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 관련 고전 지문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존 롤즈, 『정의론』
노르베르토 보비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에머리히 코레트, 『인간이란 무엇인가』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피히테, 『인간의 소명』
공자, 『논어』
장자, 『장자』
박지원, 『열하일기』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1. (자유의 의미)
우리는 인간의 태도를 ‘거리감*’ 유지의 능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인간은 사물을 직접적으로 본능에 얽매여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이 사물과의 거리와 간격을 유지할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은 스스로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본질을 초월하는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도 거리와 간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인간은 더 높은 위치와 더 넓은 시야를 획득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사물 자체의 고유한 존재와 의미 안에서 사물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오로지 인간만이 하나의 의미 형태를 파악할 수 있고, 의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인간만이 자신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가치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세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목표를 설정할 수 있고, 사물을 파악하고 사용할 수 있으며, (기존의) 가치를 실현하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으며, 문화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세계는 결코 완성된 세계도 고정된 세계도 아니다. 인간의 세계는 끊임없이 확대되고 계속 형성되어야 할 열려 있는 세계이다. ‘세계 개방성’은 인간이 세계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과 인간의 세계가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註* 인간은 환경에 얽매여 있는 동물과는 달리 환경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함으로써 환경에 맞서 환경을 지배한다. 막스 쉘러(M. Scheler)는 이런 인간의 능력이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중략)…
여기서 인간 행동의 기본 구조로서 나타나는 것은 직접 주어진 바로부터의 지양을 의미하는 ‘중재된 직접성*’ 그리고 자발적인 중재를 의미하는 중재된 직접성이다. 이 중재된 직접성은 그 근본에 있어서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바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의 원초적인 본질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기본 자유’라고 한다. (註* 인간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정신 작용을 통하여 반영된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중략)…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조건지워진 자유이다. 인간의 자유는 이미 인간의 유한한 본질에 의해 그리고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 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 안에서 인간은 각각 제한된 가능성들과 대결해야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에 당위와 가치의 규범이 미리 주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또한 제한된 자유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는 의미가 없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선(善)의 인정과 실현 안에 발생하는 의미 있는 자기 발전이다. 자유는 선과 존재 당위에 예속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는 참된 의미를 갖게 된다.…(중략)…
이렇듯 인간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인간 현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다. 개별적인 결단이 자유로운 선택 안에서 발생한다면, 이 결단은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자유를 전제한다. 이 자유를 통하여 우리의 현존재는 근본적이며 본질적으로 자유롭게 된다. 기본 자유는 선택의 자유를 조건지우면서 선재(先在)하고 있다. 이 기본 자유는 우리의 전체 행동이 자연의 예속성으로부터 해방되고 자기 처리에 책임을 지는 한, 우리의 전체 행동을 규정짓는다. 기본 자유를 통해 질료적이고 감각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개방성 안으로 자유롭게 되는 정신적 인식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다른 한편 기본 자유는 가치와 가능성들에 대한 정신적 인식을 통해 구체적인 선택에 대한 분명한 결단을 중재한다. 이 선택이 의식적인 자기 처리와 자기 규정을 의미하면 할수록, 그리고 우리의 자존의 중심으로부터 혼신의 노력으로 참된 책임 아래 완성되면 될수록 인간의 자유는 더욱 더 실현되고 발전된다.
― 에머리히 코레트, 『인간이란 무엇인가』
2. (참다운 자유)
이러한 혼란스런 생각의 와중에서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는 신성모독적인 생각이 테레사의 영혼 속에서 싹텄다: 카레닌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 더 크다는 것이 아니라 낫다는 것이다. 테레사는 자기 자신이나 토마스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를 더욱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단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적어도 여러 형태 중에서 최상의 경우라도)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 역사의 이러한 기형태는 아마도 조물주가 계획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사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의 한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는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사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남자가 자기 부인을, 그리고 여자가 자기 남편을 바꾸고 싶어하는 것처럼), 단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 (자유의 의미)
자유의 기본 영역으로 다음의 셋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내면적 의식의 영역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적이거나 사변적인 것, 과학 ⁃ 도덕 ⁃ 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의견을 표현하고 출판하는 일은 타인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다른 원칙에 의해 규제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도 생각의 자유만큼이나 중요하고 또 생각의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보호되어야 하므로, 이 둘을 떼어 놓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어렵다.
둘째,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녀야 한다. 각각의 개성에 맞게 자기 삶을 설계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갈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러한 일이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설령 다른 사람의 눈에 어리석거나 잘못되거나 또는 틀린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런 이유를 내세워 간섭해서는 안 된다.
