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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패스트푸드 전체주의 /강유원

ddolappa 2008. 5. 16. 04:28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 대부분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거의 망설이지 않고 '공산주의'라고 대답한다. 제도권의 윤리교육이 탄탄한 기반을 다져준 데다 계속되는 언론의 세뇌, 그리고 정치권의 음산한 흑색선전이 단단히 효과를 보고 있다는 증거다. 위의 질문의 정답은 '독재 또는 전체주의'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차원의 주제이고, 정치적 의사결정 방식에 따라 민주주의와 독재는 양극으로 나뉜다. 공산주의는 경제체제의 하나로 봐야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반대말은 될 수 있을지언정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건 조금이라도 타당하지만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이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건 말도 안 된다. 어떤 정치체제가 독재냐 민주정이냐를 판별하는 가장 명백한 기준은 사상범이 있느냐 없느냐 이니 독재자를 비판하는 이를 감옥에 가두는 자는 자신이 독재자임을 시인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라는 말이 그렇게 잘 먹히는 것일까? New York Review of Books에 실린 Mark Lilla의 주제 서평 "The New Age of Tyranny"(http://www.nybooks.com/articles/15757)에는 이 의문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과거 소비에트 제국이 전체주의 체제였다는 것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환상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마땅하고도 옳은 통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통찰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또는 '자본주의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닌가?'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려면 전체주의에 대한 개념사적인 고찰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나, 여기서는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만을 검토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려면 어쩌다 한번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우리의 마음에 새삼스럽게 의식되지 않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미 말했듯이 새삼스럽게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문화가 아닌 것이다. 음식을 예로 들어 보자.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요즘 어린이들이 즐겨 먹는 음식은 패스트푸드다. 광고에 의해 그렇게 되었건, 입맛이 바뀌어서 그랬건, 이제는 어떤 게 원인인지를 식별해내기 어렵게 되었고, 그 음식 때문에 비만이 늘어났고 벌써 수많은 어린이들이 패스트푸드에 이미 중독이 되어 버렸다. 음식습관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가서도 그 나라음식을 잘 못먹고 시큼한 김치를 먹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은 음식이 머리가 아닌 몸에 붙는, 그것도 내장기관에 달라붙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의 아이들이 패스트푸드를 좋아하고 그것에 중독 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아이들의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식습관이다. 따라서 그 식습관으로 30대 이후 세대와 자연스럽게 구별되며, 이제 그러한 구별은 아주 다른 여러 가지 사회적 경향들로까지 전개되어 갈지도 모른다.

말이 나온 김에 패스트푸드라는 것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해보자. 아이들이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어서 여러 가지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 머리 속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일 게다. '패스트푸드 안 먹이기 운동을 벌이자', '전통적인 음식을 많이 먹이도록 노력하자', '전통식단을 아이들 입맛에 잘 맞도록 개선하자'...

이런 대책들은 문제점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등에서 각계 전문가의 입을 빌려 마지막 부분에서 내놓는 것들이다. 그러면 이제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니까 철썩 같이 옳다고 여기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보기로 하자. 패스트푸드의 대립물은 전통음식이니 그걸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우선 입맛을 바꿔야 한다. 입맛을 바꾸려면 날마다 먹여야한다. 날마다 먹이려면 날마다 집에서 누군가가 아이를 끼고 앉아서 아이 입맛에 맞도록 개선된 전통음식을 만들어 먹여야한다. 내장기관에 달라붙은 패스트푸드 음식의 독을 완전히 제거하고 전통음식이 배게 하려면 꽤나 오랫동안 먹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 그럼 이 짓을 누가 할 것인가? 이 짓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집이 한국에 얼마나 될까? 나는 이런 여건을 갖춘 집이 대다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핵가족화 되고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는 시대에 이런 '전통적인 음식 만들어 먹이기'가 가능하려면 꽤 갖춰진 집에서 살아야하고, 사실 그런 집에서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효율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보면 낭비일 수도,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전통음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와 가공에 들어가는 노력이 대형할인매장에서 사다가 거의 즉시 해먹을 수 있는 반 가공식품보다 훨씬 비싼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패스트푸드의 범람을 막는 일은 경제활동구조와 관계되어 있으며, 개개인의 각성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전 사회적.국가적 급식 시스템과 농업생산 시스템의 뒷받침이 있어야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패스트푸드 문제는 개인의 입맛이 아닌 사회적 밥통의 문제인 것이다.

