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도산 안창호

[스크랩] 1878.11.09 도산 안창호 선생 출생

ddolappa 2016. 8. 23. 02:03

1878.11.09  도산 안창호 선생 출생

 

 

 

 

 

1913.05.13  흥사단 결성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6913

1938.03.10  서거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4915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년)-소년한국일보, 2003-06-23
http://kids.hankooki.com/lpage/study/200306/kd2003062317401727360.htm

 

독립의사 안창호
오로지 나라와 겨레 위해 살았다-어린이강원, 2009-06-11
http://www.kidkangwon.co.kr/NewKid/News/news.asp?aid=200906110011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도산 안창호-한국경제, 2012-03-09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30965971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오늘 대한의 주인되는 이가 몇 분이나 되는가? 민족 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감이 있는 이가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이는 객이다. 진정한 주인에게는 비관도 없고 낙관도 없고 제 일인 고로 오직 어찌하면 우리 민족 사회를 건질까 하는 책임심뿐이다."


- 안창호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1878년 오늘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유학 하다가 1907년 귀국해 애국계몽운동을 펼친 안창호 선생!

안창호 선생은 평양의 대성학교와 흥사단 등을 통해 무실역행 등 인격수양을 위한 4대 정신을 가르쳤다.

1973년 오늘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완공된 도산공원 새 묘소에 안창호 선생의 유해가 부인의 유해와 함께 합장됐다.

[녹취:대한뉴스]
"한편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해와 부인 이희은 여사의 유해가 이곳 도산공원 새 묘소에 옮겨져서 합장됐습니다. 도산 선생은 1938년 3월 61세를 일기로 순국했습니다. 당시 일제 압력으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던 선생의 유해는 36년 만에 미국에서 환국한 부인 유해와 함께 이번에 도산공원 새 묘소에 모셔진 것입니다."

 

 

 

 

 

 

 

 

 

 

안창호[ 安昌浩 ]

 

1878(고종 15)∼1938. 독립운동가·교육자.

 

〔생애 및 활동〕

호는 도산(島山). 평안남도 강서 출신. 흥국(興國)의 셋째아들이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 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배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상경하여 언더우드(Underwood,H.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 때 평양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감사 조민희(趙民熙)와 수백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18조목의 쾌재(快哉)와 18조목의 부재(不哉)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였다. 점진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기른다는 교육목표를 설정하였으며, 초등과정의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190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였다. 여기에서 야학을 개설,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공립신보 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에 힘썼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귀국길에 일본 동경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 나라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청년들을 만나 국내정세에 대한 지식을 얻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귀국 후 1907년에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①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② 동지를 찾고 단합하여 국민운동의 역량을 축적하며, ③ 각지에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청소년의 교육을 진흥시키고, ④ 각종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富力)을 증진하게 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회관(太極會館)을 건립하였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또한, 1909년에는 박중화(朴重華)·최남선(崔南善김좌진(金佐鎭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山東省)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었다.

 

청도회의는 북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영농과 군사양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하였으며, 이에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신한민보 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913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흥사단을 창설하여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대성학교·신민회·청년학우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聯通制)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취임한 지 2년째인 1921년에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 실패하여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어 부의장에 취임하게 되었으나 공산당의 전략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1924년에는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理想村) 후보지를 탐사하고 난징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사업을 추진하였다.

 

1927년 길림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大獨立黨)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 내 사회여론이 비등하게 되어 20일만에 석방되었다.

 

1928년 상해에서 이동녕·이시영·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난징에서 토지를 매입하였다.

 

1932년 일본의 중국본토침략정책에 대응하여 독립운동근거지 건설계획을 재검토하던 중, 같은 해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大寶山) 송태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 (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졸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중장을 받았다. 죽은 뒤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1973년 11월 미국에 있던 부인 김혜련(金惠鍊)의 유해와 함께 도산공원 (島山公園)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교육사상〕

안창호의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하여 민족혁신을 이룩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민족혁신은 자아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자아혁신은 바로 인격혁신이라 보았다.

 

따라서,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로 연결되며, 자기개조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무실역행을 강조하였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이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무실은 개조의 내용이고 역행은 그것의 행동으로, 무실과 역행이 없이는 자기개조가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개개인의 인격혁명으로서의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이며 자기개조가 곧 민족개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는 주인정신(主人精神)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성학교의 교훈을 주인정신으로 설정한 것도, 주체·독립·책임을 의미하는 주인정신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자기개조와 민족개조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교육사상은 학교건설과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안창호는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3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 가운데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있었다. 이것은 곧 설립자인 안창호의 교육이념이었다.

 

또한, 흥사단 창립 당시의 약법(約法)에 표시된 단(團)의 설립목적 조문을 보면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층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고 덕·체·지 삼육(三育)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육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이라.”고 하여, 정의돈수를 통하여 인격을 육성한다는 교육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한편, 교육방법상의 원리로는 성실성과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근본원리 및 인간이 믿고 의지해야 할 진리의 등불은 곧 성실이라 하였으며, 거짓없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정성과 진실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실이야말로 자아혁신과 민족개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적 원리라 보았다.

 

또한, 그는 공부하는 정신과 태도로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점진공부는 학문과 실천의 기본적인 태도로서, 자신의 생활은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여 향상을 기하자는 것으로 이는 성실성과 함께 주요한 교육방법의 원리가 된다.

