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무한도전을 위하여

ddolappa 2008. 4. 2. 17:01

무한도전을 위하여

 

 


나를 위한 변명


내가 '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란 글로 무한도전 갤러리와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지난 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찌라시 언론의 도가 넘은 만행에 분노를 금할 수 없어 시작된 일이 이제는 하나의 습관처럼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과 온라인 상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는 게 리뷰를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 자신이 가진 '직업'과 '환경'에 갇히다보면 항상 자신과 비슷한 나이와 처지의 사람들과 만날 수밖에 없는 데 비해, 내 글에 반응을 해주는 각개각층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나는 토요일이 되면, 온갖 사무적인 일이나 지인들과의 만남조차 되도록이면 오전 중에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부득이 하게 참석해야 할 술자리라도 생기면 잠깐 얼굴을 비추고 빠져나오거나 리뷰를 써서 올려놓고 뒤늦게 찾아가기도 한다. 이것은 나의 '하찮은' 의무감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내가 해서 즐겁지 않았다면 진작에 때려치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주위에서도 급한 원고가 있다고 핑계를 대면 이해를 해주는 편이어서 아직까지는 다행이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히지는 않았다.


내가 리뷰를 쓰는 일은 대개 세 가지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일단은 당일 방송분을 그냥 아무 생각없이 웃으며 시청한다. 그 때만큼은 내가 리뷰를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최대한 나를 풀어놓고 즐겨야 한다. 취미가 일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아무것도 즐거운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다시 시청을 하며 장면과 자막을 하나하나 꼼꼼히 분석을 하고 기록을 한다. 이 과정이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보통 이 과정은 2시간에서 3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분석한 내용과 시청소감은 '무한도전 시청기'에 적히게 된다. 기록된 내용은 연습장 1장 내외의 분량으로 정리되지만 3장이 넘기도 하는데, 그건 그만큼 분석할 만한 내용이 많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다음에 나는 분석한 노트를 근거로 다시 복기를 하며, 서로 연관이 있는 장면들을 연결시키거나 전체의 구조나 주제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엮여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는지 구상을 한 다음 리뷰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구성이 완벽하면 글을 쓰는 시간이 비교적 짧아지게 되지만, 뚜렷한 내용이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경우는 참 난감해진다. 그 전에는 그나마 엉터리 언론들이 밑밥을 많이 던져주었기 때문에 기사들을 비판하는 내용만으로도 글을 가득 채울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기사들조차 드물어졌고 내가 비판할 가치조차 못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오히려 더 늘어난 셈이다. 따라서 나는 글의 구성이나 문체도 변화시켜야만 했는데, 그런 변화를 무도갤의 한 분이 지적하셔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사실 나의 글은 '리뷰'라기 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에 대한 구조 분석과 장면 분석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나의 개인적인 세계관과 언어를 거쳐 재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세이'라는 장르를 몽테뉴나 파스칼의 전통이 아니라 루카치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통에서 이해했을 때, 나의 '에세이'는 또한 넓은 의미에서 '비평'에 포함될 수 있다. '비평'이란 게 작품들을 매개로 비평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관'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대단한 것은 못 된다. 오죽했으면 내가 리뷰를 '발로 쓴다'고 표현했겠는가.

 


상징과 알레고리 사이에서


그런데 내 글에 대한 재미있는 반응 중에는 '꿈보다 해몽이 낫다'는 것이 있다. 이미 한 차례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 점을 생각하다가 여기에는 나의 글쓰기 방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글을 읽는 사람들의 빈곤한 인문학적 교양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예로 내가 동해 가스전을 '정치적 알레고리의 공간'으로 해석했던 리뷰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그 글에서 나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1954),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1976) 등을 예로 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섬'이란 토포스가 지닌 의미를 지적하며 가스전 역시 그러한 전통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썼다. 이 때에 돌아온 반응 중에는 가스전에 가고 싶으니까 간 것이지 무슨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시니컬한 반응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무한도전의 담당 PD인 김태호 PD는 한 인터뷰에서 동해가스전이나 뉴질랜드편의 '롤링페이퍼' 등이 섬이 줄 수 있는 고립감을 활용해서 기획된 에피소드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서병기 기자, '무한도전' 출범할 때 가장 고민한 것은? 08/03/06) 그에 따르면 '파리대왕'에서 무인도에 불시착한 10대 소년들이 원시적 모험담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잠재해 있는 욕망을 드러내듯이 고립되어 있거나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되면 친구 관계나 라이벌 관계가 생기게 되고 예상 밖의 상황도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명수가 반장에 당선이 되서 3주동안 댓가를 치르게 되고, 서로의 속마음을 '롤링페이퍼'를 통해 표현하는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 신문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 처음 들었던 느낌은 내가 옳았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김태호 PD처럼 공부를 하면서 오락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대단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감탄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웃음 속에 어떤 심오한 의미를 담아내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대다수의 평범한 PD들이 하는 일이란 성공한 프로그램을 열심히 모니터해서 모방하고 흉내내는 일이 전부이지 않는가. 그런 감독들에게 언론이 호들갑을 떨며 '무한도전'을 넘어섰다는 등의 '하찮은' 찬사를 연발하는 것을 보면 '썩은'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런데 나와 김태호 PD가 '섬'이란 토포스를 이해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가 '섬'을 '고립감'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심리학적'이고 '생산미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면, 나는 '섬'을 '정치의 무대'라는 알레고리로 이해하고, '문화사적'이고 '수용미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 중에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것일까?