셋째,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서 이와 똑같은 원리의 적용을 받는 결사(結社)의 자유가 도출된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그리고 강제나 속임수에 의해 억지로 끌려 온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성인이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든 이 세 가지 자유가 원칙적으로 존중되지 않는 사회라면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자유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각 개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4. (참다운 자유)
언젠가도 말씀 드린 일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누구나 오늘의 자기 현실을 최종적이고 불가변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현실은 내일 다시 선택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 내일의 선택이 열려 있지 않는 한 그 현실은 누구에게도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섬 위에 꾸미고 계신 원장님의 천국은 어떻습니까. 정직하게 말해 그것은 이 섬 원생들의 천국이기 전에 우선 원장님의 천국인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오직 원장님 한 분만의 천국일 수도 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이 섬 원생들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편안히 지내다 갈 수 있는 그런 천국을 꾸미고 싶어하십니다. 원생들 역시 즐거이 그 천국을 받아들여야 하리라고 굳게 믿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그 천국을 바꾸거나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계십니다. 원장님께서는 그처럼 누구도 그 원장님의 천국을 거역할 수 없는 필생의 천국을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하지만 진정한 천국이라면 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할 것이고, 적어도 어느 땐가는 보다 더 나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천국이란 실상 그 설계나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보다는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택 여부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더욱 큰 뜻이 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만 있었을 뿐 원생들의 진정한 선택이 있을 수 없었던 그 마지막 정착지로서의 천국―필생의 천국― 그것은 원생들의 천국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그렇게 믿어주기를 바라면서 거의 일방적으로 그것을 점지해주고 싶어하신 원장님이나 원장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 섬 바깥에서 이 섬을 저들의 천국이라고 말하게 될 바로 그 사람들의 천국일 뿐인 것입니다.
(중략)
전 결국 이 몇 년 동안 원장님과 원생들의 관계에서, 한 선의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사이의 어떤 대등한 상호 지배 질서, 만인 공유의 화창한 지배 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지배자가 어떤 불변의 절대 상황 속에 갇힌 다수의 인간 집단을 얼마나 손쉽게, 그리고 어느 단계까지 저항 없는 조작을 행해갈 수 있는가 하는 슬픈 지배술의 시범을 보아왔던 셈입니다. 그 지배자가 최초에는 아무리 성실한 인간성과 선의의 명분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갇힌 인간의 무리가 아무리 그들의 지배자를 바로 경계한다 하더라도 다스려지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다 함께 그들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에 대한 깊은 각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다스리는 자는 결국 그의 무리를 일방적으로 조직해 나가게 마련이며, 다스림을 당하는 자들 또한 다스리는 자의 뜻을 재빨리 수락하고 그것에 봉사해 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는 한 원장님께서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조작이 가능하십니다. 그리고 원장님께선 결국 이 섬 위에 그 같은 원장님의 천국을 완성해놓으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아마도 그것은 이 섬의 원생들이 즐겨 누리게 될 천국이기에 앞서 그것을 이루어내실 원장님 한 분의 획일적이고 생기 없는 천국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원생들은 자기 천국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받들고 복종하는 그 천국의 종으로서 괴로운 봉사만을 강요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
5. (참다운 자유)
자공이 남쪽의 초나라에 여행하고 진나라로 돌아오려고 한수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굴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를 안아 내다가는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애를 써서 수고가 많은데 그 효과는 아주 적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다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수고해도 효과가 큽니다. 댁께선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습니까?' 밭일을 하던 노인은 고개를 들고 그를 보자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자공이 말하기를 '나무에 구멍을 뚫고 기계를 만들고 뒤쪽을 무겁게 앞쪽은 가볍게 합니다. 그러면 물 흐르듯이 물을 떠내는데 콸콸 넘치듯이 빠릅니다. 그 기계 이름을 두레박이라고 하죠'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서 들었소만, 기계 따위를 갖는다면 기계에 의한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 그런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오, 그런 마음이 가슴속에 있게 되면 곧 순진 결백한 본래 그대로의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정신과 본성이 안정되지 않은 자에겐 도가 깃들지 않소. 내가 두레박을 모르는게 아니오, 도에 대해 부끄러워 쓰지 않을 뿐이오.' 자공은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며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 장자·천지 』
6. (자유의 의미)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즉 신이 없다면 무엇이든 허용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출발이다. 실상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결과로서 사람은 자신의 내부나 외부에 의지할 곳이 없어 고독하게 되어 버린다. 아무런 핑계도 찾을 수 없다. 만약에 실제로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면 사람은 절대로 일정하고 응고(凝固)된 인간성을 미루어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결론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자유로우며 사람은 자유 그것이다.
