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로운 변화들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겠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문화연대)는 올 초부터 한국 대중음악 개혁을 위한 정기포럼을 준비하면서, 그 첫 번째 개혁과제로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다. 당초에 국회공청회를 통해서 문제의 사안들, 예컨대 순위프로 선정방식의 불공정, 대중음악의 일부 장르독점, 방송사와 기획사의 결탁관계, 공중파방송의 문화권력들의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방송사에 대안제시 및 필요한 압력을 넣는 정도로 운동을 마무리할 생각이었지만, 예상밖에 일이 커져 지금은 거리서명운동, 라이브공연 방송사 항의시위를 포함한 음악소비자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운동이 확대된 데에는 당초에 문화연대에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일반 음악팬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일반 음악팬들 중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분들은 대부분 팬클럽 회원들이다. 국회공청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서태지 팬클럽 회원들의 연락을 받고 함께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으며, 이후에 와 일부팬클럽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들의 공연과 계약문제와 관련하여 저간의 사정에 대한 도움 요청이 들어왔다. 국회공청회가 끝나고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의 후속작업만이 아니라 여타의 대중음악 개혁과제들을 이슈화하는 과정에 일반음악팬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히자는 제안이 있었고, 이를 위해 ‘대중음악개혁을 위한 연대모임’(대개련)을 만들게되었다. 현재 서태지팬클럽 중에서 ‘태지매니아’ 뿐 아니라 6개 통신동호회 연합모임인 ‘이승환팬클럽’, ‘조용필팬클럽’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 자발적으로 대중음악개혁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개련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2개월 동안 주말마다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를 촉구하는 거리서명운동을 벌였는데, 한마디로 이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태지매니아 팬클럽의 몇몇 친구들은 거리서명운동 이외에도 대학가를 찾아다니며 서명운동을 벌였고, 한 여고생은 학교친구들과 친지들을 총동원해서 혼자 1,600여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지역의 팬클럽회원들은 독자적으로 거리서명 운동을 조직하고 온라인을 통해서 받은 서명용지를 개별적으로 다운받아 1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해서 현재 모은 서명자수가 4만 명이 넘는다.
이 운동을 통해 나는 팬덤문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생각을 갖게되었다. 첫째, 우리 시대의 팬덤은 하나의 ‘문화현상’에서 ‘문화실체’(cultural entity)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 둘째, 팬덤문화는 그 안에 다양한 문화적 취향과 차이들이 있다는 점, 셋째, 팬덤문화는 스타-팬 사이의 획일화된 종속관계를 스스로 거부하며 자생적인 문화실천을 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팬덤문화는 이중적인 문화자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2. ‘문화실체’로서의 팬덤
팬덤(fandom)은 특정한 스타나 장르를 선호하는 팬들의 자발적인 모임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중문화에 다양하게 퍼져있는 뮤지션, 배우, 서사물, 장르들을 선택하여 자신들의 문화 속에 수용하는 대중문화의 일반적인 ‘문화현상’이다. 팬덤은 스타덤(stardom)이 주로 대중문화 속의 스타들이 동시대 문화유행을 주도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스타들이 만든 스타일과 취향들을 자신들의 선택과 기호에 맞게 재가공하여 팬들 스스로가 스타를 매개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자발적인 문화형식을 창출해 낸다. 따라서 팬덤의 형성에 있어 스타덤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며 때로는 스타덤과 독립해서 독자적인 문화현상들을 만들어 낸다. 일례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했을 때, 그들을 열광적으로 선호하던 팬들은 ‘서태지기념사업회’를 결성하여 스타의 은퇴와는 무관하게 자발적인 활동을 해왔고, 서태지가 컴백한 이후에도 일부 서태지 팬클럽조직들은 ‘서태지없는’ 서태지팬덤을 자임하고 있다고 말한다.