일단은 동해가스전 자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생산자의 입장에서 출연자들의 심리적 상태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섬'이란 장소를 선택했다면 김태호 PD의 이해방식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투표에 참여한 제작진들 역시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여 박명수에게 기회를 줘보자는 쪽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효과적인 장소의 선택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가스전 위에서 출연자들이 벌인 퍼포먼스는 연말에 치뤄진 대선이라는 정치적 맥락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내가 분석을 했듯이 자막들과 상황들은 우리나라의 현실 정치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섬'이라는 토포스는 '고립감'을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라 '연말대선'이라는 다른 기표를 지시하는 '알레고리'로 이해하는 것이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보다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김태호 PD가 섬을 '상징'으로 이해하고 '동해가스전 편'을 기획한 것은 생산자 측면에서 가능한 것이지만 그가 실제로 만들어놓은 것은 '알레고리'로서만 수용될 때 이해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섬에 대한 상이한 이해방식은 양립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식사' 모티브는 공동체를 상징한다


'인도 특집'은 무한도전의 팬들에게조차 최악의 에피소드로 손꼽히고 있지만 과거 무한도전의 역사를 되짚어 보겠다는 제작의도를 염두에 두고 천천히 음미하다보면 상당히 정교하게 연출된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비록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리고만 형국이 되고 말았지만, 결과로 제출된 고양이 그림에서 충분히 호랑이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나는 '인도 특집'편에서 멤버들이 카레를 먹는 장면을 보며 '뉴질랜드'편에서 멤버들이 컵 라면 하나를 나누어 먹던 장면이 떠올랐다. 뉴질랜드의 광활한 눈밭에서 컵 라면 하나를 나누어 먹었던 멤버들의 모습은 그들이 한 가족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게 했고, 실제로 한 멤버는 고생을 하는 게 서러웠는지 한국에 두고온 가족생각에 눈물까지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이제 곧 떠나갈 하하를 옆에 두고 함께 카레를 먹는 그들의 모습은 정들었던 식구를 떠나보내야할 가족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라는 모티브는 이미 내가 리뷰를 통해 말했듯이 '괴물'이란 영화의 비평글들을 보면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이고 해서 비교적 손쉽게 그 장면들을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식사'는 '공동체적 분위기'를 전달하는 상징으로 이미 우리나라의 대중문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고, 서양의 경우 '최후의 만찬'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식사 장면은 2000년이 넘게 그들의 문화 속에서 '정신적 공동체'를 나타날 때 흔히 사용되어왔던 것이고 나중에는 '빵과 포도주'란 모티브로 변형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인터뷰에서 김태호 PD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일찍와주길 바래’ 같은 경우는 처음으로 리얼한 콘셉트로 가보기로 한 거였고, 기왕 멤버들이 늦는 걸 살려보자는 의도여서 우리로서는 터닝포인트였고, ‘뉴질랜드’ 때는 여름에 그냥 시원한 눈을 보여주기로 했던 거였고. 원래 알래스카로 가려고 했는데, 거기엔 눈이 없다는 얘길 듣고 2주 전에 뉴질랜드로 바꿨다. 그런데 거기서 정말 죽을 뻔 했다. 3000미터 위에서 차가 미끄러져서 낭떠러지로 쭉 내려가는데, 정말 죽는구나 싶어서 오히려 차분해졌다. (웃음) 거길 다녀오고 나서 서로가 뭉친 계기가 되었고. 그러다가 갑자기 시청자 층이 넓어졌다."(차우진과의 인터뷰, "<무한도전>의 경쟁 상대도 적도 <무한도전>이다” , 08/03/04)


