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도산 안창호

[스크랩] 도산 안창호의 국토사랑과 개조론

ddolappa 2016. 8. 23. 02:05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거가 있었다. 그리고 이 날 도산은 프랑스 조계 경찰에 체포되었고 곧바로 대나무 통 용수를 쓰고 일경에 인도되었다. 6월 7일, 도산은 선편으로 압송되어 인천 항구에 도착했다.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의 길을 떠난 지 23년 만에 묶인 몸으로 조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도산은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30개월 복역하다가 1935년 2월 10일 대전형무소에서 모범죄수로 인정되어 가출옥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꿈에 그리던 고향을 찾아 우선 성묘 길에 나섰다. 도산은 산과 들과 강이 어우러진 조국의 땅을 밟으면서 매번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대한 강산은 조각마다 금이라”

 

도산이 찾은 고향, 대동강은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며 여전히 굽이굽이 자신의 생명력으로 맑고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비록 일제의 군화발로 짖밟혔을 지라도 꿋꿋하게 살아서 얕은 여울과 깊은 소(沼)를 되풀이 하며 수천수만의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강으로 흐르고 있었다. 대동강 줄기를 휘돌아 대성산, 금수산, 대보산 등이 있고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득월루, 연관정 등이 있으며 평양성으로 들어가는 대동문, 칠성문, 현무문 등이 자연 지형과 잘 어우러져 축성되어 있다. 도산은 선조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사랑하고 또 자연을 대하는 정신과 예술혼이 잘 조화되어 이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완성되었다고 믿었다.

“산천이 수려한 나의 한반도야 내 선조와 모든 민족들이 너를 의탁하여 생장 하였구나” “송백의 푸른빛은 창창하고 소년의 기상은 늠름하도다”

도산에 따르면 강과 산이 어우러진 자연 경관은 사람의 정신과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자연이 빚어 낸 사철 신비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으면 내면의 웅장한 기상이 생장하지만 인위적으로 변경되거나 마구잡이 개발로 인해 훼손된 이미지는 인성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도산은 다시 찾은 고향땅 모란봉 정상에 일제가 지어 놓은 최승대를 보고 무식한 일이라면서 분노했다. 본래의 최승대는 봉우리 밑 중턱에 세워져 모란봉의 아름다움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그런데 부윤이라는 일본 사람이 모란봉 꼭대기에다 키 큰 나무를 심고 최승대를 옮겨 지어 봉우리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인위적으로 압살하고만 것이다.

 

도산의 자연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데가 있다. 유소년기, 어려운 살림에 형들이 농사일을 했기 때문에 소 키우는 일은 어린 안창호의 일거리였다. 서당에 다녀와 틈만 나면 소를 몰고 나가 산으로 들로 강으로 좋은 풀과 물을 찾아 다녔다. 들에 피는 꽃들을 좋아했고 가끔씩 그 들꽃을 한 아름 따다가 훈장님 책상에 꽂아 놓기도 하였다.

“오늘도 창호가 이 꽃들을 꽂아 놓았구나 ”

 

안창호는 11살 때 혼자서 황해도 구월산을 두루 여행하였다. 여행은 도전이고 결단이고 모험이다. 특히 혼자 떠나는 여행은 성찰과 통찰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수련이다. 낯섦에 대한 상황대응력이나 위험에 대처하는 위기관리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어린 안창호는 특별한 친구나 보호자 없이 깊은 산과 계곡으로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름 모를 풀과 꽃, 나무와 계곡의 물을 마시면서 야생동물이나 곤충, 새 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생명의 신비함과 철따라 변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새기는 일은 심미적, 정서적 인격형성에 기초가 되었을 터다. 성장기에는 특히 대동강을 바라보면서 자연사랑, 나라사랑, 국토사랑의 마음을 키웠다. 그러던 1894년, 그가 16살 되던 해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평양은 다른 나라들에 의해 한 순간에 짖 밟혀 피난을 했고 고향을 잃었다. 이 때 안창호는 위대한 자각을 했다.