팬덤은 스타(혹은 서사물)의 취향과 기호들을 선호하여 목적의식적으로 결합된 특정한 팬들의 조직을 생산하지만, 그러한 집단적 활동을 통해 형성되는 문화현상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벌어졌던 팬덤문화 현상들은 스타에 대한 팬들의 지나친 직찹증세나 스타의 일상에 대한 과도한 대응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사건에 스타들이 개입되어 있거나 스스로 개입하는 사실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팬덤문화 현상들은 거의 대부분 팬들 스스로 만든 것들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작년 11월 20일에 최고의 아이돌 댄스그룹인 의 리드보컬인 강타가 음주운전에 뺑소니 사고를 내고 경찰에 조사를 받은 날 아침, 소식을 전해들은 열혈팬들은 필사구명의 사명을 띠고 강남경찰서 앞에 수 백명이 몰려들었는가 하면, 강타를 구해내기 위해 경찰서 홈페이지를 순식간에 마비시켜 버린 일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채 강타의 팬들은 자신들의 우상인 강타의 신체를 속박한 공권력에 적개심을 드러낸다. “우리 오빠 매도하지 마세요”. “음주운전이 뭐가 그렇게 나쁜가요” “강타오빠를 대통령으로” 등등.
이 사건에 대해 의 소속매니저사인 SM기획측은 이성을 잃은 팬들의 이러한 집단적인 행동이 나 강타에게 오히려 좋지않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며 팬들의 자제를 촉구했다. 한편 올 초에 가 한동안 주춤한 사이 최고의 아이돌 댄스그룹으로 등장한 의 한 맴버 가족과 팬들을 상대로 경쟁팬 클럽 회원의 연쇄 독극물 테러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내용인즉은 경쟁 팬클럽이 의 급부상에 시기한 나머지 한 맴버의 어머니에게 독극물이 든 음료수병을 배달했고, 텔레비전 녹화장에 모인 팬에게도 전달되었다는 것인데 경찰 조사결과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이 인기증폭을 노린 기획사측의 의도적인 자작극이 아니면 팬클럽의 내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어쨌든 실제 사실이 과장되고 확대되어 하나의 사건처럼 포장되는 이면에는 스타의 행적과는 무관하게 대단히 상징적이고 집단적으로 사실을 해석하는 팬들의 무의식이 존재한다. 문화현상으로서의 팬덤은 이렇듯 팬들 스스로가 사건의 주체가 되고 사건의 사회적 의미작용들을 생산한다.
그러나 팬덤의 사회적 의미작용들은 하나의 일시적인 문화현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팬들과 팬덤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매스컴과 부모세대의 여론들은 팬들이 일으킨 사건들을 대체로 일시적인 사회병리현상의 한 형태나 다른 사회적 모순구조로 환원해버리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예컨대, 90년대 초반 미국의 아이돌 스타였던 <뉴키즈언더블록>(New Kids on the Block)의 내한공연 시에 10대 소녀 하나가 공연장에서 압사당한 사건이나, 일본의 록그룹 의 맴버였던 히데가 자살하고 난 후에 10대팬들이 동반자살한 경우나, 공연 중 무대에서 부상을 당한 희준을 보고 공연장에 있던 일부 팬들이 기절을 하는 사건들에 대해 매스컴과 여론은 이해할 수 없는 사회병리현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으로 비판적 사회학자들은 10대팬들의 이러한 현상들을 입시교육, 가부장제, 가정불화 등 그들이 처한 사회적 모순들을 해소하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읽어내려고 한다.
팬들이 야기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그들을 비행성 병리현상으로 직접적으로 질타하건,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들을 비판하건 모두 팬덤을 일시적인 문화현상으로 간주한다. 전자의 비판은 사회적 모순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팬들의 집단적인 광기와 파시즘에서 모든 병리현상이 비롯된 것으로 보는가하면, 후자의 비판은 사회적 모순들을 팬덤의 외부에서 찾아 마치 그것이 해소되면 팬덤의 문화현상은 없어지게 되는 것처럼 본다. 그러나 팬덤은 팬덤 내부의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나 외부의 사회구조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팬덤의 외부와 내부의 교차, 상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의 교차, 욕망과 이데올로기의 교차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팬덤은 자의적이고 일시적인 문화현상, 말하자면 허구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자생적인 물질적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외부의 구조에 의해 조작되기보다는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과 선택을 결정한다.
