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롤랑 바르트

[스크랩] 스투디움과 푼크툼

ddolappa 2008. 12. 5. 23:33

 

 

구칸이형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이런 사진들을 볼 때마다 사진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름자나 들어 보았을 [ 롤랑 바르트 ]  개념까지.......ㅠ.ㅠ 솔직이 이야기 하면 이 글을 읽고서야 누구냐고 알아 봤습니다. 뿐입니까 저 말들은 도대체 무신 말들인지.....에쿵 무식한 돌탱이...........ㅠ.ㅠ

 

 

[출처] 동네 : 할머니와 아이|작성자 방물장수

 

살 날이 얼마 안남은 늙은이가

이제 막 삶을 시작하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밀어주는 것은

뭔가 뭉클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이의 사이에는 밥을 위한 폐품 신문지 쪼가리가 자리잡는다.

 

롤랑 바르트의 개념의 인용.

그의 유언적인 저작 '카메라 루시다'에서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좋게 만드는 사회적 문화적 미학적 요소는 스투디움으로

개인적으로 마음을 끄는 사소한 얼룩적인 요소는 푼크쿰으로 구분 짓는다.

여자를 예로들면 누가 보아도 유려하고 아름답운 생김과 자태가 일종의 스투디움이라면

푼크쿰은 나만이 알고 있는 그녀 눈가의 주름, 미세하게 기울어진 걸음걸이 같은 것이랄 수 있겠다.

우리가 누군가에 애정을 품을 때,

흔히 결점으로 생각되는 요소(푼크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위 글 중 푼크쿰은 아마도 푼크툼이 아닌가 싶은데요.. 책과 책에서 나온 위 두 개념에 대해 잠깐 정리해봤습니다. 人物外傳에는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 여기 저기 글들을 편집해서 올렸습니다.~~~에휴 힘들어............

 

[ 카레라 루시다 ] 혹은 [ 밝은 방 - 사진에 관한 노트 ] 

롤랑 바르트의 1980년에 쓰여진 저작으로 원제목은 《밝은 방: 사진에 대한 노트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Paris 1980  이다. 국내에서는 조광희와 한정식님에 의해서 번역되어 열화당 에서 1986년, 1998년 출판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동문선에서 [밝은 방 - 사진에 대한 노트 ]라는 제목으로 김웅권 님이 번역하여 출간되었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저작으로 알려진다. 아래 글은 이 책에 대한 번역자 김웅권 님의 글이다.
 

본서는 바르트가 《카이에 뒤 시네마》지의 요청과 어머니의 타계를 계기로 사진에 대해 펼쳐낸 단상들을 일관된 구도에 따라 담아내고 있다. 현대인은 이미지의 가공할 무차별적 융단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이미지가 소비의 대상이 되어 범람하는 이 시대에 기호학자 바르트의 사진론은 사진계에 이미 중요한 고전처럼 현실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사진에 대한 바르트의 분석은 일정한 한계를 전제하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든다면 우선 그것은 ‘촬영자’의 입장을 거의 배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진가를 다분히 환원적이고 ‘도구적’ 역할로 축소시키고 있다. 저자가 선택한 관점은 ‘구경꾼’, 다시 말해 사진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자의 것이기 때문에 ‘전문가’와 ‘아마추어’ 사이의 갈등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사진의 본질을 공적인 사진들보다는 사적인 사진들에서 찾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지의 변형이나 창조를 ‘기만’의 차원에 위치시킴으로써 논란의 불씨를 내재시켜 놓고 있다. 세 번째로 바르트는 자신의 개인적인 비극사, 즉 어머니의 죽음을 중심으로 사진의 본질을 논구함으로써 사진을 사라진 존재, 즉 “그것은 존재 했다”는 과거 현실과의 관계, 혹은 시간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사진가의 창조적 측면은 거의 도외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 본서는 사라진 존재와 관련된 부재의 슬픔과 부활의 시도를 담아낸 ‘사랑의 텍스트’라 규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에서 독자는 바르트의 대가다운 지적 통찰을 풍요롭게 만날 수 있다. 그는 “실존적으로 결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되풀해 보여주는” 사진이 ‘고유한 정수(精髓)’, 곧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 특징상 그것은 다른 ‘이미지 집단’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이해하기 위해 그 어떠한 학문적․언어적 담론으로부터도 벗어나 사진의 대상․인물로부터,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진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나’에게 오는 주관적․정서적 감동을 검토하기 위해 다소 현상학적 방법을 빌리고 있음을 밝힌다.

