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봄,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극단의 시대』
[위의 홉스봄 저작 주요 논점]
<혁명의 시대>(1789-1848) 1. 1780년 (유럽)사회의 특징 : 압도적 농촌사회였다는 점, 토지소유관계의 중요성, 계몽주의의 영향, 절대군주와 신생세력(신생부르주아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2. 1780년대를 산업혁명의 출발시기로 보는 이유,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이유(세계시장의 확보, 기존의 기술을 재조직할 수 있는 조건/능력 등) 3.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자코뱅주의란 무엇인가?(프롤레타리아적 의식과의 차이), 상퀼로트운동의 한계, 자코뱅주의 몰락의 원인 4. 민족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5. '토지'를 둘러싼 사회관계 변화의 과정은?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대하여 6. 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 운동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 7. 이중혁명(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 8. 종교개혁은 자본주의로의 발전에 있어 필연적 과정(귀결)이었는가? * 영국 청교도혁명의 경제사적 의의
<자본의 시대>(1848-1875) 1. 1848년 혁명은 왜 부르주아혁명이어야 했는가? 1848년 혁명이 이뤄낸 결과는? 2. 대호황의 시기, 노동3권 보장의 배경 3. 이 시기의 대호황은 유럽적 현상이었나? 전 세계적 현상이었나? 4. '혁명의 시대'의 내셔널리즘(국민국가 형성운동)과 '자본의 시대'의 내셔널리즘(새로운 내셔널리즘)의 차이 5.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왜 양립할 수 있었는가? 6. 인터내셔널 창립 및 활동의 의의 7. 러시아의 농노제 폐지와 미국의 노예제 폐지 이유(영국은 왜 노예무역을 폐지했는가) 8. 부르주아의 '이중성'과 '위선'이란? 부르주아의 이중성은 '본질적 특성'인가? 9. 가부장제의 기원, 가족의 불평등(가부장적 독재)을 계속 유지한 이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족'의 의미. 10. '자본의 시대'에는 무엇이 변화했는가?
<제국의 시대>(1875-1914) 1.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제국주의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는가? 이전의 식민지 지배와의 차이점은? 2. 사회복지의 도입은 '노동계급 투쟁의 성과'인가? '지배계급의 안정화전략'인가?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관련하여) 3. 제국의 시대의 '민족주의'의 특성 4. 1차대전의 발발 원인(영국 헤게모니의 위기?)
<극단의 시대>(1914-1991) 1.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제시의 배경 2. 전후 '보편적 세계경제'가 창출되었다는 의미는? 전쟁 이전과 다른 새로운 작동원리란? 3.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정책을 포기하게 된 이유(아프리카의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4. 소련이 2차대전에 개입한 이유 5. 2차대전의 성격(1차대전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6. 1920년대 이후 볼셰비키와 코민테른 노선에 대한 평가(소련의 국가적 이해와 세계혁명적 이해관계의 충돌?) 7. 세계혁명과 대공황의 관계 8. 파시즘이 공황극복에 성공한 이유 9. 냉전 형성의 동인 10. '황금시대'가 후퇴하게 된 이유 11. '68 학생운동'의 성격 12.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13. 이슬람혁명(이란혁명)의 사회경제적 배경 14. 현실사회주의는 왜 붕괴했는가?
『혁명의 시대』
<역자해설> ▣ 홉스봄의 역사학적 방법 : 회고적 역사학과 유보의 미덕
- 홉스봄의 역사서술은 한편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당시의 역사를 재해석 회고적 역사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역사를 발생론적으로 추적(*월러스틴의 경우, 보다 강하게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해석한다고 할 수 있음) : 예컨대 이중혁명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그것이 오늘의 세계를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며, 그런 만큼 충분히 강조됨. 그러나 또한 당시의 시점에서 그것이 19세기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았았던, 그러한 혁명이었음을 이야기함.
▣ 이중혁명과 자본주의 세계의 형성
-「17세기 위기론」: 유럽은 17세기에 전반적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이 시기에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점이 사회경제적으로 준비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18세기 유럽은 이미 자본주의적 요소가 내제하고 있었음. -『산업과 제국』: 영국의 급속한 발전은 세계시장의 존재(및 확보)때문이었다고 함으로써, 자본주의 발전에서 해외식민지의 중요성(불가분성)을 제기 - 자본주의의 발전과정 가운데 그것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게된 시기를 '장기 19세기'로 규정하면서 이를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구분 - 장기 19세기의 첫 번째 국면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은 (자본주의의 존재나 시작여부가 아니라) 왜 이시기에 비로소 자본주의가 승리하게 되었는지→ 이것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 즉 이중혁명 때문이었음. - 단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사회/국가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해) 이중 혁명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중혁명이 미친 세계사적 결과임. 영국: 정치혁명 부재/프랑스: 정치혁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때문에)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이 지체/ 프로이센: 절대주의하에서 산업혁명 달성. (*우리는 '정당하게' 자본주의가 하나의 세계체제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해야 함) - 자본주의 이행논쟁(마르크스가 '소위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에서 간략히 검토한 문제) : 홉스봄은 계급에 대한 강조와 별개로 세계시장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특정산업(면공업)이 어느정도 우월성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 이외에 이미 세계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임. 역사적으로 볼 때 산업혁명은 혁명적인 기술의 발전에 의해 초래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시장의 팽창에 대응하여(즉 이에 추동되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당시에 중요한 생산력의 발전이 있었다면 이는 기술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기술을 사회적으로 조직하여 그에 부응할 수 있는 능력이었음. - 프랑스 대혁명 :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초래시켰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갖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사회에 '직접적인' 부르주아 정치를 초래하지는 못하였음.
▣ 이중혁명의 현재적 의미
-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홉스봄은 그것을 역사에서의 불가피한 진보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면모들 드러내고 있음. - 『혁명의 시대』가 이중혁명이 발생했던 시대의 특성상 유럽 중심의 역사서술이라는 평가에 대하여: (홉스봄 자신이 충분히 의식하면서 설명하고 있듯이)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존의 기술을 적절하게 재조직화할 동기를 추동하고, 그와 같은 필요성을 대두시킬 만한 시장의 요구가 존재했는지의 여부에 의해 가능했음. 따라서 『혁명의 시대』는 자본주의가 유럽의 필요에 종속된 나머지 세계들을 포함하는 불가피하게 세계적인 규모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월러스틴이 갖는 세계체제론적 시각, 그리고 유럽이 근대 자본주의로의 진입함에 있어-특히 중국과 비교하여-지리상의 확대가 갖는 결정적인 중요성의 강조와 일맥상통)
제1장 1780년대의 세계 1. - 1780년대의 세계는 현대세계에 비해 훨씬 작기도 하고, (그도 인해사람들이 느끼기에는) 동시에 훨씬 크기도 한 세계 ·사람들은 지구상의 전 지역중 극히 일부만을 알고 있었으며, 인구수에서도 오늘날의 세계보다 적었고, 인간의 주거지역 역시 협소했고, 몸도 작았다 ·그러나 통신이 더없이 어렵고 불확실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현재보다 훨씬 거대한 세계였다, 특히 육상운송/수송이 느리고 운임도 지나치게 비쌌던데 비해 수송운송은 간편하고 저렴했으며 오히려 더 신속→항구에 가까이 있는 것은 세계에 가까이 있는 것
2. - 1789년의 세계는 압도적으로 농촌적이었는데, 이러한 기초적 사실일 이해하지 못하면 당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음. - 런던과 파리, 그리고 10만여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20여개의 도시를 제외하면, 당시의 도시 대부분은 '지방 소도시'의 형태였음 : 이러한 지방소도시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농촌의 사회와 경제에 속해 있었음. 18세기말 팽창하는 공동체인 지방소도시의 번영의 근원은 주위의 시골로부터 나온 것이었음.
3.4. - (따라서) 농업문제는 1789년의 세계에서 기본적인 것: 대륙에서 최초의 경제학파였던 프랑스 중농학파가 왜 토지와 지대가 순소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했는지 이해될 수 있음 - 토지소유관계라는 측면에서 유럽농업경제의 세 개의 지리적인 구분 1) 유럽의 서쪽, 해외 식민지 : 노예노동에 입각 ·전형적인 경작자는 강제노동자나 노예 ·전형적인 지주는 거대한 준봉건적 토지 또는 노예 플렌테이션의 소유주 2) 엘베강 동쪽의 유럽 : 대부분 농노제에 입각 ·이지역에서 농노제의 현상이 가장 불분명했던 곳은 발칸지역 : 전(前)봉건적인 터키의 원래토지제도-비세습적인 터기인 전사(戰士)를 먹여 살릴 수 있도록 토지를 분할-로 인해 영주들은 영농에 거의 관여하지 않음→발칸제국이 19,20세기에 터기의 지배하에서 벗어나면서 소농국가로서 등장하게 됨. ·전체적으로 동부의 농노제 지역은 해외 식민지와 유사하게 식료품과 원자재를 생산하는 서유럽에 '종속된 경제'로 간주될 수 있음. 3) 서유럽 : 귀족적 또는 신사 신분은 여전히 토지에 근거하고 있었지만, 봉건질서의 노후화로 귀족층의 수입은 물가와 지출의 상승에 비해 점점 떨어져 감. 또한 경제적으로 서구의 농촌사회는 나머지 지역과 매우 달랐는데, 이 지역의 농민은 중세 말기의 농노적 지위 중 많은 부분을 상실하고 자유로운 농민의 특징을 지니게됨→일정한 정치적 속박이 제거된다면 유럽의 대부분은 소농농업 지역으로 등장할 개연성이 가장 컸음.(*이러한 측면에서 영국과 대비되는 프랑스의 상황이 이해될 수 있음, 프랑스는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정치적 혁명을 통해 정치적 속박이 제거됨) 4) 예외적인 경우1-영국: 농업이 순수한 자본주의적 형태로 한 단계 발전해 있었음 ·중간규모의 상업적 차지농이 특징적인 경작자(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업을 경영) vs 광범위한 영세농지보유자와 빈농→(소농적농업이 아니라) 농업기업가계급 vs 대규모의 농업프롤레타이라 계급으로 발전 5) 그 밖의 예외적인 경우 ·특화된 상품작물이 생산되었던 북부이탈리아와 네덜란드 일부지역이 강한 자본주의적 경향을 보임 ·불행한섬 아일랜드 : 소수 대(大)부재지주들이 엄청난 화폐지대로써 소작인들을 착취
5. - 농업의 세계는 그 자본주의적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침체되어 있었음. - 당시의 상황은 식민지 착취와 밀접하게 관련된 방대한 무역의 전개가 인상적, 규모면에서 급성장하고 있던 해상무역 체제는 북대서양 유럽의 상인 사회에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면서 전 지구로 그 기운을 파급. - 플랜테이션 농장주, 상인 및 해운업자들이 경제적으로 번영 - (광산과) 제조업은 유럽의 전 지역에서 급속히 팽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인이 이러한 산업의 주요한 통제자로 남아 있었음 : 이는 팽창하던 공업의 주요 형태가 이른바 가내공업제도/선대제도 였기 때문. - 그 밖의 분산된 형태의 생산을 핵심적으로 통제한 사람이자, 파괴된 마을이나 뒷거리의 노동을 세계시장과 연결했던 사람은 상인, 생산자층 내부로부터 나타나는 중이었던 공업경영자들은 그들에 비교하면 소경영자에 불과 - 공업경영자들의 지위야 어떠했든 공업은 확장되고 번창되고 있었음. - 과학은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전념하였으며, 작업장에서의 실제와 공업의 요구에 가장 밀접했던 화학 부분의 발전이 두드러짐. - 계몽주의 이념이 사심없이 열정적으로 보급되었던 시기, 이 이념의 주요 중심지 두 곳이 이중혁명의 중심지인 프랑스와 영국이었다는 것은 중요. 모든 인간의 자유·평등 및 이에 따르는 박애가 슬로건 - 대륙에서 계몽의 옹호자들이 정치적 신중성과 온건함을 보였고, 계몽군주제를 신봉했다 하더라도 '계몽'을 혁명적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정확함. 구체제의 요새는 온건한 계몽주의자들이 신뢰했던 바로 그 군주국들이었음(*계몽주의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절대군주를 지지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함께 가기에는 본질적으로 어려운 사상이었음)
6. - (17세기 명예혁명을 거쳤던 영국과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면) 절대군주제가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를 지배하고 있었음. - 군주들은 계몽이라는 구호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국가를 근대화시키기 위하여 중류계급과 그 이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며, 미약했던 중류계급은 견고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던 귀족 및 성직자 계급의 진보에 대한 저항을 이겨내기 위하여 군주를 '필요'로 했음 - 절대군주제는 모든 신분계급 또는 지방들을 서로 반목시켜 어부지리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고자 하였을 뿐, 경제적 진보와 상승하는 여러 사회계급들이 요구했던 근본적인 사회적·경제적 변혁을 성취할 수도 없었고 거의 원하지도 않았음→따라서 구세력과 새로운 '부르주아' 세력사이에는 곧 현재화될 강들관계가 잠재되어 있었음. - 기존의 정치체제는 세 방향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는 (안정되지 못한)취약한 체제였음, 즉 새로운 세력으로부터의 압력,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세력으로부터의 압력, 그리고 해외 경쟁국으로부터 오는 압력→신세력과 구세력의 반대가 일치되는 경향이 있는, 통치가 허술했거나 식민지에서 있어났던 자치주의운동이 가장 취약한 지점으로 존재 - 그러나 주요한 권력 이동의 조건이 순수하게 국내적이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음. 상황을 폭발적으로 만들었던 것은 국제적 대항관계 ·1689∼1713년, 1740∼1748년, 1756∼1763년, 1776∼1786년, 1789∼1815년에 반복되어 전면전이 발생함. ·이러한 영구과 프랑스의 전면전은 신/구체제의 전쟁이었으며, 구 사회질서의 대한 신질서의 우위를 생생하게 보여줌 : (이는 단지 영국이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에 대해 모두 승리했기 때문만은 아니며)영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전비를 조달하고 전쟁을 치리는 일을 쉽게 해냈으나, 절대군주국가 프랑스는 그러한 일이 지나치게 힘겨운 일이었음 ·7년전쟁(1756∼1763)에서 프랑스가 또 다시 패한 후, 아메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발생하자 프랑스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영국을 참패시키지만, 오히려 유일하게 승리한 이 전쟁 후 프랑스 정부는 곤경에 처했으며 국내적으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게되고, 이로부터 6년 후의 프랑스 혁명을 배양하게 됨.
7. (북서) 유럽과 세계의 다른 지역 간의 관계 - 18세기 후반까지도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몇몇 거대한 세력 및 문명이 완전히 동등한 입장에서 백인 무역상, 선원 및 군인들에게 맞서고 있었음.(대표적으로 중국과 이슬람) - 그러나 유럽의 교역 및 자본주의적 기업에 의한 급속하고도 광범위한 팽창은 이미 이러한문명과 세력들의 사회질서를 잠식 ·이미 유럽에 의한 직접 정복은 16세기 에스파냐 및 포르투갈과 17세기 북아메리카 백인정착민들에 의해 이루어짐 ·영국은 인도의 일부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영토 지배를 이미 확립→인도 전체의 지배자 및 관리자로 발전
제2장 산업혁명 1. - 산업혁명의 시작된 시점은 1780년대 정도부터이나, 1840년경 이전에는 '아마도' 산업혁명의 영향은 느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음(1840년이 지나서야 산업혁명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방대한 양의 공식·비공식 문헌들이 출간되기 시작) - 산업혁명이 영국에 의해서 시작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은 명백한데, 18세기 산업혁명의 선두경쟁에서 영국이 앞선 던 것은 일단, 과학 및 기술의 우위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음(자연과학의 경우는 프랑스가 확실히 앞서 있었으며, 기술·대학교육, 초등교육 등에서도 주변국들에 비해 오히려 매우 후진적이었음) - 산업혁명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었다기 보다는 기존의 지식과 기술을 재조직하고 활용하며 혁신하도록 추동할 조건과 필요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조건이 영국에서는 뚜렷이 존재하였음.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으로 인해)사적 이윤과 경제발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 ·농업문제에 대한 영국 특유의 혁명적 해결방식이 토지를 거의 독점화함으로 인해, 농노제적 농민층이 파괴됨(*즉 광범위한 농업노동자 혹은 노동자적 농민이 존재했으며, 이는 곧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로 전화될 수 있었음) ·농업경영 역시 주로 차지기업농에 의해 경영됨으로 인해, 주로 시장을 목적으로 해서 이루어짐→비농업 인구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생산과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근대적인 경제부분서 이용될 자본 축적을 위한 메커니즘을 제공. ·상당한 양의 사회간접자본이 해운, 항만시설, 도로 및 수로 개선과정에서 창출 - 산업사회의 주요한 조건과 사회적 기반이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존재했다고 가정했을 때, 이것이 실제로 기계화된 공장제의 창출, 즉 공업경제로 이어지려면 두 가지가 필요 첫째, 비용이 그다지 크지 않고 단순한 기술혁신에 의해 산출량을 재빨리 증대시킬 수 있었던 산업 : 영국에는 산업혁명을 선도하기에 극히 적합한 면 공업이 존재 둘째, 생산국에 의해 광범위하게 독점되는 세계시장 : 영국은 당시 직물공업화로 인한 이점을 그다지 누리지 못했던 반면(다른 나라들 역시 그런 공업화를 곧장 모방할 수 있었으므로), 경쟁국의 시장을 장악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국가였고, 실제로 프랑스와의 투쟁(특히 1793∼1815)에서 신생 미국을 제외한 모든 경쟁국들을 비유럽 지역에서 사실상 제거
2. 면공업 - 영국의 면공업은 해외무역의 무산물로서 성장했으며, 식민지 무역은 면공업을 계속 육성. 식민지 무역의 대규모의 팽창을 약속했고, 이러한 팽창은 기업가가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혁명적 기술을 채택하도록 자극. 산업혁명은 국내시장에 대한 수출시장의 승리로 표현될 수 있음. - 특히 라틴아메리카는 영국의 완전한 경제적 종속국이 되어있었으며, 동인도는 자신의 면공을 해체당하고 랭커셔의 면제품시장으로 전락함(1820년 1천 100야드수입→1840년 1억 4500만야드 수입) : 이것은 유럽이 동양으로 보다 많이 수출할 수 있는 거의 최초의 물품의 가지게 되었고, 또한 그랬다는 점에서 세계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 - 따라서 면제품은 산업혁명이라는 모험으로 '유인'하기에 충분한 가능성과 산업혁명을 '요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갑작스런 팽창을 제공 : 또한 면제품 생산에 대변혁을 일으킨 새로운 발명품들은 아주 간단하고 값이 쌌으며, 보다 많은 산출로 거의 즉각적인 보상을 제공 - 또한 면공업의 모든 원료는 해외로부터 왔기 때문에 유럽농업에 의거한 완만한 절차(즉 기득권을 가진 농업가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가 아니라, 식민지에서 노예제와 새로운 경작지의 개척이라는 과감한 절차에의해 확대될 수 있었음. - 또 제품생산의 중요한 부분들, 특히 방적 부문에서 면공업은 값싸고 효율적인 노동력의 부족으로 기계화가 추동됨(어느곳에서나 방적공정은 방직공정보다 한 세대 먼저 기계화되었는데, 이는 물레가 확대되는 생산량을 즉각적을 감당할 수 없음에 비해, 원시적 수직기는 일정기간 다수의 가내수공업 수직공들을 창출하여 생산량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임)
3. 면공업의 독보성과 그 한계 - 면업은 혁명을 겪은 첫 산업이며, 1830년경까지 다소나마 근대적인 의미의 공업과 공장은 영국의 면업분야만을 의미(신공장법이 대상으로하였던 '공장들'은 1860년때까지도 오로지 직물공장, 그중에서도 면공장들이었음) ·첫째, 여타의 산업들은 훨씬 적은 인구를 고용 ·둘째, 여타의 산업들은 다른 산업들에 파급되는 변혁 능력이 훨씬 작았음, 이에 비해 면공업은 보다 많은 건물, 기계, 화학적 개선, 공업용 조명, 해상운송 등 상당한 파급력을 지님 ·셋째, 면업이 영국의 대외무역에서 점했던 절대적인 비중으로 전체 경제의 움직임을 좌우(1816년∼1848년 사이에 영국 총수출품의 40∼50%를 차지) - 면업을 위시로한 공업경제의 진보는 1840년 전후에 이르면 주요한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사회적인 것 : 새로운 경제로 이행됨에 따라 사회혁명의 근원이 되는 빈곤과 불만이 생겨나고 자생적 봉기 형태인 사회혁명이 발발(대륙에서 1848년의 일련의 혁명과 영국에서 거대한 규모의 차티스트 운동)→노동자들과 무산계급으로 전락할 찰나에 있었던 프티 부르주아들의 불만은 급진주의, 민주주의, 혹은 공화주의라는 대중운동들 속에서 그들을 결합시킴 - 그러나 자본가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회적 문제들은 사회질서를 전복시키는 한에서만, 경제의 진보와 관련하여 의미를 갖는 것. 반면 경제과정에는 그것의 근본적 원동력인 이윤을 위협하는 일정한 선천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 시작→①호황과 침체의 경기순환, 즉 공황 ②이윤율 저하경향 ③(그로 인해 야기되는) 유리한 투자기회의 부족 - 18세기 유럽 대륙에서의 공황은 일반적으로 일정한 농업적 재난을 반영하는 것, 그러나 1830년대가 되면 공황이 무역과 금융부문에서 규칙적이고 주기적인 현상임이 어렴풋이 인식되기 시작함. 그러나 사업가들은 여전히 공황이 특별한 실수, 또는 외부의 간섭에 의해 야기된다고 생각. - 반면 면공업이 매우 분명하게 예증하고 있던 이윤율의 하락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 ·초기 면업은 기계화로 인한 노동의 생산성 증가, 부녀자와 아이들에 대한 저임금, 저렴한 공장의 건축비용, 원료비용의 감축-조면기(繰綿機)의 발명후 미국 남부에서의 면화재배의 팽창, 이윤 인플레이션으로 엄청난 이윤율을 누림 ·그러나 '경쟁'의 과정에서 완제품 가격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급격히 떨어졌지만, 생산요소의 가격은 그렇지 못했으며, 1815년 이후 일반적인 가격환경은 인플레이적인 것이 아니라 디플레이적(?)이 됨. - 공업 전체에 관한 일반적인 상황은 여전히 총매상고가 급증함에 따라 체감하는 이윤율 속에서도 총이윤은 여전히 급증했으나, 그럼에도 면공업자들은 이윤폭의 축소는 저지되어야 한다고 생각→이는 오직 비용을 줄임으로써 가능했는데, 모든 종류의 비용가운데 임금을 줄이는 것이 가장 쉬웠으므로 이러한 상황이 일반화됨→그러나 임금 하락에는 생리학적 한계가 있었으며, 생계비가 하락하는 한에서만 임금도 이 한계 이하로 떨어질 수 있었음 - 면공업자들은 생계비가 지주세력의 독점, 특히 전후 지주로 구성된 국회가 보호관세(즉 곡물법)에 의해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되고 있다고 판단. 또한 곡물법은 여타 국가들이 자신의 농업제품을 영국에 팔수 없음으로 인해 대금 지불 능력을 상실하고, 이로 인해 영국 수출의 성장을 위협한다고 판단→맨체스터 면공업계는 지주세력에대해 호전성을 띤 저항의 중심지가 되고 1838년∼1846년 반곡물법동맹의 중추세력이 됨 - 공업은 이와 같이 기계화 합리화와 함께 생산과 판매를 확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윤율의 하락를 보충당할 것을 강요당하게 됨→1815년 이후 방직의 기계화도 급속히 진전되기는 하나, 1830년 당시 면업은 기술적으로 이미 안정화(즉 더 이상의 급속한 혁신이 불가능한 상황)되어 있었음. -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의 이자율도 이윤율에 비견될만한 하락 경향이 존재하게 됨→(기초)자본재 산업에 대한 발달을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
4. 석탄산업과 철도의 발명 - 적절한 자본재 생산능력은 일정한 수준을 넘어 발전할 수 없음, 그러나 사적 기업이 자본재 생산능력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극히 많은 비용이 드는 자본투자를 행할 가능성이 그다지 없다는 것 또한 명백(그런데 영국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자본재 산업의 발전이 추동된 경로 - 영국에서는 19세기 석탄이 공업의 주요한 동력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삼림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탄광업이 매우 발전, 1800년에 영국은 세계 생산량의 약 90퍼센트 가량을 생산→이 막강한 산업은 그 자신이 현대적 규모의 공업화를 이룰 만큼 팽창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재 산업을 변혁시킬 기본적 발명품 즉, 철도의 발명을 자극하기에 충분!(탄광은 물을 퍼낼 대량의 고성능 증기기관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운송수단을 필요로 했음) : 기술적으로 철도는 광산, 특히 '북부 영국 탄광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음 - 철도는 새 시대의 힘과 속도를 극적으로 일반인들에게 보여줌 -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철도 건설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즉, 새로운 투자처)이야말로 철도의 주요한 장점, 또한 장기적으로 세계시장에서 단절되어 있던 나라들을 개방시킬 수 있다는 것등 많은 중요성을 지님. - 그러나 당시의 관점에서는 철강, 석탄, 중기계 그리고 노동력 및 자본투자에 대한 철도의 수요가 이 단계에서는 결정적으로 중요→자본재 산업들이 (면공업이 변혁되었던 것만큼이나) 심대하게 변혁되기 위해 필요로 했던 바로 그 막대한 수요를 철도가 제공했기 때문
▶극히 많은 비용이 드는 철도산업에 대한 투자붐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 철도에 대한 투자붐은 철도가 극히 적정한 수준의 이윤만을 낳거나, 거의 이윤을 낳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무분별한 것이었음. 그런데 왜? - 산업혁명의 첫 두세대 동안 영국의 안락하고 부유했던 계급들이 모든 소비 및 투자의 가능성을 초과할 정도로 방대한 양의 소득을 빠른 속도로 축적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 중류계급 또한 자신의 저축을 활용할 수 있는 유리한 투자기회를 찾아내야 했으나 당시에는 공업상황은 이미 일정한 한계에 이르러 있었음. - 해외투자는 분명히 하나의 가능성이었으며, 실제로 이러한 투자가 행해졌음. But 1818년과 1831년 사이에 공여되었던 25건의 외국 정부에 대한 차관 가운데 16건이 채무불이행에 빠졌으며, 나머지도 거의 이자수익을 발생시키지 못함 : 일정한 투기 붐 속에서 해외로 유출되고 있던 자본이 조금이라도 덜 실망을 안겨줄 사용처를 찾게됨. - 이렇게 엄청난 자본이 투자되며 대규모로 그리고 급속하게 철도산업이 발전한 것은 이렇게 '당시의 실제적인 필요성'을 능가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것은 어떤 면에서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음. 이후 철도가 사실상 경제성장의 모든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하게 되었기 때문!
5. 경제자원의 동원과 재배치의 과정(및 새롭고 혁명적인 길을 가도록 요구되었던 경제와 사회의 적응과정)
▶ 동원되고 재배치되어야 했던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노동(력) : 공업경제는 농업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비농업인구의 급격한 증가를 의미하며 또한 필요로 함. 따라서 공업경제는 우선 주로 국내 농업으로부터의 식품 공급이 증가하는 것, 즉 농업혁명을 수반해야함. - 영국에서 소도시와 비농업적 거주지의 급석한 성장은 자연히 농업의 발전을 오래전부터 자극시켰으며, 실제로 1830년대 영국의 농업생산은 당시 인구 규모의 2,3배 인구가 필요로 하던 곡물의 98%를 공급할 수 있을 만큼 확장. 그러나 농업기술과 자본투자라는 측면에서 1840년대까지의 변화는 큰 것은 아니었음 - 이러한 변화는 (기술적 변화보다는) 사회적 변혁, 즉 개발경지 및 공동목초지를 기반으로 하는 중세적 공동경작의 청산(인클로저 운동) 및 자급자족, 소농경영과 토지에 대한 비상적업적 태로를 일소함으로써 이룩→이러한 16∼18세기의 예비적 진화과정 덕분에 영국은 소수의 대지주 및 적당한 수의 상업적 차지농, 그리고 다수의 농업 노동자로 구성된 나라로 변모 - 농업세력들은 자신의 이익을 곡물법으로 보호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이미 농촌으로 자본주의가 침투하는데 대항하는 후위(後衛)전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함. - 경제적 생산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변혁은 엄청난 성공이었지만, 인간의 고통이란 측면에서 볼 때는 비극. 그러나 이 역시 공업화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결과들이었음→경제적·사회적 곤란은 비공업 부문에서 노동력을 재배치하는 가장 효율적인 채찍이었음. ※프랑스의 경우 공업에서 요구되는 노동력이 공업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프티 부르주아지와 농민층의 상대적 안정성과 안락함에 의해 저해됨.
▶ (노동력의 숫자문제를 넘어)적절한 가격 및 기술을 갖춘 노동력을 얻는 문제 - 우선 노동자들이 공업에 적합한 방식으로, 즉 규칙적이며 중단되지 않는 매일의 작업 리듬 속에서 일하는 규율을 몸에 익히는 문제 ·이는 무엇보다도 최저소득을 벌기 위해서 노동자가 한 주 내내 꾸준히 일해야 할 만큼 적은 보수를 그들에게 지급하는 관행에서 구해짐. ·보다 다루기 쉬운, 그리고 보다 값싼 부녀자와 아동을 고용→1834∼1847년간 영국 면공장 전체의 반 이상이 부녀자들이고, 그 나머지의 반정도가 18세 이하의 소년들이었음. ·청부제의 도입 : 숙련노동자들이 그들의 미숙련 조수에게 실제적인 고용자가 되게끔 하는 관행. 재(再)고용자에게는 직접적인 금전상의 유인이 주어짐(노동력의 분할을 통한 착취) - 충분히 숙련된 노동자를 모집하거나 훈련시키는 문제 : 다행히도 1789년 이전 수세기 동안의 영국의 완만한 반 공업화로 인해 방직과 금속처리 부분에서 적절한 기술이 많이 축적. 이로 인해 사실 영국은 수준 높은 숙련공들을 계획되지 않은 공급에 의존하게됨. (일반교육 및 기술교육에 대한 소홀함이 존재하게 되고 이에 대한 대가를 후에 치르게됨)
▶ 자본공급의 문제 : 영국에서는 즉각 투자될 수 자본의 부족은 없었기 때문에 종종 새로운 공업에 자본을 투자하기를 꺼렸다 하더라도 별 문제는 되지 않았음.
▶ 교역 및 금융 : 어떠한 기술상의 어려움도 없었으며, 18세기말에는 정부정책이 상공업 제일주와 굳건히 결합되어 있었음.
- 이처럼 오히려 우연적이고 비계획적인 듯한, 경험적인 방식으로 최초의 주요한 공업경제는 성립함. 이 경제는 1848년 영국을 가장 근접하게 쫓아오는 경잭국이었던 프랑스 교역량의 두배였는데, 1780년에 영국이 프랑스의 교역량을 막 앞질렀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규모임. 영국은 실제로 '세계의 공장'이 되어가고 있었음.
제3장 프랑스 혁명
1. 프랑스혁명의 성격 - 프랑스혁명은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발생한 민주혁명 중의 하나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즉 다른 어떤 혁명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었으며, 그 결과도 훨씬 심대했음. 첫째, 프랑스 혁명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가장 강력하고 인구가 많은 유럽국가에서 발생했음, 1789년 프랑스인구는 유럽인구의 약20%를 차지함 둘째, 프랑스 혁명은 그 이전이나 이후의 모든 혁명 중 유일한 대중 사회 혁명이었으며, 어떠한 격변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이었음. 셋째, 동시대의 모든 혁명들 가운데 프랑스혁명만이 보편적이었음. 프랑스의 군대는 세계혁명을 일으키기 위하여 출발했으며, 실제로 세계혁명을 일으킴
▶ 프랑스 혁명이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다면, 그 기원은 프랑스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찾아져야 함. - 프랑스는 유럽의 절대군주국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여러 측면에서 가장 전형적인 국가 : 구체제의 통치기구 및 기득권 세력과 신흥 세력 사이의 충동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남. - 신흥 세력의 개혁은, 루이16세 시기 재정총감인 중농주의 경제학자 튀르고에 의해 다른 지역에서 보다 더욱 빨리 실패 : 이러한 실패는 기본적으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유효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군주제의 경우 비극적이었음.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기에는 부르주아적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상당히 강력했으며, 개혁의 실패는 그들의 희망을 걸 대상을 계몽군주제로부터 인민 혹은 '국민'으로 바꿔놓았을 뿐. - 프랑스라는 '화약상자'를 폭발시킨 이른바 봉건적 반동에 대하여 ·귀족 계급이 관직쟁탈전에서 성공함으로써 중류계급을 격분시켰으며, 또한 이러한 지위를 이용해 농민들을 착취함으로써 소득감소에 대항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개입 속에서 영국에 승리를 거두게 되지만, 이는 파산적인 재정적 곤란을 야기시킴(1778년 총 지출중 기존 부채의 이자 지불액의 1/2을 구성) ·이러한 정부의 위기는 귀족계급과 고등법원에 기회를 부여했는데, 그들의 자신의 특권이 확대된다는 전제없이 지불하기를 거부→귀족계급은 이를 목적으로 '명사회의'를 소집했으며, (1614년 이래 잊혀왔던 옛 봉건적 의회인)삼부회의를 소집. 혁명은 이렇게 국가를 재탈환하려는 귀족계급의 시도로부터 시작 - 이러한 시도는 ① 그것이 '제3신분'의 독자적인 의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과 ②심각한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간과하고, 그 '위기 속으로'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던져넣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산이었음. - '제3신분'정치적 지향과 의회구성에서 실제로는 중류계급(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재산소유자의 과두정치에 기초를 둔 입헌군주제가 민주공화제에 비해 더 마음에 드는 것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뿐만 아니라 '인민'의 일반의지도 표현하고자 했고, 그 인민이 그 다음에는 '프랑스 국민'이 되었음. 이는 매우 중요한 동일시였음. 이제 그들은 그들의 잠재석 다수표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삼부회에서 단호하게 싸웠으며, 독립적인 '국민의회'를 구성 - 제한된 개혁을 요구하는 소요를 혁명으로 전환시킨 것은 삼부회의 소집이 심각한 경제·사회적 위기와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 1789년에 왕국 안의 중요한 격변, 즉 선전 및 선거운동은 고통받는 농민과 도시빈민들에게 정치적 전망을 부여하였으며, 귀복들의 반혁명은 잠재적인 대중봉기를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 - 실제적으로 반혁명은 파리의 대중을 동원하였으며,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국가의 감옥인 바스티유를 함락(1789. 7. 14)시켰고, 이는 혁명을 지방 도시와 농촌으로까지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함. - 봉건제도는 1792년 2차 혁명으로 국민공회가 성립되고 공화정이 채택(혁명력 1년)되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 철폐된 것은 1793년(루이 16세 처형)이었으며, 8월말이 되어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로 획득됨. - 프랑스 혁명이후 모든 부르주아 혁명적 정치의 전형이 나타남 : 온건한 중류계급의 개혁가들이 완강한 저항이나 반혁명에 의해 대중들을 동원(대중동원)→대중들이 온건파의 목표를 넘어 그들 자신의 사회혁명을 향하여 진전(좌경화)→온건파들은 반동주의자와 제휴하는 보수적 집단과 대중의 도움을 얻어 목표들을 수행하기로 결의되는 좌파로 분열(분열)→우경화 - 프랑스 혁명의 특색은 자유주의적 중류계급의 한 분파가 혁명의 경계에 이를 정도로 또 실제로 이 경계를 넘어설 정도로 혁명적이었다는 사실에 있음-'자코뱅파', 왜 그랬을까? ·프랑스이후의 자유주의자들처럼 두려움의 대상인 혁명에 대한 무서운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 ·당시 자코뱅파를 대신하여 통일된 사회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계급의 부재로 자신의 급진주의를 유지 - 부르주아 급진주의의 유일한 대안은 노동빈민층, 수공업자, 소매상인, 직인, 소기업주 등으로 구성된 도시적인 운동이었던 상퀼로트 : 상퀼로트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이라라는 양 극단 사이에 존재했으며, 현실적인 대안을 갖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역사의 진로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 실제로 이는 프랑스의 경제성장을 방해하게됨
2. - (바스티유의 함락으로) 승리는 거운 온건파 부르주아지는 1789년에서 1791년 사이에 프랑스의 거대한 개혁과 합리화에 착수 : 제헌의회의 관점은 전적으로 자유주의적, 1790년 이후의 교회령과 망명귀족령 몰수 및 매각이라는 조치를 제외하면 일반 민중에게 거의 만족을 주지못함. 1791년 헌법은 재산제한선거권에 기반을 둔 '입헌군주제'라는 이름으로 지나친 민주주의를 저지 - 궁정은 신권에 기반한 가장 카톨릭적인 프랑스의 지위를 복귀시킬 음모를 획책, 이러한 시도는 자멸적인 것이었음. 망명귀족 및 성직자들은 외국의 개입을 통해 구체제를 보귀시키고자 했는데, 이러한 전쟁의 발발은 ·1792년의 제2혁명으로 ·혁명력 2년의 자코뱅 공화국으로 ·결국은 나폴레옹으로 이르게 함. - 또한 어떠한 면에서 이러한 전쟁은 수많은 국내문제들, 즉 새로운 체제가 갖는 어려움을 망명귀족과 전제군주의 음모 탓으로 돌리고 대중의 불만을 이 음모로 향하게 하는 효과도 갖고 있었음. 더욱이 전쟁은 이윤을 낳도록 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입법의회의 대다수는 전쟁을 주장 - 1792년 4월 (반혁명국가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2국에게)전쟁은 포고되고, 전쟁에서의 패배는 그럴듯하게 궁왕의 태만과 반역의 탓으로 돌려졌으며, 이 패전은 급진화를 가져옴 : 상퀼로트와 대중의 무장활동에 의해 8월(혁명코뮌 수립)과 9월(국민공회 수립)에 군주제는 타도 되었고 공화국이 성립 - 새로운 국민공회는 대기업과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정당인 지롱드당이 우위를 점함. 지롱드는 국왕을 재판하거나 처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경쟁상대인 산악파(자코뱅파)와 혁명적 열정의 상징을 놓고 경쟁해야 했음. 그러나 전쟁의 확대는 전황이 악화되면 될 수록 좌파의 권력을 강화시킬 뿐이었는데, 이는 확립된 정규군 없이 전면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오직 전례없고 혁명적인 방식만이 그러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음 →오늘날의 관점에서 1793년∼1794년의 '공포정치'(1793년 6월 산악파의 국민공회 제패이후 17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반동때까지) 는 근대적 총력전의 유효한 동원이라는 형태로 이해될 수 있음.
3. 자코뱅 정권의 성립과 몰락 - 공포정치 기간의 대량살인은 비교적 온건한 것(?)-14개월 동안 1만 7000명이 공식처형 - 공포정치를 지지했던 견실한 중류계급의 프랑스인에게 공포정치는 병적인 것도, 신의 계시도 아니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유효한 방법, 혁명력 2년의 공화국은 더 적은 재원을 가지고 더 악화된 위기에 대처 : 즉 중류계급의 관점에서 보았을 대 나타나는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공포정치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혁명의 파괴, 국민국가의 해체, 그리고 아마도 나라의 소멸을 택하느냐하는 양자택일이었음. - 자코뱅 정권의 첫 일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며, 이미 동원된 상퀼로트의 지지를 유지하는 것. 지롱드당에 의해 지연되어온 다소 급진화된 새 헌법이 포고→그것은 근대국가에 의해 포고된 최초의,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헌법이었음. - 프랑스에서 자코뱅은 국민생활은 지배해온 중소규모의 토지소유농민, 소규모 수공업자 및 소매상인들로 구성된 견고한 요새를 확립→농업과 소기업의 자본주의적 변형은 완만하게 진행되었음. - 공안위원회의 로베스피에르는 공식적인 독재권력이나 심지어 관직조차 가지고 있지않았음. 그의 권력은 인민의 권력이었으며, 그의 공포정치는 그들의 공포정치였음. - 로베스피에르의 급속한 몰락이유 ·자코뱅정권은 중류계급과 노동대중 간의 동맹이었음. 중류계급자코뱅의 경우 상퀼로트에 대한 양보는 오로지 그것이 재산소유자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대중을 정권에 결합시켰기 때문이며, 그리고 결합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참을 수 있는 것(자코뱅 내 지지의 본질적 취약성) ·전쟁의 필요는 중앙집권화와 통제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이 과정에서 직접적인 민주주의, 임시의용군, 자유토론선거가 희생되었으며 전쟁재원마련을 위한 경제적 필요는 대중의 지지를 멀어지게 함.(대중의 지지 후퇴) ·자유로운 돈벌이에 대한 제약은 사업가들에게 가중되는 불안의 요소였으며, 또한 지속적인 숙청은 모든 정치가들에게 불안의 요소가 됨 - 테르미도르의 반동 : 전쟁의 위기라는 국면에서 봉합되었던 정권의 취약성은, 1794년 6월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승리와 벨기에의 점령이후 현실화→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 실각, 다음날 파리코뮌의 구성원들과 함께 처형됨
4. 테르미도르 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 - 나머지 혁명기(1974∼1799)동안 중류계급이 직면했던 문제는 당초의 자유주의적 프로그램에 기초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자코뱅민주공화국과 구체제라는 이중의 위험을 피하면서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 - 테르미도르파의 가장 큰 약점은 부활된 귀족적 반동(왕당파)과 자코뱅-상퀼로드적 파리빈민들(무산파) 양쪽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 - 나폴레옹의 혁명군은 자코뱅 공화국의 가장 무서운 산물. 혁명군은 항상 즉석 징집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군은 공로에 의한 승진이라는 단순한 계급제도와 혁명적인 사명감으로 정통적인 군대처럼 물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음 : 벨기에, 북부이탈리아, 독일과 같은 부유하고 약탈 가능한 나라들에서는 부족할 것이 없었음. 그러나 폴란드나 러시아 같은 황야지대에서는 보급체계가 붕괴 - 나폴레옹은 자코뱅독재아래서 혁명력 2년 장군이 되었으며, 1796년 이탈리아 원정으로 군내 주도권 확립, 1799년 외국의 침략에 의해 집정부의 취약성과 나폴레옹의 절대적 필요성이 명백해졌을 때,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의해 권력장악, 혁명의 마감. - 나폴레옹의 신화에 대하여 ·그의 신화는 유례없었던 입신출세에 관한 사실들에 기초 ·모든 평민들은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른 일개 평민의 모습을 보고 감격 ·프랑스의 오랜 역사에서 그는 해외로 진출한 가장 성공적인 지배자 - 그가 파괴한 것은 단 하나, 즉 자코뱅 혁명, 평등/자유/박애의 꿈, 압제를 뿌리치기 위하여 인민들이 장엄하게 봉기한다는 꿈→그러나 이것은 나폴레옹의 신화보다 더 강력한 신화로 작동, 나폴레옹의 몰락 후 19세기의 여러 혁명들을 고무하였던 것은 바로 이것.
제4장 전쟁
○ 배경 : 1792년-1815년의 전쟁 ○ 논점 : - 전쟁의 현실적 전개과정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가? - 군사동원과 군사작전은 어떠했는가? - 군사동원(작전)의 결과 취해진 정치적·경제적 조치들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Ⅰ. 전쟁의 성격과 전선, 경과
1. 전쟁의 성격 : 전혀 다른 종류의 적대적인 요인 두 개가 서로 대결 ① 국가 v.s. 국가의 대결 :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국가로서의 전쟁 ② 제도(체제) v.s. 체제의 대결 : 혁명의 주체로서 전제정치에 대한 반대와 자유를 호소 - but, 나폴레옹 시대말기엔 ①의 성격보다 ②의 성격(제국주의적 정복과 착취)이 지배. - 한편으로, 반혁명세력 역시 프랑스대혁명의 성과(제도와 이념)를 역전시키는 것을 단념하기 시작. - 결국, 당시의 외교는 게임(전쟁)을 통해 강대국들 사이의 관계를 규제했던 것. cf. 이데올로기 면에서 친프랑스적 국가는 미국뿐. 프랑스의 사상적 동맹자는 '다른 나라 내부의 당파'이거나 '여론의 논조'로써 존재했을 뿐. 그러나, 많은 계몽사상가와 지식인들이 프랑스혁명을 지지(p184)
2. 자코뱅주의(프랑스혁명)의 수용 여부 - 영국의 자코뱅주의는 장인층 또는 노동자 계급 사이의 현상. 그러나, 민중들의 전통적인 반프랑스적 편견이 자코뱅주의를 터부시하는 요인으로 작용. - 이베리아, 중부유럽, 동부유럽, 스칸디나비아, 발칸, 러시아 등에서는 일부 열혈청년, 계몽주의적 지식인 등이 자코뱅주의를 지지했을 뿐. - 프랑스 밖의 자코뱅주의는 자코뱅주의의 세례를 받은 중류계급이 얼마만큼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또한 사용하고자 했는가에 좌우됨. 예) 폴란드 : 사방으로부터 외국의 침략에 직면했던 상황에서, 이에 저항하기 위해선 강력한 국내개혁이 필요했음. 프랑스를 모델로 1791년 개혁헌법 마련. 아일랜드 : 민족적 불만과 농업문제를 둘러싼 불만이 자코뱅주의에게 정치적 힘을 실음.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잉글랜드에 대한 미움 때문. but, 두 나라는 친자코뱅주의의 전형적 예라 할 수 없음. 실제 프랑스혁명의 프로그램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 - 자코뱅주의 전파의 두가지 가능성 ① 토착 자코뱅주의가 정치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큰 나라들(저지대 나라들과 스위스의 몇몇 지방, 이탈리아의 몇몇 나라) ② 프랑스의 정복을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나라들(서부 독일과 이탈리아의 대부분) - 외국의 친자코뱅주의는 주로 프랑스의 점령에 대한 보조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행정요원에 대한 공급원으로서 역할. 내부에 자코뱅주의가 강했던 지역은 위성국적인 공화국이 되고, 편의에 따라 프랑스에 병합되는 경향을 보임(벨기에, 네덜란드의 경우) - 프랑스 안의 외국인 자코뱅주의자들 역시 공화정치의 전략수립에 중요한 역할 담당(살리체티 그룹-나폴레옹의 승진에 역할, 이탈리아에서의 성공에 기여) -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더라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외국의 친프랑스운동=아일랜드의 자코뱅 운동. but, 곧 진압.
3. 반프랑스 지역에서의 결과 - 프랑스 점령에 맞선 민중저항운동 발생. - 파르티잔 활동 활발(1798-99년 남부 이탈리아 도적떼들의 게릴라 활동이 선구) - 프랑스 군대가 패배하거나 철수한 뒤, 프랑스 국경밖 지역에서는 친자코뱅 정권 곧 몰락
4. 기본적 국제관계(영국 v.s. 프랑스) - 전쟁 당시의 기본적 국제관계는 프랑스와 영국의 싸움. 1세기 동안 유럽의 국제관계 지배. - 영국은 유럽시장에 대한 완전지배와 해외시장의 전면적 제패에 있어 걸림돌(프랑스)을 제거하고자 했음. -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입장 : 영국 상업을 영구적으로 파괴할 필요성이 있었음. 영국이 누려왔던 명백한 경제적 우위를 상쇄하고자 했음. -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지속적이고 완강한 것이 됨.
5. 또 다른 반프랑스세력들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한 지도적 위치가 프랑스에 의해 직접적으로 위협받았기 때문에 프랑스혁명을 전복시키기를 원함. - 반프랑스연합 참가국들의 정책은 동요적이었음. 프랑스혁명에는 반대했지만, 프랑스에게 영구불변으로 적대심을 가져야만 할 국가적 이해관계는 없었음. - 외교적 야망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점은 프랑스에게 적지않은 동맹국들을 만들어줌. 계산상으로는 반프랑스 연합국의 세력이 프랑스 편보다 훨씬 강했지만, 결과는 프랑스군의 연전연승(1794-1812)
6. 프랑스의 승인(勝因) - 혁명을 통한 전법의 변혁 : 임기응변과 기동성, 신축성, 용기와 사기가 효과를 발휘하는 곳에서는 프랑스군이 무적. ∵ 프랑스군 간부들은 젊었으며, 이는 혁명이 낳은 주요한 결과.
7. 전쟁의 경과 - 1793-1794년에 걸친 반혁명시도 차단. - 1794-1798년 라인란트, 에스파냐, 스위스, 사보이, 이탈리아 등 점령, 1차 반프랑스연합군 격파 - 1807 틸지트 조약, 스칸디나비아와 터키령 발칸반도를 제외한 유럽 대륙 전역에 대한 프랑스의 패권 확립. but, 해상에서는 영국에 완패. 나폴레옹은 대륙봉쇄(1806)를 통해 영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려 했으나, 이것은 러시아와의 결렬을 불러오고, 그 결과 러시아를 침공해 모스크바를 점령하게 됐으나, 그것이 오히려 나폴레옹의 몰락을 앞당김. - 모스크바로부터의 퇴각 : 러시아의 겨울 때문이 아니라, 적절한 보급에 실패했기 때문. - 라이프치히에서의 패배(1813)→파리 점령→황제퇴위(1814. 4. 6)→워털루싸움(1815. 6)으로 종식
Ⅱ. 전쟁의 결과
1. 국경의 변화(영토의 통일과 표준화) - 독일과 이탈리아의 정치지도에 나타난 전반적 합리화 - 영토적으로 불가분하게 통일되고 국경이 확연히 그어진 한 지역에서 단일한 주권당국에 의해 단일한 행정적, 법률적 제도로써 통치가 이뤄지게 됐다는 점 → 유럽 중세시대의 종지부.(중세와의 비교 p199) - 신성로마제국(1806)과 같은 전 시대의 형식적 잔재와 도시국가, 도시제국은 대부분은 사라짐.(베네치아 1797 사라짐). 독립교회국가도 사라짐. 주교공국이 자취를 감추고,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국가 몇 나라만이 1870년까지 살아 남음. - 프랑스는 병합, 강화조약, 국제회의 등의 방법을 통해 계획적으로 독일정치지도의 개편을 기도 → 신성로마제국의 234개 영토가 40개로 줄어듦. 2. 제도상의 변화 ① 정복에 의한 변혁 : 프랑스가 직접 통치한 영토에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이 낳은 제도들이 자동적으로 시행. 혹은 그 지방행정의 모델이 됨. 봉건제도가 정식으로 폐기되고, 프랑스 법전이 적용됨. ② 반동으로서의 변혁 : 프랑스에 대한 반동으로서도 많은 변혁이 이뤄짐. ∵ 새로운 정치제도가 훌륭했기 때문에, 또는 자신들이 개혁을 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패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예) 프로이센 : 농민해방의 제도화, 징병제적 요소를 가미한 군대 조직, 법률·경제·교육의 각 분야에 걸쳐 개혁 단행(프랑스에 당한 패배의 충격 때문). : 러시아와 터키의 서쪽, 스칸디나비아 남쪽의 유럽대륙에서 프랑스혁명의 확대 또는 모방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3.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 - 한 나라의 혁명이 전 유럽의 현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자각 - 사회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국가는 왕국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며, 백성들은 지배자로부터 독립된 존재라는 것, 가난한 사람도 지배계급과 독립된 존재라는 점에 대한 자각. - "프랑스 병사들은 전쟁을 통해 조국의 혁명에 대한 세계성을 다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을 만큼 효과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들이 퍼뜨린 원리와 제도는 보편적 원리가 됨. - 그리스의 콜로코드로네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행동은 세계의 눈을 뜨게 했다"
Ⅲ. 전쟁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들.
○전쟁의 실제과정, 군사동원과 군사작전, 거기서 나온 정치적·경제적 조치의 결과는 무엇인가?
1. 인명피해 - 20년간의 전쟁은 17-8세기의 전쟁이나 20세기의 전쟁들이 그러했던 것만큼 지역을 폐허화하지는 않았음. 속전속결의 양상이었고, 병기도 그다지 파괴적이지 않았기 때문. - 인명 피해는 근대적 표준에서 볼 때 그릴 놀랄 만큼 많지 않았음. 20년 동안의 인명피해수 100만명은 1차대전(4년간)의 피해, 남북전쟁 사망자(60만 내외)에 비하면 많다고 할 수 없음. - 유럽 주민들 대부분에게 있어, 전쟁이란 정상적인 인생행로를 이따금 일시적으로 흔드는 의미를 가지는 데 불과했음. - 무장 병력의 수도 각별히 많은 것이 아니었음. 1800-1815 사이 프랑스의 총인구 중 불과 7%가 징집됨.(1차대전에서는 그보다 짧은 기간에 21%가 징집) - 인명피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컸음. 그러나 적군에 의해 사망한 숫자는 얼마 되지 않음. (영국군 가운데 프랑스군에 의해 사망한 수는 6-7%에 불과. 80%는 병사 혹은 사고사) - 진실로 무서운 위험은 태만, 불결, 빈약한 조직, 허술한 의료체계, 위생지식의 결여 등.
2. 전쟁에 따른 경제적 필요, 경제전쟁의 영향 2-1. 금전적 비용이 인명피해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침. 1815년 이후 두드러진 것은 인명피해의 감소보다도 재정부담의 축소였음. <군비조달의 방법> : 전통적 방법 - 화폐인플레이션(정부공채를 위한 통화의 신규발행), 차관, 특별과세 : 그러나, 전쟁에 따른 터무니없는 재정수요와 전시의 비상조건은 모든 것을 타파하거나 변혁시킴. ① 불태환지폐의 일반화 : 채무변제를 위해서는 종잇조각(지폐)을 찍는 것이 제일 손쉬운 일. 처음에는 태환을 전제로 발행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통화로 전환되고, 점점 더 대량으로 발행케 됨. "세상은 불태환지폐에 익숙해진다" : 프랑스의 경우, 불태환지폐는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가치가 하락했고, 1797년 공식적인 국고파산으로 종지부. 영국의 경우, 1797년 민간고객에 대한 금지불을 정지시키면서 불태환통화가 사실상 유효통화가 됨. 그 결과 탄생한 것이 1파운드 짜리 지폐. cf. 태환지폐(兌換紙幣) convertible paper money : 금속화폐는 주조에 소요되는 비용이 크며, 유통되는 과정에서 파손될 가능성이 많고 휴대가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음. 따라서 정부가 금화를 주조하지 않고 일정한 용량의 금으로 태환해 주겠다는 약속하에 발행하는 지폐를 태환지폐라 함. ② 과세를 대신할 수 있는 두 번째 대안은 차관. 그러나, 전비부담의 증가와 장기화에 따라 '과세'로 다시 전환 : 영국은 차관을 통해 전비를 조달한지 5년만에 전비조달을 위해 '소득세 도입' (1799-1816)
2-2. 부채(차관)의 증대 : 국제금융업자의 시대 도래 - 주민전체가 내놓은 조세 수입 중 점점 더 많은 부분이 부유한 소수 즉, '공채보유자' 계층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게 됨. - 영국의 경우, 1794-1804년 사이 8천만 파운드를 빌림. 베어링 가문과 로스차일드 가문 등 국제금융재벌들은 그러한 차관거래의 중개자로서 활동. 이후 세계금융을 지배.
2-3. 평시사용으로부터 전시 이용으로의 자원 전용(轉用)이 가져온 경제적 효과 ① 고용의 창출, 자본재산업(예, 철강산업) 발전 자극. 라드너, "18세기 주철공장은 대포제작소와 동일" ② 기술혁신 : 사탕무공업, 통조림식품공업의 등장 2-4. 인플레이션의 초래 - 모든 나라에서 물가수준 급상승→소득 재분배 초래(혹은 반영) : 임금가득(稼得)자로부터 사업가로, 제조업으로부터 농업으로.
2-5. 전후, 전시수요에서 풀린 인력과 자원의 재조정 문제 대두 : 전쟁으로 인한 자원전용이 얼마만큼 경제발전을 저해시키거나 지연시켰을까? : 프랑스 경제가 무너진 이유는 10년에 걸친 혁명과 내란과 혼란 탓. : 영국의 부담은 자체의 전쟁비용뿐 아니라, 대륙의 동맹국에게 베풀어온 전통적인 재정보조. : 전쟁의 비용은 전쟁의 이익과 대비시킬 때 헤아릴 수 있는 문제이며, 이 전쟁은 전쟁 자체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영국은 희생을 통해 경쟁상대를 결정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이후 60년 동안 '세계의 공장'이라는 지위를 누리게 됨. 경쟁상대를 일시적으로 제거해내고 해상무역과 식민지시장을 사실상 독점한 것이, 영국 공업화에서 가일층의 전진을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됨.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우위를 지키는데 지불한 비용은 지나치게 비싼 것이 아니었음. : 반면, 프랑스는 전쟁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더 많이 확장되었을 것.
제5장 평화
Ⅰ. 전쟁 이후의 과제 : 평화(혁명의 억제) - 전쟁에서 승리한 구체제가 직면한 문제는 '강화'와 '평화유지'. 전쟁을 통해 얻은 결론은 앞으로 유럽에서 그 어떤 대전쟁도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전쟁은 곧 새로운 혁명(구체제의 붕괴)을 의미하기 때문. 국왕과 정치가들이 현명해진 것은 평화를 좋아하게 돼서가 아니라, 그전보다 겁이 많아졌기 때문. - 1815년부터 1914년 사이 근 1세기 간, 동방문제를 비롯해 항구적인 위기의 불씨가 존재했고 분쟁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둘 이상의 나라가 휘말려든 전쟁은 전혀 없었음.(1854-1856년의 크리미아 전쟁만 예외).
Ⅱ. 전쟁억제의 요인들
1. 승전국들의 현실주의적 선택 - 전쟁 이후의 유럽문제 처리는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이뤄짐. 프랑스인을 자극해 자코뱅주의의 새로운 발작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1818년에는 유럽협력체제의 정회원으로 프랑스를 받아들이기까지 함. but, 프랑스혁명이 가져왔던 주요한 변화들은 모두 수용됨. - 열강의 출현 : 러시아,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2. 각국의 전리품과 지위 ① 영국 : 해운 및 상업상 중요한 지점의 지배에 초점. 대륙에 대한 야심은 없었음. 노르웨이를 스웨덴으로 이양케 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의의 합병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취함. "어느 나라도 너무 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영국의 요구. ② 러시아 : 폴란드의 대부분을 수중에 넣는 등 한정된 영토적 야망을 채움. 프랑스 동쪽의 절대주의적 공국들에 대해 패권을 행사하는데 만족. 혁명을 회피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기 때문. 이를 위해 신성동맹의 결성 주도(영국은 불참.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패권에 반대했기 때문) ③ 오스트리아 : 유럽의 안전판 구실. 빼앗겼던 이탈리아 내 영토 회복. 이탈리아에 대한 경찰 역할. 유일한 관심사는 안정. ④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안전판 구실. 영국은 프랑스가 지배할 가능성이 많은 지역에 강대국이 위치할 것과 러시아의 팽창을 억지하기를 희망. 이로 인해 프로이센은 라인란트를 차지하고 폴란드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 내주는 대신 작센 지방의 절반을 차지. 영토 및 경제적인 면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었고, 실질적 자원 면에서 강대국이 되었음. cf. 독일연방(오스/프로이센/군소 군주국)의 형성 : 오스트리아가 수령국 지위 차지. 독일계 군소국가들의 친프랑스화 억지 역할.