 

그의 이러한 짐진주의적 사고는 학교설립의 순서에도 나타나는데, 점진학교 설립 이후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하는 인물을 기른다는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흥사단[ 興士團 ]

1913년 창립된 사회교육·국민훈련 기관.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만들어졌으며,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수양단체이다. 일제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여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창립과 일제강점기의 활동

흥사단의 전신은 1909년 2월 국내에서 창립된 청년학우회였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강영소(姜永韶)의 집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경기도 홍언(洪焉),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충청도 조병옥(趙炳玉), 황해도 민찬호(閔燦鎬), 경상도 송종익(宋鍾翊), 평안도 강영소,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등의 8도 대표를 포함한 25명의 발기인에 의해 창립되었다. 흥사단의 목적 조항은 '건전인격'과 '신성단결'을 위한 '무실역행'으로 '우리 민족 전도(前道)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을 표방했다. 그러나 행동강령은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기본적인 민족부흥운동으로 발전할 것 등으로 결의했다. 흥사단은 첫 사업으로 동맹수련과 동맹저축을 실시하고, 1914년 10월에는 〈흥사단보〉를 발간했다. 1915년에는 사기앙양과 정서표현을 위한 문학적 창작활동의 방편으로 〈흥사단단기가〉를 발간했다. 미국 내에서만 활동하던 흥사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1920년 봄 상하이[上海]에서 흥사단원동위원부(興士團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이후 미국 본부와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했다. 원동위원부는 1924년 미국 유학을 꿈꾸는 한국 학생들에게 어학준비를 시키기 위해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세웠다. 흥사단은 국내에도 조직사업을 펼쳐 서울에서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를 조직했고, 1923년 1월 평양에서는 대성학교(大成學敎) 출신을 중심으로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결성했다. 새로 조직된 두 단체는 흥사단의 합법적 표면단체로서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로서 우리 민족 신문화 건설의 기초를 기함'이라는 사업목적을 내세웠다. 두 단체는 1925년 10월 안창호의 권유로 합동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를 결성했다. 1926년 수양동우회를 정치적 결사로 개조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수양동우회는 국민운동단체로 두고 정치단체는 외부의 저명한 인사들과 합동하여 새로이 만들 것이라는 안창호의 방침을 따랐다. 그해 5월 잡지 〈동광〉을 발간하고 통속교육보급회(通俗敎育普及會)를 설립했으며, 1929년 11월 이름을 동우회(同友會)로 고치고 합법적인 실력양성운동을 벌였으나,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 안창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동총장으로 상하이에 온 뒤로부터 흥사단의 미국 본부는 구심점을 잃고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원동위원부도 1932년 윤봉길의 폭탄의거로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면서 쇠퇴했다. 국내외의 조직이 수난을 당함에 따라 흥사단 본부는 국내의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 관련자 13명에 대한 출단처분을 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단의 혁신을 도모했다.

 

8·15해방 후 활동

1945년 12월 흥사단 국내위원부가 발족되었고, 1946년 1월에는 위원장에 김윤경(金允慶), 서무원에 주요한(朱耀翰)·박현환(朴賢煥), 재무원으로 김선량(金善亮)을 선임하는 등 부서를 정하여 정식으로 조직활동을 개시했다. 1947년 봄 청년부를 설치하고, 그해 10월 제2차 국내대회를 열어 본부를 미국에서 서울로 옮길 것을 결의했다. 또 그해에 '단은 일체의 정치적 활동에 중립을 지키나 단에 참가한 개인이 정치활동에 참가하는 것은 관여하지 않는다'는 '정치행동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1948년 3월에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를 발기했다. 흥사단은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활동을 일시 중지했다가 1963년 7월 다시 등록했다. 그해부터 고등학교·대학생을 대상으로 전개한 아카데미 운동은 10만 여 명의 회원을 배출했다. 1964년 4월부터 기관지 〈기러기〉를 발간했고, 흥사단출판부는 〈도산안창호〉·〈흥사단운동70년사〉 등을 발간했다. 1969년 8월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고 전국에 10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 본부는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에 있다.

 

 

