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롤랑 바르트

[스크랩] 롤랑 바르트 - 언어에 대한 역사적 관심에 대한 흔적

ddolappa 2008. 12. 5. 23:32

롤랑 바르트 (Roland Gérard Barthes)

: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 


소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들에 대한 '읽기'를 시도하며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문학과 이론의 모든 전위적 움직임에 중심부에 있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롤랑 바르트는 1915년 프랑스 북부 쉐르부르에서 태어났다. 바르트는 그가 한살때 사망한 아버지의 몫까지 맡았 던 어머니가 프랑스와 독일이 번갈아 차지했던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이었고 스페인, 바스크 문화가 혼재된 곳이었던 프랑스 남부 바욘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년시절 폐결핵으로 고등사범학교 진학과 교수자격시험을 포기한 바르 트는 소르본느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한 후 파리에서 고등학교 선생을 했으며 이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림도 그리고 연주도 하는 등 다재다능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바르트는 1952년 파리의 국립과학센터(프랑스어: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의 연구원이 되어 1953년 근대문학의 형성을 다른 [[ 영도의 글쓰기 Le Degré zéro de l'ériture ]] 를, 1957년에는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기고문을 모아 엮은[[신화론Mythologies]]을 출판했다. 1960년 에콜 프라티크 교수 역임하고 1962년 파리고등실업연구원(프랑스어: 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의 연구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60년대 기호학과 구조주의에 전념했지만(《기호학원론Éléments de sémiology》(1964), 《유행의 체계Systéme de la mode》(1967)), 곧이어 구조주의를 폐기했다(《S/Z》(1970), 《텍스트의 쾌락Le Plasir du texte》(1973)).1976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최초로 문학적 기호학 강좌 개최하였으며 많은 저작을 남겼고 사후에 출판된 《작은 사건들Incidents》(1987)에서 동성애를 고백했고, 1980년 사회당 당수가 주최한 회식에 참석하 고 걸어서 귀가하다 트럭에 치인 후유증으로 한 달 후 사망했다.


• 《영도의 글쓰기Le Degré zéro de l'ériture》 Paris 1953
• 《신화론Mythologies》 Paris 1957
• 《기호학원론Éléments de sémiology》 Communications 4 1964
• 《유행의 체계Systéme de la mode》 Paris 1967
• 《기호의 제국L'Empire des signes》 Genf 1970
• 《텍스트의 쾌락Le Plasir du texte》 Paris 1973 ISBN 898038422X
•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R. B. par. R. B. Paris》 Paris 1975
•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Paris 1977
• 《강의Leçon》 Paris 1978
• 《밝은 방: 사진에 대한 노트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Paris 1980
• 《목소리의 결정Le Grain le la voix. Entretiens 1962~1980》 Paris 1981
• 《Essais critiques III. L'Obvie et l'obtus》 Paris 1982
• 《Essais critiques IV. Le Bruissement de la langue》 Paris 1984
• 《기호학의 모험L'Adventure sémilogique》 Paris 1985
• 《작은 사건들Incidents》 Paris 1987
• 《전집Œuvres complétes》 Paris 1993~1995


아래 글과 위 아래 사진은 클럽 프랑스에 있는 ( http://www.france.co.kr/ ) 자료와 다음인물사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사진설명 : 1978년 영화 '브론테 자매들'에서 여배우 마리-프랑스 피지에와 함께 출연한 롤랑 바르트

 