“나라에 힘이 없다” “힘을 길러야 한다”

 

안창호는 피난길에서 곧바로 서울로 왔다. 그리고 구세학당에 들어가 신학문과 기독교에 입문했다. 구세학당을 졸업하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도 고향에 점진학교를 세워 앎을 나누고 실천했다. 안창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벗하며 심미적 역량을 키웠고 사물의 이치를 인과적으로 살피는 지적 역량과 진실을 존중하는 도덕적인 상상력을 키웠다. 그리고 그러한 힘을 최고의 차원으로 끌어 올려 지도력을 발휘했다. 평양에서 서울로 유학을 한 것도 24살 때 도미 유학을 떠난 것도, 1910년 망명을 결행하고 이후 평생토록 아시아, 태평양, 유럽, 아메리카 대륙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이끌 수 있었던 힘은 이렇게 형성되었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실천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선각적 개혁 사상가’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도산이 일생동안 추구한 사상은 민족개조, 사회개조, 국가개조 그리고 세계개조였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각 개인과 민족은 물론이고 사회와 국가,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까지도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 인류의 완전한 행복’이 인생의 가장 값진 최종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한 행복’은 문명에 있고 문명은 끊임없는 개조의 노력에서 얻어진다고 생각했다.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환경도,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 습관, 능력 등도,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체제와 내용도, 더 아나가서는 침략적이고 불평등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까지도 개조되고 변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19년 도산은 상해로 와서 내무총장의 자격으로 통합임시정부 수립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리고 경제, 군사, 외교, 교육, 문화 등 국가 건설의 기초 수립을 위한 시정방침을 제시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전략과 전술을 수립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독립전쟁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독립운동 근거지로 기능할 이상촌(도산은 거생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계획을 수립하고 부지 매입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산과 강이 있고 땅이 비옥한 지점에 200호 정도의 집단부락을 설치하되 도로망과 하수도, 상수도 등을 현대적으로 시설하고 가옥도 한국 건축의 특징을 살리면서 현대식 생활을 할 수 있게 또는 균일하지 않고 다양성 있게 세운다. 중략. 보통 교육 기관 이외에 직업인으로서 훈련을 철저하게 하기 위하여 농업, 양잠, 임업, 원예, 목축 등의 각과를 두고 공업 방면으로는 건축, 토목, 요업, 식료품 가공, 농구제조, 목공, 칠공, 농촌 상업 등을 포함시킨다. 교육방법은 실습에 치중하여 농사로는 논과 밭, 채소원, 과수원, 뽕밭, 조림 등을 실습하고 토목은 도로, 치산, 치수, 배수, 관개 등을 직접 경영하며 공업 부문도 같이 한다. (안도산 전서 440~441)”

 

물론 이 같은 이상촌 계획은 일본의 만주와 중국침략으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했고 1932년 윤봉길의거로 인해 도산이 피체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이상촌계획으로 대변되는 해방 조국의 新國 건설의 핵심은 역시 주요산업 진흥과 교육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특히 독립전쟁을 쟁취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사람에게서 나옴으로 도산은 인격개조, 인격혁명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하여 도산은 많은 연설과 담화문을 내놓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개조’에 대한 장문의 연설은 도산이 생각한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의 비전을 호소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 일부를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 일생에 힘써 할 일이 무엇일까요. 나는 우리 사람의 일생에 힘써 할 일은 개조하는 일이라 하오. (중략)

우리 전 인류가 다 같이 절망하고 또 최종의 목적으로 하는 바가 무엇이오? 나는 이것을 ‘전 인류의 완전한 행복’이라 하오. 이것은 고금동서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다 동일한 대답이 될 것이오.

그러면 이 ‘완전한 행복’은 어디서 얻을 것이오? 나는 이 행복의 어머니를 ‘문명’이라 하오. 그 문명은 어디서 얻을 것이오? 문명의 어머니는 ‘노력’이오. 무슨 일에나 노력함으로써 문명을 얻을 수 있소. 곧 개조하는 일에 노력함으로써 문명을 얻을 수 있소.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우리 사람이 일생에 힘써 할 일은 개조하는 일이라” 하였소.

여러분! 공자가 무엇을 가르쳤소? 석가가 무엇을 가르쳤소? 소크라테스나 톨스토이가 무엇을 말씀했습니까? 그들이 일생에 많은 글을 썼고 많은 일을 하였소 마는,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다만 ‘개조’ 두 글자뿐이오. 예수보다 좀 먼저 온 요한이 맨 처음으로 백성에게 부르짖은 말씀이 무엇이오? “회개하라” 하였소. 나는 이 ‘회개’라는 것이 곧 개조라 하오.

