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세계/한국 문학

[스크랩] 아수라의 세상을 건너는 노래의 개별성 / 김남호

ddolappa 2008. 12. 5. 23:29

 

 



아수라의 세상을 건너는 노래의 개별성

―김훈의 『칼의 노래』와『현의 노래』를 중심으로



김 남 호



[1]


대저 ‘노래’란 무엇인가? 현상을 꿰뚫은 뒤 드러나는 진실의 다른 이름인가, 교감으로서의 울림의 다른 이름인가, 아니면 그윽한 통찰의 다른 이름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한낱 유한한 존재들이 유한함을 넘어서려 하는 몸부림의 다른 이름인가, 어쩌면 이들 전부를 통칭하는 다른 이름인가. ‘칼의 노래’가 있고 ‘현의 노래’가 있다. 그러나 ‘칼의 노래’는 ‘노래’라기보다는 고독한 영혼의 ‘울음’에 다름 아니었고 ‘현의 노래’는 현의 울림만큼이나 찰라적이고 감각적인 권력의 무상함에 붙여진 길고 애달픈 ‘조사(弔辭)’에 다름 아니었다.

‘현의 노래’를 읽는 내내 ‘칼의 노래’와 장면 장면이 겹쳐지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물론 김훈 특유의 문체가 빚어내는 유사한 아우라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주인공들의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무 때문에 더욱 그런 착종(錯綜)을 겪었던 것 같다. 그랬다. 허무였다. 어느 것 하나 뭉쳐지지 못하고, 철저하게 개체로 존재하는 실존의 우울한 카니발이었다. 집단을 떠나 개체로 환원되는 순간 인간은 누구나 처음의 상태로 제가끔 같다. 김훈의 사유는 철저한 개별적 상황에서 인간을 응시한 결과이며, 그의 소설은 그 개별자들의 내면의 풍경이자 그 풍경의 감각적 기록이다. 즉, 가장 개별적일 때 가장 강력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을 그는 두 편의 소설을 통해 여실히 증명하고 보여준다. 먼저 그의 에세이를 통해서 개별적 존재에게 보내는 그의 긍정과 집착을 보자.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 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 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에세이집『밥벌이의 지겨움』220쪽 )


시위대와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전경과 그들의 날선 대치를 취재하는 기자, 이들이 입각하고 있는 지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그 판이함은 집단이 놓여 있는 상황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 집단이 허물어지는 지점은 그들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돌아오는 지점이다. 가장 숭고한 개인의 영역인 밥 먹는 지점에서 그들은 더 이상 시위대도 전경도 기자도 아니다. 개체 유지를 위해 고픈 배를 채워야 하는 순간에 그들은 가장 평화롭다. 먹고살기 위해 데모하고, 먹고살기 위해 진압하고, 역시 먹고살기 위해 취재하지만 정작 먹는 순간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제약하는 목적에서 벗어난 지점에 위치한다. 바로 개별적 존재의 아이러니와 거룩함이 빛나는 지점이다. 이러한 개별적 존재가 허무는 경계는 적의(敵意)를 누그러뜨려 전의(戰意)를 흐려놓는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 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칼을 버리고 저 병신년 이후의 곽재우처럼 안개 내린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개울물을 퍼먹는 신선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칼의 노래』254쪽)


상대를 먼저 죽여야 자기가 살 수 있는 적(왜병 포로)에게서 나(이순신)는 그들의 개별성을 보고 말았다. 개별성을 보는 순간 적은 적에서 나와 같은 인간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군인에게 적의 개별성을 인식하는 일은 적(敵)의 적의(敵意)보다 더 위험하다. 즉,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인 것이다. 이렇듯 김훈은 개별성으로 인간성 회복을 도모한다. 전체가 하나의 명령으로 꿰어져야 마땅한 전장(戰場)에서 개별성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며,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김훈의 이순신’이 바다에서 본 적들은 병졸 하나 하나가 개별적이었고, 그들과 벌이는 싸움이 개별적이었고, 그 개별적인 싸움들의 집합인 전쟁이라는 보통명사도 개별적이었고, 그 속에서 이유 없이 죽어가는 그들의 죽음도 개별적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개별적으로 존재했고, 철저하게 개별적으로 소멸되었다. 그(이순신)의 칼은 징징징 울 뿐 적을 베지 못했다. 그가 벤 것은 적이 아니라 권력에 연연하는 조정의 나약함이었으며, 세계의 중심이라는 오만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명나라 원군(援軍)의 가증스러움이었다. 김훈은 가장 개별적일 수 없는 전장에서, 그것도 하나로 뭉쳐서 떠다녀야 하는 물 위의 전장에서 이순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재구성하고, 전쟁의 이면을 재조명하고, 역사의 질감을 재의미화하여 펼쳐 보인다.


