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호학1) 이론과 바르트의 ‘신화’ 개념 1) 기호학 이론-소쉬르(Saussure)와 퍼스(Pierce)의 이론을 중심으로 기호학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호(Sign)’에 관한 학문으로 이는 곧, 기호와 기호 시스템 들을 연구하여 의미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문제들을 해명해 나가는 방법론이다.2) 방법론 으로써의 기호학은 기존의 인상비평이나 내용분석으로부터 과감히 탈피하여, 텍스트의 가치 를 평가하기보다는 기호들이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과 기호의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을 연구 한다. 그러한 목적 하에서, 기호학은 기호의 의미가 무엇인가보다는 의미가 어떻게 창출되는 가에 관한 의문을 제시한다.3)
기호학의 역사는 고대로까지 올라가는데. ‘기호학(Semiotic)'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 한 현대 철학자는 존 로크이다.4) 그러나, 현대기호학의 창시자는 보통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 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C harles Sanders Pierce)라고 일컬어진다.5)
소쉬르의 연구는 보통 기호학을 ‘창안했다’고 이야기되는데, 그가 기호학이라는 용어를 처 음 사용한 것은 그의 사후에 출간된 「일반언어학 강의(Course In General Linguistics)」에 서였다. 그는 이 책에서 기호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사회 속에서 기호의 생명을 연구하는 과학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호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기호학은 기호를 성립하고, 기호들을 지배하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6) 소쉬르7)에 의하면 기호학의 가장 작은 단위인 기호(Sign)는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 다고 한다.8) 이는 곧, 기표(Signifier, Signifiant)와 기의(Signified, Signifié)인데, 전자가 정 신적인 개념인 기의를 유발시키는, 직접 감지될 수 있는 물질적, 청각적, 시각적 신호-기호 의 인지 가능한 측면-라면, 후자는 기표가 발생시킨 부재하는 정신적 재현이다. 기의는 형 상, 소리 등의 어떤 ‘사물’이 아니라 정신적인 재현이다.9) 즉, ‘책상’이라는 단어가 기표라면, 그 단어가 우리에게 만들어내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데 받치는 기구’라는 정신적 이미지 가 기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우리가 만지고 사용하는 실제 대상을 기호의 지시대 상(referent)라고 한다.10)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표와 기의 사이에 서로 연결되어야 할 어떤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책상이라는 기표는 책상이라는 이미지와 어떤 유사성도 가 지고 있지 않으며, 이러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는 전적으로 관습적이며 자의적인 것이 다.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소쉬르는 의미라는 것이 기표와 기의 사이의 본질적 교류의 결과 가 아니라 오히려 차이와 관계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11) 즉, 책상이라는 기표는 그 기표 가 어떤 본질적인 유사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것이 책성, 첵상, 책싱이 아니기 때문에 기의 인 책상을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표와 기의의 체계는 본질적인 의미를 가짐으로써가 아니라 차이. 즉 그 체계 내에서의 반대와 대조라는 구별 때문에 작동하는 것 이다.12) 즉, 소쉬르에게 의미라는 것은 조합하고 선택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곧 두 가지 기본적인 관계의 유형-계열체적(Paradigmatic) 유형과 통합체적(Symtagm atic) 유형-을 의미한다. 계열체적 유형이 실제적인, 혹은 ‘수직선상의’ 단위들로 구성되는 것 으로 그 단위들은 공통적으로 유사성이나 대조의 비교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단위들과 결합시키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라면, 통합체적 유형은 담화의 연속적인 특징, 즉 그것이 ‘일 직선상’으로 배열되어 하나의 전체적인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다. 즉, 계열체적 유형이 선택 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통합체적 유형은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13) 소쉬르는 언어학에 대 한 통시적, 역사적 접근법과 공시적, 구조적 접근법이 있음을 이야기하며, 언어의 과학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후자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소쉬르의 이론에 반대하 는 사람들은 그의 이론이 정적이며, 비역사적이라고 비판한다.14)
소쉬르가 언어학 연구에 자신을 한정시킨 것에 비해 퍼스의 작업은 기호의 모든 형태를 설 명하고자 한다. 퍼스에 따르면 기호란 ‘누군가에게 어떤 측면 혹은 어떤 입장에서 그 무엇을 나타내는 그 어떤 것’이다.15) 퍼스에게 기호는 표상체, 대상체, 해석체라는 3가지 구성요소 로 만들어진 삼원적 존재인데, 이는 곧 ‘기호(Sign)라는 것은 대상(Object)을 통해 해석체(In terpretant)로 연결되는 것’이라는 것이다.16) 여기서 대상은 기호가 상징하는 것이고 해석체 는 기호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 의해 생성되는 ‘정신적인 영향’이다. 즉, 여기서 기호는 대상체 와 해석체를 중재(mediation)하는 기능을 한다.17) 소쉬르에 있어 기호가 두 사람이 의도적 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려하거나 고의적인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할 때 생기는 대화수단이라 면, 퍼스의 모델은 의사소통을 위한 의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퍼스에게 있어서 기호의 수신자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꼭 있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18) 퍼스에 게 있어 모든 의사소통은 기호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이는 무한 기호작용(Infinite Se miosis)19)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퍼스는 또한 기호를 도상 기호(Iconic Sign), 지표 기호(In dexical Sign), 상징 기호(Symbolic Sign)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고 있다. 도상 기호는 그림 이나 사진과 같이 기표가 명백히 그 유사성을 통해서 기의를 재현하는 것으로 퍼스는 이를 ‘그 본질상 역동적인 대상에 의하여 결정되는 기호’로 정의하고 있다.20) 지표 기호는 풍향계 나 온도계와 같이 기표와 기의 사이에 인관관계와 존재론적 연관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퍼 스는 이를 ‘역동적인 대상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으로써 결정되는 기호’로 정의한다.2 1) 퍼스에게 있어 지표 기호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물질적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이어그 램이나 지도는 지표 기호가 아닌 도상 기호이다. 마지막으로, 상징 기호는 기표와 기의 사이 에 관습적이지만 자의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연언어는 그 기호들이 오직 언어 학적 관행에 의해서만 대상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상징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움베르트 에코 는 이러한 퍼스의 기호 구분이 모든 기호가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 이 있다고 비판하며, 그 대신에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시한다. “기호학은 원칙적으로 거짓말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만약 무엇인가가 거짓말하는데 사용되어질 수 없다면, 역으로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데 사용도리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실제로 ‘말하는 것’에 전혀 사용되어 질 수 없다.”22) 2) 바르트의 기호학 이론-「현대의 신화(Mythologies)」를 중심으로 롤랑 바르트는 40-50년대 구조주의 기호학자로 지적 경력을 시작하여, 후기에는 후기 구조 주의자로 전환하게 된다. 그 자신이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시대 구분한 것에 따르면 각각 ‘감 탄의 시기’, ‘과학의 시기’, ‘텍스트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23) 이 중에서 「현대의 신 화」와 「기호학 요강」, 「모드의 체계」에 이르는 감탄의 시기와 과학의 시기가 구조주의 기호학자로써의 바르트의 시기였다면, 이후의 「S/Z」로부터 시작되는 텍스트의 시기에서 는 기호학의 한계를 느끼고 ‘글쓰기’와 ‘텍스트 실천’ 등의 새로운 개념으로 선회한 시기이다. 