'패스트푸드'는 사실 현대사회, 특히 아메리카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이제 단순한 음식이 아니고 그것 안에 아주 다양한 습관과 관행, 심지어 문화까지도 포괄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패스트푸드 문제가 사회적 밥통의 문제라면 그 음식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조리사 개인의 손이 아닌 여러 가지 사회적 생산의 요소들이 개입될 것이니, 그러한 요소들을 분석해 보는 것은 현대사회의 본질적 구조의 일단을 밝혀내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겠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패스트푸드가 현대 사회의 획일성 또는 전체주의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논의의 최종 결론은 '패스트푸드 전체주의'겠는데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패스트푸드가 만들어지고 팔리는 과정을 분석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어떠한지, 그리고 그 속에서의 우리의 삶은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며, 그에 이어 우리의 삶 속에 전체주의가 어떤 양상으로 어느 정도까지 스며들어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는 맥도날드다. 그런데 이제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 이름도 아니고 그걸 파는 가게이름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경제적 현상을 가리킨다.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는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사회와 그 밖의 세계의 더욱더 많은 부문들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규정은 원제가 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인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라는 책에 나오는 것이다. 이 책은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날드에서 패스트푸드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기계적 합리성의 과정을 분석하고 그것이 사회의 여러 부문에 미치는 영향들 -- 이것이 맥도날드화일 것이다 -- 에 대해 논증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조지 리처에 따르면 "네 가지 매혹적인 특성이 맥도날드 모델, 좀더 넓게 말해 맥도날드화의 성공을 이끄는 핵심이다. 간단히 말해 맥도날드는 고객과 종업원, 지배인 모두에게 효율성(efficiency), 계산가능성(calculability), 예측가능성(predictibility), 그리고 통제(control)를 제공하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유심히 살펴보면 이 네 가지 특성은 맥도날드의 경영전략일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가 움직여가는 기본적인 작동원리이면서 동시에 특정집단에 속한 인간 전체를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즉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방법 -- 어찌 보면 전체주의적인 -- 이기도 하다. 과연 그러한지 알아보자.

첫 번째, 효율성. 패스트푸드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이것이다. 그러니 이름에 'fast'라는 말이 들어간다. 패스트푸드는 준비되는 시간이 빠르다. 메뉴판을 보고 고르고, 시키고, 서서 기다리면 미리 규격에 따라 만들어져 있던 음식이 덥혀져서 나온다. 준비만 빠른 게 아리나 먹기도 빨리 할 수 있고 분량에 비해서 많은 열량을 가지고 있으므로 금방 포만감을 느낀다. 빨리, 효율적으로 해치워주는 것은 패스트푸드 만이 아니다. 어딜 가나 미리 규격화되어 준비된 맞춤서비스들이 성행하고 있는데 이것들 역시 목표는 효율성이다.

두 번째, 계산가능성. 이것은 '예측가능성'과 통하기도 한다. 신속한 것에 길들여지면 천천히 참고 견디는 일을 거의 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굉장히 불안해한다. 그래서 어떤 피자업체는 30분 내로 배달을 약속하기도 한다.

세 번째 특성인 예측가능성은 시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내용에도 해당된다. 미국에서 먹는 맥도날드나 중국에서 먹는 맥도날드나 기본은 같다. 현지인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별도로 개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미세한 차이일 뿐이다. 맥도날드의 이러한 통일성은 수많은 프랜차이즈 외식업을 성황케 한 비결이기도 하다. 또한 맥도날드적 체계는 어디에나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매뉴얼을 중시한다. 모든 기업들은 점차로 개인의 차이나 창의력보다는 업무에 필요한 지침과 세부실행사항들을 비치해두고 그것에 따르도록 한다.