3. 국제회의의 등장 - 국제회의의 등장 : 열강은 정기적인 국제회의를 통해 평화를 유지(문제 발생시 해결)하는 메커니즘을 마련. 회의의 중요한 결정은 열강이 내리는 것으로 양해됨.(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과 같이) - 열강들은 국제경찰의 역할 담당.(영국은 불참. 국제경찰적 원리는 경쟁세력-특히 프랑스-을 라틴 아메리카로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 영국은 이미 자신의 경제적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지)
4. 전후동맹체제의 붕괴(열강의 분열) - 그리스 문제와 관련한 분열 : 러시아와 영국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터키의 약화라는 이득) 그리스 독립을 지원(1820) →1815 협약의 항구성과 '모든 혁명은 억압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파기됨. - 1830년에 일어난 일련의 혁명들 : 협약체제를 완전 파괴. 혁명의 파동으로 라인강 서쪽지역에서 신성동맹의 경찰활동은 무력화됨. - 동방문제(터키의 해체)를 둘러싼 러시아와 영국의 대립 : 러시아의 목표 - 유럽과 소아시아 사이의 해협에 대한 지배권 장악(외교군사적 목적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곡물수출을 위해서도) : 영국의 목표 - 인도에 대한 통로 확보. 따라서 터키를 통해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했어야 함. : 터키 스스로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근대화할 능력 부재. 오직 영국의 지원을 통해서만 터키의 붕괴를 막아낼 수 있었음. : 동방문제는 전후 국제정세에서 가장 폭발적인 문제였고, 결국 1854-1856년의 전면전쟁으로 이어짐.
5. 소결 - 전쟁을 붙불일 만큼 폭발성이 있는 사안은 없었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너무 약했고, 영국은 아무 불만이 없었음.(영국은 1815년 무렵, 모든 분야에서 가장 완벽한 승리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업화된 경제와 해군대국, 독보적인 식민대국이었음) 러시아의 영토적 야심은 한정된 것이었고, 사회적으로 위험한 전면전쟁을 정당화할 배경이 존재하지 않았음. 오로지 프랑스만이 '불만을 품은' 강대국. 그러나, 자체 인구와 자원만으로는 또다시 강대국 연합에 맞서 전쟁하기란 불가능.(경제발전의 속도도 영국, 미국, 독일에 비해 치명적으로 뒤떨어짐.). 국제적 야심을 위해 자코뱅주의를 택하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 비쌈(온건자유주의정부는 혁명전쟁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메테르니히만큼 두려워했음) - 유럽 바깥지역으로는 팽창과 호전성 횡행. 백인들이 취한 영토는 광대했지만, 그래도 한정적이었음. 영국은 무역 이권에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여러 지점들을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 점령에 따른 행정비용을 부담하지 않고도 더 값싸게 수탈하는 쪽을 선택.(단, 인도만큼은 예외. 인도는 극동을 개방시키는 열쇠였기 때문) 러시아의 팽창은 영국에 비해 보잘 것 없었고, 프랑스는 팽창주의적 야망을 알제리로 국한. 미국은 서부전체를 차지.
cf. 국제노예무역 폐지의 이유 - 인도주의적인 동시에 경제적인 것(노예제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것). 영국의 경우, 이 시기의 경제는 설탕이 아니라 면제품의 판매에 의존하는 것이었음. 영국은 1834년 노예제 폐지.(부족한 노동력은 아시아로부터 수입해온 계약노동자로 대체)
제6장 혁명
○ 모든 강대국들의 지상목표는 혁명이 유럽전역으로 확산되는 사태를 방지하는 일. 어떤 국제적 사태보다도 프랑스의 자코뱅 세력의 팽창을 두려워했고, 그것을 막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음.
Ⅰ. 세 차례의 혁명의 물결 ① 1820-1824, 에스파냐를 비롯한 지중해 지역의 혁명과 중남미의 해방 : 대콜롬비아, 아르헨, 칠레의 독립 쟁취. 멕시코의 항구적 독립(1821), 브라질의 독립(1827) ② 1829-1834 : 1830혁명 : 부르봉왕가의 타도는 갖가지 봉기를 자극. 벨기에 독립(1830). 폴란드의 반란(1830-31), 에스파냐와 포루투갈에서는 자유주의자들과 성직자들 사이에 본격적인 내란 시작. 영국의 의회개혁법(1832) : 1830년대 혁명의 물결은 서유럽에서 귀족세력이 부르주아 세력 앞에 명백히 패배했음을 부각시킨 시기. 귀족계급은 스스로 모습을 감추거나 대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받아들임. 정치제도 면에서 입헌군주제 아래 제한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막는 자유주의적 제도 채택(영국, 프랑스, 벨기에) : 1830년은 한결 과격한 정치혁신을 기록.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에서 노동계급이 하나의 독자적이고 자각적인 세력으로 출현. 다른 유럽나라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 : 1830년은 이후 수십년 동안 일어날 위기의 서막을 올린 해("가장 기억되어야 할 해") ③ 1848년 '혁명의 파도' : 유럽 전역에서 번져간 이 자연발생적인 혁명의 물결만큼 세계혁명의 문턱까지 가까이 다가선 예는 일찍이 없었다.
Ⅱ. 혁명의 주체 ○ 의도적인 것이었으며, 계획적이기까지 했음. 프랑스혁명의 유산(모델)은 경제사회적 불만에 대한 하나의 구체적 목표를 제공하고, 유럽전체를 단일한 운동(정부를 전복하려는)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함.
1. 혁명운동(반정부운동)의 세 가지 조류 ① 온건자유주의자(중류계급 상층부/자유주의적 귀족계급) - 리버럴 : 1789-1791 혁명에 고무. 입헌군주제 추구. 과두정치적 의회주의 제도 추구. ② 급진적 민주주의자(중류계급 하층부/새로 대두된 제조업자/지식인/불만 품은 향신계급) - 래디칼 : 1792-1793 혁명에 의해 고취. 복지국가적 성향을 가진 민주공화국 추구. 쟈코뱅 헌법을 모델로. ③ 사회주의자(노동빈민) - 소셜리스트 : 혁명력2년과 테르미도르 이후의 반란들에 의해 고취. 바뵈프의 모의를 모델로. 그러나, 반정부운동(세 가지 조류)은 절대군주와 교회, 귀족정치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에 서 있었음. 1815-1848년의 역사는 이러한 연합전선 해체의 역사.
2. 왕정복고기(1815-1830) : 분화되지 않았던 반정부세력 - 영국을 제외하고는 자각적 노동계급 혁명가나 사회주의자를 정치무대에서 찾아볼 수 없었음. : 1830년 무렵, 오언주의적 협동조합운동의 비호 아래 정치와 이데올로기 면에서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적 경향 등장. : 대륙에서의 정치적 저항은 예외 없이 부유한 자들, 교육받은 자들의 소수집단에 한정됨. : 영국의 인민헌장 프로그램은 정치적 급진주의와 양립가능했던 것. : 사회적 차이나 민족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정부세력은 갈라지지 않았음. : 영국과 미국을 제외하고,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반정부세력의 정치적 전망은 대동소이. 혁명성취의 전략도 대동소이(평화적 개혁의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
3. 비밀결사운동(예, 카르보나리) : 혁명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엘리트 집단으로 인식(일반 민중의 역할 경시)→혁명의 성취를 위한 비밀결사 조직 : 나폴레옹 시대 말기에 들어, 의례와 격식, 위계질서를 갖춘 비밀결사 속출. : 러시아에서는, 비밀결사들이 데카브리스트들과 결합, 1825년 근대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반란 일으킴. : 비밀결사의 전성기 - 1820-21년. 이탈리아의 몇몇 나라와 에스파냐에서는 일시적 성공. 1823년 이후 모든 결사가 사실상 파괴됨. : 반동에 대한 증오라는 하나의 공통점에 의해 결합된 집단. : 유일하게 성공한 혁명 - 그리스 독립. 인민의 반란을 일으키는데 성공했고, 유리한 외교적 상황에 힘입은 것. 그리스 독립은 국제적으로 자유주의를 고취시키는 자극이 되었고, 1820년대 유럽의 좌익들을 결속·단합시키는데 기여.
Ⅲ. 1830년 혁명의 결과(영향) ○ 1830년 혁명은 사태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1. 주요한 결과 ① 1789년 모델에 따른 대중정치와 대중혁명이 다시 가능해짐→비밀결사에 의존할 필요성 작아짐.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았던 대중은 1830년 7월 파리혁명에서 바리케이드를 무수히 구축 ② 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대두 ③ 좌파정치의 분열 : 급진주의자에 대한 온건파의 배반. 온건파와 급진파 간의 긴장 고조. : 서쪽에서는 온건파 자유주의자들이 반정부 공동전선에서 탈퇴. 권력획득 후 급진파 배반 영국의 경우, 차티스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배치되었던 군대의 지휘관은 중류계급의 급진주의자. ④ 유럽의 양분 : 라인강 서쪽(프랑스/영국/벨기에) - 신성동맹에 대한 온건자유주의의 승리 라인강 동쪽(독일/이탈리아/폴란드) - 혁명은 모두 진압 cf. 이베리아반도 - 자유주의의 승리와 보수주의의 재등장이 반복 - 발전속도와 사회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혁명적 민족들과 수동적 민족 사이의 차이가 뚜렷해짐 - 혁명운동에 있어 프랑스의 방관은 급진주의자들의 실망을 불러옴. 1830년대 민족주의의 고조와 더불어 왕정복고 기간 중에 혁명주의자들이 지향했던 통일된 국제주의를 무산시킴. - 국제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동(낭만주의적 사조와 결합) 마치니 - 카르보나리 운동에 반대하는 반동의 주창자가 되어 여러 민족적 음모를 조직.
2. 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운동의 등장 : 서유럽에서 가난한 도시 사람들의 불만이 보편화 : 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 운동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등장. : 영국의 차티스트운동(인민헌장 쟁취운동. 1839-1842)과 오언주의적 협동조합운동(1829-1834) : 차티즘은 협동조합운동에 비해 정치적으로는 성숙된 것이었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약간 뒤졌다는 역설을 낳음) :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 - 생시몽, 퓨리에 등 유토피아 사회주의 등장. 바뵈프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블랑키주의 등장. * 블랑키주의 - 비밀결사를 프롤레타리아적 조건에 맞도록 뜯어고치고, 반란과 집중적 민중독재 전략을 취함. 근대 사회주의 혁명운동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목표가 정권탈취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전달함. but, 대규모 대중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반란을 계획함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실패.(엘리트 운동의 한계를 못 벗어남)
3. 반정부운동 세력의 분열 : 사회혁명의 문제는 반정부운동 세력을 분열시킴. 1848년 2월혁명 이후 중류계급 급진주의자들은 극좌파로부터 떨어져나감. : 프랑스, 영국 이외의 나라들에서의 급진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와 극좌파 두 집단으로 갈라짐. : 극좌파는 '혁명투쟁은 외국 지배자와 국내 착취자에 대한 일반민중의 투쟁'이라고 생각. 서유럽 초기 사회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음. 그러나, 농민동원에 실패했기 때문에 극좌적 운동들은 실패.
cf. 소부르주아지 세력은 급진주의의 주류를 형성했으나, 혁명에 대해 이중적 위치를 점함. 그러나 허약하나마 여전히 자코뱅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였고, 미래의 찬탈자(프롤레타리아)들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는 민중전선의 변함없는 구성분자였음. Ⅳ. 1830-1848년 혁명운동의 공통점
① 중류계급과 지식인 음모가들의 소수집단의 운동 : 대중선동 및 대중조직의 전통이 부재했기 때문.(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 : 입헌국가에서도 극좌파의 운동은 불법화되는 일이 많았음. 즉, 대중정치의 기본적 장치들(공개적 선전활동, 대중적 조직, 청원운동, 순회강연 등)이 허용되지 않음. ② 좌파세력들의 공통된 세계관과 혁명상, 전략전술에 있어서의 공통성 : 모든 좌파세력은 어느 시점까지는 같은 적을 상대로 투쟁. 따라서 목표와 강령도 동일. : 국왕, 귀족, 특권에 대항한 공동전선. 1848년 이전까지 부르주아와 노동자 사이에 근본적 대립은 발생하지 않음.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자들도 자신들을 급진적 민주주의운동의 극좌파로 규정. : 공통된 혁명상 공유. "국가의 정치정세에 위기가 일어나서 급기야 폭동에 이르게 되리라"는 전망. (p264) ③ 국제적 단결의식 : 위와같은 공통된 견해는 강력한 국제주의 전통에 의해 보강됨. : 프롤레타리아적 성향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증대하면서 국제주의가 더욱 힘을 얻어감.(이후, '인터내셔널'로 발전) : 망명이라는 우연적 요소의 역할 - 망명처로 모여든 좌파들은 공통된 운명과 이상으로 결속됨.
제7장 민족주의
1. 민족주의의 등장 : 1830년 이후로 혁명을 지지하는 운동 전반이 분열. 분열의 산물 가운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이 '자각적인 민족주의 운동' :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 - 마치니가 설립하거나 영향을 미친 각국의 '청년운동'들. → 유럽 혁명운동이 민족단위로 분해됨을 나타냄. 그러나, 각 부분들은 대동소이한 정치강령과 전략전술을 가졌고, 사용한 깃발마저도 한결같은 삼색기. : 혁명의 각 부분들은 자국에 대해 1차적 관심을 쏟기 시작 → 자국의 해방을 통해 전 세계를 해방할 것이라는 논리로 스스로를 정당화. : 반면, 민족주의는 보수주의적 정책이나 제국주의적 정책들에도 쉽사리 적응, 변용될 수 있었음
2. 민족주의의 주체세력 : 소토지소유자, 민족적 중류계급, 직업적 지식인들 : 헝가리의 향신들, 절대주의와 외국인, 명문거족의 지배에 불만을 가져온 향신들은 더 많은 일자리를 얻고자 하는 소망에서 민족주의와 융합. : 민족적 사업가 계급은 오히려 민족주의운동에 부정적. 국가로 독립했을 때의 좁은 시장보다는 개방되어 있는 큰 시장 쪽을 선호했기 때문. : 중류계급의 민족주의 운동에 큰 몫을 담당한 것은 '교육받은 계층'. : 민족주의 운동의 전위부대는 종래 소수 엘리트들만이 차지했던 분야로 진출한 많은 '신인'들. 학교와 대학은 민족주의의 가장 의식적인 기수가 됨. 사회변혁과 대학의 변모는 학생들을 한 사회집단으로서 자각하도록 함. : 교육받은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서, '국어'의 존재 부각. 교과서나 신문이 처음으로 그 나라의 민족어로 발행되는 순간, 언어가 일종의 공용어로 처음 사용되는 순간은, 한 민족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계 : 그러나, 일반대중의 경우 국민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여전히 종교. 에스파냐 사람은 카톨릭 교도로서 에스파냐인이 되는 것. 국민감정이란 대다수 민중들에게 아직도 전적으로 생소한 것. : 인구이동의 영향→지방적 전통주의 파괴. 실향(失鄕)은 격렬한 치사성 향수병을 초래.
3. 민족주의운동의 사례 : 1848년 이전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일관성 있는 형태로 조직된 민족운동은 '아일랜드 합병철회운동'이 유일. : 근대적 형태의 민족주의가 강력한 대중적 세력이 된 곳은 이중혁명으로 이미 변혁을 겪은 나라들(프랑스, 영국, 미국)과 아일랜드와 같은 나라들뿐이었음. : 부르주아 세계가 자리잡은 이외의 지역에서는 외세의 지배(다른 종교에 의한 지배를 의미)에 대한 민중반란은 이후 민족운동의 선구가 되는 양상을 보임. 그러나 민중반란을 쉽사리 근대적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는 없다. 예) 유고슬라비아인들을 단결시킨 것은 경제적 후진성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없었다.
4. 그리스의 민족주의 : 부족과 산적떼의 영웅들이 현실적인 통치권력에 대하여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면서 중산계급의 민족주의 및 프랑스혁명의 이념과 융합되었던 예는 오직 그리스의 독립투쟁(1821-1830)뿐임. 오직 그리스에서만 국민 전체가 유럽의 좌파입장과 동일시해도 무방한 식으로 압제자에게 항거해서 일어났기 때문. : 배경 - 발칸과 흑해, 레반크 지방의 교육받은 계층과 상인계급은 모두가 그리스화되어 있었음. 18세기 현저한 경제적 확장에 의해 그리스화는 더욱 힘차게 진행. 유럽 각지와의 교류 확대. : 그리스의 민족주의는 서유럽에서 일어난 엘리트들의 운동과 비슷한 면이 있었음. : 서구형 민족주의자들은 반란군(산악지대의 산적과 무법자들, 족장)의 지도부가 되어 반란을 범헬레니즘적 양상을 띠도록 만들었고, 반란군으로부터 한 민족의 무장된 대중봉기라는 거사를 얻어냈던 것. : 그리스인이라는 사실이 그리스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의미하게 되자, 그리스에 동화된 발칸의 지식계급들 사이에서조차 그리스화는 후퇴. 발칸의 여러 민족들에게 잠재적인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거나 그것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음. 그리스의 독립은 발칸의 민족주의가 진전하기 위한 불가결의 전제조건이었음.
- 동양의 민족주의는 서양의 영향과 서양의 정복이 가져다준 산물.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양에서는 진보파와 민족주의, 민중들 사이의 접목은 이뤄지지 않았음. - "민족주의도 이중혁명의 산물"
제8장 토지
1789-1848년; 토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따라 인간들 대부분의 생사가 좌우되었다.
자본주의 농업을 위한 전제조건; 1)토지가 일종의 상품(사적 소유자의 소유와 자유로운 매매의 대상)으로 변해야 했다. 2)토지는 시장을 위해, 그 생산적 자원을 개발하려 하며, 이성(계몽된 자기이해와 이윤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계급의 사람들에게로 소유가 넘겨져야 했다. -귀족영지의 한사상속제, 매각이나 분할 금지하는 제도 타파; 경제적 무능은 파산, 경제적으로 능력있는 자가 토지구입가능하도록; 교회가 소유한 광대한 토지가 비교회화, 매각되도록; 집단소유지의 분할과 인클로저 3)방대한 농촌인구는 증대하는 비농업 부문 경제를 위해 적어도 그 일부는 어떻게든 자유로이 이동하는 임금노동자로 전환되어야만 했다. -농민들을 경제외적인 속박과 의무(농노적 토지보유, 농노신분, 영주에 대한 공납제, 강제노동, 노예제 등등)로부터 해방시켜야; 부르조아가 되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될 대량의 '자유'노동력 창출; 능률에 따라 보다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유인을 본 자유로운 임금노동자와 농장경영자쪽이 농노등의 노동보다 훨씬 능률적이라는 이점; 토지에 붙어먹고 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토지가 생산적으로 이용될 때가 오면 남아도는 잉여인구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도시와 공장으로 옮겨갈 수 있다, 즉 농민은 속박과 함께 토지도 잃어야만 한다; 봉건제도의 폐기를 의미 4)'자연적 독점(natural monopoly)'상태의 토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지대를 어떻게 제거하거나 경감시킬 것인가?; 전(前)자본주의적 지주와 전통적인 자영농민이 장애물; 완전히 양도가 가능한 개인재산을 유일한 합리적 제도이자 가장 자연적인 제도라고 보는 사회적 관점과 그렇게 보지 않는 관점(봉건영주로부터 극빈한 목부에 이르기까지 농촌 인구의 대부분이 극도로 싫어함)사이의 전면 충돌; 저항을 분쇄할 정치적·법률적 혁명을 통해서 역전의 조건 조성; 서유럽의 대부분과 그 식민지의 농업관계의 역사는 정치·법률적 혁명의 역사; 이러한 법률의 칼날은 오막살이농민과 노동자를 겨냥(예; 1834년 구빈법; 농촌빈민들의 살림살이를 못견딜만큼 어렵게 해서 그들이 무어든 상관없이 주어진 일을 좇아 옮겨가지 않을 수 없게 함); 법률혁명은 유럽 대부분의 곳에서 외부와 위로부터 부과됨으로써 실현 -미·영은 자영농민층을 없애버리는 방식을 취함; 영국은 4천명 내외의 토지소유자가 전체 토지의 약 4/7를 소유하고, 25만 명의 농장경영자(farmer)가 약 125만 명 내외의 노동자와 머슴을 고용하여 경작하는 나라; 미국은 토지소유자가 직접 점유하여 영농, 노동력의 부족을 집약적인 기계화의 힘으로 충족, 사실상 무제한으로 얼마든지 토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특수한 사정, 봉건적 관계 등이 전적으로 결여된 사정 위에서 아메리카 인디언간의 갈등은 대단히 하찮은 것, 사기·약탈 등 강제적인 방법으로 인디언의 땅을 빼앗는 것은 도덕적인 일 -프로이센; 봉건적 지주를 자본주의적 농장경영자로, 종래 농노를 고용된 농업노동자로 바꾸는 가장 비혁명적인 방식; 1849년 당시 토지없는 농촌노동자가 거의 200만명으로 추정 -덴마크식; 상업적으로 영농을 하는 중소 규모의 농장을 대량으로 조성, 1780년대의 계몽적 전제정치 아래서 봉건제도 폐지; 개방경지 폐지후 소작.자작농들이 개인소유지를 만들도록 장려 또는 대규모의 농장경영을 세분하는 경향; 농업생산성의 급겨간 증가,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농촌빈민의 증가; 19세기 후반 최대규모의 이민파동(미국행) 초래 -프랑스; 혁명에 의한 봉건제도 타도; 농민적 토지소유자의 나라;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유출된 잉여노동력이 많지 않아 프랑스 산업의 발전을 지연시킨 요인이 됨; 프랑스혁명이 전파된 지역에서는 그 나라의 토착 자유자들에 의해 봉건제도 타파; 그러나 농업관계의 혁명이 프랑스 혁명만을 원인으로 하는 것은 아님; 토지의 합리적 이용을 주장하는 순전히 경제적 논의들이 계몽적 전제군주들에게 감명을 주었기 때문에 유사한 해결책이 이미 나와있었고, 따라서 프랑스 혁명을 법률혁명의 완성보다는 출발과 지속을 의미
Q: 농민은 토지를 원했지만 부르조아적 농업경제를 원하지는 않았다. 왜 농민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일까? - 관습과 전통에 의한 聖化; 전통적 제도가 비효율적이고 억압적이더라도 사회적으로 상당히 확실성있고 비참한 수준에서나마 어느정도 경제적 안전 보장; 법률혁명은 약간의 권리를 주는 반면 많은 것(살림이 어려울 때 영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권리 등)을 빼앗아감; 자유라는 이름의 고독(익숙하게 살아온 사회구조가 박살나고 부자 이외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음)⇒농촌인구의 저항; 교회와 정통적 국왕(그들 주변의 사람, 理想의 왕)의 이름하에서의 저항; 실제로는 모두 성직자와 지배자들의 이익에 이바지 하는 것; 좌파적 농민운동이라 부르는 그런 소요는 거의 없었다; 부르조아 경제가 토지에 미친 충격이 농민폭동을 유행병처럼 만연시켰지만 그 충격이 실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1880년대의 대농업공황기와 그 후의 일
제9장 산업세계를 향하여
1848년까지 제대로 공업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 뿐; 세계인구의 대부분은 농민; 경제적 운동은 산업의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되풀이되는 새로운 리듬이 아니라, 풍작과 흉작이라는 해묵은 리듬에 의해 지배; 공업지역과 비공업지역의 변화 리듬이 1780녀과 1848년사이에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1846-1848년 유럽에 번졌던 경제공황은 농업의 작황에 의해 지배된 구형의 불황(구체제의 마지막이자 아마도 최악의 경제적 파탄); 영국만은 예외, 순전히 '근대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난 초기 산업주의 시대 최악의 파국을 1839-1842년 사이에 이미 겪음; 그러나 1789-1848의 시기에서 중요한 점은 어떤 기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 1) 인구통계적인 변화; 전례없는 '폭발적' 증가(약 150년 만에 몇곱절 증가); 경제적으로 선진적인 나라에서 가장 두드러짐; 인구증가는 경제혁명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 경제혁명이 없었던들 인구증가가 일정기간 이상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예: 아일랜드); 인구증가는 보다 많은, 특히 '젊은' 노동력 산출 2) 교통·통신의 변화; (아직 요람기지만) 철도, 도로망의 확장, 운하 건설, 선박(특히 증기선) 총톤수 증가, 우편물의 증가, 무엇보다도 수송력의 개선 때문에 기근의 위협이 전보다 약화되고 인구증대에 기여 3) 인구와 재화의 이동 증가; 이민, 국제 무역의 증가 4) 경제적·사회적 변화의 템포가 눈에 띄게 가속화; 1830년대 이후 급속화, 1840년이 되면 산업주의의 특징적 사회문제들(프롤레타리아, 무절제하고 무리한 도시화의 진행이 가져오는 공포 등)이 일상적 토론거리화; 철도와 중공업의 조직적인 건설, 이에 따른 투자기법의 혁명(금융회사), 집중의 징후; 유럽대륙의 모든 나라 정부는 산업개발에 보다 강력한 힘을 휘두름
Q: 프랑스라는 거대한 역설적 존재; 이론상으로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급속한 발전을 할 수 있었는데(독보적인 프랑스 기업가들의 창의성과 발명의 재능(백화점과 상업광고 발명, 사신술, 소다제조법 등 온갖 기술혁신과 성과), 방대한 여유자본 등) 다른 나라들보다 속도가 뚜렷이 느렸고 또 일찍이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영국이나 독일, 미국과 필적할만한 대공업국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패러독스에 대한 설명; 프랑스 혁명; 국민의회의 힘으로 이뤄졌던 많은 것들이 로베스피에르의 손에 의해 없어졌다; 프랑스 경제의 자본주의적 부문은 농민층과 소부르주아지라는 확고한 토대위에 세워진 상부구조에 불과; 인구증가 저조, 국내시장 형성 미비, 자본은 밖으로 투자하고 사치품만 생산, 사기업은 프랑스를 통해 다른 나라들의 경제성장을 촉진시켜줬지만 프랑스 국내에서는 그렇지 못함 - 미국; 프랑스와 극단적 반대의 처지(자본부족, 정착인구와 수송력 부족); 자본의 수입, 기계의 발명, 40년대 중반 대기근 이후의 광대한 이민 인구, 이상적인 동질적 시장 형성, 무한대의 확장 가능; 단 한가지 장애물은 공업적인 북부와 반식민지적인 남부의 갈등 - 러시아 등; 경제적으로 보잘 것 없음. * 세계의 한 부분은 대공업국을 향하여 맹렬히 돌진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 부분은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두가지 현상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침체나 불경기, 심지어 경기후퇴마저도 경제발전의 산물이었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경제가 부와 공업과 상업의 새로운 중심지들의 힘에 저항하여 버텨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국과 유럽의 일정지역이 세계의 공장노릇을 하는 것은 적합한 역할이었고, 후진지역들은 식량이나 광산물(비경쟁 물자)을 생산하여 영국의 제조업 산물과 교환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독일과 미국에서는 국제경제란 사실상 영국을 유일한 공업국이 되게 한다는 이유로 국제경제를 거부하고 보호주의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가정하고 있었던 것은, 경제란 정치적으로 독립된 것이며, 세계의 조그만 일부분의 선구적인 공업화가 그들 각자에게 떠맡기는 역할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힘을 가졌다는 점이다. 식민지처럼 경제가 독립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아무런 선택권도 가질 수 없었다. 이중혁명의 시대가 가져온 경제적 귀결 가운데서도 '선진국'과 '저개발국'을 갈라놓은 분열이 가장 뿌리깊고 영속적이었다; 1848년까지 누가 선두 그룹(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서부유럽과 독일, 북부 이탈리아, 중앙유럽의 일부와 스칸디나비아 및 미국, 영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이 사는 식민지)에 속하는가가 분명해졌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은 모두 뒤져 있거나 서양의 경제적 종속물로 전락했다.
제10장 재능에 따른 출세
귀족사회의 종결이 귀족 세력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출세주의에 입각하여 세워진 사회는 눈에 보이는 제도화된 성공의 표지를 환영하는 법; 신흥계급들은 그 이전 지배계급이 만들어놓은 호화로움의 표준들 가운데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의 상징을 찾으려 함; 프랑스 혁명은 그 문화의 귀족적 특성을 예외적이라 할 만큼 순수한 형식으로 보호; 혁명 후의 프랑스 사회는 벼락부자와 벼락출세를 한 사람들,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사회
이중혁명의 결정적 성과는 재능있는 사람들, 활동적이고 빈틈없고 근면하고도 욕심많은 사람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놓았다; 미국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세의 길이 모두 열린 것은 아니었으며, 맨 꼭대기까지 열린 것도 아니었다; '통행허가세'로 상징되는 밑천이 필요했다; 성좌에 오르는 길(사업과 교육-관직과 정치와 자유업, 예술과 전쟁) 관직; 개인주의적인 경쟁과 재능에 의한 출세, 출생과 연고에 대한 실력의 승리; 경쟁시험이라는 장치를 통해 이루어짐(프랑스 혁명은 시험에 의한 계층제도를 만들어냄); 시험에 붙는다는 것은 민주주의적인 것도 평등주의적인 것도 아닌 장치; 그것이 낳은 것은 사업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개방사회'가 아니라 관료주의적인 '폐쇄된 사회'를 낳았다; 능력있는 사람이 관직생활에서 일단 그 지위를 획득하고 나면 경쟁이 곧 자동적인 승진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발되었다는 자각, 청렴결백과 실무적 능률, 교육이라는 지배적인 분위기, 그리고 비귀족적인 출신성분이 공무원 기구의 전체를 결속; 나폴레옹 전쟁 후의 시대가 거의 어느 곳에서나 정부기구 및 활동이 두드러지게 확대된 시대; 국가의 기능은 야경이라는 기능만 남기고 축소되야 한다는 통속적 슬로건은 국가가 사실은 그 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 야심적인 국가였다(공공교육제도 운영; 국립경찰; 전쟁 전보다도 더 큰 군대; 공공철도 운영 및 소유; 더 큰 규모의 사법제도; 더 큰 자치적 행정조직)는 사실을 은폐; 단일국가공무원제도 자유전문업; 의사, 법률가, 교수, 건축가, 편집자와 저술가; 오랜 기간의 교육과 남다른 재능, 기회가 필요 성직; 기대된 만큼의 개방을 가져오지는 않음; 정부의 반교권적 열성 덕분에 확대보다는 축소; 교직; 진실로 개방된 것은 세속인과 종교인에 의한 초등학교 교직; 농민이나 장인들, 그 외 수수한 집안의 아들들 중에서 구했는데 그 수가 서양 각국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사업; 급속히 팽창하는 경제에서는 성공할 기회가 컸고, 시작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빈민에게는 그렇지 못했다.(산업경제는 고용주나 자영업자의 숫자상의 증가보다도 더 빨리 임금 노동자를 창출함으로써 그 발전이 가능했다.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켜 사업가 계급으로 올라설 때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아래로 내려앉게 마련이었다/경제적 독립에는 기술적 능력과 마음가짐 또는 자원이 필요한 법인데,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경쟁'을 기대한다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전쟁;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에서는 매우 중요했으나 그 후 계속된 오랜 평화시대에는 그 매력이 크게 상실 예술; 무대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신처럼 존경받는 연주가나 우상화된 가수나 무희의 출현
유대인 자유화; 이중혁명은 이제까지 그들이 기독교 세계 아래에서 향유해본 적 없는 가장 평등에 가까운 것을 주었다; 재력, 재능; 기회를 잡은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에 동화, 압도적으로 '자유주의'에 공감; 그럼에도 그들의 처지는 불확실하고 불안정; 피착취대중은 유대인과 부르조아를 곧잘 동일시, 반유대주의가 유행병처럼 번져가
새로운 사회의 참여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 관습이라는 완강한 갑옷, 뭘 해야 할줄 모름; 재산 축적의 능력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은 제구실을 하는 사람이 아니며, 제구실을 하는 시민도 될 수 없다(재산에 의한 선거권 제한제도); '야만인(본국에 있는 많은 노동빈민이 포함)'에 대한 '문명인'들의 경멸; 냉혹한 시대; 자유롭게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는데 못 들어오는 것은 능력의 결여다; 역사적 또는 인종적으로 영구히 불구가 될 유산을 타고 났다;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원리와 의식적으로 차별적인 노동법 사이의 모순을 간과; 모자라는 사람은 항상 굶어죽기 직전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적 동기를 얻을 수 없어서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불평등에 대한 공식승인; 불평등은 재산과 상속과 더불어 인간사회의 3개 기둥 중 하나; 형식적 평등의 기초 위에 계층적 사회가 수립; 계층적 사회에 결여된 것-인간은 의무와 권리를 가졌다, 미덕은 결코 단순히 화폐의 등가물이 아니라는 것, 하층계급은 비록 신분이 낮기는 해도 신이 정해준 장소에서 겸손하게 살아갈 권리를 가졌다는 것,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신념
제11장 노동빈민
부르조아가 되느냐; 검약, 자조, 자기향상을 위한 최선의 노력; 그러나 막힌 길 견디느냐; 독주의 흑사병; 전염병의 창궐, 유아살해, 매춘, 자살, 정신착란... 계급분화의 거대한 과정; 묵시록적, 신비적인 교파와 의식의 대유행; 빈곤과 굴종을 받아들이거나 잊어버리려는 시도; 대중적 무관심 저항하느냐; 반란이 가능했을 뿐 아니라 사실상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태; 19세기 전반에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출현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 직접적 결과가 1848년의 혁명
19세기 초의 노동운동; 계급의식과 계급적 야심을 가졌다;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계급, 즉 노동계급인 근로자 또는 프롤레타리아가 또 하나의 계급인 고용자 또는 자본가와 맞서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계급적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고 산업혁명은 그 자신감 위에 언제나 끊임없이 동원돼야 한다(수시 항의가 아니라 끊임없이 경계하고 조직하고 활동하는 운동의 필요)는 필요를 부과; '사회주의적'; 1830년대 영·프에는 노동자계급의식이란게 확실히 존재; 그러나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엄밀한 의미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니라 주로 도시의 노동빈민을 대표한 모든 세력과 모든 경향의 한 공동전선; 사회의 중류계급 아래에 있는 도시대중 전체를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또는 '노동계급'에 동화시키는 경향; 지도와 통합은 거의 이루어지지지 않음(예; 1834-35년의 '총노동조합'은 신속하고도 비참하게 분쇄당함);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일시적 위협을 뛰어넘어 그 반란을 조직화하고 성숙시켜가기에는 부족했지만 1848년경 노동빈민운동은 1789-1794년의 혁명적인 중류계급의 자코뱅주의에 견줄 만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자코뱅주의: 보통선거, 반란권, 노동 또는 생계유지의 권리, 모든 사람의 행복이 정부의 목표이며 인민의 권리는 손에 넣을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실시되는 것이어야 한다/상퀴로트주의;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양 극단사이에 존재하며, 대체로 가난했기 때문에 후자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되는 막대한 숫자의 '小소유자'의 이해관계를 나타내고자 한 정치적 경향의 한 분파, 자신의 이상이었던 촌락민과 小수공업자의 빛나는 과거 또는 소농업자나 직인들이 은행가와 백만장자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 미래를 이상으로 여김)
제12장 종교
대중적 세속화; 전례없는 대변화; 두드러진 비종교화 경향; 이 시대는 비종교화와 함께 종교적 무관심이 날로 증대하면서, 가장 비타협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이며 감정적으로 강압하는 형태의 종교부흥운동과 싸운 시대
신사.귀족층은 하층계급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 종교적 의식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종교엔 관심을 잃어갔다; 공공연히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드물었지만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적, 반교권적인 프리메이슨주의가 엘리트들의 종교;양적인 면에서의 종교는 여전히 강대했고 더 강대해져갔지만 우성적인 것이 아니라 열성적인 것; 현세적 이데올로기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아메리카 혁명 및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변화들이 비종교화되었다; 19세기의 새로운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출발부터가 현세적(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퍼져있던 종교적 무관심, 기성교회가 새로운 사회나 계급들을 도외시)
빈민대중사이에는 신앙과 미신 중류계급; 일편단심의 강력한 도덕적 규율과 조직 필요; 기독교 도덕을 대신할 부르조아적 비기독교 도덕을 만들어내려는 갖가지 시도가 성행; 특히 세속사회에서 교회의 성직자와 맞먹는 존재인 학교 교사들 위해 도덕을 세우려는 시도;
숫자로는 팽창; 각별한 팽창능력을 보인 것은 이슬람교와 분리파적인 프로테스탄티즘 - 이슬람교; 조직적인 전도의 노력이나 강제적 개종 없이도 팽창한 것이 특색; 이슬람교도의 상인들이 아프리카 대륙과 바깥 세계의 통상을 독점함으로써 세력을 크게 강화, 이들 덕에 이슬람교가 새로운 민족들에 착목; 노예무역으로 원시적 공동체 생활이 파괴된 아프리카에서 사회구조를 재통합시키는 수단(독립성, 전투성, 우월성의 관념)으로서 이슬람교가 노예제에 대한 유용한 대항력이 됨; 동남아시아에서는 일종의 前내셔널리즘으로서 이슬람교; 이슬람교 내부의 개혁운동과 부흥운동; 세계적인 이슬람교 부활의 시대 - 프로테스탄트 분파들의 교세확장운동; 전적으로 선진자본주의 문명을 가진 나라들에 국한되었다; 대량의 개종현상; 기성교회들의 분열과 여러 교파의 분리 및 발달; 배타성과 인간과 신 사이의 개인별 교류를 고집하는 것 등이 상승세에 있던 기업가와 소사업가들에게 매력적이었고, 까다로운 종교의식이나 학식을 내세우는 어려운 교리에 적의를 나타낸다는 점이 평신도들의 예언이나 설교를 장려; 열광적인 강도(대중적 감정의 배출구)의 대중적 종교 부흥운동
종교는 민중의 아편; 전투적이고 곧이곧대로의 케케묵은 종교로 복귀 경향; 중류계급적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억압적인 사회에 대중들이 대처하는 하나의 방법; 정치적으로 개발되지 못한 사람들이 불만과 갈망을 표현하는 원시적 표현수단
중류계급에게는 도덕적 기둥이 되어준 종교; 전통사회에 맞서는 그들의 사회적 존재를 정당화, 뻗어나가게 하는 도구, 피압박자에 대한 가혹성을 정당화
최고위층에게는 사회적인 안정; 교회란 왕권을 떠받치는 가장 강력한 기둥; 혁명에 대항하는 반동을 지탱하는 지주; 신의 섭리가 그들에게 정해준 지배자 밑에서 살아가라; 왕권과 제단의 동맹; 자유주의에 대한 공포, 반계몽주의적이고 반혁명적인 정신으로 과거로 도피; 상류계급 청년들 사이에서의 로마카톨릭교의 부활
제13장 이데올로기 : 현세
1.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 1789∼1848년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양적으로 우위였지만, 질적으로는 현세적·비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우세 : 주요 사상가들은 종교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음. - 당시의 이데올로기는 크게 진보를 믿는 사람들(세계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받아들이는 측)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갈라짐 - 당시의 가장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유일한 세계관')는 합리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계몽주의' 사상이며, 가장 대표적인 인물 역시 영국과 프랑스에서 출현 : 이성의 힘에 대한 무한한 신뢰, 철학적으로는 유물론과 경험론적 경향, 인간의 세계란 독립자족하는 원자(개인)으로 구성된다는 전제. - 공리주의의 발전(홉스, 벤담, 밀) : 사유재산과 사적기업과 개인의 자유를 확고히 하려는 사람들은 흔히 효용이라는 다치기 쉬운 것보다는 '자연권'이라는 형이상학적 승인을 부여하는 편을 택함. 또한 철학적으로 비길 데 없이 훌륭했던 홉스 보다도, 오히려 철학적으로 약한 로크쪽이 통속적 자유주의의 단골 철학자로 남게 되는데, 이는 사유재산을 '자연권'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간섭과 공격의 사정거리 밖에다 자리잡게 했기 때문. - 고전적 자유주의가 하나의 정치사상으로 대담성과 엄격성에서 벗어난데 비해, 경제사상으로서 자유주의는 제지당하는 바가 적었음, 이는 인간의 본성 및 인간의 자연적 상태라는 고전적인 가설이 인류의 일반상태보다는 '시장'이라는 특수상황에 더 잘 들어맞았기 때문. ·애덤스미스 : 경제적으로 매우 불평등한 사회란 모든 인간의 '자연적 평등' 및 정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님.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평등한, 즉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등가물의 교환이라는 기초 위에서 성립되는 관계이기 때문. ·리카도의 경제학 : 자연적 조화 속에 상당한 불협화음의 요소를 추가. 예컨대 '이윤율의 저하'나 '노동가치설'(이는 한 차례 더 비꼬기만 하면 곧 하나의 유력한 자본주의 반대론으로 전화될 수 있을 만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반적으로는 자유주의 고전경제학이 전보다 더 튼튼한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데 기여
2.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급상승이 다소 둔화되면서, 사회주의가 18세기적 진리들을 손질(?)하여 등장 : 이성과 과학과 진보가 사회주의의 확고한 기초(기본적으로 초기 사회주의는 역사의 진보와 이성에 대한 신뢰라는 면에서 계몽주의의 토대를 지님), 이 시기의 사회주의자들은 근대 사회주의의 가능성 자체를 만들어낸 산업혁명을 진보로 받아들였으며, 고전적인 영국·프랑스적 자유주의의 동조를 얻을 수 있는 논의의 선을 넘어 좀 더 나아간 입장을 밝힌 것에 불과. - 휴머니즘과 계몽주의라는 뿌리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적인 한 가족'의 갖가지 구성원인 자유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를 구별하는 것은 추구했던 유토피아라기 보다는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 이 지점에서 사회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과 결별. ·첫째, 사회란 개별적 원자들의 집합체이며,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각 원자들의 이기심과 경쟁이라는 가정과 절연, 인간은 본래 공동체적 존재라는 신념으로 회귀 ·둘째, 사회주의는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던 형태의) 진화론적이고 역사적인 논법을 채택 :오언, 푸리에, 생시몽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세계가 교육과 양식이 있는 사람들(유력자 계급들, 계몽적 전제군주)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전망을 지님. - 마르크스 : 사회주의에 관한 입론의 중심을 사회주의의 합리성이나 희망으로부터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쪽으로 옮기면서, 사회주의는 가공스러운 지적 무기를 획득. 마르크스는 이러한 논법은 영국의 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독일의 철학에서 끌어냄.
3. 진보에 반대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사상체계라고 부를 만한 것을 지니지 못했으며, 그다지 주목할 필요는 없음. 그들의 적은 이성, 그리고 합리주의 였음
4. 진보주의자와 반진보주의자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데올로기 -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주로 소소유자와 평범한 중간층에 의해 발전 ▶ 루소 : 소부르주아적 급진주의 - 순수한 개인주의와 공동사회 안에서만 인간이라는 확신/이성에 입각한 국가와 '감정'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불신/진보에 대한 불가피성과 진보는 '자연적인' 원시인간의 조화를 파괴한다는 확신 사이에서 동요 - 루소의 전형적인 신봉자들은 자코뱅형, 재퍼슨형 및 마치니 형의 소부르주아적 급진주의 :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평등한 재산 분배와 약간의 복지활동을 갖춘 소독립생산자의 국가를 신봉하는 사람들 ▶ 독일철학 집단 : 독일 고전철학 - 독일 사상의 기본적 분위기는 18세기 서유럽의 분위기와 현저히 달랐는데, 고전적인 18세기적 견해가 한계에 접근하는 상황은 독일 사상에 일종의 유리한 입장을 제공 : 독일 철학은 고전적 자유주의와 달리, 의식적인 관념론(유물론과 경험론 배격)이었으며, 그 출발점을 집단(즉 공동체)로 설정 - 루소의 사상이 일정한 딜레마를 그대로 표출하는 반면, 헤겔 철학은 그들의 모순을 이론 정연한 체계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노력.
제14장 예술
1. 이중혁명과 예술의 관련성 - 당시의 예술은 그 업적이 여러 국민들 사이에 놀랍도록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것은 실로 새로운 현상!)과 특정한 예술과 장르(문학 중 소설, 그리고 음악)가 유달리 발달했다는 사실이 특징적 - 당시의 예술은 이중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 : 프랑스 혁명은 한 실례로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산업혁명은 그 끔찍스러움으로 그들을 자극하였으며, 이 두 혁명의 산물인 부르주아 사회는 예술가의 존재 그 자체와 창조양식을 변혁. -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초연한 존재로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 겉보기에는 가장 비정치적인 음악도 정치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녔으며, 정치적 선언으로서 오페라가 장착. - 사회적 사건과 예술을 연결시키는 유대는 민족의식이나 민족해방운동 또는 통일운동이 발전되어가고 있는 나라에서 특히 강하였는데, 민족주의가 가장 명백한 문화적 표현을 문학(고유한 언어)과 음악(민요에 의존)에서 찾았다는 것은 실로 당연.
2. 낭만주의 - 좁은 의미의 낭만주의는 1800년 무렵의 영국, 프랑스 및 독일에서 나타난 자기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예술의 한 경향. 1830∼1848년에 걸친 혁명의 시기동안 가장 성황을 이룸 - 낭만주의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은 결코 명확하지 않으나 중간적인 것에 적대적이라는 것은 명백, 즉 낭만주의는 극단주의의 신념. - 이러한 낭만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이성 있는 비판을 제공하지는 않았으나, '자연철학'이란 사조를 통해 여러 영향을 미침 : 무엇보다도 헤겔 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프랑스의 초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생시몽, 푸리에)은 낭만주의자들 그 자체. -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가장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비판은 고전적인 사상의 전통을 그대로 밀고 나간 사람들로부터 출현. 로버트 오언의 사회주의는 계몽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마르크스 역시 영국경제학의 비낭만주의적 이론을 결합함으로써 자신의 무기를 완성.
3.4. 낭만주의의 전개 - 낭만주의적 현실비판은 비록 정리된 형태는 아니었으나 역사적 영향력을 지님. 낭만주의는 상실된 인간과 자연의 통일을 동경했으며, 중세와 원시인(이국적 취미와 민족),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낭만주의의 세 원천이 됨. - 중세숭상주의는 주로 반동적 낭만주의와 밀접하며, 독일 낭만주의의 주된 구성요소가 됨. 또한 이러한 경향은 신비적인 종교성의 전통과 제휴되어 동양의 더 오래되고 심오한 비합리적 지혜에 대한 추구로 나타나기도 함. - 원시주의는 훨씬 더 오래된 복잡한 역사를 갖는 것일텐데, 이는 훨씬 더 손쉽게 좌파적 반란에 힘을 빌려주게 됨 : 자유로운 사회적 인간의 이상으로서 원시사회는 루소에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의 한 모델이 됨(원시공산주의/계급사회/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라는 역사 단계 설정) ·'민중들'(folk)의 경우 이러한 관념은 훨씬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백성들의 말씨와 노래와 이야기와 습관이야말로 '민족영혼의 참된 보고'라는 것은 낭만주의자들 사이에 이의 없이 받아들여짐(민속학이라는 말 자체가 이 시대-1846년-에 만들어짐) ·낭만주의에 대한 추구는 원시인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아메리카에 대한 관심(마지막 인디언인 모히칸족은 유럽 문화에서 하나의 강력한 상징)으로도 나타남 - 유럽의 거의 모든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1789년의 프랑스혁명을 환호로 맞이 ·그러나 낭만주의의 1세대들은 자코뱅주의에 대한 환멸 속에서 신보수주의로 돌아서는 경향이 강함 ·나폴레옹 전쟁의 말기 새로운 세대들(영국 낭만주의 2세대)에게 해방혁명의 이미지는 새롭게 빛을 발하면서, 낭만주의와 행동적인 혁명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짐. 프랑스에서도 1830년 혁명기 이후 낭만주의 예술과 혁명의 접합이 이루어지며, 그 결과 1830∼1848년의 기간 중에는 정치적 예술이 압도적으로 됨. ·민족해방의 진통을 겪는 나라들에서 예술가들은 예언자 또는 국민적 상징이 되는 경향을 보임.
5. 귀족과 부르주아층의 문화 - 낭만주의는 이중혁명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생활 및 예술 양식이지만, 유일한 양식은 아니며, 양적으로는 여타의 경향들이 오히려 더 많은 부분을 차지 - 귀족적인 생활과 예술의 기본적 스타일은 아직도 여전히 18세기에 뿌리를 둔 그대로였음 - 부르주아(중류계급)의 문화 역시 비 낭만주의적이었으며, 이는 중류계급의 가정을 보면 명백히 드러나는데, 나폴레옹 이후 부르주아 가옥이나 거리의 스타일은 18세기 고전주의 혹은 로코코에서 직업 연유. (단지 중류계급의 부인 계층에서는 경제적 여유와 이의 과시하려는 욕구 속에서 낭만주의적 문화가 유입되기도 함) - 기술적 진보의 흥겨운 고양 그 자체가 산업발전의 중심지에서는 낭만주의를 해체해버렸으며, 예술은 전체적으로 과학에 뒤져있었고, 그들은 문화적 노력은 지식을 보급시키고 진흥하는 데로 기울어있었음 : 18세기 계몽사상의 산물은 '백과사전'의 붐
6. 민중들의 문화 - 민중들의 전반적인 문화양식도 낭만주의하고는 거리가 있음 - 1840년대의 민중들의 문화양식(노래와 축제, 옷차림, 장식예술의 의장과 색깔, 관습)은 거의 1789년 당시 그대로였으나, 산업과 커나가는 도시들은 그러한 것을 파괴하고 황폐화시킴 - 도시의 노동빈민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도시적 오락은 선술집 또는 드링크 하우스의 부산물로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현세적 위안을 얻는 원천이 되어감. - 또 하나 대도시의 도시적 오락은 장터 : 유랑 흥행꾼들, 여흥, 연극, 매무리기(hawker), 소매치기, 손수레 행상소년 따위
제15장 과학
1. 전반적 상황 - 이중혁명은 과학에 대하여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새로운 문제에 직면케 했으며, 또한 이중혁명 자체가 사상의 새로운 양식을 제시. - 과학적 사고는 외적 요인에 의해 자극이 주어지고 사고가 형성될 충분한 여지가 생기게 됨, 과학의 진보가 단순히 직선적 전진만을 했더라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못 되었을 것. - 산업에 대한 기술적 진보는 대부분 사람들의 숙련에서 비롯되었으며, 산업에 직접적 영향을 주려는 순수한 과학적 시도는 대부분 실패. - 다른 한편, 과학은 '과학기술교육'에 대한 두드러진 장려로부터 큰 혜택을 입음. - 혁명의 시대는 과학자나 학자들의 수효를 크게 증대시켰고, 그 소산(所産)도 크게 불어났으며, 두가지 면에서 과학의 세계가 지리적 확대를 거듭 ·첫째, 무역과 탐험의 진행 과정 자체가 과학연구를 위해 세계의 새로운 영역들에 대한 문호를 열어주었고, 과학에 대한 사상에 자극 ·둘째, 이중혁명의 결과로 자극을 받은 서유럽 이외 지역의 민족문화의 발흥을 일으킴
2. 고전적 자연고학 분야의 변화 - 전체로 볼 때, 고전적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혁명적이라 할 만한 큰 변화는 없었음. - 새로이 개척된 가장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기술적 결과를 수반한 것은 '전기' - 화학은 다른 어느 과학보다도 산업상의 실용적 요구(특히 섬유산업의 표백법 및 염색법과 밀접)속에서 크게 발전. 화학은 일종의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것은 생명 현상을 무기적인 과학으로 분석·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 일. - 화학분야보다도 훨씬 뿌리깊은 혁명이 수학 분야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성질상 그다지 두드러지지는 못함
3. 사회과학 분야의 발전 - 사회과학 분야의 두 개의 혁명 ·첫째, 정치경제학이라는 체계적인 연역적 이론을 확립한 일 ·둘째, 낭만주의와의 결합 속에서 역사적 진화를 밝혀낸 일 →이 두 혁명의 과정이 합쳐져 사회과학의 포괄적인 종합으로 마르크스주의가 탄생 - 수학적 방법을 사회에 적용(통계학, 사회조사)함으로써 또 하나의 큼직한 전진이 이루어짐. -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서 '사회학'이 탄생 : 사회학은 1830년 콩트가 만들어낸 말인데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의 개인비서로 생애를 시작했음 - 학문적 과목으로서 '역사학'의 창조는 사회과학의 역사화에서 (역설적으로)가장 중요하지 않은 측면 : 당시의 역사저술은 흔히 내셔널리즘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흔히 그 나라에 관한 최초의 역사서술인 경우가 많았음. 사회과학에 역사가 주입됨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법률학과 신학 - '언어학'은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 속에서 놀랄만한 발전을 이룩 ·외견상의 자극은 유럽에 의한 비유럽 세계의 정복 ·중요한 것은 언어가 역사적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것을 밝혀내는 일이었으며, 언어학은 진화를 핵심으로 본 최초의 학문이었음 ·같은 진화론적 학문인 생물학과 지질학에 비해, 기독교적 영향과 반발로부터 자유로왔으며, 모든 사회과학중 인간을 직접 다루지 않고 '말'을 다루었다는 것도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조건을 형성함.
4. 기타 - 생물학과 지질학의 진화론은 과학적 보수주의 압력 하에서 일정한 우여곡절을 겪음. - 이 시기의 사회과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것은, 그들이 확고하게 유물론적인 경향을 지녔고,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진화론의 편에 섰다는데 있음. - 사회과학의 초기 발전이 낳은 어두운 부산물 : 인종에 관한 이론 ·초기의 논쟁은 여러 피부 빛깔의 지닌 인간이 단일하게 창조된 것이냐, 복수로 창조된 것이냐의 문제 : 대체적으로 진화론과 인간의 평등성을 믿는 사람들이 단일발생론자쪽으로, 노예제를 지지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복수발생론쪽으로 기움 ·인종에 대한 논의는 골상학에 영향을 받은 인체측정학의 유행을 낳기도 함 ·그와 동시에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와 역사학, 그리고 현장조사 등이 뒤범벅이 되어 영구적인 민족적 특성, 또는 인종적 특질이라는 위험함 대목들을 사회에 끌어들이게 됨.
5. 과학의 발전과 (이중혁명에 의한) 그 밖의 역사적 변화의 관련성 - 이 시기의 과학적 발전은 산업혁명의 자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 - 또한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 보수주의자 내지 온건파가 과학에 품었던 적개심을 드러나게 하였으며, 투쟁적이고 과학을 지지하며 반 교권적이었던 좌파와 반 과학적이었던 우파 사이의 투쟁이 계속되어 나폴레옹 전쟁 후의 시대에는 과학자들 태반이 중도 좌파임을 자처하게 됨. - 혁명의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당시의 대동란과 변화로 인한 간접적인 영향, 즉 정신적인 자극과 상상력의 동원이 보다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함. - 당시의 시대에서 일반적 사조의 큰 조류들은 과학의 각 분야에도 대응적 조류를 가지고 있었음→과학과 예술 사이, 아니면 그 양자와 정치·사회적 태도들 사이에 대응관계가 성립함을 입증할 수 있음. -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과학의 세계에도 존재했으며, 고전주의는 크게 자유주의의 편에서 낭만주의(자연철학)는 자유주의 반대의 편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 : 자연철학은 과소평가되기 쉬우나 마르크스와 엘겔스가 자연철학에 대한 은혜를 솔직히 인정했다는 사실, 모든 과학의 역사적·진화론적 요소가 낭만주의적 영감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 - 전체적으로 볼 때 낭만주의적 접근은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출발은 촉진하는 한 자극제로서의 수실을 했고, 그러한 다음에는 과학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감.
제16장 결론 : 1848년을 향하여
(1789년의 세계 이후, 가장 혁명적인 반세기가 막을 내리는 시점에서의 세계 상태)
- 그것은 '최상급'의 시대였음, 이 시대에 계량될 수 잇는 양이란 양은 거의 모두가 종전의 어느 때보다 더 많았음 : 알려진 세계의 면적, 세계인 인구, 거대한 도시의 수, 국제무역에 관한 수치가 모두 엄청나게 증가. 과학이 어느 때보다 득의양양했으며, 지식이 널리 보급. 철도이용객의 수도 크게 증가했으며, 정기 기선이 유럽과 인도를 연결. - 그러나 이러한 승리에는 어두운 면이 따랐음 : 산업혁명은 인류가 살아온 세계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세계를 만들어 냈으며, 가장 충격적이라 할 그러한 종류의 빈곤이 존재하고 있었음 ·진보의 투사들(부르주아계급들) : 이는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의 작용 때문이 아니나 낡은 봉건제도와 군주제도, 그리고 귀족제도의 잔존 때문이라고 항변 ·새로운 사회주의자들 :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제도의 작용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 ※ 그러면서도 양쪽 모두 이것들이 성장과 진보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견해에서는 일치했으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증가에 맞먹는 물질적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전망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음. - 세계의 사회적·정치적 구조에 대한 분석은 우리를 좀더 겸허하고 제한된 세계로 되돌아가게 함. ·세계의 주민들 대부분은 여전히 농민 ·노예의 존재는 그 비율이 감소하고 있었지만, 브라질과 미국 남부에서는 수적으로 노예제가 오히려 확대를 계속했으며, 뿐만 아니라 '연간계약노동'과 같은 반(半)노예제도도 발달 ·지주 귀족들의 지위 또한 프랑스와 미국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음. - 중류계급은 급속히 증가했으며, 노동계급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급속한 증가율을 보임(절대적인 수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이지 않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점점 커짐) - 정치구조 또한 상당히 달라졌으나, 서유럽을 제외하고는 절대군주제가 가장 우세 - 1830년의 혁명으로 서부 유럽의 주요한 나라들에 온건 자유주의적 중류계급의 정치체제가 가 들어선 것은 커다란 변화 - (그런데) 국제 정치에서만은 명백히 전면적이고도 사실상 무제한적인 혁명을 겪음 : 1840년대의 세계는 유럽의 정치적·경제적 강대국들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유럽의 전반적인 테두리 안에서 영국는 해군과 무역과 성경을 가지고 패권을 장악. 요컨대 1840년대의 세계는 균형을 잃고 있었음. -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새로운 경제가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거나 극복하게 되리라는 것이 분명히 눈에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날로 더해가는 것처럼 생각되는 시기였으며, 사업가들 자신은 사생결단의 처지에서 극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음(551p. 참조) - 일반 대중에게는 문제가 한결 더 단순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쓰라린 세계의 부자나세도가들에 대한 증오와 새롭고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환상이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사물을 보는 안목과 '목적'을 부여했으며, 또한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은 일대 각성은 민중이 힘없이 참고만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음. - 이러한 세계 속에서 새로운 혁명의 기운들이 감지되기 시작함. 1831년에 빅토르 위고는 이미 "혁명의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고 기록하였으며, 이는 1848년에 폭발
● {혁명의 시대} : 1789-1848 종합정리
Q. 왜 이 시기를 '혁명의 시대'라 부르는가? 산업혁명/프랑스혁명/전쟁 Q. 혁명의 시대는 왜 도래했으며, 무엇을 남겼는가? 토지/농민/부르주아지/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 Q. 이 시기에 자본주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이중혁명에 의해. ○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그 혐오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의 불가피한 진보였다.
Ⅰ.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 - 농업세계
○ 1789년의 세계는 농업의 세계 - 그러나, 침체되어 있던 농업세계. : 1789년의 세계는 압도적으로 농촌적이었다. 지방소도시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농촌의 사회와 경제에 속해 있었고, 지방소도시 번영의 근원은 주위의 시골로부터 나온 것. : 토지소유관계의 측면에서 유럽은 세 부분으로 나뉨 - ① 노예노동지역 ② 농노제 지역(엘베강 동쪽/서유럽에 종속된 경제) ③ 서유럽 지역(봉건질서의 노후화로 귀족층의 수입이 떨어지고 있었고, 농민들은 중세말기의 농노적 지위 중 많은 부분을 상실하고 자유로운 농민의 특징을 지니게 됨→정치적 속박이 제거될 경우, 소농농업지역으로 등장할 개연성이 가장 컸음 : 프랑스의 경우 대혁명을 통해 정치적 속박이 제거되고 소농중심의 농업사회로 재편) ④ 예외 - 영국은 이미 순수한 자본주의적 형태로 농업이 한 단계 발전해 있던 상황. : 상업적 차지농이 특징을 이루는 경작자 계급(후에 농업기업가계급으로 발전)과 광범위한 영세농지보유자 및 빈농(후에 대규모 농업프롤레타리아로 발전)으로 분화된 상황 : 토지 소유관계가 중요했던 시기.