바르트의 지적 영역이 넓게 포진되어 있는 만큼, 바르트 이론의 전체를 살펴보는 것은 여기 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다루는 방법론이 기호학적 방법론이고, 비록 바르 트의 이론이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전환되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기호학적 이데올로 기 비판은 신중하게 연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글에서는 그의 초기작이면서도 여전히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현대의 신화(Mythologies)」를 중심으로 해서 바르트의 초기 이 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Mythologies)」는 1957년에 출간된 책으로,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현대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1954-56년 사이에 씌여진 것으로 프로레슬링, 장 난감, 가르보의 얼굴, 비프스테이크와 감자튀김 등 프랑스 대중문화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이 다. 2부는 “오늘날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앞의 에세이들을 특징짓는 이론적 에세이이다. 이 책의 1970년 서문에서 바르트는 이 책의 성격을 두 가지로 규정짓고 있다. 그 하나는 대중문 화의 언어활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서이며 다른 하나는 그 언어활동에 대한 최초의 기 호학적 분석서라는 것이다.24) 이러한 성격 하에서 바르트는 ‘현실이란 완벽히 역사적인 것 임에도 저널리즘 등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 본래적인 것으로 둔갑해 버리는 현상을 참을 수 없이 느끼며, 자명한 것으로 포장된 진술 속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는 이데올로기적 오용을 포착해 내고 싶었다’고 한다.25) 그리고 이러한 거짓 자명함을 설명해주는 용어로 ‘신화’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여기서 그가 비판하는 이데올로기적 오용은 부르주아적 규범인데, 이러한 부르주아적 규범은 <역사>를 <자연>으로 대체함으로써 현실을 중립적이며 영원하고 불변 하는 것으로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화가 하나의 파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곧 신화가 하나의 대상, 하나의 개념, 혹은 하나의 관념이 아닌 하나의 의사소통 체계, 곧 하 나의 메시지라는 것이다.26) 계속해서, 바르트는 신화가 메시지의 대상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화가 그 메시지를 말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신화에는 형식적인 한계들만 있을 뿐 실질적인 한계들은 없으므로 그 어떤 것도 신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27) 즉, 바르트에게 신화는 의미의 체계 안에서 기능하는 메시지로 신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메시지가 드러내는 지시나 대상이 아니라 메시지가 전달되는 보이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이 다. 그러한 기반 하에서 바르트는 기표가 기의를 표현한다고 단순히 말하는 일반 언어활동과 는 반대로,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의 상이한 항들을 지닌 모든 기호학적 체계들을 다룬다고 이 야기한다.28) 즉, 바르트에게 신화는 2차적인 기호학적 체계인 것이다. 이를 표로 보면 다음 과 같다.
<표 1>29) 이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는 1차적 의미체계, 즉 외연적 작용이다. 이것은 곧, ‘무엇이 혹 은 누가 묘사되는가’하는 것이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2차적 의미체계, 내포 의미에서이 다. 이것은 ‘어떠한 사상과 가치가 재현된 것, 혹은 재현되는 방식을 통해서 표현되는가’하는 것이다.30) 1차적 의미체계에서 만들어진 기호가 2차적 의미체계에서는 기표가 된다. 이 때 1차적 의미체계에서의 기표(1)를 의미라고 부르고 2차적 의미체계에서의 기표(Ⅰ)를 형식이 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때의 기의(Ⅱ)를 개념이라고 부른다. 또한, 1차적 의미체계에서의 기 표와 기의의 결합(3)을 기호라고 부른다면, 2차적 의미체계에서의 기표와 기의의 결합(Ⅲ)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의미작용은 곧 신화가 된다. 1차적 의미체계 에서의 기호(3)는 2차적 의미체계의 기표(1)가 되면서 의미가 비거나 빈약하게 된다. 그리 고, 그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 의미작용이다. 그러나, 의미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신화의 기능은 변형시키는 것이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는 개념이 의미를 변형시키고, 신화의 형식은 그렇게 유예된 의미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의미를 변형시 키면서 신화를 만들어내는 개념은 역사적인 동시에 의도적인 것이다. 곧, 개념은 신화를 말 하게 하는 동기인 것이다.31) 여기서 신화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이 나타난다. 개념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권력을 갖는 사람들-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데 공헌하는 것이다.3 2) 신화가 이데올로기 작용을 하는 것은 그러한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탈역사화, 중성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의미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에 의해 변형되면서 기호의 ‘자연적’ 의미와 ‘부과된’ 이데올로기적 개념 사이에서 숨박 꼭질을 한다는 것이다.33) 즉,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가 사진을 볼 때 그 사진의 의미작용(신 화)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것이라도 그것을 우리가 볼 때는 그 사진이 의미를 ‘구성한다’기보다는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지고, 발견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 의미 를 중성화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바르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사회는 그 자 체의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은폐하기 위해 신화를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 체계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세계의 실재를 세계의 이미지로 바꾼다. 이것은 곧 역사를 자연으로 환원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독자가 이러한 신화를 순진하게 소비하는 것 은 신화 속에서 기호학적 체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기표와 기의가 자연스런 관계를 갖는 것 으로 보는 귀납적인 체계를 보기 때문이다.34) 즉, 신화의 소비자는 그것을 사실의 체계로 간 주하지만 실상은 하나의 기호학적 체계일 뿐이다. 이렇듯, 신화가 비정치화된 파롤이라면, 그 신화에 반대하는 파롤은 정치적 파롤이다. 부르주아는 가면을 쓰고 이를 통해 신화를 만 들어 내는 반면, 혁명은 자신을 혁명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신화를 제거한다.35) 그럼으로 써 바르트는 신화에서 주술적인 무시간적 겉모습을 폭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부르주아적 진술의 겉치레를 벗겨내기 위해 서 부자연스러운 파괴를 단행하는 것이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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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프랑스: Roland Barthes, 1915년 ~ 1980년)는 불란서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이다.
[편집] 생애
소르본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한 다음에, 파리에서 고등학교 선생을 했다. 이후 부카레스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대학강사를 하며 보냈고, 1952년 파리의 국립과학센터(프랑스어: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의 연구원이 되었다. 1953년 근대문학의 형성을 다룬 《영도의 글쓰기Le Degré zéro de l'ériture》가 출판됐고, 1957년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기고문을 모아 엮은《신화론Mythologies》이 뒤따랐다. 1962년 파리고등실업연구원(프랑스어: 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의 연구책임자로 임명됐다.
1960년대 기호학과 구조주의에 전념했지만(《기호학원론Éléments de sémiology》(1964), 《유행의 체계Systéme de la mode》(1967)), 곧이어 구조주의를 폐기했다(《S/Z》(1970), 《텍스트의 쾌락Le Plasir du texte》(1973)).
다재다능하여 연주도 하고 그림도 그렸던 바르트는 《오브비와 옵투스L'Obvie et l'obtus》(1982)에서 슈만과 톰블리(영어: C.Y. Twombly)를, <밝은 방: 사진에 대한 노트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1982) 에서 사진을 다루었다. 1976년 콜레주 드 프랑스(프랑스어: Collége de France)의 문학기호학 교수로 초빙됐다. 바르트의 다방면의 작품들은 고유한 발전과 현실적 위치를 끊임없이 성찰한 결과들이다 (자서전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1975)와 대담집 《목소리의 결정Le Grain le la voix. Entretiens 1962~1980》(1981) 참고).