한말에는 애국계몽 활동을 했으며, 이후 도덕적 실력양성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호는 도산(島山). 아버지는 흥국(興國)이다.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12세 때 아버지를 여읜 후로는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이무렵 서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몇 살 위의 필대은(畢大殷)과 국내외 문제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다. 1895년(고종 32) 17세가 되던 해 서울로 와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여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으면서 서구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 서당 훈장 이석보(李錫寶)의 딸 혜련(惠鍊)과 약혼을 한 뒤 1897년 서울로 다시 올라와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독립협회 관서지부 주최로 열린 평양 쾌재정 연설회와 이해 11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연설을 통해 많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자 고향인 강서로 돌아와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학교로 남녀공학이었다. 그뒤 학교 운영을 형 치호(致浩)와 가까운 친지에게 맡기고 결혼을 한 후 미국으로 유학갔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이곳 교포들의 생활상을 개선하기 위해 1903년 친목회를 조직했으며,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뒤 교포 노동자들의 권익옹호와 생활향상을 목표로 1905년 4월 5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야학을 개설하여 교포들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순한글 신문인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이 공립협회는 1910년대 국민회의 창립으로 발전적 해체를 할 때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교포 사회의 영사관 구실을 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그는 공립협회 대표로 국내 사정을 살피는 한편, 국내의 유지들과 반대 여론을 유도하기 위해 귀국을 결정했다. 귀국 도중 도쿄[東京] 에 들러 재일한국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서 연설 한 뒤 1907년 봄 서울에 도착했다. 귀국 후 그는 일본의 국력과 비교해볼 때 조선의 독립은 요원한 것이라 생각하고 당장 시급한 일은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물질문명을 이룩한 지식을 하루빨리 습득해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실업사상을 기르며 산업을 경영할 신민(新民)을 길러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에 따라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여 독립 애국청년을 양성하고, 대구에 태극서관을, 평양에는 자기회사를 세워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1909년 청년운동의 핵심체로 청년학우회를 박중화·최남선·김좌진·이동녕 등과 함께 조직했다. 청년학우회의 목적은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을 익히는 데 있으며 1가지 이상의 전문기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해 날마다 지(智)·덕(德)·체(體)에 대한 수양행사를 1가지씩 행해 수련에 힘쓸 것을 표방했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3개월간 개성헌병대에 갇혀 있다가 1910년 봄 대한제국 멸망 직전 베이징[北京]을 거쳐 칭다오[靑島]로 가서 해외망명인사들과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협의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이갑과 함께 유동열(柳東說)과 김희선(金羲善)이 주장한 잡지 및 신문 경영을 중심으로 하는 실력양성운동 방침에 찬성했으나, 급진파는 만주나 노령에서 안전지대를 택해 근거지를 정하고 군사운동을 준비하자고 주장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어 연해주에서도 회합을 가졌는데 그는 이갑과 농촌개척을 주장했으나 의견이 분분하여 결론을 얻지 못했다. 2차례의 회합이 다 실패로 끝나자 1911년 미국으로 가서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초대 총회장에 취임했으며, 기관지로 〈신한민보〉를 발간했다. 한편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및 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그 후신으로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결성했다. 무실역행과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을 목적으로 한 흥사단은 지역 차별을 없애기 위해 창립위원을 8도를 대표하는 청년들로 구성했으며 25인의 발기인으로 발족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미실업주식회사를 경영하여 민족의 실력배양에 더 한층 치중했다.

 

미국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그는 1919년 4월 5일 정인과(鄭仁果)·황진남(黃鎭南)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떠나 5월에 도착했다. 6월 28일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로 취임하여 대한인국민회로부터 2만 5,000달러를 지원받아 프랑스 조계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소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 방략을 작성하는 한편, 대외선전 및 문화사업에도 착수하여 영자신문인 〈차이나 프레스〉에 한국의 진상을 연재하고, 임시정부 사료편찬회를 조직했으며 〈우리소식〉을 활판 인쇄로 발간하도록 했다.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안창호의 준비론,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이동휘의 무장독립론으로 나뉘어 있던 임시정부는 결국 이동휘가 1921년 1월 노령으로 떠나버림으로써 분열되었다. 임시정부가 운동노선에 따른 분열로 약화되어 독립운동의 영도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자, 독립운동진영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극복하고 운동의 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자는 요구가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22년 국민대표대회주비회(國民代表大會籌備會)가 다시 활동을 재개하자 5인으로 구성된 주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대회가 개최되자 그는 윤해(尹海)와 함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하면서부터 안창호의 소속단체인 북미국민회가 미국에 대하여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문제로 안창호의 대표권 불신임이 제기되었으며,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조시키자는 개조파가 대립했다. 결국 안창호가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개조파가 대회불참을 선언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었다.

 

한편 그는 1922년 1월과 1923년 10월 2번에 걸쳐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이광수를 만나 국내에서의 흥사단운동 전개에 관한 방략을 협의했다. 이에 따라 이광수는 수양동맹회를 조직했으며 평양에도 동우구락부를 설립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뒤에 이 두 단체가 합하여 수양동우회가 되었다. 수양동우회가 1927년 1월경 언론·집회의 자유, 치안유지법 등 악법의 개폐를 중심으로 한 합법적 정치투쟁을 주장하는 방향전환론과 수양단체로의 존속론으로 내부의견이 갈렸을 때 안창호는 상하이에서 수양동우회 회원인 주요한(朱耀翰)과 조병옥을 만나 수양단체로 존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24년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해외에서 유학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준비교육과 민족관을 가르쳤으며, 그해 12월 미국에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이상촌(理想村) 가입자와 투자금을 모집했다. 1926년 2월 상하이로 다시 돌아온 그는 흥사단과는 별도로 북중국과 만주 일대를 여행한 뒤 이상촌 후보지를 마련하고 남·북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한 단결된 혁명세력인 대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해 8, 9월경에는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원세훈과 협의하여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먼저 각지에 촉성회를 조직할 것 등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조직되는 것을 시작으로, 각 지역에서 촉성회가 조직되어 민족유일당을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한 가운데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은 1928년에는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29년 각지의 촉성회가 해체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한 후 그는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종래의 파벌투쟁을 청산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을 결성한다는 명분하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했다.