한편으로, 만약에 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정당하게 하여 주는 가치라든가 질서를 우리 앞에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나 뒤에서나 확연한 가치권(圈) 속에서 아무런 정당성이나 변명을 설명해 낼 수가 없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고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의 선고를 받은 셈이라는 말로써 표현은 끝난다.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한 것은 아닌 까닭에 선고(宣告)를 받는 것이요, 세상에 한 번 내던져지자 그가 행동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까닭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는 감정의 맹위(猛威)를 믿지 않는다. 그는 결코 하나의 열정이 숙명적으로 인간을 어느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도도한 격류이기 때문에 후에 이것이 하나의 구실(口實)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자기의 감정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또한 이 땅 위에 볼 수 있는 어떤 표적 속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제가 원하는 대로 표적을 판독(判讀)하는 것이라고 실존주의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사람이란 아무런 의지(依支)도 도움도 없이 매순간 인간을 창조하도록 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퐁주(Françis Ponge)는 그의 훌륭한 글 속에서 「사람은 사람의 미래이다」라고 말했다. 확실히 옳은 말이다. 다만 거기서 미래라는 것이 하늘에 씌어 있고 신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미래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인간이 어떠한 인간이든지간에 만들어야 할 장래, 그를 기다리는 무구(無垢)한 장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옳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사람은 고독하다. 고독이라는 것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예를 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환경에서 나를 만나 보려고 찾아온 내 제자의 경우를 인용하려 한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지고 또 친독적(親獨的)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의 형은 1940년의 독일군 침공 시 살해된 터라 좀 원시적이라고는 하겠으나 갸륵한 생각으로 이 청년은 형의 원수를 갚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변심과 형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서 밖에는 위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 청년은 영국으로 출발하든가,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하든가 그 중의 한 가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즉 어머니를 포기하느냐, 혹은 어머니 곁에 머물러서 생활을 돕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어머니가 다만 그만을 의지 하고 살고 있으며, 그의 실종(失踪)―아마도 그의 죽음―이 어머니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결국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가 출발하고 투쟁하기 위해서 취할 모든 행동이 모래 위에 물 붓는 격일지도 모르며, 아무 소용없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는 애매한 행동인 반면에 그가 어머니를 위하여 하는 그의 행동은 모두 뚜렷한 반응이 있는 행동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영국으로 떠난다면 스페인을 통과하다가 무기한으로 그는 스페인 당국의 난민 수용소에 체류하게 될는지도 모르고, 또 무사히 영국이나 알제리에 도착해서도 사무실 속에 처박혀 붓이나 놀려야 하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행동에 대하게 되었다. 그 하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일개인만을 위한 행동이요, 또 하나는 무한정으로 광범한 전체, 즉 국가 전체를 위한 행동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애매함을 면할 수 없고, 도중에서 중단되어 버릴 수도 있는 그런 행동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두 가지 종류의 모랄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공감에서 오는 모랄, 즉 일개인에 대한 헌신이며, 또 한편으로는 더 광대하나 효과성이 미심스러운 모랄이었다. 양자택일(兩者擇一)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택하는 데 누가 도울 수 있는가?
…(중략)…
우리는 자유를 위한 자유를 원하는 동시에 하나하나의 특수한 경우를 통하여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자유를 원하면서 그것이 타인의 자유에 완전히 의존한다는 것과 타인의 자유는 우리의 자유에 의존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물론 인간의 정의(定義)로서의 자유는 타인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앙가주망이 생기자마자 나는 나의 자유와 동시에 타인의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내가 또한 타인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아야만 나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정당성의 견지로서 사람이란 그 존재가 본질을 앞서는 존재이며, 그는 여러 경우에 있어서 자기의 자유밖에는 원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였을 때에는, 동시에 나는 타인의 자유밖에는 원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처럼 자유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의지의 이름으로 나는 그들의 존재의 완전한 무상과 완전한 자유를 스스로 은폐하려고 꾀하는 이들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경건한 심정으로 혹은 결정론적(決定論的)구실로 그들의 완전한 자유를 스스로 은폐하려는 사람들을 나는 비겁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또 그들의 존재라는 것이 땅 위에서의 인간의 출현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을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려 하는 이들을 나는 떳떳하지 못한 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비겁한 자나 떳떳하지 못한 자거나 엄밀한 정당성의 견지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 이처럼 모랄의 내용은 변할 수 있지만 그 모랄의 일정한 형태는 보편적인 것이다. 칸트는, 자유는 그 자체와 타인의 자유를 요구한다고 말하고 있다. 찬성이다.