사후에 출판된 《작은 사건들Incidents》(1987)에서 동성애를 고백했고, 1980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편집] 저작
- 《영도의 글쓰기Le Degré zéro de l'ériture》 Paris 1953
- 《신화론Mythologies》 Paris 1957
- 《기호학원론Éléments de sémiology》 Communications 4 1964
- 《유행의 체계Systéme de la mode》 Paris 1967
- 《기호의 제국L'Empire des signes》 Genf 1970
- 《텍스트의 쾌락Le Plasir du texte》 Paris 1973 ISBN 898038422X
-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R. B. par. R. B. Paris》 Paris 1975
-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Paris 1977
- 《강의Leçon》 Paris 1978
- 《밝은 방: 사진에 대한 노트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Paris 1980
- 《목소리의 결정Le Grain le la voix. Entretiens 1962~1980》 Paris 1981
- 《Essais critiques III. L'Obvie et l'obtus》 Paris 1982
- 《Essais critiques IV. Le Bruissement de la langue》 Paris 1984
- 《기호학의 모험L'Adventure sémilogique》 Paris 1985
- 《작은 사건들Incidents》 Paris 1987
- 《전집Œuvres complétes》 Paris 1993~1995
**현대의 신화 책 소개 http://cafe.naver.com/bookvil/3104
http://blog.naver.com/lugali/50032519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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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화로서의 대중문화
Roland Barthes(프랑스, 1915-1980)
신화의 표현수단: 신화는 언어로 표현된다. 그러나 신화언어는 일상언어와 그 성격이 다르
다. 신화언어의 표현양식인 신화의 의미작용, 즉 이데올로기 조작으로서의 표현양식에 주목
하여 그 형태로 신화를 정의한 학자가 바르트다.
* Mythologies
1954-1956년 사이에 쓰고 1957년에 출판. 여기서 바르트는 두 가지 작업을 행한다. 대중
문화의 언어에 대해 이데올로기 비판과 이 언어에 대한 최초의 기호학적 분해, 즉 탈신비화
(d mystification)의 작업을 행한다. 말하자면 쁘띠 부르주와 문화를 보편적 자연으로 변형시
키는 신비화(mystification)를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바르트는 고발은 반드시 정교한 분석
도구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기호학은 결국 기호 파괴(s mioclastie)의 입장에 서야함을 주장
한다.
프랑스인들의 일상생활 신화 몇 가지를 성찰하였다. 재료는 신문기사, 선전, 주간지의 사
진, 영화, 구경거리, 전시회에서 취하였으며, 주제는 자의적으로 정하였다. 이들의 분석을 통
해 거짓(허위) 자명함 속에 감추어진 이데올로기적 남용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신화 개념은
이 거짓 자명함들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 오늘날 신화란 무엇이냐? 간단히 답하자면 신화는 빠롤(parole)이다. 이러한 정의는 어원
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 빠롤이나 다 신화는 아니다. 언어(langage)가 신화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별한 조건들이 필요하다. 신화는 한 의사소통체계(un syst me de communication), 하나의
전언(un message)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는 한 대상, 개념, 관념(un objet, un concept,
une id e)이 될 수 없다. 신화는 한 의미작용 양식( un mode de signification), 한 형태(une
forme)이다. 이 형태들의 역사적 한계들, 사용 조건들을 제시해야 할 것이며, 신화에 사회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신화는 그가 전달하는 전언의 대상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전언을 전달
하는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신화는 하나의 빠롤이므로 모든 것이 다 신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 물질에
사회적 관습이 추가된 빠롤이다. 실제적인 것을 빠롤 상태로 이행시키는 것은 인간의 역사
이며,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신화 언어의 삶과 죽음을 조절한다. 멀건 가깝건 신화학(la
mythology)은 역사적 토대밖에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화는 역사가 선택한 한 빠롤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사물들의 본성(la nature)에서 솟아날 수가 없다.
신화적 빠롤은 하나의 전언이다. 따라서 구술적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이것
은 문자( criture) 또는 표상들로 만들어질 수 있다. 글로 표시된 담론, 사진, 영화, 현지보고,
스포츠, 공연, 선전, 제의, 이 모든 것이 신화적 담론의 매체로 사용될 수 있다. 신화는 그
대상으로도, 그 소재로도 정의될 수 없다. 신화적 빠롤은 전유된 의사소통(une
communication appropri e)을 목적으로 이미 작업된 재료로 만들어졌다. 표상적이건 문자적
이건, 모든 신화 재료들은 기표의식(une conscience signifiante)을 전제하기 때문에 신화를
그 재료와는 무관하게 논할 수 있다.
여기서 언어(langage), 담론(discours), 빠롤(parole)은 모든 유의미한 합치 또는 종합 ㅡ
그것이 언어적이건, 시각적이건 ㅡ을 의미한다. 한 장의 사진은, 한 신문기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빠롤이다. 대상들 자체도 그것들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빠롤이 될 수 있다. 이
것은 신화적 빠롤을 랑그로 취급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화는 언어학보다 더 확장
된 일반적인 어떤 학문, 즉 기호학(s miology)의 영역에 속한다.
* 기호학 체계로서의 신화
어떤 의미작용(une signification)을 상정한다는 것은 기호학의 힘을 빌린다는 것이다. 정
신분석, 구조주의, 직관심리학, 문학비평의 새로운 시도(예, 바슐라르 Bachelard)는 내용은
다르나 공통된 규약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가치의 학문이다. 이들은 사실에 만족하
지 않고, 사실을 정의하고 사실을 un valent pour(…에 값하는 것, …에 해당하는 값어치)로
탐구한다.......
기호학은 기호들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의미작용을 연구하므로 한 형태학이다. 이러한 형
태학의 필요성과 한계를 다 인식해야 한다. 형태학의 필요성은 모든 정확한 언어의 필요성
이다. 예를 들면 어떤 철학자는 지구의 원형적 구조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구조를 형태
용어로써 말할 수 없고, 형태 또한 마찬가지다. 과학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는 관심
이 없다. 만일 그가 삶을 변형시키고자 한다면, 그는 삶을 말해야 한다. 삶(la vie)의 지평에
서는 구조와 형태의 식별불가능한 총체성만이 있을 뿐이다......
역사 비평은 형태에 대한 특별한 연구가 어느 점에서도 전체성(totalit )과 역사(Histoire)
라는 필요 원리들에 모순되지 않음을 알았다.
위험한 것은 형태를 반형태, 반실체(mi-forme et mi-substance)의 모호한 대상으로 간주
하고, 형태에 형태실체(une substance de forme)를 부여하는 것이다. 형태학의 한계를 지닌
기호학은 형이상학적 올가미가 아니다. 다른 학문들 중의 한 학문이며, 충분하지는 않으나
필요한 학문이다.
* 신화학은 형태학으로서의 기호학의 일부이며, 역사학으로서의 관념학(l'id ology)의
일부이다. 신화학은 형태로 나타난 생각들(des id es-en-formes)을 연구한다.
* F. de Saussure 활용어(langage)의┌ 랑그(langue) 두 측면 └ 빠롤(parole)
기호(signe)의 +-기표(signifiant,(영) signifier): 청각 이미지(image acoustique)
두 구성요소 +-기의(signifi , (영) signified): 개념(concept)
신화에서도 기표, 기의, 기호라는 3차원의 도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신화는 그에 앞
서 존재했던 한 기호학적 연쇄에서부터 세워졌다는 점에서 특별한 체계이다. 신화는 그에
앞서 존재했던 언어라는 기호학적 연쇄로부터 세워진 이차 기호학 체계이다. 그래서 랑그
를 대상언어(langage-objet) - 신화가 이것을 포착하여 자신의 고유 체계를 구축하므로 - ,
신화를 메타언어(m ta-langage)라 부르겠다.