김훈의 전략은 치밀하고 잔인하며 가차없다. 개별성이 부각되는 순간이 얼마나 인간을 전율스럽게 하는지 『현의 노래』를 펼치면 곧바로 알 수 있다. 가야 왕의 주검과 함께 순장 당하는 백성들의 개별성이 지옥도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왕의 죽음에 동참해야 하는 쉰 명 남짓한 순장자들의 죽음은 국가라는 집단이 충(忠)이라는 이름으로 백성에게 요구한 ‘마땅한 도리’였다. 그러나 집단을 비켜나서 개별적으로 순장자들을 보는 순간 충(忠)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극한적 폭력의 명분이 되고 만다. 순장 팀을 구성하는 문과 무의 중신들, 농부, 어부, 목수, 대장장이, 무사, 선비, 늙은 부부, 아이 딸린 젊은 부부, 처녀, 과부 등이 그들의 삶만큼이나 그들의 죽음도 개별적이었다. 아무것도 공유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깊고도 견고한 단절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가의 허무주의는 관계의 단절을 통해 극명화되고 그들을 개별자로 보는 데서 일반화되며 세상을 등짐으로써 완성된다.



[2]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히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칼의 노래』서문)


수많은, 경이로운 악기들이 거기에 널려 있었다. 악기는 인간의 생명의 모습과 질감을 닮아 있었다. 모든 악기는 인간이 끌어안거나 두들기거나 입술 대기에 편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악기는 인간의 몸의 연장(延長)이었으며 꿈의 도구였다. 악기는 스스로 자족(自足)한 세계 안에서 꿈꾸는 듯했으나, 악기는 몸이 지닌 결핍의 보완물로서 불우해보였다. (…) 잠든 악기 앞에서, 그 악기가 통과해온 살육과 유혈의 시대를 생각하는 일은 참담했다. 악기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 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악기가 아름답고 무기가 추악한 것이 아니다. 무기가 강력하고 악기가 허약한 것도 아니며, 그 반대도 아닐 것이다. (…) 그러나 들리지 않는 적막을 어찌 말로 옮길 수 있겠는가. 내 글이 이루지 못한 모든 이야기는 저 잠든 악기 속에 있고, 악기는 여전히 잠들어 있다. (『현의 노래』서문)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겠다니, 이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인가. 그리고 잠든 악기 속에 파묻힌 채 “들리지 않는 적막”을 말로 옮기는 자의 깨어날 수 없는 절망이 곧 허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개별적 존재들의 가뭇없는 허무를 하염없이 건너가는 것이 바로 소리일 것이며 소리의 정제된 형식이 노래가 아닐까.


금(琴)은 줄의 소리이고 통은 그 울림이다./금의 소리는 줄의 것입니까?/북은 가죽의 소리이고 피리는 바람의 소리이다. 징은 쇠의 소리이고 목탁은 나무의 소리이다. 소리의 근본은 물(物)을 넘어서지 못한다./하오면, 물이 어찌 사람을 흔드는 것입니까?/울림이다. 울림에는 주객(主客)이 없다. 그래서 소리가 울릴 때, 물과 사람은 서로 넘나들며 함께 울린다. 개 소리, 꿩 소리, 닭 소리가 다 마찬가지이고 대장간 쇠망치 소리와 다듬이 소리며, 파도 소리, 빗소리, 바람 소리, 눈길에 소달구지 미끌어지는 소리는 소리와 어린 아이 울음소리와 군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다 이와 같다. (『현의 노래』21쪽)


그래서 소리란 개별적인 대상을 개별적인 주체가 응시하는, 혹은 개별적인 대상이 개별적인 주체를 응시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상호조응의 형식이며 공명(共鳴)의 내용이다. 물(物)이 사람을 흔드는 것은 ‘울림’ 때문이며, 소리는 그 울림의 몸이다. 그리고 소리는 그 소리를 울려내는 주체와 그 울림에 공명하는 객체와의 구분을 무화(無化)시키며 넘나든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다 이와 같다”고 작가는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리는 세상과 교호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를 획득하는 원리이다. 개별적인 소리의 가장 비극적인 예를 아라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


