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13>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 무한도전 99회(080405) : 무한도전 가족 1) 까마귀의 꿈 2) 하찮은 형의 결혼식
그래도 사람마다 꿈이 있잖아요?
그대는 아직도 삶에서 꿈을 간직하고 있는가? 어느날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비루하고 누추해져 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서글픈 마음에 목이 메였던 적은 없는가?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누구나 이렇게 사는 거라고 위로해 보지만, 아무에게도 차마 고백하지 못한 자신만의 소중한 꿈 하나쯤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명수의 매니저인 정석권 실장의 개그맨 도전기는 바로 이처럼 개인마다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이루지 못한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닌가 하는 우려섞인 질문에 "그래도 사람마다 꿈이 있잖아요?"라는 그의 대답은 그래서 희망을 갖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되어버린 '88만원 세대'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올 것 같다. 강퍅한 현실에 이미 모든 것을 다 알아버렸다는 태도를 취하더라도 꿈을 잃은 젊은이의 그런 태도는 성숙과 무관한 조로(早老)의 징후이니 말이다.
그런데 MBC 공채 개그맨 시험에 도전하는 정석권 실장과 최종훈 코디를 지켜보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웃음조차 앗아가는 정석권의 'Killer 콘테츠 까마귀 가족'을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은 '늘 걱정하듯 말하죠 / 헛된 꿈은 독이라고 /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 현실이라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5년 지기인 박명수의 태도는 싸늘하다 못해 냉혹할 정도다. 그는 친구 정석권에게 '매니저 관두고 하라고 그래.', '떨어질 걸 뭐하려 해? 내 스케줄이나 잘 정리해.'라며 쓴소리도 해보고, '왜 사서 고생을 하려는지, 되고 나서가 더 어려운 건데.'라며 차분하게 설득도 해보고, '재능이 있어 개그맨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나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타격이 너무나 커.'라며 진심으로 걱정하기도 한다. 누가 모르겠는가? 호통을 치고 차갑게 말을 해도 그 안에는 신인시절 자신이 겪었던 고생을 마흔이 다 된 친구가 지금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따뜻한 씀씀이가 담겨 있다는 것을.
무한도전은 이미 90회에서 부친상을 당한 최종훈을 찾아가서 위로하는 이야기와 하하의 집을 방문해서 새해 인사를 드리는 이야기로 '가족'이라는 주제를 다룬 바 있다. 이번 방송분은 그런 점에서 '가족'이란 주제를 반복하고 있지만, 개인의 '꿈'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성은 김현철과 박휘순이라는 중고신인과 무명신인이 등장했던 에피소드와 연결될 때 보다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는 무한도전 97회 <레슬링편>에 등장했던 김현철과 박휘순을 부득이 하게 떠올리게 한다.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들과 함께 한 지난 특집에서 게스트로 초청된 청춘스타 조인성 대신 촬영에 임한 김현철과 박휘순을 두고, 혹자는 무한도전의 재미를 그들이 망쳐버렸다고 비난을 하기도 했고, 또 혹자는 조인성을 '기회를 잡은 자'로, 박휘순을 '기회를 놓친 자'로, 김현철을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나 역시 그 때 당시 김현철과 박휘순이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TEO PD의 연출의도였다. 매끄럽고 원만한 진행을 위해 어깨 탈골 위험이 있는 박휘순을 빼고 김현철을 당장에 투입시키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고, 무한도전이 아무리 '리얼'을 추구한다지만 본촬영을 중단시켜 가면서까지 그들로 인해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사건들을 시시콜콜 방송에 내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 에피소드를 다룬 리뷰에서 나는 김현철과 박휘순을 통해 개그맨들의 비애를 엿볼 수 있다고 썼는데, 그건 그보다 앞서 촬영된 정석권 실장과 최종훈 코디의 개그맨 도전기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번 에피소드는 늦게 방송되었지만 시간상 먼저 촬영된 것이고,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도 앞에 놓여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석권과 최종훈은 개그맨이 되는 과정의 어려움과 고민을 담고 있다면, 김현철과 박휘순은 개그맨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에피소드를 시청한 후에 김현철과 박휘순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본다면, 꿈을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고 그들에게 보다 너그러운 시선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 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 혹 때론 누군가가 뜻모를 비웃음 내 등뒤에 흘릴때도 / 난 참아야 했죠 참을수 있었죠 그날을 위해'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앞에 /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
찮은이 형 장가가던 날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장가를 가는 박명수를 보면 문득 칸트가 떠오른다. 칸트는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평생을 규칙적인 산책과 당구로 소일을 하며 저술 활동에만 몰두한 채 독신으로 살았다. 그도 젊었을 때는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자 용기를 내서 그녀가 그에게 먼저 청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는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마침내 칸트가 결혼을 해야할 354가지 이유와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할 350가지 이유를 정리하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7년이 흐른 뒤였고, 그녀는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나친 우유부단함이 결혼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는 이 에피소드는 그러나 칸트가 남긴 또 다른 문장을 읽게 되면 달리 이해될 수도 있다. 그는 훗날 '내가 젊었을 때는 돈이 없었고, 돈이 생긴 뒤에는 너무 늙어 있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대학 정교수가 되지 못한 채 가정 교사 생활로 근근히 살아가던 �은 칸트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여하튼 박명수는 '가을소풍 특집'에서 여자친구와 싸움을 하고 실의에 젖어 '딱따구리 명수'를 탄생시키게 했던, 하하가 박명수와 그의 여자친구의 관계를 폭로해서 끊임없이 그의 입을 막아야만 했던, 멤버들로부터 여자친구의 성이 '한'씨라서 '한의사'를 만나러 간다고 놀림을 받아야 했던, '가스전 특집'에서 무한도전 달력을 개업을 한 여친을 위해 사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구설수에 오르게 했던, 무한도전을 위해 말을 아껴서 그의 기자 회견장을 찾은 기자들로부터 두고두고 뜨거운 눈총을 받아야 했던, 바로 그 '형수님'과 결혼을 한다. 그의 매니저 정석권 실장이 자신의 꿈을 위해 '도전'을 한다면, 박명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도전'을 하는 셈이다.