* 신화적 빠롤의 예들
1. 미장원에서 누가 나에게 빠리-마취Paris-Match 잡지 한 권을 건네준다. 표지에는 프랑
스 군복을 입은 한 젊은 흑인 남자가 삼색기를 올려다보며 경례를 하고 있는 모습이 사진
찍혀 있다.
기표(제 1항): 프랑스 국기를 올려다보며 경례하고 있는 흑인 병사의 이미지
기의(제 2항): 프랑스성(francit )과 군사성(militarit )의 의도적 혼합
의미작용(제 3항): 기표를 통한 기의의 현존
기의가 의미하는(signifier) 것은 프랑스는 대제국이며, 프랑스의 아들들은 피부색의 구별
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 충실히 군복무하며, 이른바 그들의 압제자들에게 봉사하는 이 흑인
의 열성은 식민주의를 비방하는 비방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대답을 제시한다.
2. 나는 프랑스 한 고등학교의 5 학기 째 학생이다. 라틴어 문법책을 열어서 이솝이나 페
드라에서 차용한 한 문장을 거기서 읽는다: quia ego nominor leo. 이 말뜻은 Je m'appelle
lion(나는 사자이다 My name is lion)이다. 그러나 진짜 의미(signification)는 속사의 일
치 규칙을 분명히 보여주는 문법의 예다.
* 신화 기표의 이중성: 가득 찬 의미, 비어있는 형태
계의 최초 항으로서. 신화의 기표를 랑그의 지평에서는 의미(sens, meaning)로, 신화의 지
평에서는 형태(forme)로 부르고, 기의는 개념(concept)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겠다.
첫 두 항의 상관작용(corr lation)인 제 3의 항은 랑그체계에서는 기호(signe)로, 신화체계
에서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으로 부르겠다.
의미로서의 신화 기표는 역사, 지리, 도덕, 동물학, 문학 등 온갖 가치체계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만약 quia ego nominor leo를 단지 언어체계 속으로만 넣는다면, 이 명
제는 거기서 온전함, 풍부함, 역사를 되찾는다. 나는 동물이며, 사자이며, 어떤 나라에 산
다. 사람들은 내가 내 사냥감을 암소, 염소와 함께 나누어 갖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장 강하므로 여러 이유들로 해서 내 사냥감의 모든 부분을 내가 다 차지했다. 마지
막 이유는 단지 나는 사자라 불린다(Je m'appelle lion)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의 형태로서 '나는 사자라 불린다'라는 명제는 이 긴 역사 중 거의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형태는 의미가 담고 있는 온갖 가치체계(역사, 지리, 도덕, 동물학, 문학)
의 풍부함을 멀리한다. 형태의 새로운 빈곤함은 그것을 가득 채울 어떤 의미작용을 부른다.
신화의 형태는 한 상징이 아니다. 경례하는 흑인은 프랑스 제국의 상징이 아니다. 그가
프랑스 제국의 상징이 되기에는 너무 많은 현존(영향력, trop de pr sence)을 가지고 있다.
그는 풍부한 이미지, 체득된 이미지, 자발적이고 순진무구하며 논란의 여지없는 이미지 행
세를 한다.
* 신화 기호의 유연성(有緣性)
의미작용은 결코 전적으로 자의적이지 않다. 신화는 필연적으로 유비(analogie)의 몫을 지
니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제국성이 경례하는 흑인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흑인의 경례와
프랑스 군인의 경례간에 동일함이 필요하다.
신화의 형태는 필히 유연(有緣, motivation)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편적이다. 이 유
연성(有緣性)은 자연적이지 않다. 형태에 유비들을 제공하는 것은 역사이다. 의미와 개념간
의 유비는 결국 부분적일 뿐이다. 형태는 많은 유비들 중에서 몇 개만을 붙든다. 프랑스 제
국성에 흑인의 경례 외에 다른 기표들을 줄 수 있듯이, 유연성은 다른 가능한 것들 가운데
서 선택된다.
신화 기표와 기의와의 결합은 꼭 표의문자만큼 자의적이다. 신화는 순수 표의문자체계이
다. 신화의 의미작용은 표의문자(id ogram)보다 더 자의적이지도 덜 자의적이지도 않다.
표의문자체계에서는 형태들이 그들이 표상하는 개념에 의해 근거를 갖게된다. 하지만 표상
의 총체성을 포괄하지는 못한다. 역사적으로 표의문자가 차츰차츰 개념을 떠나 소리와 결합
되고, 그러면서 점점 더 무연(無緣)적으로 되듯이, 신화의 마모는 자신의 의미작용의 자의
성(恣意性)으로 식별된다.
* 신화 읽기와 해독
명할 수 있다.
신화 읽기의 세 다른 유형
1.신화 생산자, 신문 작성자, 선전 제작자, 이데올로기 조작자들은 빈 기표에 초점을 맞
춘다. 이들은 개념을 먼저 염두에 두면서 의도를 잘 부각시킬 수 있는, 메시지를 가장 효과
적으로 전달시킬 수 있는 형태를 찾는다. 그리하여 자의성(恣意性)이 가장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조작한다.(신화는 역사를 자연으로 변형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가
장 효과적인 기표를 선택하려고 애쓴다. 앞에서 말한 빠리-마취 표지 제작자는 경례하는 흑
인은 프랑스 제국성의 상징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프랑스 제국성의 기표로 경례하는 흑인
병사 외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한 장군이 세네갈의 외팔이 병
사에게 훈장을 준다든지, 프랑스 수녀가 병들어 누워있는 아랍인에게 따끈한 차 한잔을 따
라준다든지, 백인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흑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 등.
2.신화학자들은 가득 찬 기표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신화의 의미작용을 해체하여 신화
가 속임수임을 보여주려고 하며, 자연스러운(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인위적이
며 역사적인 것임을 드러내 알려주려 한다. 다시 말해서 경례하는 흑인은 프랑스 제국성의
알리바이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신화학은 형태학(science formelle)으로서의 기호학의 일
부이며, 동시에 역사학(science historique)으로서의 관념학의 일부이다.
3.신화 소비자 및 신화 독자들은 의미와 형태가 뒤얽힌 전체로서의 신화의 기표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신화의 의미작용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경례하는 흑인의 사진에서 프
랑스 제국성의 현존을 본다.(신화 소비자의 예:386세대)
* 휴가중인 작가 (pp.30-33)
『피가로 Figaro』지가 찍은 사진: 앙드레 지드가 콩고로 내려가서 보쉬에 Bossuet를
읽고있는 모습.