 

한편 이상촌 건설을 위해 1927년에는 만주지방에 이주한 한국농민의 생활안정을 목적으로 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했고, 중국 화중[華中] 지방에도 10만 200호의 농촌을 건설하여 포도원(葡萄園)을 경영하고자 했다. 1930년말에는 생산, 신용의 합작운동을 보급시키기 위해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다음해에 공평사(公平社)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촌 건설계획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중국침략이 노골화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경성으로 압송되어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2월 가출옥하여 서북지방 등 각지를 여행하면서 친구들도 만나고 조선총독부 한인 고위관리와 대화도 가지는 한편 모범촌 계획을 염두에 두고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평양 근처 송태산장에서 은거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9일 전인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1937년 12월 24일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경성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듬해 죽었다. 망우리에 안장했다가 1973년 11월 도산공원으로 이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실력양성론, 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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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노니 여러분이시어,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동아일보>에 실린 선생의 글 [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1925.1.25)-

 

 

민족에 눈을 뜬 청년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 11. 9 ~ 1938. 3. 10) 선생은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아버지 순흥 안씨 흥국(興國)과 어머니 제남 황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도산(島山), 필명은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이며 이명으로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등을 사용하였다. 1885년에 강서에서 평양 대동강변 국수당으로 이사했으며 이듬해인 8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슬하에서 교육받았다. 1891년에 평남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하면서 노남리댁 셋째라고 불리었으며 이때부터 서당에서 김현진에게 한문 수학을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16세의 청년 도산은 평양에서 벌어지는 청일전쟁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청일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 세상 구경에 나선 선생은 서울 정동거리에서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면서 학생을 모집하는 선교사 밀러를 만나 밀러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문을 교육받고 기독교인으로 입교하게 된 밀러학당에서의 3년간의 수학시절은 선생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크게 넓혀주었다.


 

졸업 후 독립협회 민권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서당 선배인 필대은과 함께 고향 강서로 가서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질풍과 같이 몰아치는 열강들의 한국침투를 세계사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인식한 선생은 그 안에서 대한제국이 나아갈 길을 냉철히 구하였다.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 받은 이후 가는 곳마다 많은 청중들을 웅변으로 감동시켰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자, 고향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에 교회를 설립해 교육과 전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육자의 자질에 부족함을 느낀 선생은 교육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이혜련과 혼인하고 그 이튿날 선생 부부는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유학길에 올랐다.

 

 

한인공동체의 지도자, 공립협회 창립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선 영어를 익히기 위해 소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입학을 거절당하였다. 다행히 한 학교장의 배려로 입학허락을 받고 영어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나 그 당시 선생을 사로잡은 일은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이었다. 당시 신흥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인삼상인 등이 모여 있었으나 커뮤니티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며 구심점 없이 흩어져 되는대로 살고 있는 처지였다. 앞서 이주해온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으며 생활 또한 불안정하였다. 선생은 한인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천시받지 않고 상호 권익을 보호하면서도 신용있는 문명인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공부를 중단하고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미주 한인들의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였다. 친목회를 통해 한인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고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1904년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로 모여드는 한인들과 함께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도산은 미국인 가정의 가사고용인으로 취업해 있으면서 부인을 중국인이 설립한 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미국인 집주인이 집을 더럽게 관리하는 한인들에게 집 임대를 꺼린다는 말을 듣게 된 도산은 일일이 한인들의 집을 방문해 집안은 물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청소해주었다. 각 집에 커튼을 치게 하고 문 앞과 창문에 화분을 놓아 꽃씨를 심어 주는 등 주변 환경을 청결하고 아름답게 가꾸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며 경계하던 한인들은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선생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인들은 매사 모든 일을 선생과 의론하게 되었고 어느 사이엔가 선생은 한인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깨우치려 했던 도산의 마음을 한인사회는 공유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수확하는 도산의 모습.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선생에게 한인들은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 때 고국에서는 일제가 우리 땅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며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던 중 1905년 3월 28일, 장남 필립(必立)이 태어났다. 필립이라는 이름은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선생의 의지를 표한 것이다. 한인사회가 자리잡아 가면서 자신감을 얻은 선생과 동지들은 4월 5일,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 때 28세로 초대 회장에 취임한 선생은 공립협회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신보>을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만들어 공립협회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국내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선생을 당혹케 하였다. 일제가 을사5조약을 늑결하고 광무황제가 인준하지 않은 조약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이어 한국통감부를 설치해 노골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조국의 소식을 들으며 크게 낙담하던 차, 동지들은 선생의 귀국을 종용하며 국내에서 국민단체를 만들어 조국의 국권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의 신세를 질 수 없다 하며 거절했지만 동지들은 그렇다면 자신들이 노동하는 것도 의미가 없으니 공립협회를 해산해 버리겠다며 강권하며,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도산뿐임을 설득하였다. 선생은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그 설립 취지서를 안고 1907년 2월 20일에 국내로 귀국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우치다(內田良平)가 선생이 4월경 서울, 대구, 원산 등지로 유세하고 다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한국통감부에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신민회 조직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시도 끝에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구국전략으로 선택

