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스미스의 생몰연대(1723-1790)를 염두에 둔다면, 그가 여전히 의미있게 인용되는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다. 생전에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윤리학 교수였을 뿐이다. 그는 오늘날 수많은 경제학 저서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학술저서에서 인용되기는 플라톤이나 스미스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스미스가 진정으로 의미있는 지점은 그가 학술적인 글이 아닌 잡지의 시사칼럼에서, 일상의 대화에서 인용된다는 것이요, 그것도 격언처럼 쓰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태를 설명하는 근본 원리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사후에 이렇게 오래도록 삶의 현실에서 받아들여지는 학자는 아마 스미스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의 영향은 사후의 일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생전에 당대의 정책 결정자들에 의해 널리 수용되었다. 이는 그의 이론이 대영제국의 현실과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간 확실한 증거라 하겠으니, 그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행복한 학자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아담 스미스의 이러한 행복은 그의 저작 <<국부론>> 때문이다. 이 책은 초판이 6개월만에 매진될 정도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의 범위는 대영제국의 총리실까지도 그의 명성이 알려졌다는 사실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그는 구체적인 정책 결정에 관여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는데, 총리를 지낸 프레드릭 노스는 국가 예산안을 짜는데 그가 추천한 새로운 조세 제도를 도입했는가 하면, 그는 1778년 아메리카 식민지 정책 결정, 1779년 아일랜드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등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과연 <<국부론>>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기에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세상의 일에 그처럼 깊게 관여하고 있는가? <<국부론>>의 내용을 정리하라고 하면 아주 상투적인 것들이 제시된다.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자유 방임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는 것, 시장에 의해 통제되는 이기적인 행위의 사회적 결과물로서의 국부를 내세웠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주장들이 오늘날 실현되었는지는 의문이고, 설사 실현되었다해도 그 실현 여부가 저작의 영향력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말하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지나친 숭상일 수 있으므로, 그의 저작에서 대표적인 테제 몇가지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은 항상 동료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을 오직 동료의 자비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동료의 이기심을 자극하고 자기의 요망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낫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면,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러한 모든 제의가 의미하는 바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호의의 대부분을 상호간에 얻어낸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은, 마땅히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익' 또는 '이기심'이다. 이것에 대비되는 말은 '인간성'이다.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위의 설명은 경제적 활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스미스가 바라보는 인간의 참 모습에 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스미스 경제학의 원리로서의 인간관인 것이다. 스미스의 출발점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은 종래의 전통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그것은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는 것외에도 다양한 차원의 도덕적 실천까지도 고려하는 인간의 종합적인 성품이다. 그런데 스미스는 그러한 가치기준을 점잖게 없애 버린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이익을 따질줄만 알면 '인간'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간관이 스미스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담백한 현실 수긍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영제국의 전통의 최종 귀결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 선행하는 베이컨, 홉스, 로크 등이 이미 이러한 인간관을 예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사상의 영역에서만, 원리의 차원에서만 주장했다면, 스미스는 현실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며, 아마 이러한 점이 그의 저작의 호소력을 높여 주었을 것이다.
스미스의 출발점이 인간의 이기심이라면, 그것은 <<국부론>>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이며, 동시에 그가 서술하는 자유방임 경제 체제의 핵심 요소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체제에서는 이기심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의도적인 계획도 수립되어서는 안된다. 스미스는 그것을 강조하여, 역설적으로 이기심의 충족이 보편적인 이익, 즉 국부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개인]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 의도한 것도 아니며 그가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목적을 증진시키게 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하여 반드시 [의도했을 경우에 비해] 사회에 보다 적게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종종 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여기서 개인의 이익 추구와 보편적인 사회의 이익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작동하여 사회의 이익을 더 효과적으로 증진시키는지 어쩌는지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스미스의 이 주장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둘러싸고는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과 억지가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스미스라고 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려는 사람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더러는 전혀 상반되는 주장들이 스미스를 근거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는 '국부'가 아닌 개인의 '치부'를 목적으로 삼은 행위를 정당화할 때에도 스미스가 활용된다. 이는, 이기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았던 스미스 자신에게는 언짢은 일이겠으나 그의 위세를 빌려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며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겠다.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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