『피가로』지가 찍은 지드의 형상은 "휴가중인" 우리 작가들의 이상을 꽤 잘 요약하고
있다: 그 어느 것도 저지시킬 수도 박탈할 수도 없는 천직의 특권을 평범한 여가와 연결하
였다. 사회학적으로 아주 유효한 좋은 르포르타쥬이며, 또 우리 중산계층들의 작가관을 숨
김없이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먼저 이들 중산계층의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작가들도 일
반인들처럼 휴가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는 자신들의 너그러운 시각이다. 휴가는 최근
에 나타난 사회적 사실이다. 휴가의 신화적 전개를 추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휴가
는 먼저 학교와 관련된 사실이었다가, 유급휴가 이래로 생산계층과 관련된, 적어도 노동 생
산계층과 관련된 사실이 되었다. 이 사실이 그 이후로 작가들과도 관련됨을 확인하는 것,
또 인간 영혼의 전문가들 역시 일반적인 현대 노동의 지위에 따른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작가들도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산다는 것을 부르조와 계층의 독자들에게 납득시키는 한 방법
이다. 사람들은 '거 봐, 어떤 평범함들의 필요성을 인정했잖아'라고 우쭐대며, 그들은 시그
프리드 Siegfried와 푸라스티에 Fourasti 의 교훈들로써 "근대적" 실재들에 유순하게 길
들여진다.
물론 이러한 작가의 프롤레타리아화는 인색하게 밖에 허용되지 않고 곧 이어 더 잘 파괴
된다. 사회적 특질(휴가는 사회적 특질의 기분 좋은 이점이다)을 지니자마자 곧 문인들은
그들이 천직의 직업인들과 함께 공유하는 천상계로 재빨리 되돌아간다. 사람들이 우리 소설
가들을 그 속에 주저앉히는 자연스러움(le naturel)은 사실 고상한 모순을 표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물질주의 시대가 만들어 낸 평범한 조건과 부르주와 사회가
정신인들에게 후하게 허용했던 ― 이들이 부르주와 계층에게 비공격적인 한 ― 특권적 지위
라는 고상한 모순이다.
작가들의 경이로운 독특성을 입증하는 것은 그 유명한 휴가 기간동안에도, 작가가 노동
자들, 양품점 점원들과 형제처럼 잘 지내는 동안에도, 그는 일을 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생산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사이비 일꾼이자 사이비 휴가객이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회고록을 쓰고, 또 어떤 작가는 교정을 보고, 또 다른 작가는 장차 나올 책
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작가는, 그것을 진짜 역설적인 행위, 전위적
위업, 즉 오직 강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감히 보란 듯이 드러낼 수 있는 전위적 행동 같은
것으로 시인한다. 문학적 생산은 인간적 결정을 벗어나므로 일종의 반사적(비의지적) 분비
같은 것, 따라서 타부와 동일시된다. 보다 고상하게 말하면, 작가는 내면의 신, 즉 자신의
영매(靈媒)의 휴가중의 어떤 순간이건 게의치 않고 말하는 폭군인 내면의 신의 먹이이다.
작가들은 휴가중이다. 그러나 그들의 뮤즈는 그들을 지켜보며 줄곧 그들의 해산을 돕는다.
이 수다의 두 번째 이점은, 그 강압성(명령성)으로 인해 이 수다는 아주 자연스럽게
작가의 본질 자체로 오인된다는 점이다. 작가는 그가 인간적 존재이며, 그에게는 전원의 낡
은 집, 가족, 짧은 바지, 어린 딸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른 노동자들, 해변에서는
한갓 휴가객으로 바뀌는, 그들의 본질을 바꾸는 다른 노동자들과는 달리, 그는 어디서건 작
가의 본성을 유지한다.
휴가를 가지면서 그는 자신도 인간이라는 인간성의 표시를 공공연히 나타내 보인다.
그러나 신은 남아 있다. 루이 14세가 단두대에서도 왕이었듯이 그는 작가이다.
그래서 문인의 기능과 인간의 노동과의 관계는 엠브로시아(신들의 음식)와 빵과의 관계
와 어느 정도 같다. 경이롭고 영원한 본체인 이것은 사회적 형태가 원하는 대로 해줌으로써
그 특권적 차원이 보다 잘 포착된다. 이 모든 것이 초인적인 작가, 구별되는 어떤 존재라는
생각, 이 생각은 사회가 그에게 부여한 인위적인 것이며, 사회는 작가의 이 독특성을 진열
시켜 작가가 이 역할을 보다 잘 수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휴가중인 작가"라는 선인(善人) 이미지는 다름 아니라 바로 좋은 사회가 그들의 작가들
을 보다 잘 복종시키기 위해 조작해 낸 교활한 신비화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육화
(incarnation)의 범속함으로 그 반대를 말하는 것 ― 이것은 결코 그 반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 보다 천직의 독특성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이것은 모든 성인전들의 오래
된 비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학적 휴가의 신화가 아주 멀리, 여름 저 밖으로 펼쳐져
나가는 것을 본다. 현대 저널리즘의 기술들은 작가를 구경거리가 되는 평범함으로 만들려고
점점 더 애를 쓴다. 이것을 탈신비화의 노력으로 여긴다면 잘못이다. 오히려 완전히 그 반
대이다. 한갓 독자인 내가 천부적 재능으로 선택된 종족의 일상생활에 은밀히 참여하는 것
은 감동적으로, 그리고 환상적으로까지 보인다.
내가 신문을 통해 알고있는 한 인간, 그토록 위대한 작가가 허름한 실내복을 입고 있으며,
그토록 젊은 소설가가 "예쁜 여자들, 사브 와 치즈, 라벤다 꿀"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나는
분명히 감미로운 우애를 느낄 것이다. 이러한 조작의 바겐세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여전히 스타이며, 천상의 거주지에 가기 위해 이 땅을 더 자주 떠난다.
천상의 거주지에서 그가 입는 실내복과 그가 먹는 치즈들이 결코
조물주들이 하는 고상한 말들을 다시 사용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작가들에게 공공연히
살덩어리의 육체를 주고, 그가 싸구려 백포도주와 설익은 비프스테이크를 좋아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그의 예술의 산물들을 보다 더 경이롭고 신성한 본질을 지
니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일상생활들의 세부 사항들은 그 작가의 영감의 본성을 내게 친숙하고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은밀하게 고발하는 자신의 조건의 사회적 독특
성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보편적 의식(conscience universelle)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때
에도, 허름한 실내복을 입거나, 아니면 그들이 장차 그들의 자아의 현상학(Ph nom nologie
de l'Ego)을 알려주는 바로 그 목소리로 사브와 치즈를 좋아한다고 공언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들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초인성(超人性)(surhumanit )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한 고상함과 그러한 경박함이 구경거리로 결합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아직도 모순을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둘의 결합은 완전한 경이이며, 이들 결합의 각 항도 역시
경이롭다. 작가의 일이 그의 의복의 기능 또는 미각적 기능들도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세
속화된 그런 세상에서는 이 모순의 결합은 흥미를 잃게될 것이다.
* 빈민과 프롤레타리아 (pp.40-42)
챨리 채플린이 가장 최근에 보여준 희화적 행동은 소련의 상금 절반을 피에르(Pierre)
신부의 기금에 기부한 것이다. 이것은 곧 프롤레타리아와 빈민들 간에 동일한 본성을 설정
하는 것이다. 챨리는 늘 빈민들의 특징들로써 프롤레타리아를 보았다. 그가 표상하는 것들
이 지닌 인간적 힘들도 바로 여기서 나오며, 정치적 모호성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 유명
한 영화 "모던 타임즈"(les Temps modernes)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챨리는 이 영화에서
줄곧 프롤레타리아 테마를 건드리지만 그 테마를 정치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욕구의 직접성,
그들의 통제자(고용주와 경찰)의 손으로부터의 완전한 소외로 규정되는,
아직은 무지하고 신비화된 프롤레타리아이다.