팬덤의 문화현상은 대체로 집단적으로 호명당한 이데올로기이며, 일종의 상징적 최면술에 의해 확대되고 조정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팬덤의 집단적 조직화는 그런 점에서 군중심리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해석처럼 이해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팬덤은 하나의 문화현상을 넘어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팬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며, 일정하게 문화적인 파급효과를 생산한다. 팬덤은 동시대의 문화적 스타일과 취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사회적 환기를 불러일으켜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고, 특정한 형태의 문화자본의 흐름을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3. 구별짓기로서의 팬덤문화
팬덤문화는 공식문화, 지배문화, 혹은 부모세대 문화와 대별되어 비공식문화, 종속문화, 하위문화적 형태로 분류되곤 한다. 팬덤의 사회적 파급효과를 미루어볼 때, 팬덤문화가 대중문화에서는 지배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러한 구분은 대체로 고급 대 저급, 부모세대 대 자녀세대, 본격문화 대 일상문화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이분법에 의하면 팬덤문화는 부모세대 문화, 고급취향의 문화, 본격장르예술의 문화와 대립되는 어떤 동질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팬덤문화는 하나의 동질적인 문화로 변별하기에는 그 안에 수많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한다. 심지어 팬덤문화 안에는 일반적으로 대립되는 부모세대나 지배적인 기성세대의 문화적 속성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영국의 문화연구자 존 피스크(John Fiske)는 팬덤문화 내부의 차이에 대해 “차별”(discrimination)과 “구별”(distinc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한다. 피스크는 팬들은 예민한 차별성을 갖고 있어 팬덤의 안과 바깥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주) 그는 팬덤의 차별에는 스타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과 체험들을 의미화하는” ‘사회적 차별’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이 좋아하는 작품들을 다른 작품들과 위계질서적으로 차별화하려는 ‘미학적인 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주) <<존 피스크, 「팬덤의 문화경제학」, 박명진 외 편역, ꡔ문화, 일상, 대중ꡕ, 한나래, 1996, 192쪽.>>
차별이 팬덤의 내부와 외부를 구획하려는 전략이라면, 구별은 팬덤 내부의 차이를 구별짓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팬덤은 추상적으로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들을 변별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볼 수 있지만, 팬덤의 주체들 내부에도 이미 세대적 구별짓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조용필, 이문세, 이승환을 비롯해 386세대 출신 이상의 뮤지션들의 팬들은 , , <핑클>과 같은 소위 아이돌 스타팬들과 정서적인 차이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세대적인 구별짓기는 단순한 연령의 차이만이 아니라 그 세대가 살아온 사회적, 역사적 정체성의 차이이기도 하다. 또한 팬덤 내부에서도 양적인 구별짓기만이 아니라 질적인 구별짓기가 이루어진다. 일례로 서태지팬들은 양적으로 20 만명의 팬클럽회원을 보유한 팬들과 비교할 때, 일종의 선민의식, 엘리트의식을 표명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요즘 아이돌 스타들은 서태지의 유산의 일부라는 의식이 지배적이고, 따라서 질적으로 서태지를 능가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나머지 아이돌 스타들의 팬조직들을 아류로 일별하게 만든다. 팬덤의 구별짓기는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의 구별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예컨대 아이돌 스타들의 팬들이 대부분 10대 소녀들에 의해 조직화되었다면, 축구서포터즈 그룹들은 대부분 장년남성들에 의해 조직화되었다. 물론 국내 축구 서포터즈 그룹들의 구성원 중에서 10대 소녀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만(국내 서포터즈문화는 부분적으로 신세대축구스타들에 대한 팬클럽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통적으로 남성 노동자계급들이 주축이 된 서구의 축구서포터즈 문화는 남성적인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팬덤의 구별짓기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스타일과 취향을 통해서이다. 팬덤문화에는 서로 다른 팬덤문화와 구별지으려는 기호체계를 가지고 있다. 취향과 스타일로서의 기호체계는 자신들의 독특한 언술행위뿐아니라 머리모양이나 화장술 옷이나 악세서리의 선택에서 구체화된다. 일례로 축구 서포터즈들은 서로 다른 응원방식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서포터즈 그룹들은 주로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성을 표상하는 청바지스타일에 강력한 합창을 무기로 하는 반면, 네델란드 서포터즈들은 전통의 오렌지색 상의와 다양한 형태의 모자를 쓰고 트럼펫을 이용한 연주응원이 돋보인다. 