선생은 서북학회 등의 표면활동과 함께 평양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해 교육 및 산업진흥운동을 전개하고 가옥 개량과 모범농장 건설, 여성교육의 필요성 제창, 국가(國歌) 보급운동 등 다양한 국민운동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를 전개했지만 열강 사이에서 한국이 처한 정세는 더욱 불리해져만 갔다. 한편 한국을 식민통치하기로 예정한 일제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며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날 해산 군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본군과 일대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산군인들의 탄환이 떨어지자 일본군들은 반격에 나서 도망하는 해산군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이 때 선생은 남대문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복무 중이었던 김필순의 집인 세브란스 건너편 김형제상회 2층에 머물고 있다가 시가전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선생은 현장에 뛰어들어 거리에 쓰러진 군인들의 시체를 거두고 중상 입은 군인들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연 이틀 밤을 꼬박 새며 구호하였다. 이 경험은 한국의 근대화를 도와주겠다며 한국의 정치를 장악한 일제의 본질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었으며, 후일 선생이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를 재건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그 해 11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선생과의 회견을 요청, 만남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선생에게 ‘청년내각’ 구성을 제안하며 회유했지만 선생은 단호히 이토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국내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여전히 선생은 미주 공립협회 회장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공립협회의 민족운동을 원격 지도하고 있었다. 선생과 신민회 회원들은 공립협회와 함께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해 항일투쟁할 것을 준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당시 공립협회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해 미주 한인들이 투자한 주금으로 북만주 밀산지역 봉밀산의 토지를 사들이고 이미 개척사업을 준비 중에 있었다. 한편 1908년 8월, 신민회의 청년조직인 청년학우회를 창립한 선생은 이 땅의 건전한 청년들을 교육계와 경제계, 그리고 정치계 등 각 계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우고자 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얼마 활동하지 못하고 신민회의 해체와 동시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1913년 미주에서 결성된 흥사단이 그 역사를 계승하였다.

 

1909년 2월 3일 융희황제가 서도순행 중 대한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함께 들고 나와 환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안의사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제는 블라디보스톡 <대동공보>사에서 의거를 모의한 증거를 포착하고 <대동공보>의 주필 이강을 포함한 공립협회 파견 원동위원들이 관여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공립협회의 지도자인 선생을 안중근의거 배후 혐의로 체포하였다. 선생은 그 해 말 석방되었다가 이듬해 초에 재소환되는 등 일제의 요주의 경계 인물로 부각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과 신민회 회원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긴급 간부회의를 개최해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구국전략으로 채택하였다. 그것은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을 양성해 일제에 장기적 항쟁한다는 전략이다.


대성학교 모습. 도산 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고 하여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다.

 

 

1910년 4월 7일 행주를 출발해 인천을 경유하여 황해도 장연에 도착한 선생은 그곳에서 중국인 소금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중국의 위해위로 탈출하였다. 망명 전에 지은 ‘거국가’는 <대한매일신보>(1910. 5. 12일자)에 소개된 후 국외 동포사회로 급속히 퍼져 만주 및 미주 등지에서 발간된 [애국창가집]에 실려 국내외 민족사립학교에서 애창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거국가’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에 반항을 장려한다고 지목해 이를 부르지 못하게 탄압하였다.

 

 

뛰어난 조직력과 리더십으로 수많은 단체들과 학교를 설립하다

각자의 경로를 통해 국내를 탈출한 신민회 동지들은 중국 청도에 모여 독립운동 전개 방향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선생은 길림지방이나 러시아, 만주국경 지역에 토지를 사서 우선 농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신문, 잡지를 경영해 우선 선전활동에 치중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청도회담에서 논의된 최종안은 이종호가 3천 달러를 대기로 하고 길림성 밀산현에 땅을 구입해 개척한 후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결의였다. 청도회담이 끝난 후 선생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재러 한인사회에는 강제 병합조약 체결 소식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러시아에서 선생은 연해주 각지를 돌며 한인의 권익보호와 민족통합을 주선하고, 1911년 2월경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하였으며 안중근 가족이 거주하는 목릉을 돌아본 후 치타, 이르크츠크,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 런던을 경유해 그 해 9월 2일에 미국 뉴욕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온 선생은 분주히 한인사회를 돌아보며 한인들의 정황을 파악하고 현시점에서 한인사회를 어떻게 지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1912년 7월에 둘째 아들 필선(必鮮)을 얻었으며 도산의 열성으로 ‘대한인국민회’도 활기를 띠고 발전해 나갔다. ‘대한인국민회’는 재미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일본정부에 대항해 캘리포니아 주정부를 상대로 한인들 문제에 대한 자문에 응했으며, 미국에 새로 들어오는 한인들을 위해 출입국 관계를 보증하는 준정부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중앙총회 아래 하와이, 북미,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를 두고, 각 지방총회 아래에 160여개의 지방회 조직을 거느렸다. 멕시코와 쿠바지역과 필리핀에까지 지방회 조직을 둔 대한인국민회조직은 명실상부한 세계 한인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1913년 5월 13일, 8도 대표를 선정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흥사단은 민족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중견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 출범해 오늘날까지 조직을 이어가는 역사 깊은 단체이다. 선생은 조직 단체만이 아니라 각종 회사와 학교를 설립해 운영한 조직의 명수이다. 독립운동의 물적 토대와 인적 토대를 구축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장래 희망도 없다고 본 선생은 인적, 물적 실력양성의 기반을 다져가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선생은 직업적 혁명가만이 아니라 장차 독립될 국가의 전문분야에서 전문인으로서 조국 건설에 기여할 인재를 키우는 일도 독립운동이라 보고,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광복된 조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전문인 될 것을 권유하였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많은 결사들이 조직되었다가 사라졌지만 선생이 조직하거나 관여한 조직은 민주적 운영과 민족전도 대계를 목표로 했기에 그 생명력이 길었다.