그러므로 오늘은 이 온 세계가 다 개조를 절규합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약한 나라나 강한 나라나, 문명한 민족이나 미개한 민족이나, 다 개조를 부르짖습니다. 정치도 개조해야 되겠다. 모두가 개조해야 되겠다 하오, 신문이나 잡지나 공담이나 사담이나 많은 말이 개조의 말이오. 이것이 어찌 근거가 없는 일이며 이유가 없는 일이겠소? 당연의 일이니 누가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오.(중략)

여러분이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십니까? 만일 너도 한국을 사랑하고 나도 한국을 사랑할 것 같으면 너와 나와 우리가 다 합하여 한국을 개조합시다. 즉 이 한국을 개조하여 문명한 한국을 만듭시다.(중략)

우리 한국을 문명한 한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개조의 사업에 노력하여야 하겠소. 무엇을 개조하잡니까? 우리 한국의 모든 것을 다 개조하여야 하겠소. 우리의 교육과 종교도 개조하여야 하겠소. 우리의 농업도 상업도 토목도 개조하여야 하겠소. 우리의 풍속과 습관도 개조하여야 하겠소. 우리의 음식, 의복, 거처도 개조하여야 하겠소. 우리 도시와 농촌도 개조하여야 하겠소. 심지어 우리 강과 산까지도 개조하여야 하겠소.

여러분 가운데 혹 이상스럽게 생각하시리다. “강과 산은 개조하여 무엇하나?” 하시리다 마는 그렇지 않소. 이 강과 산을 개조하고 아니하는 데 얼마나 큰 관계가 있는지 아시오?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소.

이제 우리나라에 저 문명스럽지 못한 강과 산을 개조하여 산에는 나무가 가득 서 있고 강에는 물이 풍만하게 흘러간다면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 되겠소. 그 목재로 집을 지으며 온갖 기구를 만들고 그 물을 이용하여 온갖 수리에 관한 일을 하므로 이를 좇아서 농업, 공업, 상업 등 모든 사업이 크게 발달됩니다.

이 물자 방면뿐 아니라 다시 과학 방면과 정신 방면에도 큰 관계가 있고, 저 산과 물이 개조되면 자연히 금수, 곤충, 어오(漁鰲)가 번식됩니다.

또 저 울창한 숲속과 잔잔한 물가에는 철인 도사와 시인 화객이 자연히 생깁니다. 그래서 그 민족은 자연을 즐거워하며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높아집니다. 이와 같이 미묘한 강산에서 예술이 발달되는 것은 사실이 증명하오. (중략)

그런즉 이 산과 강을 개조하고 아니함에 얼마나 큰 관계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다른 문명한 나라의 강산을 구경하면 우리 강산을 개조하실 마음이 불 일 듯하시리라. 비단 이 강과 산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개조하고 아니하는 데 다 이런 큰 관계가 있는 것이오. 그런 고로 모든 것을 다 개조하자 하였소.(하략)” (주요한 안도산전서, 641~647)

 

여기서 도산이 강조한 강과 산의 개조는 治山治水의 의미로 특히 친환경적인 개발을 의미한다. 즉 사람에게 이롭고 문명생활에 조화되는 생태계의 보존과 생명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자원을 보호하고 가꾸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도산의 ‘개조’ 연설은 전후 맥락을 깊이 살펴봐야 한다. 이 연설을 통해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면, 인류 공통의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나부터 작은 일부터’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천적인 교훈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지적, 도덕적, 심미적 요인을 아우르는 인격혁명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나쁜 습관을 개조하여 좋은 습관을 기르고, 게으른 습관을 개조하여 부지런한 습관으로 바꾸고, 야만적인 습관을 개조하여 참된 문명인이 되고, 분열하는 습관을 물리쳐 단결하고 통합하는 힘을 길러 대한의 독립을 쟁취하여 ‘복스러운 새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 도산의 외침이었다. (끝)

<씨알의 소리 214호 2011. 1,2월호 이은숙>

 

출처 : 무실역행
글쓴이 : 애기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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