80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현대의 모든 전위적- 문학적 움직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롤랑 바르트. 그는 신화· 기호·텍스트·소설적인 것으로의 그 '현기증 나는 이동작업'을 통 해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와 세계에서 가장 활력적인 사유체계의 개 척자로 손꼽힌다.
바르트는 79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취임 강연 에서 "어떤 야만적인 것에 의해 우리 교육에서 단 하나의 학문만을 남기고 모두 추방돼야 한다면 구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문학이다" 는 말로 문학에 대한 애정을 토로했다. 그는 비록 문학의 지배가 끝 나고 작가가 더이상 과거와 같은 위상을 가지지 못한다 할지라도 '문학적인 기념비 안에는 모든 학문이 자리하기 때문에', 문학만이 과학의 닫힌 체계에 열림을 창출해 낼 수 있다고 했다. 또 문학만이 삶의 실재를 재현하려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을, 불가능한 꿈을 구현 할 수 있다고 외치던 바르트의 목소리는 아직도 그 울림을 간직하고 있다.
바르트의 문학적 편력을 특징짓는 '다양성'(문학비평가이며 기호 학자, 작가였다)과 '유동성'(마르크스주의자이며 구조주의자, 후기 구조주의자 등)은 때로는 지나치게 시류에 편승하는 스타일리스트 혹은 타인의 이론을 이용할 줄 아는 에세이스트라는 부정적인 평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 대중문화의 소비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문학이 카프카가 말 하는 '유희와 절망'의 열린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지극 한 성찰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크리스테바는 이런 바르트를 현대적 인 문학연구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그녀에 따르면 바르트는 글쓰기 의 개념을 통하여 문학연구에 최초로 주체와 역사를 도입하였으며, 부정성으로서의 언어, 글쓰기에서의 주체의 욕망과 육체의 영향을 통하여 담론의 일반 체계 안에서 문학에 핵심적인 자리를 제공했다 는 것이다.
초기 저술 '영도의 글쓰기'(1953) 이후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글쓰기란 개념은 사회적이고도 문법적인 언어와 개별적이고도 생리 학적인 문체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목적에 의해 변형된 문학언어" 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의도적인 표현으로서, 당시 그가 영향을 받고 있던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 엇인가'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문학을 하나의 가치 로 파악하고 메시지의 교훈을 강조했다면, 바르트의 작업은 글쓰기 의 역사, 그 형식에 관한 물음으로 모아진다. 그 이유는 "작가가 사 회에 연루되는 것은 그가 그 사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보다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와 형태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심은 기호학을 현대 사 회의 상징 체계를 드러내 줄 새로운 틀로 제시하게 한다. 기호학은 분절된 언어를 넘어서서 의복이나 음식 영화 광고 사진 등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 뿌리박고 있는 요소들의 분석에 유효한 도구로 사용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기호학이 이론적이고도 방법론적인 틀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하며, 또 그것이 인문학의 진정한 메타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체를 끊 임없이 의문시하고 부정하고 해체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 부정적인 그러나 능동적인 기호학을 '기호지향 론'이라고 부른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데리다, 라캉, 니체 등의 보호체계 하 에 또 한번의 변신을 시도한다. '텍스트' 그리고 '소설적인 것'이라 고 불리는 바르트의 후기 저술은 욕망, 즐거움, 육체 등 개념을 중 심으로 이뤄진다. 우리는 여기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이론과 결별 하고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실천가로서의 바르트와 만나게 된다.
언 어는 그 자체로 억압이고 폭력이기 때문에, 이런 언어에 저항하기 위해 욕망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복수적인 글쓰기, 하나의 언어가 권력에 의해 수렴되면 곧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다 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동작업, 총체성의 괴물을 깨부수는 단편 적인 글쓰기/단상, 대립항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통합이 아닌 전혀 엉뚱한 제3의 항을 만들어 냄으로써 대립항의 빗금을 들어올리는 중 성의 언어 등.
이 모든 전략과 실천작업은 삶과 유리되지 않은 문학, 타자의 언어와 텍스트를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지평을 개조해 나가야 한다는 '실존의 예술'로서의 문학에 대한 조망이다.
또한 '저자의 죽음'은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인 독자를 부각시킨 다. 왜냐하면 글쓰기/글읽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한 소비자로서 의 독자가 아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작품을 다시 쓰는 아마추어 를 생산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언어에 대한 역사적 관심 의 흔적"이라고 불렀던 바르트.
비록 언어의 폭력성에 대한 그의 제 안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유토피아적인 제안처럼 보일지 언정 결코 경직된 사유나 형태에 안주함이 없이 일련의 극단적인 모 순된 태도 속에 언어의 흔들림을 실천하며 끝없이 새로운 것을 향해, 불가능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때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는 그 의 외침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불문학)
글쓴이 : 김희영 약력 1949년생. 한국외국어대 불어과졸. 프랑스 파리Ⅲ대학교 불문학 석사-박사. 하버드대 로맨스어문학과 객원교수 역임. 한국외국어대 외국문학연구소장(현재). 역서:'사랑과 단상'(바르트 지음· 문학 과지성사·1991)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1997) 등.


바르트는 문학평론가, 문화비평가, 마르크스주의자, 구조주의자, 후기구조주의자, 에세이스트 등 다양한 명함을 가졌다. 그러나 사 르트르의 '실존주의'나 데리다의 '해체주의'같은 자신의 '주의'를 갖진 않았다. 그는 학사 학위 하나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까지 지냈지만 어떤 학파에 얽매이지도, 자신의 학 파를 만들지도 않았다. 이는 그의 학문세계가 끊임없이 스스로 변 화를 꾀하며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르트의 학문인생은 흔히 세 단계로 구분된다. 초기는 '현대의 신화' '글쓰기의 영도'를 써낸 1950년대. 이 시기 그는 마르크시즘 과 사르트르,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문학의 역사성과 사회성에 주목 한다. 특히 1945년 스위스 요양 중에 접한 마르크시즘에 심취해 1955 년 카뮈의 '페스트'를 놓고 논쟁이 붙었을 때 "나는 역사적 유물론 관점에서 말한다"고 선언해 한동안 '바르트=마르크스주의자'라는 딱지가 따라다니기도 했다.
바르트는 그러나 학문인생에서 중기로 분류할 수 있는 60년대 들어 기호학적 방법론에 빠져든다. 1940년 대 후반 루마니아 부쿠레시티대 교수 시절 동료였던 리투아니아 출 신의 언어학자 그레마스와의 인연으로 구조주의에 눈뜬 그는 60년 대 본격적으로 소쉬르의 기호학을 자신의 분석틀로 응용했다.
이 분석틀은 그가 현대 대중문화와 소비사회의 다양한 단면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됐다. 1970년대들어 바르트는 푸코, 데 리다, 라캉, 솔레르스, 크리스테바 등 후기구조주의자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현대사회를 읽는 틀을 제공했다.
바르트의 폭넓은 사상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70년대부터 주요저 작이 번역되면서 시작되었다. 90년대들어 바르트는 국내에서도 본 격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동문선 출판사가 97년부터 프랑스 쇠이유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바르트 전집을 발간하고 있으며 그밖에도 '기호의 제국' (김주환-한은경 옮김) '카메라 루시다'(조광희 옮김· 열화당간)를 비롯, '사랑의 단상'(김희영 옮김·문학과 지성사간) '이미지와 글쓰기'(김인환 옮김·세계사간) '롤랑 바르트가 쓴 롤 랑 바르트'(이상빈 옮김·강간) 등 다양한 저작이 번역돼 있다.
(김한수기자, 조선일보)

 

 


 

출처 : Bigstone Kang
글쓴이 : 돌탱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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