이에 비해 이탈리아 서포터즈들은 대형깃발과 구호가 적힌 긴 플래쉬 손수건, 스탠드를 환하게 밝혀주는 폭죽을 즐겨 사용하며, 브라질 서포터즈들은 타악기에 삼바춤으로 유명하다. 또한 <섹스피스톨즈>(Sex Pistols)와 <크래쉬>(Clash)의 음악을 좋아하는 펑크족들은 찟어진 청바지, 메탈자켓, 체인 등으로 거칠고, 공격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반면, 데이빗 보위를 좋아하는 글램족들은 양성애적인 헤어스타일과 의상에 짖은 화장을 즐겨한다. 한국에도 서태지팬클럽들은 노란색 손수건을 애용하며, 팬클럽들은 파란색 풍선을, 는 하얀색 풍선을 상징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팬덤문화에서 스타일과 취향의 구별짓기는 팬덤 주체들 내부의 반감과 적대의식들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팬덤주체들이 외부의 사회적 행위에 대한 상징적 위용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70년대 영국의 펑크족들의 공격적인 스타일들은 동시대 청년하위문화 그룹들인 테디보이나 글램족들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면서 부모세대들에 대한 상징적인 불만으로 표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펑크족의 스타일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불일치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펑크족들은 가슴에 ‘나치십자상’(swastika)을 달고 다녔는데, 사실 이들은 가장 인종차별주의가 심했던 나치즘과는 다르게 흑인문화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나치의 십자상을 패용하고 다니는 유일한 이유는 나치체제를 혐오하는 영국부모세대들에게 밉게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팬덤문화의 스타일이 단순히 불만과 소외의 표시가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자신들의 표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딕 헵디지는 청년하위문화의 스타일의 잠재적 기능이 “부모문화에서 드러나지 않고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있는 모순들을 마술적으로나마 표현하고 해소하려는 것”*주1)이라고 말한 필 코헨과는 다른 입장을 가진다. 그는 펑크족이 학교와 직장, 가정과 계급의 현실들을 스타일을 통해서 지시한다해도 언제나 상징적인 행위의 새로운 순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것이 부모세대들의 문화뿐아니라 자신들의 문화경험과의 단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펑크의 복장들은 “경험된 모순들을 마술적으로 해결했다기보다는 모순의 경험 그 자체를 시각적 익살(구속복장, 찢어진 청바지, 안전핀, 포고, ECT 헤어스타일 등)의 형식으로 표상한 것”*주2)이라고 말한다.
*주1) <<필 코헨, 「하위문화갈등과 노동계급 공동체사회」, ꡔ하위문화는 저항하는가ꡕ, 이동연 외 편역, 문화과학사, 1998, 33쪽.>>
*주2) <<딕 헵디지, ꡔ하위문화: 스타일의 의미ꡕ, 이동연 역, 현실문화연구, 1998, 166쪽.>>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팬덤의 스타일은 사회적 행위에 대한 상징적 위용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팬덤문화에서 스타일과 취향의 구별짓기가 사회적 차별에 대한 상징적 보상행위로 기능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예컨대 스타들이 즐겨입는 복장들을 팬들이 길거리에서 입고 다닐 때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되는 과정에서 평상시보다 더 많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팬들은 그러한 의미들을 사회적으로 유통시키려 한다.*주) 10대 소녀팬들이 스타들의 앨범뿐 아니라 브로마이드나 악세사리 구입에 집착하는 이유도 한편으로는 팬클럽 내부의 정보와 결속력에 소외당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자산의 부족을 스타들의 기표의 복제품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상징적 행위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팬덤의 문화는 그 안에 다양한 감수성의 차이와 사회적 구별짓기를 위한 다양한 표현행위들이 존재한다.
*주) <<존 피스크, 앞의 글, 197쪽.>>
4. 팬덤주체들의 자생적 문화실천
이제 다음의 두 사건들에 주목해보자.
사건 1. 강타의 음주운전 사건의 여파와 팀의 일원인 재원의 부상에 따른 공연연기, 토니안의 재계약 불투명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인기절정의 댄스그룹 가 해체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의 홈페이지 <클럽 HOT>의 회원들은 지난 3월 17일 SM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앞에서 HOT 해체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2,000여명이 참여한 이날 집회에 10대팬들은 가 계약관계나 음반판매 인쇄수입 등에 소속사인 SM 기획사에 상업적으로 이용당해왔으며 의 해체설도 이러한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라며, SM기획사에 강력히 항의했다. “우리는 가수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며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SM기획사에 강력히 항의한다.” 그러나 마침내 지난 5월 13일 의 일부 맴버들이 소속사인 SM사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의 영생을 믿는 10대 소녀팬들 수백명은 이날 SM 기획사에 몰려가 SM사의 상업적 횡포에 다시 한번 항의하며 의 재결합이 관철이 안되면 집단적으로 화염병과 각목 시위도 불사하겠다고 결의했다.