 

 

 

1917년 멕시코 한인사회를 돌아보기 위해 떠나기 직전 찍은 가족사진


하지만 전 세계 한인사회를 대한인국민회 중심의 네트워크로 구축하고자 했던 선생의 희망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이 승전국의 하나가 됨으로써 만주 및 러시아지역의 대한인국민회의 항일운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국제사회의 변화를 지켜보며 한인사회를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던 선생은 1916년 하와이의 이승만과 박용만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을 때, 분쟁해결을 위해 하와이를 방문하던 차, 하와이 각 섬의 교민사회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1917년 1월,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한인들의 경제적 실력을 키우고자 힘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에는 멕시코 순방길에 올라 10개월 간의 짧은 방문기간 동안 농장주들과 새로운 계약 체결을 주도하고 한인회관 건축, 국어학교 설립, 자치를 위한 경찰서 조직, 실업회사 설립 등 많은 일을 주선해 멕시코 한인사회를 크게 변화시키고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 발발 소식이 3월 9일 선생에게 전달되었다. 선생은 신속히 3.1운동의 소식을 북미,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전파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전 세계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과 전 동포사회가 독립전쟁 준비에 단결해 줄 것, 특히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포들이 재정공급과 선전활동에 주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윌슨 대통령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5국 대사에게 한국민의 절대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대표출석권을 안정해 줄 것을 간절히 청원하였다. 특히 선생은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책임을 갖고 나서야 한다며 각지에 산재한 여성단체들의 통합을 권유해 1919년 8월 북미의 5개 여성단체가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으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생명을 불어넣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전체대회에서는 선생을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으로 선출하고 상해파견을 결의하였다. 선생의 상해 행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축은 미주중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동하였다. 6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한 선생은 곧바로 임시정부의 시정방침을 발표하였다. 시정방침으로는 인구조사를 행하고 국채를 발행해 재정을 확보할 것과 인두세를 징수하고 군사에 노력할 것, 그리고 구국재정단을 조직할 것과 파리와 워싱턴을 중심으로 외교에 힘쓰고, 한인관계사를 조사, 편찬하는 일을 할 것 등이 발표되었다. 그 외에도 선생은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해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통망을 구축해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산하로 통합하고자 했다. 또한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독립국으로서의 역사정립을 위한 사료편찬에 착수하였으며 인성학교를 정비해 공립학교로 출범시키고 정부기관지로써 <독립>을 창간해 언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해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8월 이후에는 정통성을 가진 민족정권을 수립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자 3개의 임시정부 통합운동을 진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 통합에 성공해 통일 임시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음은 선생의 정력적인 통합운동의 결실이다. 초기의 임시정부의 조직과 운영은 이처럼 선생의 방침과 방략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이 때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리더십이 크게 발휘되었다. 그러나 통일정부에서 선생은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함에 따라 노동국 총판이 되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기호파 내각의 견제를 받게 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 선생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렇다고 임시정부의 행보를 늦출 수 없었던 선생은 1920년 교민단 사무소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라는 연설을 통해 우리의 독립운동이 어느 한 부분이 아닌 군사, 외교, 교육, 사법, 재정, 통일의 6대사업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과 구체적 진행방법과 실행을 주창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통일임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국민개병, 국민개납, 국민개업의 방침을 통해 국내외 모든 한인은 독립전쟁 시에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고 인두세를 내어 조세의무를 지며, 직업을 갖고 생산에 종사함으로써 정부를 유지해야 할 책임감 있는 의무를 가진 국민임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선생의 통일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의해 결집된 반정부세력은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며 반정부활동을 전개해 임시정부의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현재의 정부조직이 미주, 러시아, 만주 등 각각의 운동조건이 다른 곳으로부터 모여든 독립운동의 세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선생은 그 대안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횡적으로 연대시킨 ‘대독립당’을 결성해 정부와는 별개로 정당에 의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자 하였다. 1921년에 들어와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 독립운동 방략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선생은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나갔다. 1923년 1월 3일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국내는 물론 미주, 만주, 중국관내, 러시아 등지에서 대표권을 인정받은 140명이상의 대표들이 참석한 대대적인 민족회의였다. 여기서 선생은 부의장에 선임되었고 외교분과위원과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5월 15일까지 총 63회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정부유지파와 새로운 정부 구성을 주창한 창조파, 그리고 정부개조를 주창한 개조파로 나뉘어 그 어떤 합의도 끌어내지 못하였다. 선생은 현정부유지파와 창조파를 중재하며 중도안으로 정부개조안을 주창했지만 국민대표회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고, 실망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해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선생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또다시 대독립당 결성과 이상촌건설운동에 매진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독립운동방략에 대해 재미한인들과 의논하고자 1924년 12월에 미국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 동안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이상촌 건설의 지원과 임시정부에 인두세를 내 줄 것을 미주 교민들에게 호소하였다. 13개월간의 방문을 마치고 1926년 4월 22일 선생은 홍콩에 도착하였다.