○ 상인층의 역할 : 식민지 착취와 연결된 방대한 무역이 전개되었고, 이는 유럽의 상인사회에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줌. 상인들은 제조업을 비롯한 산업의 주요한 통제자였음. 분산된 생산을 통제하고 이를 세계시장과 연결했던 계층. ○ 한편으로, 계몽주의 이념이 열정적으로 보급되었던 시기.
○ 토지에 있어 이중혁명의 의의 : 전(前)자본주의적 지주와 전통적 자영농민은 '자본주의적 농업'으로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었음. 정치적·법률적 혁명을 통해 이를 분쇄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농업 형성의 조건 조성. 서유럽의 대부분과 그 식민지의 농업관계의 역사는 정치법률적 혁명의 역사였음(1834년의 구빈법). ex) 미국·영국은 자영농민층을 없애버리는 방식 취함. 프로이센은 봉건적 지주를 자본주의적 농장경영자로, 덴마크는 상업적으로 영농하는 중소규모의 농장을 대량으로 조성. 프랑스는 혁명에 의해 봉건제 타도. 혁명이 전파된 지역에서는 토착 자유민들에 의해 봉건제 타파. 프랑스 혁명은 법률혁명의 완성이 아니라, 출발과 지속을 의미.
Q.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토지의 관계
Ⅱ. 정치적 상황 - 절대군주제의 시기(영국과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 : 군주들 - 국가의 근대화를 위해 중류계급과 그 이념인 '계몽'의 구호를 필요로 했음. 중류계급 - 귀족 및 성직자 계급의 저항을 이겨내기 위해 군주를 필요로 함. : 그러나, 절대군주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혁을 원하지 않았으며, 단지 세력간의 갈등 상황 속에서 어부지리를 획득해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고자 했을 뿐. : 국왕은 새로운 세력으로부터의 압력, 기득권세력으로부터의 압력, 해외경쟁국으로부터의 압력 등 세 부분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던 상황 : 상황을 폭발적으로 만든 계기는 국제적 대항관계에서 나옴. : 영국과 프랑스의 전면전은 신구체제 간의 전쟁이었고 신질서의 우위를 드러내게 됨. 전쟁준비와 군비조달에 있어 영국이 우위에 있었음.
Ⅲ. 산업혁명
○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점 - 1780년대. 그러나 1840년경 이전까지 그 영향은 거의 의식되지 못했음. q. 왜 이 시기가 산업혁명의 출발점인가? 초기 공업화의 정착? ○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이유 : 세계시장이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 산업혁명은 혁명적인 기술의 발전에 의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의 팽창에 대응하여(시장의 팽창에 추동되어) 이뤄진 것. 당시의 중요한 생산력의 발전은, 기술적인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기술을 사회적으로 조직하여 그에 부응할 수 있는 능력이었음. 그리고 산업혁명은 기술을 재조직화할 동기와 필요성을 대두시킬 만한 시장의 요구가 존재했는가의 여부에 의해 가능했음. 따라서 세계적인 규모에 의해서만(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될 수 있었음.
○ 영국이 산업혁명의 경쟁에서 앞섰던 이유 : 기존의 지식과 기술을 재조직하고 활용하며 혁신하도록 추동할 조건과 필요가 먼저 갖춰졌기 때문. : 영국은 특유의 혁명적 해결방식(인클로저)에 의해 토지의 독점화를 달성하고, 농노제적 농민층을 파괴한 상황(프롤레타리아로 전화할 수 있는 농업노동자를 창출). 그리고 차지기업농에 의해 시장을 향한 생산이 이뤄짐 → 이는 자본축적을 위한 메커니즘을 제공하고, 상당한 양의 사회간접자본을 창출 : 즉, 사적 이윤과 경제발전을 향한 사회적 합의의 존재로 인해 산업혁명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 영국에서는 면공업의 존재와 세계시장의 독점이 공업경제(기계화된 공장제)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됨.
○ 산업혁명의 필요조건 : 공업경제에는 농업혁명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었음.(노동력의 재배치를 위해) : 영국에서는 중세적 공동경작의 청산(인클로저 운동) 및 토지에 대한 상업적 태도의 확립을 통해 변화가 가능해짐. 이미 16-18세기의 과정을 통해 영국은 소수의 대지주 및 적당한 수의 차지농, 다수의 농업노동자로 구성된 나라가 됨. : 반면, 프랑스는 쁘띠부르주아와 농민층의 상대적 안정성으로 인해 노동력의 이동이 저해됨.
○ 산업혁명을 가속화시킨 두 가지 요소 <면공업> : 면공업은 비용이 적게 들고 단순한 기술혁신에 의해 산출량을 빨리 증대시킬 수 있었던 산업 : 식민지 무역을 통해 육성된 면공업은 식민지 무역의 대규모 팽창을 이끌었고, 그러한 팽창은 기업가로 하여금 혁명적 기술을 채택하도록 만들게 됨. : 면제품은 산업혁명으로 '유인'하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산업혁명을 요구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갑작스런 팽창을 제공. 새로운 발명품들은 간단하고 값이 쌌으며, 즉각적인 보상을 제공. 즉, 기계혁신의 계기를 자연스럽게 제공. 동시에 식민지 노예제를 통해 확대될 수 있었음. : 한편, 이 시기 자본의 이윤율저하경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공업은 기계화를 통해 생산과 판매를 확대해야 할 것이 강요됨. <철도의 발명> : 영국의 탄광업 발전은 철도의 발명을 자극 → 축적된 자본들은 새로운 투자처로써 철도를 선택 → 철도는 자본재 산업에 대한 막대한 수요를 창출.
○ 한편,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빈곤과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고, 급진주의 등이 대중 속에서 자라나는 결과를 초래. ○ 최초의 공업경제는(산업혁명은) 오히려 우연적이고 비계획적인 듯한, 경험적인 방식으로 성립됨.
○ 1848년까지 제대로 공업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에 불과. 그러나 기본적인 변화가 이 시기에 진행되고 있었음. ①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젊은 노동력 산출. ② 교통통신의 변화 ③ 인구와 재화의 이동 증가 ④ 경제적·사회적 변화의 템포가 가속화 : 1840년대가 되면 산업주의의 특징적 사회문제들 즉, 프롤레타리아 문제와 도시화에 따른 공포 등이 일상적 토론의 주제가 됨. 중공업이 조직적으로 건설되고 투자기법에 혁명(금융회사)이 일어남.
○ 프랑스가 다른 나라들보다 뒤쳐진 이유 : 국민의회에 의해 이룩된 많은 조치들이 쟈코뱅에 의해 사라짐. 농민층과 소부르주아지의 기반이 여전히 강력. 인구증가 저조. 국내시장 형성 미비.
○ 이중혁명의 경제적 귀결 가운데 가장 뿌리깊고 영속적인 것은 '선진국'과 '저개발국'을 갈라놓은 것. 즉, 세계경제에 있어서의 분업(종속관계)이 정착되었다는 점.
Ⅳ. 프랑스혁명
○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초래했다는 점. : 유일한 대중사회혁명. : 동시대의 모든 혁명들 가운데 프랑스혁명만이 보편적이었다. : 프랑스 군대는 세계혁명을 일으키기 위하여 출발했으며, 실제로 세계혁명을 일으킴 : 프랑스혁명 이후 부르주아 혁명적 정치의 전형이 나타남 : 대중동원, 대중들은 온건파의 목표를 넘어서 사회혁명을 향해 진전하는 경향을 보임(좌경화), 온건파와 좌파의 분열 경향.
○ 왜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했는가? : 가장 강력한 절대군주국 - 구체제의 통치기구와 기득권세력, 신흥세력 사이의 충돌이 가장 첨예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 관직쟁탈전에서의 귀족의 승리가 중류계급을 격분시킴. : 미국 독립전쟁의 개입이 재정적 곤란을 야기 - 왕정의 위기 상황 속에서 귀족계급은 국가를 재탈환하고자 시도(삼부회의의 소집) : 그러나 중류계급은 독자적인 이해관계가 있었고, 그것이 혁명으로 발발. : 중류계급은 공식적으로 '인민'의 일반의지를 표현하고자 했고, 인민은 '프랑스 국민'이 되었음. : 제한된 개혁에 대한 요구가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계기는 '삼부회의'의 소집 : 중류계급의 선전은 농민과 도시빈민들에게 정치적 전망을 부여했고, 귀족들의 반혁명이 대중봉기를 촉발.
Q. 자코뱅파(자유주위적 중류계급의 한 분파)는 왜 혁명으로 치달았는가(혁명의 경계를 넘어설 정도로 혁명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 "혁명에 대한 무서운 기억이 없었기 때문. 자코뱅파를 대신해 통일적인 사회적 대안을 제시할 만한 계급의 부재." Q. 상퀼로트 운동의 한계는? : "그들의 역할은 기껏해야 역사의 진로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프랑스의 경제성장 방해)이었다." Q. 쟈코뱅주의(공포정치)의 역사적 의의는? 자코뱅주의와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의 차이는?
Ⅴ. 나폴레옹 전쟁(혁명이념의 전파)
○ 전쟁(1792-1815)의 성격 ① 국가 vs. 국가의 대결 :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국가로서의 전쟁 ② 제도(체제) vs. 체제의 대결 : 혁명의 주체로서 전제정치에 대한 반대와 자유를 호소(혁명의 전파) 나폴레옹 시대말기엔 ①의 성격보다 ②의 성격(제국주의적 정복과 착취)이 지배.
○ 전쟁의 경제적 배경 : 영국은 유럽시장에 대한 완전지배와 해외시장의 전면적 제패에 있어 걸림돌(프랑스)을 제거하고자 했음. 반면, 프랑스는 영국 상업을 영구적으로 파괴할 필요성이 있었고, 영국이 누려왔던 명백한 경제적 우위를 상쇄하고자 했음.
○ 전쟁의 결과 ① 국경의 변화 : 영토적으로 불가분하게 통일되고 국경이 확연히 그어진 한 지역에서 단일한 주권당국에 의해 단일한 행정적, 법률적 제도로써 통치가 이뤄지게 됨 → 유럽 중세시대의 종지부. ② 제도상의 변화 : 프랑스가 직접 통치한 영토에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이 낳은 제도들이 자동적으로 시행되거나 그 지방행정의 모델이 됨. 봉건제도가 정식으로 폐기되고, 프랑스 법전이 적용됨. : 프랑스에 대한 반동으로서도 많은 개혁이 이뤄짐. ∵ 새로운 정치제도가 훌륭했기 때문에, 또는 자신들이 개혁을 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패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러시아와 터키의 서쪽, 스칸디나비아 남쪽의 유럽대륙에서 프랑스혁명의 확대 또는 모방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③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 - 혁명에 대한 자각 : 한 나라의 혁명이 전 유럽의 현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자각 : 사회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국가는 왕국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며, 백성들은 지배자로부터 독립된 존재라는 것, 가난한 사람도 지배계급과 독립된 존재라는 점에 대한 자각. : "프랑스 병사들은 전쟁을 통해 조국의 혁명에 대한 세계성을 다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을 만큼 효과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들이 퍼뜨린 원리와 제도는 보편적 원리가 됨. : 그리스의 콜로코드로네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행동은 세계의 눈을 뜨게 했다" ④ 경제적 결과 : 전비조달을 위해 불태환지폐의 일반화, 부채의 증가에 따른 국제금융업자의 시대 도래(로스차일드, 베어링 가문). 인플레 초래(소득의 재분배, 일부로의 집중 초래) 프랑스 경제의 몰락. 영국의 우위 확보(해상무역과 식민지시장의 사실상 독점)
Ⅵ. 전쟁이후의 과제 = 평화(혁명의 억제) : 전쟁을 통해 얻은 결론은 앞으로 유럽에서 그 어떤 대전쟁도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전쟁은 곧 새로운 혁명(구체제의 붕괴)을 의미하기 때문. 즉 혁명이 유럽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 모든 강대국들의 지상목표가 됨. : 실제로 전쟁 억지에 성공(크림 전쟁만 예외). 그것은 각국의 현실주의적 선택과 열강들의 힘의 균형에 의해 유지됨.
Ⅶ. 그런데 왜 다시 혁명은 발발하는가?
○ 세차례의 혁명의 물결 ① 1820-1824, 에스파냐를 비롯한 지중해 지역의 혁명과 중남미의 해방 ② 1829-1834 : 1830혁명 ; 부르봉왕가의 타도에 의해 자극됨. 벨기에, 폴란드 등 ③ 1848년 '혁명의 파도'
○ 혁명 주체의 변화 : 왕정복고기(1815-1830)까지는 반정부세력이 분화되지 않았음. 혁명의 전망과 혁명의 전략이 대동소이했기 때문이며, 반정부운동은 절대군주와 교회·귀족정치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으로 연대. 1815-1848년의 역사는 이러한 연합전선 해체의 역사. : 온건자유주의자, 급진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로 분화.
○ 1830 혁명의 의의와 결과 : 서유럽에서 귀족세력이 부르주아 세력 앞에 명백히 패배. 귀족계급은 스스로 모습을 감추거나 대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받아들임. 정치제도 면에서 입헌군주제 아래 제한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막는 자유주의적 제도 채택(영국, 프랑스, 벨기에) : 혁명주체의 변화 -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에서 노동계급이 하나의 독자적이고 자각적인 세력으로 출현(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대두). 온건파의 배반으로 좌파정치 분열. 다른 유럽나라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 : 1830년은 이후 수십년 동안 일어날 위기의 서막을 올린 해("가장 기억되어야 할 해") : 1789년 혁명과 같은 대중정치와 대중혁명의 가능성 재확인 : 유럽의 양분 - 라인강 서쪽(프랑스/영국/벨기에)에선 온건자유주의 승리. 라인강 동쪽(독일/이탈리아/폴란드)에선 모든 혁명 진압
○ 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 운동은 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 : 서유럽에서 가난한 도시 사람들의 불만 보편화 : 영국의 경우, 차티스트운동(인민헌장 쟁취운동. 1839-1842)과 오언주의적 협동조합운동(1829-1834)으로 등장. 프랑스에서는 생시몽·퓨리에 등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블랑키주의(바뵈프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등장. * 블랑키주의 - 비밀결사를 프롤레타리아적 조건에 맞도록 뜯어고치고, 반란과 집중적 민중독재 전략을 취함. 근대 사회주의 혁명운동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목표가 정권탈취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전달함. but, 대규모 대중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반란을 계획함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실패.(엘리트 운동의 한계를 못 벗어남)
○ 1830-1848년 혁명운동의 특징 : 중류계급과 지식인 음모가 등 소수집단의 운동에 머뭄. 이는 대중선동 및 대중조직의 전통이 부재했기 때문(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인데, 극좌파의 운동은 불법화되는 일이 많았고, 결과적으로 대중정치의 기본적 장치들(공개적 선전활동, 대중적 조직, 청원운동, 순회강연 등)이 허용되지 않았던 탓. : 모든 좌파세력은 어느 시점까지는 같은 적을 상대로 투쟁. 따라서 목표와 강령도 동일. 즉, 국왕·귀족·특권에 대항한 공동전선을 폄. 1848년 이전까지 부르주아와 노동자 사이에 근본적 대립은 발생하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자들도 자신들을 급진적 민주주의운동의 극좌파로 규정.
Ⅷ. 민족주의의 대두 : 1830년 이후 혁명을 지지하는 운동 전반이 분열. 분열의 산물 가운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이 '자각적인 민족주의 운동'. 혁명의 각 부분들은 자국에 대해 1차적 관심을 쏟기 시작 → 자국의 해방을 통해 전 세계를 해방할 것이라는 논리로 스스로를 정당화. : 민족주의의 주동세력은 절대주의와 외국인의 지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사업가계급은 오히려 민족주의운동에 부정적 입장. 민족주의운동에 큰 몫을 담당한 것은 '대학'을 중심으로 한 '교육받은 계층'들이었음. : 일반대중에게 있어, '국민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여전히 종교. : 1848년 이전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일관성 있는 형태로 조직된 민족운동은 '아일랜드 합병철회운동'이 유일. : 근대적 형태의 민족주의가 강력한 대중적 세력이 된 곳은 이중혁명으로 이미 변혁을 겪은 나라들(프랑스, 영국, 미국)과 아일랜드와 같은 나라들뿐이었음. : 부르주아 세계가 자리잡은 이외의 지역에서는 외세의 지배(다른 종교에 의한 지배를 의미)에 대한 민중반란은 이후 민족운동의 선구가 되는 양상을 보임. 그러나 민중반란을 쉽사리 근대적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는 없음. : 동양의 민족주의는 서양의 영향과 서양의 정복이 가져다준 산물.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양에서는 진보파와 민족주의, 민중들 사이의 접목은 이뤄지지 않았음. : "민족주의도 이중혁명의 산물"
Q. 민족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Ⅸ. 이중혁명의 결과
1. 재능에 따른 출세의 길을 열었다는 점 - 불평등의 승인 :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부기구 및 활동이 두드러지게 확대 → 개인주의적 경쟁과 재능에 따른 관직으로의 진출(경쟁시험을 통한)은 '관료주의'를 낳게 됨. : 재능이 없는 사람들, 즉, 새로운 사회의 참여자가 되지 못한 자들은, 제구실을 하는 시민으로서 취급받지 못했고,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제한선거권제도의 명분). 길은 개방되어 있는데도 그리로 못 들어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능력 탓으로 치부됨. : 이는 불평등에 대한 공식 승인을 의미하며, 불평등은 재산, 상속과 더불어 인간사회의 3개 기둥 중 하나가 됨. 즉, 형식적 평등 위에 계층적 사회 수립.
2. 계급적 자각과 노동운동의 등장 : 노동빈민의 선택은 ①부르주아가 되느냐 ②견디느냐 ③저항하느냐(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출현은 피할 수 없었던 일. 그 직접적 결과가 1848혁명임)의 세 갈래였음. : 19세기초의 노동운동은 계급의식의 자각을 전제로 나아감. 프랑스혁명이 가져다 준 것은 계급적 자신감이었으며,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것은 '끊임없이 경계하고 조직하고 활동하는 운동'의 필요성이었다. : 1830년대 영국과 프랑스에는 노동자계급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나, 엄밀한 의미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니라, 노동빈민을 대표한 모든 세력과 모든 경향의 공동전선이었음. 1848년경 노동빈민운동은 자코뱅주의에 견줄 만한 수준으로 발전(급진화).
3. 현세적 이데올로기의 승리 : 현세적 이데올로기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승리를 거둔 시대. : 계몽주의 사상이 지배-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공리주의(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발전. 정치경제학의 등장. :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등장.
4. 예술·과학의 변화 : 프랑스혁명이 불어넣은 영감과 산업혁명의 끔찍스러움에 자극받은 특정한 예술과 장르가 유달리 발달. 예술의 정치화. 낭만주의의 융성(중세로의 향수나 원시사회에 대한 동경, 프랑스혁명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 : 과학의 발전은 산업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였고, 과학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림. 또한, 혁명에 의한 정신적 자극과 상상력의 동원은 과학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 됨. 혁명의 시대는 과학자의 수효를 크게 증대시켰고, 그 소산도 크게 불어나게 함. 이중혁명에 자극받은 서유럽 이외 지역에서 민족문화의 발흥을 일으킴. :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정치경제학의 성립과 역사적 진화에 대한 믿음이라는 혁명적 변화 발생 → 마르크스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짐. : 새로운 학문들의 탄생 - 사회학, 언어학(유럽에 의한 비유럽세계의 정복이 외견상의 자극제) 등
Ⅹ. 결론 1. : 이중혁명의 시대는 최상급의 시대. 즉, 계량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종전의 어느 때보다 많았던 시대. : 산업혁명은 가장 추악한 세계를 만들어냈고, 충격적인 빈곤을 만들어 냄. :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증가에 맞먹는 물질적 개선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됨.
2. : 세계의 주민들 대부분은 여전히 농민이었고, 지주 귀족들의 지위 또한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음. 그러나 중류계급과 노동계급은 급속히 증가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되어감. : 정치구조 면에서도 여전히 절대군주제가 가장 우세. 단, 1830혁명으로 서유럽의 주요 나라들에 온건 자유주의적 중류계급의 정치체제가 들어섬. : 국제정치에서만은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인 혁명이 발생. 1840년대에 세계는 유럽의 정치경제적 강국들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었고, 영국은 그 가운데 패권을 장악. 균형이 깨진 세계. : 1830-40년대는 경제적 어려움의 극복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시대 : 일반대중이 갖는 증오와 절망은 그들에게 새로운 안목과 목적을 부여했으며, 프랑스혁명을 통해 이뤄진 일대 각성은 민중이 더 이상 참고만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함. : 혁명의 기운들은 이미 감지되고 있었으며, 그것이 1848혁명으로 폭발.
『자본의 시대』
<서문과 머리말>
○ 서술의 관점 : 독립된 개별 국민사가 아닌, 하나의 전 대륙적 관점에서, 전 세계적 관점에서 논할 것. ○ '자본의 시대' 란 : 평온하지만 팽창주의적인 1850년대, 더 시끄럽고 불온한 1860년대, 호황과 불황의 1870년대 : 좋건 나쁘건 '부르주아지의 시대'.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 승리의 시대 : 물질적·도덕적 진보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성과 과학, 진보와 자유주의를 믿는 이념과 신조)의 시대. : 한쪽으로 기운 일방적인 시대 : 정치적으로는 이렇다할 드라마가 많지 않았던 시대. 반면, 경제와 기술의 드라마는 화려했던 시대. 유럽과 아메리카의 힘이 펼치는 드라마의 시대. : 정치혁명은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앞으로 나선 시대(산업혁명이 정치혁명을 삼켜버리고 만 시대). ○ 자본의 시대의 종언(1870년대의 전환점) : 1873년 시작된 대불황 ; 같은 해 사회주의 인터내셜널의 창설 → 새로운 시대의 개막
제1부 혁명의 서막 - 제1장 '여러 국민들의 봄'
1. 혁명의 성격 ○ 1848혁명만큼 급속하고 광범하게 국경을 넘어 번져나간 혁명은 없었음.(p84) ○ 최초의 전 세계적 혁명 - 브라질(1848), 콜롬비아의 반란에도 영향 ○ 유럽의 선진지역과 후진지역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친 유일한 혁명 ○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됐으나, 가장 성공하지 못한 혁명. ○ 그렇다면, 1848년은 '유럽이 전환에 실패한 전환점'인가? 아니다. 전환은 했으되,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았던 것뿐 ; 혁명의 시대는 하나의 전주곡이었을 뿐. ○ 1848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 대결의 판가름은 '2월의 파리'가 아니라 '6월의 파리'에서 일어났다. (p 96) ○ 사회주의자가 처음부터 무대 전면에 나선 최초의 혁명. 그러나 혁명기간 중에도 '자본주의'에 대해선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즉, '사회주의'의 이념이 자각되지 못했던 혁명. 마르크스조차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정에 올라 있다고는 믿지 않았음. 달성하고자 했던 최대치는 '부르주아 공화제'였던 것. ○ 신화와 약속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혁명.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으나, 부르주아지는 혁명으로부터 몸을 뺐다.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위대한 국민'이 되려하기보다 '사회적 안정'쪽을 택했던 것.
2. 혁명의 경과 ○ 공산당선언이 간행된 지 불과 몇 시간 후, 1848년 2월 24일 프랑스 2월혁명 발발(공화제 선포) ○ 불과 몇 주일만에 유럽 10개국 정부 타도. ○ 유럽의 넓은 중심부 도처에서 승리를 구가. v. 주변지대(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이베리아반도, 너무나 후진적이었던 러시아, 이미 다른 룰이 작동하고 있던 영국 등) ○ 혁명적 지역 - 프랑스, 독일연방,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대부분 절대군주제에 의해 통치되고 있던 지역(프랑스는 예외). 혁명이 번져간 나라는 각양각색이었다. ○ 혁명지대와 비혁명지대의 차이(양쪽은 사회경제적 구조와 정치에 의해 갈라짐) : 서유럽의 농민은 법률상 자유로운 신분 v. 동유럽의 농민들은 여전히 농노 : 서유럽의 중류계급은 토착은행가, 상인, 자본주의적 기업가, 자유전문직 종사자 등 v. 동유럽의 도시계층은 주로 민족집단으로 구성되고 숫자도 적었음. : 프랑스를 제외하고 혁명지대에서는 '민족운동'이 주요한 쟁점. 여기서 급진파는 '단일중앙집권적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했으나, 온건파는 '민주주의의 도래'를 두려워하고 무력한 왕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문제에 관심을 뒀음. ○ 혁명 발생 18개월만에 프랑스를 제외하고 모두 옛 자리로 복귀.
3. 혁명의 공통된 특징 ○ 혁명은 '여러 국민들의 봄'이었으며, 봄답게 오래가지 않았다. ○ 모두가 일단은 성공했으나, 재빨리,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전면적으로 실패. : 혁명지대에 속한 모든 나라의 정부가 쓰러졌거나 무력화됨. 그러나 비교적 단기간 내에 모든 지역에서 혁명은 주도권을 상실. (프랑스에서는 4월말에, 나머지 곳에서는 1848년 여름까지) : 프랑스의 경우 - 4월 보통선거에서 보수파 부활. 6월봉기에서 혁명적 노동자들 패배. : 독일과 오스트리아 - 1848년 여름과 연말 사이 구체제가 권력을 회복. : 1848년 겨울까지 혁명세력의 수중에 남아 있던 지역은 이탈리아 일부와 헝가리 일부 뿐. : 1849년 8월 헝가리인과 베네치아 인들의 항복으로 혁명의 불길은 완전 진압. : 프랑스를 예외로 하고 옛 지배자들이 권좌에 복귀. 모든 정치적 꿈은 일소되었다. * 단 하나의 유일한 큰 변화 -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농노제 폐지 ○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과 흡사 : 특정한 목적들이 혁명에 의해서 혹은 혁명적 맥락 속에서 달성되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달성되었다는 점. 동시에 혁명이 품었던 보다 큰 열망을 잃어버리진 않았다는 점. ○ 노동빈민들의 사회혁명이었거나 노동빈민의 사회혁명을 눈앞에 예상시키는 혁명이었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점. 그것이 온전 자유주의자들을 더욱 불안하게 했기 때문.
4. 노동빈민(프롤레타리아트)의 위치/상황 ○ 혁명을 한 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노동빈민들. 도시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죽어간 것도 노동빈민들. ○ 혁명으로까지 발전한 시위운동의 원동력은 노동빈민의 굶주림이었음. ○ 사실 프롤레타리아의 힘이란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유럽의 중산계급은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 있는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노동빈민은 조직·성숙도·지도력도 없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대안이 될 만한 역사적 조건을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음 : 스스로를 하나의 계급으로서 거의 의식하지 못했지만, 혁명적 잠재력은 훗날의 경우보다 컸다. ○ 2월 혁명은 의식적인 사회혁명으로도 수행됐던 것. 목표는 '민주적·사회적 공화국'의 수립이었고, 2월 혁명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음. ○ 반면, 온건한 반체제파는 혁명을 원하지도 혁명을 위해 진지하게 일하지도 않았음. 그들은 대결보다도 절충과 외교 쪽을 선호. 즉, 언제든 혁명의 대오에서 물러설 용의가 있었던 자들이었음. 그들은 구체제로부터 오는 위험보다 좌파쪽에서 오는 위험을 훨씬 더 우려했으며, 파리에 바리케이드가 쌓이자마자 잠재적인 보수주의자가 되었음. 결국 노동자들은 고립되었고 패배했다.
5. 혁명이 좀 더 지속됐던 지역 - 민족해방이 쟁점화됐던 이탈리아와 헝가리 ○ 혁명의 기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곳은 급진파의 힘이 충분히 강하고 민중운동과 튼튼히 결합되어 온건파를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거나, 온건파의 힘 없이도 해낼 수 있었던 곳. ○ 그것은 대중의 계속적 동원을 필요로 하는 민족해방의 목표가 결정적 쟁점이 되는 곳이었다. ○ 헝가리의 경우, 러시아 군대가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패배. : 1848년 혁명 가운데, 내부의 약점과 모순 때문에 붕괴하지 않은 유일한 혁명이 헝가리 혁명.
6. 혁명이 패퇴하지 않을 가능성은 있었는가?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재산에 위협이 가해지는 사태에 직면하자 혁명의 강령보다는 '질서'쪽을 선택. ○ 적색혁명과 맞서는 순간, 온건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굳게 손을 잡게 됨. ○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은 ① 혁명이란 위험스러운 것이라는 사실 ② 그들의 실질적 요구사항들 중 어떤 것들은 혁명 없이도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 → 부르주아지는 혁명에서 이탈하게 됨.
7. 지식인들의 역할과 행보 ○ 급진적 하층 중류계급에는 지식인들이 포진. 그러나 지식인들의 급진주의는 뿌리가 깊지 못했다. 지식인들은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들에게 넉넉한 지위를 제공하지 않은 것에 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1848년 당시 급진주의적이었던 학생들은 1850-60년대에 이르러 자신들이 활약할 기회가 증대하면서 '체제에 순응'하는 쪽으로 선회. ○ 적색혁명에 맞부딪혔을 때, 그들은 '민중에 대한 순수한 동정'과 '자신들의 재산에 대한 감각' 사이의 두 갈래 사이에서 분열. 동요하는 계층으로 후퇴했다.
8. 혁명의 결과 ○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전통적인 정치, 즉 군주에 의한 정치의 종언을 의미. ○ 지배수단의 혁신 - '민중의 정치학' 습득 : 신문의 필요성 인식 : 보통선거가 사회질서의 유지와 양립될 수 있음을 인식 - 그 상징적 사건이 루이 나폴레옹의 집권 ○ 중류계급,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노동자계급이 이후 정치무대의 항상적인 등장인물이 되었음.
제2부 전개과정 제2장 대호황
1. 경이적인 경제적 진전 ○ 1848-1870년대 초에 일어났던 경이적인 경제적 변화와 확대는 자유주의와 민주적 급진주의, 내셔널리즘이 내세운 정치적 요구들이 서서히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됨. ○ 세계가 자본주의 세계가 되고 선진제국이 공업경제를 수립한 것이 이 시대의 일. ○ 일찍이 유례가 없는 경제적 전진의 시대가 대호황과 함께 시작됨. ○ 한편으로, 고용이 비약적으로 급증하고 엄청난 사람들이 이주를 할 수 있게 됨 → 이는 민중들의 불만의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옴. ○ 호황의 정치적 귀결은 ① 정부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숨돌릴 여유를 주었다는 것 ② 혁명가들의 희망을 박살냈다는 것. 그렇게 정치는 동면기로 들어가고 말았다. (영국 차티스트 운동의 사망) ○ 부활한 유럽대륙의 군주제에게는 '정치적 회복'의 시간을 부여했고, '안녕과 번영'을 통한 정통성 확보라는 은혜를 부여함. ○ 1857년의 불황과 함께 평온했던 이 시대는 종지부. 그러나 1860년대에 다시 대규모 성장이 시작되고, 1871-1873년의 대호황으로 절정을 이룸. ○ 경제확장의 시기에 정치학이 부활하기는 했으나, 더 이상 '혁명의 정치학'은 아니었음.
2. 이 시대의 눈부신 경제 확장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19세기 전반에는 생산기반을 제약하는 굴레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었음. 공업화를 통해 빈민들에게 모두 고용기회를 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기. 이러한 이유에서도 1830년대와 1840년대는 위기의 해였음. ○ 진보의 주요 동인 ① 기차의 발명 ② 자본주의 경제의 지리적 범위의 급격한 확대. : '확장된 하나의 세계창출'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발전일 것임. : 이 시대에 극적인 신발견이나 새로운 정복이 있었던 것은 아님. 단지 전혀 새로운 경제세계가 옛 세계에 첨가되고 통합되었던 것. ○ '금의 발견'이 갖는 의미 :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금광발견 : 인플레이션의 결정적 요인이 됨 → 사업가들의 이윤폭을 넓힘으로써 기업활동을 자극. : 파운드에 의거한 안정된 통화기준 확립을 도움. : 골드러시 자체가 태평양 주변의 활발한 경제활동 자극. "골드러시는 무(無)에서 시장을 창출했다" ○ 경제적 자유주의의 확대 : 사기업의 자유화, 영업의 자유 확대, 고리대금 금지법 폐지, 회사설립기준의 완화, 전면적 무역자유화 경향, 노동통제방식에 있어서 비경제적 강제의 후퇴(노조설립과 파업의 법적 장애물 폐지)=노동력의 매매를 온전히 시장에 맡기는 조치 → 방대한 자유화의 과정은 사기업을 북돋우고 영업자유화는 경제확장을 촉진. : 노동자의 노동계약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노동예비군'이 적절하게 유지된다고 판단됐기 때문. : 영국의 경쟁국들이 자유무역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것이 선진공업경제 모두에게 혜택을 베풀었기 때문. * 만국박람회의 의미 : 1851년 런던에서 시작. 자본주의의 세계적 승리를 자축하는 거대한 예식이었음.
3. 경제적 진보의 양상과 귀결 ○ 19세기 중반은 연기와 증기의 시대 : 경제적 확장의 척도는 증기력과 석탄, 철 ○ 중요한 사실은 공업화가 지역별로 불균등하게 이뤄지기는 했지만,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 : 철도망과 기선의 보급은 모든 대륙에 기계력을 도입하게 함. : 철도의 도래는 그 자체가 혁명적 상징이자 혁명적 성취였음. 세계를 단일한 경제체제로 합치게 함. ○ 독일의 공업화가 갖는 정치적 의미. : 어느 나라도 공업발전 없이는 '열강'의 대열에서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됨. : 정치적·군사적 힘은 점점 산업잠재력과 기술능력, 실제적 지식에 기초를 두게 되고, 산업발전이 가져오는 정치적 귀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대한 것이 되었음. ○ 이 시기 철강공업의 기술혁신은 '혁명의 시대'에 섬유공업이 이룬 기술혁신과 유사한 역할을 담당. ○ 19세기 중반이후 고급과학지식에 대한 수요 증가 → 대학교수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한 존재가 되었고, 연구실험실은 산업발전의 불가결한 일부가 되었다. → 산업에 대한 과학의 침투에 따라 '교육제도'는 점점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됨(대중교육과 적절한 고등교육기관 양쪽을 다 갖추지 못한 나라가 '근대적' 경제를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 더 높은 경제발전을 위해선 '적절한 수준의 기사'를 대량양산하는 것이 요구됨.(미국이 앞서나갔던 부문) ○ 새로운 원료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됨 : 석유, 신금속, 고무 등 → 전등과 전력, 강철과 합금강, 전화와 축음기, 터빈과 내연기관의 시대로 나아가는 발판. ○ 또 하나 주요한 산업상의 혁신은 기계의 대량생산.(대량생산공학의 진보는 대부분 미국에서 이뤄짐)
4. 1870년대초 실업가들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자신감은 옳은 것이었을까? ○ 영국 산업혁명의 기술적 잠재성은 1870년대에 이르러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 ○ 1870년 초 사업가들은 경제적 도취감에 들떴다. 그러나 붕괴는 찾아 왔다. ○ 1873년 대불황의 시작. 이 불황과 함께 새로운 시대는 막을 열었다. 그 시대는 19세기 중반의 자유주의의 기초를 허물어뜨리고 파괴했다. ○ 1840년말엽부터 1870년대 중반은 '막간극'의 시대. 그러나 그 성취는 감명적인 것이었고, 산업자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제로 발전했다. ○ 역사는 이때부터 세계사가 되는 것이다.
제3장 하나가 된 세계
1. 탐험과 교통통신의 발달 ○ 1848년 당시만 해도, 여러 광대한 지역들이 지도상의 공백으로 존재. ○ 지도상의 공백을 메워갔던 것은 탐험. 탐험을 통해 1875년의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알려진 세계가 되었다. ○ 지리적 지식 이상으로 중요했던 것은 동떨어진 세계가 교통통신기관에 의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 교통의 변화는 육상에서, 철도에 의해 일어났다. : 1855년까지 5대륙 모두에 철도 개통. 이 시대는 진정한 철도시대에 들어선 시기. : 세계는 철도와 증기기관으로 연결되고 묶이는 단일체가 되었다. 사업의 지평선은 꿈의 지평선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로 뻗어나갔고, 인류의 운명과 역사와 이윤이 곧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 되었다. ○ 전신의 발달 : 가장 경이적인 기술변혁은 '전신(電信)'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것. : 유럽의 선진지역들은 1848년 이후 몇 년 동안에 재빨리 전신을 채택. : 1860년대 중반이래, 국제적인 전선부설이 꼬리를 물고 홍수처럼 시도되어 불과 5, 6년 안에 지구는 사실상 전선으로 둘러쌓이게 되었다. : 세계적인 전신 시스템의 건설은 정치적 요소와 상공업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었음. 즉, 군사목적, 치안목적, 행정상의 목적에 있어 모두 긴요한 것. ○ 정보전달 속도의 비상한 가속화는 하나의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신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격차를 넓힌 것. 즉 후진지역의 상대적 후진성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
2. 교통통신발달의 결과 ○ 국제경제 활동망의 긴밀화는 지리적으로 동떨어져 있던 지역마저도 직접적인 관계 속으로 끌어들임. ○ 이 시대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큰 몫을 했던 경제적 사건 - 캘리포니아의 금광발견 : 유럽에서 수천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사태가 유럽 대륙에 거의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게 됨. : 선원들의 탈주. 연안무역망의 형성. 중국인들의 골드러쉬 등.(후에 미국은 1882년 중국인 이민제한법 제정으로 이를 제지)
3. 국제적 표준화와 일체화, 하나의 세계로 ○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새로운 종류의 국제적 표준화기구의 설립을 요구.(국제전신연합 등) ○ 노동운동은 차츰 성장해가는 세계의 일체화 속에서 세계적 조직 '인터내셔널' 창설. ○ 그러나 여러 국민국가와 문화의 대두는 국제적 표준화를 거스르는 흐름으로 존재. 국제적 표준화는 여전히 미미하고 부분적인 현상에 머무름. ○ 세계의 단일화는 내용상으로는 다양한 분화를 의미. 서로 경쟁하는 여러 '국민경제'의 구조로 이뤄진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서, 자유주의의 승리여부는 '민족'들을 자유주의 쪽으로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는가의 여하에 달려 있었다. ○ 세계의 일체화는 '공황'의 세계규모화 초래. : 1848년 이후 경기순환형 공황은 진정하게 세계적 규모로 발생. 뉴욕의 은행 도산과 함께 시작된 1857년의 공황은 근대적 유형의 세계적 불황 중 최초의 것. : 단, 모든 사태는 이미 국제경제 속으로 진입해 있는 부문에만 영향을 미침.
제4장 분쟁과 전쟁
○ 1850년대의 대호황은 세계적 규모의 공업경제와 단일화된 세계역사의 기초가 되었고, 유럽의 지배자들에게 숨돌릴 여유를 주었다. 또한 대중적 불만을 약화시킬 만한 안전판(넉넉한 고용기회와 이주)을 마련함으로써 사회문제는 훨씬 다루기 쉽게 보였다. 그러나 정치적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고, 1850년대의 마지막 무렵에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국제적 분쟁의 불씨는 독일과 이탈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 이탈리아와 독일 통일의 문제는 모두 합스부르크제국의 성격 및 국경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 : 이 두 지역의 통일이란 바로 전쟁을 의미하게 됨. : 그러나 두 지역에 내재한 폭탄은 호황 덕에 폭발력을 잃고 있었다. 다만, 1850년대 말부터 여러 나라 정부들은 정치적 동요에 직면하고 있었음. ○ 1860년에 특기할 만한 점은 '민중에 대한 양보'가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는 점. : 1860년대는 개혁과 정치적 자유화의 시기. : 1860년의 지배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규정받음 ① 지배자들 스스로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제적 정치적 변화의 상황 ② 신흥세력에 대한 양보의 한계를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 ③ 그럼에도 상당 정도의 주도권과 사태를 조종할 수 있었던 상황 ○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지는 정치가 - 비스마르크와 카부르 : 국가적 통일이 민중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이뤄지도록 했던 인물들. : 이들의 눈부신 정치적 업적은 개인적 재능만이 아니라, 심각한 혁명의 위험과 다루기 힘든 국제적 경쟁이 없었다는 사실. ○ 1848년 이후의 30년은 혁명의 시대가 아닌 전쟁의 시대. - 혁명의 위협이 사라졌기 때문. : 중요하고도 유일한 세계적 문제는 5대 열강의 관계. : 1848년 혁명을 겪었지만, 열강에 의한 국제정치 체제는 옛날 그대로였다. : 그러나 그후 몇십년 동안 놀랍도록 사정이 달라졌다. 루이 나폴레옹 등장의 결과. : 프랑스의 야심은 힘의 균형체제를 교란 → 교란이 낳은 최초의 큰 결과가 크리미아 전쟁(1854-1856). : 크리미아 전쟁의 중요한 결과는 러시아의 짜르체제에 금이 가게 되었다는 점.→ 위기, 개혁, 변화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농노해방(1861)과 1860년대말 러시아 혁명운동의 출현으로 절정에 달함. : 12년 동안 유럽은 네 차례의 큰 전쟁을 경험. : 그러나 전쟁에 대한 공포는 1871년 이후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 ○ 이 시기를 상대적으로 피비린내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① 세계적인 자본주의 팽창의 과정. 비서구세계의 긴장을 증대시켰고, 공업세계의 야심을 증대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직접간접의 분쟁을 증대시켰던 것. ② 정부가 취할 통상적 수단으로서 전쟁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 - 더 이상혁명으로의 귀결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 ③ 자본주의의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됨. → 공업경제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초래했고, 그 전의 어떤 전쟁보다 근대적인 대량전쟁에 가까웠음. ○ 1860년대에 발생한 세 가지 일 ① 영국 이외의 본질적으로 공업적인 자본주의 국가 출현(미, 프로, 프, 일) ② 부와 공업능력이 국제적 세력관계에서 점점 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음.(러, 프의 지위 저하, 독일의 지위 상승) ③ 미국과 일본이 강국으로 대두함에 따라 처음으로 세계적 분쟁의 가능성이 조성되었음. ○ 국제정치 체제는 자본주의적 공업강대국들에 의한 일종의 과두체제가 되었다. 새로운 세력구조의 기초가 다져졌고, 유럽 전면전쟁에 대한 공포도 이때 씨가 뿌려졌다. ○ 자유주의 승리의 시대는 여러 분쟁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875년 이후는 그렇지 않았다.
제5장 국민들의 형성 1. 1848-1870년대의 국제정치; -'내셔널리티'의 문제가 중심 쟁점 -서로 경쟁하는 민족들이 자기 주장을 하는 시기: 독립할 권리와 그 민족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묶는 통일 국가를 형성할 권리를 통치하는 압제자들에게 요구 -'국민국가의 형성'이 세계 도처에서 진행: 프랑스(루이나폴레옹); 이탈리아(사부아 왕권지배아래 통일); 독일(프로이센 왕권 지배아래 통일); 헝가리('타협'에 의해 사실상 자치 획득); 루마니아(다뉴브 강 유역 2개 공국의 합병으로 국가를 이룸, 1850년대 말에 일종의 독립획득); 폴란드(독립이나 자치를 얻지 못함); 아일랜드(페니어회의 반란); 발칸반도(기독교도 민족들의 반란); 그리스와 세르비아(요구보다 훨씬 작은 영토에서 독립); 터키(민중봉기로 인하 국내.외적 위기→불가리아 독립, 발칸 민족들의 발칸화 가속); 동방문제(터키제국의 유럽 지도를 어떻게 고쳐 그리느냐의 문제); 합스부르크 제국(한결 더 명백한 구성민족들의 민족문제; 온건한 문화적 자치 요구로부터 분리독립에 이르는 다양한 요구); 유럽밖(미국의 남북전쟁; 일본의 메이지유신) - '국민'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나 설명하고 정의 내릴 수 없는 것; 이 시대에는 '국민들(nations)'을 주권적 '국민국가(nation-state)'로 개편함을 의미하는 것; 국민국가는 '국민'의 성원이 정주함으로써 지역이 확정된, 한결같이 일관된 영토를 가지는 것; 국민이란 그 과거의 역사, 공통의 문화, 그 인종적 구성,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것; 그러나 여기에는 논리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19세기적인 영역국가란 비교적 새로운 역사적 현상 - ①국가 내지 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민족들' vs ② 이 점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민족들' ① 정치사적 사실, 식자층의 제도적·문화적 역사 등이 길잡이: 프랑스, 잉글랜드, 에스파냐, 러시아(그 나라 사람들이 국가와 동일시 될 수 있었다), 헝가리(합스부르크 제국 안에서 별개의 실체인 헝가리 왕국), 폴란드(18세기 말에 망하기 전까지 존재), 독일(게르만 민족의 신성로마제국, 독일연방 형성, 식자층이 같은 문자와 문학 공유), 이탈리아(식자층의 가장 오래된 공통의 語文문화); '역사적' 기준에서, 일반민중의 그것과 일치하거나 상충되지 않는다는 전제아래서 지배층 또는 식자층의 제도와 문화가 결정적으로 중요 ② '비역사' 내지 '준역사적' 민족, 비인종적, 비언어적; 아일랜드, 체코, 핀란드; 소규모의 민족; 딜레마-적어도 어느 정도는 큰 국민이어야,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사회발전의 '자연적' 단위라야 한다; 독립 못지 않게 '통일'이 그 원리의 하나(같은 국민이라 생각할 증거가 없다-예)유고슬라브 내셔널리즘의 상충·갈등) - 국민국가를 진보의 개념과 결합; 소수민족의 민족적 열망에 직면한 '여러 국민의 유럽' 논자들의 선택의 기로(실재하는 민족 성격, 소수민족 요구의 정당성과 존재를 부인하거나(독일인;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헝가리인에 대하여)/역사의 진보에 따라 더 큰 실재하는 민족 내부의 한 지방적 특질 정도가 되고 말아야 한다거나(아일랜드인들의 운동에 대해)/동화시킴으로써 소멸시켜야 한다(체코에 대해); 反 평등주의적 요소; 어떤 민족(수가 많고 튼튼한 지위를 확보한 민족들)은 생존경쟁의 승리자가 되도록 역사에 의해 운명이 정해져 있고 다른 민족은 그렇지 않다.
2. -국민국가형성 운동과 내셔널리즘의 차이; 국민국가형성운동은 내셔널리즘에 입각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구조물을 건설하려 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사람이지만 독일내셔널리스트는 아니었다 -국민국가와 내셔널리즘의 괴리의 극단적인 예; 이탈리아(단지 지리상의 표현; 단일한 통치권력이 존재한 선례는 고대 로마 이후 없었다; 이탈리아어 사용주민은 2.5퍼센트에 불과; 이탈리아를 만들었으니 이탈리아인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민족이념'을 내거는 운동은 성장해갔으나, 20세기 초까지는 표준적인 내셔널리즘의 강령(각 '민족'마다 완전히 독립한, 영토·언어적으로 동일·동질적이고 비교회적인(대개 공화제적·의회주의적인) 국가를 가진다)을 대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①종전의 내셔널리즘 vs ② 새로운 내셔널리즘 ①국가를 아직 가지지 못한 '역사적' 민족과 오래전부터 국가를 가지고 있는 민족도 포함; 민족주의의 보편적 존재와 동질성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잉글랜드인 이민자vs웨일스인, 스코틀랜드인 이민자, 병역을 국민적 의무로 생각지 않은 프랑스인, 독일 통일에 관심없는 독일농민) ②새로이 나타난 나라들; 신화와 선전상으로만 내셔널리즘이 당연시; 감성적·민속적 단계→민족이념에 헌신하는 핵심집단(부르주아지, 귀족, 중간계층, 엘리트) 출현→출판 및 단체 구성, 교육.문화기관 설립, 직접 정치활동→대중적 내셔널리즘(경제적.정치적 발전과 상관관계, 새로운 현상) -노동자계급의 민족주의; 정치의식과 발맞추어 앙양; 노동자 계급의 '국제주의'는 민족의식의 대치가 아니다; 좌파의 국제주의란 다른 국가에서 같은 대의를 이해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와 지원을 의미; 프롤레타리아트는 개념상으로만 국제적 존재, 현실적으로는 국민국가 또는 인종적.언어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여러 그룹의 총집합체로서만 존재
3. -'네이션'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산물 -'네이션'은 새로이 건설되어야만 했다; 국민적 통일성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의 결정적 중요성; 이 제도란 '국가', 국가적 교육(초등교육 분야에서 큰 변화, '국어'의 현실화, 덕목과 애국심의 배양, 하나의 국민성 강요), 국가적 고용, 병역을 의미 -네셔널리즘의 역설; 한 내셔널리즘이 어떤 고유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에서 동화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열위의 소수민족임을 감수하느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대항 내셔널리즘을 자동적으로 낳게했다; 자유주의 시대는 이 역설을 파악하지 못함; 국민이나 내셔널리즘의 형태가 제대로 잡혀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마음대로 틀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 내셔널리즘은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 양립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졌다
제6장 민주주의 세력들 1. - 민주주의; 나랏일에 대한 서민들의 역할 증대; 역사적인 힘; 이 시대의 민족주의운동이 대중운동화되어 있었던한 두가지는 동일한 것 -지배계급의 불안; 대중들의 신념이 바야흐로 정치에서 힘을 가지기 시작했다; (혁명을 경험해봤으니)대중을 잘 다루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자유주의 주장의 약점; 법률상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는 원칙은 차별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만듦; 사회적 유동성과 교육의 진전으로 중산층과 그 아래 사회층의 구분이 흐려짐에 따라 차별의 실제화가 점점 더 어려워짐 -1860년대; 정치를 민중으로부터 차단시킬 수 없게 됨; 보통선거제를 넓히지 않고 견뎌냈던 나라는 극소수; -부르주와지가 현실적으로 정치 시스템 안에서 힘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이 사람 머릿수, 즉 투표권을 가지고 있던 비부르주와 계층의 지지를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 자유주의의 계속 득세-경제발전을 위해 효과적인 유일한 정책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과 이성과 역사와 진보를 대표한다고 믿는 거의 모든 세력들은 이데올로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유주의만이 대표; 자유주의파와 급진파는 함께 좌파를 형성; 우파는 '역사의 힘'에 반항하는 사람들;
2. -프롤레타리아트; 정치에서 그 자체의 독자적 주체성과 역할을 최초로 그리고 가장 위험스러울 정도로 확립한 집단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출은 '국제적인' 과정; 급진좌파의 국제적 단결과 불가분의 관계; -국제노동자협회(제1 인터내셔널 1864-1872);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인터내셔널 시대에 출현하여 주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됨; 노동운동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운동(마르크스주의운동)과 동일시 됨;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육성; 노동분쟁과 스트라이크의 물결; 노동운동을 독립된 것,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 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성취; 노동운동은 대중운동으로 정치권력 쟁취를 목적으로 조직; 단순한 공화주의와 내셔널리즘을 포함한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와 아나키즘과 상호부조주의 같은 좌파 사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다; 당장의 혁명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적에 대해 장기전을 수행해낼 수 있는 부대를 조직하는 일→독일을 제외하고는 침체, 패배, 그러나 독립적이고 정치적인 대중적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조직과 前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주의 좌파의 영향 타파라는 두가지 성취는 항구적인 것 -각국 정부와 부르주와지: 적어도 일부는 1860년대에 노동자 계급의 대두를 인식;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한 계급투쟁을 대신할 대안으로서, 또는 예방조치로서 '사회개량'을 창도; 노동자의 조직과 그 활동을 길들이려면 우선 그것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깨달음; 자유시장의 이론 속에 노동자의 자유로운 단체교섭권의 여지를 마련해주기 위하여 법을 개정-노동자 조직과 파업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개혁조치의 목적은 노동자들이 독립된 정치세력(혁명세력)으로의 대두를 막아보자는 것
제7장 패배자들 1. -부르주아 세계, 생존경쟁에서 오직 '최적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희생물; 북서 유럽 및 중앙 유럽의 여러 국민경제와 국가들, 그곳 출신의 해외이민들이 정착한 나라들, 아메리카 합중국에 의한 희생물 -인도, 인도네시아, 북아프리카 이외는 공식적인 식민지; 육상에서의 정규적 접전에서는 능한 백성들, 비정규전 또는 게릴라전의 위협, 선진국의 뜻과 이익을 관철시킬 수 있다면 굳이 어렵고 비싸게 먹히는 군사점령을 감행할 필요가 없었다 -희생물이 된 세계; 외면하거나 거역하기에는 백인들의 힘이 너무 강했다; 결국 '충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의 문제-모방하느냐, 저항하느냐, 결합하여 대응하느냐의 문제 ①오스만제국, 페르시아, 중국, 일본, 모로코, 미얀마, 시암, 베트남 등의 제국 또는 독립된 대왕국이 아직은 살아남음; 19세기 자본주의 힘에 무너져 감; 보다 작은 나라들은 모두 점령당함 ②아메리카 대륙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前식민지; 형식상으로 주권국가의 집합체; 농업국, 대토지 소유자들의 부에 의해 지배, 토착 과두정치 체제 하 외국인들을 통한 세계경제와의 접촉, 풍부한 자원, 정치권력의 힘으로 가차없는 근대화와 유럽화를 강행했으나 경제적 자주성이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실패 ③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④아시아에서 공식적으로 식민지가 되어 있거나 점령당해 있던 지역들
2. 인도; -영국은 행정상의 필요와 경제적인 요청에 따라 서유럽화를 강요; 기존의 사회구조 붕괴; 소수의 인도인을 위한 순수한 영국식 교육제도 확립; -다른 한편으로 영국은 인도인들의 서유럽화를 거부, 왜냐하면 예속민에 지나지 않는 인도인이 해야 할 일은 영국 자본주의와 경쟁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 지나친 간섭은 정치적 위험이 될 수도 있기 때문; -서유럽화는 인도 해방투쟁의 지도자, 그 이데올로기 및 강령, 본국의 경제정책과는 이해가 대립되는 토착적 산업과 계급의 원초적 존재를 출현시킴; -인도의 반란(1857-58); 인도 통치의 전환점, 전통적 인도가 영국의 직접 지배에 행한 마지막 반격, 동인도회사의 몰락; 영국인에게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병합정책의 중지; 분할하여 통치하라, 꼭두각시인 토후들의 통치; 이후 새로운 중산계급 엘리트의 저항을 견제하는 대항추가 됨
3. -알제리; 1871년 대봉기, 인도의 경우와 유사한 사태 -서유럽 자본주의의 희생물이 된 곳들은 정복당한 식민지가 아니라 오히려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이면서 점점 더 약체화, 분열되어 갔던 사회와 국가들; 이집트와 중국; 서유럽의 팽창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킬 수 없게 되자 일종의 개혁정책을 채택한 예; 양국의 지배층은 국민적 저항의 길을 물리치고 서유럽에 종속.의존하는 길을 택했다; 결국 실패; 이집트는 정복자의 직접적 통치를 받게 되고, 중국은 붕괴의 길로 치달음 -이집트; 농업적 자원(면화, 소맥)과 전략적 위치(수에즈운하) 때문에 희생물; 농업산품 공급국으로서 유럽 경제에 편입; 알 아프가니의 근대 이슬람 이데올로기, 이슬람의 회춘, 근대과학을 흡수하여 서유럽과 겨뤄보자 -중국; 태평천국의 난(1850-1866); 서유럽이 중국에 미친 충격의 직접적인 산물; 전통적인 대제국 가운데서 이데올로기적(천명)으로나 실천적으로나(반란의 큰 역할과 왕조교체) 민중적인 혁명의 전통을 가진 나라는 중국 뿐; 제1차 아편전쟁(1839-1842)의 패배, 제국의 허약성 노출, 반대세력의 활동 활기, 홍수전을 지상의 천자로 만드는 태평천국 선포, 사회혁명적 체제이자 대중층에 지지세력, 도.불교 및 기독교등 평등사상에 의한 것; 사회혁명 진압을 위해 외국의 지원을 받아들임으로써 급속희 의존상태로 떨어짐; 서유럽열강에 대한 양보, 보수주의로의 복귀, 중앙권력의 치명적인 부식 속에 태평천국의 난 모면
4. -열정적인 '근대화주의자'들; 전통주의의 올가미를 부수는 일을 도와주는 존재, 서유럽과 맞설 수 있는 사회를 창건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로서 외국인을 보았다; 자기 나라에 절망하여 외국풍에 심취; -마르크스도 미국의 멕시코에 대한 승리가 역사의 진보, 자본주의적 발전조건 창출, 자본주의 전복의 조건을 갖추어 줄것이라 보았다(인도에 대한 영국의 사명도 마찬가지, 부르주와지에 의한 정복을 적극적.진보적인 것으로 파악) -명백한 결과는 '새로운 세계라곤 아직 얻은 것 없이...옛 세계만 잃어버린' 것 -긍정적인 면; 정기선, 철도, 교육받은 소수지식인, 소수의 재산가, 물질적.문화적 커뮤니케이션 형성, 질서와 치안, 결코 부정적인 측면을 압도할 수 없다; 태반은 서유럽 문명의 진보로부터 이렇다 할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빈곤과 부의 대조; 대규모의 아사, 동시대의 선진국과 비교할 때 극적인 대조
제8장 승리자들
-미국; 영토적 야심은 멕시코와 서부, 알래스카에서 그이상 진행되지 않음; 미국의 지배에서 기본적 유형은 간접적 지배; 유럽은 미국을 날카롭게 의식하기 시작; '신세계'의 이미지; 세계에서 어느 만큼 규모와 중요성을 갖춘 유일한, 자유스럽고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공화국 형성; 미국의 유토피아는 원래 자유로운 땅 위의 독립자영농민의 농업적인 유토피아, 대도시나 대공업의 세계와는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성질의 것, 1862년 자영농지 조성법 제정; 농업적 유토피아의 실패-투기꾼, 금융업자,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이 이법의 혜택을 받음; 남북전쟁과 서부개척은 밀접연관; 서부개척된 지방에 노예제를 도입하는 문제로 대립; 1867년 인디언 절멸정책; 자유의 꿈은 인디언, 중국인, 흑인, 멕시코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노예제 사회로서 남부가 존속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불가능, 남부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것은 강력한 북부의 자본주의와 공존이 어렵고, 서부로 이민이 쏟아져 들어감으로써 야기된 문제들; 남부는 자유무역, 북부는 보호관세의 편; 북부는 반자유무역주의, 반보호무역주의를 더 우려; 북부는 대륙을 통일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데 반해 남부는 그렇지 못했다; 4년간의 남북전쟁에서의 북부의 승리는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 근대 미국의 승리; '도적귀족'의 시대-냉혈적이고 사기적인 상거래, 엄청난 규모의 부패 가능성, 치부를 위해서는 어느 특정 수단에만 매달리는 일 없이 이윤의 극대화만을 노림, 자수성가(?, 대부분은 실업가 또는 전문직 집안 출신)한 사람이며 그 부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 어떠한 경쟁상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2. 일본 -비유럽 국가들 중에서 서양과 맞부딪치고 서양의 수법을 써서 성공한 유일한 나라 -17세기 초까지 나가사키에서만 제한된 규모의 무역 허용 -19세기 중반까지도 하등 다름없는 나라 -1853-54; 페리제독의 항국 개항 -다른 비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서양을 모방하는데 보다 적극적이었고 모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의지와 능력의 겸비; 제국이 아니라 하나의 잠재적인 국민국가, 19세기 경제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 및 기본구조 겸비, 일본의 엘리트들이 사회 전체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국가기구와 사회구조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 -'사회적 복종'이라는 전통적 메커니즘을 활용할 수 있었던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입장 -1836년 철저한 위로부터의 혁명인 메이지 유신 실현 -전투적 무사들의 양이와 존황의 슬로건; 막부권력에 대한 천황권력(왕정복고)의 회복을 택함; 자본주의가 부르주와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 즉 이 개혁이 없이는 그들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관료.귀족적인 구체제의 힘에 의하여 공식화됨; 서유럽화는 출생보다는 부와 교육수준과 정치적인 영향력에 의해 신분산의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 실현의 과정, 평등주의는 노동자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 무사들에게 나쁜 반면 대부분의 평민에게는 유리한 것;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힘과 국가를 강하게 해야 할 필요성으로 정당화; '복잡'한 서양; 신도제의를 출현시키는 반동; 신전통주의와 선택적인 근대화의 결합이 대세가 되었다.