챨리에게 프롤레타리아는 아직은 배고픈 인간이다. 배고픔의 표상들은 다음과 같다. 지
나치게 두툼한 샌드위치, 흘러내리는 우유, 한 입 깨물고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던지는 과일
들, 조롱이라도 하는 듯이 급식기(주인의 본질을 띤)는 맛없어 보이는 음식들만을 제공한
다. 기근에 들러붙어 있는 채플린-인간(l'homme-charlot)은 늘 정치적 자각의 직전에 위치
해 있다. 파업은 굶주림에 눈먼 한 인간을 실제로 위협하므로 그에게는 파국이다. 이 인간
은 경찰의 눈길(과 위협)하에 빈민과 프롤레타리아가 일치한 순간에만 노동자의 조건에 돌
아온다. 역사적으로 챨리는 거의 왕정복고 때의 노동자, 기계에 항거하며, 파업이 일어나면
어쩔줄 몰라하며, 빵(그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의 문제에 매달려 있는, 그러나 아직은 정치
적 원인의 자각이나 집단적 전략의 요구에 다가갈 능력이 없는 일꾼들을 포괄한다.
그러나 챨리는 바로 아직은 혁명의 외부에 있는,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프롤레타리아
를 형상화하기 때문에, 그 표상력은 엄청나다. 어떠한 사회주의적 작품도 아직은 그렇게 폭
력적으로, 또 그토록 관대하게 노동자의 굴욕적 조건을 표현해내지는 못했다. 어쩌면 브레
히트만이 늘 혁명 전야의 인간, 말하자면 아직은 몽매하나 그의 불행들이 (쌓이고 쌓여) 자
연적으로 도에 넘쳐 바야흐로 혁명의 불빛 쪽으로 나아가려는 외톨이 인간(l'homme seul)을
포착하려는 사회주의적 예술의 필요성을 엿보았을 뿐이다. 이미 의식적인 투쟁에 관여한,
대의(大義)와 당(黨)(la Cause et le Parti)에 포섭된 노동자를 보여주는 다른 작품들은 필
요한 정치적 실재를 보고하지만, 그것들은 심미적 힘들은 없다.
그런데 챨리는 브레히트처럼 대중에게 그의 몽매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무지와 그가 펼치는 구경거리를동시에 본다.
누군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그가 보지 않는 것을 강렬하게 보는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인형극에서는 어린이들이 인형 기뇰(Guignol)이 못 본 척 하는것을 기뇰에게 알려준다.
예를 들면 챨리는 그의 좁은 감방에서 교도관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곳에서 미국 중산계층의 이상적 생활을 누린다. 그는 링컨의 초상화 아래에서 다리를 꼬
고 신문을 읽는다. 그러나 이 근사한 자기만족의 자세는 그 허세가 완전히 드러난다. 이 자
기만족이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소외에 주목하지 않고 그곳에 피신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장 하잘 것 없는 애착(집착, englument)도 허사가 되고,
또 빈민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유혹이 차단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챨리-인간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 그는 온갖 것에서 벗어나고, 모든 몫(할당)도 거부하며, 결국 외톨이 인간에게만
마음을 쏟기 때문이다. 그의 무정부는 정치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예술에서는 분
명 혁명의 가장 효과적인 형태를 재현한다.
* 도미니치 혹은 문학(Litt rature)의 승리 (pp.50-53)
도미니치 소송의 전 과정은 어떤 심리관에 의거해 행해졌는데, 우연적이게도 이 심리관
은 보수문학의 심리학이다. 물적 증거들은 불확실하고 서로 모순되므로 사람들은 심적 증거
들에 호소하였다. 이 심적 증거들은 고소인들의 심성 속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취했겠느냐?
결국 사람들은 행동의 동기와 연결고리들을 일말의 의심도 없이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다. 이들은 발굴지의 네 모퉁이에서 낡은 돌들을 주워 모아 시멘트를 발라 세조스트리스 왕
의 제단을 세우거나, 보편적 지혜 ― 이 보편적 지혜라는 것도 사실은 제3 공화국의 학파들
속에서 다듬어진 지혜에 불과하다 ―의 토대들을 끌어들여 2000년 전에 죽은 어떤 종교를
재구축하는 고고학자들처럼 소송을 진행하였다.
늙은 도미니치의 심리상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진정 도미니치의 심리상태였던가? 이
점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심리는 재판장과 차장검사의 심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알프스 시골 노인의 심성과 재판관들의 심성, 이 두 심성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인가? 이
것보다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도미니치는 보편심리라는 이
름으로 선고를 받았다. 문학(Litt rature)이 부르주와 소설과 본질주의적 심리학이라는 매
혹적인 천상계에서 내려와 한 인간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차장검사의 말을 들어보자.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듯이, 잭 드뤼몽 경은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흉포한 사람에게 덤벼들어 그의 목을 조릅니
다. 그들은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갸스똥 도미니치에게는 누군가가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렸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갑작스레 자신을 억누르
는 이 힘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조스트리스의 사원이나 모리스 줘너브와(Maurice Genevoix)의 문학(Litt rature)처럼 그럴 듯 하다. 단지 "그래서 안될 게 뭐냐(Why not)"에 의거하여 고고학이나 소설의 토대를 정립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Justice)도 그러하냐? 주기적으로 몇몇 소송들은 ― 『이방인』의 경우처럼 반드시 허구적이지만은 않은 ― 늘 당신에게 예비용 머리를 빌려주어 당신이 유감 없이 선고를 받을 수 있도록 할 요량인 듯한, 또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아닌 '그러했음에 틀림없을 당신'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피고의 세계 속으로의 이러한 정의 (Justice)의 운송(運送)은 어떤 중개 신화 덕분에 가능한데, 그 종교재판은 ― 그것이 중죄 재판소의 형태이건 아니면 문학 토론회의 형태이건 ― 언제나 널리 쓰인다. 재판장은 ― 『피가로』지를 읽는 ― 무식한 양치기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않
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공히 동일한 언어, 그것도 가장 명료한 불어를 사용하지 않느냐?
근대적 교육의 놀라운 확신 ― 양치기가 재판관들과 아무런 장애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는
― 아닌가! 그러나 여기, 라틴어 독법(讀法)과 불어의 유식한 장광설로 가득한 위엄 있는
(괴상하고) 도덕 뒤에는 한 인간의 머리가 달려있다.
활용어들(langages)의 부조화, 침투할 수 없는 그 울타리들이 몇몇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강조되었으며, 지오노(Jean Giono, 1895-1970, 자연과 농부의 삶을 찬미)가 많은 예들을 제
시한 바 있다. 여기서 카프카의 오해나 신비한 장벽 같은 것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면, 당신은 다리에 갔습니까?( tes-vous all e au pont?) 산책로라고요?(All e?) 그곳에
산책로는 없습니다. 내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il n'y a pas d'all e, je le
sais, j'y suis t .) 물론 모든 사람들이 공식어가 공통의 의미를 지니며, 도미니치가
활용하는 언어는 통사론, 어휘 등이 결여된 괴상한 지역 변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척 한
다.