 

 

이데올로기 소용돌이에서 오로지 민족 우선의 신념을 지켜가다

도산이 미국에 있는 동안인 1925년 9월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이상룡이 취임했으나 임시정부와의 통합 문제로 인한 정의부 내부의 분규가 일어나자 이상룡은 급히 만주로 귀환하였다. 그 후임으로 1926년 2월 양기탁이 국무령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취임을 거부해 국무령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선생이 상해로 돌아오기 전인 5월 8일, 선생을 국무령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취임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은 정부 내에서보다는 재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정부를 후원하고, 독립운동계의 전선통일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시세에 유리하다고 보고 취임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선생이 주장했던 독립운동의 방략은 좌, 우 운동세력의 통합과 전민족의 연대, 그리고 일제에 대한 파괴책을 주창한 바, 미국내의 일부 분자들은 선생이 사회주의자이며 위험분자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런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1926년 7월 8일에 선생의 상해 귀환을 환영하는 연설회 석상에서 ‘주의(主義)’를 초월해 전민족운동계가 역할분담을 한 혁명을 진행시켜 나갈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이 때의 연설의 요지는 ‘대혁명당을 조직하자, 임시정부를 유지하자’ 였다. 전 민중이 중심이 될 통일기관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유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천명한 본 연설에서 선생은 우리 민족은 빈민이며, 자신 또한 무산자라고 하며 자본주의가 미발달된 채 국망을 당한 민족이 프롤레타리아, 부르조아의 계급논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가 힘의 낭비임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리고 민족국가 건설 시에 우리의 경제 방책은 일제 및 일본자본가, 그리고 친일 매판자본가들이 장악한 대생산기구를 독립 달성 후에 국가소유로 한다고 공언하여 사회주의자들을 포용한 노선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4년 뒤 1930년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당의, 당강에서 다시 천명되었다.

 

한편 이날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한 홍진은 취임석상에서 임시정부의 정강 중 “전민족을 망라한 공고한 당체(黨體)를 조직할 일”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선생이 주창한 독립당 내지 유일당 결성운동을 현실화하기 위한 도정에서 임시정부가 정강으로서 방향과 보조를 맞춰준 것이다. 유일당 운동은 반임정세력의 집결지인 북경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 결성으로 나타났다. 한편 1926년 12월에 새로이 국무령으로 취임한 김구와 그 내각은 1927년 2월, 3차 임시약헌 개정에 착수해, 3월 5일에 ‘이당치국(以黨治國)’체제로의 헌법 개정을 단행함으로써 유일당 결성의 추세를 임시정부 헌법에 반영하였다. 선생이 유일당 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9월 26일, 미국에서는 막내아들 필영(必英)이 태어났다. 막내아들 필영은 태어나서 한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였다.

 

1927년 1월에 길림에 도착한 선생은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유일당 결성의 당위성을 주지시키고 1월 27일에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이 때 들이닥친 중국경찰에 피체되어 20여일 만에 풀려난 이른바 ‘길림사건’을 겪었지만 석방 이후에도 만주 각지를 순회하며 대동단결을 호소하였고 4월 1일에는 길림의 교민들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결성하였다. 한편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3부 대표들이 모인 이른바 ‘신안돈회의’에 직접 참여하여 만주지역 유일당 조직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정력으로 민족통합과 대동단결을 주선해 나간 선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북경에 이어 상해, 광동, 무한, 남경 등지에 차례로 한국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되었다. 중국인들에게 구축 당하는 비참한 한인들의 실정을 돌아본 선생은 1928년에 들어와 중국인들과 항일협력전선을 결성해 공동투쟁 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아울러 자신의 대공주의(大公主義)사상을 정립해 나갔다.


선생이 자녀에게 보낸 엽서(1930).유일당 결성의 바쁜 와중에도 도산은 자녀들에게 “언제든지 스마일”이라고 쓴 엽서를 보내 용기를 주었다.

 

 

이해 12월 20일에 연희전문축구단이 원정 경기를 위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선생은 학생들에게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민족에 대한 의무를 완수한다”는 요지의 훈화을 하였는데, 이는 대공주의의 요지를 표현한 것이다. 선생의 대공주의는 사회전반의 공익을 제일의로 하고 독립운동계에 분열을 초래했던 자본주의(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대화하여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수립의 전도를 제시하였다. 또한 대일본에 대해 비타협적 항일투쟁의 노선을 견지하고 민족내부에서는 민족간의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민족우선의 통일주의를 주창하여 좌, 우 양쪽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도에서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 뿐"