아라는 치마를 올리고 속곳을 내렸다. 엉덩이를 까고 주저앉아 가랑이를 벌렸다. 허벅지 안쪽에 풀잎이 스치자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아라는 배에 힘을 주어 아래를 열었다. 쏴 소리를 내면서 오줌줄기가 몸을 떠났다. (…) 오줌줄기가 몸을 떠나서 쏴 ― 소리가 크게 울렸다. 몸속에서 살이 울리는 소리가 가랑이 사이의 구멍으로 퍼져나오고 있었다. 오줌을 눌 때마다 그 소리는 낯설고 멀게 들렸고, 소리를 내고 있는 살구멍의 언저리가 떨렸다. (『현의 노래』53쪽)


가야 왕의 시녀로서 왕의 죽음과 함께 순장으로 자신의 생도 마감해야 할 아라는 자신의 오줌소리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그 소리에 촉발되어 살고 싶은 욕망으로 대궐 담을 넘어 탈주를 감행한다. 바람이 몸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말[語]이었다면, 물이 몸을 통해 나온 그 소리도 또한 ‘오스스 소름이 돋’고 떨리는 말[語]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몸만이 낼 수 있는, 낸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자신의 몸의 소리를 어찌 젊은 시녀는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개 소리, 닭 소리는 소리의 주체가 개나 닭임을 밝힌다면 같은 이유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어떤 처지인지를, 어떤 욕망의 주체인지를 자신의 소리는 명쾌하게 보여주고 깨닫게 한다. 그런 점에서 소리는 철저하게 개별적이면서 사회적이다. 그러나 이때의 사회적 의미는 개별적 의미의 확장된 외연에 불과하다. 철저하게 개별적이면서 사회적이기는 소리뿐만 아니라 냄새도 마찬가지다. 냄새처럼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형식이 있으랴. 우륵의 여인인 비화를 묘사하는 다음 대목을 보자.


비화의 날숨에는 자두 냄새가 났다.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에, 비화의 입속에서는 단감 냄새가 났고, 잠을 맞는 저녁에는 오이 냄새가 났다. 귀 밑 목덜미에서는 잎파랑 냄새가 났고 도톰한 살로 접히는 겨드랑이에서는 삭은 젖 냄새가 났다. 바람이 맑은 가을날, 들에서 돌아온 비화의 머리카락에서는 햇볕 냄새가 났고 비 오는 날에는 젖은 풀 냄새가 났다. 비화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비린내가 났는데, 그 냄새는 초승에는 멀어서 희미했고 상현에는 가까워지면서 맑았고 보름에는 뚜렷하게 진했고 그믐이 가까우면 다시 맑고 멀어졌다. (『현의 노래』63쪽)


냄새는 소리가 할 수 없는 기능을 수행하며 존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소리보다 더욱 내밀하고, 명확하게 존재를 드러낸다. 아침, 점심, 저녁은 물론 맑은 날, 흐린 날과 같은 기후와 초승, 보름, 그믐과 같은 우주의 흐름까지도 반영하며 세분하여 그 존재의 정체를 드러내는 ‘냄새의 노래’는 가히 독보적이다. 가장 감각적인 후각을 통해 가장 구체적으로 대상의 색깔과 질감을 인식할 수 있다.

몸(육신)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실체이자, 문화가 생성되는 최초의 지점이다. 그 실체이자 문화의 생성지점인 몸은 때로 시각이나 청각, 촉각보다 후각이 유효하며, 그 후각으로 드러나는 존재는 명징(明澄)하다. 아무리 몸을 숨겨도 살아 있는 것들의 어쩔 수 없는 부스럭거림이나 자신의 고유한 체취로 고양이에게 들키고 마는 쥐처럼 소리나 냄새는 실존의 안타까움이면서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이다. 소리나 냄새를 가진 것들이 복되고도 불우한 까닭은 그것들이 환기시키는 개별성 때문이다. 개별성으로 인하여 아름다우며, 개별성으로 인하여 불우하고, 개별성으로 인하여 허무해질 수밖에 없다.