여기에서 눈여겨 볼 점은 뉴질랜드 방문이 멤버들이 단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구절이다. 뉴질랜드 특집에서 멤버들이 단합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앞에서 김태호 PD가 언급한 것처럼 '롤링페이퍼'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장면과 눈 위에서 컵라면을 나누어먹던 장면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인도 특집'편에서 '롤링페이퍼' 장면을 비롯해서 뉴질랜드 특집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무한도전의 역사에서 그 에피소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카레를 나누어 먹는 장면을 컵라면을 나누어 먹는 장면과 연관시킨 것이나 그것을 '공동체적 분위기'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해석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기자들아, 제발 공부 좀 하자


최근에 울리히 벡이라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가 한국을 방문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앤서니 기든즈, 니클라스 루만 등과 더불어 현대 사회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그의 명성은 이미 전 세계에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나는 국내에 번역된 그의 대표작인 '위험사회'와 다른 저서들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그의 이름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사를 읽으며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노학자에게 한국에서 최근에 일어난 아이 유괴 사건이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묻는다는 게 무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울리히 벡은 대가답게 방문국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막힘없이 자신의 학문적 입장과 연관시켜 설명해나갔지만 꼭 그런 식의 질문을 던져야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그의 최근 관심 분야는 세계화 문제로 알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질문은 없이 수십년 전에 출간된 저서에 대해서만 묻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내가 더더욱 실망스러웠던 것은 그 기사 아래에 달린 댓글들이다. 기사 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인지 대체 당신이 무엇을 안다고 그에 대해 언급하냐고 따져묻는가 하면 심지어 '양키 고 홈'이란 댓글도 있었다.


물론 모든 기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댓글들 모두가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화의 바람이 불어 외국여행을 많이 경험했더라도 좀처럼 세련되어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기자들과 일부 시청자들이 식견이 없다는 사실은 '중국 특집'편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무한도전이 식목을 위해 찾아간 쿠부치 사막은 우리나라에 불어오는 황사의 40% 가량이 발원하는 곳이고, 황사로 인해 매해 피해액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황사 특집'을 시청하다 보면, '녹색장성'이란 이상한 단어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약간의 상식을 발휘해서 그 단어가 '만리장성'을 패러디한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 단어는 국내의 기업들과 민간단체들이 이미 몇 년 전부터 중국 정부와 협정을 맺어 벌여온 ‘한중 우호 녹색장성(綠色長城) 건설사업'의 줄임말이다. 그렇다면 무한도전의 중국 방문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에 대한 추리가 충분히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사막의 '녹색화 사업'이 지닌 의미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기사는 단 한 줄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시청율이 떨어졌다며 무한도전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기사들이나 <'무한도전' 中특집, 의미 찾을수록 재미 반감?>이나 <'무한도전' 중국에서 '물만 먹고 왔지요?'>하는 식의 비아냥거리는 기사가 전부였다. 시청자들이 불친절한 무한도전 때문에 혼란스러워 한다면 적절한 정보를 제공해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제대로 된 언론의 역할이 아닌가? 이미 언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지 오래이긴 하지만 시청자 수준보다 못한 기사들을 보면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괴상한 행동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중국 특집'에서 박명수는 짜증이 날 정도로 다른 멤버들에게 주어진 생수를 훔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박명수의 행동은 그의 괴퍅스러운 성벽으로밖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무한도전이 '리얼'을 표방하는 오락 프로그램이다 보니 그의 행동을 그의 본래 성격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무한도전은 정확히 말해 '리얼 버라이어티 쇼'이지 '리얼리티 쇼'가 아니다. 이미 서구의 '리얼리티 쇼'도 이미 어느 정도의 연출과 허구가 개입되어 있는 마당에 리얼리티쇼와 버라이어티쇼의 중간단계인 무한도전을 완전한 '리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리얼'과 '연출'을 중간 정도로 배합하는 형태의 쇼가 의도를 전달하는 데 보다 효과적일 수 있고,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극대화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박명수의 반복되는 기이한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을 단순히 그의 사악한 성격이 발현된 것으로 이해하고, 그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아니면 그 반복 속에서 어떤 논리를 발견해내고,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이 문제는 무한도전을 시청하는 시청 태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멤버들이 때로 보여주는 '상식 밖의 행동'을 그의 실제 성격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답변은 Yes이면서 동시 No이다. 즉 화면 속에 비춰진 멤버들의 행동은 일부 실제 성격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무한도전이란 허구적 세계 속에서 그의 캐릭터가 지시하는 법칙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연출자의 지시가 개입되고 있기 때문에 반복되는 이상 행동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인지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날 방송분을 시청하다 보면, 맨 마지막 장면에서 노홍철의 매니저인 '똘이'가 등장하며 '너무나도 기다리던 물과 함께 물 한 방울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란 자막이 등장한다. 박명수의 이상한 행동을 그 때라도 이해하면 다행이지만 이 둘을 서로 연결시키지 못한 사람에게 박명수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나마 이 둘을 연결시킨 사람이 있어서 사막에 갔으니 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우리나라가 물부족 국가에 포함된다는 사실과 연결시켜서 사유를 확장시킨다면, 무한도전을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 그렇다면 다시 묻도록 하자. 박명수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왜 무한도전이 환경문제의 지평을 확장시켰다는 기사는 없는 것일까?


