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家 사라진 철학계… 누가 哲學을 죽였는가
입력 : 2004.08.18 18:38 52' / 수정 : 2004.08.18 18:43 56'
왕이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주위의 신하들은 진혼무(鎭魂舞)를 춘다. 그러면서 각자 자신의 독약이 왕을 죽인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사인(死因)은 왕 스스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왕은 철학(哲學)이다. 신하들이란 지금까지 철학에 독설을 가한 유명 철학자들과 그 비판을 재생산한 이런저런 철학자들이다. 니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마르크스, 데리다, 로티…. 우리는 이들이 ‘전통’ 철학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새로운 철학의 시대를 열었다고 기대하기도 했고 때론 그렇게 단정하고 싶기도 했다. 이들의 사상은 우리처럼 자생적 철학이 미약한 곳에서 철학의 유행, 혹은 ‘유행철학’을 주도했다. 실제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철학계에선 대체로 실존주의(60~70년대), 분석철학(70~80년대), 마르크스철학(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90년대) 등이 사상의 유행을 이끌어왔다. 심각한 후유증낳는 현대 과학기술이 ‘아버지’ 철학을 위협하는 시대 유행만 남고 철학은 죽었는가? 어떤 사상도 철학 그 자체에 결정적 치명타를 가하지는 못했다. 철학의 죽음이 실은 철학의 유행을 타는 사람들의 ‘상상 살해’에 머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티를 살해하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런데도 철학의 종말을 단정하거나 예언하는 일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사람들도 철학의 향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철학의 무용(無用)을 외치는 사람들의 삶에조차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소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은 무엇 때문인가? 여기서 우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이르게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하기는 ‘경이로움’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여기서 경이로움이란 놀라움뿐만 아니라 공포와 불안도 포함한다. 그래서 인간은 알고 싶어한다. 무상(無常)한 세상을 관장하는 불변의 진리를 찾고 그것을 형이상학적 체계로 보존하여 그곳에 안주하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앎을 추구한다는 애지(愛知), 즉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렇게 탄생했다. 필로소피아, 혹은 애지, 혹은 철학은 사유(思惟)의 역동성 그 자체를 중시한다. 끊임없는 지적(知的) 욕구는 또 ‘모든 것’, 즉 전체를 아우르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이런 지속적이고 범위 확장적 경향은 ‘애지의 광기’에 이런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만, 사유 주체의 위상을 극대화하고 모든 객체를 지배의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필로소피아의 이런 본질은 고대 자연철학에 내재해 있었고 근대 과학기술 발달의 저변에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서구 철학계는 문명의 본질 앞에서 思惟의 소강상태에 놓여있어 인간은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되돌아갈 수는 없어도 되돌아볼 수는 있으며, 철저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철학의 유산에는 지혜의 보고(寶庫)라는 것 이상으로 수인(囚人)의 표지가 있다. 오늘날 철학자는 필로소피아의 인류사적 ‘범죄’를 재구성하고 분석하며 성찰하는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에는 증거 자료로 철학사에 남은 수많은 고전을 재해석하는 임무도 포함된다. 이와 함께 필로소피아 바깥의 시선 또한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데 다양한 인류의 지적 유산들 사이에서 협동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동양철학이라는 통칭 안에는 사실 수많은 사유의 역동성들이 있으며, 동·서양의 도식적 구분 밖에도 다양한 감성과 이성의 유산들이 산재한다. 필로소피아 없이 인류는 더 ‘잘’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유의 협동 없이 더 잘 살 수는 없다. 여기에 철학의 보편적 의미가 있다. 사유의 협동은 국내 학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세계적인 차원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협동의 차원이 전(全) 지구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좀 더 구체적인 데에 있다. 지금 서구철학계는 인류 문명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사유의 ‘소강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본질적 질문인가? 오늘날 누구든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바로 ‘희생이 합리적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뭔가 얻기 위해서는 뭔가를 잃어야 한다는 것은 고대인들의 지혜였다. 그래서 신화의 시대에는 경이로운(앞서 언급한 의미에서)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희생의 의례를 치렀다. 트로이 원정에 나선 아가멤논은 올바른 뱃길을 알기 위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자신의 딸을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 그것은 성스러운 의례였다. 문명성찰과 함께 권력비판 사고할때 ‘누가 철학 구했나’ 묻게 될것 철학은 경이로움의 합리적 실체를 찾으려 했다. 반면, 과학은 경이로움의 현상을 기술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잃는 것 없이 얻는 방법을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희생은 선행되지 않았을 뿐 뒤따라 왔다. 자연 파괴 등 과학기술에 의한 문명발전의 부작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철학과 달리 변명을 갖고 있다. 어떤 심각한 후유증이 있더라도 과학 자신은 중립적이라는 변명이 그것이다. 즉 과학기술적 결과를 ‘활용하는 지혜’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공은 그래서 다시 철학에 넘어왔다. 더구나 과학은 철학의 자식 아닌가. ‘합리적 희생’을 설명할 수 있는가, 또 그것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다시금 철학의 말문을 막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소강 상태 때문에 철학이 실업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은 큰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항상 부지런하다. 철학은 우리에게 ‘산이 아니라 마을 쪽에서 견디라’고 한다. 속세에서 견딘다는 것은 비판 정신으로서의 철학의 임무를 일깨운다. 이 점에서 철학은 소중하다. 속세의 권력은 생각을 결정적으로 굴복시키지 않는 한 생각 옆에서 항상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되도록 많은 ‘생각들’이라면 사회는 덜 위험하다. 문명성찰적 사유와 함께 권력비판적 사고의 임무를 잘 이행할 때, 우리는 ‘누가 철학을 살해했는가’ 묻지 않고, ‘누가 철학을 구했는가’ 묻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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