사건 2. 독극물 사건이 있고 난 직후 전국순회 공연 중 마지막 장소인 잠실체육관이 폭설로 지붕이 가라앉자 기획사 측에서 서울콘서트를 잠실주경기장으로 이전하고 공연 횟수도 한 회로 제한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에 대해 ‘ 공연 잠실주경기장 개최 반대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팬들은 공연장소를 다른 곳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고, 만일 원래대로 강행할 경우 관람료 차등제와 완벽한 공연시설 보장을 차선으로 요구했다. 이들은 서명운동과 신문광고 등을 통해 팬이자 음악소비자로서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고, 비록 장소 변경을 이루어내지는 못했지만 기획사로부터 내실있는 공연환경 보장 등 일부 요구들에 대한 답변을 이끌어 냈다.
소위 부정적인 사회병리현상을 낳는 주범으로 몰렸던 와 팬클럽들은 자신들의 스타를 거느리고 있는 기획사들에게 전면대응을 불사했다. 이들의 새로운 집단적 행동들은 오히려 스타를 보위하려는 대단히 이기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기획사의 횡포, 공연문화의 내실화, 새로운 팬소비자 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스타와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팬덤문화의 자생적 실천을 암시해주고 있다.
최근 1-2년 사이에 팬덤문화의 자생적 실천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작년 초에 프로야구 선수협의회가 결성되고 KBO와 각구단주들로부터 심한 협박을 받았을 때 순수한 프로야구 팬들은 ‘팬들의 선물’이란 팬클럽을 만들어 선수들의 갖은 뒤바라지를 했으며, 올 초 일부 기독교단체들이 성남일화축구단을 사이비종교운운하면서 성남연고지 철회를 요구하고 성남시가 이를 받아들이는 사태가 있었을 때, 성남일화 서포터즈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성남축구단 사수운동을 벌였다. 또한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한국 대중음악 개혁을 위해 서태지와 이승환 팬클럽 등이 주축이 되어 <팬덤연합체>를 결성하고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와 공연문화활성화를 위한 팬덤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팬덤연합체는 앞으로 대중음악에 행사되는 방송사의 지나친 권력을 해체하고, 공연문화활성화를 위한 제도개선 등의 운동을 펼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서태지 팬클럽들이 가요음반 사전심의제도 철폐에 앞장서서 결국 사전심의 제고를 철폐시켰고, 시애틀 그런지의 대표적 밴드인 <펄잼>(Pearl Jam)이 주도한 미국의 독점예매사 ‘티켓 마스터’ 반대행동에 절대 다수의 팬이 참여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팬덤의 자생적인 문화실천은 팬덤 내부의 차이와 적대관계들에 불구하고 팬덤문화의 선택적 연대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을 마련해 준다. 팬덤조직들은 인원조직력이나 결속력에 있어 상당한 운동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팬덤문화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문화운동, 문화소비자운동으로 이행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해하고 있는 것이다. 팬덤주체들은 그동안 팬클럽들간의 지나친 경쟁의식과 반복관계를 조장하게 만든 것은 팬클럽 내부 때문이 아니라 우리 문화환경의 잘못된 시스템, 요컨대 상업적 기획사의 횡포와 방송사의 지나친 시청율경쟁주의, 그리고 언론의 과대포장된 미디어효과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요순위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끝임없이 팬클럽들을 적대관계에 몰아넣는 방송사의 편성권력과, 팬덤과 관련된 사건이 터지면 마치 그것이 사회병폐현상의 온상인 것처럼 과장보도하는 언론들의 속물저널리즘, 그리고 팬들의 인기유지의 볼모로 이용하는 기획사의 상업적 전략이 결국 팬덤문화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거세하게 만들었다는 지적들은 일리있는 말이다.