제9장 변화하는 사회
◇자본주의를 대체할 사회에 대한 전망이 아득히 흐려져간 시대 -혁명의 기억(희망이나 공포)은 강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유럽혁명이 재현을 기대했으나 1857년 세계적인 경제불황의 여파가 그냥 넘어갔다.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 있는 장래의 혁명 발발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일종의 점진적 사민주의로 전환했다든가,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마르크스는 (심지어 선거의 승리를 통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의 경우에도)'노동자들에 의한 권력의 장악'과 '구정치, 구제도의 파괴'를 필요불가결한 과정이라 보았고, 구시대의 지배자들에 의한 폭력적 저항을 유발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예견될 수 없는 먼 미래의 혁명은 유럽의 선진국들(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대중정당 조직이 당면한 미래)에서는 거리가 먼 얘기, 오히려 주변부의 사태발전에 의해서 앞당겨질 수 있는 일; 1860년대 후반 마르크스는 식민지혁명, 러시아 혁명, 미국혁명을 구상했다. -영국; "혁명의 물질적 조건이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까지 발전한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장래를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나라; 아일랜드의 독립 쟁취를 통한 영국 혁명 촉진 구상 -러시아: 러시아 혁명은 성숙한 자본주의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촌락공동체주의에서 곧바로 공산주의적 발전으로 러시아 사회를 직접 이행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 미국 정치제도의 위기 예상(농민약화, 투기꾼과 대기업가들의 정치장악); 대중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형성되어가는 경향 강조 -마르크스 사후의 승리; 독일사회민주당의 출현,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 사이에 침투
◇인터내셔널 운동 -온갖 좌익집단의 잡동사니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결속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주요한 흐름이 존재하지 않게 된지 오래; 생시몽주의는 콩트의 실증주의로 변형, 오언의 추종자들은 협동조합으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수명은 1848년을 넘기지 못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후예들 -급진적인 민주적 공화주의자에서 블랑키류의 자코뱅적 공산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블랑키슴은 파리 코뮌 이후로 이렇다 할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새로운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갈등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민주적 급진주의 -이들의 강령은 소시민, 노동자, 그리고 그들의 표를 바라고 있던 자유주의적 정치가들의 마음을 잡는 편리한 호소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더 잘 버텨냈다.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거의 실현되지 않음 -그 자체로서는 혁명적 슬로건이 아니고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혁명제 공화제→사회적 공화국, 혁명적 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
*무정부주의 -1860년대라는 시대의 산물; 프루동과 바쿠닌이 시조; 마르크스를 찬미하였으나 결국 적대적인 입장으로 돌아섬 -비인간화된 공장제 생산 대신 서로 지원하는 소규모 생산자의 집단에 의한 생산, 정부에 대한 증오; 독립적 수공업자, 프롤레타리아화에 저항하고 있던 비교적 자주적인 숙련노동자, 옛생활을 잊고 있지 않은 사람들, 공업화가 진전된 지역의 주변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음 -공업화 시대 이전의 과거가 현재에 반항하는 것인 동시에 또 그 현재의 산물 -전통을 거부하지만 사상적으로나 운동 면에서는 직관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성격 때문에 반유대주의, 배외주의같은 전통적인 요소들을 지니게 됨; 계몽과 교육의 대의를 열렬히 환영;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방임주의적인 부르주와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와도 기묘한 합치; 이 시대를 비뚤게 비쳐주는 거울
◇러시아의 인민주의 운동 -결코 대중운동이 될 수는 없었다; 지식인들이 참여한 운동; 부르주아와 새로운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다같이 미약했기 때문에 정치적 선전.선동운동을 담당할 사회계층은 단 한계층-인텔리겐치아 -인민주의는 1830년대, 1840년대 혁명운동과 1917년의 혁명운동을 연결시키는 고리 -인텔리겐치아; 고등교육을 받은 이가 매우 소수였기에 결속된 한 집단으로서 자각; 비즈니스의 세계나 관료사회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특수한 사회집단으로 인식되고 있고, 민족지향적이기보다는 사회지향적인 정치적 급진주의를 보였다는 것이 유럽의 지식인들과의 구별점; 러시아는 시민사회가 아니었으며 이미 독립국가였다; 인민주의자들은 근대화론자, 그러나 자본주의적 새 러시아가 아닌 사회주의적 새 러시아(촌락공동체에 그 토대를 둔 것)를 꿈꾸었다; 서유럽적인 전통(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인 사상원리의 유형을 포함)을 거부; 준열하고도 전체적인 자기희생; 초기의 중핵부대는 가난한 학생들; 인민주의자들은 화학실험실의 구실을 했다, 19세기의 주요혁명사상을 시험하고 결합하여 20세기의 혁명사상으로 발전시켰다.
◇혁명 -태평천국의 난; 사실상 서양의 관찰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유럽의 혁명사상과도 별로 관련이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들; 가장 빈번; 군사쿠데타나 지역적 분리; 그들 나라의 양상에 눈에 띄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유럽의 혁명; 실패(1863 폴란드 봉기), 온건한 자유주의에 흡수(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 가리발디), 순수히 국민적인 의미만 지닌 것(1854, 1868-1874 에스파냐 혁명) -1871년의 파리코뮌; 하나의 '상징'으로서 가공스러운 것; 실제로 하나의 정부였다는 사실; 단지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로서도 부르주와적 질서를 혼비백산케 했다; 각국 정부들의 국제적인 협력; 각국 정부가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혁명 일반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피의 강물; 사회혁명가들은 권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제10장 토지
1. 이 시기 농촌의 특징과 변화
▶ 1848년 당시만 해도 세계의 인구는 여전히 농촌인구가 압도적 비율이었으며, 1871년대 중·후반까지 이런 상태에는 큰 변화가 왔지만 여전히 농촌인구가 도시인구를 앞지르고 있었음
▶ '성장하고' 있던 세계 모든 곳의 농업의 공통점 : 농업이 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경제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사실 1) 공업적 세계경제의 수요(식량과 섬유공업의 원료, 공업용 작물)는 농산물에 대한 시장을 몇 곱절로 확대 2) 국내적으로는 도시의 급성장을 통해 시장의 확대가 이루어졌으며, 국제적으로는 철도나 기선덕분에 개발이 불가능했던 지역들도 세계시장에 편입 : 기술의 발달이 지리적으로 멀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들의 개발을 가능케 함 : 대표적으로 미국 중앙부의 대평원과 러시아 남동부의 평원→대표적인 곡물 추출지로 성장 3) 세계시장 지향적 농업의 발전에 따라 수출지역에서의 극단적인 특화재배나 모노컬처가 나타나기 시작(아직 안정화 되지는 못함) : 벵골의 인디고나 황마, 콜롬비아의 담배,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의 커피, 이집트의 면화 등
▶ 세계농업지역의 분할 1) (국내적 또는 국제적) 자본주의 시장에 의해 지배되는 농업 : 생산과잉이나 경쟁의 격화, 그에 따르는 가격폭락에 영향을 받음, 1870년대 이후 이러한 형태가 지배적 2) 시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농업(농업의 전통적 부분) : 흉작과 그 결과로 빚어진 기근에 의해 영향을 받음 3) 1)번의 한 극(極)의 형태로 모노컬쳐가 형성 - 농업의 원격지 세계시장의 지향성과 수출무역을 좌지우지하던 외국상사의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짐 - 이러한 지역에서는 대규모 생산자들과 이들의 국가/ 대무역상과 항구의 매매중계인/ 시장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 밀접한 공생관계가 형성: 미국남부의 노예소유 귀족층, 아르헨티나의 농장주,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목양업자는, 그들이 의존하던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무역과 외국기업 활동의 거래에 열중
▶ 자본주의 경제성장은 대량수요에 의해 농업의 형태를 변혁 1) 농업용지의 증가(및 생산성의 향상에 따른 산출량의 증가) - 1840년에서 1880년 사이 수확 가능면적은 약 5억 에이커에서 7억 5천만 에이커로 증가 - 신대륙 : 이중의 절반은 농업용지가 3배로 늘어난 미국의 증가였음, 오스트레일리아서도 5배, 캐나다에서도 2.5배가 증가 - 유럽 : 대부분 휴한지를 없애거나 황무지 늪의 개간, 삼림의 파괴로 경작면적 증가(오직 영국에서만 새로운 농업이 '이미'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이러한 증가가 미미함) 2) 생산증가·생산성 향상과 기술 이용과의 관계: 전반적으로는 예전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 - 수확작업 : 기술이 예외적으로 혁신된 주요분야 ; 특별히 많은 노동력이 일시적으로 투입되어야 했으나,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그 비용이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 - 대량으로 생산된 옹기 배수관, 유기화학 분야가 농업자본에 공헌
2. 자본주의적 농업의 팽창
▶ 자본주의적 농업의 팽창을 가로막은 것 : 사회적인 제도적 장애 1) 근대경제에서의 농업 부문의 세 가지 기능 - 수요가 급증해가는 식량·원자재의 공급처이자 시장으로서 기능 - 비농업 부문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 - 도시와 공업을 위해 자본을 마련(효과적이고 충분하지는 않았음) 2) 장애의 원인 : 첫째는 농민들 자신, 둘째는 농민들을 지배하고 있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지배자들, 셋째는 전통사회의 제도적 중압 - 이러한 장애들은 자본주의의 발달 속에서 희생물이 되도록 운명지워짐 - 농촌은 자본주의 '정치적 안정'을 떠 받쳐 주었지만(군대의 근간이 되었고, 도시에 인력을 보충해 주었으며, 보수적성향을 나타냄)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허물어뜨릴 수밖에 없었음
▶ 자본주의적 농업의 팽창 속에서 세 종류의 농업경영 방식이 압력을 받음 1) 노예제 플랜테이션 :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 노예제가 폐지됨으로써 일소됨 2) 농노제 농장 : 형식적으로는 1848년부터 1868년 사이에 일소 - 남유럽 및 동유럽의 대토지 소유가 존재한 지역들에서는 반(半)농노적 처지가 지속 -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실제로 오히려 강화되었지만, 부역은 인디언 농민들에게 차츰 한정 3) 전통적·비자본주의적 농민경제 : 일정한 규모로 지속
▶ 전자본주의적 형태의 농업이 청산(농노제와 농노해방)되어 갔던 이유 : 매우 복잡!! 1) 정치적인 요인 : 1848년 합스부르크 제국과 1861년 러시아의 농노해방 ; 비농민계층에 의한 혁명이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힘을 얻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음 2) 농민반란 : 1846년 갈리시아, 1848년 남이탈리아, 1860년 시칠리아등의 농민반란 ; 이 경우에도 정부가 두려워 한 것은 맹목적인 농민봉기가 아니라 중앙의 권위에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에 의해 농민들의 사회적 소요가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 ※ 반란이나 혁명은 왜 그러한 시기에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주기는 해도 그 이상의 것은 말해주지 못하며, 더욱이 노예해방은 전혀 설명하지 못함. 그렇다면 3)번 요인은? 3)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적 압력 : 확실히 '어느 정도'는 그러했음, - 노예제: 노예에 들어가는 자본의 비효율성, 기계화와 노예노동자 쌍방에 대한 이중적 대규모 투자의 부담 - 농노제 : 속박된 농민의 광범한 존재는 자유노동을 필요로 하는 공업의 발달의 저해 ※ 그러나 부자유노동의 폐지는 단순히 경제적인 계산만으로 분석될 수는 없음. 4) 부르주아 사회의 여러세력이 지닌 정치적 입장 : 농노제나 노예제가 개인적 이익의 자유로운 추구에 입각하는 시장사회(market society)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 ; 정말로 노예제 혹은 농노제 폐지가 경제력만의 산물이었다면 러시아나 미국에서 그러한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지는 않았을 것
▶ 노예제의 폐지나 농노제의 해방도 농업문제에 대해 만족스러운 자본주의적 해결을 가져오지는 못함 : 자유주의화의 중요한 결과로 농민층의 불만만을 한층 더 날카로워지게 함, 또한 새로운 점은 이제 그것이 정치적 좌파에 의해 동원될 수 있었다는 것 -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 : 1860년대의 농민폭동이 가리발디와 결합 - 남에스파냐 : 공화주의자와 인터내셔녈(바쿠닌파)이 급속히 세력을 얻음 - 아일랜드 : 혁명적 좌파가 1860년대에 페니언회(Fenians)로 출현, 1870년대 말부터 1880년대까지는 '토지동맹(Land League)'이라는 세력으로 발전 - 반면 좌파가 성공적으로 농민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 곳이 많았음 : 좌파는 기본적으로 도시적·세속적이었으며, 농민층은 좌파에 대한 의심과 적의를 가지고 있었음.
제11장 인간의 이동
1. 가난한자들의 여행 : 이민
▶ 19세기 중반은 역사상 최대의 인간이동이 시작된 시기 - 1848년부터 1875년 사이에 900만 이상의 사람들이 유럽을 떠났으며, 그 압도적 다수가 미국으로 향함(국제적 이민의 대부분은 유럽인들-보다 정확히는 서유럽과 독일인들) - 인구이동과 공업화는 함께 진행 : ① 세계적인 근대경제의 발전이 인구의 이동을 요구 ②개선된 교통기관이 이를 가능케 했으며 ③근대경제의 발전이 이동된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었음 ▶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농촌에 살았으므로 이주자들도 대부분 농촌 출신 : 농촌에서의 농촌으로의 인구재배분이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농업으로부터의 인구유출 만큼 현저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민과 도시화는 동시 진행 ▶ 국내의 이주 - 여성들 : 중간에 농민과 결혼하거나 다른 도시에서 직업을 갖게 되기까지는 가정부가 되는 경우가 압도적 - 남성들 : 대부분 그의 출신지에 갖고 있었던 전통적인 직업에 종사, 그렇지 않은 겨우에는 건축업과 수송업에서 직업을 구함 ▶ 국외의 이주 : 좀 더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킴 1) 언어상의 어려움 : 중부 유럽 및 동유럽의 다민족 제국의 경우 2) 이주민들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 것인가? - 이는 미국에서 가장 크게 제기되었으며, 미국의 이주민 1세대들은 이주전의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강하게 지님 - 소수민족 거주지구인 게토가 형성되고 동향인들만으로 인간관계를 한정 3) 물질적인 곤란의 문제 - 어디로 가야하며, 간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 문제 - 이민에 소요되는 비용 : 그 자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운 것은 아니었으나, 극빈자들에게는 그러한 정도의 여비조차 조달하기 어려운 형편 - 다양한 형태의 중개업자, 대리인, 청부인들이 출현 : 한쪽으로는 노동력에 대한 커다란 수요가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새로운 나라의 조건에 대한 무지한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 ; 중간적 착취자로 기능함
▶ 왜 사람들은 이민을 떠나야만 했는가 ? - 그것은 압도적으로 경제적인 이유, 즉 가난했기 때문 :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든가, 미국에는 일자리가 많고 보수도 좋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이민이 증가 but 미국경제가 불황에 빠진 1873년에는 이후 수년간은 이민이 급격히 감소 - 이 시기 최초의 대이민(1845∼1854) : 본질적으로 아일랜드와 독일을 대표적인 경우로 하는 기아와, 토지에 비한 인구의 상대적 과잉 압력에서 탈출하려는 시도
▶ 영구적이 아닌 일시적 계절 노동 형태의 이민이 또한 포함 - 경제가 급속히 세계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뜨내기 일꾼들이 필요 - 이러한 형태의 노동을 급속히 확대시킨 것은 철도의 세계적 건설
2. 중산계급의 여행 : 관광
- 관광여행은 기본적으로 철도와 증기선의 산물 - 대중들에 의한 당일 여행은 1851년의 대박람회에 의해서 생겨남 : 무수한 국제박람회가 각기 수많은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새로운 구경거리를 제공, '토산품' 제조라는 소규모 사업의 번영을 가져오기도
▶ 중류계급 여행 : 가족의 여름휴가 여행이나 매년 온천으로 치료차 떠나는 여행이 특징을 이룸 - 영국의 해안이나 유럽 대륙에서 이러한 휴양지가 현저히 발달 - 대륙의 온천장은 도박을 위한 카지노나 상당히 고급스러운 매춘업소 등 사치스러운 오락시설이 마련 - 온천이 부유해짐에 따라 귀족 아닌 부자나 전문직의 중산계급까지도 온천장으로 끌어들임 -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후 이집트는 북방의 습기가 많은 가을과 겨울을 피해 즐겨 찾는 곳이 됨, 반면 지중해는 아직까지 휴양지로 그다지 발달하지 못함
▶ 1870년대의 세계는 이주여행 및 인구유출이 지배했던 시기인가? -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죽어감 - 그러나 점점 그들의 부친이 본적도 없는, 또한 그들 자신도 예기치 않았던 사물에 둘러싸여 사는데 익숙해져 감
제12장 도시·산업·노동자계급
1. 도시
- 공업 자체의 확대와 도시화에 의해 야기된 변화 '자체'가 자본주의가 가져온 충격을 가늠하는 모든 척도는 아님 : 1870년 초 설탕붐의 시기 사탕무 재배면적이 20배 이상 증가한 것이나(오히려 설탕공장에 고용된 노동자 수의 증가는 미미함), 철도 승객의 수가 증가한 것 등 역시 매우 중요한 지표 - 그러나 산업노동과 도시화는 확실히 새로운 생활의 가장 극적인 형태였으며, (철도를 별도로 한다면) 도시는 공업화된 세계의 가장 두드러진 외면적 상징
▶ 이시기 도시화의 특징 1) 범위의 전면화 : 19세기 전반에는 영국, 벨기에만이 도시화율에 있어 두드러지나 1850년 이후에는 이것이 유럽전역에 확대됨 2) 규모의 특징 : 당시의 전형적인 공업도시는 중간규모가 대부분 - 일터는 걸어서 다닐 정도의 범위에 존재 - 노동자들이 반 농업적인 상태에 있었음 : 주변에 농촌지역이 가까이 존재했기 때문 - 인구 20만 이사의 대도시는 공업도시라기 보다는 상업, 교통, 행정 및 기타 각종 서비스의 중심지 3) 도시의 '과밀'과 '슬럼'화 - 철도회사는 땅값이 싸고, 주민들의 저항이 약한 슬럼지구에 간선대와 지선대를 통과시킴. - 지속적이며 대량적인 인구유입 없이 성장하는 재생산 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영국 뿐
▶ 도시화의 진전에 따른 건축과 부동산의 개발 - "투자대상을 찾고 있는 세계의 절반의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돈이 "적당한 주거환경을 찾는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에게 투자 but 그 양자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도시빈민들에게 도움이 되돌려지지는 않음 ; 이러한 건축과 부동산 붐은 부르지아지들을 위한 것 - 노동자 계급에게 돌아갔던 몫 : 가로, 공중 위생시설, 조명, 공공시설과 갖은 일반적 사회지출 - 대중시장을 노리는 사적 기업(건물을 포함)의 유일한 형태는 선술집 : 그 후신으로 극장과 뮤직홀이 나타남
2-1. 산업
▶ 기업형태의 특징 1) 대기업은 그다지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음 : 1850년대에 영국에서는 고용인권 300명 정도의 공장이 대규모적인 것으로 간주됨/ 1871년 영국 면 공장의 평균 고용인원수는 180명, 작업기계는 85대 2) 반면 중공업은 훨씬 대규모적인 형태를 띰 - 철도, 야금회사 등 - 중공업은 한 기업주의 성공과 호의에 주민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는 기업도시를 출현 3) 자기 금융에 의존(예를 들면 한 가족의 자산)하여, 이윤을 재투자하는 형태로 기업규모를 확장
▶ 새로운 기업 형태와 자본조달 방식의 출현 - 이는 철도, 야금 같은 중공업 분야에서 사업규모와 비용이 증가해감에 따라 자본의 조달이 한층 어려워 졌으며, 민간자본이 축적되지 않은 후발 공업국가들이 자본조달을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기 때문 1) 자가 금융에 대신하는 '주식회사 제도'가 고안됨 2) 크레디트 모빌리어(credits mobilier)라는 일종의 산업금융회사가 대유행 3) 투장은행 또는 대리은행이 두드러졌으며, 증권거래소도 전에 없던 성황을 누림
2-2. 노동력 관리의 방식
▶ 노동력 동원과 관리의 방식 : 새로운 노동통제 방식이 아직 안정화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전통적인 군대식·행정관료식 모델이 새로운 제도와 불안정하게 공존 - 19세기 중반의 고용주들은 임금을 되도록 낮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원리로 받드는 자들(임금기금설)이 대부분 - 1860년대 영국 자본주의는 경제 외적인 노동의 강제와 장기고용계약 및 현물지급을 폐지 : 평균 고용기간이 짧아지고, 노동계약 조건도 보다 민감하고 탄력적이 됨 - '도급임금제'와 같은 성과급제도 ·노동자쪽에서는 숙련공들의 저항에 부딪힘 ·고용주쪽에서도 기준산출고를 설정한 일정한 기준을 갖지 못했으며, 모든 직종에 적용시키기가 쉽지 않았음.
▶ 19세기 노동자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가장 큰 특징 : 불안정성 - 주말에 임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주초에 알지 못했으며, 현재하고 있는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 지도 알지 못함 - 중년이 되어 육체노동자로 일을 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이후 어떻게 살아남아야할지도 도무지 알 수 없었음 - 이러한 불안정성은 농민들의 불안정성과 다른 성질의 것 : 진보와 자유에 대한 대가 - 당시에 안정성을 누릴 수 있었던 노동자는 종(servant)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자유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사용인에 한정 : 즉 가내사용인(domestic servant), 철도종사원(railway-servant), 공복(civil servant) 따위에 불과
▶ 이러한 불안정성의 요소를 폭발점 이하로 묶어 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 - 경제적 확장이 부단히 존재하는 불안정성을 경감 : 유럽에 실질임금이 상승했다는 증거는 없었으나, 시대의 사정이 호전되고 있다는 여론이 일반적 - 그 진상은.. : 경제적 붐이 국내에서나 해외로 이민간 사람들에게 대해서나 전대미문의 규모로 취업의 기회를 열어놓았다는 것
▶ 정리 : 노동자들의 통제하는 노무관리의 방식 1) 숙련노동자들 : 어느 정도 높은 임금과 정규적인 고용의 혜택을 누리는 유능한 노동자들 - 이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주요 구성원이 됨 ; 조합의 존립을 실제로 가능하게 하고 교섭할 수 있을 만한 힘을 당시에는 이들만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 ; 명령이나 감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실제로 노동조합을 제외하고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음 2) 대다수의 비숙련 노동자들 - 조직되지 못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노무관리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제공 : 즉 극도의 노동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그들은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으며,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음
3. 노동자 계급 ※ 질문 : '노동자들'을 단일 범주 혹은 단일 계급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 하나의 '경향' - 노동자들은 중산계급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난이 공통점은 되지 못함 - 그러나 노동자들은 육체노동과 착취에 대한 공통된 의식으로 실상 단결되어 있었으며, 이 단결은 임금소득자라는 공동운명에 의하여 점점 더 강화 - 사회적 양극화와 아울러 공통적인 생활 스타일과 사고 스타일(이는 '노동자의 교회'라고 일컬었던 선술집이 매개가 됨)에 의하여 자신들의 공통성을 자각 : 의식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말없는 가운데 세속화되었고, 의식이 강한 자들은 급진주의자가 되었고, 1860-70년대에는 '인터내셔널'을 지지하였으며, 그 후에는 사회주의를 따름 - '인터내셔널'의 존재자체는 이러한 프롤레타리화(노동빈민이 하나의 단일한 계급으로 되어가는 경향)를 기반으로함. - '노동빈민'들은 19세기 초반의 시기에 균질적인 대중으로 융합한 경험을 지님
▶ 또 하나의 경향 : 이러한 균질성이 이 시기에는 해체되기 시작 - 번영과 안정을 향유하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는 '노동자 계급'에게 집단적 조직에 의하여 노동자 공동의 운명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 - 역설적으로 이러한 상황이 노동자 개개인에게 부르주아적 관점의 진보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제시하였고, 노동조합은 대체로 혜택 받는 소수자들의 조직이 됨 : '노동자'와 '빈민'의 분열 - 이 시기 개인적 상승과 집단적 향상 사이에, 중산계급을 모방하는 일과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중산계급을 패배시키려는 것 사이에, 선을 그어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
1) 유능하고 지적인 '존경받는' 노동자 : 노동귀족 - 중산계급의 사회지배와 산업규율을 떠받쳐주는 기둥 역할을 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집단적 자기 방위의 가장 활동적인 핵심부대로 역할 - 이미 자본주의는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대혁명(파리코뮌)은 흘러가는 시대의 마지막 물결로 여겨짐 - 영국의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하층관료층은 '자유당'이 대중적 정당으로 번신(飜身)하는데 한몫을 하였으며, 유례 없이 강력히 조직된 노동조합운동의 중핵을 이룸 2) 그 이외의 노동자 - 이들 노동자들이 빈곤과 불결 속에서 생활하였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음 - 실상, 비숙련직종 또는 육체 노동 부문에 조직화의 손을 뻗친다는 것은 당시로는 불가능
▶ 예외적 상황 1) 독일 : 가장 체통있는 노동자들도 프롤레타리아의 지위로 밀려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독일의 노동자들은 1860년대에 새로 생겨난 '자기개선협회'에 몰려들었고, 중산계급적 자유주의로부터 재빨리 일탈→이러한 노동자들이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대 이후에는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핵심이 됨 2) 혁명만이 노동빈민들의 처지에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유일하게 여겨진 지역, 또 프랑스처럼 반란과 혁명적 사회공화국의 전통이 노동자들 사이에 지배적인 전통이 되어 있는 곳에서는 다소 다른 경향을 나타냄
제13장 부르주아의 세계
1. 물질과 정신의 이중성
○ 부르주아의 세계는 물질(욕망)과 정신(도덕)이 분리된 이중성의 세계였다. : 부르주아 세계의 정신과 이상은 물질을 매개로 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으며, 가정에서의 물질적 치장과 내부장식 등은 부귀와 지위, 출세의 표현이었다. : 이러한 물건들은 튼튼해야 했고 또 한편으론 아름다워야 했는데, 이는 물질적인(육체적인) 것과 이념적인(정신적인) 것의 이중성을 반영하는 것. : 물질과 정신의 이중성은 '위선'을 의미하며, 이러한 위선이 부르주아 세계의 기본적 특질이었다. 공식적인 도덕과 인간의 욕망 간에는 메워질 수 없는 괴리가 있었기 때문.
○ 성에 대한 위선 : 부르주아의 위선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이 '섹스'의 문제. 청교도적 윤리를 설파하면서도, 뒤로는 혼외정사를 즐기는 부르주아. : 한편에서 부르주아의 성도덕은 유지되었고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부르주아 문명은 본능적인 충동의 억제 위에 존립하는 것.
○ 소비와 금욕의 딜레마 : 부르주아지는 소비하려는 욕망과 금욕적 윤리 사이에서 곤란을 겪어야 했다. : 일하지 않는 부르주아가 늘어나면서, 부르주아지로서는 돈을 쓰는 일 이외에 달리 승리의 전과를 과시할 길이 없었다. : 노력과 향락은 공존하면서 서로 충돌. 성문제는 이러한 모순의 희생물이었으며, 위선이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2. (자율적) 부르주아 사회구조와 (위계적인) 가족구조의 모순
○ 부르주아 사회는 왜 가부장독재를 유지했는가? (부르주아 사회의 논리에 따르면 오히려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파괴하거나 변혁시킬 만도 했는데..) :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단위인 핵가족제는 '가부장 독재'인 동시에, (부르주아지가 규탄하고 폐기시키려 했던) '개인예속적 위계질서제의 축소판'이었다. : 아내는 남편보다 열등한 존재인 동시에, 하녀들을 다스릴만한 지배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 이상적인 부르주아 가정의 구조는 위계질서로 구성된 많은 여성들 위에 남자가 군림하여 여자들을 지배하는 구조. 여기서 하인과 고용주의 관계는 전인적인 종속적 관계였다. : 가족 내부에서는 결코 자유나 기회, 금전적 관계와 개인적 이익추구(부르주아지의 윤리)가 지배적이지 않았다. 왜 그러할까? : 자본주의의 본질적 불평등성이 가족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현되는 것. 가족 내에서의 개인적 우월성은 불완전한 것. 그러한 우월성을 영속적이고 확실한 형태로 하기 위해 가부장제를 강화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 이 시대에 이상형 부르주아 가정은 한결 더 강화되었다. 왜? (가부장제도의 강화는 이 시기에 조직적 페미니스트 운동이 비로소 시작된 배경)
3.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란 무엇인가?
: 경제적으로 볼 때, 전형적 부르주아지는 '자본가'(재산소유자, 자유전문직, 고위관료 포함) : 정치는 현역(혹은 은퇴한) 부르주아 자신들에 의해 직접 움직여졌다. 부르주아지들은 시평의회, 시장직, 지방평의회 등 하층 정치권력을 공략하여 정복했고, 19세기말 대중 정치가 등장할 때까지 그것을 계속 지배해 나갔다. : 중산계급에 대한 사회적 정의는 명확하지 않다. '상한'과 '하한'을 정하는 것은 애매한 일. 귀족집단의 법률적 사회적 폐쇄성 때문에 귀족과의 구분은 용이. 부르주아지와 하층을 구분짓는 기준은 명확히 경제적인 성격의 것.(독립수공업자, 소상인, 부유농민, 화이트칼라는 부르주아지가 아니었다) :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출생·신분'과 무관한 집단이라는 점.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재산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한 개인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진 인물. : 동창회나 비밀결사와 같은 자신들만의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프리메이슨은 중산계급의 인터내셔녈"이었다. : 대중운동 대신에 압력단체 조직. 예) '곡물법 반대동맹' : 부르주아지의 집단의식(공통의 사상) - 자유주의. 질서와 양립되는 한도 내에서 진보와 대의정치, 일정한 범위의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신봉. 문화를 신봉. 절제와 중용의 미덕에 대한 신념. :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부르주아가 그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율적인 인간이었다는 점. (집이든 공장이든) '명령권의 독점'은 부르주아지의 자기규정에 있어 결정적인 사항이었다. : 계급에 관한 생물학적 우월성 이론 신봉.
4. 부르주아는 지배계급이었나? : 자기 소유지역의 주민에 대해 법률상 사실상 국가권력을 행사했던 지주들에 비하면, 분명히 지배계급은 아니었다. 부르주아는 국가권력과 행정기구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었음. 즉, 공식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었다. : 부르주아가 정치에서 행사했던 것은 헤게모니(주도권)이었고, 점차로 정책에 대한 결정권을 증대시켜 나갔던 것. 그것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의 경제적 제도적 강령의 실현과 부르주아지가 국가에서 점하는 결정적 지위의 현실화였다. : 사회주의자들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는 길은 온전히 발달된 자본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구 지배세력은 더 이상 부르주아 사회와 부르주아 사상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됨. (중앙유럽과 동유럽의 농노제 폐지와 명목상의 대의정치제도 도입) : 이 시기 부르주아지의 승리는 의심과 동요의 여지조차 없는 것으로 보였다.
제14장 과학·종교·이데올로기
1. 진화론의 의의
○ 철학이 천대받던 시대 : 이 시대의 교양인은 모든 지적활동을 과학에 종속시키고자 했다. 철학자에겐 행복한 시대가 아니었음. : 프랑스의 실증주의(실험과학의 재래적 방법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던 것)와 영국의 경험주의는 철학을 과학에 종속시킴. → 과학의 진보에 의해 철학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으며, 철학의 역할은 과학자를 돕는 일종의 지적실험실에 불과할 것이었다.
○ 과학에 대한 자신감 : 과학에 대한 확신은 이 시기의 성과를 거의 최종적인 성과로 받아들이게 함. 자연법칙에 관한 결정적 이해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 과학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 나아갈 뿐이라고 생각됨.
○ 진화론의 반향 : 이 시기 자연과학 발달의 결정적인 중요한 이론은 진화론. : 다윈의 진화론이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개념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 경제에서 가장 낯익은 개념인 '경쟁'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 :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이론은 생물학의 범주를 뛰어넘어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모든 과학에 대한 역사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역사'를 '진보'와 혼동하고 있었다) 진화론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확연한 구분을 철폐시킴. : 우주는 부단한 역사적 변화의 과정으로 파악되어야만 했고, 인간도 진화의 과정에 포함되기에 이름. : 자연선택설의 크나큰 공적은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종의 기원'을 설명했다는 것. → 이는 사상사들로 하여금, 역사적 변화를 지배하는 다양한 과정들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인간사회를 생물학상의 진화의 법칙으로 환원시키려는 유혹에 빠져들게 하는 경향을 낳기도 함.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전통 및 보수주의 세력과 충돌한 까닭에 극적인 이론이었다. 진화론은 인간의 특별지위를 박탈한 것이었고, 진화론에 대한 반대가 심했다는 것은 전통주의와 종교조직의 힘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 :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신속히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1) 자유주의적 진보적 부르주아지가 급격히 대두되었다는 사실과 (2) 혁명이 없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 즉, 전통적 세력에 대한 도전이 강력했지만, 그것이 사회적 동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음. : 진화론은 사회주의자의 즉각적인 환영을 받았다.
2. 인종주의의 성장 ○ 마르크스 : 이 시기에 사회구조와 사회변동에 관한 포괄적 이론을 전개한 유일한 사상가(부르주아 사상가들은 시장경제의 작동에 의해 문제들이 해결될 것으로 믿었으며, 사회적·정치적 측면에서는 자신들의 세계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사회란 '사회유기체'였으며, 이는 사회의 모든 집단이 기능적으로 협력한다는-계급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상이었다.) : 마르크스의 과제 - 前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에 대한 성격 및 역학관계, 자본주의 특유의 운동양식 및 미래의 발전경향을 밝히는 것. : 마르크스가 경제분석을 역사적 사회적 관계로부터 분리시키는 경향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음.
○ 인종주의 : 오늘날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종주의가 당시의 사상 속에 깊이 침투해 있었음. : 문헌학과 인류학은 전형적으로 '진화론적'인 사회과학이었음. 그러나 이러한 학문은 인종주의의 성장에 기여하게 됨. : 인간의 혈통과 사회의 여러 형태를 연구한 인류학에 의해, 자연스럽게 '인종'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으며, 인류진화에 관한 연구는 인종적 우열에 관한 견해를 만들어내게 됨. : 상이한 문명발달은 상이한 인종적 특성(즉, 우열)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됨. 타인종은 생물학적 진화 내지 사회문화적 진화의 초기단계를 대표하는 까닭에 열등한 것이며, 우수인종은 기술적 선진성, 군사적 힘, 부유함 등에 앞서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열등인종의 열등성이 증명된다는 논리. 이는 가난한 자들을 생물학적 열등인자로 규정하는 논리로 이어짐. : 백인의 유색인종에 대한 지배와 부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기능. : 기본적으로 불평등한 사회가 그 불평등성을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이었고, 민주주의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될 특권계층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메커니즘이었다. : 평등과 민주주의로부터 자신을 방위할 논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자유주의가 구축한 비논리적 장벽이 '인종'이었다. : 그러나 이 시대의 과학은 인간의 불평등성을 증명하지 못했다. 인간 진화의 역사는 오히려 '후진성'이 항구적이지 않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었음. : 사회적 다윈주의, 인종주의적 인류학(생물학)이란 과학이 아니라 정치학에 속하는 것이었음.
3. 종교
○ 종교를 약화시키는 힘 : 종교가 쇠퇴하던 시기였으며, 적극적인 공격을 받게 된 시기. 그러나, 종교에 대한 공격 그 자체가 무신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 반교권주의의 목표는 종교가 누려온 공적 지위를 박탈하고 종교를 순수히 사적인 일로 돌리려는 것. 즉, 국가의 활동분야로부터 종교를 추방하려던 것. : 반교권주의는 기성종교가 진보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당시 로마카톨릭교회는 19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모든 것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함)
○ 종교의 쇠퇴를 저지하는 힘 :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적당히 겸손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종교의 기능이 필요했다. : 지적영역에서 종교가 전면적으로 패배한 것에 비교할 만큼, 대중종교가 쇠퇴한 것은 아니었음. 중산계급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신자였다(적어도 위선적인 신자) : 중산계급에 있어선, 정서적 대용물이 제공되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의 쇠퇴가 저지되었음. 대중에 있어선, 인구의 증가가 교세 확장의 원인이 되었음. : 기독교 내부로부터도 세속화에 대한 반격의 조짐이 등장 → 농촌지역에 대한 공략. 복음화운동 등
제15장 예술
1. 질적 후퇴의 시기 : 이중혁명의 시대의 탁월함에 비할 때, 이 시대의 예술은 큰 감명을 주지 못했고 신통치 못했다. 러시아는 두드러진 예외
2. 예술이 성황을 이루고 예술에 맘껏 돈이 뿌려진 시기 - 대중예술의 시대 : 예술에 투자한 사람은 종래의 왕후귀족들이 아니라, 정부, 공공단체,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음. 산업기술의 발달로 하층민들이 점점 더 많은 예술품을 싼값에 입수할 수 있게 됨. 이는 대량복사가 가능해진 것에 기인. : 예술에 대한 대량시장이 존재하게 됨. 이는 기계적 복제기술의 발전으로 전통적 수공예품의 가격이 하락한 사실과 하층 대중들도 예술의 고객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
3. 예술가를 부자로 만든 시기 : 예술가들은 물질적 풍족의 가능성뿐 아니라 사회적 존경까지 누릴 수 있게 됨. : 예술가들에게 기대된 것은 '정신적 내용의 공급처'로서의 역할.
4. '양식'이 사라진 시대 : 이 시대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도덕적·이데올로기적·미적' 양식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 절충주의가 판을 친 시대.
5. 사실주의의 시대 : 19세기 중반의 예술은 '현실과 생활'을 말하려 했다' : 부르주아 시대의 특징적 예술형식인 소설은 '현실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황을 이룸. 이 시대 예술의 최고의 성과는 소설.
6. 대중을 위한 예술이 실현된 시대 : 복제기술의 발전에 따른 것. : 대중신문의 간행은 문화적 혁명을 의미. : 대중은 근대적 부문과 전통적 부문으로 분열. : 중산계급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아래쪽으로 전파되었다.
제16장 결론
○ 자유주의의 시대는 혁명의 패배와 함께 시작되어, 장기화된 불황 속에 막을 내렸다. : 그러나 어떤 절정에 이르러 끝난 것은 아니다. 그 역사적 분수령은 1871년부터 1879년 사이의 어느 때이다.(홉스봄이 1875년을 택한 것은 특정한 사건이 그 분수령이 아니라는 점에서였다.) ○ [자본의 시대]에서 [제국의 시대]로의 변화 : 제한없이 경쟁하는 사기업→거대산업체(카르텔, 트러스트 등)로 : 정부 개입의 전무→정부의 적극적 개입으로 : 맨체스터주의(정통적 자유무역주의)의 시대→판이한 정책관행의 시대로 : 개인주의의 시대는 1870년으로 끝이 나고 '집산주의'의 시대가 시작된 것.
○ 자본주의 경제의 변화 ① 새로운 기술의 시대로 : 새로운 동력원과 새로운 재질 등에 기초한 새로운 산업의 시대로 ② 국내소비시장에 점점 더 의존하는 경제로 : 대량생산시대로 ③ 제국주의 시대로(새로 대항하는 국민경제들간의 국제경쟁의 시대로) : 넓은 의미에서는 경제체제의 구조적 변화를, 좁은 의미에서는 선진국 지배하의 세계경제에 저개발국을 종속적으로 통합시키는 움직임을 의미. : 선진지역에서 구할 수 없는 원료들이 점차 중요성을 띠게 된 사정에서도 기인. ④ 발전이 곧 종속을 의미하는 발전/종속의 유형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름.
○ 정치적 변화 : 문자 그대로 자유주의 시대의 종결 - 영국의 휘그당이나 독일 오스트리아의 경우와 같이, 자유당은 정권을 내놓아야 했음. : 점점 더 강력하고 매사에 간섭하는 국가를 요구 : 불황에 따라 보호정책을 요구하는 압력이 강화된 한편, '자본가'로부터의 보호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정치적 힘으로 성장.
○ 새로운 경제적 불황기의 혼란과 긴장이 초래한 새로운 정치동향 ①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독립된 노동자계급의 정당과 운동의 출현(독일사회민주당이 가장 두드러진 예) ② 반자유주의·반사회주의적 정당의 출현(1880-90년대, 범게르만주의적 국가주의자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사회주의) ③ 민족주의적 대중정당과 운동이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의 테두리로부터 해방됨. : 그러나, 선진국들의 정치가 지닌 기본유형("마지못해 점진적으로 민주주의적 입헌제로 접근해가는 추세")을 무너뜨린 것은 아님. : 다만,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대중정당의 출현은 정부를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했다.
○ 경제적·정치적으로 자본주의 세계구조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대불황은 일시적 국면(막간극)이었으며,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신의 경제적·정치적 자유주의를 수정하면서 작동해나갈 여유가 있었던 것. 진보는 확실히 지속됐다. : 다만, 러시아에서는 '대불황'이 목전에 다가선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제국의 시대』(1875-1914)
역자의 글: 파국에 처한 부르주아의 세계
* 제국의 시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배태시킬 수밖에 없었던 모순이 지배한 시대;'자본의 시대'에서 그려진 '승리하는 부르주아'의 낙관이 갑작스럽게 붕괴된 시대; '제국의 시대'는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된 임금노동계급의 운동이 대중적으로 조직되어 출현하면서 자본주의의 전복을 요구했던 시대(자본의 시대가 낳은 모순의 산물); '승리하는 부르주아'의 이미지는 이자소득과 식민지 민중의 노동력 착취를 근거로 살아가는 기생계급의 이미지로 바뀌어버렸다. -제국의 시대가 현재 생존해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개인사들과 현재의 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제국의 시대'와 현재가 객관적인 연구에 필요한 적절한 시간적 거리를 결여하고 있다; '제국의 시대'는 역사에서 여명의 지대; 여명의 지대란 역사와 기억, 혹은 기록으로서의 과거와 사람들의 경험적 기억으로서의 과거 사이에 위치한 시간대, 공적이고 사적인 종착점들이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까닭에 중립적인 시각에서 고찰하기가 힘든 시기; 그렇기 때문에 脫신화화를 요구받는 시대; 개인들의 기억이 갖고 있는 불투명한 편린들을 극복하고 시대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객관적인 위기의 경향은 불가피하게 드러났지만 주관적인 의식은 낙관에 지배되고 있었던 것이 특징 -자본주의 일반의 붕괴라기 보다는 19세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붕괴
*19세기 후반의 세계 - 이중혁명 이후 100년이 지난 시대 - 지구적인 세계인 동시에 분화된 세계; 발전된 세계와 저발전된 세계 사이의 간극의 강화; 기술로 인한 간극의 강화; 기술(과학)혁명이라 불릴 만한 생산력의 발전; 그 결과 식민지 정복의 활발 - 1880년경의 유럽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기원적인 핵심부이자 세계경제와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 홉스봄의 관점이 유럽중심적이라고 비판받는 지점 - '제2세계'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의 범주인 것인 '19세기 역사의 희생자들이라는 종속성' - 지배와 피지배(발전과 저발전)를 가르는 차이는 산업이나 전통의 존재유무(경제적 차이)만이 아니라 정치적 차이, 문화적 차이를 고찰해야 한다는 홉스봄의 생각; 그러나 홉스봄의 결론은 양자간의 차이를 한마디로 딱 부러지게 규정하기 힘들다는 것;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과 상반되는 것, 중심부의 경우에 '진보'는 전통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가공하면서 진행된 것, 반대로 제2세계의 경우 '저발전'은 전통의 존재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중심부에 편입된 결과로서 나타난 것 - '진보'는 진보된 지역에서조차 그다지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 시대는 장밋빛이 결코 아니다. 진보는 역설적으로 체계적인 인종차별을 동반했다; 부르주아 세계의 진보에 대한 회의가 지구 곳곳에서 출현한 것은 당연했다
* 파국에 처한 아름다운 시절 - 공황(1873-1890년대 중반); 불황의 특징은 무역의 침체와 생산의 지속적인 증가라는 상반된 현상; 근본문제는 생산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획득 가능성의 문제 - 가격, 이윤, 이윤율의 공황의 영향; ·농민; 곡물가격 하락과 자연재해의 이중적 재앙; 대량이민(토지가 없거나 빈농; 사회적 압력을 반란이나 혁명의 분기점 이하로 유지시키는 안전판)과 협동(잠재적으로 상당 규모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농민; 소농들에게 적당한 대부를 공급하는 방식) ·기업;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이자율 삭감; 생산규모의 초과확대와 소비재 제품을 위한 대량시장이 아직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의 대응; 보호관세; 영국만이 자유무역 유지(자본수출국으로서 서비스산업이 발달했던 까닭); 민족경제론에 입각한 보호무역주의는 적절한 산업국가들(방어능력을 가지고 있는 '발전된' 세계의 일부에만 적용가능)에서 나타난 현상; 그러나 보호주의란 상품무역에 한정된 것이었고 노동력의 유동이나 국제적 금융거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공황에 대한 자본주의의 가장 의미깊은 경제적 대응양식은 경제적 집중과 기업 합리화의 복합으로서 '트러스트'와 '과학적 경영'이었다 - 호황으로 전환(1890년대 중반부터-제1차 세계대전); ·'아름다운 시대'라 불릴 정도로 풍요를 구가; 세계경제력과 지도력의 재배치, 경기변동이 경제학의 핵심문제; 영국의 상대적 하락과 미국과 독일의 약진에 관한 문제; '장기파동'에 대한 최초의 고찰인 '콘드라티예프 주기'가 만들어짐; ·그러나 홉스봄의 관심은 누가 더많이 더빨리 성장했는가가 아니라 전체적인 지구적 규모의 성장 그 자체; 제국의 시대가 보여주는 세계경제는 1) 지리적으로 이전보다 아주 넓어진 기반을 가진 경제, 2) 이전의 어느때보다도 다원주의적, 3) 진정한 의미에서 기술혁명의 시대, 4) 자본주의 기업들이 구조 면에서, 작동 양식 면에서 이중적으로 전환, 5) 소비제품 시장에서 대량소비의 등장, 6) 경제의 제3부분, 공적이고 사적인 사무실, 가게, 그리고 다른 서비스 부분에서의 노동의 절대적인 그리고 상대적인 성장, 7) 정치와 경제의 점증하는 수렴 ·제국주의의 경제적인 동기; 식민지 확보는 보호주의의 확장이 갖는 자연스런 결과물이었다; 정치적 보조를 통해 경제적 작동을 도와준다는 보호주의적 목적을 요구했던 정치적 행위로부터 분리되기 어려웠다 ·제국의 시대는 '서구화'를 가져다 줌으로써 식민지 사회를 변형시켰다. ·중심부 나라의 지배계급과 중간계급은 서로 적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 자체에 서로 공감했다 ·대중선거주의의 정치; 민주주의의 조작; 체제내화; 비합리성의 정치적 중요성; 노동자 계급 정당들의 등장; 정치에서 민족주의의 등장 ·부르주아의 유한계급화 ·여성해방의 시작 ·중심부에서는 황금의 시대, 사회와 정치제제의 관리가 가능하다고 낙관한 시대였으나 주변부에서는 혁명의 시대
* 장기 19세기의 종결과 단기 20세기의 전망 - 1914년 이전과 이후; '재앙'의 의미가 달라졌다. - 볼세비즘의 위협, 그러나 세계는 사회주의로 전환되지 않았다. 혁명은 오히려 세계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는 보루로 남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회는 사라지거나(파시즘) 스스로를 무력화(존 케인스) 시켜야 했다. - 장기 19세기는 비록 자유주의적인 진보였지만, 부르주아는 멈추지 않는 물질적.지적.도덕적 진보를 기대, 내용은 다르지만 동일한 종류의 희망이 그것에 적대적인 계급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공유되었다. 양자 모두가 그것을 기대했다. 단기 20세기는 부르주아에게서나 프롤레타리아에게서나 과거에 추구되었던 내용의 희망이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고 단정. 19세기 역사가 그랬듯이 미래의 역사 또한 현재 사람들이 희망한 것과 아주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머리말
- 역사적인 여명의 지대 - 1914년의 시점; 레닌 44세, 스탈린 35세, 루스벨트 30세, 케인스 32세, 히틀러 25세, 아데나워 38세, 처칠 40세, 간디 45세, 네루 25세, 마오쩌둥 21세, 호치민 22세, 티토 22세, 프랑코 22세, 드골 24세, 무솔리니 31세; 1977년 출간된 '근대사상사전'에 뽑힌 인물들 중 45%가 1914년에 성인이었거나 1880-1914년에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20세기를 통틀어 커다란 줄기의 4분의 3을 형성해온 남성과 여성들이, 근대 시기와 그 다음의 현대 시기에 이르는 전체적인 사상의 형성에서 제국의 시대가 단연코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다고 판단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명의 지대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대중매체의 편견에서 핵심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제국의 시대는 脫신화화를 요구받고 있다.
제1장 혁명 100주년
1 - 미국혁명 100주년(1876)/프랑스혁명 100주년(1889) - 1880년대의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 세계적; 세계 대부분의 지역이 알려지고 지도화; 탐험은 더 이상 '발견' 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시도; 일종의 경쟁 경기; 1914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완성, 철도와 증기선, 전신의 발달(예; 1879년 거의 100만명의 여행자들이 스위스를 여행했다) ·인구밀도가 훨씬 높아진 세계; 15억 정도, 1780년대의 두배 정도라는 가정; 아시아〉유럽〉아프리카; 인구적으로는 커지고 지리적으로는 작아지고 더 지구화되어갔다. ·불균형과 분화의 시대; 1780년대 무렵에는 문화, 생산과 부의 측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르러 발전된 세계와 나머지 나라들 간의 차이는 처음에는 매우 완만하게 나중에는 매우 급속한 속도로 벌어져갔다(예: 1913년에는 중심부 국가의 1인당국민총생산이 제3세계와 비교해 최고의 경우 약 일곱배 가량 차이); 간극의 원인은 기술. ·유럽의 시대; 제2세계와 비교해볼 때 제1세계의 후진지역조차도 진보된 것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미국보다 두 배 이상의 산업적 성과물; 자동차, 영사기와 무선들은 유럽에서 최초로 의미 있는 발전; 유럽의 문화와 지적인 삶은 잘살고 교육받은 소수의 전유물이었으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엘리트주의적인 문화적 성취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박물관과 개방도서관). ·제2세계 전체는 종속적이고 후진적인 지역, 동일한 범주라고는 하나도 공유할 것이 없는 이 사회들을 역사의 희생자들로 위치지은 것은 종속성
2 - 분화된 세계의 정치적 차이 ·'진보된' 나라를 상정하는 일반적인 모델; 자유주의적 입헌 민족국가; 국제적으로 주권을 가진, 국가적 경제발전의 기초를 제공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크며, 광범위하게 자유주의적이고 대의적인 종류의 법적·정치적 제도들의 단일한 틀을 가진, 어느 정도 동질적인 영토국가를 형성해야 한다. 또 하위 차원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지역적 자율성과 주도성을 가져야만 하고, 그것은 '시민들'로 구성돼야 한다. 이 시민은 기본적인 법적·정치적 권리를 확실하게 향유하는 영토 내 개인 거주자들의 집합, 민족정부에 대해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며 다른 어떠한 집단에 의해 매개되어서는 안된다. ·비발전된 세계; 대부분이 이러한 형태의 국가, 유사한 국가조차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유럽에 의한 식민통치를 받거나, '국가'라 보기에 부적절한 정치적 단위로 구성되어 있거나, 오래된 고대 제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치적 민주주의; 국제정치 측면에서 '주권국가'로 취급되는 나라; 1875년 무렵 유럽에는 17개 이하, 미대륙에는 17개, 아시아에는 4-5개, 아프리카에는 3개; 아메리카 바깥의 나라들 대부분은 실질적으로는 군주국으로 존재(유럽에선 스위스와 프랑스만이 예외); 스위스, 프랑스, 미국, 덴마크를 제외하면 대의제 국가들 중 어느 것도 민주적인(배타적인 남성투표) 투표에 기초해 있지 않았다; 유럽 바깥의 나라들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는 원주민들의 박멸로 나타났다; 라틴아메리카의 공화국들은 군사 쿠데타의 경향, 문맹자들이 선거권을 박탈당해 ·공식적인 이론상으로는 불평등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 발전된 세계의 성인 남성이 법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란 범주로 자리잡아; 법적인 농노제와 노예제의 소멸; 이제 사회적으로 배타적인 특권의 분배를 결정하는 것은 출생이나 법적인 자유혹은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재산상의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 ·문화적인 차이; '발전된' 세계에서는 압도적인 수가 문맹 탈출, 고대종교와 전통주의, 미신의 주술로부터 해방, 과학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독점; 대중교육의 확립; 대학과 오페라하우스는 '발전된' 지역들의 정형
3 ·발전 지역에서의 진보; 명백하고 부정될 수 없는 사실; 기술의 승승장구와 가시화; 철도와 전신, 발명, 빠르고 대중적인 통신수단과 물질적 생산능력; 진보된 세계에서조차도 부는 매우 불균등하게 배분되었지만 평민들의 생활조건상에서도 어느 정도의 개선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근대적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경제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곧 도래할 것이었다; 도덕통계학-문자해독률 상승, 편지와 신물과 잡지 발행 증가, 과학연구자 증가 ·비발전 지역에서의 진보에 대한 부정과 참여에 대한 주저; 새로운 것이란 옛날의 정착된 방식을 방해하는 그 무엇으로 간주; 진보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외래의 것과 비종교적인 가치를 자신들과 동일시하는 아주 소수의 지배자들이나 도시인들 ⇒따라서 세계는 '진보'가 내생적이었던 보다 작은 부분과, 소수부역자들의 협조하에 외국인 지배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보다 많은 부분으로 나뉘었다. ⇒서구 부르주아에 의해 정초된 사례를 따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했고 또 거부했던 것에 대해 1세계 주민들은 '생물학적 이유로 인해 획득할 수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인종'에 의한 인류의 구분; 생물학을 통한 정당화와 백인과의 통혼 ·진보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근본적인 진보의 딜레마; 유례 없는 팽창의 세대 뒤에 세계경제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제2장 경제가 속도를 바꾸다 1 - 공황(1873-1890년대 중반); 엄청나게 생산성이 증가했던 시기(예; 강철생산 1870년에 비해 20배 가량 증가);그런데 왜 공황인가?; 생산이 아니라 '이윤획득 가능성'이 문제였다. ·농업; 가장 심각한 공황; 넘쳐난 농업생산물의 가격하락과 자연재앙; 세계시장에 결합되어 있었던 어떤 나라의 농부들이나 영향을 받음; 정부적 대응 1) 농민이 없는 나라는 그냥 방치, 또는 농업근대화, 또는 농산물 가격 유지를 위한 관세 채택; 비정부적 대응; 대량이민과 협동 ·기업;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이윤율 삭감; 시장의 팽창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신기술 발전으로 인한 엄청난 생산증대를 소화할 더 큰 시장은 충분히 확대되지 못했다; 생산비용이 단기적으로는 상품가격보다 훨씬 비유동적이었다-임금은 감소되지 않았고, 낮은 이윤속에서의 설비와 장비 교체 비용 부담, 은 가격의 하락과 은과 금의 교환비율 불안정; 가격·이윤·이윤율의 공황 ·정부; 보호주의; 공황은 상품무역의 문제에 관한 한 오랜 경제적 자유주의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자본주의 이론가들의 이념인 자유주의에서는 그 위에 국가가 설 자리가 없었고, 오히려 시장의 자율적이고 자동적인 작동을 방해하는 그 무엇이었다. 경제의 최대한 성장을 보장해주는 것은 국제적 노동분업이었다; 그러나 이 모델은 실천적으로는 부적절했다. 진화하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유동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단한 블록(국민경제로 구성된)들의 집합체였다; 초국가적 기업들조차도 자신들에게 맞는 적절한 국민경제에 달라붙어 있는데 신경을 써왔고 거기서 번영했다. 그러나 이것은 경쟁에 대항하여 산업화되어가고 있는 자국의 경제를 방어할 능력이 있는 '발전된' 세계의 일부분에만 적용될 수 있었고 종속된 국가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시기의 보호주의는 일반적이지 않았고, 상품무역에 한정된 것이었고 노동력의 유동이나 국제적인 금융거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보호주의는 공황에 대해 두려워하는 생산자들의 본능적인 정치적 반동이라고 규정할 수는 있지만 공황에 대한 자본주의의 가장 의미 깊은 경제적 대응양식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공황에 대한 자본주의의 경제적 대응양식; 경제적 집중과 기업 합리화의 복합-트러스트와 과학적 경영; 경쟁과 가격하락으로 인해 상실된 이윤 폭을 확대시키려는 시도; 무제한적 경쟁 추세로부터 단독으로 움직이던 다수의 자본가들의 합병 경향(독점과 과두제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것도 불가역적인 것도 아니었다; 미국의 석유와 강철산업부문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경쟁이 발생했다. '독점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1914년의 시점에서 볼 때는 잘못된 것이었다. ·과학적 경영; 테일러주의;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는 기업을 만들기 위해 통제, 감시, 작업 프로그램에 대한 보다 합리적, 과학적 방식의 요구; 1) 각각의 노동자들을 노동집단들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노동과정의 통제를 노동자들(노동집단들)로부터 빼앗아 그것을 지시하는 경영 대리인에게 넘겨주는 것, 2) 각각의 과정들을 체계적으로 단절시켜 시간에 의해 규정된(시간과 동작 학습) 부분 요소들로 전환, 3) 노동자들에게 성취욕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임금 지불체계를 만들어내는 것; 1914년 이전에는 진척되지 못했으며 1차대전 직전에야 익숙한 슬로건이 되어갔다; 근대적인 기업 조직과 관리라는 '보이는 손'이 익명의 시장을 대체; 법인 혹은 콘체른이 개인들을 대체 ·공황의 부산물; 제국주의- 영토의 확장은 상업의 팽창이 낳은 부산물; 거대한 사회적 선동
2 -아름다운 시대(1890년대 중반-1차 세계대전) ·우려에서 행복감으로의 변동; 갑작스럽고 극적인 것; 마르크스의 원리에 대한 논쟁 ·경제연구의 집중 경향; 하나는 경제력과 지도력의 재배치 문제(영국의 상대적 하락, 미국과 독일의 약진), 다른 하나는 장기파동에 관한 문제 ·중요한 문제는 성장하는 세계 경제 내에서 누가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성장했는가가 아니라 전체적인 지구적 규모의 성장 그 자체; 지속적인 생산혁명에 의해 성장하는 세계의 산업부문과 지리적으로 새로운 생산지역의 비연속적 개방에 의해 혹은 수출산업에서 새롭게 특화된 지역에 의해 주로 성장했던 세계의 농업부문 간의 관계; 세계 농업생산 성장률의 속도는 지속적으로 낮아졌고, 무역의 측면은 농업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공업에 대해서는 비우호적으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이같은 변화는 산업의 생산비용과 그에 따른 이윤율의 상승폭에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했고, 그같은 압력을 이윤으로부터 노동자들에게로 옮아가게끔 경제가 구성되어 있었다; 노동자의 실질임금 하락과 무거운 사회적 긴장 ·무엇이 세계경제를 이같이 역동적으로 만들었는가?; 문제의 핵심은 발전된 국가들; 이들 나라에서 세계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주요한 대중적 구매자 창출; 대중고객들의 집단적 중요성 인식, 광고산업 발전, 할부판매 고안; 세계인구에서 유럽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증가; 발전된 국가들이 세계시장의 80%를 구성했고, 그들이 세계의 나머지 부분의 발전을 결정했다; 나머지 세계의 경제들은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 위성경제들이 잘하면 잘할수록 더 많은 혜택이 중심의 핵심부 경제에 돌아갔다
3 -제국의 시대가 보여주는 세계경제의 요약; 앞서 언급했음
제3장 제국의 시대 1 -새로운 유형의 제국, 식민지 제국의 시대; 지국의 땅의 약 1/4이 약 6개국에 의해 식민지로 분배.재분배; 정치적.군사적 정복형태에 대한 준거가 문제의 초점이 아니었다. 황제들과 제국들은 오래된 것이지만 제국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아시아; 전통적 제국들은 명목상 독립국가, 완충국가로서 편리했기 때문이거나 경쟁국들끼리 분할공식에 합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토자체가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유지 ·성공적으로 저항한 유일한 국가는 에티오피아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완전 분할, 태평양에는 독립국이 전혀 남지 않았다. ·분할과정에서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지역은 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들; 경제적으로 발전된 세계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 공식적인 정복 없이 무난히 경제.정치적 지배가 가능했기 때문; 미국과 적대할 충분한 이유가 없었다 ·새로운 제국주의; 경제의 지구화가 급속하게 확대되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주요한 사실은 후진적인 세계와 연결되면서 진행된 선진국들간의 경제적 거래, 통신, 상품과 화폐, 사람의 움직임의 밀도가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적 발전은 원거리에 독점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존재하는 원재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문명은 이국적인 취향의 것들을 필요로 했다; 중심지 나라들의 대중적 소비를 위한 음료와 식품들을 공급하기 위한 국제시장의 창출; 빠른 수송 및 보관능력이 발전함에 따라 수입 가능-바나나 공화국을 가능하게 함; 식민지와 비공식적 종속의 기능은 중심부 경제의 보완물이었지 그것과 경쟁하는 것은 아니었다-종속된 생산자들의 취약성 심화; -식민지 획득의 동기; ·다수의 발전된 경제들이 동시에 새로운 시장에 대한 동일한 필요성을 느꼈다; 만약 그들이 충분히 강했다면 저발전된 세계의 시장에 대해 '개방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강하지 못한 경우에는 실질적인 이점을 줄 수 있는 지역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못박아버림으로써, 즉 해당지역에 대한 소유의 이점을 통해 민족기업들에게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기를 희망했다. 따라서 점령되지 않은 제3세계의 일부를 분할하는 것은 논리적인 결과였다; 어떤 의미에서의 보호주의의 확장; 식민지를 획득해야 할 경제적 동기는 어떤 종류이건 정치적 보조를 통해 경제적 작동을 도와준다는 보호주의적 목적을 요구했던 정치적 행위로부터 분리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 ·식민지 획득은 그 자체의 가치를 불문하고 일종의 신분적 상징 ·유권자들에게 돈이 더 많이 들어가는 개혁보다는 영광을 주겠다는 익숙해진 관행; 대중들에게 스스로 제국 국가 그리고 민족과 동일시하도록 고무; 제국은 훌륭한 이데올로기적 응고제를 만들어냈다; 우월성과 지배에 대한 관념이 인기를 끌었다; 식민지 전시관의 히트; 적어도 잠재적인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했던 나라들도 식민지에서는 그것이 지배로 바뀌어버렸다 ·제국의 시대는 대중선교사업의 고전적인 시대; 선교사업은 결코 제국주의적 정치의 대리자가 아니었다; 교회는 식민지 당국에 자주 반대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공은 제국주의적 진보의 기능; 무역이 교회의 깃발을 따라왔는지는 논쟁적이지만 식민지 정복이 효과적인 선교활동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반제국주의 운동; 인도의 자유는 영국 노동운동의 목표, 식민지 전쟁과 정복에 대한 좌파의 비난; 하지만 매우 희소한 예외들을 제외하면 공산주의 인터네셔널 시대에 이르기 전까지 서구의 사회주의자들은 식민지의 인민들이 자신들의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을 조직화하는 것에 실질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식민지 논쟁이 적실성이 없다거나, 백인 노동자를 위협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간주하거나, 제국주의가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식민지인민들은 자치정부를 위한 준비에 이르지 않았다고 여김; 1914년 이전의 사회주의는 압도적으로 유럽·백인의 운동
2 -제국주의의 경제적 충격; 고도로 비대칭적, 근본적으로 불평등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추동력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역동적이지 못한 중심부 국가들에서 더 컸다. 경제적·정치적 열등함의 잠재적 보상 ·식민지 팽창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특정한 경제집단의 존재 ·일부는 번영하게 되었으나 대부분의 새로운 식민지들은 자본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했으며 경제적으로 실망스러운 것; 새로운 식민주의는 보호주의에 의해 강화되었던 경쟁하는 국민경제들간의 경제적·정치적 경쟁의 부산물 -문화적 충격; 토착 엘리트를 제외하고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가져다 준 것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서구화' -반제국주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의미를 가졌던 반제국주의 운동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와 러시아 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인민의 독립, 자결, 영토국가의 형성 등등은 이 시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서구 유람을 통해 서구에 의해 만들어진 교육제도를 통해 서구화되었던 엘리트들의 형성시기 -지배자들에게 준 영향; 19세기의 새로움은 비유럽인들과 그들이 사회가 열등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며 연약하고 후진적이며 유아기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는 점; 야만인에 대한 문명인의 우월감 강화; 이국주의-약간 긍정적인 측면, 차이에 대한 애정,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 예술의 고무
제4장 민주주의의 정치
1. 민주주의의 전개와 대중정치/대중조직의 형성
▶ 헌법과 주권을 가진 선출된 의회(즉,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19세기 자유주의의 기본적인 딜레마 - 민주주의의는 인민대중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대체적으로 가난한 자들→대중들이 지배계급과 동일한 방식으로 공공의 문제를 보지 않았다라는 점 : 의회는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서서 불편한 사태를 회피하고자, 즉 여성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남성 가운데에서도 다수를 그 투표할 권리와 피선거권으로 배제하고 최선을 다함. - 그러나 1870년 이후, 국가 정치의 민주화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으며, 실제로 발생했던 일. why? 1) 정치가들은 일부 극좌파들이 준동하는 사태를 어느 정도 통제하기 위한 대가로서, 투표권의 '예방적인 확장'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음 2) 대중선동과 압력, 혹은 국내정치의 갈등으로 인해 투표권의 확대를 양보
▶ 민주적 정치는 더 이상 연기될 수 없었음. 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조작할 것인가? : 가장 노골적인 의미에서의 조작은 매우 손쉬운 것! ① 의회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엄격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 : 독일의 경우 ② 세습적인 성원들로 구성된 양원제를 통해 민주화된 대의기구(하원)에 제재를 가함 : 영국의 경우 ③ 소유권에 기반한 투표권의 부여 : 교육적인 차별에 의해 투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유지·강화됨 ④ 영국의 게리멘더링이나 오스트리아의 '선거지도'와 같은 방식으로 특정분파를 위한 경계적 조작 ⑤ 공개투표 : 강력한 지주계급이나 영향력있는 후원자들의 직접적인 압력이 행사됨 ⑥ 투표권의 연령제한을 높이는 방식 ⑦ 선거인 등록에 대한 접근을 매우 어렵게 만드는 방식 ex)영국의 경우 1914년에 노동계급의 절반 정도가 그러한 기제 때문에 사실상 투표권을 박탈 ☞ 이러한 기제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운반수단이 작동하는 것을 늦출 수는 있었지만, 그 진전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음
▶ 이러한 상황들은 선거를 통한 그리고 선거를 위한 '정치적 동원(動員)'을 출현케 함 ; 대중운동과 대중정당의 조직화, 대중 선전의 정치와 대중매체의 발전, 그리고 지배계급과 정부에 중요하고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킨 다른 종류의 발전을 함의 - 확대되는 민주화는 (역설적이게도) 중요한 정치적 문제들이 공개적인 정치적 토론의 장에서 토론되는 것을 사라지게 함 : 정치에 관한 진지한 토론은 엘리트들끼리, 은밀한 장소(주말의 시골 별장, 클럽, 개인적인 사교모임, 사냥연회 등)에서 그것도 매우 애매한 형태로 이루어짐 - 정치인들은 점차 대중적인 선거제도에 호소 : 직접적으로 대중들에게 호소하든가 아니면 대중언론이라는 메가폰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중들에게 호소 ☞ 민주화의 시대는 공적인 정치의 위선의 시대(이중성의 시대)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정치적 풍자의 시대(다양한 풍자 시사만화가들이 활동하는 시대)가 됨.