그렇지만 재판장이 사용하는 이 언어도 구체적 심리의 언어가 아닌(적어도 대다수의 사
람들이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이 그들에게 학습시킨 언어의 심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한), 비
현실적 편견들로 가득 찬 학교 글짓기 언어인 특수언어, 그래서 도미니치가 사용하는 언어
만큼이나 특별한 특수언어이다. 단지 두 특수성이 대적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는 명성과 법
과 독자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보편적인" 활용어가 때 마침 주인들의 심리에 새로운 활기를 주려 한다. 이
언어는 늘 타자를 대상으로 오인하게 하며, 동시에 타자를 묘사하고 선고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형용사의 심리학으로, 그 희생자들에게 속사(성)들만을 제공할 뿐이고, 유죄의 범주
― 이것은 사람들이 억지로 유죄의 범주 속에 들여놓은 것이다 ― 밖에 있는 행동에 대해서
는 아무 것도 모르는 심리학이다. 이 범주들은 고전 희극의 범주들이거나 필적학 개론의 범
주들이다: 허풍쟁이의, 화를 잘 내는, 이기적인, 음흉한, 음탕한, 냉혹한. 주인들의 눈에는
인간은 성격들(caract res) ― 성격들은 사회에게 인간을 다소 쉬운 동화의 대상으로, 다소
공손한 복종의 주체로 지칭한다 ―로써만 존재한다. 모든 의식상태를 괄호치는 이 심리학은
,그렇지만 행동의 토대는 사전(事前)의 내재성에 두어야 한다고 우기며, 또 영혼을 가정한
다. 이 심리학은 인간을 "의식(conscience)"으로 판단하며, 그를 먼저 하나의 대상으로 묘
사하는데 아무런 거북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 심리학이 ― 이 이름으로 사람들
은 당신의 머리를 잘도 자른다 ― 부르주와 스타일이라고들 하는 인간 다큐멘터리(Document
humain)문학이다.
도미니치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인간 다큐멘터리문학의 이름으로이다.
정의와 문학이 연합하여 그들의 옛 기법들을 교환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의
심오한 동일성을 드러내고 뻔뻔스럽게도 서로 공모한다. 고관의자에 앉아있는 재판관들 뒤
에는 작가들(지오노, 살라크루)이 있다. 기소대에 있는 사법관이란? (『르 몽드』가 차장검
사에게 부여했던 놀라운 찬사에 의하면) '눈부신 영감'과 '의심할 나위 없는 정신'을 타고
난 '비범한 이야기꾼'아니냐? 경찰도 여기서 자신들의 서체의 몫을 한다.
지방 경찰서장이 말하기를,
"나는 갸스똥 도미니치 보다 더 거짓말 잘하는 희극배우는 본 적이 없으며, 그보
다 더 의심 많고 익살맞은 이야기꾼도 본 적 없으며, 70 노인 치고 그보다 더 음흉하고 호
탕한 이도, 그보다 더 자신을 확신하는 폭군, 교활한 계산꾼, 기만적인 위선자는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갸스똥 도미니치는 인간의 영혼에 동물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놀라운 인물
입니다. 그는 위대한 대지의 허위 가부장제의 여러 얼굴, 아니 백 개의 얼굴을 가진 인간입니다."
여기서 그 늙은 양치기를 고발하는 것은 대조, 은유, 비약과 같은 온갖 고전 수사학
이다. 정의(正義)는 현실주의 문학과 전원 이야기의 가면을 취한다. 하지만 문학 그 자체는
새로운 인간 다큐멘터리를 찾으러, 피고와 용의자들의 얼굴에서 어떤 심리상태의 반영 ―
그렇지만 이 심리상태란 정의에 의해 처음으로 그에게 부과된 것이다 ―을 수집하러 법정에
왔다.
다만 비만문학(늘 실재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문학으로 주어지는)의 면전에는 찢김의
문학이 있으며, 도미니치의 소송 또한 이 찢김의 문학이다. 여기서는 실재를 갈구하는 작가
들과 빛나는 이야기꾼들 ― 이들의 눈부신 영감이 한 인간의 머리를 앗아가는 ― 뿐이었다.
피고의 유죄성의 정도가 얼마이든, 그곳에는 또한 우리 모두가 위협받는 공포의 스펙타클,
우리의 것으로 돌리는 활용어 외에는 듣고싶어하지 않는 어떤 권력에 의해 심판 받는다는
공포의 스펙타클이 있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도미니치, 살인자는 아니나 언어를 박탈당한 피고들, 혹은 더 심하게는 우리를 고발하는 고발자들의 언어 아래에서 덧씌워지고, 모욕을 당하며 선고를 받는 잠재적 도미니치이다. 한 인간에게서 바로 그 언어의 이름으로 언어를 훔치는 것, 모든 합법적 살인자들은 바로 이 언어절도로부터 시작한다.
* 장난감 (pp.58-60)
프랑스 어른들은 어린이(l'Enfant)를 또 다른 자기 자신으로 본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프랑스 장난감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장난감은 본질적으로 축소판 성인세계이다. 그것
들은 죄다 인간 물품들의 축소된 복제품이다. 마치 대중들에게 어린이는 작은 인간으로 밖
에, 그들의 규격에 맞는 물품들을 주어야 할 난쟁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창조된 형태는 아주 드물다. 손재주에 의거해 만들어지는 몇 가지 조립놀이만이 역동적
형태를 제시할 따름이다. 나머지 장난감들은 늘 뭔가를 의미하며(signifier toujours
quelque chose), 이 뭔가는 항상 전적으로 사회화된 것, 현대 성인 생활의 신화나 기술들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군대, 라디오, 우체국, 병원(축소된 의료기구 가방과 인형 수술실),
학교, 미용실(파마기), 공군(낙하산병), 교통수단(기차, 자동차, 모터보트, 스쿠터, 주유
소), 과학(화성인 장난감). 프랑스 장난감들이 성인들의 기능세계를 있는 그대로 예시하고
있다는 것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깊이 생각하기 전에 성인들의 기능세계를 모두 수용
하도록 분명하게 대비시키는 것일 뿐이다. 언제 어느 시대에나 줄곧 군인이나 우체부, 스쿠
터를 만들어낸 자연의 알리바이를 그들에게 구축하고 있는 이 장난감의 목록들은 전부 어른
들이 보고도 놀라지 않을 전쟁이라든가, 관료주의라든가, 추함이나 화성인들 같은 것들이
다.
그런데 포기의 기호는 모방보다는 모방의 완벽함에 있다. 프랑스 장난감은 지바로
(Jivaro)의 축소된 머리 같아서, 사람들은 거기서 사과 크기로 축소된 성인의 주름살과 머
리카락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줌누는 인형을 보자. 그것은 식도를 가지고 있으며, 사
람들은 그 인형에게 젖병을 물리고, 그것들은 기저귀를 적신다. 위장에 들어간 우유는 이제
곧 틀림없이 물로 바뀐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여자 아이들을 가사생활의 인과성에
대비시켜 장래의 어머니의 역할에 맞도록 조절할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를 충실하게 따르
는 이 복잡한 대상들 앞에서, 아이들은 단지 그것들의 소유자, 사용자가 될 수 있을 뿐 결
코 창조자가 될 수는 없다. 어린이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용한다. 사람들
은 어린이에게 모험도, 경이도, 환희도 없는 몸짓들을 채비해 준다. 사람들은 어린이를 성
인의 인과성의 탄성(彈性)들을 창조할 거리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빈둥거리는 어린 소유자
로 만든다. 어린이에게는 이미 만들어진 인과성이 제공된다. 아이는 단지 그것을 사용하기
만 할 뿐이며, 그 인과성을 꿰뚫기 위해 돌아다니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그에게 주어지
지 않는다.