서구의 선진국가들은 환경 문제를 한 국가만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인류 공동이 대처해야할 할 문제로 바라본다.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환경 문제를 미래를 선도할 환경산업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환경을 보호하는 일이 물건을 파는 일만큼이나 커다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환경산업을 미래의 부가가치 산업으로 장려하는 나라로 독일을 들 수 있다.


독일은 수년간 관료들, 학자들, 기업인들이 모여 '하이테크 프로젝트'라는 마스터플랜을 기획하고, 정당들 간의 치열한 논쟁과 논의를 거쳐 수반의 변화와 상관없이 독일의 미래를 걸고 프로젝트를 진행시켜오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정부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학계와 실무 기업인들 간의 원활한 소통을 도와주는 기능에 머물면서 초당적이고 초부서적인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기획안 안에는 IT산업이나 생명공학과 같은 BT산업 뿐만 아니라 환경산업을 미래를 주도할 혁신적인 산업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해서 보아야 했던 것은 그들조차 실패한 사업이라고 생각하는 대운하 건설이 아니라 독일이 21세기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물론 건설업자로 잔뼈가 굵어온 그에게 흉물스러운 건물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국가 경영을 정치적인 마인드가 아닌 기업가의 마인드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무한도전의 중국 방문은 단순히 외화를 낭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세계적 흐름에 부합하는 혁신적인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라인업의 태안 봉사 활동을 오락 프로그램의 지평을 확장시킨 획기적인 방송이었다고 떠들어대던 언론들이 무한도전에 대해서는 침묵을 하거나 실패한 프로젝트로 비아냥거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들의 인식 수준이 그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며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오락 프로그램은 어떻게 환경 문제를 다룰 수 있는가?


그런데 오락 프로그램이 환경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라인업이 아니라 무한도전이나 기타의 다른 오락 프로그램이 태안을 방문했다면, 여론은 똑같이 환경문제의 지평을 확장시킨 프로그램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찬사는 프로그램의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닐까? 소재만 적절하게 선택한다면 누구나 그러한 찬사를 받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최근에 나는 태안을 방문했던 라인업을 시청하며 무거웠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이 삼성 중공업이 저지른 인재임에도 마치 자연재해인 것처럼 다루어졌고, 검찰 역시 사건 책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애매한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참혹한 광경을 방송으로 내보냈던 라인업 역시 사건의 원인이나 대책마련을 위한 성찰을 담는 대신에 시청자들의 감정에만 호소하는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당시에 태안이 봉사자들의 노력 덕택에 깨끗해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보도기사가 나온 뒤였기 때문에 아직 기름 제거를 하지 못한 섬 주변이나 인력이 닿지 않는 부분들을 조명하려는 시도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라인업의 태안 봉사 편을 시청하며 마음놓고 웃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던가? 우리가 그런 심각한 사건의 당사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웃을 수 없기도 했지만 그것은 시청자들을 선동하는 자극적인 자막과 멘트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태안 봉사 활동이 분명히 훌륭한 행위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쇼 오락 프로그램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환경 문제와 같은 심각한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질문은 미국의 9.11. 테러 사건에도 던져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건 당시 붕괴하는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떨어지고 있는 장면이 캠코더에 녹화되기도 했는데, 사건 직후 촬영된 장면을 지켜보며 아무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후에 미국의 한 대학강당에서 그 장면을 보여주자 관람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캠코더에 촬영된 한 남자가 건물에서 떨어지며 우스꽝스러운 욕설을 했기 때문인데 자신의 몸이 건물 밖으로 떨어지는 심각한 상황과 부조화를 이루는 그의 욕설은 웃음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 직후에 사람들은 분명 우스꽝스러운 장면인데 왜 웃을 수 없었을까? 그것은 너무나 심각한 그 사건이 사람들의 유머감각과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마비된 이성의 상태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란 어떤 것인지 그 후 미국정부가 보여준 옹졸한 정책들을 통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무한도전이 환경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은 사람들의 횡경막을 자극해서 사건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구호나 감정에 대한 호소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도갤의 한 분이 정확히 지적을 했듯이 오히려 정보가 빈곤해서 무한도전이 벌인 행동을 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전문가를 동반해서 설명을 첨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 분의 제안은 정말 적절하다고까지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한도전의 그런 불친절함이 오히려 미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문가를 초빙해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고, 의미를 설명하고, 시청자들에게 동참을 유발하는 방식은 이미 다른 오락 프로그램에서 해오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황사 문제를 다룬 다큐멘타리나 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하는게 도움이 되지 굳이 오락 프로그램을 시청할 까닭이 없다고 본다.