'무한도전 퀴즈의 달인' 시절부터 멤버들로부터 '보고도 못 믿을 초혼'이라 놀림을 받아도 '월드컵 이후 최대의 축제'인 '개그계의 하찮은'의 '세기의 결혼식'은 '아쉬움 제로 사람 하나 구제해주는 기쁨'만이 넘쳐난다. '부상이후 폭주하는 16기통 퀵마우스' 노홍철이 '글자라도 보일 때 가야죠 형님, 빨리.'하고 정곡을 찔러도, 결혼식이 왜 4월 6일이냐며 묻고 '망통아냐? 4+6!'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악마의 아들도 혀를 내두르는 독기'를 내뿜어보지만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도 울고 갈 절대악 하찮은'의 반도 안 되는 독기일 뿐이다. '악의 길'은 그만큼 높고도 험하다는 사실을 박명수와 함께 보낸 4년의 시간이면 노홍철도 충분히 깨닫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냥 당하고만 있을 박명수가 아니다. 미국 공연 일정 때문에 공교롭게도 박명수의 '세기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된 정준하, 정형돈, 노홍철에게 박명수는 '무한도전 예전부터 하하하고 너(유재석)만 있으면 되지 뭐. 나머지는 밑밥이지, 밑밥'이라며 일격을 가한다. 결혼을 앞두고 착해질 법도 한데 무한도전의 '악의 축' 박명수는 자신의 섭섭함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다 함께 결혼식에 참석을 할 수 없는 미안한 마음에 촬영이 없는 일요일에 박명수를 1등 신랑감으로 만들기 위해 멤버들이 모이긴 했지만, 박명수를 위한 마음이 무한도전식으로 표현되다 보니 그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쏭달쏭하다. 늙은 신랑에게 첫날밤에 도움이 되라고 '생명테라피'을 받게 하지만, 남게 되는 건 박명수의 등에 활짝 핀 성인여드름이 그려놓은 '지옥 탈출 지도'와 '하찮은의 섹시화보 싼타나'뿐.
2단계로 박명수의 애매한 얼굴 윤곽을 살려주기 위해 메이크업(Make Up)이 아닌 리모델(Remodel) 작업인 '메이크 오버'(Make Over)를 해보지만, '병색이 완연한 봄신랑'의 모습을 닯은, '소년명수'에서 '청년명수'로의 변신만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모든 걸 가진 남자로 대변신', 'Cute & Young 하찮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매력', '멋있다! 잘 생겼다!! 닮고 싶다!!!'고 아무리 포장을 해봐도 사치스러운 미사여구일 뿐 그의 얼굴은 '응사마'를 닮은 '명사마'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기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미스코리아 특집'에 출연하기도 했던 신부 '노홍례'를 상대로 신랑, 주례, 초대가수의 1인 3역을 소화하고, 멋진 신혼방도 함께 꾸며 보지만 사악한 TEO PD가 '대체 에너지 특집' 때 사용했던 '발로 구르는 차'를 웨딩카로 꾸며 놓았을 줄이야 누가 알았던가.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무한도전식의 축하방식인 것을! 그래도 '형수님 모쪼록 부족한 우리 큰형님 잘 부탁드립니다'고 솔직한 심정을 전달하지 않았나.
하이네는 '결혼은 어떤 나침반도 일찌기 항로를 발견한 적이 없는 거친 바다이다'라고 말했지만, 겉으로는 차갑고 냉정한 '악마의 아들'이지만 속으로는 따뜻한 마음씨와 배려는 감추고 있는 '하찮은'의 본심을 알고 있다면, '형수님'이 능수능란하게 지도편달을 해서 안전하고 행복한 항로를 찾아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시청율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요즘 기자들이 보여주는 재미있는 행태 중 하나는 무한도전이 방영된 토요일에는 무난한 내용의 기사를 쓰고, 시청율이 발표되는 일요일에는 떨어진 시청율을 근거로 비난 기사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두어번이긴 하지만 30%의 시청율을 넘었던 적이 있던 무한도전이 20%대의 시청율을 보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토요일 오후 시간대에서 그만한 시청율도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기자들이 설레발을 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간 눈꼴사나운 것이 아니다.