팬덤문화의 자생적 실천이 거세당하거나 왜곡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아직 우리사회에서 팬덤문화가 본격적인 문화운동이나 문화소비자운동으로 확대되지 못한 내재적인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류공식문화의 일정한 거부감이 반영되기도 한다. 지난 1-2년 동안 현실에서 부디쳤던 문제들이지만,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이 사실상 왜곡된 형태로 잔존하게 된 것이나, 아이돌스타들을 거느린 대부분의 기획사의 횡포가 여전히 근절되지 않거나, 방송가의 과도한 시청률경쟁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주류문화의 저항은 예상했던 것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는 팬덤의 자생적 문화실천의 대상들은 확대되었지만, 구체적인 현장에서는 문화자본가들의 많은 저항들이 예상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주류문화는 팬덤주체들이 예전대로 얌전하고, 순종적인 집단으로 남아주길 바라고 있다. 그들의 가끔 보여주는 사회병리적 사건들을 통해 팬덤의 운동적 에너지를 적절하게 조절 훈육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팬덤은 어떤 입장취하기를 해야하는가?
5. 팬덤의 이중적인 문화자본
팬덤문화는 언제나 이미 편집증과 분열증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를 옹호하고 집착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극단적인 이기적인 행동들이 나오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은 스타와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문화의 동시대적 실천가로서, 생산적 참여자로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팬덤문화의 이러한 이중적인 성격으로 인해 팬덤문화를 둘러싸고 두 가지 자본의 형태가 존재하게 된다.
첫 번째는 팬덤문화가 대량문화자본을 확대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존 피스크는 이를 ‘공식적인 문화자본’이라고 했는데, 공식적인 문화자본은 대량의 소비구매욕구를 가진 팬덤 주체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서태지나 , 의 앨범이 나오면 그들의 고정팬들에 의해 100만장이 순식간에 구매된다.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들의 각종 사진과 악세사리 등을 수집하기 위해 고정적으로 돈을 쓴다. 팬들의 수집 욕구는 대단히 분명하고, 맹목적인 경우가 많아 상품과 가격과는 무관하게 구매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업은 기업대로 스타들을 모델로 하여 골수팬들만아니라 잠재적인 팬들의 수요를 끌어들이려고 필사의 마케팅전쟁을 하고 있다.
이제 팬덤은 문화산업 시장에서 중요한 문화자본의 구성요소로 등장했다. 팬덤이 문화소비의 독점적인 효과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은 화폐자본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문화상품의 상징적 힘 때문이다. 스타와 관련된 문화상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평범한 팬덤주체들에게는 상당한 지적 자부심과 상징적 위용을 갖게 해준다. 팬들은 스타들이 각인된 문화상품을 소유함으로써 스타를 매개로 한 상징적 자산의 힘을 행사한다. 이 과정에서 스타문화상품의 수집은 화폐의 환산가치를 넘어서 팬들의 문화적 자신감과 결속감을 높여주는 상징적 자산의 축적행위이다. 일례로 NBA의 황제 마이클 조던이 신었던 ‘에어조던’을 10만원이나 되는 돈을 지불하고 아이들이 구매하는 것은 에어조던이 그들에게 약속하는 상징적 자산 때문이다. 를 캐릭터로 한 에초티 음료가 순식간에 동이 나고, 한때 일본만화인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동물들을 수집하기 위해 초등학교 학생들이 빵을 사서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스티커만 수집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식적인 문화자본은 이러한 상징적인 문화자산의 재생산을 통해 안정된 화폐를 축적한다. 서태지가 컴백앨범의 컨셉으로 사용했던 ‘하드코어’ 역시 그 자체로 온전한 의미에서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다기 보다는 그의 상징적 위력을 통해 재생산된 일종의 문화자본의 형태를 가진다. 그러나 상징적인 문화자본은 항상 화폐자본으로 완전히 계량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동시대 문화적 파급효과를 생산해내는 감성적인 힘이 작용하기도 한다. 팬덤이 이러한 문화자본을 취득하는 과정은 스타와 동일시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문화적 취향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팬덤의 문화자본은 팬과 스타의 관계, 화폐적 문화자본과 감성적 문화자본의 관계가 일방적이거나 종속적이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스타를 통한 독자적인 팬들 스스로의 문화적 위용이면서 동시에 화폐자본을 거스르는 비자본적 행위이기도하다.
팬덤은 언제나 이미 문화자본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적 취향과 결속력, 감성적 커뮤니티의 공간을 열어놓고 있다. 그것은 마치 스타에 일반적으로 동일시하는 팬덤과 그렇지 않은 팬덤이 있듯이 화폐자본으로 재생산되는 문화자본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문화자본이 있다. 나는 후자의 과정을 통해 팬덤의 상징적 투쟁과 감성적 연대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제 새로운 문화자본을 생산하는 팬덤문화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