▶ 다양한 대중단위·대중정치 형성과 그 특징 ① 그러한 정치조직은 헌법을 형성하고 있는 합헌적 조직들 ② 새로운 대중운동은 이데올로기적 : 강력했지만 특정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익집단과 달리 새로운 정당-대중운동의 형태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전망을 표현 ③ 대중동원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점차 세계화되어 감 : 지역적이거나 국지적인 정치의 틀을 분쇄/주변화/통합시켜 나감 ④ 새로운 대중정치는 '귀족'의 영향력에 기반한 낡은 정치와 양립할 수 없었지만 but 지역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보스 정치는 사라지지 않음 ⑤ 민주주의는 그 '수혜와 영향'의 자리에 인민이 아닌 조직을 위치시킴(조직은 지도적인 인물들에 의해 수행되는 과두제적 형태를 띰)
2. 민주주의의 확장과 정치의 불안정성
▶ 다한 동원의 정치, 대중운동의 등장 속에서 지배계급은 국가의 통일성과 정치적 안정성의 유지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등장 - 보다 일반적으로는 사회혁명이라는 대중운동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면서, 제도화되어 있던 사회의 정통성과 그 생존 자체를 보장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 - 정부와 지배계급들을 곤경에 빠지게 했던 것은 바로 1880년대와 그 후에 갑작스럽게 출현했던 국제적 대중적인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의 정치적 지배는 1870년대를 거치면서 무너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공황 때문이었음
3. 지배계급의 전략과 대응
▶ 이러한 정치적 위기에 대한 지배계급들의 전략 : 전략의 주요한 대상은 1890년대를 전후하여 대중현상으로서 국제적으로 나타났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1) 사회주의적 대중운동과 대중선거주의의 결합 - 성장하는 대기업의 권력으로 인해 노동운동을 정치의 제도화된 게임으로 끌어들이는대 일정한 어려움이 존재했으며, 노동운동 측에서도 인터내셔널에 집착하며 부르주아 국가 그리고 일국적인 체제와 모든 협상을 거부 - 그러나 1900년이 되자 사회주의적 대중운동에 중도적인 혹은 개혁적인 진영(베른슈타인)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대중선거주의의 정치는 이러한 노동운동 정당들의 체제 내부에 조용히 통합 2) 사회개혁과 복지 프로그램의 도입이라는 모험의 준비 - 독일(비스마르크) : 이미 1880년대에 야심찬 사회보장계획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선동 기반을 제거하고자 함 -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가 뒤를 따름(미국은 그와 같은 정책이 전무) 3) '비합성리성'의 정치적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실행에 옮김. - 제국과 식민지 정복과 같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의해, 영광과 군사적 승리감 같은 낡고 믿을 만한 도발들을 활용한 전통의 창조에 대중의 통합과 충성을 만들어냄 - 대중문화의 창조와 활용 : 대중적인 시장과 구경거리, 상업적인 오락의 발전
4. 이 시기 지배계급들은 전복적인 대중동원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는가?
-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그런 대로 성공을 획득 : 자본주의 서구국가들에게(세계의 다른 부분들은 상황이 매우 달랐지만) 1875년부터 1914년까의 기간은 경고와 탈선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정치적인 안정과 통합에 성공 - 1880년과 1914년의 사이에 지배계급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의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경제적 안정성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 - 마르크스와 엥겔스 : 민주공화국이 '부르주아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타 및 이의 지도하에 대중들의 정치적 동원을 허용/고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것을 사회주의의 전(前)단계로 간주 - 레닌은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의 가능한 정치적 외피이며, 자본주의가 이러한 최선의 외피를 획득하게 되면 어떠한 변화도 그것을 흔들어놓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 : 이 경우 혁명적 러시아의 임시정부에 반대하고 소피에트 권력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서구 민주화에 대한 전쟁 전까지의 15년 동안의 경험이 존재 - 그러나 정치적 민주주의와 번영하는 자본주의간의 결합은 어디까지나 소수국가에 한정되었으며, 미래에 대한 보편적인 모델이 되지는 못하였음.
제5장 세계의 노동자들
1.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노동자 정당의 성장
▶ 산업화의 물결이 서구를 휩쓸게 되면서, 가장 눈에 띄게 성장했으며 도저히 회피될 수 없었던 계급, 근대사회의 사회적·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체제를 위협하게 된 계급은 프롤레타리아였음. - 노동자들은 수공업과 농업이라는 여전히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전(前)산업노동의 두 개의 거대한 인적 저수지로부터 전환되는 가운데 성장 - 임금노동에서 기존의 전(前)산업적 형태였던 숙련된 수공업 제조자들은 초기 경제의 발전하는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교육받고 자기 신념에 찬 부분→이들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였으며, 대다수 노동자 정당의 지도자로 활동 - 이들 대중들이 단일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이질성을 띄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중공업 중심지에서 거대하고 복합적인 기업의 일부로서 일하고 있었던 경향은 보편적
▶ 이러한 노동자 대중은 점차 하나의 계급으로서 정치적으로 조직화 되어감 :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대중정당들이 역사무대에 등장했으며 또 놀랄만한 속도로 성장 - 유럽에서는 사정이 허락하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당들이 선거에서 사당한 위력을 발휘 - 이러한 정당들과 연결되어 있고 흔히 이들 정당에 의해 창설된 정치적으로 덜 직접적인 노동자 조직들-노동조합, 협동조합-은 정당들보다 더 많은 수의 성원을 확보 - 체계적이고 통계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었던 독일 사회주의자들에 따르면, 이들 정당들이 민주적인 국가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선거에서의 '51퍼센트라는 마술적 수치'를 통과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며, 세계 사회주의의 새로운 국가로서 '인터내셔널은 인류가 될 것이라고 생각
2. 노동계급운동의 양상
▶ 그러나 실질적으로 노동계급을 관찰했던 사람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가 동질적인 대중이 아니었다는 점, 심지어 한 나라안에서도 동질적이기가 힘들었다는 점에 동의 : (새로운 정당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노동자 계급'들'이라고 단수가 아닌 복수로 호칭 1) 근대 산업공장 혹은 기업에서 일하는 프롤레타리아가 성장했지만, 대다수는 그들과 동일시하기 힘들었던 임금노동의 정글(작은 작업장이나 농촌의 오두막 혹은 도시의 후미진 방)에서 일하는 수작업 노동자들 2) 분열은 수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것이지도 했음 : 수공업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존경받는' 사람들의 '존경받는' 직업과 그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 노동귀족과 룸펜프롤레타리아들 사이에, 그리고 서로 다른 직종의 전문가들 사이에도 분열이 존재. 3) 특정한 종류의 작업을 독점하고자 했던 동일한 집단들(예: 열쇠장이와 편자공) 사이에서는 단순한 분열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조차 존재 4) 이에 덧붙여 민족적·언어적·종교적 기원을 가진 보다 명백한 차이도 존재 -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에서 국제주의를 열렬히 호소했는데, 이는 그것이 이상적일 뿐만 아리나 그들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전제조건이기도 했음 - 사람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느끼긴 했지만, 특히 체코인 노동자, 폴란드인 노동자, 혹은 카톨릭 노동자로 느꼈으며, 이러한 대안적인 정체감은 계급의식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계급의식 5) 산업경제 자체의 이질적인 구조도 노동자 계급의 통일을 가로막는 저해요소로 작용
▶ 노동운동의 내부적 양상 - 1867∼1875년 사이에 노동조합들은 법적인 지위와 특권을 상당한 정도로 획득 - 광범위하게는, 효과적인 노동조합은 거대한 규모를 지닌 산업의 한계점을 넘어섰을 때, 즉 중소기업이나 작업장 규모로 조직화될 때만 원활하게 기능(예 : 독일의 경우 라인란트나 루르의 중공업지대에서 사민당의 힘과 사민당의 '자유노동조합'을 발견할 수 없었음) - 놀랄만한 예외의 하나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공식적인 노동계급 간부들을 형성한 다른 여러 장인들(목수, 담배 제조공, 열쇠공, 칠장이 들)과의 차이로 인해 뚜렷하게 구분되었던 광부들 : 프랑스나 미국에서 석탄광부들은 간헐적으로나마 강력한 조합을 형성 -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은 교통(철도), 공공부문, 항만과 거대하게 성장하고 있던 금속산업
3. 노동자 대중의 노동자 계급으로의 조직화
▶ 동질적이지도 않았고 응집된 사회집단도 아니었던 노동자 대중은 쉽게 통일될 수 없었지만, 통일되어 가고 있었음.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1) 하나의 강력한 힘은 '조직에 동반된' 이데올로기 : 거의 대부분의 사회단체로부터 무시당했던 대중들에게 새로운 복음(보편적인 노동계급이라는 신념 하에 가난하고 노동하는 모든 이들의 통일이라는 복음)을 전파 2) 조직의 구성 : 구조화된 집단적인 행동이 없다면 노동자들은 하나의 계급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조직을 통해서만이 자신들의 희망과 감정을 집약해낼 수 있는 대변인을 갖게 될 수 있었음 3) 사회적 변화 - 사회적으로 차이가 있던 조심성 있는 프티층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노동자들을 구분시켰던 혹은 구분시켜주었던 차이가 점차 확대 - 도시계획과 재산권의 발전에 의해 보완된 공간의 기능적 세분화는 계급들을 공간적으로 분리 4) 제3의 요소(국민경제와 민족국가)가 이들에게 '통일'을 강요 - 경제는 점차 통합된 체계로 기능했으며, 그 안에서 노동조합은 더 이상 느슨하게 묶여 지역적 조건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지역적인 단위의 합으로서만 기능할 수 없게됨 - 이에 따라 산업들은 전국적 범위의 집단적인 협약을 협상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태는 (1889년 이전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1910년이 되면 일상적인 것이 됨 5) 집단적 힘이 발휘될 수 있는 경로의 진전 : 선거 민주화 - 시민권의 확장을 위한 투쟁 자체는 불가피하게 계급적 연대라는 형태를 취하게 함 (∵ 핵심적인 문제는 무산자 시민들의 선거권에 관한 것이었음) - 어떠한 사회집단들이라도 특정한 국법의 제정과 실시를 선호하거나 반대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부에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그 정치적 목적을 추구해야 했으며, 민족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치인들은 선거권자들의 그 엄청나고 위험한 요구에 더욱 민감해짐.
4.5. 사회주의 정당들의 대중적 기반획득과 외연의 확장
▶ 왜 그렇게 많은 정당들이 마르크스의 이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이는 다른 어떤 좌파 이론가들보다도 그가 훨씬 더 그렇듯했고 희망적인 세 가지 사항을 말했기 때문 - 현재의 체제 내에서는 예상되는 어떠한 발전도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상황(그들의 '착취')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점 - 자본주의 발전의 본성은 현재의 사회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사회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점 - 조직화된 노동계급은 다가올 영광스러운 미래의 창조자이자 계승자가 될 것이라는 점
▶ 수정주의 vs 혁명적 생디칼리즘 - 1890년대 중반부터 즉각적인 자본주의의 붕괴라는 관념이 적실성을 상실하면, 좌파정당들은 일정하게 수정주의의 영향을 받음. - 조직화된 대중집회, 주의 깊게 계획된 대중시위나 행진, 선거 캠페인들은 준비되었던 폭동이나 봉기를 대체하였으며, 체제 '내부'의 급진적인 반대자로 재조직됨. - 1905∼1914년 사이 번창했던 '혁명적 생디칼리즘'은 대중적인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거부하였으며, 다양한 무정부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탈(脫) 중심화된 노동조합의 전투성과 결합.
▶ 사회주의 정당들은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게 되자 노동계급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주의를 한정시키는 것은 점차 불가능해졌으며, 그러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됨 - 사회주의자 정당에 대한 지지를 순수하게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에서 더욱 확대시켜야 할 필요성은 단순히 선거에서의 표 획득이나, 혁명적 고려에서부터 일반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정식화되거나 정의될 수 있었음 1) 역사적 원인 : 좌파의 정치적 전통-공화주의, 민주주의, 자코뱅적인 혹은 그와 유사한-이 강력했던 곳에서, 사회주의는 그것의 논리적인 확장으로 간주됨 2) 사회주의자 정당들은 부자에 대한 반대자로서의 위상을 갖게 됨으로써 더욱 명백한 혜택을 누리게 됨. 프롤레타리아는 아니었지만, 가난하고 착취당한다고 느꼈던 이들은 그러한 정당을 자신들과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 3) 진보를 믿고 있던 사람들, 특히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전통으로 양육되었고 그것이 각인되어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진보의 우월한 위치로부터 상당한 혜택을 받게됨. 4) 국외자였다는 것과 영원한 야당이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 : 소수자들(어느정도 주변적이었던 유태인과 프랑스의 기독교도)과 다민족 국가에서 억압받는 민족들의 지지를 획득 ☞ 명목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에 대한 지지는 프롤레타리아를 훨씬 넘어서 확대될 수 있었고 사정이 이러한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은 적당한 상황아래서 집권당이 될 수 있었음. 그러나 '부르주아' 정부의 체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혁명정당으로서의 위치 혹은 심지어 급진적인 반대주의자로서의 위치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
제6장 휘날리는 깃발 : 민족들과 민족주의
1. 새로운 민족주의의 등장
- 민주화의 정치가 낳은 두 가지 산물 가운데 하나가 노동자 계급정당들의 등장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정치에서 민족주의의 등장 - 그 자체로서의 민족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1880년대부터 1914년에 이르는 시기에 민족주의는 극적인 도약을 이루는 가운데 그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내용이 변형 - 국가가 이들을 동원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애국주의라 불렀는데, 기존에 성립되어 있던 민족국가들에서 나타났던 본래적인 '우파' 민족주의가 본질상 극단적인 정치적인 권리에 대한 애국주의를 독점하게 됨 : 19세기 내내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운동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전통과 동일시되었다고 할 때,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었으며, '민족주의(national)'란 단어 자체는 외국인,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에 대항하고, 자기 국가의 침략적인 확장을 선호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우파 이데올로그 무리들을 설명하기 위해 19세기 말에 최초로 등장. - 그러나 일반적으로 민족주의는 정치적 스펙트럼상 어떠한 색깔과도 동일시될 필요가 없었으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하였음 : 따라서 '정체성'이 정치적 동인이 된 곳에서는 이것이 '일반적인 정치의 토양'과 같은 것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민족주의의 잡다한 표현을 정의한다는 극도로 어렵게 되어버림.
▶ 20세기에 이르러 심오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정치적 민족주의 내에서 발생한 주요한 틀의 변형 1) (이미 언급된 대로) 정치권력에 의해 점령된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출현→이의 극단적인 표출을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파시즘에서 발견하게 됨 2) 민족자결주의가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생존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민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주장하는 모든 그리고 특정한 집단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전제 3) '민족자결'은 그것이 국가의 완전한 독립이 아닌 한, 어떠한 자율성의 형태로도 만족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점차 커졌다는 것 4) 민족을 인종성의 측면, 그리고 특히 언어의 측면에서 정의하는 새로운 경향이 발생
- 유럽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민족주의적 운동들의 수가 1870년대를 기점으로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오랫동안 성립되어온 민족국가들 내에서도 지방 사람들이 이제 정치적으로 '민족들'을 동원 - 이 운동들 대부분이 아직 운동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민족주의라는 정치적 문제는 국가들이나 비민족주의적 경쟁자들 모두에게 점점 다루기 힘든 문제가 되어감.
▶ 언어적 민족성의 '발명'과 발전에 대하여 - 이전에도 언어는 민족적인 과제의 하나였으나 민족성을 구성하는 다른 여러 범주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보다 중요했던 것은 대중들이 스스로를 민족체의 집단성과 동일시하려는 정체감 - 언어적 민족주의는 그 말을 할 줄 아는 성원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읽고 쓸 수 있는 성원들을 창조해내는 것 - 필연적이지는 않았지만 언어적 민족주의는 영토주의와 연결되었으며, 민족주의와 국가는 이웃과 고향이란 의미를 점령하게 됨 - 국가 민족주의를 보다 본질적으로 만든 것은, 기술적인 시대의 경제와 공적·사적 행정들이 본질적으로 대중적인 초등교육 혹은 적어도 문자 해독 정도의 교육을 요구했다는 점 - 또한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학교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훌륭한 백성과 시민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칠 수 있는 본질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었음 : 텔레비전이 승리하는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교실에 비견될 만한 어떠한 세속적인 선전매체도 존재하지 않았음→ 교육적인 측면에서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에서 1870년부터 1914년까지는 무엇보다도 초등학교의 시대 ▶ 국가 민족주의는 양면적 성격 : 그것은 일부 거주자들을 동원하게 됨에 따라, 다른 일부의 거주자들을 소외시켰음. 즉 공식적인 공적 언어와 이데올로기에 저항했던 공동체들을 분리시킴으로서 공식적인 민족체로부터 제외된 민족체들을 규정하는데 도움을 주게됨
2. 민족주의의 양상
▶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곳에서, 왜 일부 사람들은 '민족주의'를 통해 대해 저항해왔는가? -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지역으로부터 다른 한 지역으로의 이민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한 계급으로부터 다른 한 계급으로의 이민을 시도. 19세기의 대부분의 시기에 '동화'는 결코 나쁜 말이 아니었으며, 특히 중간층에 참여하고자 원했던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했음 - 어떤 민족체의 성원들이 왜 '동화'되기를 거부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명백한 이유는 그들이 공식적인 민족의 완전한 성원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 - 극단적인 경우가 유럽 식민지의 원주민 엘리트였으며, 중간계급이자 서구화된 교육을 받을 유태인들에게서 보다 확실히 나타남 ▶ 1914년 이전의 반세기는 고전적인 인종혐오주의의 시대였으며, 그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동의 시기 - 1893년 이민제한동맹이 창설된 곳은 교육받고 부유했던 전통적인 백인 앵글로색슨의 프로테스탄트 부르주아의 중심지였던 보스턴 - 노동계급들의 인종혐오주의는 이웃들간의 문화적 마찰과 구직을 위한 저임금 경쟁의 두려움을 반영 - 외국으로 이민자들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지역적인 인종혐오주의가 발생하기도 하고, 스스로 민족적 정서를 발견하는 경향도 나타남 : '민족성'을 단순한 상징적인 공동체 이상의 현실적인 인간관계의 연결망이 되어감 - 제국의 시대 민족주의의 진전은 대부분 사회의 중간계층에 의해 수행 : 민족주의는 일종의 비제도적인 측면에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계급으로서의 그들 혹은 특정 계급의 동조자로서의 그들로부터 그들이 그토록 되고 싶어하던 완전한 부르주아의 신분으로 도피할 수 있게 만드는, 예컨대 민족의 진정한 방어자와 같은 집단적인 정체성을 제공
3. 민족주의의 광범위한 영향
- 1870년대와 1914년 사이의 민족주의는 혼란스러운 중간계급들 혹은 파시즘의 반자유주의적 선전에 호소하는 이데올로기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만 한정될 수는 없음: ∵이 시기 민족주의적 호소를 만들 수 있었거나 실행했던 정부와 정당들 혹은 운동들이 이를 통해 부가적인 이점을 향유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
▶ 아직 독립(자결)을 획득하지 못했던 민족체들의 현실운동이 존재 ▶ 존재의 기원과 근본적인 목적을 국제적 계급과 사회적 해방에 두고 있었던 정당들이 스스로를 민족해방의 운반체로 정립했다는 것 : 독립 폴란드가 다시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제2차 인터내셔널의 폴란드 사회주의당의 지도 하에서 였으며, 이스라엘을 만들었던 것은 러시아에 기원을 둔 노동 시오니즘 ▶ 민족주의가 국가에 의해 동원되는 애국주의가 일반화됨 - 대중적인 정치와 결부된 호전적인사람들이 수행한 국내적인 선전에서, 강조의 초점은 영광이나 정복이 아니라 우리가 침략 혹은 침략전쟁의 피해자들이라는 것이었음 - 1914년의 전쟁을 향해 행진하던 독일, 프랑스, 영국의 대중들은 전사들이 아니라 시민과 민간인으로서 그렇게 했던 것.
제7장 누가 누구인가? 부르주아의 불확실성
1. 부르주아의 생활양식 : 부르주아의 생활양식은 보다 덜 공식적이고 사적이고 사유화된(전통적인 상층계급과 달리) 생활양식이었음. 이를 부추긴 네 가지 요인은, ① 정치의 민주화에 의해 부르주아의 공적·정치적 영향력이 대대적으로 축소되었다는 점 ② 성공한 부르주아에게 있어 청교도적 가치가 퇴색했다는 점. 즉 유한계급이 증가하고 소비 성향이 강해졌다는 점 ③ 부르주아의 가족구조가 느슨해졌다는 점. 이에 따라 새로운 범주로 등장한 '청춘'이라는 연령집단은 취향·장식·스타일 상의 변화를 몰고 왔음. ④ 전체적으로 '중산층'이 증가했다는 점
2. 사회적 동질성의 위기 - 경계의 모호함 : 중간층 혹은 자산계급에 누가 속하고 속하지 않는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문제였음. 전통적 신분질서의 붕괴와 사회적 이동은 중간적인 사회영역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듬. : 스스로 부르주아라 칭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었다는데서 근본적인 구분의 어려움이 존재. : 부르주아와 귀족간의 경계가 모호해짐. 이제는 '혈통'이 아니라 '돈'을 기준으로 귀족이 될 수 있었음. 영국의 경우 1901∼1920년 사이 159명의 귀족이 생겨났는데, 그 중 66명이 사업가였고 34명이 전문직(변호사가 압도적)이었음. : 부르주아와 하층 간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았음. 여기엔 제3부문(사무직)의 등장이 큰 변수. 제3부문은 봉급을 받는 직위였지만 정식교육을 받아야 자격이 생기는 비육체 노동업무였고, 그들 스스로 노동계급의 일부로 생각하기를 거부했으며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동경했음. 새로운 중하층계급인 '사무원'과 상층 전문직 영역(고용간부 등)과의 경계도 모호했음. : 중산층에 새로 포함되거나 중산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증가. 부르주아를 이론상으로 정의하는 것은 '귀족'과 노동계급을 정의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됨. : 중산층의 거대한 다수는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음. 그것은 사회적 이동의 결과물이었다는 점. '중산층'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으로 상승하는 과정에 있는 가족들, 그리고 정상 또는 상층부에 이미 도달한 부르주아들로 구성되어 있었음.
3. 부르주아로 인정받는 기준은 무엇인가? : 부르주아 또는 중산층에 속해 있거나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음. : 그러한 기준은 노동계급, 농업 및 다른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고, 배타적인 신분질서를 제시하는 것이어야 했음. : 그 기준으로는 ① 제도교육 ② 생활양식과 문화 ③ 스포츠가 존재.
① 제도교육 : 제도교육(대학)이 부르주아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젊은 신사들에게 술 마실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고 오입질과 스포츠를 가르쳐주는 데 있었음. (실용적인 의미는 없었음) : 학교교육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중산층 영역으로의 입장권을 제공. 교육 수혜자를 하층계급과 구별될 수 있게 하는 경로였음. 이 시기 유럽 각국에서는 학생의 수가 수배 이상 증가. : 그러나 학교와 대학은 상승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지, 이미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음. 교육은 부르주아가 되는 필수 관문으로 자리잡음. 그러나 노동자의 자식들, 농부의 자식들이 위로 올라간 경우는 거의 없었음. : 부르주아의 배타성 - 교육의 개방이라는 이면에서 부르주아는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집단(클럽) 문화를 형성. "19세기 후반의 부르주아란 개방적인 교육과 폐쇄적인 집단의 기묘한 혼합물". 독일 학생단 학생들의 결투 문화, 미국의 아이비리그, 동문(OB) 등. 이러한 수단들은 일종의 잠재적인 마피아를 형성했고, 이렇게 동등한 경제적·사회적 신분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확대된 가족'은 그들만의 접촉의 그물망을 제공.
② 생활양식 : 부르주아의 새로운 생활양식은 교외의 집과 정원이었음. 전원도시와 전원주택지는 하층민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주요한 기준이 됨. : 거주상의 격리(살기 좋은 교외지역으로의)는 안락한 사람들을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 조직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음.
③ 스포츠 : 스포츠는 19세기말의 제도화된 하나의 관행으로 등장. : 스포츠의 근대적 형식은 본질적으로 중산층과 결합된 것이었음. : 중산층만의 특별한 영역은 말을 타고 사람과 동물을 죽이거나 최소한 공격하는 것과 관련된 운동 - 사냥, 사격, 낚시, 경마, 펜싱 같은 것들이었음. : 아마추어 정신 - 전문 직업주의를 배격한 것은 중산층의 고결함을 부각시키는 한편,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노동계급은 감히 끼어들기 어려운) 영역으로서 스포츠를 위치지우고자 했던 것. 이러한 정신이 '올림픽'의 탄생으로 이어짐. : 스포츠는 애국적이고 군국주의적 측면도 가짐. : 스포츠는 중산층의 새로운 형태의 생활과 통합을 창출하는데도 기여. 예컨대 테니스(1873년 발명)는 중산층 교외지역의 주요한 게임으로서, 많은 중산층의 자녀들이 같은 사회적 신분임이 확실한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 : 골프클럽은 전문직 종사자들과 사업가들의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 담당. 초기의 사업거래는 골프코스에서 결론지어졌고, 사회적·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외부인을 배제할 수 있었음. : 스포츠가 놀라운 속도로 부르주아 사회를 정복했다는 점을 그것이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임.
4. 신중산층 : 상층의 1만명(맨 꼭대기층)이 상대적으로 배타적인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반면, 바로 아래 계층(신중산층, 신프티부르주아)은 그것이 쉽지 않았음. : 신중산층은 '하인을 두는 계급'이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유지. : 신중산층의 다수는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었음. : 이러한 중산층은 큰 규모로 확대되고 있었고, 개인으로서가 아닌 집단적으로만 인정될 수 있는 계층이었음. 즉 이들이 받은 교육, 이들이 사는 장소, 이들의 생활양식과 관행을 통해 위치를 인정받았던 것. : 신프티부르주아의 목표는 노동자 계급과 가능한 한 뚜렷한 경계를 긋는 일이었으며, 이에 따라 정치적으로 극우의 편에 섬. 이들의 속물 근성은 반동으로 드러나게 됨.
5. 부르주아에게 '아름다웠던' 시대 : 요트를 하나 사려면 얼마나 돈이 드느냐에 대한 J.P.Morgan의 답변, "만일 당신이 가격을 물어봐야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살 수 없는 사람이다" : 모건이 죽어서 8000만 달러를 남겼다고 할 때, 록펠러의 말 "우리는 그가 부자인 줄로만 알았지" : 억만장자들은 오래된 명화를 소장해야만 신분이 입증된다고 생각했고, 거대한 요트 없이는 성공한 상인이 아니었으며, 경주마와 교외의 대저택, 사냥터가 없다면 완전히 성공했다고 볼 수 없었던 놈들. : 한편으로, 부르주아의 '부'는 '여성해방'의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함. 즉 넉넉한 집안의 아내, 아들과 딸, 친척들은 여가의 대부분을 비영리적 활동으로 채우게 됨. : 부르주아의 '허영'은 20세기 초 예술에 기여하기도 함. 릴케, 게오르게, 카르우스, 토마스 만, 포스터 등이 예술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의 '재정적 보조'가 있었기 때문. 6. 자유주의의 위기 - 부르주아는 더 이상 진보의 담지자가 아니게 됨 : 유럽에 있어, 19세기 부르주아의 확고한 외형을 분해한 것은 다름아닌 이데올로기(자유주의)와 성실성의 위기였음. 진보와 개혁과 자유주의는 모두 위기에 처하게 됨. : 이제 무엇이 진짜 자유주의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게 됨. : 부르주아 정치 그 자체는 더욱 복잡해지고 분열되었음. 영국의 자유당원들은 보수주의로 옮겨갔고, 독일의 경우 자유주의는 분열하고 쇠퇴했음. : 1900년대까지 많은 나라에서, 전형적인 기업가와 전문가 계급에 속했던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정치적 중도 우파가 되고자 함. 신중산층 및 중하층계급은 노골적인 반(反)자유주의적 우익에 이끌리게 됨. :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는 제국주의적 정복에 열광하지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도 않는 태도를 취함. 그러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전쟁에 환호한 젊은 남성들에게서 보여지듯이. 평화와 이성, 진보의 이상을 배격하고 폭력과 본능, 폭발의 이상을 지지하는 유행이 쉽사리 발견되었음. : 부르주아는 그들의 역사적 사명을 상실. 한때 부르주아가 본보기로서 자부했던 이성, 과학, 교육, 계몽, 자유, 민주주의, 인류의 진보가 가져다주는 이익 등은 노동계급의 '노래'가 됨.
제8장 신여성
* 이 당시 막 시작되고 있던 여성해방은 전적으로 한정된 중간층, 사회 상류계층에 제한된 일이었음.
1. 19세기의 여성
1) 출산의 조절 - 출생률의 통제 : '발전된' 세계의 여성들이 보다 적은 수의 자녀들을 갖기 시작. 출생률과 사망률의 하락은 명백히 여성의 삶과 정서에 영향을 미침. : 낮은 출생률은 만혼과 비혼, 혹은 성생활의 절제와 성교 중지 등을 통해 이뤄짐. : 도시 사람들의 경우, 높은 생활조건을 누리기 위해 출산을 조절. : 출생률의 통제는 노동하는 여성들의 영역에 새로운 구조와 가치, 기대가 생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나, 여전히 주변적으로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
2) 경제적 영역에서의 여성 : 여성은 국외자들이었음. 1890년대 서구에서 여성의 3/4 정도는 직업을 가지지 못했고, 기혼여성들은 12%만이 직업을 갖고 있었음. : 그러나 경제적 혁명으로 인해 여성들의 삶의 패턴이 변화하게 됨. 여성들을 변형시켰던 혁명의 첫 번째 측면은 '원산업화'(가내공업이나 하청산업)의 놀랄만한 성장. 특정한 종류의 가내공업은 특히 여성노동을 필요로 했음. 다만 가사와 생산의 결합 속에서 노동이 수행되는 한 여성의 위치는 그다지 변화할 수 없었음. : 원산업사회에서 점차 산업들이 발생함에 따라, '작업장과 가사의 분리'가 이뤄지게 됨. 이에 따라 공적으로 인정받은 경제에서 여성들은 배제되었고, 그로 인해 초래된 새로운 경제적 종속으로 인해 여성의 지위는 더욱 하락. (최소한 가내산업은 가사, 어린이들에 대한 감독, 지불노동을 결합시킬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산업화에 따라 대부분의 가내산업은 더 이상 가족 기업이기를 그치고, 그저 여성의 저임금노동에 의존하는 산업이 되어 버림.) : 새로운 경제 하에서 가계수입은 전형적으로 집 바깥으로 일을 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획득되게 됨. : 가계와 작업장의 분리는 성적·경제적 분업의 패턴을 수반. : 여성에 대한 임금차별은 당연시됨. 가족의 수입은 남성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고, 여성의 노동은 기껏해야 보완적인 것으로 간주될 뿐이었기 때문. : 여성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종속'이 최적의 경제전략이기도 했음.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결혼이야말로 그러한 수입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최선의 직업이었던 것.
3) 여성의 진출 : 봉급생활자로서의 여성의 직업에 대한 전망이 한층 높아지게 됨. 가장 놀라운 변화는 여성적인 직업의 등장. 상점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업 등. : 초등교육의 성장은 여성이 진출할 수 있는 교직의 확대를 가져 옴. :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기대수준의 변화는 매우 두드러지게 됨. : 기대수준의 변화 가운데 가장 특별한 양상은 '여성 참정권론자' 들의 등장이라 할 수 있음.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중간계급에 한정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냄. 정치적 공민권의 박탈보다도 훨씬 시급했던 '열악한 노동조건'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었음.
4) 부르주아 여성들 : 1870년대 이후 부르주아 내에서의 변형은 부르주아의 딸들에게 더욱 확대된 전망을 제공. 이는 결혼과 상관없이 잘살 수 있고 비가족적인 활동에 대한 욕구를 지니며 독립적인 생활수단을 가진 실질적인 여성 유한계급을 만들어냈기 때문. : 자본주의는 대중소비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 부르주아의 부인들은 보다 가치 있는 소비자로서 대접을 받음.
2. 여성지위 향상의 징후 : 여성을 위한 중등교육의 엄청난 확대 : 스포츠에서의 보다 커다란 자유 : 시장의 역할 - 여성시장을 노린 사업과 시장으로 인해 여성을 소비자로서, 성취가로서 취급(인정)하는 공적인 가치형성에 기여
3. 여성해방운동의 특징 : 여성해방을 위한 운동에 있어서 '전투적인 대변인'들에게 주목하는 것만으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전반을 이해하기 어려움. : 중요한 점은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했던 대다수는 여성해방을 특정하게 여성적인 운동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과 같이 보다 확대된 일반적인 해방운동으로서의 여성의 자유와 동일시하면서 참여했다는 점. : 중간계급 중심의 여성해방론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대한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음. : 이 시기의 여성해방운동은 보편적 인간해방운동 내의 여성적인 부분으로서 대중들 사이에서 지지를 획득한 것이었음. : 종교는 여성들에게 전통적인 복종을 요구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여성해방을 비난하도록 부추김. : 여성참정권은 중요한 여성운동을 동원하는 이슈가 아니었으며, 정치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도 아니었음.
4. 또 다른 여성해방운동 : 여성해방의 다른 한 조류로 '성적 자유운동'이 존재. : 여성해방운동은 여성의 미래(가족의 미래)에 대한 문제였음. Q. 여성의 해방은 현존하는 핵가족을 무엇인가 다른 인간집단화로 대체할 수 있음을 함의하는 것이 아닌가? : 좌파이론가들은 일반적으로 여성해방을 외부에서의 성취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 그러나 해방과 모성을 결합하는 문제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음.
5. 19세기 여성운동이 남긴 것 : 남성의 독점물로서 방어되어온 영역으로의 약진 : 참정권의 확보 : 그러나 가난과 결혼에 의해 빚어지는 종속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 Q. p397
제9장 변화된 예술
* 아방가르드(전위예술), 신예술, 대중문화 * 아방가르드에 의한 문화혁명(전통적 고급문화와의 단절)의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그 역할은 산업사회의 발전에 의해 초래된 '대중문화'에 의해 수행되었던 시대.
1. 전체적인 양상 : 1870년대부터 1914년의 시기는 창조적 예술가들과 대중들 모두가 참을성을 잃어버린 시기. 예술가들은 혁신과 실험으로 뛰쳐나가고, 대중들은 '고전의 세계'로 후퇴해 버렸던 시기. : 그러나 대중적이고 창조적인 예술가라 하더라도 고급문화(부르주아 문화)와 완전히 단절된 시기는 아니었다. 다만, 전쟁 직전의 실험적인 아방가르드들이 기성 문화(고급문화)와의 분기선을 형성. : 이 시기 예술의 위기는 '동시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사이의 분리가 확대되었다는 것에서 초래. 최초에는 이러한 분리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며, 이는 공적인 예술과 시험적인 예술 사이의 균열이 대단히 협소한 것이었고, 양자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
2. 신예술과 아방가르드 2-1. 신예술 : 이 시기의 진보는 '부르주아적 관습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 존경을 보냄. 따라서 진보의 이념은 '자연주의'(억압받고 착취받는 노동자들과 노동투쟁을 주된 문제로서 취한 예술형식)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졌으며, 예술가들이 고통받고 있는 인간에 대해 열정 어린 관심을 표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음. : 신예술의 대표주자는 윌리엄 모리스(건축가). 모리스와 그의 미술공예운동을 영향력 있게 만든 것은 이데올로기였으며, 이러한 예술적 혁신운동은 예술과 노동자들 간의 연결을 복원시키고, 일상적 삶의 환경을 변형시키고자 함.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은 신예술이라는 단어를 통해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연결되어 있었다. : 미술공예운동과 더불어 예술적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서는 경향이었으며, 이는 공공적 개혁, 현실세계에서 사용될 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음. 신예술은 공예, 건축, 그리고 개혁 간의 사회미학적 결합을 의미했고, 자연, 젊음, 성장, 운동의 은유였음. : 또한 신예술은 의식적으로 혁명적, 반역사주의적, 반아카데미적이었고, '현대적'이었음. 그것의 가장 탁월한 기념물은 파리 역과 빈의 도시교통 시스템. 신예술은 작은 집안 물건들을 통해 승리를 구가하고 있었고, 그것은 최초로 모든 부문에서 승리한 '근대' 스타일이었음.
2-2. 아방가르드의 딜레마 : 아방가르드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은 근대성과 현실의 문제. : 그러나 아방가르드가 표현하고자 추구했던 '근대성'은 모리스와 신예술에서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모순을 갖고 있었음. 즉 기술이 예술작품을 재생하는 시대에 정작 기술을 위한 진정한 기반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음. 19세기 후반의 아방가르드의 모순은 여전히 낡은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것에 있었음. 즉 기존의 상징주의와 비유의 언어들을 통해 새로운 이념과 열망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아방가르드는 전통주의자들과 세기말의 근대주의자들을 비판했지만 낡은 것을 해체하지 못한 채 새로운 세상을 표현하고자 했고, 그것이 '근대주의'의 딜레마였음.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발전시켰던 것은 과거의 개정판이었다". :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모리스와 신예술가들은 기능주의의 새로운 유토피아로 이동. : 1900-1910년 사이 아방가르드 내에서는 가시적 균열이 발생. 1907년의 입체파 탄생. : '반부르주아적 반역자'라고 주장하는 아방가르드와 문화적 취향의 주요한 실체들(문화적 수용자?) 사이에는 넓은 간극이 발생하게 되었고, 다만 세 가지 요소가 이 둘 사이를 연결해주게 됨. ①계몽된 소수의 후원 ②유행을 타는 상류사회의 일부들 ③사업(아방가르드의 기술이 광고면에서 효과적일 것이라고 예측) : 아방가르드는 르네상스 이래로 지속된 고급예술사에서 근본적인 단절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문화혁명을 성취하지 못함. : 아방가르드가 꿈꿨던 문화혁명은 전적으로 비부르주아 시장에 눈을 맞추고 있던 기업가들에 의해 중개됨과 동시에, 사회의 민주화가 낳은 부산물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음.
3. 대중문화의 성장 : 19세기말에 이르는 동안 고급문화는 대중적 시장의 발견과 기술의 결합에 의해 혁명화된 예술(대중문화)에 의해 침식을 겪게 됨. : 극장수의 대량 증가, 값싼 복제품의 대량 보급, 문고판 시리즈의 국제적 보급 등 문화활동이 보다 넓은 계층들로 확산되는 가운데, 그러한 문화활동이 정신적 고양과 물질적 성취를 표현하는 구체적 상징이 되어감. 대중들은 보다 많은 예술과 부, 문화와 민주화에 대해 열정적이었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음. : 대중문화의 명소 발생 - 몽마르트르, 슈바빙 : 대중관객을 목표로 한 예술 성장 - 가난뱅이 예술가를 존경받는 예술가로(ex 채플린) : 대중오락적 차원에서 국제적인 음악적 혁신 출현 - 플라멩코, 탱고(부에노스아이레스 사창가의 산물이었던)의 보급 : 20세기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20세기 예술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변형시킨, 궁극적으로 새로운 예술은 바로 영화. : 영화의 예상치 못했던 이점 - 무성영화의 제작은 보편적 언어를 발전시켰고, 영화로 하여금 언어를 불문하고 세계적인 시장을 착취할 수 있게 함. 1914년에 이미 영화산업은 세계시장을 정복하고 철저하게 지배하는 과정에 있게 됨. : 산업화된 대중오락은 아방가르드로부터 독자적으로 분리된 가운데 20세기 예술을 혁명화시켰음. 그러나 대중문화는 더 이상 부르주아 세계와 부르주아 세기의 예술이 아니었고, 또 아닐 수밖에 없었음. 문화의 민주화는 엘리트들로 하여금 더욱 배타적인 문화로 옮겨가도록 했고, 부르주아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 나서게 됨.
4. 기타 이 시기 예술의 특징 4-1. 정치적 상징 : 예술은 노동운동에서 집단적인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나타남. : 민주주의 시대의 예술은 정치적 목표와 성취를 상징화하는 것이었음.
4-2. 전문 예술인의 확산 :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라는 직업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꾸려나가게 됨. : 소비재산업과 광고산업의 출현을 통해 전문적인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졌음. 광고산업은 '포스터'라는 새로운 시각예술을 만들어냄.
4-3. 예술의 국제화 및 민족문화의 번영 : 에스파냐, 러시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북아메리카로부터의 영향이 서구세계로 확산. : 1880년대부터 고급문화는 향토 수공품과 수입품의 결합에 의존하고 있었음. : 민족적 문학작품들 또한 꽃핀 시기였고, 작거나 주변적이고 오랫동안 휴지기를 거친 나라와 지역들에서도 예술이 번영.
4-4. 부르주아적 자신감의 퇴조 : 에펠탑과 미국의 마천루는 기술의 진정한 성취의 반영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은 (부르주아의) 승리주의와 문화적 자신감을 보여주지 못했음. 고급예술들은 사회적으로 쉽사리 불건전한 것이 되었으며, 부르주아 사회와 역사적 진보의 결과물들은 기대된 것과 달랐음. : 니체는 "1888년의 독일정신은 1788년의 독일정신보다 후퇴했다"고 주장. 낡은 것과 근대적인 것 사이의 전쟁에서 이제는 다시 낡은 것이 승리.
제10장 발제문 없음.
제11장 이성과 사회
◆ 진보와 세속화의 전진 ·1875-1914년 사이의 중요한 지적 진전; 대중교육 및 독학의 엄청난 발전, 대중적인 문맹의 퇴치; 독학과 자기발전은 새로운 노동계급운동의 주요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이자 노동운동의 실천가들이 갖고 있던 주요한 매력들 가운데 하나; 대중들이 역동적이었고 교육받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저변에서부터 과학을 재조직화할 준비가 되어있는 대중적 기반을 공급함으로써, 낡은 과학의 전선이 앞으로 전진하도록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 ·비유럽사회; 과학은 권력과 진보, 근대화의 이념을 의미; 농촌의 교화, 실증주의에 고무된 과두적인 정치가들을 계몽 ·유럽에서의 전통적인 종교의 급격한 후퇴: 교회의 여성화; 도시화의 자동적인 결과-경건한 시골로부터 유입된 인구들은 비종교적이거나 무신론적인 토착 도시인들에게 동화되었을 때 점점 더 비신앙적이 되어갔다; 중간계급의 합리주의와 사회주의의 협공으로 인해 신앙심은 급속하게 퇴색; 反성직주의는 정치의 핵심사항-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성과 진보의 이념을 완전히 거부하여 정치적 우파와 동일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 ② 미신과 암흑에 반대하는 투쟁은 자유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을 자본가들과 프롤레타리아로 분리시키기보다 오히려 연합시켰기 때문; 급진적인 탈그리스도교화의 가속화-유아영세를 받지 않는 경향; 요약하면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진보와 세속화는 함께 전진; 서구의 종교는 1900년대 초기보다 더 곤경에 처해본 적이 결코 없었고, 정치적으로도 그때보다 더 후퇴해본 적은 없었다 ·비백인세계에서의 종교; 이데올로기적으로 막강; 간디에게 성스럽고 영적인 삶은 독립을 성취하는 정치적 수단 이상의 것; 벵골의 청년 테러리스트-스와미 비베카난다의 영향; "세속적인 정치가 아니라 준종교적인 사회를 통해 인도인들을 먼저 민족적인 관점에서 사고하고 조직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교육해야 한다"; 근대성을 환영했던 교육받은 계층들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것과 분리시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반란은 늘 자신이 믿는 신의 깃발 아래서 이루어졌다(쫓겨난 칼리프, 실패한 터키 술탄, 그리스도 왕을 내세운 멕시코 혁명); 지구적 규모에서 종교가 1780년 혹은 1870년보다 1914년에 더 약해졌다고 간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마르크스주의의 결정적인 매력점은 그것이 '과학적 사회주의'였다는 데서 비롯; 유물론적이고, 결정론적이며, 불가피론적이고, 진화주의적이었으며 '과학의 법칙'은 '역사의 법칙'과 확고하게 동일시되었다 ·민주화와 세속화의 결합이 가져다준 자연스러운 혜택은 정치적인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좌파에게 돌아갔다 ·사회혁명과 사회해체 직전에 와있던 지역들(이탈리아, 동부와 중부유럽, 차르의 러시아)에서 지식인 집단의 지지를 획득; 서유럽에서는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보다 강력한 마르크스주의자;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제기하는 지적인 문제에 대해 대안적인 비사회주의적 대응을 모색하거나 그것의 이론을 비판하려는 사람들, 즉 정치적인 도전일 뿐만 아니라 지적인 도전을 시도했던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영향력 행사;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었던 영국같은 나라에서는 마르크스에 대해 신경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조류가 강력한 운동으로 존재(뵘바베르크)
◆ 사회과학과 인문과학 ·경향; 제국의 시대가 점차 진행되면서 자연과학과의 분리가 두드러졌다; 진화의 이론을 통해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역사와 과학이 서로 분리되어가고 있었다.; 실증주의적 혹은 '명징한' 사회과학의 성장; 격렬하고 논쟁적인 발전은 부르주아 세계의 지적인 위기와 밀접하게 연결; ①사회와 정치 자체는 대중의 시대에 관한 문제 그리고 특히 사회구조와 응집에 관한 문제(혹은 시민적 충성심과 정부의 정당성 문제)에 관한 재고를 요구 ②인간의 합리성과 사물의 자연적인 질서에 관한 19세기적 가정에 대해 새로운 의심이 제기 ·경제학; 역사적 역동성, 경제적 발전, 경제적 유동과 위기의 문제가 새로운 학문적 정통분야로부터 축출;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라고 묘사될 수 없는 모든 거래행위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학문으로 정의; 한계효용과 균형에 관한 작업(1860년대와 1870년대에 이미 그것을 완성시켰던 제번스, 발라, 멩거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언어학;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던 언어학 모델에 대한 관심마저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소쉬르-추상적이고 정적인 소통구조에 모든 관심 집중, 단어는 우연하게도 하나의 가능한 매체가 될 수 있었다. ·심리학; -개념과 학습과 행위의 실험적인 변형에 관한 연구를 추구하기 위해 실험실로 달려들어갔다-실험적인 과학자들과 똑같아지려 했다; '행동주의'(파블로프, 윗슨)-점수 채점의 심리학(비네의 인지시험); 1904년 실험심리학이란 제목의 최초 정기간행물은 러시아인 베크테레프가 만들어낸 것-기원은 1860년대에 만들어진 독일의 빌헬름 분트 학파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실험적인 상황이 아니라 인간정신 전체에 관계하고자 했던 심리학; 이성의 위기-합리적인 목표의 추구가 동물들의 그것과 같은 '본능'의 집합에 기초하고 있다면, 합리적 정신이 무의식의 파도와 같은 흐름 위에 표류하는 작은 배와 같다면, 합리적 의식이 그저 특정한 종류의 의식에 불과하다면, 전적으로 다른 의식의 잠재적 형태가 존재하고 있다면 인간적 효용성을 극대화함으로써 합리적 목표를 추구하고자 했던 시민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극적인 프로이트는 심리분석을 창조해냈고 그 자체를 심리학의 다른 분야와 분리시켰다-전통적인 과학서클에서는 의심스럽게 취급, 보통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지게된 과학자,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동을 그들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것으로(무의식 탓으로) 돌릴 수 있게하는 이론의 편리함에 기인, 성적 터부의 파괴자로 간주, 하지만 새로운 성과학자들(성적경향에 대한 공적 관용을 주장, 성적 소수에 속해 있던 사람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 했던 개혁주의자들)과는 달리 프로이트는 성적문제에 관련된 공적인 관심에 대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쨌든 심리학이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인류가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가에 대해서였다; 의식적으로 반민주적이었던 '군중심리학'-폭도들 중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성적인 행위를 포기한다(트로터), 비누는 논쟁에 의해 팔리지 않는다(광고심리학) ·사회학; 제국의 시대에서 사회과학의 가장 독창적인 산물; 담당교수가 드물었던 학문 분야(뒤르켐과 막스베버 정도);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이 오늘날 사회학으로 분류될 수 있다-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자유주의 이론이 이해할 수 없었던,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다양한 분야에 통일성을 부여; 당시 사회학의 주요한 관심사는 '어떻게 변형시킬 것인가라기보다는 어떤 변화를 담아낼 수 있는가, 즉 사회를 어떻게 혁명화할 것인가'; 일부는 '사회가 어떻게 현실적으로 작동하는가'에 관심 집중-경험에 기초한 '정치사회학'; 일부는 '사람들 내부에서 계급과 집단들 간의 갈등에 의해 붕괴되는 힘에 대항하여 사회를 묶어두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인간성을 뿌리뽑고 왜곡된 개인들('아노미')로 환원시키는 자유사회의 경향'에 대해 관심 집중; 제국주의가 인류학자들로 하여금 밀접한 관찰을 허용했고 때로는 요구했던 '현장조사'가 20세기 초반 사회인류학에서 정규과목화; 여전히 핵심적인 문제로 남은 '인류의 역사적 진화의 문제'-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개념을 논박하는 일, 마르크스적 질문에 대해 비마르크스적 해답을 구하려 함, 부르주아 마르크스로 불린 베버 -제국의 시대에 사회학의 발전을 추동하고 결정했던 것은 부르주아 사회가 드러내고 있는 사태에 대한 위기감, 덜 바람직한 다른 종류의 사회로 해체되거나 변형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의식; 혁명과 해체라는 사태를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줄 수 있었나?-아니었다.