반면에 무한도전은 환경문제라는 진지한 주제를 지극히 오락 프로그램답게 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박명수가 보여주는 상황극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다소 엉뚱하지만 코믹한 상황극은 이성을 마비시키지 않으면서도 '물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를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도표나 자료를 제시하지 않아도, 전문가가 나서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박명수의 모습을 시청한 시청자라면 초등학생조차 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을까? 유아 프로그램처럼 유치하지 않으면서도 교양시사 프로그램처럼 무겁거나 따분하지도 않으면서 예능 프로그램답게 환경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이 있었던가 생각해보자.

 


각자의 리뷰를 씁시다


나는 시간에 쫓겨 맞춤법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내용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사들을 보며 '속도'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느리지만 확실한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될 때 우리 사회가 더 풍요롭게 되지는 않을까 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나는 사실 일부러 장문의 리뷰를 쓰고 있다. 인터넷 댓글들은 대개 1-2줄 정도의 간략한 내용을 담고 있고 그 이상의 글은 잘 읽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비난을 받기조차 하는 일을 목격하곤 한다. 게다가 요즘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바쁘다 보니 소설이나 시를 읽는 일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호흡이 긴 문장을 읽어내는 훈련이 부족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호흡이 긴 문장을 쓰기로 했다. 그러면 악플러들 따위란 내 글을 읽지도 않을테고, 무한도전을 정말 아끼는 몇몇 분들하고만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다짜고짜 욕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아서 내 기대는 어긋났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비교적 안락하게 인터넷 공간 상에 내 글을 지켜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리뷰를 쓰며 한가지 원칙만큼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다. 그것은 무한도전의 구조나 주제와 같은 문제를 다루지만 내 개인적인 감상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각자의 유머감각에 따라 엇갈린 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 부분은 확실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10대 청소년에서 50세를 넘은 중장년층까지 폭넓은 시청자를 자랑하는 무한도전에 대해 각자의 입맛에 꼭 맞는 글을 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전체적인 구도를 확인할 수 있는 가이드 라인만이라도 제대로 그려볼 수 있다면, 부족한 부분은 각자의 입맛에 따라 채워넣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 원칙만큼은 확실하게 지키려고 노력한다.


헌데 내가 게시판의 글들을 읽으면서 혹은 다른 분들과 댓글로 대화를 나누면서 느끼는 점은 서로의 공동 분모도 존재하지만 참으로 다양한 연령 때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무한도전이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분들은 각자의 시청소감을 짧은 댓글이나 짤방용 화면을 통해 표현하기도 하고, 나처럼 긴 문장을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은 머리 속에 담긴 생각과 이미지를 객관화하고 분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독서를 통해 우리의 기억에 남게 되는 건 문자의 형태가 아니라 이미지의 형태를 띤다. 그리고 일단 생성된 이미지는 때로는 기억으로 또 때로는 선입견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독서를 반복함으로써 책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을 부수는 행위일 수 있다. 글로 써보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뭉뚱그려진 이미지를 문자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던 기억과 이미지들이 분석되고 객관화되기 때문에 자신과 세계에 대한 관계를 새로 정립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각자의 리뷰를 써보는 일은 비슷한 나이대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호소력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인간 관계를 맺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한 여고생이 쓴 리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중년의 성인 남자인 내가 도저히 쓸 수 없는 귀여운 문체와 재기발랄함으로 무장한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무한도전을 시청하는 방식 역시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점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내가 배울 수 있는 점도 있었던 글이었다.


물론 글이라는 게 일정한 연습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무도갤의 가족들로부터 의견을 듣기도 하고 수정을 해나간다면, 기사보다 더 훌륭한 내용이 담긴 자신들만의 무한도전 리뷰를 누구나 하나쯤은 갖게 되지는 않을까? 마음 속에만 간직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때로는 연습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 사랑의 표현이 절실한 때가 아닐까.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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