바르트는 사진을 ‘촬영자’(사진작가), ‘구경꾼’(사진을 바라보는 자), ‘유령’(사진찍힌 대상이 발산하는 환영적 이미지)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자신이 사진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첫 번째는 배제하고 나머지 두 관점, 특히 구경꾼의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하면서 사진을 “나는 좋아한다(I like)/나는 사랑한다(I love)”와 같은 정서의 차원에서 검토한다. 그러니까 그는 사진이 어떻게 감정을 폭발시키는지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이로부터 나온 두 개의 개념이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다. 전자가 ‘나는 좋아한다’와 연결된다면, 후자는 ‘나는 사랑한다’와 연결되면서 둘은 강밀도와 질적 차이를 나타낸다. 전자가 사진에서 교양적으로 정보․재현․놀라움․부러움의 감정을 일으킨다면, 후자는 나를 정신적으로 찌르고, 상처를 주며, 타박상을 입힌다. 사진에서 감정을 촉발시키는 이런 두 특징적 요소/개념들에 연극과 접근되는 죽음의 직관이 덧붙여진다.

이어서 바르트는 스투디움이 표현되는 여러 양상을 고찰하고, 푼크툼이 없는 ‘단일 사진’들을 중심으로 사진이 주는 여러 놀라움들, 우연과 마스크가 각인된 사진의 의미와 사유 촉발의 문제,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머니의 육체와 결합되는 풍경 사진 등을 다룬다. 또 그는 스투디움-푼크툼의 관계에서 구경꾼과 사진작가의 역할을 보다 심층적으로 조명하고 푼크툼을 위한 침묵을 영화를 끌어들여 언급한다. 결국 푼크툼은 스투디움적인 포르노의 욕망을 넘어선 에로티시즘의 욕망이 위치하는 차원에 자리잡는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와 같은 욕망의 차원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두 개념을 중심으로 펼쳐진 사진론이 결국 피상적이라고 결론짓고 ‘취소의 변’을 늘어놓는다. 이상이 본서의 제1부를 구성하며 제2부부터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 사진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진의 본질을 향한 새로운 탐험의 여정을 떠난다.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을 발견하는 과정을 타계한 어머니의 사진들을 정리하는 작업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어머니의 어린시절 사진인 〈온실 사진〉에서 이 본질과 마주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진 인물의 환원 불가능성, ‘그것은-존재-했음’, 시간에 관한 확인으로서 사진의 의미, 시간의 정지, 사진과 죽음, 사진에서 닮음과 분위기와 같은 테마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전개하면서 사진의 본질을 주조해낸다. 결국 진정한 사진은 한편으로 “그것은 존재했다”라는 노에마의 현실과, 다른 한편으로 부동의 영혼을 담아내는 분위기를 나타내는 “바로 이것이다”의 사토리 같은 진실을 결합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바르트는 결론으로 사진의 본질과 광기의 관계를 다룬다. 영매로서, 새로운 환각의 형태로서 사진은 ‘현실의 문질러진 광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며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광기를 다스리기 위해 사회는 한편으로 사진을 예술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일반화․평범화시키고 증식시켜 군서적으로 만든다. 이미지의 폭주 속에 광기를 잠재우는 것이다. 사진은 그것의 사실주의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에 따라 광기 혹은 현명함의 두 갈래 길로 유도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역자가 간단하게 제시한 대략적 윤곽은 바르트의 사유가 지닌 깊은 울림을 담아내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다만 독자에 대한 역자의 기본적 도리로서 제시된 것에 불과하다. 분량이 많지 않은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바르트와의 직접적인 만남의 장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 지적 모험을 끊임없이 떠났던 바르트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내놓은 마지막 작품이 《밝은 방》이다. 쾌락주의자적인 면모가 강했고, 텍스트의 ‘즐거움’과 ‘즐김’의 마야(환상) 놀이를 통해 유물론자의 위상을 드러냈던 바르트에게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 상실의 아픔 속에서는 마야의 놀이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가 보다. 인도의 종교에서 빌린 이 ‘마야’라는 단어가 바르트의 저작들에 자주 등장했음을 기억하는 역자에게 본서는 그가 살고 있었던 정신적 지대를 생각하게 한다. 문학 텍스트 속에서 전개되는 사랑의 갈등, 이별의 슬픔, 죽음의 드라마 등을 마야의 놀이로, ‘즐김’과 ‘즐거움’의 생산적 유희로 변모시켰던 그의 글쓰기를 상기할 때, 그는 자신의 현실과 관련해서 겪는 고통을 어느 정도 마야의 그물 속에 던질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게 어머니의 초상을 통한 사진의 본질 찾기인 것 같다. 그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1976-1978)를 위해 준비한 노트가 묶여 출간된 책들인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김웅권 역, 동문선, 2004)와 《중립》(김웅권 역, 동문선, 2004)을 보면 그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폭넓은 지적 유희를 하면서 동양의 불교나 도가 사상 등에 깊은 관심 ― 물론 《기호의 제국》을 상기해야 한다 ―을 보이고 있다. 이런 관심은 지적 놀이의 차원을 넘어서 그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탈바꿈시켰을까? 감각론자․유물론자로 통하는 바르트의 진정한 종교적 사유는 어디에 자리잡고 있을까? 그는 ‘마야의 놀이’, 곧 패러다임을 통한 의미의 생성적 유희가 전개되고 굴러가도록 하기 위해서 비극을 비극으로 연기해내는 마스크를 써야 했을까? 비극 혹은 운명, 그것의 인식과 감내를 담보할 때에만 인간은 예술을 향유하고 의미를 창출하는 문화의 놀이를 고도하게 펼쳐낼 수 있다. 한 예술가가 어머니의 초상 앞에 바치는 추도사 같은 애도적 울림이 들려오는 본서에서 사진의 ‘진실 찾기’는 종교적 차원을 지닌 명상의 공안(公案)과 같다 하지 않을까.

