의 목동", 즉 정치가의 이상이란 신화시대에나 속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자기가 "인민의 목동"이라 주장하는 지원자들뿐.

플라톤의 문제는 이 중 가짜와 진짜,

즉 이상적 정치가의 속성을 분유한 복제물과

그렇지 못한 시뮬라크르를 구별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에게 "인민의 목동", 즉 이상적 원상의 속성을 분유한 복제물은

 당연히 스승 소크라테스, 그리고 그걸 흉내낸 가짜는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리하여 복제와 시뮬라크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의 구별.

그런데 이 대립에 대해 들뢰즈는 이렇게 코멘트한다.

 

"시뮬라크르는 그릇된 복사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복사물의 개념 그리고 모델의 개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


시뮬라크르의 세계

 

안티 조선 <우리모두>(urimodu.com)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다.

플라톤의 3분법을 이 문제에 적용시켜 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언론의 이상,

 이 이상을 불완전하게 모방한 복제물로서의 현실의 언론,

그리고 이 복제물을 모방하는 시뮬라크르로서의 인터넷 언론의 세 가지.

 

그런데 우리는 플라톤과 달라서

 저 하늘 어딘가에 이상적 언론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현실의 언론과 인터넷 대안언론, 둘 뿐이다.

이중 인터넷 대안언론은 가짜 언론, 즉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가짜'라는 낱말의 부정적 뉘앙스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즉 "시뮬라크르는 한갓 그릇된 복사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복사물의 개념 그리고 모델의 개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

 

안티조선 <우리모두>는 또 하나의 언론이 되고 싶지 않다.

그저 언론을 흉내내고 풍자하고 비웃는 시뮬라크르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거기서 활약하는 논객들(에버맨, 송명수, 김영재)의 글은

어떤 면에선 복제물인 현실의 언론보다 '언론'의 이상에 훨씬 더 가깝다.

현실의 언론은 독자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헛소리를 늘어놓고

 이데올로기적 이유에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특히 조선일보의 사설은 시정잡배가 술 취한 김에 올려놓은 글처럼

저열하다. 그런데도 그 너절함이 버젓이 '정론'으로 인정을 받는다.

 반면 <우리모두> 논객들의 글은 '정론'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외려 권력화한 현실의 언론보다

훨씬 더 균형 잡히고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정론의 이상에 가까운 것은 과연 어느 쪽인가?

 

시뮬라크르는 이렇게

"복사물의 개념 그리고 모델의 개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모두>는 그 존재로써 이 시뮬라크르의 전술을 지향한다.

말하자면 굳이 촌스럽게 자신을 정론이라 주장하지 않고,

그저 '현실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며 가상이 얼마나 비가상적인지'

보여줌으로써 현실(=언론매체)과 가상(=사이버 공간) 사이의

익숙한 구분을 흐리고, 그 위계질서를 뒤흔들어 놓으려 할뿐이다.

하이퍼 텍스트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이를 현실의 언론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립시킴으로써,

후자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데올로기의 세계인지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모두>의 전술이다.

그리고 그 전술은 곧 <우리모두>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詩 經


-시 305편 혹은 311편 (6편은 篇名만 있는 것 6편 합쳐 311편)

그러나 통상 詩三百이라 함. 詩三百 一言而幣之曰 思無邪 (논어 爲政편)

-風, 雅, 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風  雅  頌

1. 風 풍  -  민요

 

2. 雅 아  -  왕조에서 숭상하던 正樂, 雅樂 (사대부들의 작품)

 / 궁중에서 연주하던 것.

     小雅  -  宴饗 (연향)의 음악 

     大雅  -  會朝 의 음악 (축복과 훈계의 가사) 

 

3. 頌 송  -  容의 뜻이다.

용은 곧 形容 또는 모습의 뜻을 지녀 노래와 춤을 겸한다는 뜻이다.

      종묘에서 제사 지낼 때나 신을 頌揚하거나 조상들의 은덕을 찬송하는 것.

 *雅와 頌은 귀족의 노래이다.


-編者

  옛날에는 采詩官이 있어 시를 채집, 임금에게 올림.

그것을 보고 민심의 동향을 알고 정치에 참고.

채집한 시가 3000편이 있었다고 한다.

공자가 이 중에서 잘된 것 300여 편을  모아 지금의 시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공자가 10분의 9를 버렸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설도 있다.

본래 300편 정도였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경의 형태로 編次를 정하였다고 보는 것은 옳다.

 

  송나라 이후로는 古文인 毛詩만이 세상에 행세하게 되었고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시경은 毛詩인 것이다.  

 

  *今文 - 漢代에 통용되던 隸書로 씌어진 것.

태반이 입으로 전해지던 것을 漢初에 기록한  것. (진시황의 焚書로)

  *古文 - 진나라 이전에 유행한 古文字로 씌어진 것.

  *毛詩 -조나라 사람이라고 전해지는 모공이 시경을 편찬한 것.

우리가 읽고 있는 시경은  毛詩본인 것.

 (그런데 모공이 시경의 시를 해석한 걸 보면 너무 빗나가 있다.

 시를 시 그 자에로 해석하지 않고 대부분 정치와 결부시켜 해석했기 때문.)

 

 -시경 읽기

   시란 읽는 이의 교양과 마음가짐에 따라

같은 시라도 읽는 이에게 각기 다른 감흥을 주 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음미하면 됨.

한문 실력이 있는 이는 원문을 보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 될 것.