[3]


개별적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허무는 비장함으로 이어진다. 우륵의 삶이 비장하고, 야로의 삶이 비장하고, 이사부의 삶이 비장하다. 그들의 비장함은 세상의 비의를 알아버린 자의 절망과 체념과 허무에서 비롯된다. 우륵은 소리의 개별성과 소멸될 수밖에 없는 소리의 덧없음을 알았고, 야로는 세상을 비켜갈 수 없는 쇠의 흐름을 알았고, 이사부는 쇠를 딛고 선 자의 무상함을 알았다. 우리는 『현의 노래』에서 우륵을 통해 맹목적인 예술가의 순결한 영혼을 읽기보다는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버린 자의 달관된 허무를 읽지 않았던가. 우륵의 다른 얼굴인 이순신을 통해 세상의 허무를 노래한 『칼의 노래』가 탄핵기간 중 노무현 대통령의 애독서로 알려지자 일부 네티즌들은 노대통령에게 독한 허무주의에 기초한 행동주의를 경계하라고 충고(?)한 것은 바로 개별적 존재가 만나는 허무주의의 위험성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한다.


『현의 노래』가 『칼의 노래』와 직설적으로 만나는 부분이자 은유적으로 헤어지는 부분은 이사부가 우륵을 심문하는 바로 다음 대목일 것이다.


(이사부) 너는 가야의 녹을 받았느냐? / (우륵) 많지는 않았소./가야의 악사는 무슨 일을 하느냐?/왕들이 죽으면, 무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금(琴)을 뜯으며, 소리를 베풀었소./왕의 장례에 소리를 베풀며 녹을 받던 자가 적국으로 귀부함이 온당하냐?/귀국의 도끼에 맞아 죽는 것 또한 온당치 못할 것이오./(…)/소리는 주인이 없는 것이냐?/소리는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고 울리는 동안만의 소리니 아마 그러할 것이오./너희 나라 대장장이 야로를 아느냐?/가야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소./그 늙은 대장장이가 말하기를, 병장기는 주인이 따로 없어서 쥐는 자마다 주인이라고 하였다. 소리는 병장기와 같은 것이냐?/소리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본래 있는 세상인 것이오. 병장기가 어떠한 것인지는 병부령께서 더 잘 아시리이다. (『현의 노래』250-251쪽)


첫째, 직설적으로 만난다함은 소리(노래)나 병장기(칼)는 그 주인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인이 없다는 것은 영원히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소리는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고 울리는 동안만의 소리”이기 때문이며, 칼도 그것으로 권력을 잡고 권력이 유지되는 동안만의 칼이기 때문이다. 소리가 울림을 그쳤거나 칼이 권력을 잃었을 때는 이미 주인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노래와 칼은 철저한 유한성과 현재성에서 직설적으로 만난다.

둘째, 은유적으로 헤어진다함은 그들 ― 악사와 무사가 입각한 점이 백 팔십 도 다르다는 점이다. 악사는 “왕들이 죽으면, 무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금(琴)을 뜯으며, 소리를 베풀”어 왕의 죽음에 동참하지만, 무사는 철저하게 왕의 삶과 함께 한다는 점이다. 왕의 삶을 왕의 삶답게 하기 위해 칼이 필요하지만, 왕의 죽음을 왕의 죽음답게 하기 위해 노래는 필요하다. 따라서 노래와 칼은 권력을 대칭축으로 하여 그것의 상실과 획득을 향해 은유적으로 갈라선다.


그러나 그 둘 다 위치하는 지점은 아수라의 세상이다. 악기가 아름답고 무기가 추악한 것이 아니 듯 무기가 강력하고 악기가 허약한 것도 아니며, 그 반대도 아니다. 악기는 무기의 그늘이자 연장(延長)이고, 무기 또한 악기의 그것이다. 그 둘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고, 상충하면서도 상보하는 것이어서 미(美)/추(醜), 혹은 선(善)/악(惡)의 개념을 벗어난 곳에 그들 스스로 오롯하다.

김훈이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를 통해 펼쳐 보이는 개별성이야말로 유한성에 대한 승인이자, 이 아수라의 세상에 대한 그만의 수용방식이다. 그의 소설은 인간의 지극한 내면을 그리는 탓에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줄거리(플롯)로서가 아니라 아득함으로 이야기된다. 그래서 그의 책을 덮고 나면 꿈에서 깬 듯이 혼몽하고 막연하며 허무하다. 이 막연함과 혼몽함과 허무함은 그의 소설이 갖는 미덕이면서 그치지 않는, 그칠 수 없는 이 세상의 길고 긴 노래의 맨얼굴일 것이다.□

-『교육경남』(2005. 가을).


 

 

출처 : 뫼비우스의 띠
글쓴이 : 뫼비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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