제12장 혁명을 향하여
·1899년부터 1914년까지의 약 15년은 서구에 있어서는 상당한 정도로 '관리가능'한 것으로 보인 반면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는 혁명의 시대였다; 부르주아의 세기는 ①주변부 사회경제의 낡은 구조와 사회의 균형을 침식시키고 ②기존의 정치체제와 제도들의 안정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주변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단절과 몰락;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정치세력들이었던 제국(중국,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의 몰락 ◆이슬람 왕국들 ·모로코; 가장 서구적; 전략적 요충지인 북서 아프리카의 모퉁이에 위치한 까닭에 어떤 세력들에게도 적합한 희생물의 위치; 취약한 왕조, 특히 외국의 야심에 취약;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모로코를 분할; 국제적인 이해관계는 탕헤르에 자유항을 설치함으로써 보호 ·페르시아; 러시아와 영국의 이중적 압력; 다른 서구국가들(벨기에-미국-1914년 이후 독일, 실제적인 균형점을 제공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함)에 원조와 지원 요청; ①계몽되고 서구화된 지식인 집단 ②외국의 경제적 경쟁력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던 상인계급 ③민족종교의 일종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전통적 대중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시아파를 대변하는 이슬람 종교지도자 집단이라는 세 부류의 세력 존재; 1890-92년 거부투쟁으로 영국에 부여된 담배 독점사업권 취소, 상인들과 종교인들간의 동맹; 러일전쟁(1904-5)과 제1차 러시아혁명으로 페르시아를 압박했던 열강 중 하나가 일시적으로 떨어져 나감; 1906년의 선거로 구성된 의회와 헌법제정(헌법은 서구적 혁명의 명백한 요구와 '저력의 비밀'로 간주됨); 명목적으로 1979년까지 1906-7년의 헌법과 같은 종류의 헌법 아래 유지; 최초의 혁명적 시기는 1911년에 사실상 종결; 어떤 제국주의 세력도 영국과 러시아에 도전할 만한 실질적인 위치에 있지 못했기에 페르시아의 존재를 보장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 ◆중화제국 ·뿌리깊은 내적위기; 태평천국의 난, 제국주의 열강들의 연합에 직면(영국 식민지 홍콩의 확장, 티베트 병합, 독일의 북중국 영토 획득, 인도차이나 제국의 주변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 일본의 만주점령, 포르투갈의 마카오 획득), 미국의 '문호개방' 정책 주장; 중화제국을 둘러싼 태평양 세력들간의 경쟁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발발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 단기적으로 이들은 중국의 명목적인 독립을 유지시켰으나 결국에는 몰락을 야기 ·중국의 정치세력; ①제국의 궁정관리들과 유교적 고위관료들; 서구모델을 따르는 근대화만이 중국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인식,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표방하고 있는 도덕과 정치제체의 명백한 파괴를 의미, 그들의 개혁은 실패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②저항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고전적이고 강력한 민중봉기와 비밀결사의 전통을 가진 집단들; 1900년 의화단 사건; 전투적으로 외국인혐오, 반근대적; 중국혁명을 위한 근거를 일부 제공하기긴 했지만 혁명의 프로그램이나 전망을 제공해줄 수는 없었다 ③비밀결사와 젊은 남부의 공화주의적 혁명가들; 만주왕조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과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 '근대민족주의적 표현' 또는 '사회혁명'의 개념; 쑨 원의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소수의 공화주의적 도시 지식인들의 비밀결사는 도시와 특히 농촌의 대중들에게 접근하는데 결정적, 해외 중국 이민사회에서 지지세력을 조직하는데 도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결사들은 새로운 중국을 위한 최선의 기반이 될 수는 없었으며, 서구화(반서구화)된 급진적인 지식인들은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1911년 제국의 붕괴; 무장봉기의 요소를 갖춘 공화주의적 봉기, 향신들의 제국에 대한 충성철회, 대중적이거나 비밀결사적인 혁명의 복합적인 작용; 제국을 대체했던 것은 새로운 체제가 아니라 주로 군벌들이 통제한 불안정한 지방권력구조들의 이합집산; 1949년 공산당 승리까지 40년 동안 새롭고 안정된 정권을 만들어내지 못함 ◆오스만 제국 ·1914년 무렵 터키는 유럽에서 거의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으며, 아프리카로부터는 완전히 제거되었고, 겨우 중동지역에서 취약한 제국의 명맥을 유지했은데 그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후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1908년에 권력을 장악한 청년터키당; 계몽주의의 터키식 판본-콩트의 실증주의에 바탕, 과학에 대한 열정적인 믿음, 종교와 등가적인 세속화, 비민주적 진보(질서와 진보), 계획된 사회공학을 지니고 위로부터 추진되는 근대화의 혼합; 이 이데올로기는 20세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세력들을 묶어줌으로써 후진적이고 전통주의적인 나라에서 권력을 장악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엘리트들의 냄새; 이는 1908년 터키혁명의 실패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세력의 편에 서게 된 원인; 이후 터키의 근대화는 자유-의회주의적인 것으로부터 군사-독재적인 틀로, 세속적·제국적·정치적 충성으로부터 순수한 터키 민족주의로의 충성이라는 현실로 전환; 인종적으로 동질적인 민족을 만들겠다는 경향, 인종적이고 심지어 인종주의적인 근대화주의로 방향을 선회; 제국 자체의 실질적인 폐기로부터 시작된 진정한 터키 혁명은 1918년 이후 그러한 틀을 갖추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페르시아나 중국과는 달리 터키는 낡은 구체제를 붕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과정으로 진행; 현대 최초의 제3세계 근대화 정권의 출범-혁명적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 혹은 다른 어떤 혁명적 계급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지식인들과 특히 전후에는 군인들이 권력을 장악; 근대화 프로그램의 무자비한 실행은 현대 터키의 발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식민지 해방운동 ·멕시코 혁명(1910년); 중요성이 간과되었다; 중앙아메리카가 워싱턴의 배타적인 뒷마당이었고 혁명이 갖는 함의가 너무 불투명했기 때문; 중요한 이유-제국의 세계 내에 존재했던 모순의 직접적인 산출물이기 때문이며 노동하는 대중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식민지와 종속된 세계에서 발생한 최초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사파타와 빌라 ·식민지의 직접통치가 그다지 인기가 없었던 까닭에 전쟁 이후(1922)직접적인 통치를 점차 줄이는 방향으로 폐지되어갔다.; 아일랜드의 반독립과 이집트의 반자치; 인도의 해방운동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가 가장 취약했던 지점은 공식 제국주의라기보다는 비공식 제국주의가 지배했던 회색지대; 이 지역은 제2차 대전이후 '신식민지'로 불리게 될 지역들; 라틴아메리카; 경제적 제국주의를 그것의 주변지역으로 인식했던 자신의 나라에게 역사적 운명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자 진보를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희망; 부르주아 세계의 보편적 인종주의의 영향하에서 진보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국민들을 생물학적으로 개량할 생각을 품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 ·거대하고 무거우며 비효율적이었고 경제적으로 기술적으로 낙후되었던 차르의 제국은 국가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이 차르를 설득한다거나 위로부터의 조치를 통해 국가기구를 변화시키는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혁명을 통하는 길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차르 체제의 내적.외적 취약성; 차르의 정부가 농업개혁을 잘못하고 있으며 농민을 무시했다는데에 대한 공감; 차르의 경제적 근대화가 몰고온 결과 ① 석탄, 철광석, 철 생산물, 철도 길이의 두배 증가 ②급증하는 산업프롤레타리아의 출현, 사회혁명을 선언한 노동운동의 출발에 직면 ③비러시아 지역(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폴란드)의 부적절한 발전, 러시아화정책, 사회적이고 민족적인 긴장이 동시에 강화; 모험적인 대외정책-일본의 확장세와 맞부딪치게 됨 이와같은 내적·외적 취약함의 결과 혁명운동의 출현 ①초기 '인텔리게치아들'로부터 전적으로 충원된 혁명운동; 1세대는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의 소집단 테러; 러시아 혁명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기여 ②마르크스주의; 레닌에 의해 지도, 점차 대세를 장악하게 됨 ·1905년의 혁명; 최초에는 정부의 후퇴를 가져왔고 나중에는 10월 17일의 헌법과 같은 것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던 것은 노동자들;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 자유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모두 혁명은 다만 서구적 부르주아 정당체제의 성립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아무런 반대없이 받아들였다. 러시아가 너무나 후진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건설은 직접적인 혁명의 강령이 될 수 없다는 점에 일종의 동의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 레닌은 이를 '프롤레타리아적 방식에 의해 획득된 부르주아 혁명'이라 말함; 레닌은 부르주아가 부재하거나 취약한 상황 속에서, 부르주아없이 부르주아 혁명이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레닌주의적 전망은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과 농민계급이 혁명적 세력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그것이 차르의 적인 한에서 혁명적인 세력의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는 민족해방 세력들을 동원하여 그들과 동맹하고 적어도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것 ·1907년 차르는 대부분의 헌법을 폐기하고 과거의 귀족국가로 되돌아가려 함; 1905년 혁명의 실패는 차르 체제에 대한 잠재적인 부르주아적 대안도 차르 체제에 대한 6년간의 유예기간 이상의 것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1912년부터 프롤레타리아 봉기의 물결이 다시 발생하기 시작; 1917년 차리즘의 붕괴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 범위의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가 정복자의 세계와 희생자의 세계에 동시에 속한다는 사실, 진보와 후진적 세계에 동시에 속한다는 사실은 러시아 혁명이 두 세계 모두에 막대한 잠재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제13장 평화에서 전쟁으로
·1815년 이래로 모든 유럽의 열강들이 개입되었던 전쟁은 없었다. 평화는 유럽인들의 삶에서 정상적인 것이었고 또한 기본적으로 기대되는 틀이기도 했다. 유럽의 열강들은 대부분 비유럽 세계의 약한 자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희생물을 찾아냈다. ·오스만 제국의 해체과정에서의 상호투쟁으로 전쟁이 사실상 영구적인 가능성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통제력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일반적인 전쟁 예측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1890년대에 세계평화회의, 노벨평화상 제정, 최초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등의 모임들이 계속 개최; 하지만 전쟁의 발발이 현실적으로 기대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1914년 7월 위기고조 속에서도 여전히 전면전은 불가능할 것이라 확신;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에서 1871-1914년 사이에 유럽 전쟁은 역사적 기억이거나 규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약간의 이론적인 생각에 불과 ·군대; 의무복무제가 일반적인 규칙; 국가의 성원으로 만들기 위한 기제; 내부 진압에 동원; 일상적인 전쟁 특히 식민지에서의 전쟁에 동원-의료와 관련된 위험, 열대질병으로 인한 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작업의 상당부분은 민간인들이 종사하는 어떤 직업(광업, 해운 등)보다는 훨씬 덜 위험; 생과 사가 엇갈리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군복을 입었을 때가 아니었다. ·군비경쟁; 군사기술의 발전이 야기시킬 전쟁의 엄청난 변화를 예측했던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들이었다; 미래의 전쟁이 갖는 재앙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는 신기술이 승리를 보장해 줄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정열적으로 군비경쟁에 몰두; 특히 전쟁 전 30년 동안에 급속하게 진행; 막대한 지출과 거대산업의 출현; 전쟁분비가 거대산업의 한 부분이 되면서 거대산업은 정치적 필수품이 되었던 까닭에 전쟁과 군수품 생산의 공생은 불가피하게 정부와 산업간이 관계를 변화시켰다; 군수물자를 소비하는 것은 국가-국가들은 기술적인 발전비용을 지불하고 그것의 이윤을 보장해주면서, 강력한 군수산업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야 할 의무를 가짐; 전쟁과 자본주의의 집중은 함께 진행되었다; 세계대전을 무기상들의 음모에 의해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1914년 이전의 5년 동안 최고조에 달했던 무서운 군비의 집중은 상황을 더욱 폭발적으로 만들었다는 것;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것은 경쟁적인 군비확충 그 자체가 아니라, 열강들을 그와같은 상황으로 몰고 갔던 국제적인 상황이었다. ·전쟁의 원인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 전쟁범죄의 테제, 제국주의적 경쟁 등; 최대한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심연을 향해 완만히 기울어져가는 어떠한 시점에서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명되자 몇몇 정부들은 최소한의 악의를 가지고 적대감을 도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결정하게 되었다는 점; 제1차 대전의 기원을 규명하는 문제는 '침략자'를 규명하는 문제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정부의 통제를 점차 벗어난 국제적 상황이 점진적으로 왜곡되어간 사태의 본질에 기인했다; 권력의 블록체제는 반대되는 동맹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때, 특히 그들간의 분쟁이 통제할 수 없는 대립을 만들어 낼 때만이 평화에 대한 위협이 된다. 이것이 바로 20세기에 들어와서 발생한 상황 ·그렇다면 왜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는가; 1880년대에서 1914년에 이르는 전선 배치에서는 적수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가장 안정되어 보이던 외교적 형태는 1882년의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 이탈리아는 탈퇴하여 1915년 반독일진영에 가담); 세가지 상황전개(열강들내에 존재하는 야망과 그것으로 인해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야기시킨 불안정하고도 유동적인 국제상황, 상호대립하는 블록들의 관계를 영속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은 합동군사계획, 영국이 하나의 블록으로 결합된 것)가 동맹체제를 시한폭탄으로 바꾸어놓았다; 가장 놀라운 일은 영국이 반독일진영에 가담하여 프랑스, 러시아와 확고한 동맹관계를 맺었다는 것(영, 프, 러 삼국협상, 1907년에 완성); 국제외교관계의 행위자(미국과 일본의 출현)와 법칙의 변화(지구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규모의 전개)가 그 원인이었다; 기업이익은 평화가 보장되는 한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세계를 국가경쟁, 제국주의적 팽창, 갈등과 전쟁의 방향으로 몰고갔다; 경제적 세계에서 영국은 더 이상 세계의 공장이 아니었으며 가장 중요한 시장도 아니었다. 영국의 상대적인 침체는 분명해졌고 경쟁적인 다수의 산업경제국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하에서 경제적 경쟁은 국가들의 정치적인, 심지어 군사적인 행위와 맞물려 요동쳤다; 영국은 가능한 한 현상유지를 달성하려는 세력을 대표했으며, 독일은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불가피하게 영국의 희생을 통해 그것의 변화를 달성하려는 세력을 대표했다; 이러한 블록들이 유럽을 전면전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어떤 정부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 2년후 터키 혁명, 1911년 모로코에서의 대립은 두 열강 세력 간의 대립이 어떤 것이라도 전쟁이라는 분기점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내적으로는 현실적인 외교정책의 비밀을 조심스럽게 지켜나가기에는 민주정치 그 자체가 매우 큰 위험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무책임한 군사전문가들에게 권력을 양위한 비민주적 정치는 더 나빴다-해결 불가능한 국내문제에 봉착한 나라들이 외국에서의 승리를 통해 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겠다는 도박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특히 군사전문가들이 정치가들에게 그와같은 제안을 하면서 그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말했을 때; 감당할 수 없는 민족문제를 가졌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바로 그러했다; 정부들의 무장 요구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국적인 열정의 물결에 휩싸여 가벼운 마음으로 도살장으로 행진해갔다. 단기적이었다 해도 국제주의와 평화에 헌신하던 운동이 갑자기 불능상태로 붕괴되고 지배계급의 주창하에 민족단결과 애국주의의 물결이 교전국들의 당들과 심지어 계급의식화된 프롤레타리아를 압도
글을 마치며
놀라운 기술발전, 생산능력의 발전, 인간사회 조직의 부정할 수 없는 발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적 재앙, 야만적인 방법의 확산 또한 문명화된 세계의 통합적이고 예상되는 일부가 되어버렸다. 습관적으로 역사를 진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야 할 이유는 명백한 것 같다. 20세기의 진보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진보는 지속되는 상향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거대한 재앙의 가능성(더욱 치명적인 세계대전, 생태학적 재앙, 인간이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세계를 만들지도 모르는 기술적 승리 등)을 동반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하는 것이 훨씬 올바를 것이다. (혁명이) 현실적인 것이었든 상상된 것이었든, 체제에 대단히 위협적이었던 기간은 매우 짧았으며 그리하여 결국 과격한 처방이 전혀 필요없어지면서 사태는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20세기는 사회혁명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이 끝나기 전에 더 많은 사회혁명들이 출현하게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전된 시장경제'의 경제와 사회들은 대단히 견고했다. 다른 어떤 사회들보다 더 많은 저항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1914년 이전과는 매우 다른 그 무엇으로 자신을 변형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비볼셰비키적·비혁명적·'개혁주의적' 사회민주당과 같은 그 무엇으로 스스로를 동화시켜나갔다. 실제로 사회민주당은 1917년 이후 서유럽에서 사회적·정치적 지속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주요한 행위자로 나타났으며, 그에 따라 야당의 입장에서 잠재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정당으로 전환되어갔다. 한마디로,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회는 사라지거나 혹은 스스로를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최초에는 정치적인 위기였고 곧이어 경제적이었던 위기는 자유주의적 정통성에 대한 케인스주의적인 재검토의 기반이 되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필요하다면 자본주의 경제를 공적/사적 경제가 혼합되는 방식으로 전환시키고, 경제의 일반적인 형태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심지어 계획할 때야만 자본주의 사회를 생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가장 지적이고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 잇는 방법이 되리라는 것을 공식화했다. 1914년 이전의 자유주의적 용어로 씌어진 자본주의가 죽어버렸다는 교훈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에, 그리고 세계의 침체 속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일반적으로 19세기 그리고 특수하게는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되었거나 그것의 연속선상에 있다.(제국의 시대로부터 전승된 것들; 도시화, 지구화, 여전히 부르주아의 세기, 사회주의 나라들과 그밖의 나라들로 분화(마르크스의 그림자), 세계의 정치적 패턴의 지구화, 민족국가, 여성해방의 진행, 대중문화(스포츠, 영화, 언론)라는 근대 도시사회의 특징들 대부분이 탄생) 제국의 시대는 세계역사상 다른 어떤 시대들보다도 유럽인들의 시대였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모든 과거의 역사가 어쩔 수 없이 중단되어버린 시대였다. 제국의 시대는 세계가 변화된 시기였다. 이전과 이후의 어떤 세기에도 사람들이 이 땅위에서 살아가면서 그렇게도 고상하고, 그렇게도 유토피아적인 기대를 했던 적은 없었다. 단일한 세계언어를 통한 보편적인 평화, 보편적인 문화,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그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답하려 했던 과학, 과거 역사전체로부터 여성의 해방, 노동자들의 해방, 성적 자유, 풍요의 사회를 통한 모든 인간의 해방,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세계와 같은 기대들이 바로 제국의 시대에 사람들이 가졌던 기대들이었다.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들이나 멈추지 않는 물질적·지적·도덕적 진보를 기대했다. 그리고 양자 모두는 그것을 어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가는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력과 투쟁을 통해 달성될 것으로 기대했다.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희망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회의주의와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희망의 여지는 있다. 반대되는 편견과 외양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이고 지적인 진보 속에서 20세기 실질적으로 성취했던 것들이 유례 없이 인상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희망의 여지는 있다. 이 모든 희망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희망, 즉 두려움과 물질적 결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들이 훌륭한 사회에서 훌륭한 삶을 영위하게 될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존재할 여지는 남아 있는가? 왜 안되겠는가? 역사가 우리에게 반드시 올바른 결과를 보장해준다고 믿지 않을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역사가 우리에게 반드시 나쁜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으리란 점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해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미래는 그것에 대해 가장 멀리 예측한 사람들조차도 놀라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극단의 시대 : 20세기의 역사』
20세기 : 개관
1.2. 단기 20세기의 구조 및 이 책의 구성 1) 1914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까지의 파국의 시대 - 2번에 걸친 세계대전, 그리고 두 차례의 전세계적 반란과 혁명 - 전례없는 수준의 세계적 경제위기는 파시즘과 그것의 위성격인 권위주의적 운동들 및 체제들을 부상시킴 - 파시즘에 맞선 자본주의-공산주의의 동맹의 이 시기(1930-40년대)는 여러 점에서 20세기사의 중심이자 결정적인 시기이며, 또한 역설의 시기 : 히틀러에 대한 소련의 승리는 10월혁명으로 소련에 수립된 체제의 성과였으며, 그러한 승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서방세계는 아마도 자유주의적 의회주의라는 테마의 변주곡보다는 권위주의적 , 파시스트적 테마의 변주곡들로 이루어졌을 것. 또한 소련의 사회체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신의 적대자들에게 자극과 공포를 줌으로써 그들 자신을 개혁시키고, 경제계획의 인기를 확립하여 그들에게 개혁절차들 중 일부를 제공. ; 자본주의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10월혁명의 가장 지속적인 결과가 전쟁에서나 평화에서나 자신의 적대자들을 구한 것이었다는 점은 이 기묘한 세계의 아이러니들 중 하나 -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세계적 도전이 보인 위력은 자본주의가 약한 데에 기인한 것 : 파국의 시대에 19세기 부르주아 사회가 붕괴하지 않았더라면 10월혁명도 소련도 없었을 것/ 전(前) 차르제국에서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급조된 경제체제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보이게 된 것은 1930년대의 대공황 덕분이었고, 소련이 히틀러를 패배시키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되고 그럼으로써 양대 초강대국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파시즘의 도전 덕분
2) 이후 약 25-30년간의 엄청난 경제성장과 사회적 변화 - 정확히 어떻게 그리고 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주의가 1947-73년의 전례 없고 어쩌면 파격적인 황금시대로 급진전했는가? 아직은 합의된 답변이 없음 - 그러나 자신있게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이 황금시대가 낳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변동의 엄청난 규모와 충격 : 그리고 이러한 황금시대는 대체로 국경들을 넘어서 '초국가적으로' 기능하고 따라서 갈수록 국가 이데올로기의 경계들도 넘어서 기능하는, 단일하고 갈수록 통합되고 보편적인 세계경제를 역사상 처음으로 창출 - 이에 비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의 역사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아마도 역사적 중요성이 덜한 것으로 보일 것 : 그러나 20세기 말의 독자들에게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이 책에서도 사회혁명들과 냉전, 그리고 '현존사회주의'의 본질과 한계와 치명적 결함 및 그 몰락에 대해서 상세히 논의함 - 10월혁명에 의해 고취된 체제들의 주된 지속적인 영향은 후진농업국들의 근대화에 대한 강력한 촉진제로서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
3) 1970년대 초 이후 해체, 불확실성, 위기의 시대 - 1970년대에 부딪친 난관은 처음에는 세계경제의 대약진이 잠시 중단된 것일 뿐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장기적 난관의 시대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음 -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자본주의 세계는 황금시대가 이미 해결했던 것으로 보인 전간기(戰間期)의 문제들대량실업, 심각한 주기적 불황, 엄청난 빈부의 격차 및 국가 수입과 지출의 불일치로 다시한번 비틀거리게 됨 - 사회주의 국가들도 그 경제가 정체되고 약화되어, 자신의 과거와 근본적인 단절을 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결국 붕괴를 향하여 나아감
3. 단기 20세기말의 세계가 이전과 질적으로 지점들
1) 우선 그 세계는 더 이상 유럽 중심적이 아니었음 - 1914년의 '열강'은 차르 러시아의 계승자인 소련처럼 사라졌거나, 아마도 독일을 제외하고는 지역적 또는 지방적인 지위로 떨어졌음 : 초국가적인 단일한 '유럽공동체'를 창출하려고 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유럽 정체성(正體性)의식역사적 민조고가 국가에 대한 오랜 충성을 대체하는을 만들려는 노력 자체가 이러한 하락의 정도를 보여줌 - 그러나 미국은 여러 가지 독특한 점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확대된 유럽이었다고 할 때, 이전의 유럽 중심적 또는 '서구적'인 세계가 완전히 몰락했다는 인상은 피상적이라고 할 수 있음 2) 1914년에서 1990년대 초 사이에 지구는 훨씬 더 단일한 작동단위가 되어감 : 아마도 20세기 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세계화 과정은 갈수록 빨라지는데 공적제도와 인간들의 집단적 행동은 둘 다 그러한 과정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 될 것 3) 오래된 유형의 사회관계들이 해체되고, 세대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 :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 가치관이 공식적 이데올로기와 비공식적 이데올로기 둘 다를 지배
제1장 총력전의 시대
1.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조약 - 세계대전 없이는 단기 20세기를 이해할 수 없으며 전쟁은 그 세기에 흔적을 남김 : 단기 20세기는 총소리가 나지 않고, 폭탄이 터지지 않았을 때조차 '세계전쟁'의 견지에서 살았고 사고했음. -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유럽 열강과 (스페인,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3국, 스위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국가를 끌어들임.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이 '유럽 문제에 말려들지' 말라는 조지 워싱턴의 경고를 거부하고 유럽에 파병함으로써 20세기사의 양상을 결정지었다는 것 - 제2차 세계대전이 문자 그대로 세계적이었다는 것은 거의 증명할 필요가 없음 : 그것은 일종의 세계지리 수업이 됨. - 1816-1965년에 일어난 74차례의 국제전 중 사망자수로 등급을 매긴 바에 따르면, 위에서 네 번째까지의 전쟁이 20세기 발생 : 양차 세계대전과 1937-39년의 중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 - 제1차 세계대전의 2중적인 부정적 영향 : 전쟁에 복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확고한 전쟁 혐오자가 되었지만, 반감을 가지지 않은채 이러한 종류의 전쟁을 겪었던 퇴역군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수적 우월감을 느꼈고 이러한 우월감이 전후 극우파의 초기 대열을 지배/ 그러나 정반대의 반작용은 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민주주의 정부들이 자국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적국 시민들의 생명은 마음대로 희생시킬 수 있는 것으로 다루게 함(1945년의 원폭투하는 승리에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미국 군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수단으로서 정당화됨) -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어떻게 타게 할 것인가가 양쪽 진영 모두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됨 : 양쪽 진영 모두 기술에 의해서 이를 깨뜨리고자 했는데, 독일은 독가스를 싸움터에 도입했으며, 영국은 아직도 '탱크'라는 암호명으로 알려져 있는 캐터필러 장갑차를 개발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함. - 1914-18년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친 유일한 과학기술적 무기는 잠수함 : 이는 상대방 군인들을 패배시킬 수 없었던 양쪽 진영 모두, 상대방측 민간인들을 굶겨 죽이는 방법을 썼기 때문. 그리고 이 작전은 미국을 1917년 전쟁에 끌어들이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하게됨. ▶ 왜 제1차 세계대전은 양쪽 진영의 주도적 열강 모두에 의해서 제로섬 게임으로, 즉 완전한 승리 아니면 완전한 패배만이 있을 수 있는 전쟁으로 수행되었는가? - 이는 대체로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제한된 목표를 위해서 수행되었던 이전의 전쟁들과 달리 무제한적인 목표를 위해서 수행된 전쟁이었기 때문 - 독일은 당시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것과 같은 세계적인 정치적, 해상적 위치에 올라서기를 원했으며, 독일이 그러한 위치에 올라선다면 이미 하락하고 있던 영국은 자동적으로 더 낮은 지위로 떨어지게 될 것이었음. 양쪽 모두에게 타협은 단순히 연기만을 의미했을 뿐.
▶ 살아남은 주요 승전국들(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의해서 부과되었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알려진 강화조약을 지배했던 다섯 가지 고려사항 ① 유럽에서 그렇게도 많은 체제가 붕괴했다는 사실과 전세계적 체제전복에 전념하는 대안적인 혁명적 볼셰비키체제가 러시아에 출현했다는 사실 ② 단독으로 연합국 전체를 거의 패배시킬 뻔했던 독일을 통제할 필요 - 이는 실질적으로 영토의 축소보다는 실전에 쓸 수 있는 해군과 전 공군의 박탈, 육군병력의 10만으로의 제한, 이론상 무제한의 배상액, 서부 독일 지역의 군사적 점령, 독일의 전 해외식민지들을 박탈함으로써 성취가 보장될 수 있었음 - 그러나 1930년대 중엽에 이르면 영토에 관한 조항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강제력을 잃음 ③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제국, 오스만 제국이 동시에 무너짐으로써 유럽과 중동에 생긴 큰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유럽의 지도를 재분할하고 다시 그려야 했던 것(이것의 기본원칙은 민족들이 '자결권'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에 따라 민족-언어적 국민국가를 창출하는 것: 그러한 시도는 1990년대의 유럽에서 볼 수 있듯이 일종의 재난이었으며, 1990년대 대륙을 분열시킨 민족분규는 베르사유의 망령이 다시 한번 돌아온 격) - 세계를 볼세비즘의 공격을 받을 염려가 없도록 만드는 것과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일치 : 영토의 대부분 또는 전체를 전(前) 러시아 땅에서 잘라내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가를 성립(핀란드, 발트 소 공화국, 폴란드, 루마니아) - 전에 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속했던 지역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일로써 탄생한 유고슬라비아나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결합물은, 역사적 선례도 논리도 존재치 않음 ④ 승전국들의 국내정치와 그 나라들 사이의 알력이라는 문제 : 가장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미국의 국회가 주로 대통령이 서명한 평화조약을 비준하기를 거부했고 그 결과 미국이 그 조약에서 이탈한 것 ⑤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할 평화조약의 모색 - 포괄적인 '국제연맹'의 설치는 강화조약의 일환으로 설치되었으나, 통계자료를 모으는 기구로서의 역할을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실패작 - 더구나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 거부는 그 기구로부터 조금이나마 있던 현실적 의미마저 박탈 - 승전국들이 독일을 완전히 억누르고, 소련을 완전히 불법화하려는 목적하에서 성립된 베르사유 조약은 곧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남 - 또한 1930년대의 대공황은 독일과 일본에서 대결을 통해 의식적으로 현상을 타파하는데에 전념하는 군국주의 정치세력과 극우파를 집권시킴
2. 제2차 세계대전
▶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가 왜 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 한쪽은 명확히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일을 한데에 비해, 다른쪽은 전쟁을 찬미했지만, 침략국들 중 어느 나라도 실제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들이 하게 된 종류의 전쟁을 원치는 않았음 - 일본이 총력전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오직 미국이 총력전에 들어갔기 때문이며, 독일의 경우 1939년의 (영국과 프랑스가 지원하는) 폴란드와의 전쟁은 히틀러의 작전계획에 없었고 그가 결국 벌이게 된 소련과 미국 둘 다와 싸우는 전쟁은 모든 독일 장군과 외교관에게 최악의 사태였음. - 유럽에서의 히틀러의 승리로 인하여 동남아시아에 제국의 부분적인 공백이 생겼고, 이제 그곳으로 일본이 이동했으며, 미국은 추축국이 동남아시아로 뻗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고 무역과 공급을 전적으로 해상교통에 의존하던 일본에게 모진 경제적 압력을 가함 :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을 야기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갈등.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은 세계규모가 됨 - 전반적으로 독일이 러시아에 침입하기로 한 결정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기로 한 결정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부를 결정지음
- 1945년의 승리는 전면적이었고 무조건적이었으므로 어떠한 공식적인 강화조약도 체결되지 않았으며, 평화협상에 가장 가까운 것은 주요 연합국들이 전리품의 분배를 결정하고 전후의 그들 서로간의 관계를 결정하고자 했던 1943-45년의 일련의 회담들 - 제2차 세계대전의 손실은 문자 그대로 헤아릴 수 없고, 대략적인 추정치를 내는 것 조차 불가능 : 전쟁사상자 수에 관해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여성보다 남성이 많이 죽었다는 것뿐, 소련에서 1959년도까지 35세와 50세 사이의 남성 대 여성 수의 비율은 4:7이었음.
3. 양차 세계대전의 기본적 성격 : 총력전, 대량전.
- 20세기의 전쟁은 교전중에 그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생산물을 사용하고 또 파괴했다는 의미에서 대량전이었음 : 나폴레옹은 1806년의 예나전투에서 1,500발의 포탄으로 프로이센 군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하루에 20만개의 포탄을, 차르 러시아까지도 하루에 15만개의 포탄을 생산해야 했음. 대량전은 대량생산을 요구했으며, 공장의 기계공학적 공정이 혁명적으로 변화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님 - 이러한 대량 생산은 조직과 관리 역시 혁신시킬 것을 요구함 : 실제로 군대와 전쟁은 곧 어떠한 사적 사업보다도 훨신 큰 '산업'내지 복합적인 경제활동이 되었으며, 그러한 관계는 오늘날 '군산복합체'로 알려진 것을 미리 보여줌 - 정부들의 주된 문제는 어떻게 전쟁 비용을 댈 것인가 하는 것 : 그 결과 전시경제의 지휘자로 보이게 된 것은 재무성이나 재무부 ▶ 전쟁(총력전)은 기술과 생산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는가? - 총력전은 명백히 기술을 진보시켰는데, 이는 전쟁이 군대의 싸움일 뿐만 아니라 군대에 효율적인 무기와 여타의 필수적 시설을 공급하기 위해서 앞을 다투는 기술적 싸움이기도 했기 때문 - 원자폭탄, 항공술과 컴퓨터 등 - 그러나 전쟁이 성취한 것은 전반적으로 하나의 변혁이라기 보다는 변화의 가속화 ▶ 전쟁은 경제성장을 촉진시켰는가? - 제2차세계 대전의 경우, 가장 피해가 컸던 소련에게 전쟁의 순경제적 영향은 전적으로 부정적 - 다른 한편 미국 경제에게는 전쟁들이 명백히 유익했음 : 미국은 양차 세계대전에서 싸움터로부터 거리가 먼 동시에 동맹국들의 주된 군수공장이라는 사실로 득을 보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1년에 약 10%의 비율로 경제가 성장. 아마도 양차 세계대전의 가장 지속적인 영향은 단기 20세기 전(全)시기 동안 미국 경제로 하여금 전세계적인 우위를 누리게 한 데에 있을 것.
4. 전쟁의 시대가 인간에 미친 영향과 그 손실.
- 1914년 이후에 야만성이 계속 상승곡선을 그렸다는 점만큼은 불행히도 전혀 의심할 바가 없음 : 20세기 초까지는 서유럽 전역에서 고문이 공식적으로 사라졌으나, 1945년 이후에 국제연합 회원국들 중 적어도 1/3에서 고문이 일반적으로 행해짐 - 야수화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전쟁의 기묘한 민주화(대중화) : 민간인들과 민간인들의 생활이 전략의 적절하고 때때로 주된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총력전은 '인민의 전쟁'이 되었음. 대중적 국민감정이 동원되는 어떠한 전쟁도 귀족전쟁처럼 제한될 수는 없었던 것 - 야만화의 또 하나의 이유는 전쟁의 새로운 비인격성 :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일이 스위치를 누르거나 레버를 당기는 원격조작의 결과가 되어버린 것. - 그렇게 세계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강제이주와 살인에 익숙해졌는데 그러한 현상은 너무도 생소한 것이어서 그것을 지칭할 새로운 단어가 발명되어야 했음, 즉 'apatride(무국적자)'나 'genocide(대량학살)'이 그 예 - 또한 두 전쟁은 모두 유럽과 아시아의 상당 지역에서 붕과와 사회혁명이 일어나는 것으로 끝나게 됨 : 게다가 두 전쟁은 모두 미국을 제외한 교전국들을 지칠 대로 지치게 한 반면, 미국은 두 전쟁 모두 피해를 입지 않고 보다 부유해진 상태로 종전을 맞이했고 그 결과 세계의 경제적 주인으로 떠 오르게 됨 -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차이들 · 제1차 세계대전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적어도 몇십 년 동안은 해결책을 낳음 : 서방의 세계경제는 황금시대에 돌입했고,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질생활은 엄청난 개선에 힘입어 안정되었으며 전쟁은 제3세계로 추방 · 양차 대전 끝에 일어난 혁명도 그 성격을 달리함 : 제1차 세계대전 뒤의 혁명들은 갈수록 무의미한 살육으로 보였던 것에 대한 혐오에 뿌리를 둔,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 제2차 세계대전 뒤의 혁명들은 적들과의 세계적 투쟁에 대한 대중적 참여에서 나온 것.
제2장 세계혁명
- 혁명은 20세기 전쟁의 산물 : 특정하게는 소련을 낳은 혁명이 그랬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20세기 역사의 세계적 상수(常數)로서의 혁명 자체가 그러하였음 ; 20세기의 총력전이 그 전쟁에 말려든 국가들과 인민들에게 지운 부담은 너무도 무겁고 전례가 없는 것이어서, 그들은 거의 자신의 한계점과 어쩌면 극한점까지 기력을 소모해야 했음. - 러시아의 10월혁명은 프랑스 혁명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세계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일정한 국가들이 1914-45년의 장기적 세계전쟁의 두 번째 국면에서 나온 두 번째 물결의 혁명들을 통해서 소련의 예를 따랐음 - 10월 혁명이후 20세기 전 시기 동안의 국제정치는 사회혁명에 맞선 구 질서세력의 오랜 투쟁으로 볼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음 1. 첫 번째 세계 혁명의 예비적 조건들
- 1917년 3월혁명은 놀랄 것 없고 모두에게 예상된 사건 - 그러나 러시아 촌락공동체의 집단적 관습에서 사회주의적 미래로 직행할 것이라고 보았던 낭만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당연시 ; 이는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 자신도 이러한 견해를 공유 - 사태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러시아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자유주의적 '부르주아혁명'이 일어날 준비 역시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 - 1차대전으로 지속 속에서 광범위한 반전감정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들이 가진 정치적 입장의 선명성을 강화시켜나감 : 모든 주요 교전국들에서 광대한 군수산업의 조직된 노동운동이 노종자 투쟁과 반전 투쟁 양쪽 모두에서 중심지가 되어감 - 특히 10월 혁명으로 레닌의 볼세비키가 집권한 뒤에 평화에 대한 갈망과 사회혁명에 대한 갈망이 서로 융합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님
2.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 대하여
- 사회혁명의 기회가 무르익고 전쟁에 지쳤으며 패전에 직면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압박과 부담으로 무너진 중부 유럽 및 동유럽 체제들 중 첫 번째 - 러시아에서 자발적이고 지도자도 없었던 거리에서의 나흘후 부대들이 폭동을 일으키자(2월 혁명) 차르는 퇴위했고 자유주의적인 '임시정부'가 들어선후 나타난 것은 혁명적인 진공상태 : 한쪽에는 무력한 '임시정부', 다른 한쪽에는 비 온뒤의 버섯처럼 도처에서 자발적으로 피어오른 수많은 민초 '평의회(소비에트)'가 있었음/ 레닌의 비범한 성과는 바로 이러한 통제할 수 없는 무정부적인 민중의 파도를 볼세비키 권력으로 전환시킨 데 있음. - 볼세비키가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 특히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다수파가 되고 군대내에서 급속히 세력을 넓힘에 따라 임시정부의 존재는 점점 더 공허해짐 : 특히 임시정부가 8월에 있었던 반 혁명 쿠데타를 패배시키기 위해서 수도의 혁명세력에 호소해야만 했을 때 더욱 그러했으며, 그 순간 권력은 장악해야할 것이라기 보다는 집어올려야 하는 것이었음(1917년 11월 7일에 동궁을 실제로 점령했을 때 다친 사람의 수는 에이젠슈테인의 유명한 영화 "10월"(1927)을 찍을 때 보다도 적었다고 함) - 10월 혁명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임시정부의 몰락을 누가 또는 무엇이 뒤이어야 했는가 또는 뒤 이을 수 있는가 였음 : 레닌의 볼세비키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당도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 그려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또한 모든 볼세비키가 자신만큼 단호했던 것은 아니었음 - 사실 문제는 새로운 체제가 독일의 가혹한 강화조약, 다양한 반혁명적인 백군 및 정권들, 그리고 내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의 문제, 즉 당분간 볼세비키의 첫 번째, 그리고 유일한 의무는 버티어내는 것이었으며, '예상과는 달리'소련은 다음의 힘을 통해 살아남게됨 ① 유례 없이 강력한 실질적인 국가건설 도구로서 60만 당원의 중앙집권화되고 규율이 잡힌 공산의 존재. ② 혁명정부는 명백히 러시아를 하나의 국가로서 단결시킬 능력과 의지를 지닌 유일한 정부로서 애국적 러시아인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음 : 이외의 선택은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 또는 투르크와 같은 붕괴이외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였음 ③ 혁명 덕분에 토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한 농민층의지지
3. 볼세비키 혁명 이후 유럽의 혁명 실패
- 러시아를 사회주의 건설에 주력하도록 한 레닌의 결정을 정당화할 세계혁명은 그 후 상당기간 성공하지 못했으나, 10월 혁명이후 2년 동안은 혁명의 물결이 전지구를 휩쓸었으며, 적들에게 포위당한 볼세비키가 품었던 희망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음.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라인 강까지 모든 체제들을 휩쓸어 버린 혁명은 전쟁에 대한 반란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평화가 달성됨으로써 혁명이 내포하고 있던 폭발물의 뇌관이 상당 부분 제거 : 그러나 1918년의 혁명적 수병들에 의한 독일 혁명으로 사회주의 공화국이 실제로 1918년에 바이에른에서 선포되고, 1919년 봄에는 뮌헨에서 단기간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된 것 등은 러시아 볼세비키의 희망을 강화시킴 - 1920년에는 혁명의 물결이 급속히 눈에 띄게 잠잠해졌지만, 모스크바의 지도부는 1923년 말에 가서야 독일 혁명에 대한 희망을 포기 - 1920년 당시 볼세비키는 전업적 '직업 혁명가' 엘리트로 구성된 레닌주의 전위당을 모델로 삼아 새로운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레닌주의적 조직을 채택하기를 꺼리는 정당들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대한 가입이 거부되거나 쫓겨남 - 그러나 유럽에서의 혁명은 성공되지 못했으며 혁명의 전망은 아시아로 이동했고, 유럽에서의 운동은 영구적으로 분열 : 개인이든 정당이든 남은 사회주의자들 대다수가 사회민주주의운동으로 되돌아갔고, 새로 생긴 공산당들은 일반적으로 정열적이만 작은 소수파에 머물게 됨(이러한 상황은 1930년대에 가서야 바뀜)
4. 볼세비즘과 소련공산당의 지배화
- 그러나 격변의 해들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운동의 지도 아래 세계혁명의 전망에 헌신하는 정부와, 규율 잡힌 국제적 운동과,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한 세대의 혁명가들을 뒤에 남김 - 또한 대공황과 히틀러의 부상이 곧 입증해 주었듯이, 양차 세계대전 사이 세계의 상태는 묵시록적 기대를 단념시킬 만한 것은 아니었음 : 그러나 1928년-34년 코민테른이 수사적인 양식의 초혁명주의와 분파주의적 좌파주의로 갑자기 돌아선 이유는 이보다는 스탈린이 통제했던 소련 공산당의 국내정치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고, 어쩌면 불가피하게 다른 국가들과 공존해야만 하는 국가로서의 소련의 이해관계와 다른 모든 정부들을 타도하고 전복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운동의 이해관계 사이의 갈수록 벌어지는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음. - 소련의 국가적 이해관계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세계혁명적 이해관계를 압도 : 따라서 세계혁명은 과거의 수사에 속하게 되었고, 사실상 어떠한 혁명도 소련의 국가적 이해관계와 충돌하지 않고, 소련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을 수 있는 경우에만 용인될 수 있었음 - 볼세비즘은 1917년 이후 다른 모든 사회혁명 전통을 흡수하거나 급진주의운동의 변두리로 밀어냈으며,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과 인터내셔널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고 강화함에 따라, 코민테른은 이단자에 대해 갈수록 무자비한 정책을 취함.
5.6. 혁명운동의 양상들
- 세계혁명을 추구한 운동들이 발휘한 힘은 공산주의 조직형태, 즉 레닌의 '새로운 유형의 당'에 있었음 : 그러나 '전위당'모델과 혁명들 사이의 선/후 관계는 전혀 분명하지 않았음. 1917년이 보여주었듯이 사회혁명은 대항 엘리트 측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중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에 달려 있기 때문 - 사실 10월 혁명 이후의 전형적인 단기 20세기의 혁명은, 수도를 장악한 (거의 항상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서 시작되거나, 주로 농촌에서의 장기적인 무장 투쟁의 최종결과로서 시작됨. -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통해서 혁명에 이르는 길은 20세기 사회혁명가들에게 다소 늦게 발견됨 : 그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기본적으로 농촌적인 활동형태가 구식 이데올로기의 운동들을 압도적으로 연상시켜왔다는 있을 것이며, '게릴라'라는 말 자체가 1959년의 쿠바 혁명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마르크스주의의 어휘에 속하게 됨. -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게릴라 활동이라는 것이 장차 혁명을 일으키게 될 사람들의 투쟁수단에 전혀 포함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사실 모택동 자신이 쿠바 혁명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서 혁명가들의 길잡이별이 되었음. -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혁명에 이르는 길로 게릴라전을 택할 보다 직접적이로 일반적인 동기를 제공 : 히틀러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군대가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에 저항할 필요성이 바로 그것. 유럽의 점령당국체제나 파시스트 체제들은 와해되었고, 무장저항운동이 가장 효과를 발휘했던 몇몇 나라들(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혁명적 체제들이 들어섬. -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과 달리 전쟁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전쟁의 수행자체가 혁명에 권력을 가져다줌. 이러한 혁명과정은 두 가지 점에서 1789년이나 '10월'의 고전적인 시나리오와 달랐음 ① 누가 혁명을 일으켰고,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지가 전혀 불확실하지 않았음. 즉 승리한 소련 군대와 연합한 정치집단들이 바로 그 주체 ② 게릴라전을 통하여 권력에 이르는 길은 불가피하게,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기반했던 도시나 공업중심지가 아니, 농촌의 오지나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서 발견됨.
7. 두 번째 세계혁명 이후, 그리고 그 결과
-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 고취된 세계혁명은 눈에 띄는 진전을 가져옴. 하나 뿐이고 약하고 고립된 소련 대신에 12내외의 국가들이, 세계강국 중 하나의 지휘하에서 새롭게 등장하게 됨 - 변화된 국가의 새로운 공산주의 통치자들이 걱정했던 것은 사회주의의 전망 자체가 아니라, 가난해지고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것과 재건으로 안전해지기전에 자본주의 열강이 전쟁을 벌이지 않을까 하는 것 - 역설적이게도 그와 동일한 걱정으로 서방의 정치가들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세계혁명의 두 번째 물결 이후 세계를 지배한 냉전은 악몽들 간의 싸움 - 그러나 1917년 이후 격동의 시대의 '간접적인 결과'는 직접적인 결과만큼이나 깊었음 : 러시아 혁명이 서방으로 하여금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 독일을 이길 수 있게 해준 동시에, 자본주의로 하여금 스스로를 개혁하도록 고무하고 대공황에 대한 소련의 명백한 면역을 통하여 자유시장이라는 정통교리에 대한 믿음을 버리도록 고무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구세주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
제3장 경제적 심연 속으로
: 경제붕괴의 충격을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경제붕괴가 없었다면 히틀러도, 루스벨트도 없었을 것. 또한 소련 체제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만만치 않은 경제적 맞수이자 대안으로 간주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을 것.
1. 경제붕괴의 양상 - 1차대전 이후 진정으로 세계 규모의 붕괴가 찾아왔다. 자신만만했던 미국 자체가 전지구적 지진의 진원지가 되었다. 때문에 양차대전 사이에 자본주의세계경제는 붕괴할 것처럼 보였고, 그것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 지는 아무도 몰랐다. -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에 있어 경기변동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고, 19세기 이래 모든 사업가들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며,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은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그때까지는 유일하게) 자본주의의 경기변동이 진정으로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다는 점.
① 경제 세계화의 중단 : 양차대전 사이(전간기)에 경제의 세계화는 중단된 것으로 보였다. 어떤 식으로 측정하든 세계경제의 통합은 정체하거나 후퇴했다. ; 이민의 물줄기는 고갈되었고, 세계무역량은 1948년에도 1차대전 이전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 1927-33년의 국제적 대출은 90%이상 감소. ② 통화 붕괴 : 독일에서 소련에 이르기까지 통화제도가 극적으로 붕괴 - 1923년 독일의 화폐단위는 1913년 가치의 1조분의 1로 하락. 화폐가치의 붕괴는 저축을 사라지게 했고, 사업 운영자금은 바닥을 드러내게 됨. 이는 독일경제가 외채에 크게 의존하도록 만든 이유였으며, 공황이 도래했을 때 독일경제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러한 충격은 파시즘을 준비케 했다. ③ 북미경제 후퇴의 충격 : 미국의 공업생산고가 1929-31년에 약 1/3로 감소. 농산물 위기의 발생 → 농산물 상품의 국제무역에 의존하던 세계 각국의 경제를 극도로 약화시킴. (국제무역은 대공황을 문자그대로 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④ 폭발적인 실업 : 임금노동자들에게 있어 공황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실업이었음. : 32-33년, 영국과 벨기에는 22-23%, 스웨덴 24%, 미국 27%, 독일 44%. : 33년 이후의 회복기에조차 평균 실업률이 17-20% 미만으로 떨어지지 못함. 실업을 제거하는 데 유일하게 성공한 서방국가는 나치 독일. : 사회보장제도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빈약했던 당시의 대량실업은 정치에 충격적인 영향을 미치게 됨. 당시의 지배적 이미지는 '빈민을 위한 무료식당'과 '실직당한 기아 행진자들'의 모습. 독일공산당 당원수의 85%는 실업자였음.
- 1932년 이후 최악의 불황이 끝났다는 신호가 분명해짐. 그러나 경기고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세계는 계속 불황기. 37-38년에 또 한번의 경기폭락 발생. - 이 모든 일은, 30년대가 공업에서의 상당한 기술혁신의 시대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벌어졌음.
2. 경제붕괴의 원인
Q. 양차 대전 사이에 자본주의 경제는 왜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는가? : 미국이 이 물음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룸. 1차대전은 미국의 경제에 눈부신 이득을 주었는데, 왜? : 대공황은 미국의 지배권의 행사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킴.
① 미국과 나머지 세계 사이에 갈수록 심화된 불균형 : 미국은 세계를 안정시키는데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미국은 세계를 그다지 필요로하지 않았다.") 세계경제로부터의 미국의 철수가 얼마나 중요했나 하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전후 미국이 세계경제를 안정시킬 책임을 떠맡도록 설득하는데 기여한 것은 명백. ② 세계경제가 지속적인 팽창에 대해 충분한 수요를 낳지 못했다는 점. : 대중수요가 급증한 생산성을 따라잡지 못함에 따라 과잉생산과 투기가 빚어졌고, 그것은 폭락을 촉발시킴. 그 폭락은 미국에서 더욱 격렬했음. 미국의 자동차 생산고는 1929-31년에 절반으로 감소. → 미국의 소득수준과 자신감이 무너졌던 것. * 전쟁은 미국을 세계 최대의 공업생산국으로 강화했을 뿐 아니라, 미국을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변모시킴. 1929-32년 미국의 수입과 수출액은 70% 감소. * 전후배상금 문제 - 연합국들은 독일의 전후배상금 지불 문제와 관련해, 독일이 막대한 차관을 들여오도록 강제했고(독일이 생산이나 수출을 통해 돈을 마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 배상금은 미국으로부터의 대규모 차관에서 나온 것이었음. → 월스트리트 위기에 따라 미국 차관 유입이 중단되자, 여기에 고도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체계였음.
3. 공황의 결과
1) 경제적 자유주의의 파괴 : 기존의 자유주의 경제라는 틀 속에서는 어떠한 해결책도 발견할 수 없었음. 당장의 단기적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정책의 결정자들은 세계경제의 장기적 토대(다각적 무역체계)를 잠식(파괴)해야만 했다. : 금본위제의 포기. 1931년 영국의 자유무역(1840년대 이래 영국의 경제적 정체성의 핵심이라 할) 포기. : 국가정책에 있어 경제적 고려보다 사회적 고려를 우선시하게 함. (좌파/우파의 급진화는 너무도 위협적인 것이었기 때문). 현대 복지제도의 수립(1935년 미국에서 사회보장법 통과) : 불황의 지속과 함께 케인스주의가 영향력을 얻게 됨. 1930년대 말 경제현실은 자유시장경쟁이라는 자유주의의 정통교리로부터 너무도 멀어져, 세계경제는 시장부문, 정부간부문, 공적인 또는 준공적인 국제적 권위체들의 부문으로 구성되게 됨.
2) 정치적 결과 ① 유럽과 일본의 우경화 ② 혁명적 좌파의 극적인 후퇴 :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전례없이 취약한 상태에 빠짐. 이는 어느 정도 코민테른의 자멸적 정책에 기인. (코민테른은 독일에서의 국가사회주의의 위험을 심하게 과소평가했고, 심한 종파주의적 고립정책 - 자신의 주적을 사회민주당과 노동당들로 조직된 대중적 노동운동으로 단정- 추구) : 사회민주주의 역시 대부분 궁지에 몰림.(영국의 노동조합은 1920년 이래 조합원의 절반을 상실) ③ 아메리카 대륙 북부지역은 두드러지게 좌파쪽으로 이동. 라틴 아메리카의 정부들은 주요 수출품의 세계가격의 폭락과 함께 재정이 파산함으로써 연달아 무너졌지만, 모두 같은 방향으로 무너지지는 않음. 아르헨티나는 우파쪽으로, 칠레는 좌파쪽으로, 페루, 콜롬비아, 쿠바 등은 좌경화. ④ 식민지 지역에서의 반제국주의 활동의 증가 : 식민지 세계에서의 공황은 지역 고유의 정치적, 사회적 불만이 시작되는 기점이 됨.
3) 대공황은 장기 19세기의 경제와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모든 희망을 파괴. 구식의 자유주의는 죽었거나 운이 다한 것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세 가지 길이 지적-정치적 헤게모니의 쟁취를 다투게 됨. ① 마르크수주의적 공산주의의 길 : 소련이 재난을 면한 것으로 보였다는 사실 ② 개혁된 자본주의의 길 : 비공산당계 노동운동과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의 비공식적 결합이나 영구적 연계를 통한 길 ③ 파시즘의 길 : 공황은 파시즘을 세계적 운동, 세계적 위험으로 바꾸어 놓음.(독일판 파시즘은 대공황을 다루는데 다른 어떤 길보다도 빠르고 성공적이었음)
4. 공황기의 소련 : 소련이 대공황으로부터 안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대공황의 충격은 더더욱 컸음. : 소련은 새로운 5개년 계획 하에 초고속의 대대적 공업화에 몰두. 1929-1940년 소련의 공업생산고는 3배 이상 증가. 동시에 소련에는 실업도 없었음. : 서방에서도,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본따 '계획'이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
제4장 자유주의의 몰락
1. 자유민주주의의 전면적 후퇴 : 1차대전이 끝난 뒤 소련을 제외한 모든 체제가 선거를 통해 구성된 대의제적 의회주의체제가 됨. 그러나 무솔리니의 집권 이후 추축국의 성공이 절정에 달했던 20년 동안 자유주의 정치제도는 갈수록 빨리, 갈수록 파국적으로, 전면적으로 후퇴. : 온전히 민주주의적 정치제도가 전간기 내내 쉬지 않고 기능했던 유럽 국가는 영국, 핀란드, 아일랜드공화국, 스웨덴, 스위스 뿐. 서반구에서 일관되게 입헌적이고 비권위주의적이었던 국가는 캐나다,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미국, 우루과이가 전부.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랄라시아에서는 호주와 뉴질랜드만이 일관되게 민주주의적. :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위협은 정치적 우파로부터만 나왔음. 사회민주주의운동은 체제전복세력이라기보다 국가를 떠받치는 세력으로 바뀌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소수파이거나 대부분의 경우 억압의 대상이었음.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엎은 세력 ① 구식의 권위주의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 : 반공주의와 그들 계급에게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편견말고는 어떠한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의제도 가지지 않은 세력 ② '유기적 국가주의' 세력 :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도전과 노동자 및 사회주의의 도전 양쪽 모두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개조하는 보수주의 체제. 상상 속의 중세나 봉건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향수를 가진 세력. 다양한 종류의 코포라티즘 이론 생산. 관료들과 테크노크라트에 의해 위로부터 통치되는 권위주의체제나 강력한 국가와 결합. 선거민주주의를 제한하거나 폐지. 코포라티즘 국가의 가장 완벽한 사례는 포루투갈. ③ 로마 카톨릭 교회 : 교회를 구식의 반동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파시스트들과도 결합시킨 것은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 민주주의, 자유주의,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대한 공통된 증오. → 역으로 반파시즘이나 외국의 정복자에 대한 애국적 저항은 민주적 카톨릭 세력(기독교 민주주의)에게 처음으로 교회 내에서의 적법성을 부여.
- 세 종류 모두 사회혁명에 대항한 것이었고, 사실상 1917-20년에 구 사회질서가 전복되었던 것에 대한 반발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 - 세 종류 모두 군대를 선호하고, 경찰이나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들을 육성하는 경향과 민족주의적 경향을 보임. 외국에 대한 원한과 패전, 불충분한 제국 때문이기도 했고, 국기를 휘두르는 것이 정통성과 인기를 얻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함. .
3. 파시즘의 승리 : 독일에서 히틀러가 승리하지 않았다면, 독일이 성공적이고 부상하는 세계적 강국이 아니었다면, 파시즘은 일반적인(보편적인) 운동이 되지 않았을 것.
1) 파시즘의 내용 ① 대중동원에 의한 정치 : 파시스트와 비파시스트 우파 사이의 주된 차이는 파시즘이 밑으로부터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점. ② 자유주의적 해방(진보)에 대한 적대 : 여성해방, 근대문화에 적대. : 18세기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유산에 대해 원칙적으로 적대적이었으나, 실제 문제에 있어선 광적인 신념을 기술적 근대성과 결합. (히틀러의 인종주의는 유전학의 지원을 받음) ③ 자유주의와 부상하는 사회주의 노동계급운동 모두에 대한 반발 ④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 : 대량이주를 통해 세계를 휩쓴 외국인들의 물결에 대한 반발. : 인종주의의 공통된 기반은 '소시민들의 분개'(역동적 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한 것에 대한 분개) 였음. 이러한 감정은 반유태주의를 통해 발현. : 유태인에 대한 혐오는 이미 서방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것. (제정 러시아에서의 유태인 학살. 동유럽 파시스트 운동의 대중적 지지기반은 민중적 반유태주의) ⑤ 민족주의 : 급진적 우파운동은 민족주의 지식인들에 의해 수사와 이론으로 공식화됨. '민족주의'라는 말 자체가 1890년대 반동의 대변인들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
2) 파시즘의 지지기반 : 중간계층과 하위 중간층이 파시즘 운동의 중추 : 중간계급 청년과 전(前) 장교집단 - 장교집단에게 있어 1차대전은 개인적 성취가 정점에 달했던 시대였던 반면, 앞으로의 전망은 실망스러운 내리막길이었을 뿐. : 사회적 지위를 유지시켜주던 사회구조가 흔들리고 부서짐에 따라 중간계급 직업의 지위에 대한 위협도 증가 → 급진적 우파의 호소력이 커질 수 있었던 배경 : 독일의 경우, 인플레이션과 대공황의 타격으로 중급 및 고급 공무원까지도 급진(우경)화. : 양차 세계대전 사이 우파의 '자연적 동맹'은 전통적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구식의 반동주의자, 외곽의 병리적 파시스트에까지 걸침.
4. 파시즘의 대두와 사회혁명(레닌주의)의 관계 : 1차대전후 급진적 우파의 부상은 사회혁명과 노동계급의 힘에 대한 대응이자, 10월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대응 : 그러나 우파의 반발이 혁명적 좌파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명제는 두 가지 점에서 제한이 가해져야 함. ① 민족주의적 군인들이나 청년들에게 미친 1차대전의 영향 - 초기 이탈리아 파시스트 가운데 57%가 제대군인. 1차대전은 세계를 야수화하는 기구였다는 점. 급진적 우파를 충원한 것은 그 시대의 '람보'들. ② 우파의 반발은 볼세비즘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직된 노동계급에 대한 것 - 레닌은 위협의 실체라기보다 상징이었음. ; 보수주의자들의 피를 얼어붙게 한 것은 노동자 세력의 힘의 증가에 내재한 위협. (1936년 프랑코의 반란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기세가 급격히 고조된 것에 대항해서 일어났던 것). 따라서 레닌과 스탈린을 파시즘에 대한 변명의 구실로 삼는 것은 사후적 합리화임.
Q. 우파의 반발이 왜 하필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승리를 거두었는가? : 극우파의 극단주의운동들은 1914년 이전에도 존재. 다만, 그러한 운동들은 어느곳에서도 사회 전체를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못했음. : 1차대전 이후 극우파에게 기회를 준 것은 구체제의 붕괴와 구지배계급 및 그 계급의 권력, 영향력, 헤게모니기구의 붕괴. : 구체제가 무사했던 곳에서는 파시즘이 전혀 요구되지 않았고, 새로 독립한 나라에서도 파시즘은 필요치 않았음. : 광적인 극우파가 승리할 최적의 조건은, ① 오래된 국가 ②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된 국가의 통치기구 ③ 방향을 잃고 불만을 품은 대다수 시민들이 어디에 충성을 바쳐야 할 지를 알지 못하는 상황 ④ 강력한 사회주의운동이 사회혁명을 달성할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사회혁명을 일으킬 우려가 있거나 그렇게 보이는 상황 ⑤ 1918-1920년의 강화조약들에 분개하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존재하는 상황 ⑥ 즉, 무력한 기존의 지배 엘리트층이 급진적 극우파에 의지할 마음이 생기는 상황이었음. →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은 '권력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구체제의 묵인이나 사실상의 구체제의 주도로, '합헌적인' 방식으로 권좌에 오름.
