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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화두3]21세기형 좌파의 코드

ddolappa 2008. 5. 16. 04:08
위성전화·인터넷 무장…21세기형 左派의 코드로
민족국가보다는 시민사회 힘 강조
과학보다는 '문학' 규율보다 자율의존

이해영 한신대교수 국제정치사상
입력 : 2004.09.01 18:30 42' / 수정 : 2004.09.02 09:58 50'
- 세계의 지식사회, 이것이 화두다
“부르주아지는 세계 시장의 개발을 통해서 모든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 도구들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진 교통에 의하여 모든 민족들을, 가장 미개한 민족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끌어넣는다. 부르주아지의 상품의 싼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완고하기 그지없는 증오심을 굴복시키는 중포(重砲)이다. 부르주아지는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 영원한 혁명가 마르코스는 미국의 붕괴를 꿈꾸는가? 빈민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그는 자신이 종교적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가 가는 길이 오사마 빈 라덴의 길과는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힘주어 한 말이다. 이후 150년, 우리 시대의 ‘무장한 예언자’ 마르코스는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들이 바로 들녘의 이름 모를 꽃을 닮은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서서 큰 눈망울을 굴리며 수줍게 웃던 원주민 여성들이었다. 손때 절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배인 땀을 연신 훔쳐내며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던 원주민 아낙이었다. 그들의 나무총에 서린 분노는 하늘을 향해 말없이 외치고 있었다. 내 자식들을 더 이상 굶길 수 없다! 내 자식이 알약 하나가 없어 죽는 것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부르주아지가 강요한 ‘생산양식’과 멕시코 원주민의 분노 사이에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아주 또렷한 인과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부르주아 생산양식의 ‘운동법칙’을 최초로 ‘폭로’한 19세기 마르크스와 적빈(赤貧)의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을 이끌고 북미 FTA에 맞서 무장봉기한 21세기 게릴라의 전설 마르코스, 그 사이에는 그렇지만 두 사람의 비슷한 이름과 달리 적지않은 차이 또한 존재한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세계화가 어디까지나 민족국가를 앞장 세운 것이라면, 마르코스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화는 오히려 민족국가의 약화를 전제한다. 또 전자가 주로 산업자본의 세계화를 보았다면, 후자가 항의한 것은 금융자본과 초국적 기업에 의해 추동된 세계화이다. 또한 양자 사이에는 다른 무엇보다 20세기 현존사회주의의 좌절 70년사가 놓여 있다.

1989년 독일 재통일과 현존사회주의의 붕괴로 ‘짧은’ 20세기는 역사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9·11까지 90년대 세계사는 사실 막간극에 불과했었다. 진정 새로운 것은 뉴욕 쌍둥이 빌딩의 폐허 속에서 태어난 미국이라는 제국이었다.

사실 20세기 내내 미국이 원한 것은 2가지였다.

첫째는 반소, 반공이고, 둘째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다. 20세기 후반기, 이른바 ‘자본주의 황금기’ 동안 미국은 반소·반공을 고리로 서유럽 및 일본을 성공적으로 묶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의 상실은 이러한 세계질서의 운용원칙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소련이 없는 조건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이익동맹은 잘해야 2인 3각 같은 불신의 동맹일 따름이다. 1990년 1차 걸프전 당시 미국이 UN을 등에 업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압도적 지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라는 공동의 이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클린턴시대의 다자주의는 그래서 강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동의를 확보할 수 없었던 미국의 과도기적 딜레마의 전형적 표현이었다. 9·11은 이러한 미국의 내밀한 고민을 해결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여기에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표방한 미국 신보수(네오콘) 이데올로기는 엔진오일에 다름아니다. 9·11 이후 미국을 원톱으로 하는 새로운 신봉건적 세계질서에서 유럽은 가신적(家臣的) 기능을 요구받고, 우적(友敵)결단주의에 기반한 미국의 일방주의 앞에 세계는 기독교 근본주의 대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선택을 강요받고,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은 신보수주의적 무한전쟁과 결합한다.

미국 문제 나아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21세기 좌파의 존재이유이다. 마르크스보다는 마르코스, 국가/당보다는 시민사회/네트워크, 과학적 엄밀함보다는 문학적 상상력, 규율보다는 자율, 민족주의보다는 국제주의가 새로운 조건의 코드명이다. 얼마 전 한 현직 장성이 휴대폰, 인터넷, 교통체증 때문에 한국에서 쿠데타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토로한 것처럼, 이 운동은 새로운 물적 조건에 대단히 개방적이다.

21세기 자본주의의 상징이기도 한 정보통신혁명은 곧바로 이들의 무기고를 채운다. 하지만 격발이 될지 의문스러운 사파티스타 게릴라의 나무총과 마르코스의 최첨단 위성전화의 카오스적 공존, 이른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반세계화운동의 자연적인 조건을 이룬다.

모던한 19세기 마르크스와 포스트모던한 21세기 마르코스가 연대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설사 연대한다고 한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당장 무너질지는 마찬가지로 의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의 내적인 모순은 이 두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제 갈 길을 갈 것이고, 그것은 자본주의를 혁신하겠지만 동시에 해체시킬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21세기 자본주의란 전대미문의 생산력인 동시에 미증유의 파괴력이기 때문이다. 과연 마르크스와 마르코스가 ‘따로 또 같이’ 반(反)자본적 원심력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보면서, 현대자본주의의 광란의 질주로 파괴된 우리 생활세계의 복구가능성 여부도 가늠해볼 일이다.

▲ 이해영
■이해영교수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마르부르크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현재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부교수로 재직중이며 국제평화인권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그람시와 하버마스’(독문),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등이 있고 편저로 ‘1980년대:혁명의 시대’가 있다.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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