본서는 이미 다른 역자들에 의해 국내에 번역되어 다른 제목으로 두 권이 이미 나왔다. 하나는 《카메라 루시다》(조광희 역, 열화당, 1986)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론 : 바르트와 손탁》(송숙자 역, 현대미학사, 1994)이다. 필자가 번역하면서 참고한 것은 전자이고 이로부터 도움도 받았음을 밝혀둔다.
                                                                                                         역자 김   웅   권 


 

 스투디움과 푼크툼 ( studium and punctum )

 바르트는 사진을 라틴어를 차용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 (punctum)으로 나누었다.  라틴어로 스투디움이라는 것은 study , studio 등의 뜻을 보면 알 수 있듯 연구가 수행되는 공간으로서의 연구소를 의미하며 푼크툼이라는 것은 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코드화 되고 일상적인 것을 예를 들어 어떤 사진속의 여인이 아름답다든지 하는 정보에 관한것이라 든지 이런것을 스튜디움이라 하였고 코드화 될수 없는 사진의 어떤 작은 요소가 자기의 마음을 찌르는것 , 작은 구멍, 작은 반점 , 작은 흠을 푼크툼이라 했다고 한다. 바르트는 위 저작 [ 밝은 방 ] 에서 스투디움을 전반적인 정보나 넓은 개념 또는 별 감흥이 없는 일상적인 흥미로 규정하고 푼크툼은 이러한 일상적인 흥미가 아닌 무방비 상태의 나 자신이 찔리는 적나라함이나 아주 세부적인 대상을 향한 자신의 격렬한 반응이나 하나의 섬광이라 표현하였다.   

 

 

 

출처 : Bigstone Kang
글쓴이 : 돌탱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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