   나는 시경에서 국풍만 읽어도 된다고 본다. 


2. 國風


-국

  제후들의 나라

 -풍

  風謠 또는 가요

 -국풍에는 周南으로부터 빈(豳)에 이르는 15나라의 나라의 민요들이 있다. 풍을 시경의 맨 앞 에 내어놓은 것은 이것이 당시의 백성들의 마음을 궁정이나 연향에서 쓰던 雅나 頌보다  더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 즉 국풍이라 일컬어지는 지방 민요는 중국의 고대 풍습이나 소박한 생활 감정이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어 친근감을 주기 때문이다. 시경의 반을 차지 160편이 된다. 

  

가. 周南

  *주남 -북쪽은 黃河로부터 남쪽은 汝水와 漢水에 이르는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남의 서쪽 땅.

   어떤 책에서는 섬서성이라고도 함.


 1. 關雎관저 (물수리)

    

   관관저구는 재하지주로다 

   關關雎鳩는 在河之洲로다  구욱구욱 물수리는 강가 숲 속에서 우는데

   요조숙녀는 군자호구로다 

   窈窕淑女는 君子好로다  대장부의 좋은 배필 아리따운 아가씨는 어디 있는고

                                                   (*어떤 책에서는逑를 述 자로 써놓았다)  

   참치행채를 좌우류지로다 

   參荇采를 左右流之로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찾노라니 *差 -차/ 치

   요조숙녀를 오매구지로다

   窈窕淑女를 寤寐求之로다  자나 깨나 그리는 아리따운 아가씨 생각

   구지부득하니 오매사복이라

   求之不得하니 寤寐思服이라 그리어도 얻지 못해 자나 깨나 생각노니

   유재유재라 전전반측하도다

   悠哉悠哉라 輾轉反側하도다 그리움은 가이 없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참치행채를 좌우채지로다

   參荇采를 左右采之로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따노라니

   요조숙녀를 금슬우지로다

   窈窕淑女를 琴瑟友之로다  금슬 좋게 벗하고픈 아리따운 아가씨 생각

   참치행채를 좌우모지로다

   參荇采를 左右芼之로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고르노라니

   요조숙녀를 종고락지로다

   窈窕淑女를 鐘鼓樂之로다  풍악 울리며 즐기고픈 아리따운 아가씨 생각

   

   *물수리 -징경이(어떤 책에는 징경이라 되어 있다. 물수리와 같은 말. *여러 책을 보다 보면 헛갈릴 때도 있지만 좋을 때도 있다.)

    요조 -교양이 있고 아리따운 모습.

    숙녀 - 곱고 훌륭한 여자.

    군자 -시경에서는 대체로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부인들은 자기의 남편을 군자라 부르기도 하였다. 덕망이 있는 사람의 뜻으로는 춘추시대 이후에 쓰이게 되었다.)

    역자는 관저의 작자는 평민이 아니라 왕족이었던 것 같다, 라고 했는데 왕족이라고 하니 맛이 싹 달라진다. 차라리 평민이라고 하는 게 이 시에는 더 잘 어울린다. 왕족이라고 한 이유는 이렇다.

    옛날 음악에서 종과 북을 모두 쓴 것은 천자와 체후들이고 사대부들은 북만을 썼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시에 鐘鼓가 나오니 왕족이라고 한 모양.

    *毛詩序에서는 이 시를 后妃의 덕을 노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 자체만을 볼 때는 연애시, 사랑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신혼을 축하하는 시’ ‘결혼 축하의 노래’로 풀이되고 있다 하는데, 글쎄…… 난 그렇게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이 시의 전체 내용은 어여쁜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노래. 물수리하고는 거리가 먼 내용(구절)이나 앞의 구절은 뒷구절을 강조하기 위한 수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것이 興이다.

    *중국시에는 6義 가 있는데, 6의란 풍, 아, 송, 흥, 비, 부를 말한다.

     風, 雅, 頌 -시의 내용과 성질을 말하고

     興, 比, 賦 -시의 체재와 서술방식을 말한다.

     興  -작자의 주관적인 연상작용에서 생기는 것으로, 주희는 詩集傳에서 흥이란 것은 먼저 다른 사물을 말하여 읊으려는 말을 끌어 일으키는 것, 이라 하였다. 즉 자연의 사물을 빌어 우선 노래하고 그것을 주제가 되는 사항에 결부시키면서 시 내용을 전개시켜 나가는 방법을 일컫는 것이다. 시경 국풍의 작품들은 대체로 興에 의거하고 있다. 이 興은 작자의 주관적인 연상작용은 있을지라도 반드시 객관적으로 어떤 비유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예는 현대시에도 나타난다.


     (예)

     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 바닥은

     파아란 풀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김소월 ‘풀따기’ 일부)


     *그런데 정음사판(1973년) 소월시집에는 이 시를 ‘고향의 章’에다 넣어두었다. 내가 볼 때는 ‘사랑의 章 ’에 넣어둬야 할 시이다. 누가 봐도 님을 애타게 그리는 시가 아닌가.

      

     比  -비유

     賦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 또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    

     起承轉結

       기 -일으킴 / 시 전체의 시작이며 표현의 실마리.

       승 -받음 / 기에서 서술 된 것을 받아 더욱 내용을 전개시켜 가는 것.

       전 -옮김 / 기와 승에서 전개된 것을 일전시켜 다른 내용으로 표현을 옮겨 가는 것.

       결 -끝맺음

출처 :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글쓴이 : 뿌다오웡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