5. 파시즘에 대한 부적절한 주장 ① 파시스트 혁명이 존재했다는 주장 : 나치즘 체제는 새롭고 다른 체제라기보다 개조되고 활력을 되찾은 구체제였음. : 이탈리아 파시즘 체제는 훨씬 더 공공연하게 기존 지배계급을 위한 체제. 이탈리아의 체제는 1918년 이후의 혁명적 소요상태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생겨났던 것. 그 체제의 역사적 의미는 승리한 반혁명의 세계적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것에 존재. ② 파시즘은 독점자본주의나 대기업의 표현이라는 주장 : 대기업은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까지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았음. : 그러나 △ 좌파 사회혁명을 말살하거나 패배시켰다는 점 △ 대부분의 경영진이 파시스트적 지도원칙을 하급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게 했던 점 △ 노동운동의 파괴 △ 산업경제를 활성화하고 근대화하는 데 능숙했다는 점 등에서 파시즘은 사업가들에게 중요한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6. 타대륙에서의 파시즘 : 파시즘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을 포함) : 유럽 파시즘의 영향이 명시적이었던 곳은 라틴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파시즘이 미친 결과는 주로 국내적인 것. 라틴 아메리카의 지도자들이 유럽의 파시즘에서 받아들인 것은, '인민주의적 지도자에 대한 신격화'. 유럽의 파시스트 체제는 노동운동을 파괴했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지도자들은 노동운동을 탄생시켰다.
7. 파시즘과 민족주의 : 양자를 동일시해서는 안 됨. 파시즘은 역설적이게도 국제주의. : 모든 민족주의가 파시즘에 공감한 것도 아니었음. 수많은 나라에서 파시즘에 대항한 동원은 좌파 애국주의를 낳게 됨.
Q. 왜 자유주의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파시즘을 받아들이지 않은 국가들에서조차 후퇴했는가? :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선 '시민들 사이의 기본적 합의'가 존재해야만 함.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하여 그러한 합의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됨. : 하지만 대공황이 자연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의 중단과 폐지로 이어지지는 않았음. : 파국의 시대에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존립 가능하게 하는 조건조차 결여되어 있었음. ① 일반적으로 합의되고 정통성을 가진 민주주의를 갖지 못했다는 점 - 전간기에는 민주주의가 확립된 나라가 거의 없었음. ② 인민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서로 양립할 수 없었다는 점 - 계급평화보다는 계급투쟁이 정치로 표현되는 경우가 더욱 우세. ③ 정부가 통치하는데 많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즉 20세기에는 정부가 통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 경우가 늘어남. ④ 부와 번영의 붕괴. :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집단들간의 불화를 공식화하는 장치. 위기의 시대에 그러한 체제는 너무 많은 대가를 요구할 뿐, 확실한 이득을 보여줄 수 없는 체제였음. 양차대전 사이에 의회민주주의가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으로 느껴지던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의회민주주의의 후퇴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제5장 공동의 적에 대하여
Ⅰ. 반파시즘 공동전선
1. 진보 대 반동의 전선 : 1930년대의 상황 - 미국과 소련은 서로 상대방보다 히틀러의 독일을 더욱 커다란 위협(파시즘 강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공동전선을 펼 수 있었음. (1939년의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들은 소련과 독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83%가 소련의 승리를 원한다고 답함) :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혁명 사이에 전선이 그어진 것이 아니라, '진보(19세기적)' 대 '반동'(18세기 계몽주의와 대혁명의 후예들 v. 계몽주의의 반대자들)의 전선이 그어졌던 것. : 전선의 성격 - 국제전이자 내전. 서방국가들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 동시에, 각 사회를 관통했던 전선. 따라서 애국주의는 중요치 않았던 전선. : 공동전선이 불가피했던 배경 - ①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갈수록 심해지는 취약성 ②단독으로든 연합으로든 적국들의 전진을 저지할 능력과 의지가 없었다는 사실. (1938년 뮌헨협정 -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에 분할해서 넘겨준 협정 - 은 한쪽의 자신만만한 공격과 다른 한쪽의 공포 및 양보의 결합을 완벽하게 보여준 것으로서, 이로 인해 '뮌헨'이라는 말 자체가 몇 세대 동안 '비겁한 후퇴'의 대명사가 되었음.) 당시 소련이 인기를 얻었던 것은 주로 나치 독일에 대한 소련의 일관된 반대에 기인. 결과적으로 39년 8월의 독소불가침 조약의 충격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음.
2. 반파시즘 전략과 연합 : 공산주의자들이 반파시즘 세력 단결의 가장 조직적이고 유능한 투사들이었음. : 인터내셔널이 제안한 전략은 동심원적 전략 - 통일전선(노동자 세력의 연합) → 인민전선(민주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들과의 보다 넓은 선거적·정치적 연합) → 국민전선(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에 상관없이 파시즘을 첫 번째 위협으로 간주하는 모든 세력의 연합). :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이 카톨릭세력에게 손을 내밀거나 영국 공산주의자들이 처칠을 받아들인 것은, 전쟁의 논리가 강제한 것. : 중도파와 좌파의 연합은 정치적으로 성과를 거둠. 프랑스(1936년 5월)와 스페인(1936년 2월)에서의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 이러한 승리들은 해당국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희망과 도취감을 불어넣음. : 그러나 반파시즘이 우파의 전통적인 적들을 조직했으나, 그들의 수를 늘리지는 못함.(동원된 것은 다수가 아닌 소수였으며, 반파시즘 전선에 가장 쉽게 동원된 계층은 지식인과 예술가들)
3. 반파시즘 동맹의 걸림돌 : 각국 정부들은 목표달성을 위해 언제라도 소련과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일부는 계속해서 볼셰비즘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1933년 이후 모든 주요 국가의 정부들이 소련을 승인.) :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의 다른 꿈 -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독일-소련의 전쟁을 최선의 해결책으로 파악. 1938-9년까지도 서방정부들은 소련과의 효과적 협상에 나서기를 꺼림. 1934년 이래 서방과의 동맹을 확고히 옹호했던 스탈린이 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은 소련 혼자만 히틀러와 싸우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 불가침조약을 통해 스탈린은 독일과 서구열강이 서로를 약화시킬 것을 기대. → 이러한 상황은 나치 독일이 저항없이 엄청나게 부상하는 것을 가능케 함. : 각국의 지리, 역사, 경제 또한 상이한 전망을 부여 - 유럽 대륙 자체는 일본과 미국, 영국에 대해 무관심. 동유럽 나라들은 독일에 적대적 입장이면서도 러시아를 불러들일 반독일 동맹을 거부. 유일하게 효과적인 동맹은 소련을 포함은 동맹이었음. 영국과 같은 나라들은 재무장 비용 때문에 주춤. : 자유민주주의 자체도 정치적 결정(동맹)을 지체시키거나 방해. 미국의 루스벨트는 강력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반파시스트 대외정책을 수행할 수 없었음. : 프랑스와 영국의 결단력을 약화시킨 것은 1차대전에 대한 기억. : 프랑스와 영국의 유화정책 - 프랑스는 1차대전의 실패를 예상, 방벽(마지노선)을 쌓는데 재정을 투여. 그들로서는 영국과 소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음. 영국도 또 다시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었고,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유럽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해체에 직면한 세계제국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는 문제였음. 양국 모두 전쟁으로 얻을 것은 없었고 잃을 것은 많았음. 이로 인해 독일과의 협상(독일에 대한 양보)을 선택. : 그러나 유화정책을 추구한 상황판단은 전적으로 비현실적이었음. 서구국가들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히틀러 스스로 유화정책 주장자들의 논거를 잠식했기 때문. 어느 편도 아니었던 대중들을 파시즘에 대항하는 쪽으로 몰고 간 것은 히틀러.
Ⅱ. 스페인 내전(1936-1939)
1. 스페인 내전의 의의 : 스페인 내전은 1930년대의 초국적 쟁점을 생생한 사실로 드러낸 사건. 1930년대 전세계적 대결의 정수(상징)이었음. : 그러나 스페인 내전은 2차대전의 첫 국면이 아니었으며, 프랑코의 승리는 중요한 세계적 결과를 낳지 않았음. 그 결과는 스페인을 30년 더 세계사로부터 고립시켰을 뿐.(why?) : 스페인 내전은 당시의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들을 제기. 민주주의와 사회혁명 v. 카톨릭교회를 기반으로 한 반혁명과 반동진영의 투쟁.
2. 경과 : 내전 이전에는 공산주의 세력이나 파시즘 세력 모두 정치적으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음. 스페인은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었기 때문. - 1931년 부르봉 왕가의 권력을 인수한 자유주의자들은, 도시와 농촌 양쪽에서 스페인 빈민들의 사회적인 소요를 억누르지 못했고 사회개혁을 통해 소요를 진정시키지도 못했음. - 1933년 보수주의 정부가 권력 장악. 1934년 광부봉기 등을 진압하는 보수주의 정부의 정책은 혁명적 압력을 더욱 증가시키는데 일조했을 뿐. - 스페인 좌파는 코민테른의 인민전선을 발견. →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 → 인민전선의 승리는 누적된 사회문만이 분출하는 계기가 됨. - 스페인 우파는 교회와 군주제주의자들에 기반한 파시스트 운동으로 나섰고, 1936년 7월 17일 장군들의 쿠데타를 통해 몇몇 도시를 장악. 그러나 다른 몇몇 도시에서는 민중과 군대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음. - 쿠데타는 마드리드를 비롯한 주요 도시를 장악하지 못함. 결국 쿠데타는 사회혁명을 제압하기는커녕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장기화된 내전으로 발전. - 프랑코 체제는 전쟁 동안 일당제의 권위주의 국가를 수립. - 내전에 돌입한 양대세력 모두 후원자들을 필요로 했음.
3. 내전에 대한 국제적 반응 ① 국제적 여론의 반응은 즉각적 ② 독일과 이탈리아는 즉각 프랑코 편을 지원. 그러나 비파시즘 정부(프랑스/영국 등)는 불간섭 정책을 취함. 영국 정부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사회혁명과 볼셰비즘의 진전에 적대감을 갖고 있었음. 러시아 역시 영국이 주창한 불간섭협정에 참가. 그러나 러시아는 36년 9월부터 줄곧,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성심성의껏 공화국을 돕기 위한 인력과 물자를 지원. ③ 소련이 자원을 동원하기 전부터, 자유주의자로부터 극좌파에 이르는 사람들은 스페인 투쟁을 자신들의 투쟁으로 파악. 50개국 이상에서 4만명 이상의 외국 젊은이들이 참전.(대의를 위하여) : 당시에 파시즘과 싸운 사람들은 스페인을 자신들의 싸움의 중심전선으로 파악. 돈을 모금하거나 피난민을 돕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등 개인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전선이었음.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뛰어난 인재들을 전부 동원. 티토는 파리에서 국제여단의 지원자들을 조직. 톨리아티는 스페인 공산당을 지휘.
4. 스페인 내전의 함의 :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가 싸운 유럽 전쟁의 축소판(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불개입) :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을 파괴하게 될 세력의 형태를 예기했고 준비했던 전쟁. 즉 국민전선이라는 독특한 동맹을 예기. : 내전에서 스페인 정부나 공산주의자들 모두 혁명이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수호가 문제라고 주장 → 이는 10월혁명의 옹호자들과 적대자들 사이의 적대감과 상호 불신의 약화를 촉진하는데 기여. 이러한 주장은 혁명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으며, 봉기적인 길에서 점진주의적인 길로, 대결적인 길에서 협상적인 길로, 심지어 의회주의적인 길로의 의식적인 전환을 반영하는 것이었음. :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전망을 획득 - 즉, 전시의 정치와 경제에 의해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점을 발견. 예컨대 지주와 자본가들에 대한 재산몰수는 '지주와 자본가'로서가 아니라 '반역자'로서 몰수하는 것이 가능하고, 경제의 계획은 이데올로기적 이유로서가 아닌 '전시경제의 논리'에 의해 가능하다는 점을 발견. 따라서 민주주의는 스페인의 근로인민에게 그 이상의 경제적, 정치적 획득을 보장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됨. : 스페인 내전은 포괄적인 '인민적' '국민전선적' 정부 내지 저항연합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으로, 국가 주도의 경제에 의해 수행되며 자본가들의 재산몰수 덕분에 공공부문의 대폭적인 증대로 끝나는 전쟁으로 규정됨. : 중부 및 동부유럽 여러 나라에서의 반파시즘은 '새로운 민주주의'로 이어졌지만, 냉전 이전까지 그러한 전후 체제들의 목표는 '사회주의 체제로의 즉각적인 전환 혹은 정치적 다원주의와 사유재산제의 폐지'가 아니었음. : 서구국가들에서의 사회적 경제적 결과도 유사. 그들의 개혁은 대중적 압력이나 혁명에 대한 공포에서가 아니라, 정부들에 의해서 도입. : 요컨대, 반파시즘 전쟁의 논리는 좌파를 향한 것이었음.
Ⅲ. 공산주의자들의 개입과 전략 1. 레지스탕스 운동에서의 활약 : 레지스탕스 운동의 군사적 중요성은 크지 않았으며, 다만 그 운동의 주된 의미는 정치적·정신적인 데에 있었음. 전후 유럽 각국에서 파시즘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공적 생활에서 배제됨. : 레지스탕스의 정치는 좌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음. 각 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은 적어도 독일인에게 반대하지 않는 경향을 띰. 저항을 택한 정치적 우파(처칠/드골)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계보에서 전형적 일원이 아니었음. : 레지스탕스 운동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이 유별나게 컸고, 그 결과 전쟁 동안 그들의 정치적 위치가 놀랄만큼 향상. 이로 인해 유럽 공산주의운동의 영향력은 1945-47년에 절정에 달함.(프랑스의 경우, 1945년 선거에서 공산당이 제1당으로 부상) : 공산주의자들이 레지스탕스에 몰두했던 것은 '전위당' 구조가 갖는 효율성 뿐만 아니라, 극한상황 자체가 '직업적 혁명가들'을 요구했기 때문. 공산주의자들만이 레지스탕스 전쟁의 가능성을 예견. 이 점에서 사회주의 대중정당들과 달랐음. 사회주의 정당들은 합법성이 없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 따라서 파시스트 집권기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동면에 들어가는 경향을 보임. : 공산주의자들이 레지스탕스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도록 한 또 다른 특성. ① 국제주의 ② 열렬하고 천년왕국적인 신념. ①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은 어떠한 애국적 요구보다도 반파쇼적 호소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었음. ②의 특성은 용감성, 자기희생, 가차없음의 결합을 낳음. : 공산주의자들은 지식인들에게도 호소력이 컸음. 프랑스 지식인들이 맑스주의에 애착을 보이고, 공산당 관련자들이 이탈리아 문화를 지배한 것은 레지스탕스의 산물.
2. 소련의 전략 : 공산주의자들은 발칸반도의 게릴라 본거지를 제외하고는 혁명적 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음. 소련은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인 권력장악 기도를 적극 제지. 유고, 알바니아, 중국 등의 공산주의 혁명은 스탈린의 조언을 거역하며 이뤄진 것들. : 소련의 입장은 전후의 정치가 포괄적인 반파쇼 동맹의 틀 속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음.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체제의 장기적 공존(공생)을 기대.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변화는 전시연합에서 출현할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 내에서의 변화에 이뤄질 것으로 기대. 이러한 전략은 스탈린이 43년 코민테른을 해산하고 44년 미국 공산당을 해산한 배경. "우리는 단결을 위태롭게 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는 형태와 방식으로 사회주의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 : 소련의 결정은 세계혁명에 대한 영원한 작별인사였음.
Ⅳ. 비유럽지역 1. : 대부분의 아시아, 아프리카, 이슬람 세계에서 파시즘은 주된 적이 아니었고, 유일한 적은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였음.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파시즘(제국열강의 적)은 식민지 해방투쟁에서의 잠재적 동맹군. 때문에 반제국주의 투쟁과 반파쇼 투쟁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음. : 반식민주의 논리의 극단적 예는 유태인 집단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독일인들과 협상을 시도했던 것.
Q, 왜 반제국주의와 식민지해방운동이 결국 압도적으로 좌파쪽으로 기울었고, 전쟁이 끝났을 때 전지구적인 반파쇼 동원에 수렴되었는가? : 근본적인 이유는 서방의 좌파가 반제국주의 이론 및 정치의 양성소였고, 식민지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이 압도적으로 국제적 좌파(코민테른과 소련)로부터 나왔다는 사실. : 식민지 해방론자들 모두가 근대론자들이었기 때문에 중세 찬미적 신화나 나치 이데올로기, 인종주의적 배타성에 친숙할 수 없었기 때문. : 따라서 추축국과의 동맹(나의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원칙에 입각한)은 전술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음.
2. 이슬람세계 : 이슬람교의 대중동원은 1918-1945년에 매우 강력히 발전. : 이슬람교에서 정상에 오른 운동과 정치가들은 비종교적이고 근대화를 추구하는 세력들. : 반파시즘의 시기는 공산당들이 이슬람교 세계의 일부 지역(시리아, 이라크, 이란)에서 상당한 지지와 영향력을 획득했던 유일한 시기.
3. : 서방 선진국의 반파시즘과 식민지들의 반제국주의는 양자 모두가 전후 미래의 사회적 변혁으로 상정한 것을 향하여 수렴되었던 것. : 소련과 각국 공산주의는 반제국주의와 반파시즘의 차이를 좁히는 데 일조. : 그러나 유럽의 전쟁무대와 달리 비유럽무대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함.
Ⅴ. 전쟁의 결과 : 진정한 선거가 있었던 나라에서 선거결과는 좌파로의 뚜렷한 전환을 나타냄. 영국이 가장 극적인 경우(처칠의 패배는 유권자가 승전과 사회변혁 둘 다를 약속한 당을 선택했기 때문.) : 게릴라 혁명이나 적군에 의해 해방된 유럽 국가들 모두에서는 대대적인 사회변혁의 시대가 시작될 참. : 전쟁이 중요한 사회적 제도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나라는 소련과 미국뿐. : 결과적으로 파시즘은 자신의 중심국들 밖에서는 아무것도 동원하지 못함. 파시즘의 호소력은 패배 이후에 살아남지 못했고, 정치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짐. 국가사회주의의 최종적 결과는 유럽의 상당 부분을 볼셰비키의 손에 맡기게 되었다는 점. : 반파시즘은 엄청난 범위의 세력을 단결시키는데 성공. 그 단결은 계몽주의와 혁명의 시대에 고양된 가치와 열망에 기초한 것. : 1945년 이후 모두는 시장의 지배권을 거부하고 국가에 의한 경제의 적극적인 관리와 계획을 선호. 자본주의 정부들은 경제에 대한 개입만이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경제적 파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인민들이 공산주의를 택할 정도로 급진화될 정치적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확신. 제3세계 나라들은 정부의 행동만이 그들의 경제를 후진성과 종속성으로부터 탈피시킬 수 있다고 믿음.
제6장 1914-45년의 예술
-1914년 이전: 모더니즘의 시대 -1914년 이후 형식의 형식은 두가지 뿐: 서유럽의 다다이즘, 동구의 소련산 구성주의 -1920년대 초: 전쟁과 전쟁을 낳은 혁명의 시대와 함께 다다이즘이 무너졌을 때 초현실주의가 등장-20세기의 중심적 예술인 카메라 예술을 발전시켰다. -전위예술은 기성문화의 일부, 일상생활의 구조에 흡수되었다. 극적으로 정치화; 그러나 일반대중의 취미와 관심으로부터는 여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고전예술과 최신유행 모두를 보충했다: 나라마다 달랐다. 파리의 헤게모니가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세계에서는 실제로 더 이상 통일된 고급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발레가 전위예술 매체로 변형 -신세계에서 확실한 전위예술은 두가지 뿐: 영화와 재즈 -각국의 모더니즘의 변형들이 무엇이든 간에 모더니즘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자신이 교양있는 동시에 시대에 뒤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다. -일상생활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모더니즘은 매우 간접적인 방식으로, 즉 광범위한 대중이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결과 선험적인 미학적 가치기준에 의해서 판단되지 않는 작품들-광고물, 산업디자인, 상업적 인쇄물 및 그림, 순수한 물건 자체-를 통해서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리얼리즘: 비서방세계의 예술가들 대부분에게 기본적인 문제는 모더니즘이 아니라 모너니티였다. 비유럽계 전위예술가가 서반구 밖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통에 틀어박히지도 않고 단순한 서구화론자들도 아니었던 비유럽 세계의 독창적 인재들은 주된 임무가 자기 나라 민중의 당대현실을 발견하고 그러한 현실로부터 베일을 벗기고 그 현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리얼리즘이 그들의 운동이었다. -20세기는 보통 사람들의 세기: 르포르타주, 카메라: 현실의 기록자와 보고자: 파국의 시대는 영화절정의 시대: 대중예술의 문화적 헤게모니: 대중매체의 성장(신문, 영화, 라디오): 영화는 국제적인 대중매체, 구어로서의 영어를 국제적으로 친숙하게 하는 역할; 라디오는 세계를 그들의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생활을 개인화하는 동시에 엄격한 시간표에 따라 조직, 일상생활의 청각벽지로서의 음악: 대중예술을 지배한 세력은 주로 과학기술적, 산업적인 것(신문, 카메라, 영화, 음반, 라디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세계는 미국적인 세계 아니면 지방적인 세계: 유일한 예외는 스포츠 제7장 제국들의 종식 Ⅰ -비서구세계(비북서유럽 세계)의 운명: 19세기 동안에 우스울 정도로 쉽게 정복되어 19세기에 인류의 주인으로 자리잡은 나라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20세기 역사 -세계사 대부분의 원동력이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유도된 것이다: 서구화, 근대화: 비부르주아 사회의 엘리트들이 서구에서 개척된 모델을 모방하려는 시도: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재력과 문화라는 형태로 진보를 낳는 사회의 모델: 후진성, 저개발, 개발도상국 등이 탈식민화된 세계를 지칭 -'발전' 모델은 이 모델과 충돌하지 않는 한 다양한 종류의 다른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들과 결합될 수 있었다: '발전'이라는 새 세계와의 접촉에 들어간 사회는 전통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판단했다: 前 자본주의 또는 非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및 가치체계들이 '발전'과 '진보'가 무엇을 얼마나 파괴했는가를 인식하는 방식으로서 사용: 대중 동원의 수단으로 이용: 종교에 의한 대중동원은 후위전과 근본주의 종교: 반대로 종속상태와 후진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고취한 이데올로기와 강령, 정치조직의 방법과 형태는 서구적인 것이었다 -제3세계 변혁을 이룬 사람들의 역사는 극소수 엘리트(필요한 지식과 교육수준을 갖춘, 소수계층만이 읽고 쓸 줄 알았다)의 역사였다: 극소수 엘리트의 만능역할: 그러나 그들의 개인적 견해는 100% 동화정책에서부터 서방에 대한 깊은 불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서구화를 추구한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모델 국가와 문화의 모든 가치기준을 반드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전통적 일본을 살리기 위한 '근대화'계획이었던 메이지유신/제3세계 활동가들 자신의 subtext/계획된 공업화를 통해서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한 모델로서의 소련 공산주의식 사회주의/1930년대 초부터 당 정책의 기본적 구성요소가 된 브라질 공산당의 개발민족주의: 그 목표가 무엇이었든 간에 근대화(서구에서 유래한 모델을 모방하는 것)는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될 방법이었다. Ⅱ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전세계 침투: 세계시장에 대한 3세계 나라들의 가치는 1차 산물(공업 및 에너지 원료, 농업, 목축 생산물)의 공급처이자 1세계 자본투자의 대상(차관, 교통, 통신, 기간설비에 대한 투자) -종속국을 공업화할 계획은 없었다: 1차 산물을 팔아서 1세계에서 수입한 공산품의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1914년 이전 시기의 영국지배의 세계경제의 토대였다(settler capitalism나라들을 제외하고는 종속국들이 특별히 수지맞는 수출시장은 못되었지만): 1세계 생산에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 농업화가 1세계 생산자들의 관심 -위 계획은 성공할 수 없었다: 세계시장사회에 흡수됨으로써 창출된 그나라 시장이 소비재 생산을 자극/종속지역 많은 수의 경제가 긴 역사의 제조업, 정교함, 기술적, 인적자원 및 잠재력을 지닌 고도로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전에 선진 자본주의 세계를 떠난 공업의 비율은 아주 작았다: 서구와 북미의 기존의 공업화 핵심지역들이 세계 총생산고의 70%이상, 세계 공업생산고의 거의 80%를 차지: 제국주의는 기존 핵심국들의 공업독점을 강화하는 고유의 경향이 있었다: 종속이론가들은 후진국들의 후진성을 확실하게 지속시키는 양식이라고 제국주의를 공격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공업을 원래의 나라들에 계속 위치시킨 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운송 및 통신기술)의 상대적으로 미숙한 발전정도였다: 이윤창출사업과 자본축적의 논리에는 어떤 지역에 어떤 사업을 영원히 유지시키도록 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었다: 자신의 식민지를 공업화할 이유의 출현- 전쟁으로 인해 식민지의 불충분한 공업이 가지는 결점 인식(식민본국의 공업상의 자급과 군사적 방위에 필요한 만큼, 공황으로 인한 식민지 정부의 재정적 압박) 정부의 직접 참여와 보호정책으로 이어져
Ⅲ -소수국가들에 의한 소유.통치.지배.통솔에 대해 외국의 지배로부터의 탈피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중남미 예외): 1945년 이후에 식민지세계는 명목상 주권국들의 집합체로 바뀌었다 -탈식민세계는 거의 전적으로 제국주의의 국경들에 의해서 분할: '국가인민'이나 자생적 혁명의 무대가 된 정치체로서의 긴역사를 가졌던 나라들은 예외적인 경우(중국, 페르시아, 오스만)였고, 보다 많은 경우에 영속적인 영토정치체(독립주권국)의 개념은 인민들에게 무의미했다. 그런 지역들에서는 그 지역의 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제국의 정복과 경쟁으로 인해서 분할되었던 영토가 20세기형 독립국들의 유일한 토대였다. -서방인들에게 가장 분개했던 3세계 주민들은 근대화에 대한 엘리트들의 신념에 대해서도 반대: 이런 나라들에서 중간계급 민족주의 운동의 주된 임무는 근대화계획을 추진하면서 (전통주의적이고 반근대적인)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 토착문화주의 성향: 대중사이에서뿐 아니라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불화의 요인: 예)힌두정신과 민족주의에 거의 같은 정도로 호소한 간디의 실패/인도와 달리 이슬람에서는 이슬람교를 개혁과 근대화의 메시지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진정한 혁명가들은 비이슬람계 세속 근대화론자들, 그러나 대중동원은 반근대적인 대중신앙(이슬람 근본주의)에 기반할 때 가장 쉬웠다. -근대화론자들과 제3세계의 일반 민중 사이의 깊은 갈등 속에서 1914년 이전의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운동들은 덜 두드러진 것: 심각한 문제에 부딪친 것은 대영제국 정도: 제1차 대전은 세계식민체제의 구조를 심각하게 뒤흔든 최초의 사건: 독일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파괴, 두 제국의 前속령들은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국이 나누어 가졌다. 러시아 제국은 일시적으로 주춤: -(1918-22) 대영제국의 운명: 영국이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던 보호령들에 전쟁이 가한 압박은 소요를 낳았다/10월 혁명의 충격/구체제들의 전반적 붕괴/아일랜드 남부 26개 주의 사실상 독립(1921): 이집트의 완전독립요구투쟁(1919-22)에 보호령에서 반독립적 이집트로 변화, 투르크제국에서 넘겨받은 아시아지역(팔레스타인 제외)을 관리하는데도 편리했기에: 1919년 이후 인도에서 영국의 일방적인 통치가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 인도 엘리트와의 타협에 영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인식: 대영제국의 규모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가장 컸지만 영국의 지배자들이 제국 지배권의 유지에 가장 자신이 없었던 시기 -이에 비해 프랑스, 네덜란드 제국은 1차 대전에 의해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프랑스에게는 모로코 정복의 미완수 정도가 골칫거리. 프랑스 식민지들의 반식민주의 운동은 1차 대전이 끝나고 훨씬 뒤에 가서야 발전
Ⅳ -종속국들 모두에게 제국주의의 시대는, 세계전쟁으로도 중단되지 않은, 거의 지속적인 성장의 시대였다: 제국주의 경제는 특히 수출지향적인 1차 산물 생산지역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대농장이 공장과 상업용 목장으로 바뀌거나 인디언노동자의 이주의 급증, 오지에까지 새로운 사상이 침투): 보다 넓은 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극히 미미했던 주민공동체가 급격히 변화·변모하는 일이 비일비재(재화와 용역의 의미 변화, 도덕적 가치 기준과 분배형태 변화, 性의 균형 변화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 그 자체는 멀리 떨어진 것, 즉각적이고 인지할 수 있는 영향은 (고립적 공업지역이나 관문도시를 제외하고는)격변적인 것이 아니었다. -대공황(1929-33)은 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종속국들 전체를 뒤흔들었다: 종속국 경제의 이해관계와 본국 경제의 이해관계가 처음으로 눈에 보이게 충돌했다: 농산물가격의 급격한 폭락, 식민주의와 종속성에 대한 지지가 무너졌다: 정치화된 소수파와 그들 나라의 보통 사람들의 접촉으로 정치적 동원의 대중적 기반이 생겨나는 동시에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모두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30년대가 제3세계에는 결정적인 시기-인도의 초 대중적 비협력운동, 국민회의파의 수의 급증/라틴아메리카 인민주의/영국령 카리브해 노동조합지도자들에 의한 정치적 동원/알제리 혁명운동/베트남의 민족적 저항운동 등: 식민주의의 위기가 다른 제국들로 확산: 그러나 식민제국들의 전반적인 종말이 실제로 임박한 것으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상황을 바꾼 것은 제2차 대전이었다: 舊식민주의 세력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럽게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1943년까지는 지는 쪽이었다)/전쟁에서 승리한 뒤에조차 자신의 이전 지위를 회복하기에는 명백히 너무 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Ⅴ -아시아에서 구식민지체제들이 처음으로 무너짐: 1950년대 말까지는, 공식적 식민주의가 청산되어야 한다는 것이 살아남은 구제국들에게 자명해졌다: 예방적 탈식민화 정책-경제적, 문화적 종속을 온존시킨 채 형식적 독립을 자발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좌파체제하의 독립으로 끝나기 쉬운 장기적 투쟁보다 낫다고 판단: 오직 포르투갈과 독립적인 식민자 국가들만이 이러한 추세에 저항했다: 1970년경에 이르면 중남부 아프리카와 적군에게 포위당한 베트남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영토 중 어느곳도 이전의 식민주의 열강이나 그들의 식민자체제들의 직접통치하에 남지않았다. 제국의 시대는 끝났다. -아시아: 1945년 (프랑스령)시리아, 레바논 독립 1946년 필리핀에 미국이 독립국 지위 정식 부여 1947년 인도, 파키스탄 1948년 버마, 실론(스리랑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호치민의 지도로 해방, 공산주의 저항세력의 독립선언, 프랑스인의 후위전, 1954년에 패배하고 철수, 미국에 의한 분단과 전쟁, 1975년 미국의 패배와 철수 1957년 말라야 1965년 싱가포르가 따로 떨어져 나와 도시국가 구성 -서부 이슬람 지역: 일련의 민중운동, 혁명적 쿠데타, 봉기를 통해서 변모: 이란의 서방 석유회사 국유화(1951)/무사디크하에 인민주의로 방향전환/영미첩보기관의 쿠데타로 전복(1953) 나세르의 이집트 자유장교단혁명(1952), 이라크(1958), 시리아에서 서방의 후원을 받던 체제들 전복 1956년 수에즈 전쟁: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적 제국열강으로서의 지위를 재천명하려 한 시도였으나 파국적인 실패작이 되었다. 알제리: 탈식민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특히 어려운 영토, 프랑스인들은 알제리의 민족독립봉기에 대해 격렬히 저항(1954-62) 1956년 (프랑스) 튀니지 자치, 모로코 독립, (영국) 수단 독립 -아프리카 1957년 가나 독립 1958년 기니 독립 1960-62년에 거의 모두 해방 1965년 남로디지아, 영국으로부터의 백인 정착민들의 독립선언 케냐에서만 상당 규모의 민중봉기와 게릴라 전쟁/벨기에령 콩고를 제외하고 예방적 탈식민화 정책 성공리에 수행 -카리브해: 큰 섬들은 1960년대에, 작은 섬들은 1960년대와 1981년 사이의 여러 시기에 탈식민화 -인도양 및 태평양의 섬들: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조용히 탈식민화
제8장 냉 전
1. 냉전의 역설적, 이데올로기적 성격 - 제2차 대전이 끝나자 마자 인류는 제3차 대전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홉스적 의미에서의) 전쟁 상태로 돌진 - 이러한 냉전의 독특성은 객관적으로 말해서 세계전쟁이 곧 일어날 위험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음. 또한 두 초강대국 정부 모두 제2차 대전이 끝났을 때의 지구상의 세력분배상태를 받아들였음 : 즉 양국은 이데올로기나 냉전적 수사와는 반대로 양국간의 장기적인 평화공존이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서 움직였음 ex) 한국전쟁시 중국기로 위장된 소련공군력에 대한 정보를 미국이 비밀에 부친 것./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에는 호전적인 제스처가 실제로 전쟁을 하려는 움직임으로 오해받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양측 모두의 주된 관심사였음. -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세계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나타난 적이 있었는가? : 트루먼 독트린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1947년 3월과 한국 전쟁시 중국 정부의 개입이 확장되었던 시기가 가장 폭발적. 그러나 소련이 일단 핵무기를 얻자(원자폭탄의 경우 1949년, 수소폭탄의 경우 1953년) 두 초강대국 모두 전쟁을 상대방에 대한 정책의 도구로 쓰기를 명백히 포기. : 불행하게도, 두 초강대국 중 어느 쪽도 핵 버튼을 누르기를 실제로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 자체가 양측으로 하여금 협상을 위해서, 미국의 경우 내정(內政)을 위해서 핵 제스처를 사용하도록 부추겼음.
2. 냉전의 기본적 원천 : 미국 ▶ 그렇다면 세계전쟁이 언제라도 일어날지 모르며 서로의 끊임없는 전쟁억제를 통해서만 이를 막을 수 있다는 40년간의 무력동원대치를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 기본적으로 냉전은 파국의 시대가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세계자본주의 사회의 미래가 전혀 확실하지 않다는 서방측 생각에 기반한 것 -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1차 대전 종전 후의 상황에 비추어, 미국에서조차 전후에 심각한 경제위기가 발생할 것을 예상. 실제로 미국 정부의 전후계획은 전쟁 재발의 방지보다 대공황 재발의 방지에 더 구체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음. - 더구나 전쟁이 끝났을 때, 굶주림 절망 속에서 급진화되었을 교전국의 국민들, 막강해진 공산주의 소련의 존재는 자유진영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졌음. - 실제적으로도 해방된 나라들과 점령된 나라들 중 많은 수에서 온건파 정치가들의 위치가 잠식되어가는 것으로 보였음. - 사실상 어떠한 합리적 평가로도 소련은 적군 점령국의 세력권 밖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제적 위험이 되지는 았았음 : 소련은 자신의 군대를 전쟁 직후 빠르게 축소했으며, 전후의 전략으로 (당내 문서에 따르면) 다른 국가에서 소련식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수립하여 하지도 않았음. 오히려 전쟁으로 피폐해진 소련은 서방으로부터의 경제적 원조를 원했던 상황. - 그러나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대결정책이 나왔음 :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의식한 소련 VS 중·서부 유럽 및 아시아 상당 부분의 불확실한 미래를 의식한 미국. 요컨데 미국은 미래의 언제가 소련이 세계에 대한 패권을 쥐게 될지 모르는 위험에 관해서 걱정했던 반면, 모스크바는 현재 미국이 적군에 의해 점령되지 않은 지구 전지역에 대해 행사한 실제적 헤게모니에 관해서 걱정 ▶ 상호 비타협적인 정치적 상황이 왜 미국에 의해 비이성적인 냉전으로 전화되어야만 했는가? - 미국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강국이었던 동시에, 소련과 달리 민주주의 국가였음. 즉 국회에서나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에서 대중들의 표에 신경을 써야 했던 것. - 묵시록적 반공주의는 두 목표(국회에서의 표결과 선거에서으 득표) 모두에 대해 유용했고, 미국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은 미국 정부들에게 편리한 존재였음. - 보다 구체적으로는 공공의 히스테리 덕분에 세금 내기를 싫어하기로 이름난 시민들로부터 미국 정책에 요구되는 막대한 액수의 돈을 걷기가 보다 쉬워졌으며, 개인주의와 사기업 위에 세워진 나라에서 반공주의는 진정으로 그리고 체질상 인기 있는 것. - 반(反) 빨갱이 마녀사냥이라는 비열하고 비이성적인 광란을 개시한 것은 내부의 적을 대대적으로 비난하는 데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발견한 정치선동가들. - 누군가가 국제적 무력대결의 현실정치에서 십자군적 요소를 도입했고 그 요소를 계속 했다면, 그 장본인은 워싱턴이었음. - 덧붙여, 나토 동맹의 정부들은 미국의 정책에 전혀 만족하지 않았지만 혐오스러운 정치체제의 군사적 침탈로부터 보호받는 대가로 미국의 패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음.
3. 냉전의 영향 - 냉전의 시기, 초강대국이 경쟁한 값비싼 첨단기술설비는 결정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남 : 중국에서의 공산당 승리에 놀란 미국은 한국에 개입했지만 무승부였고, 동일한 목표로 베트남에 개입했지만 패배했으며,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친소련적인 정부를 8년 동안 군사적으로 지원한 끝에 1988년 철수해야만 했음. - 그러나 끊임없는 전쟁위협은 국제적인 평화운동, 반핵운동과 환경운동을 낳게 함. - 훨씬 더 명확한 정치적 결과는 냉전이 거의 즉각적으로 세계를 초강대국들이 통제하는 두 개의 '진영'으로 양극화했다는 것 : 종전 직후 거국적인 반파시스트 연합 정부들은 친공산주의체제와 반공주의체제로 분열되었고, 서구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정부와 정계에서 추방당함. : 소련 역시 다당제 '인민민주주의'에서 비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상대방의 예를 따름. 동유럽 전역에서 핀란드를 제외하고는 소련의 직접통제가 확고히 유지 됨(*핀란드의 경우 1948년 자신의 정부로부터 강력한 공산당을 쫓아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길 꺼렸던 스탈린은 이를 인정) - 냉전은 또한 '유럽 공동체'(와 그것의 모든 문제들)를 낳음. 그것은 전례 없는 형태의 정치 기구였는데, 이는 미국에 '의해서'인 동시에 미국에 '맞서서'창출된 것 : 1947-47년의 서유럽 상황은 너무나 절박한 것으로 보여서, 1947년 6월에 대대적인 유럽 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이 개진되었는데, 이는 (명백히 침략적인 경제외교의 일부였던) 이전의 원조·차관의 형태보다는 보조금의 형태를 취함. :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효과적으로 복구된 유럽은 현실적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수반하는 강화된 독일의 경제력에 기반해야 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인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일이란 서독 문제와 프랑스 문제를 뒤얽히게 함으로써 그 두 오랜 적대국 사이의 충돌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 유럽공동체는 프랑스와 독일의 단결이 그 핵심이었으며, 미국의 유럽 통합 계획에 대한 대안으로 수립되었던 것. - 그러나 냉전시대가 길어짐에 따라 동맹에 대한 워싱턴의 압도적인, 군사적이고 따라서 정치적인 지배와 미국의 점차 약화되어가는 경제적 우위 사이의 괴리가 갈수록 커짐 : 미국이 자신이 구제하고 재건해주었다고 생각한 유럽과 일본으로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이 옮아갔으며, 미국이 계획하고 보장한 세계경제의 초석인 달러는 갈수록 약화됨. : 달러의 태환성은 1971년 8월에 공식적으로 포기되었고, 그것과 함께 국제지불제도의 안정성과 다른 단일한 국가경제에 의한 국제지불제도 통제도 끝이남. : 냉전이 끝났을 때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 중에서 남은 것은 너무도 적어서 군사적 헤게모니조차 더 이상 그 나라 자체의 자원으로 유지될 수 없을 정도가 됨.
4. 데탕트, 그리고 제2차 냉전 ▶ 냉전은 1960년대 초에 잠시 동안 건전한 방향으로 몇 걸음 움직이기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임 - 미 백악관과 크렘린을 연결하게 된 전화 '핫 라인'의 개설이 그러한 합의를 상징했으며, 베를린 장벽(1961)은 유럽의 동과 서를 가르는 최후의 확정되지 않은 경계선 문제를 해결했고, 미국은 자신의 문턱에 위치한 공산주의 쿠바를 인정. - 60년대와 70년대 초에는 실제로 핵무기를 통제하고 제한하는 몇몇 중요한 진전이 있었음 - 보다 중요한 사실로, 1960년가 1970년대로 바뀌는 시기, 미국과 소련간의 무역이 번창하기 시작. ▶ 그러나 이러한 데탕트는 일시적이었으며, 1970년대 중반 세계는 제2차 냉전이라고 불리는 시대로 들어감 - 제2차 냉전은 세계경제의 큰 변화, 즉 1973년부터 20년간을 특징지었고 1980년대 초에 절정에 달했던 장기적 위기의 시기와 일치 - 경제적 기후의 변화는 산유국 카르텔인 OECD의 성공적인 일격이 낳은 에너지 가격의 급등을 제외하고는 양대 초강대국에게 주목받지 못함 - 경제상태를 외에 상호 관련된 두 가지 사태의 전개가 초강대국간의 균형상태를 변화시킴 - 첫째는 미국의 패배와 불안정화 : 베트남전쟁과 제4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은 고립적으로 개입해야 했으며, 이는 미국을 약화시킴 - 둘째는 1974-79년의 새로운 혁명의 물결이 일어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의 땅 자체에서조차 수많은 체제들이 소련 진영에 이끌리게 됨. - 세2차 냉전은 이러한 세계혁명의 세 번째 물결이 미국의 공적 실패 및 패배의 시기와 일치함으로써 발생. ▶ 2차 냉전시기 : 사회주의의 진영의 쇄락 - 흐루시초프 실각 이후 브레즈네프 체제는 군비증강 프로그램 속으로 뛰어 듦으로써 자신을 파산시키기 시작(그 프로그램은 방위비 지출을 1964년 이후 20년 동안 연 4-5%씩 증가시켰음) - 과학기술과 연동된 경제의 영역에서 소련은 미국에게 계속적으로 뒤쳐지게 됨 - 황금시대의 경제·사회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보임에 따라 중도파와 온건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장기간 지배하던 시기가 끝나감 : 1950년대와 60년대의 국가가 후원하는 복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변종으로 인식되었고, 서방세계에서 다른 어떤 국가뿐만 아니라 복지국가를 공격대상으로 삼게됨. - 사회주의의 전망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와 경쟁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었으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개혁되었고, 1970년대에 정보 및 통신 기술의 '탈산업'혁명을 통해서 변모한 자본주의경제에 대해 사회주의가 갈수록 큰 폭으로 뒤지고 있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짐. - 두 초강대국 모두 대대적인 무기경쟁을 통해 자신의 경제를 혹사시키고 찌르러 뜨렸지만, 이전까지 세계최대의 채권국이었던 미국이 1980년대에 빠진 3조 달러의 빚더미를 세계자본주 체제는 흡수할 수 있었음(1970년대 말에 이르면 유럽 공동체와 일본의 경제를 합친 규모가 미국 경제보다 60% 더 컸지만, 소련의 동맹국들과 의존국들은 결코 제발로 걷지 못했음) - 그러나 사회주의의 토대를 침식한 것은 자본주의의 및 그 초강대국과의 적대적인 대결이 아니라, 사회주의 자체의 심각한 경제적 결함들과, 훨씬 더 역동적이고 우세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가속화되는 침탈의 결합 : 사회주의를 상처 입기 숩게 만든 것은 1960년대부터 계속된 소련형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 사이의 상호작용. 1970년대에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체제를 개혁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정면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새로 이용할 수 있는 세계시장 자원들(석유, 얻기 쉬운 차관 등)을 활동효난 쪽을 선택 : 냉전의 역설은 소련을 패배시키고 파산시킨 것이 대결이 아니라 데탕트였다는 데 있음.
5. 냉전의 정치적 결과와 그 종식 ▶ 냉전으로 인한 세계정치의 결과들 1)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세계정치를 형성했던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경쟁 및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약화시킴 2) 냉전은 국제상황을 얼어붙게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본질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임시적인 사태인 것을 '안정(봉합)'시켰음 - 독일이 가장 명백한 예 - 안정화가 평화를 의미하지 않았으며 1948-89년에 꽤 심각한 무력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들은 초강대국간의 전쟁을 촉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의해서 통제됨(쿠웨이트에 대한 이라크의 요구는 오래된 것이었으나, 그 요구는 페르시아만이 더 이상 자동적으로 초강대국간의 대결을 촉발할 화약고가 아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전쟁으로 이어짐) - 냉전이 끝난 뒤에, 해결된 문제와 해결이 보류된 문제 사이의 차이가 명백해짐. 3) 냉전은 신념을 무력화할 정도로 많은 무기들로 세계를 가득 채움 - 거대하고 유력한 군산복합체를 지닌 경제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국외로 파는 데에 경제적 관심을 가지게 됨 ▶ 냉전의 종식 - 냉전의 종식은 국제구조와 세계의 국내정치체제의 구조를 지탱해온 지주(支柱)를 갑자기 제거했으며, 그리고 남은 것은 혼란스럽고 부분적으로 붕괴된 세계 - 냉전의 종식은 그것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위기, 그리고 소련 및 그 체제의 최종적인 위기와 시기가 일치하지 않았더라도 아마 엄청났을 것 - 냉전의 종식은 국제분쟁의 종식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식인 것으로 드러남.
제9장 황금 시대
1. 황금시대의 개괄적 양상들 - 대부분의 관찰자들이 선진자본주의 세계가 자신의 역사에서 전적으로 예외적인 구면, 아마도 유일한 국면을 막 통과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대호황이 끝난 뒤에서였음. - 미국에게 있어 이러한 시기는 전시 팽창이 계속된 데에 불과했지만, 반면 부진한 영국까지 모함한 다른 모든 공업국에서 황금시대는 이전의 모든 기록을 깼음. ▶ 황금시대는 본질적으로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의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은 세계적이었음 - 실제로 초기에는 소련의 성장률은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도 높았고, 동유럽의 경제는 서구 나라들과 거의 같은 속도로 성장 - 제3세계 인구 역시 눈부신 속도로 증가했는데, 이는 식량생산이 인구보다 빨리 증가했음을 의미 - 그러나 1970년대에는 서로 다른 지역의 '빈국들간의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극동과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 지역은 여전히 식량생산고가 인구보다 빨리 증가했으나 아프리카는 1년에 1% 이상씩 뒤쳐지기 시작), 한편 선진세계의 문제는 잉여식량을 너무 많이 생산하는 바람에 그 식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됨. - 전세계의 공산품 생산고는 1950년대초와 1970년대 초 사이에 4배로 증가했고, 훨씬 더 인상적인 사실로는 공산품의 세계 교역량이 10배로 늘어남 - 또한 이 시기에는 무분별한 도시와 주택개발이 이루어짐 - 이러한 엄청난 폭발의 한가지 부산물은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사후적으로는 이미 위협적으로 보이게 된 공해와 생태계의 악화 : 이는 주로 화석연료 사용의 엄청난 증가에 기인한 것
2. 황금시대와 과학기술의 혁명 - 기술혁명은 기존의 종류를 개량한 제품뿐만이 아니라 아예 전례 없는 제품도 증가 - 첨단기술을 요구하는 전쟁은 나중에 민간용으로 쓰일 수많은 혁명적 공정을 마련해줌 ▶ 과학기술의 지각변동으로 인한 결과들 1) 이러한 변동은 부유한 세계와 가난한 세계에서까지도 일상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놓음 - 1950년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부엌, 가구, 개인의류에서 자연적인 재료나 전통적인 재로가 차지하던 몫은 급격히 줄어듬 - 기술상의 새로움에 의한 제품의 목록은 끝이 없을 정도인데, 이러한 혁신적인 제품들이 보여주는 적잖이 중요한 측면은 그러한 제품들이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엇다는 점. 2) 연구와 개발(R&D: Research and Development)이 경제성의 중심적 요소가 되었고, 나머지 지역에 대한 '선진 시장경제'지역의 이미 엄청났던 우위가 이 때문에 더욱 강화됨 3) 새로운 기술은 압도적으로 자본집약적이었고, (고도로 숙련된 과학자와 기술자를 제외하고서는) 노동절약적이거나 심지어 노동대체적이었음 - 황금시대의 주된 특징은 끊임없이 '대규모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갈수록 소비자로서를 제외하고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음. - 인간은 경제에서 (재화와 용역의 구매자라는) 한 가지 측면에서만 필수적인 존재가 외었으며, 바로 여기에 그러한 경제의 중심문제가 있었음. ▶ 이러한 황금의 시기동안 대량실업과 빈곤의 문제는 사라진 듯이 보였음 - 유럽의 실업률이 평균 1.5%였으며, 일본은 1.3%였음 - 많은 노동자들이 자가용을 가지려 했으며, 매년 유급휴가를 통해 바캉스를 즐기게됨 - 갈수록 보편화되고 후해지는 복지국가는 질병, 재난, 노후생활 등을 보장
3. 자본주의의 개조 : 혼합경제의 출현 ▶ 반 세대 동안 파멸 직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 체제의 이렇듯 유별나고 전혀 예기치 않은 승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 물론 약 반세기 길이의 '장기파동'의 그러한 연속은 18세기말 이래 자본주의 경제사의 기본 리듬을 형성해온 것.(소위 '콘드라티예프' 주기) - 설명이 필요한 것은 이러한 단순한 호왕의 도래가 아니라, 이 장기호황의 '이례적인' 규모와 깊이. 1) 자본주의의 개조 : 혼합경제 - 혼합경제는 양쪽 진영 모두, 국가들이 경제적 근대화를 계획하고 수행하는 것을 보다 쉽게 해주었고 또한 수요를 엄청나게 늘렸음. - 사치품은 이제 필수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며, 부유한 미국에서조차 1930년까지만 해도 가계 지출의 약 1/3이 먹을 것에 쓰였으나, 1980년대 초에 이르면 13%만이 그러한 비용으로 지출 2) 경제적 국제화의 진전 :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한 국제적 분업을 가능케 함으로써 세계경제의 생산력을 증가시킴 ▶ 자유주의 세력과 좌파간의 혼합경제로의 수렴 - 이 시기 실제로 일어난 것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경제적 자유주의와 시회민주주의의 결합(또는 미국적 표현을 쓰면, 루스벨트적 뉴딜 정책)이었음. 이는 경제계획이라는 사고를 개척해온 소련으로부터 상당 부분 차용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1970-80년대에 자유시장 숭배자들이 그렇게도 격렬하게 될 이유 였음. - 당시 국가의 기업 소유 및 경영은 사회주의자와 반(反)사회주의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함 : 경제문제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계획은 프랑스와 일본등 몇몇 나라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음 : 또한, 사회당 정부가 15년간이나 집권한 뒤인 1960년의 노르웨이가, 국유화에 몰두한 나라가 아니었던 서독보다 공공부분이 상대적으로 (물론 절대적으로도) 작았음. - 전후 유럽에서 그렇게도 두드러졌던 사회주의당들과 노동운동 역시 새로운 개혁자본주의에 기꺼이 동조함 : 이는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소련 모델을 따른다는 정책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들 자신의 경제정책을 전혀 가지지 못했기 때문. : 좌파는 자본주의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 외에 어떠한 대안책도 없었으므로, 자신의 목표 수행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 부를 창출하는 자본주의 경제에 의존해야 했음. - 전후 서방의 정치가들, 관리들, 심지어는 많은 사업가들조차 자유방임주의와 개조되지 않은 자유시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도 없는 일이라고 확신했으며, 몇몇 정책 목표들(완전고용, 공산주의의 봉쇄, 뒤떨어진 경제의 근대화)에 최우선권이 부여되었음. - 또한 필요하다면 정부의 체계적인 통제와 혼합경제의 운영을 통해서 그리고 조직된 노동운동과 협동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이러한 합의가 없었더라면 황금시대는 불가능했을 것.
4. 세계경제 : 국제화에서 초국화로 ▶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의 국제화 - 경제의 국제화에 있어 '미국의 패권'이 하나의 확고한 사실로 존재 - 그러나 1994년 브레턴우즈 협정으로 설립된 단 두 개 국제국인 세계은행과 IMF가 미국 정책에 사실상 종속된 것은, UN의 원래 모델이 냉전기에 붕괴한 뒤였음. 국제무역기구에 대한 제안은 훨씬 더 평범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맺는 것으로 끝이남. - 이러한 국제 무역-지불체계는 (국제연합과는 달리) 애초에 예상했거나 의도한 방식으로는 아니었지만, 미국 달러의 압도적인 경제적 지배에 의해 작동하고 기능하였음. - 더불어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냉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장래의 경쟁국들을 가능한 한 급속하게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긴급하다는 사실을 납득시켰으며, 이러한 점에서 냉전이 세계 대호황의 주된 동력이었다는 주장(Walker)까지 제기됨. - 이처럼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그 경제는 빅토리아 중기 이리 다른 어떤 경제보다도 생산요소의 국제적 이동에 대한 장애물이 적었음 : 단 한가지 노동력의 국제적 이주에는 다소간의 제약이 있었으나, 그래도 1970년대 초까지 약 750만 명이 유럽 선진국들로 이주했음. - 그러나 황금시대의 세계경제는 여전히 '초국적'이라기 보다는 '국제적'이었음 : 즉 공업경제국들이 서로의 생산품을 갈수록 많이 사고 팔기는 했지만, 그들의 경제활동 태반은 여전히 자국 중심적. ▶ 경제의 '초국화'로의 경향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초국적이 되어가는 경제(경제활동에 대해 국토와 국경이 기본적인 틀이 아니라 번거로운 요소에 불과하게 된 체제)가 특히 1960년대부터 계속 부상하기 시작함 : 그러한 세계경제는 매우 크고 강력한 국가의 경제조차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결정하고 보다 정확히 말해서 '한계를 설정'. : 그러한 초국적 경제는 1970년대에 전지구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1973년 이후 위기의 몇 십년 동안에 더 급속하게 성장 - 이러한 초국적화는 특히 세 가지 측면을 명백히 보여주었는데, 이는 (종종 다국적 회사로 알려진) 초국적회사, 새로운 국제적 분업, 오프쇼어(offshore) 금융의 부상이 그것 : '오프쇼어'라는말은 사업체의 법적 소재지를 대체로 작고 재정적으로 관대한 영토에 등록하는 관행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러한 행태는 기업법과 노동법의 허점들을 적절히 복잡하고 교묘하게 결합시킴으로서 해당 기업의 대차대조표에 놀랄만한 수익을 기록할 수 있게 됨. : 1990년대 초에 이르면 주도적인 중앙은행들에 의한 공동행동조차 이러한 초국적 자본에 대해 무력한 것으로 드러나게됨. : 이러한 초국적 기업에 있어 새로운 점은 그 엄청난 사업규모였는데 1980년대 초에 미국의 초국적 기업들이 그 나라 수출액의 3/4이상과 수입액의 절반을 차지했고, (영국과 외국 둘 다의)초국적 기업들이 영국 수출액의 80%이상을 차지(단, 이러한 수치에 있어 통계가 수입이나 수출로 표시하는 것은 상당 부분은 실제로 초국적기업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부교역이라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함.) : 새로운 국제분업의 형태, 즉 제3세계 공업이 초국적인 제조과정의 일부를 담당하게 됨으로써 1970년대 초부터는 제3세계가 공산품을 선진공업국들에 상당 규모로 수출하기 시작. : 지구가 점점 현실적인 단위가 됨에 따라 커다란 국가들의 국민경제가 그러한 오프쇼어 중심지들에게 길을 내주게 되었으며, 단기 20세기말에 세계는 인구가 250만 명도 안 되는 경제가 71개나 존재.
5. 황금시대의 정치-경제와 그 쇠퇴 ▶ 황금시대는 우파와 좌파 사이의 효과적인 정책 합의에 기반했음 - 파시스트-초민적주의적 극우파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치무대에서 제거되었고, 공산주의라는 극좌파는 냉전으로 제거됨. - 정부는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제도화된 협상을 주재(소위 '코포라티즘') - 1950년대의 대호황은 거의 모든 곳에서 온건 보수파 정부들이 이끈 것(단, 위의 코포라티즘적 합의는 후퇴하지 않았음) - 1960년대가 되면 이러한 합의의 무게 중심은 좌파를 향하여 이동하였으며, 문자 그대로의 복지국가의 등장과 명백히 병행되었음. - 이러한 황금시대의 균형상태는 경제적으로는 생산성의 증가와 소득의 증가 사이의 조화에 달려 있었음 : 생산성의 지속적 증가추세의 약화나 또는 지나친 임금상승이 불안정화를 낳을 수 있었음. - 그리고 이러한 균형상태는 세계경제를 안정시키고 보증하는 역할을 했던 미국의 압도적인 정치적, 경제적 지배에 기반하고 있었음. ▶ 황금시대의 쇠퇴 : 1960년대 동안 위의 모든 조건이 마모의 조짐을 보임 - 미국의 헤게모니가 쇠락했고, 금-달러에 기반한 세계 통화제도도 붕괴 - 여러나라에서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둔화되는 조짐들이 나타났고, 공업의 호황을 유지시켜온 국내 이주집단이라는 커다란 노동공급원이 거의 고갈 - 전후 20년 뒤에 새로운 세대는 성인이 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기대수준을 그들 연령집단의 유일한 경험인 완전고용과 지속적인 임금상승의 경험에 맞추었으며, 1960년대말에 '전세계적인 임금폭발'이 촉발됨 - 이러한 시기 1968년에 발생한 학생반란은 서구사회의 문제들을 영원히 해결했다고 거의 믿었던 세대에게 경고를 하는, 즉 일종의 죽음의 경고를 하는 역할을 수행. 따라서 1968년은 끝이나 시작이 아니라 징후에 불과. - 치솟는 인플레, 세계통화공급량의 급증, 미국의 막대한 적자에 의해서 촉진된 1970년대 초의 경기팽창은 열병에 가까운 것, 즉 과열되었음 : 1972년 7월부터 12달 동안에 OECD국가들의 실질 GDP는 7.5%, 실질 공업생산은 10%증가 - 세계경제는 무너진 뒤에 예전의 보폭을 되찾지 못했음, 즉 한 시대가 끝난 것.