넷째, 통제. 맥도날드에서는 거의 모든 부분이 기계화되어있다. 줄서서 기다리기, 제한된 메뉴, 불편한 의자, 시끄러운 음악 등은 고객들을 은근히 통제한다. 손님으로서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빨리 주문하고, 받아먹고 나가게 하는 것이다. 패스트푸드점에 가서는 종업원이 친절한지 불친절한지 느낄 겨를이 없다. 음식점을 고르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무의식중에 빠진 것이다. 어쩌면 맥도날드는 가까운 미래에 무인상점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 패스트푸드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알면 되는 걸까? 다시 말해서 패스트푸드는 근대 이후 합리주의가 극단에 이르러 사회의 모든 부문에 그러한 차가운 합리성이 파고드는 현상의 상징으로만 보면 되는 걸까? 그렇지 않은 듯하다. 여기에는 좀더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미국의 맥도날드 햄버거에 쓰이는 소고기나 감자를 한번 들여다보자.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대량 재배된 식품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감자는 이 상황에서 겉모습만 감자일 뿐 사실은 농산물이 아니라 공산품에 가깝다. 가령 미국 최대 농업기업인 몬산토는 유전자가 조작된 감자 종자를 판매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기름에 튀길 때 지방을 덜 흡수하도록 유전자 조작된 감자, 가뭄을 견디는 옥수수, 깎을 필요 없는 잔디, 백신을 분비하는 바나나와 감자, 서리에 끄떡없는 토마토"(<<욕망의 식물학>> 참조) 등도 있다. 이렇게 유전자 조작된 종자들을 움켜쥐고 있음으로 해서 몬산토라는 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챙김과 동시에 그들이 공급하는 종자를 사용하지 않는 농부들을 망하게 한다.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만을 일으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유전자 조작된 식물이 앞으로 자연에 어떤 해악을 끼칠지를 예측할 수가 없다. 이것은 농약에 의한 오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농약중독은 세월이 가면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지만, 변형된 종자들 때문에 생겨나는 생물학적 오염은 그것이 생물이라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자기증식을 하고 그 결과 유전자 조작을 가했던 인간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괴물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을 피하려면 유전자 조작이 되지 않은 종자를 쓰면 되겠지만, 그랬다가는 판로가 막히고 원가도 못 건지니 결국 농부는 장사꾼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고, 몬산토와 같은 거대 농업기업들은 정부의 식품관련 기관들마저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고 있으므로 얼마든지 그러한 조작들을 감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한 사회집단에서 먹는 모든 음식에 대한 개인의 선택은 그 폭이 지극히 좁다는 걸 알 수 있다. 먹고 싶지 않아도 굶기 싫으면 유전자 조작된 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음식이 사회문제라고 했던 말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음식을 이렇게 사회문제로 만들어 버린 것은 음식물마저도 이윤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전락시켜버린 기업들의 탐욕인 것이다.
기업은 이윤창출이 목표이므로 탐욕을 부린다고 비난할 수 없다. 이윤만 남길 수 있다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는 수소폭탄도 팔아치우는 게 기업인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여기서 생겨난다. 앞서 몬산토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현대사회에서 기업은 우리 생활의 모든 측면을 지배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 인생과 온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윤창출의 대상이 된다. 태어나는 순간 엄마 젖을 먹기 보다는 분유를 먹게 하고, 분유에 이어서는 이유식, 이유식에 이어서는 패스트푸드를 먹게 한다. 죽을 때도 고상한 장례식을 치러주는 장례산업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끊임없는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유포하고, 계절 신상품을 출시한다. 계속적인 소비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정부를 움직이고 반대세력을 무력화시켜서 우리의 인생전체를 기업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아무 주저 없이 '자본주의 기업의 전체주의'라 말할 수 있을 것이요, 이 전체주의를 움직이는 매카니즘은 바로 '맥도날드화'인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라 해도 정부는 원칙적으로 국민들의 뜻에 따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경제체제와는 무관하게 그 체제를 민주주의라 부른다. 그런데 기업은 민주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업의 의사결정은 최고 경영진이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다. 고작 몇 퍼센트의 지분만을 쥐고 전 그룹사를 좌지우지하는 황제처럼 굴고 있는 한국의 재벌회장들을 떠올리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최고 경영진은 기업의 종사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며 궁극적으로는 종사자들의 노동을 착취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업은 철저한 독재체제이자 전체주의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런 기업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국가의 정책에 심각하게 관여해서 모든 것을 좌우한다면 그 국가의 민주성은 형편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은 가식일 뿐이고 실제로는 기업에 의한 사회지배가 실행되는 것이며, 이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 의한 일상의 지배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전체주의'할 때 떠올리는 것은 대개 폭력과 억압으로 전 국민을 내리누르는 독재자의 모습이며, 이런 것을 우리는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억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숨쉴 틈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 보면 상황이 좀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뭐가 독재고 뭐가 아니지를 눈으로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는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스며들어있는 종류의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들어와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에 의한 전체주의는 말 그대로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이다.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가 농약이라면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생물학적 오염과 같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우리를 얼마나 노예화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우리는 먹고 살기위해 기업에 취직하여 자신도 모르게 기업의 전체주의 지배를 돕고 있으나,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목숨을 겨누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빤히 알면서도 어쩌질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파시즘'의 본질적 내용이요, 그것을 우리는 '패스트푸드 전체주의'라 할 수 있겠다.

끝으로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론자에게 두마디.
첫마디, 뭘 분석하려면 경제적 바탕 위에서 하도록.
두마디, 남들 욕하지 말고 자기부터 파시즘적 작태를 저지르지 않도록.


2 Nov. 2002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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