그러나 그는 형식과 보편성이 어떤 모랄을 구성하기에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너무나 추상적인 원리는 행동을 정의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그 학생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무엇의 이름으로 어떠한 뚜렷한 도덕적 격언을 따라 그가 안심하고 그의 어머니를 버리든가 어머니와 더불어 머무르기를 결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하는가? 평가할 아무런 방법도 없다. 내용은 항상 구체적이어서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니 항상 창조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만 이루어지는 창조가 자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닌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7. (서양의 자유관 -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자신의 피땀어린 노고의 결실들이 계속 영속되기를 기대하려 할 때 적개심을 품은 듯한 날씨가 수년에 걸쳐 신중히 마련해 온 것을 한순간에 파괴할 경우가 있다. 그 결과 부지런하고 사려깊은 그 사람들, 그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아와 빈곤 속에 내맡겨버리는 일이 여전히 가끔 일어난다.
홍수와 태풍과 화산이 전 국토를 피폐화시키고 이성적인 정신의 숱한 각인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그 제작자와 함께 죽음과 파괴의 야만적인 혼란 속으로 휘몰아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아직도 질병은 인간들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무덤으로 낚아채 가고 한창 기운이 왕성할 나이의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을 무덤 속으로 몰아넣는다. (중략)
사태는 이렇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상태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이성의 각인을 지니고 있는 어떤 작품도 그리고 이성의 위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시도된 어떤 작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냥 그렇게 없어져 버릴 수는 없다.(중략)
학문은 처음엔 위기에 몰리더라도 나중에는 깨어나서 좀더 신중하게, 그리고 여유를 갖고 평온하게 요지부동의 자연법칙들로 파고들어야 하며 이 자연의 그 모든 폭력을 개괄하고 그 가능한 전개를 계산해 내어야 한다. 즉 새로운 자연이 개념으로 형성돼 나와야 하고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자연에 가깝게 자신을 밀착시켜 그 발꿈치를 뒤쫓아야 한다.
그리고 이성이 자연으로부터 어렵게 획득해 낸 모든 인식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보존되어야 하며 우리 인류 공동의 지성을 위한 새로운 인식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자연을 갈수록 더욱더 간파할 수 있어야 하며 자연의 가장 신비로운 내면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더욱 더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발견을 통해 무장하고 깨우친 인간의 힘이 어려움 없이 이 자연을 지배해야 하며, 한 번 이룩한 정복은 물론 계속 견지돼야 한다. 또한 점차 인간은 노동을 해야 할 필요가 갈수록 줄어들어야 하며, 그래서 인간의 육체가 자신의 발전과 형성과 건강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노동해야 한다. 노동은 이제 더 이상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존재는 짐꾼이 되도록 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피히테, 『인간의 소명』
8. (서양의 자유관)
산업 제도와 그 관례 및 그로부터 생겨나는 정신은 생활의 모든 분야에 파급되어 인간의 인격 전체를 형성하며, 여러 가지 모순을 강화시켰다. 즉 근대화 산업 제도는 개인을 발전시켰으나, 개인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것은 자유를 증대시켰지만, 새로운 종류의 의뢰심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보다 더 독립적, 자율적, 비판적으로 되었고, 또한 보다 더 고립되고 격리되고 공포에 떨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의 전반적 문제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과정의 양면을 보는 능력과, 그 한편을 추구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한편의 진로를 상실하지 않는 바로 그 능력에 달려 있다. (중략)
近代史에서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는 권위의 ‘낡은’ 형태와 속박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주의가 집중되었기 때문에, 만일 이런 전통적인 속박들이 제거되면 제거될수록 인간은 더욱 많은 자유를 얻게 된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유의 낡은 적으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우리는 그것과는 다른 성질을 가진 새로운 적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는 데는 실패하였다.(중략)
모든 사람이 질서 있고 투명한 사회 제도 속에서 하나의 고정된 지위를 갖고 있던 중세의 봉건 제도와는 정반대로 자본주의적 경제하에서의 개인은 전적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그가 무엇을 했고 또 어떻게 했으며, 그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일이 되었다. 이러한 원리가 개성화의 과정을 촉진시킨 것은 분명하며, 이것은 근대 문화의 명예로운 측면을 이루는 데 중요한 항목의 하나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로부터의 자유’가 더욱 진전되어 갈 때 이러한 원리는 개인과 다른 사람들 간의 모든 결연 관계를 단절시켜 그로 인해 개인은 그의 동료로부터 고립되게 되었다.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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