제10장 사회혁명 : 1945-90년
1. 농민층의 사멸과 도시화의 급증 -20세기의 3/4분기 동안 서방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정의하기 위해, 'psot'라는 말이 수많은 용어들 중 어떤 것 앞에도 접두어로 붙여져 사용됨(포스트 산업적, 포스트 제국적, 포스트 모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적...) - 이 시기 변화의 새로운 점은 유별난 속도와 보편성 둘 다에 존재. ▶ 20세기 후반의 가장 극적이고 우리를 과거로부터 영원히 단절시킨 변화는 '농민층의 사멸' -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농업과 어업에 종사한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에도 못 미치는 공업국은 영국 외에 한 나라(벨기에)뿐이었음 - 그러나 1980년대 초에 서방 국가들중 아일랜드 공화국과 이베리아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농업인구가 전체 인구의 10%를 넘는 나라가 전혀 없었음. - 이러한 농민층의 소멸은 국제연합이 소위 '후진국'이나 '빈국'이라고 명명했던 나라들에서의 농업인구 감소 ▶ 농민층의 감소에 따른 도시화의 진전 -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세계인구의 42%가 도시에 살았음(아시아 농촌민의 3/4을 차지한 중국과 인도의 엄청난 농촌인구를 제외한다면 도시인구가 과반수를 차지했을 것.) - 실제로 1980년대 말에는 단연 가장 거대한 인구밀집 도시들은 제 3세계에서 볼 수 있었음 : 이는 역설적이게도 선진세계가 여전히 가난한 나라보다 훨씬 더 도시화된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 세계 자체의 거대 도시들이 분해되고 있었기 때문
2. 대학생 집단의 증가 - 거의 농민층의 쇠락만큼이나 극적인 동시에 훨씬 보편적이었던 것은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요구하는 직업들의 부상 - 또한 1980대말에 이르면 가장 정직하거나 가장 절망적인 국가들만이 자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라는 통계를 지니게 됨. ▶ 이러한 교육의 확대는 특히 대학교의 경우 가장 극적 -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조차 대학생은 전체 인구의 0.1%에 해당 -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이르면 서구 유럽의 경우 대학생의 비율은 2.5%이상, 예외적인 경우 3%이상을 차지 - 대체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대중교육에 대한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의 급증이 덜 두드러졌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이상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세계에서 고등교육의 유별난 성장은 '소비자'의 압력에 기반한 것. - 또한 근대적인 경제는 어딘가에서 훈련받아야 하는 행정가, 교사, 기술전문가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정부에게 인식되었음. ▶ 젊은 남녀들 및 그들의 선생으로 구성된 이러한 새로운 집단은 문화에서나 정치에서나 새로운 요인이 됨. - 1960년대가 보여주었듯이 그들은 정치적·사회적 불만을 국민적으로, 심지어 국제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유례없이 효과적인 힘을 발휘 - 독재국가에서 그들은 대체로 시민들 가운데 정치적 집단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기도 했음(다른 라틴 아메리카와 달리 피노체트의 칠레에서 대학생의 수가 전체 인구의 1.5%에서 1.1%로 즐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 ▶ 소위 '68 세계혁명'에 대하여 - 1917년 이후 혁명가들이 꿈꾸었던 동시적인 세계 대 격변에 해당하는 것이 1945년이후 딱 한번 있었다면, 그 시기는 확실히 1968년이 될 것. - 그러나 그것은 비우호적인 관찰자들이 '심리극'이나 '가두연극'이라고 격하해버린 것보다는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혁명이 아니었고 혁명이 될 수 없었음 : 이것은 학생들만으로는 아무리 수가 많고 동원 가능하더라도 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 - 학생집단의 정치적 효과는 일종의 신호와 기폭제로 작용하는 능력에 있었으며, 실제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노동계급의 엄청난 파업 물결을 촉발시켰지만, 황금시대의 막바지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마음속에 혁명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음. ▶ 학생이라는 이러한 새로운 집단의 운동은 왜 좌파 급진주의를 택했는가? - 청년세대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들? - '학생 수의 급증'이 하나의 가능한 답변을 제공해줌 : 이러한 증가의 가장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는 학생대중의 쇄도와, 물질적으로나 조직상으로 그러한 쇄도에 대비하지 못한 제도 사이의 불가피한 긴장 : 더욱이 대학에 간다는 것이 더 이상 그 자체에 보상이 주어지는 예외적인 특권이 아니게 되었고, 대학이 젊은 성인들에게 부과하던 속박은 분개의 대상이 됨. 대학의 권위라는 한 종류의 권위에 대한 분개는 다른 어떠한 종류의 권위에 대한 분개로도 쉽게 확산 : 새로운 시대는 대학에 간 젊은이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시대였으며, 부모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그들은 현재의 사정이 달라질 수 있고 더 좋아 질 수 있다고 느꼈음. :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급진주의에 대한 추진력이 경제적 불만에 영향받지 않은 집단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경제적인 이유로 동원되는 데에 익숙한 집단들조차 어쨌든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새로운 사회에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자극.
3. 산업노동계급의 변화 - (농촌주민이나 대학생과 달리) 산업노동계급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인구상의 격변을 겪지는 않았음 : 舊 산업노동계급이 사라지고 있다는 널리 퍼진 생각은 적어도 지국 전체 차원에서 보면 잘못된 통계 - 노동계급이 무너지고 있다는 환상은 인구상의 출혈보다는 노동 계급내의 변화와 생산과정 내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 - 또한 새로운 공업이 오래된 공업을 대체했을 때조차 그 공업은 동일한 공업이 아니었음 : 동일한 장소가 아닌 경우가 많았고 대개 다른 방식으로 조직화 되었음. '포스트 포드주의'라는 1980년대의 전문어는 바로 그러한 것을 암시. - 결국 (1980년대에는 매우 명백히) 노동계급은 눈에 띄게 새로운 과학기술의 희생물이 되었음 : 특히 대량생산공정의 미숙련 및 반숙련 노동자가 그랬으며, 1980년대 초의 경제위기는 유럽에서 40년만에 대량실업을 다시 낳았음 - 1980년대 말에 이르면 미국을 제외한 모든 선진지역의 제조업에 고용된 노동력은 민간부문 고용노동력 전체의 약 1/4에 머물되 되었음. ▶ 그러나 특히 舊 산업세계에서 노동계급과 그 운동의 위기는 노동자 수의 심각한 감소라는 문제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명백히 나타남.(즉 계급의 위기가 아니라 계급의식의 위기) - 여러 점에서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응집성은 오래된 선진국들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절정에 달했고, 황금시대에는 그러한 응집성의 거의 모든 요소가 토대부터 침식 됨 - 번영과 개인화는 빈곤과 공적이 장소에서의 집단성이 결합시켰던 것은 분해했던 것. - 복지정책과 '코포라티즘'적 노사 관계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압박이 가해지자, 노동계급의 최상층부는 현대 첨단기술 생산의 시대에 보다 쉽게 적응했고, 그들의 지위는 상당히 높아져서 자유시장으로부터 실제로 득을 볼 수 있게 됨 : 즉 '존경할만한' 빈민과 '존경할 수 없는' 빈민이라는 옛 빅토리아 시대의 구분법이 보다 격화된 형태로 부활 - 열심히 일하는 납세자들의 생각으로 그 '존경할 수 없는'자들이 가지는 권리가 지나치게 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존경할 만한 숙련노동자들은 아마도 처음으로 정치적 우파의 잠재적 지지자가 됨 : 영국의 대처 정부가 성공한 것은 본질적으로 숙련 노동자들이 노동당에서 이탈함으로써 가능 - 동시에 대량이주는 지금까지 미국과 프랑스에만 국한되었던 현상, 즉 노동계급의 민족적, 인종적 다양화와 그 결과인 노동계급 내부의 갈등을 낳음 - 요컨데 고전적인 노동자 정당과 노동운동이 형성되었던 시기에는 모든 집단의 노동자들이 동일한 정책, 동일한 전략, 동일한 제도적 변화가 각 집단에게 득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무리없는 생각이었던 반면, 이제는 더 이상 자동적으로 들어맞는 사실이 아니게 된 것.
4. 페미니즘과 여성운동 ▶ 선진 사회의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계층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노동계급 내에서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증가한 것 - 1940년대에 임금노동을 하는 기혼여성의 비율은 14% 미만이었는데 반해 1980년에는 절반을 넘게 됨. - 19세기말부터 몇몇 서비스업이 상당히 여성화 되었고, 이러한 3차 산업의 직업들이 1,2차 산업을 희생시켜 확산되고 있었음. 제조업에 종사한 여성들의 문제는 좀 더 복잡. - 그러나 3차 부문들과 제조업 모두에서 여성들의 태반은 하위직에 속하게 됨. - 더불어 여성들 역시 고등교육을 받는 비율이 갈수록 급증 - 이러한 기혼여성의 노동시장으로의 대량진입과 고동교육의 현저한 팽창은 서방 선진국들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인상적으로 부흥한 것의 배경이 됨. ▶ 여성 지위의 변화의 양상 - 사실상 선거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여성들이 1960년대까지는 투표권을 얻게 됨(몇몇 이슬람 국가들과 다소 기묘하게도 스위스를 제외하면) -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교육받은 중간계급의 운동이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덜 뚜렷한 형태의 첫 번째 물결의 페미니즘운동이 성취했던 것을 훨씬 넘어서, 그 성(sex, gender)의 대중에게 널리 확산됨 : 새로운 여성의식과 그것의 폭 자체는 단순히 경제에서의 여성의 역할의 변화라는 것을 넘어, 여성이 행한 역할에 대한 인습적 기대, 특히 여성의 공적 역할과 공적 지명도의 문제를 포괄함. -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정계에서 여성이 두드러지게 부상하였으며, 국가와 정부를 이끌게 되는 경우가 나타남 : 1990년에 이르면 여성이 정부수반이어가 정부수반이었던 나라가 16개국에 달함. -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이 행한 역할과 그에 상응하는 여성 정치운동의 공적인 열망에 관해서 전지구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음 : '서구화된' 종속국들의 해방된 여성들은 비사회주의 극동지역에서 사는 그들의 자매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 이 지역의 경우 엘리트 여성들조차 따라야 하는 전통적인 역할과 인습의 힘이 숨막힐 정도로 강했던 것. : 사회주의의 상황은 다소 역설적이어서, 동유럽에서 실제로 모든 여성이 임금노동력에 속했지만, 정치적 영역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보잘 것 없었음. 1980년대 이전 국가와 정당이 후원하지 않는 어떠한 정치적 운동의 개시도 사실상 불가능했던 점을 감안할 때, 사회주의 세계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낳기란 불가능 했을 것.
▶ 여성운동의 계급적 성격과 그 확대 - 초기에 서방에서 특히 페미니즘 부흥을 선도한 미국에서 페미니즘의 문제들은 중간계급의 여성들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주고 관계된 것. - 그들은 '여성이 직업이나 일을 결혼생황 및 가족과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문제의 선택권은 당시 세계의 대부분 여성과 모든 빈민여성에게는 존재하지 않았음. - 새로운 페미니즘의 개척자들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에 관심을 가졌는데, 반면 세계의 대부분 여성들, 특히 빈민 여성에게는 여성의 사회적 열세가 부분적으로 남성과의 성적 차이에 기인하여, 따라서 성구별적인 조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명백해 보였음 : 이후 국면의 페미니즘은 실제로 성의 평등뿐만 아니라 성의 차이도 강조하게 됨. - 어쨌든 전반적으로 여성해방의 시대, 혹은 적어도 여성의 자기주장의 시대가 왔다는 느낌이 전반적으로 들 정도의 변화가 수반되었는데, 이는 초기의 특정한 중간계급 페미니즘이 여성 모두에게 관계가 있는 문제들을 제기했기 때문.
제11장 문화혁명
1. 가족의 위기 : 이혼율의 급증, 독신의 급증, 고전적 핵가족의 쇠퇴, 낙태의 합법화 : 60-70년대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둘 다에게 유별난 자유화의 시대
2. 청년문화의 부상 : 강력한 청년문화의 부상. 청년은 독립적인 사회적 주체가 되었고, 60년대의 정치적 급진화를 이끔. : 세대 간의 단절 - 완전고용 시대에 자란 젊은이들은 1930년대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었음.
3. 권위와 금기에 대한 도전 : 청년문화는 넓은 의미의 문화혁명의 모체가 됨. 이는 '민중적인' 동시에 '도덕률 폐기론적'인 것. : 이전과 달리, 젊은이들은 하층계급의 문화를 자신의 모델로 받아들이기 시작(록 음악, 청바지 등). : 동성애 하위문화가 공적으로 부상. : "금지하는 것이 금지된다"(68혁명의 포스터) - 모든 권위와 금기에 대한 도전 : 권위와 금기에 대한 도전은 '억압적 법의 폐지'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감정과 욕구의 공적인 표명'에 목적이 있었던 것. 그러한 욕구가 공적인 시위, 집단, 운동과 일치할 때조차 '주관성'이 그러한 욕구의 중심에 있었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페미니즘의 중요한 슬로건) :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가들이 '무엇을 성취하고 싶어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혁명가들이 무엇을 하고 그 일을 할 때 '어떻게 느끼는가'였다. 섹스를 하는 것과 혁명을 하는 것은 명확히 구분될 수 없는 것이었다. : 굴레를 타파하는 가장 분명한 방식은 '섹스'와 '마약' - 이전까지 금지되었거나 비인습적인 행위에 공개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중요해졌음. 술에 취하는 것과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 사이의 경계선이 종종 불명확했다. : 변화들의 중요한 의미는 그 변화들이 오래전에 확립된 역사적인 사회적 인간관계의 구조를 거부했다는 점에 있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거부다 '개인적 욕구의 무제한적인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점.
4. 문화혁명의 영향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회적 구조와 인습은 아직 해체되지 않았는데, 이는 빈민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음. 그들에게는 경제적 생존과 성공을 위한 '망'이 필요했기 때문. : 새로운 개인주의 도덕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제도는 전통적인 가족과 전통적인 교회조직들. : 가족은 농업경제와 초기공업경제, 일국경제와 세계경제 모두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음. 시장만으로는 '신용'과 '계약이행'을 보장하지 못하며, 따라서 '혈연'이나 '지연'의 역할이 중요. : 그러나 전통적인 가족적 유대가 약화됨에 따라 그것에 수반된 도덕체계 역시 잠식되어감. 즉, 권리와 의무, 상호의무, 희생, 양심, 보상과 벌이라는 기존의 도덕용어가 보유하던, 인간의 사회생활을 구조화하는 능력 대부분이 사라짐. → 이제는 불확실성과 예측불가능성이 만연하게 됨. 이론들은 '판단과 가치'의 문제를 회피하고, 그러한 문제를 '개인의 무제한적인 자유'라는 요소로 환원시키고자 함. : 공동사회가 이익사회에, 공동체가 익명의 사회 속에서 연결된 개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음. : 공동체 전통의 붕괴는 최하층계급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판조차 제거해 버리게 되었고,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던 기존의 가치체계와 관습, 인습 모두의 해체를 가져 옴. : 이러한 해체는 자본주의 경제에도 위험한 것이라는 점이 갈수록 명백해짐. :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했던 것. 그러나 자본주의가 물려받은 역사적 자산이 잠식되기 시작했고, 그러한 자산없이 작동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입증하기 시작한 것이 20세기 3/4분기의 문화혁명임.
제12장 제3세계
1. 인구폭발 : 2차대전 종전 이후 종속국들에서는 인구가 경이적으로 폭증. 세계의 빈국들에서의 인구폭발은 단기 20세기의 가장 깊은 변화. : 인구폭발에 수반된 한 가지 결과는 부국과 빈국,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된 것.
2. 제3세계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 : 제3세계 국가의 정치체제는 이론상 어느 나라나 민주주의였음. (소비에트 혁명 모델을 따르는 경향이 보다 컸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민주주의'에 걸맞는 물질적, 정치적 조건을 결여함. : 군사체제로 나아가는 경향이 제3세계 국가들의 공통 요소였음. 군사쿠데타의 정치는 정부가 불안정하거나 정통성이 없는 새로운 시대의 산물. : 제3세계의 국가들은 경제적 독립과 발전에 몰두. ①체계적 공업화를 통해 농업사회의 후진성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경우 ②자국의 자원을 스스로 통제하고 개발하고 싶어하는 경우(OPEC) : 어느 경우든,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에 의존.
3. '발전' : 대다수 제3세계 주민에게 있어, '발전'은 직접적인 관심사가 아니었고,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았음. : 가난한 제3세계 주민들은 경제발전을 미끼로 던지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것이 오히려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 : 그러나 전지구적인 경제혁명은 고립된 사람들에게까지 그 손을 미치게 되었고, 그들은 선진 영역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됨. : 라틴아메리카 지역 밖의 농촌주민들이 조직적으로, 근대성을 위험이 아닌 희망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 : 그 이전에 경제발전정책이 호소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농지개혁'이었음. : 농지개혁의 슬로건은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스펙트럼 전체에서 실행되었음. 1945-50년의 인류의 거의 절반이 농지개혁을 겪는 나라들에서 살았음. 근대화론자들에게 있어 농지개혁은 ①정치적인 것(혁명을 저지할 수 있는 체제에 대한 농민의 지지 획득) ②이데올로기적인 것(토지를 땀흘리는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 ③경제적인 것(효율적이고 탄력적인 것)이었음. : 농지개혁의 가장 강력한 경제적 논거는 생산성이 아니라 평등에 있음. 라틴 아메리카의 두드러진 사회적 불평등은 체계적인 농지개혁이 없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음.
4. 정치지형 : 수십 개의 탈식민지 국가들이 '제3세계'로 분류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 나라들 모두가 가난했고, 모두가 종속적이었으며, 모두가 '발전'하기를 원하는 정부를 가졌다는 점에서. 또한 어떤 나라도 냉전의 어느 한 편에 가담하는 것을 원치 않음. : 비동맹운동 세력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주의적이었거나 사회주의적임을 주장. 한편에선 반소군사체제의 완성을 목적으로 중동조약기구(이라크, 터키, 파키스탄, 이란 등), 동남아시아조약기구(파키스탄, 필리핀, 타이)가 구성됨. : 냉전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충돌의 조건을 창출했던 두 지역 - 중동/ 인도 아대륙 북부. 중동은 파괴적인 이스라엘로 인해 지속적으로 폭발적인 지역으로 존재.
5. 제3세계의 분열 : 제3세계는 더 이상 단일한 실체가 아니게 됨. : 제3세계를 분열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발전이었음. ①OPEC의 승리(→백만장자국으로 부상) ②공업화에 의한 1세계로의 합류(남한) ③밑바닥으로의 추락(갈수록 뒤쳐진 나라들)
6. 근대화 :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약진과 세계화의 진전은 제3세계의 전주민을 근대세계로 통합시킴.(많은 '근본주의' 운동들은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반란) : 대도시가 변화의 도가니였음. 도시에는 새롭고 전례없는 것이 너무 많았고 옛날의 습속들과 충돌하는 습속들이 너무 많았음. : 농업에서의 녹색혁명은 근대성의식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시킴. : 제3세계 나라들에서 서구화된 소수 엘리트들과 대중들 사이의 간극은 좁아짐. → 주민 다수와 젊은이들이 근대적 세계에 진입함에 따라 서구화된 소수 엘리트들의 독점권이 도전을 받게 됨. : 산업의 급속한 성장은 대규모의 교육받은 전문직 계급을 낳는 경향을 보임. 그러한 계급은 체제 전복적이진 않았지만, 권위주의 체제의 시민적 자유화를 환영.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변화의 정치적 결과를 예견하기란 불가능한 지역이 광활하게 존재. 확실한 것이라고는 그 세계의 불안전성과 가연성밖에 없었음.
제13장 '현실사회주의'
1. 사회주의권의 확장과 고립 : 세계 자본주의에서 탈퇴한 지역(사회주의권)의 영토는 1945년 이후 극적으로 확대 -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1945). 중국, 북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쿠바(1959) 등 : 사회주의 지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독립적이고 대체로 자기완결적인 소우주를 형성. ① 자본주의 세계경제와의 관계는 놀랄 만큼 미약했음. 1960년대 사회주의 나라들의 국제무역의 2/3은 그들 자신의 세계 내에서 이뤄진 것이었음. ② 동서간 이동은 거의 없었음. 사회주의 진영의 격리(내지 자기격리)는 70-80년대에 점차 무너짐. ③ 두 진영이 분리된 근본적 이유는 '정치적'인 것. 소련은 자본주의 세계에 둘러싸인 채 고립되었음. 레닌이 러시아의 경제발전을 위해 최대한 양보하려고 했을 때조차 서방은 소련을 고립시켰음. 따라서, 소련은 나머지 세계와 사실상 격리된 상태에서 자급적인 발전과정에 들어가야 했음. ④ 확대된 소비에트권을 고립시키는데 일조한 것 역시 '정치', 즉 냉전. 이에 따라 두 진영 사이에 모든 경제적 관계는 정치적 관계에 의해 좌우됨.
2. 소련의 사회주의 1) 볼셰비키당은 소련이 고립상태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음. 맑스주의 창립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기능이 오직, 보다 선진적인 산업국들에서의 혁명을 촉발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 레닌이 보기에 모스크바는 사회주의의 영구적 수도인 베를린으로 옮길 수 있기 전까지의 일시적인 본부에 불과.(1919년 창설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의 공식어가 독일어였던 배경)
2) 세계혁명의 가능성이 어두워지면서(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로서 고립될) 소련이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책은 '소련의 경제와 사회를 가능한 한 빨리 선진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가장 분명한 방식은 '대중의 문화적 후진성에 대한 전면적 공격'과 '기술의 근대화 및 산업혁명의 전면적 추진'이었음. 이에 따라 소련 모델에 기반한 공산주의는 우선적으로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이었음. : 이러한 프로그램은 서유럽과 북미 이외의 지역(신생 독립국 등)에게 있어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비춰짐. 특히 2차 대전 이후 15년동안 사회주의 진영의 경제가 서방의 경제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는 점 등으로 인해 소련식 처방은 효율적인 것으로 비춰짐.
3) 소련의 경제 3)-1. 전시공산주의 체제 : '계획'이나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 등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저작에서 볼 수 없는 내용들. : 그러나 내전의 위기 속에서 모든 산업의 국유화와 전시공산주의가 등장. : 반혁명과 외국의 간섭에 대항하는 생사가 걸린 투쟁을 조직해야 했고, 그 투쟁을 위한 자원을 모아야 했음. : 공산주의 전시경제는 원칙상, 사적인 소유 및 경영을 공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시장과 가격기구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경향을 가짐. : 내전(1918-1920)에서의 승리 이후, 전시공산주의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짐. 전시공산주의는 농민에 대한 곡물징발 등에 기초했고(농민들의 반발을 낳고 있었고), 괴멸된 경제를 회복하는 효과적 수단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
3)-2. 신경제정책(NEP)의 도입(1921) : NEP는 사실상 시장을 재도입하는 것이었고, '전시공산주의'에서 '국가자본주의'로 후퇴하는 것이었음. : NEP는 전시공산주의를 소멸시켰던 반면, 국가의 통제와 강제는 사회화된 소유 및 경영의 경제의 유일하게 알려진 모델로 남음. : NEP는 공산주의로서는 명백히 하나의 패배로, 또는 적어도 사회주의를 향한 진군대열의 본류에서 잠깐 이탈한 것으로 인식됨. 그러나 NEP는 소련 경제를 폐허로부터 회복시키는데 눈부실 정도로 성공. : 그럼에도 불구하고 NEP(국가가 조종하는, 농민시장 경제에 기반한 경제성장)가 오래갈만한 전략으로 판명되기는 힘들었음. 사회주의를 공언한 체제로서, NEP에 반대하는 정치적 주장이 압도적으로 우세. NEP는 소상품생산과 소기업의 손에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내맡기는(방금 전복된 자본주의를 부활시킬) 것으로 보일 수 있었음. : 볼셰비키 당을 망설이게 한 것은 (NEP의) 대안책에 들어갈 비용문제. 그 대안책은 강제적인 공업화를 의미. 결국 이 공업화는 위로부터 국가권력에 의해서 부과되는 일종의 2차 혁명이었음. <홉스봄이 말하는 NEP의 불가피성> :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독일을 정복하는데 실패했을 때,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권력을 수립하기로 한 결정에 대한 원래의 정당화 사유는 이미 사라졌음. : 내전에서 살아남은 러시아는 폐허상태였고, 차르 시절보다 훨씬 더 낙후나 상태. : 200만에 달하는 이민에 의해 상당 비율의 교육받은 간부들을 잃었고, 차르 시대의 공업발전의 성과도 상실했으며, 볼셰비키 당의 기반을 제공했던 산업노동자들도 대부분 사라짐. : 남은 것은 과거에 훨씬 더 확고히 정박하고, 복구된 촌락공동체의 부동불변의 농민대중 속에 훨씬 더 확고하게 닻을 내린 러시아였음. : 볼셰비키 당에게 유리한 것이라고는 그 당이 공인된 정부라는 사실 뿐. : 외국의 정부와 자본가들에 의해 고립화되고 배척당한 체제에게 선택권은 없었음. : 당시 소련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농촌사회(인구의 82%)→농민들의 욕구와 의지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3)-3. 스탈린의 계획경제 : 소련에서의 어떠한 급속한 근대화정책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자비할 수밖에 없었고, 대다수 인민들의 의사에 반하여 부과되고 그들에게 상당한 희생을 부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강제적일 수밖에 없었음. : 중앙집중화된 통제경제는 불가피하게 군사작전에 더 가까웠음. : 1928년 NEP를 대체한 5개년 계획들의 '계획경제'는 훨씬 더 거친 수단일 수밖에 없었음. 산업들을 운영하기보다는 새로운 산업들을 창출하는 것이 당시 계획경제의 사업이었고, 기본적인 중공업과 에너지 생산에 당장의 우위를 부여하는 길을 택함. : 소련의 계획경제는 일종의 전시경제였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총력을 다해 막대한 양을 생산하도록 긴급명령을 내리는 것. 소련 경제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빈번하게 이루어진, 거의 제도화된 '돌격대적 노력'으로 인해 일상적 절차들이 종종 중단되는 구조로 정착됨. : 모든 결정권은 갈수록 소련 체제의 최상층으로 집중. 이러한 절차의 결점은 경제기구뿐만 아니라 그 체제의 다른 모든 부분의 엄청난 관료주의화에 있었음. : 공업화는 소련을 단 몇 년 내에 주요 공업경제국으로 변모시킴. : 주민들의 소비수준을 최저상태로 유지시키기는 했지만, 주민들에게 최소한의 사회적 수준을 보장.(일자리, 의식주, 연금, 보건서비스, 대체적인 평등, 풍부한 교육 등)
3)-4. 실패의 요인들 ① 농업부문의 실패와 농민층의 희생 : 공업화는 농민층에 대한 착취에 기반. : 1936년 헌법 이전까지 농민들은 법적, 정치적으로 지위가 열등. : 농민들은 세금을 보다 많이 내야 했고, 보다 덜 보호받았으며, NEP를 대체한 농업정책 즉, 협동농장이나 국영농장으로의 강제 집단화로 막대한 피해를 입음. : 집단화의 결과는 곡물생산고의 하락과 1932-33년의 대기근. 집단화는 러시아 농업의 생산성을 더욱 떨어뜨리게 됨. : 대대적인 기계화 역시 비효율적이었음. 전후시기가 끝난 후, 소련의 농업은 더 이상 자국의 주민을 먹여살릴 수 없게 됨. : 소련은 비효율적인 소농농업을 비효율적인 집단농업으로 바꾸는 데 막대한 비용을 들인 셈. ② 지나치게 비대해진 엄청난 규모의 관료제 : 중앙집중화된 명령식 정치의 부산물. 스탈린조차 이를 극복하지는 못함.(1930년대 말의 대공포정치는 관료층이 경직된 지배계급이 되어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한 스탈린의 필사적 시도였다는 주장도 있음) : 스탈린 시기에는 간부들의 최상층이 '언제라도 파국을 맞을 수 있는 유례없이 강력한 노예'였다고도 함. 그러나 흐루시초프 실각 이후 관료제를 제어할 장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됨. ③ 체제의 경직성 : 경제의 질적 변화나 기술혁신을 위한 메커니즘을 원천적으로 보유하지 못함. : 분배체계가 부실했고 서비스업을 조직하는 제도가 아예 존재하지 않음. 따라서 소련에서 생활수준의 상승은 대규모의 '2차 경제' 내지 '암흑 경제'에 의해 수행됨.
4) 소련의 정치체제 : 소련의 정치체제는 사회주의운동들의 민주적 측면과 완전히 결별한 것. 자코뱅적 유산(혁명적 단호함과 무자비한 행동을 강조했지만 개인의 독재를 선호하지는 않았던)보다도 훨씬 더 멀리 나아간 것. : 소련 경제가 통제경제였듯이, 소련 정치는 통제정치였음.
<통제정치가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 ① 볼세비키 당의 역사 : 레닌의 전위당 모델은 중앙지도부가 할당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하게 만들어진 것. 권위주의적이 될 가능성을 내포. : 10월 혁명이후 볼세비키가 대중정당으로 바뀜에 따라 '권위주의화'의 위험은 더욱 직접적인 것이 됨. 대중이 아는 것은 '당이 옳다'는 것과 '혁명을 지키려면 당국이 내린 결정을 무조건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 전부였음. : 독재의 가능성은 단일정당에 기반한 어떠한 체제에도 내재. 볼셰비키처럼 중앙집중화된 계서제에 기반하여 조직된 당에서는 그 가능성이 더욱 높아짐. :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해서 혁명가들은 선거적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자가 아니었음. ② 직면한 위기와 긴급한 선결문제 : 1917-1921년의 상황은 소비에트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행동에 몰두한 당에게 갈수록 권위주의적이 되어가는 통치방식을 부과. : 실제로, 강력한 보안기구로 보강된 일당독재로 반혁명세력에게 공포정치를 폄으로써 내전에서 승리. : 당 스스로 당내 민주주의를 포기.(대안정책에 대한 집단적 토론의 금지, 1921) : 위로부터 산업혁명을 추진하기로 한 결정은 자동적으로 권력을 더 무자비하게 휘두르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옴. ③ 스탈린의 특성 :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비세습적인 군주정이 되게 한 것은 스탈린이었음. : 그에게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명료한 의식과 카리스마와 자신감이 부족. 따라서 자신의 당을 테러와 공포를 통해 지배. :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이론적으로는, 합리적으로 유용한 전술이었음. 이는 상황을 평가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부족을 반영한 것.
* 소련에서의 권력은 볼셰비키들이 얻은 유일한 것이었고, 유일한 도구였음. 끊임없이 난관에 부딪히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위해 가차없이 권력을 사용하기로 한 결단력만이 궁극적인 성공을 보장할 수 있었음.
5) 스탈린 사후의 소련 : 스탈린의 계승자들은 유혈시대를 끝내자는데 암묵적으로 일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였고, 권위주의적인 사회였으며, 자유스럽지 않은 사회였음.(여행하고 이주할 자유는 공식적인 허가에 달려 있었고, 자의적 투옥이나 유배가 여전히 존재) 소련은 여전히 차르 러시아보다 명백히 뒤떨어졌음. : 소련 체제는 야수적이고 독재적이었지만, '전체주의적'이지는 않았음. 소련 체제는 효율적인 '사상통제'도 행사하지 않았으며, 사실상 놀랄 정도로 시민들을 탈정치화했음.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진술을 내면화하지 않았으며, 지식인들은 국가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사회적 공간을 창출. 1960-70년대에는 '반대의견'이 소련의 무대를 지배. (전체주의- 주민들에게 전면적인 물리적 통제를 가할 뿐 아니라, 선전과 교육을 독점함으로써 인민들로 하여금 그 체제의 가치관을 내면화하게 하는 데 성공한 전면적인 중앙집중화된 체제)
6) 동구사회주의와 소비에트권의 붕괴 : 2차 대전 이후 탄생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소련형(스탈린주의적인)의 틀 속에서 만들어진 공산당들이 지배.(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권력구조를 가진 일당제 정치체제, 정치권력에 의해 규정된 문화적, 지적 진리의 공식적 선포, 중앙에서 국가가 계획한 경제, 강력하게 그려진 최고지도자) : 공산주의 국가들은 소련이 이끄는 단일한 블록을 구성하는 일부터 시작. 유고의 이탈(1948)은 나머지 공산주의 운동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함. : 소비에트권의 정치적 붕괴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56년 스탈린에 대해 공식적으로 공격이 가해짐으로써 시작. → 소련의 지배를 받던 유럽 지역에서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남. 56년 헝가리 혁명. : 경제를 개혁하고 소련형 통제체제에 일정한 합리성과 유연성을 도입하려는 압력이 60년대에 들어와 갈수록 억제하기 어렵게 됨. 경제적 탈집중화는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요구와 맞물릴 때 폭발적인 것이 됨. : 68년 프라하의 봄(위로부터의 개혁)은 동구 소비에트권 내의 균열을 드러내고 중폭시킴에 따라 블록의 응집성과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진 것으로 보이게 함. 모스크바는 프라하 정권을 군대의 힘으로 진압했고, 이것은 결국 모스크바 중심의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사실상 종식된 것으로 판명됨. : 사회주의 경제의 성장은 현저히 하락. → 탈집중화를 통해 체제를 더욱 유연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60년대 소비에트권의 거의 전역에서 행해짐. 70년대에 들어 어느 누구도 더 이상 현존 사회주의 경제가 비사회주의 경제를 앞지를 것으로 기대하지 않게 됨.
제14장 위기의 몇십 년 1. *1973년 이후 20년의 역사: 세계가 방향을 잃고 불안정과 위기에 빠져드는 역사 ·경제를 안정시키는 요인들(컴퓨터에 의한 재고억제, 나아진 통신과 빨라진 수송, 정부측 소비와 개인소득 중 정부로부터 나온 부분의 상당한 비중...)은 전보다 더 강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세계경제가 왜 덜 안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황금시대보다 느린 속도이기는 하지만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성장은 계속 ·아프리카, 서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인당 GDP의 증가가 중단, 더욱 가난해지고 생산고는 떨어졌다. ·서양에서 이전에 '현실사회주의'였던 지역; 1989년 이후 위기는 대공황과 비교하는 것이 적절 ·중국경제의 눈부신 성장 ·서유럽의 실업률의 증가; 잠재적 노동인구가 늘어나지 않고 젊은이의 실업률이 나이 든 노동자의 경우보다 훨씬 더 높은 경향속에서 영구실업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지만 ·빈곤과 누추함: 집없는 극빈자들의 재등장: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현저하게 심화된 것의 일환: 황금시대에 노동계급에게 익숙했던 실질소득의 거의 자동적인 증가가 중단되었기에 더더욱 불평등이 증대: 1973년 이전보다 느리게 성장하는 경제에서 국가세입보다 빠르게 치솟는 막대한 사회복지비 지출로 정부재정 압박
*위기의 몇십년에 관한 중심적인 사실: ·자본주의의 작동이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경제의 변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알거나 그 변덕을 관리할 수단을 보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부정책은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국민국가가 경제적 힘을 잃은 시대 ·케인스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 사이의 싸움: 양립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들의 전쟁: 고임금, 완전고용, 복지국가가 팽창을 촉진하는 소비자수요를 창출하며, 보다 많은 수요를 경제에 제공하는 것이 경제불황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케인스주의자): 황금시대의 경제와 정치가 인플레이션에 대한 통제와 정부와 사기업 모두의 비용삭감을 막았다고 주장. 자유시장이 국부의 최대한의 성장과 부와 소득의 가장 잘 지속될 만한 분배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신자유주의자): 양쪽 경제학 모두, 선험적인 인간사회관인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합리화(예: 평등과 연대라는 집단주의적 가치를 보유한 스웨덴식 경제모델, 비사회적이고 사실상 반사회적인 이기주의에 기반한 대처정부라는 식의 평가) ·황금시대 경제학의 지지자들의 실패: 황금시대의 성장이 그침으로써 이윤과 비영리적 소득이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는 더 이상 증가할 수 없게 되자 자본의 요구와 노동의 요구 양쪽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었다: 예) 스웨덴 모델의 후퇴: 산업보조금 지급, 국가 및 공공부문의 고용확산으로 완전고용유지, 복지제도의 신장-->고영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의 상승 억제, 고소득에 대한 가혹한 세율부과, 심한 적자: 경제의 세계화로 인해서 통제할 수 없는 '세계시장'이 모든 국가의 정부들의 운명을 좌우, 일방적인 경기부양책을 쓰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신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 황금시대 정부정책들에 대해 경직성, 비효율성, 경제적 낭비를 공격하는데에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대안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정부들도 국가의 비중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고, 자국의 경제를 관리하고 조종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방임경제학에 가장 깊이 몰두한 체제(레이건의 미국과 대처의 영국)들은 노골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었고 외부세계를 믿지 않는 모순적인 태도를 지녔다.
*위기의 몇 십년의 경제적 문제들이 유난히 심하고 사회적으로 파괴적이 된 것은 ·주기적 변동이 구조적 격변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기술혁명에 의해 변형된 생산체계: 주기적이 아닌 구조적인 실업: 불경기 때 잃은 일자리가 경기가 호전돼도 돌아오지 않을 것: 기술수준이 높아질수록 가장 싼 인간조차 그의 일을 할 수 있는 기계보다는 비싼존재: 생산에서 인간들이 기계에 밀려나는 속도가, 시장경제가 그들을 위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낳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라졌다.
2. *위기의 몇십년의 정치 ·증가하는 증오의 문화 ·정부에 대한 반발이 기존의 반정부세력에게 반드시 유리하지는 않았다: 주된 패배자는 서구의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 정부에 의한 경제적, 사회적 조치는 힘을 잃은 반면 지지자들의 핵심집단인 노동계급은 잘게 분열: 좌파의 주요정당을 버리고 이른바 '신사회운동'에 가담 ·좌파의 공백에 발을 들여놓은 새로운 정치세력: 우파의 외국인 혐오 및 인종주의 세력에서부터 분리주의 정당들, 각종 '녹색'정당들과 여타의 '신사회운동들': 이러한 운동들의 중요성은 그 실제 내용보다는 '기존의 정치'에 대한 거부에 있다: 성장할 잠재력이 가장 컸던 새로운 정치세력은 대중주의적인 민중선동, 크게 부각된 개인의 지도력, 외국인에 대한 적대를 결합시킨 세력
3. *제2세계의 위기 ·사실상 자급적인 지역경제로서는 최후를 맞았다: 소련의 국제곡물시장 대거진입, 70년대 석유위기의 충격 ·동서의 기묘한 결합: 상호의존이 깨졌을 때 모두 무질서에 빠졌다: 소비에트 정치체제의 갑작스런 붕괴로 소비에트권의 지역간 분업과 상호의존망 역시 무너져 미처 대비하지 못한 세계시장에게 각개격파 당했다: 서방 역시 공산권의 기존 '대응 세계체제'의 잔해들을 자신들의 세계시장에 통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공산주의체제의 위기가 황금시대 자본주의의 위기와 시기적으로 일치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구조가 산산조각난 것은 체제붕괴의 결과이지, 선행조건이 아니었다: 서구사회의 사회적 구조는 사회주의 사회보다 훨씬 더 깊게 침식되었다: 사회주의체제는 서구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영향으로부터 시민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서구의 사회적 변화의 전면적인 충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던 것이다. 동구의 시민들이 겪은 어떠한 변화도 국가나 국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통해서 나왔다. 국가가 바꾸는 일에 착수하지 않은 것은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았다.
4. *제3세계의 위기 ·일반화가 불가능하다. 위기의 몇십년은 제3세계에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단 하나의 일반화는 확실-1970년 이후 이 지역에 속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빚더미에 깊이 빠졌다: 1980년대 초 채무위기-1929년 이래 가장 위험한 시기. ·빈국들의 부채가 증가하는 동안에 그들의 자산이나 잠재적 자산은 증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위기의 몇 십년에 명백히, 제3세계의 상당 지역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1970년에 저소득 경제 42개국 가운데 19개국에서 외국의 순투자액 제로, 1990년에 26개국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음) ·위기의 몇십 년의 주된 결과는 부국과 빈국 사이의 격차가 더욱 벌어진 것: '최후진'국들의 1인당 GDP는 1960-87년에 공업국들의 9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5. *초국적인 경제의 세계지배 확립 ·영토국민국가의 토대 잠식: 노동조합, 의회, 전국적인 공공방송망 등 영토경계선에 의해서 규정되는 조직들의 쇠퇴: 초국적기업, 국제통화시장, 위성시대의 세계화된 대중매체 및 통신 등은 강화: 복지, 교육, 보건업무에 대한 이전지출과 소득재분배 기능조차 이론적으로는 더 이상 영토별로 독립적일 수 없다 ·역설: 국민국가의 약화는 기존의 영토국민국가를 (보다작은) 새로운 국민국가가 되고자 하는 것들로 세분하는 새로운 풍조와 병행: 자치주의 및 분리주의 운동들의 부상: 새로운 소형국가들은 기존 국민국가들과 똑같은 결함들로 고통받았다. ·새로운 분리주의적 민족주의는 세가지의 결합 1)기존 국민국가들의 지위하락에 대한 반발, 2)부유층의 집단적 이기주의: 부유한 지역이 자신의 자원을 남에게 주고 싶지 않다, 3)20세기 후반의 '문화혁명'에 대한 반응: 정체성 집단, 배타적인 정체성 정치: 정체성 정치와 세기말 민족주의는 20세기 후반의 문제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 ·국민국가는 더 이상 문제들을 다룰 수 없다. 그러면 누가 또는 무엇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는가?: 유엔과 빠른 속도로 증가한 국제기구들의 무력함: 국제적인 행동을 확보하는 두가지 방식의 강화: 1)중간 규모의 국가들이 자국의 권력을 초국적인 권력체에게 자발적으로 양도한 것-유럽연합, 2)국제금융기구들(IMF와 세계은행)의 권한 강화-부국들이 빈국들에 정책을 부과하는 데에 효율적인 국제적 권력체
제15장 제3세계와 혁명 1. ·제3세계의 공통분모: 고질적인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 미국의 3세계전략-우호적이거나 매수된 해당국 정권과 결탁, 필요한 경우 그 정권의 도움없이 싸움을 벌였다: 제3세계를 계속 전쟁지역으로 남게 한 이유: 1945-83년에 일어난 100건 이상의 '대규모 전쟁과 군사행동 및 전투'에서 약 1,900만명이 사망, 모두 제3세계에서 벌어진 것 ·공산주의체제는 제3세계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해 신중한 온건정책을 유지: 소련이 197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혁명을 통해서 공산주의 영역을 확대하기를 계획했다는 현실적인 증거는 전혀 없으며, 1970년대 중반에조차 증거들은 소련이, 자신이 직접 창출하지는 않았던 유리한 국면을 이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 ·제3세계 나라들에서 적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전(前) 자본주의와 그 나라의 기득권 세력 및 그들을 지원하는 (미)제국주의: 무장투쟁이 아니라 민족 부르주아지나 프티부르주아지를 동맹군으로 하는 폭넓은 인민(국민)전선의 길 ·사회혁명에 대한 희망의 시대가 제3세계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좌파 전체의 이상을 간직한 제3세계
2. *게릴라전 ·1945년 이후 혁명투쟁의 주된 형태로 보임 ·좌파 군사 쿠데타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 ·도시에서의 대중의 행동의 혁명적 잠재력을 과소평가한 것 ·그러나 20세기의 3/4분기에 모든 시선은 게릴라에 집중: 소련정책에 비판적인 급진 좌파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서 강력히 선전: 모택동, 카스트로, 체 게바라의 고무, 베트남의 승리 ·1950년대 게릴라 투쟁: 전 식민당국이나 그 지역 식민자들이 평화적인 탈식민화에 반발한 식민지 나라들에서 발생 ·혁명이 집단적인 밀월로 체험되었던 쿠바(1959년): 급진파이지만 친공산주의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피델주의운동을 공산주의 방향으로 몰고갔고, 전지구적인 냉전 속에서 공산당은 혁명진영에서 피델에게 조직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였다.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했고 수렴되었다: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지식인 투사들을 고무했으나 비정규군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기반이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중앙아메리카와 콜롬비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거의 즉각 무산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구실을 준 1960년대 말 게릴라들의 소규모 공격은 현실적으로 그 정권에 최소한의 도전도 되지 못했다. 1970년대 초 이후 그 체제는 긴장이 완화되기 시작했고 1985년까지는 민간정부로 돌아갔다. ·게릴라를 통한 혁명방식은 제1세계의 젊은 반란자들과 혁명가들, 단순히 문화적 이단자들을 고무했다: 세계체제(world system)이라 부르게 된 것의 '중심국들'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종속상태'로 전락한, '주변국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세계가 해방될 것이라는 신념인 '제3세계주의'가 1세계 좌파이론가들을 사로잡았다.
3. *68-69년 ·사회혁명의 고전적 전망이 사라진 시대에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낸 1968-69년의 반란의 물결 ·대학생이라는 새로운 사회세력이 몰고 왔다: 교양계급의 일원, 중간계급의 자녀, 지배 엘리트의 충원기반이었으므로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기가 쉽지 않았다 ·진정한 혁명도 아니었고 그렇게 발전할 경향도 보이지 않았다: 서방의 학생반란은 문화혁명-부모세대의 중간계급적 가치관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모든 것에 대한 거부-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학생세대의 상당수를 정치화하는데 일조: 세미나 지향적 마르크스주의에 경도: 기존의 좌파정당으로 돌아가거나 학계에 진출하여 정치-문화적 급진주의자 집단을 형성: 전위조직들에 가입하거나 그러한 조직들을 재창출-고문과 대항 테러의 어두운 시대 ·학생반란은 기존 세계혁명의 마지막 환호성: 유토피아적, 기능적 의미에서 혁명적, 진정으로 전지구적이 된 세계 속에서 나타난 세계적인 것: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혁명의 퇴색: 주목받았던 운동조차 자신의 국내문제에만 관심을 둔 운동: 혁명에 헌신한 국제운동의 와해: 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사망을 공식선포: 1951년의 재건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세계혁명이든 아니든 공식적으로 혁명을 포기했고 대부분의 경우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믿음조차 포기했다. 4. *1970년대의 혁명들 ·유럽: 1974년 우익체제인 포르투갈 체제 전복, 그리스의 극우파 군부독재 붕괴, 75년 스페인의 의회주의 정부로의 평화적 이행 ·아프리카: 콩고내전과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강화에 뒤이어 게릴라 운동이 60년대에 증가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부족간 경쟁과 중소경쟁에 의해서 약화: 75년에 식민지들이 독립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포르투갈 혁명 덕분: 에티오피아 혁명(74): 이론상으로 사회주의라는 대의에 헌신하는 체제들의 유행을 가져왔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분석이 겨냥했던 사회와 사하라 이남의 탈식민 아프리카 사회의 차이를 감안할 때 명백히 다른 종류에 속하는 현상: 부족에 대한 충성이나 부족간 동맹에 기반한 동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이들 나라에서 가지는 유일한 적합성은 단련된 소수정예당과 권위주의 정부를 만드는 비결에 있었다. ·인도차이나: 75년 베트남에서 미국의 철수가 공산주의의 전진 강화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 70년대 말 좌선회: 79년 니카라과 혁명, 엘살바도르의 게릴라운동, 파나마, 83년 그레나다 혁명: 60년대의 실패와 달리 새로운 점은 반란들을 지원하거나 심지어 직접 가담하고 이끌기까지 한 마르크스주의-가톨릭 사제들의 출현: 68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해방신학'을 지지해 정당화된 경향: 미국정부는 이 혁명들을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초강대국의 세계공략의 일환으로 간주 ·73년 OPEC의 쿠데타 ·미국은 전지구적 패권의 어떠한 약화도 자신에 대한 도전이자, 소련의 세계지배 야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70년대의 혁명들은 이른바 '제2차냉전'을 낳았다: 두 진영사이의 대리전으로 주로 아프리카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일련의 체제들이 붕괴하거나 전복된 것은 미국에게 타격을 주기는 했으나 냉전과는 전혀 무관했다. ·1979년 이란 혁명: 조직되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이슬람 성직자층에 의한 새로운 도시민중의 동원: 새로운 점은 이데올로기-1789년 이후의 서구혁명의 전통과 이데올로기, 어휘가 아닌 종교적 근본주의의 깃발 아래 행해져 승리한 최초의 혁명: 인민주의적 신정체제로 구체제를 대체한 최초의 혁명: 1979-82년에 이어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반란에 영향: 그러나 어떤 것도 1789/1917년 혁명전통을 대체하지 못했다. 기존의 이데올로기들의 영향력은 계속되고 있지만(라틴아메리카의 예), 기존의 전통은 잠식되고 파괴(남부발칸, 쿠바, 니카라과, 앙골라, 카불의 예)
5. *20세기 말 혁명들의 특징 ·기본 혁명전통의 위축과 대중의 부흥: 대부분의 혁명들은 헌신적이고 조직된 소수정예활동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거나, 군사 쿠데타나 군사적 정복의 경우처럼 위로부터 부과: 그러나 20세기 말에 '대중'은 지지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이라기보다는 주역으로 무대에 복귀 ·소수정예의 행동주의: 사실상 풍토병: 국제테러사건들의 지속적 증가와 정치적 암살: 이러한 유형의 폭력이 정치혁명에 기여한 바는 적었다. ·(이란혁명, 동독, 인티파다 등)사태의 추이를 결정한 것은 기꺼이 뛰쳐나오려는 대중의 의지: 대중의 행동만으로 체제를 전복하지는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대중동원이 성취한 것은 체제의 정통성 상실을 입증하는 것; 시민들이 발로 투표하는 것이 선거에서 투표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중의 수 자체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한 상황에서 행동한 사람들의 수: 대중들의 발투표가 20세기말에 중요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격차가 벌어졌다는데에 있다: 또다른 이유는 지구, 특히 제3세계의 도시화-도시에서의 혁명. ·혁명은 계속 일어날 것인가?: 21세기에 들어선 세계는 안정된 국가들이나 안정된 사회들의 세계가 아니다: 단기 20세기 말의 세계는 혁명적 위기라기보다는 사회적 붕괴의 상태에 있다: 현재에 대한 초점없는 거부, 정치조직의 부재나 불신 또는 단순히 분해과정이 초점이 명확한 불만보다 일반적이다: 세계는 폭력과 무기로 가득찼다: 폭력적인 정치와 폭력적인 정치적 변화의 세계로 남을 것임엔 틀림없으나 그러한 정치와 변화가 어디에 이를것인가만이 유일하게 불확실하다.
제16장 사회주의의 종식
·중국문명의 자족감과 자만심: 중국제국이 무너진 뒤에야 사회혁명을 통해서 근대화의 과업을 채택: 따라서 중국 공산주의는 사회적인 동시에 민족적인 것: 공산주의혁명의 기폭제는 막대한 인구의 엄청난 가난과 억압: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반제국주의 대중운동에 기반하여 민족의 해방과 부흥에 대한 호소가 설득력을 가졌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공산주의는 질서와 평화의 회복, 복리의 회복, 위대한 제국 및 문명의 위대함의 회복인 혁명이었다: 초기에는 회복으로 보임: 60년 소련과의 단교-기술지원과 여타의 물질적 원조의 중단으로 수난의 악화: 3대 수난 1)55-57년의 지나치게 급속한 농업 집단화, 2)58년 공업 '대약진운동'에 뒤이은 59-61년의 대기근, 3) 76년에 끝난 문화혁명의 10년 ·중국 공산주의의 특수성: 모택동으로 대변: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와 직접적인 관계를 사실상 전혀 가지지 않았다: 모택동의 마르크스 이론은 전적으로 스탈린주의적인 39년의 '소련공산당사: 약사'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외피 밑에 매우 중국적인 유토피아주의가 존재: 전원일치로 단결된 사회라는 이상사회관은 개인의 철저한 자기희생과 집단에 대한 철저한 헌신이 최고의 선인 일종의 집단주의적 신비주의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궁극적 목표로 개인의 완전한 해방과 자기 실현을 설정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정반대되는 것: 인간을 개조함으로써 그러한 이상사회를 낳는다는 정신적 변화의 힘에 대한 독특한 강조, 의지에 의한 변혁의 능력에 대한 믿음: '극단적인 형태의 서구화인 동시에 전통적인 양식으로의 부분적 복귀'라는 모택동주의 정책의 독특성은 사실상 후자에 크게 의존(1956년 단 1년 사이에 중국 농민의 84퍼센트가 조용히 집단화): 모택동시대의 성과(평균 칼로리의 신장, 문맹률의 하락 등)는 서방에게는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겠지만 80%를 차지하는 농촌의 중국인들에게는 특별히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국제적 위상은 혁명이후에 퇴보했다.
2. *현존사회주의의 경제 ·실용주의적인 등소평의 새로운 노선은 '현존사회주의'의 구조를 극적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장 솔직하게 공적으로 인정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회주의화되었다고 주장하는 모든 체제들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70년 이후 소련의 경제성장의 둔화와 국제적 후퇴, 사망률 같은 기본적인 사회적 지표들조차 더 이상 개선되지 않았다-사회주의에 대한 신뢰 손상: 당관료제의 무능과 부패의 결합을 연상시키는 말인 '노멘클라투라'의 부상: 유럽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개혁하려는 시도들은 실제로 프라하의 봄 이후 자포자기: 소련의 농업을 개혁하느니 세계시장에서 밀을 사먹는게 낫다 ·유럽에서 현존사회주의가 부딪친 문제: 사회주의가 갈수록 세계경제에 말려들었고 따라서 70년대의 충격을 면하지 못했다는데 있었다: 자신의 구조적 문제들 뿐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경제가 황금시대가 끝난 뒤에 맞은 위기의 문제들에도 부딪치게 된 것 ·석유위기의 결과: 1) 소련의 횡재: 에너지를 수출해서 번 돈으로 급증하던 수입품에 대한 값을 치렀다. 석유값 인상의 뜻밖의 횡재 때문에 미국과의 체제경쟁을 적극화하는 자멸적인 과정으로 몰고 갔다는 논의도 있다. 2)OPEC국가들에서 쏟아져나온 달러홍수가 국제금융제도를 통해서 차관의 형태로 분배: 수백만달러의 차관유혹에 굴복, 80년대 초 세계적 외채위기를 잉태: 사회주의 경제는 자금의 쇄도를 생산적으로 활용하기에는 너무 경직돼 있었으므로 그러한 차관은 위기를 더욱 첨예화시켰을 뿐이었다. ·에너지 절약의 실패: 80년대 초 에너지 위기: 식량과 공산품의 부족: 현존사회주의의 마지막 10년간의 상황: 중앙의 엄격한 명령과 규제에 대한 전통적인 스탈린주의적인 의존은 기본적인 개혁없이 이루어짐: 외채위기에 '바지고 경제적 전망이 더욱 악화되는 대후퇴를 낳았다
3. *현존사회주의의 정치 ·프라하의 봄 이후 동유럽 대부분에서 위성국 공산주의 정권들은 정통성을 완전히 잃었다: 소련의 개입 위협이 뒷받침하는 국가의 강압에 의해서나 기껏해야 헝가리처럼 동유럽 평균보다 나은 물질적 조건과 상대적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유지: 그러나 심각한 형태의 정치적 반대나 여타의 공적인 반대가 전혀 불가능했다. ·예외적인 폴란드: 압도적인 정권에 대한 혐오, 반러시아적(&반유태적), 로마가톨릭적인 폴란드 민족주의에 의한 단결: 80년 폴란드 연대자유노조운동의 승리, 81년 3군사령관이 이끄는 몇 년간의 계엄령체제를 도입하여 소련의 무력개입 위험을 막아내자는데 합의: 소련정부가 더 이상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85년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또는 '투명성'): 소련엘리트들의 동요가 배경-새로운 소련인에 대한 짜증: 소련 인민대중의 반응은 아니었다. 소련의 인민들에게는 그 체제가 그들이 다른 어떤 체제도 몰랐거나 알 수 없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적법하고 전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인민들 자신은 그 체제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소련에서 변화에 대한 압력은 민초들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러한 압력은 꼭대기에서 나왔다: 고르바초프같은 사람의 집권을 가능케한 조건 1)공산당 지도부의 심화, 노출된 부정부패에 대한 당의 이데올로기를 믿는 당의 일부 사람들의 격분, 2)소련경제를 책임진 교육받고 시술상의 자격을 갖춘 계층이 급격하고 사실상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경제가 조만간 불가피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경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의 탈피, 미국과의 냉전적 대결을 가능한한 빨리 중단하는 것이 당장의 목표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이 의도를 서방정부에 납득시켰다. ·1950년대 이래 공산주의 경제개혁가들의 목표는 시장에 의한 가격결정과 기업식의 손익계산을 도입함으로써 중앙계획 통제경제를 보다 합리적이고 유연하게 만드는 것: 고르바초프도 마찬가지 입장: 사회주의의 포기란 정치적으로 실현불가능한 것이었고, 개혁에 관계했던 경제학자들에 의해 그 체제는 내부로부터는 개혁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4. ·페레스트로이카(개조)와 글라스노스트(정보의 자유) 사이의 해결할 수 없는 모순: 개혁은 꼭대기로부터 나왔으나 당/국가기구는 동시에 변화의 주된 장애물: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단순한 문구에 불과, 현실적 이행 방법이나 작동방법에 대해서 최소한의 생각도 가지지 못했다. 어떠한 대안도 제공하지 않은 채 경제를 돌아가게 한 기존의 메커니즘을 파괴하고 그 결과 시민들의 생활수준을 급격히 떨어뜨렸다: 경제적 무정부상태에 빠진 바로 그 순간에 다원주의적 선거정치를 향해 움직였다-그러나, 당의 권위에 대한 대안은 단기적으로, 입헌적, 민주적인 권위가 아니라 권위 부재였다-소련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통치하지 않았고, 아무도 복종하지 않았다: 해체를 향해 돌진-영토별 자치권력체계 단위로/자율적인 경제복합체 단위로.
5. ·동유럽의 체제들 중 어떤 것도 전복되지는 않았다: 그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국내세력이 전혀 없었다: 시민들은 대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체제를 신뢰했거나 충성을 느꼈던 이는 통치한 자들 중에서조차 없었다-저항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그들은 체제가 작동할 수 있는 한, 체제를 작동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곧 정치와 국정을 운영하는 자리들은 늘상 그러한 역할을 맡았던 자들에게로 되돌아갔다. ·소련의 해체는 중앙권위의 분해에 기인한 것: 국제적 강대국으로서의 소련붕괴의 입증: 굶주림과 부족: 절망한 개혁가들은 구체제가 완전히 파괴되지 전까지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극단주의로 치달았다: 영미의 경제학자들과 재정전문가들은 100% 자유시장이 자동적으로 상점의 선반들을 채워줄 것이라고 주장: 그러나 소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후 충격요법적 자유화가 시행되었을 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의 전면적 붕괴는 어떤 주요 정치가의 정책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의 분해는 불가피하게 원심력을 강화하고 붕괴를 피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옐친의 정책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소련의 사멸은 경제, 국가, 사회의 문제들 중 어느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한가지 악화된 점은 이제 공화국들이 이전의 비민족적인 소련의 경우와 달리, 러시아를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
6. ·공산주의가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급속하게 정복했던 거대한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이 얼마나 피상적인 것으로 드러났는가: 1)공산주의는 대중의 개종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간부들(또는 전위)의 신념, 여당으로서의 공산당은 소수정예당,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동의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확신이나 그밖의 확인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체제하에서의 삶이 자신들에게 이로운가, 자신들의 상황이 다른 이들의 상황에 비해서 어떠한가에 대한 판단에 달려있었다. 2)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도구적인 신념. 현재는 막연한 미래에 도달하려는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가졌다. 공산당 간부들조차 일상적인 생활상의 만족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일반적으로 당은 그들의 행동에 어떠한 지침도 제공하지 못했다. ·공산주의는 왜 실패(붕괴)했는가?: 소련의 역설-마르크스가 말한 생산력이 사회적,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와 충돌하게 된 명확한 사례: 소련의 경우 상부구조가 후진적인 농업경제를 선진적인 공업경제로 변화시켰는데, 그로 인해 이제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발전시켰던 힘에서 그 질곡으로 바뀌는 시점에 도달-그렇게 시작된 '사회혁명의 시대'의 첫 번째 결과는 구체제의 붕괴 ·무엇이 그 체제를 대체할 것인가?: 구체제의 전복이 더 나은 체제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19세기 낙관주의를 더 이상 따를 수 없다: 소련의 붕괴로 '현존사회주의'의 실험은 끝났다. 이러한 실험은 아마도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소련의 실험이 자본주의에 대한 세계적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하고 반복될 수 없는 역사적 맥락에서 광대하고 너무도 낙후한 나라의 특별한 상황에 대한 일단의 특정한 대응들로서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사회주의의 실패가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10월혁명의 비극은 그 혁명이 무자비하고 거친 통제사회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는데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거칠게 기본적으로 계획없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것 이외에 대안이 있었을까? 대안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난 그렇게 말할 수 없다네.-오스카르 랑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