조립놀이는 그것이 지나치게 정교하지 않다면 아주 다른 세계를 체험하게 해줄 수 있다.
어린이는 결코 조립놀이에서 뭔가를 의미하는 대상들을 창조하지 않으며, 이 대상들이 성인
의 이름을 가진다는 것에도 게의치 않는다. 어린이가 연습하는 것은 어떤 관습(un usage)이
아니라 조물주(조화의 신)이다. 그는 걸어 다니는 형태들, 굴러가는 형태들을 만들어 낸다.
어린이는 삶을 창조하지 소유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이 놀이에서 대상들은 그 자체로 움직
이지, 더 이상 사람들의 손아귀에 있는 무기력하고 복잡한 물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
우는 훨씬 드물다. 프랑스 장난감은 대개가 모방 장난감이라서 아이들을 사용자로 만들지
창조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장난감의 부르주와화는 전적으로 기능적인 그 형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재
료에서도 나타난다. 현재 유통되는 장난감은 자연의 재료가 아니라, 메마른 화학물로 된 재
료이다. 현재 많은 장난감들이 복합 성분들로 주조된 것들이다. 플라스틱 재료는 조야하면
서, 동시에 위생적으로 보인다. 플라스틱 물질은 기쁨, 부드러움과 같은 촉감이 주는 인간
성을 지워버린다. 목재는 그 견고함이나 정겨움, 그것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온기로 인해
가장 이상적인 물질인데도, 경악스럽게도 목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목재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유지하건, 예리한 모서리에 상처 입을 염려도 없으며, 금속의 화학적인 차가움도 없다.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놀다가 두드리더라도 진동하거나 삐걱거리지 않는다. 목재는 희
미하면서도 맑은 소리를 낸다. 목재는 아이를 계속 나무, 탁자, 마루와 접촉하게 해주는 친
근하고도 시적인 질료이다. 목재는 상처를 입히지도 않으며, 고장나거나 망가지지도 않는
다. 그것은 마모되면서 오래 지속되므로 아이와 함께 살 수 있으며, 대상과 그 대상을 다루
는 손과의 관계를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목재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마모되어 작
아지면서 사라지지, 고장난 용수철이 튀어 나와 못쓰게 되는 기계적인 장난감처럼 팽창하면
서 사라지지 않는다. 목재는 대상을 본질적이며 항구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오늘날에 는 이렇게 목재로 만들어진 장난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보쥬 산맥의 양치기들이 가지고 놀던 이런 장난감은 사실 상인들의 시대에나 가능했다. 그 시대 이후로 장난감은 질료
나 색이 모두 화학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화학적인 물질 자체는 기쁨의 전신감각이 아
니라 사용의 전신감각으로 안내한다. 게다가 이 장난감들은 매우 빨리 죽게되고, 일단 죽고
나면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사후 생이란 아무것도 없다.
* 가르보의 얼굴 (pp.70-71)
가르보의 얼굴은 군중들을 커다란 혼란 속으로 빠뜨린다. 그 얼굴은 사람들이 거기에 도
달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육체의 절대적 상태 같은 것을 구축한다. 몇 년 전에는
발렌티노(Valentino)의 얼굴이 자살을 불러 일으켰다. 가르보의 얼굴은 육체가 신비한 퇴폐
감을 조성하는 중세 기사도적 사랑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분명 훌륭한 대상-얼굴(le visage-objet)이다. "크리스티나 여왕 La Reine
Christine"에서 분장한 그녀의 얼굴은 흰눈이 두텁게 쌓인 가면 같았다. 그 얼굴은 그린 얼
굴이라기 보다는 회반죽을 칠한 얼굴, 선들로 방어된 얼굴이 아니라 색의 평면에 의해 방어
된 얼굴이다. 부서질듯 하면서도 조밀한 이 얼굴에서 이상한 과육처럼 까만, 그러나 표정이
라곤 없는 눈만이 가늘게 떨리는 두 개의 멍자국이다.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매끈하고 부서지
기 쉬운 것 속에 조각된, 말하자면 완벽하면서도 동시에 일시적인 이 얼굴은, 지고의 아름
다움을 지니지만 어두운 식물 같은 눈, 토템의 얼굴을 가진 챨리의 모습과 연결된다.
그런데 이 전체적 가면(예를 들어 고대의 가면)은 비밀이라는 주제(이탈리아 연극에 등
장하는 반-가면의 경우)를 함축하기보다는 인간 얼굴의 원형이라는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가르보는 플라톤적인 인간의 이데아같은 것을 보게 해주며, 바로 이것이 그녀의 얼굴이 거
의 중성적이면서도 미심쩍게 보이지 않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이 영화가(여기서 크리스티나
여왕은 교대로 여자였다가 젊은 기사였다가 한다) 성별 공유의 여지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르보는 이 영화에서 어떤 성전환도 행하지 않는다. 그녀는 늘 자기 자신으로 있으
며, 위장하지 않고 자신의 왕관이나 커다란 펠트 모자를 쓰고 언제나 눈처럼 희고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성녀라는 그녀의 별명은 지고의 아름다운 상태를 표현하기보다는 하늘에
서 내려온 육체적 인간의 본질(l'essence de la personne corporelle) ― 여기서는 사물들
이 가장 명료하게 형태를 지니며 완성되어 있다 ―을 표현하려는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여배우들이 아름다움이 성숙해 가는 불안한 과정을 대중들이 보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가르보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본질은 품위가 손상되어
서는 안되었다. 가르보 얼굴의 실재성(realit )은 다름 아니라 조형적 완전함은 물론 지적
완전함의 실재여야만 했다. 본질(l'Essence)은 안경과 모자와 유배로 점점 가리워져 차츰차
츰 희미해졌으나, 결코 변질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신격화된 얼굴에서 가면보다 더 뚜렷한 어떤 것의 모습이 나타난다. 콧구멍의
곡선과 눈썹의 곡선 사이에 자발적 관계, 따라서 인간적 관계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이것
은 얼굴의 두 부분 사이의 드문, 개인적 어떤 기능이다. 가면은 윤곽들의 合일 뿐이고, 얼
굴은 무엇보다도 윤곽들 각각을 주제론적으로 불러온다. 가르보의 얼굴은 이 불안정한 순간
을 재현한다. 영화가 본질적 미(美)에서 실존적 미를 추출하는 순간, 원형이 소멸할 얼굴들
의 매혹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육체적 본질의 명료함이 여성의 서정에 자리를 양보하려
는 순간.
전환의 순간인 가르보의 얼굴은 외경에서 매혹으로의 이행을 보장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변화의 다른 극에 서 있음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오드리 햅번의 얼굴은 개인화된 얼굴
인데, 단지 그녀의 특수한 주제(어린아이-여인, 고양이-여인)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
녀의 인물, 그녀의 얼굴에만 유일한 독특성으로 인해서이기도 하다. 이 얼굴은 이제 더 이
상 어떤 본질적인 것도 지니지 않으며, 무한히 복합적인 형태적 기능들에 의해서만 구성된
얼굴이다. 언어로 본다면, 가르보의 독특성은 개념적 질서의 것이고, 오드리 햅번의 독특성
은 실체적 질서의 것이다. 가르보의 얼굴이 이데아(Id e)라면, 햅번의 얼굴은 사건
(Ev nemen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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