무한도전이 한창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시기인 2006년과 2007년의 시청율을 보더라도 20%를 넘었던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시청율이 약간 떨어져도 20% 가량의 시청율을 보이고 있는 무한도전에게 1% 가량의 시청율이 올라도 채 5%의 시청율이 안 되는 경쟁 프로그램을 보고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두뇌에서 나온 계산법인지 모르겠다. 혹시 그 기자도 뇌용량이 2MB밖에 안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기자들이 왜 그렇게 시청율에 집착하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TV시청은 다양한 여가활동 중 하나이다. 쾌창한 토요일 오후를 방에 처박혀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근교로 여행을 가던지, 연인과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던지, 연극이나 영화, 콘서트와 같은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VOD, DMB, 인터넷, 케이블TV 등 다양한 매체들이 경쟁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공중파 채널에만 집중된 시청율 조사가 정확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더우기 표본집단 수가 수천에 불과한 조사결과를 놓고 대중들의 관심이 정확히 반영된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정확한 데이터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표본집단 수를 늘릴 필요가 있고, 또한 다매체적 환경을 반영할 만한 종합적 역학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은 없이 근거가 턱없이 부족한 시청율에 의거해서 프로그램의 질과 재미를 평가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행동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하지 않는 시청율 결과 발표를 왜 그렇게 기자들이 나서서 하는 것인지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도대체 시청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광고주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 시청자가 시청율을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시청율이 높은 프로그램을 시청하면 재미가 증가하는 것인가 아니면 시청한 사람의 높은 수준을 증명하는 것인가?
나는 우리나라의 소위 '문화부' 기자들이 시청율에 집착하는 이유가 그들이 프로그램을 정확히 분석할 만한 능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청소년들보다 못한 줄거리 요약 능력을 보여주는 기사를 쓰거나 시청자 게시판에서 찾기도 어려운 몇몇 시청자들의 의견을 전체를 대변하는 것인양 인용하는 모습은 그들의 무능력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러니 시청율이라는 확실한 숫자를 근거로 삼아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만큼 손쉽고 욕을 덜 먹는 방법이 있는데 왜 다른 노력을 하겠는가. 그런데 문화적 가치가 그렇게 숫자놀음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문화권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뿐이다.
더욱 우스꽝스러운 점은 억지춘양격으로 서로 시간대가 다르고 상관도 없는 프로그램들 간에 경쟁 관계를 만들어놓고, 시청율을 근거로 요즘은 이 프로그램이 소위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식으로 소개하는 기사들이다. 정치에서도 '될 사람을 밀어주자'는 식의 어이없는 구호가 나라를 이처럼 말아먹고 있는데, 문화의 영역에서도 '대세론'이 득세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문화의 다양성을 위하여
약간의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문화의 힘은 획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개개인들이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역으로 그 사회가 그만큼 민주적일 수 있다는 사실마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욕망하게 될 때 그 사회는 홉스식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누군가를 살해해서 질서를 되찾으려는 제의의식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지라르가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모두가 획일화된 욕망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일 뿐이다. 그렇다면 기자들이 꿈꾸는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청율이라는 숫자의 마법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문화에 대한 분석은 어떤 식으로 가능한 것일까? 사람들마다 제각각의 '취향'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니 각자의 다양한 취향을 인정하면 족한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비평활동이 무의미해져 버리고, 프로그램에 대한 정당한 피드백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각자의 개인적 경험으로 환원되어버리면, 보편성이란 게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취향'의 문제를 진리의 문제로 환원시켜 절대적인 미적 기준이 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까? 그럴 경우 개인의 다양성은 존재할 수 없게 되고, 모든 것은 '미적 판관'에 의해 평가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문제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해결하고자 한 문제였다.
칸트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 '공통감'이 있다고 전제를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인간의 감정이 보편적으로 전달 가능한 까닭은 공통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다양성은 인정되면서도 모든 사람은 '공통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공통감'이 우리의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는 지극히 관념론적인 생각이다. 반대로 '공통감'을 인간이 도달해야 할 어떤 이념이나 목표로 뒤집어서 생각을 해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된다. 즉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가능한 까닭은 그들 간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해야할 필연성이 생기게 된다. 서로 공통점만 존재한다면 말도 필요없이 이해할 수 있으니 의사소통 과정이란 것이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문화나 프로그램 분석에 적용시켜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한 문화가 활기있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들을 말살하고 일렬로 줄세우려는 시청율이라는 거짓 기준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프로그램 분석 역시 한두명의 편향된 시각을 전체를 대변하는 것인양 소개하는 대신에, 시청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해서 활발한 의사소통을 유발하는 프로그램이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활발한 의사소통이 임성한식의 논란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한 프로그램 안에서 다양한 해석 관점들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다양한 연령대의 시청자들과 다양한 계층의 시청자들이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더 없이 훌륭한 프로그램이 아닐까. 바로 이 점이 내가 무한도전을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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