유일당 운동으로 민족 내부의 전선통일을 꾀하며 분주했던 선생은 점차 중국을 노골적으로 침략해 들어오는 일제에 대항해 한, 중공동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일제 침략의 첨병으로 오해되어 무자비하게 구축 당하는 재만한인들의 비참한 처지를 구할 수 있는 방도이기도 하다. 1928년 5월 선생은 중국신문인 <세계신문>과 <중앙일보>에 ‘중국혁명동지에게 고한다’라는 논설을 게재해 한, 중 양 민족의 합작을 제의한 바 있다.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에도 중국계 신문에 한국의 혁명방략을 소개하면서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행동을 파괴해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극단의 수단까지 써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선생은 중국과 연합해 대일항전의 역량을 배가시키고자 노력하였지만 국제정세는 불리하게 전환되고 있었다. 1928년 7월의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는 코민테른은 민족 부르주아지와 유기적 관계 유지 방향에서 좌파 중심의 협동전선론으로 혁명 전략을 전환하였다. 좌파가 중심이 된 협동전선체 결성 움직임과 헤게모니 전취론이라는 전술의 등장은 좌우익 통합이라는 민족적 명분을 압도해 버리면서 그간 어렵게 좌우통합의 기반을 마련하고 서로 접근해 갔던 독립운동계는 혼돈에 빠졌다. 그 결과 민족적 입장에서 유일당 운동에 참여했던 사회주의 세력의 이탈이 시작되었으며 1929년 10월 26일 좌파세력들에 의해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는 해체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요시찰인명부’(1925.2.17)로 도산 선생에 관한 인적사항과 활동사항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1929년 3월에 남경에서 개최된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 임시정부 대표로 선생이 파견되었다. 정부 요인이 아니면서도 정부 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음은 그간 정부 외곽에서 대중국과의 공동전선구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당사자가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본 대회에서 임시정부는 한, 중 양국이 항일동맹군을 조직하면 동삼성에서 분투할 혁명군 10만을 확보할 수 있다며 중국과의 군사동맹체결을 제안하는 요구서를 국민당 측에 제출했다. 이러한 제안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군사동맹을 꾀함과 동시에 분립된 독립운동계의 기선을 잡아 계속적으로 민족 내부의 유일대당운동을 추진하고자 한두 가지의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독립운동 세력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좌익을 배제하고는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민족통일로의 길로 결코 나갈 수 없다고 본 선생은 민족주의와 계급주의를 통합하고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독립운동 노선을 채택하고자 고심하였다. 1930년 1월 비록 대다수의 인물들이 우익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대공주의 정신을 삼균주의로 정립하여 강령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를 한, 중 혁명의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대중국과의 항일통일전선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대일항쟁의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대일전선통일통맹 결성을 추진해 나갔다. 한편 1930년 12월 27일 고향 고일리에서는 어머니 제안 황씨가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931년에 상해 한인들의 경제적 처지는 매우 불안하였다. 경제 부분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선생은 상해 한인의 소비조합을 만들고 장차 생산합작의 단계로까지 발전을 염두에 둔 경제적 혁명단체로서 공평사를 창립해 경제적 위기를 타파해 나가고자 하였다. 1932년 1월 16일자로 부인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어려움에서도 최후순간까지 독립항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비장한 도산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미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오랫동안 희생을 달게 여기여 온 바에 이제 어떤 고통을 받든지 어찌 원망할 것이 있으리오. 나는 더욱이 여러 동지와 동포에게 빚을 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뿐입니다.

도산선생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편지를 보내고 얼마 후 개최된 흥사단 제18회 원동대회에서 선생은 단원들에게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적대시하지 말 것과 전적으로 탈이념주의, 민족해방운동 지상주의에 입각해 민족통합을 이루어야 함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독립운동계의 각 계파가 역량을 축척하고 발전해 나가지 못하고 원시적 힘겨루기만으로 역량을 소모하는 현실에서 선생은 국제주의자와 계급혁명론자들에게는 민족의 가치를 호소하고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약화된 투쟁성에 대해 퇴행적이라고 비판하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을 유화시키고 상대의 사상과 노선을 상호 포용하는 제3의 노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행적은 1920년 내내 일관성 있게 진행되었으며 그가 피체된 후 국내로 들어오기까지 지속되었다. 선생의 통일운동은 당대에는 극우, 극좌주의자들 모두에게 비판 받는 처지였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사상과 노선을 초월한 대동 단결운동을 간단없이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작성한 도산의 수형자 기록카드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일본군과 정부 수뇌들을 일시에 쓰러뜨렸던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민단장이라 오인된 선생은 프랑스와 일본 영사관 합동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어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하였다.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했지만 일경의 감시와 방해가 심하자 중단하고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손수 지어 그곳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일체의 민족운동을 허용하지 않은 일제는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동우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종로경찰서에서 취조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선생은 생명위독 상태에 빠졌다. 일제는 서둘러 선생을 병보석으로 출옥시켜 경성제대 부속병원으로 옮겨 치료하였다. 당시 최고 권위로 인정받던 이와이(巖井) 내과 병동에서 선생의 주치의를 맡았던 김용필 박사는 선생의 병명을 장결핵, 늑막염과 복막염 등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한 상태로 폐결핵 겸 결핵성 복막염으로 진단하였다. 선생을 수 차례 문병한 백기천 박사는 여러 가지 증세로 보아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의 증세를 보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선생의 서거로 인해 민중시위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일제는 장례식에 참석 인원을 제한해 소수의 인척들만 참석하게 하고 망우리 공동묘지로 가는 길목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후 1973년 강남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도산의 유해와 미국에서 온 부인 이혜련의 유해를 이 곳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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