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칼 마르크스

[스크랩] 맑스와 에피쿠로스: 유물론에 반하는 유물론

ddolappa 2008. 5. 17. 05:23

 

맑스와 에피쿠로스: 유물론에 반하는 유물론

 

고병권['진보평론' 1호]

 

 

 

1. 백 투 더 퓨처 -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그것은 비슷한 크기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필요하다면 팔을 날카로운 칼로 만들고, 어떤

때는 타일 바닥이 되어 위장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비슷한 덩치의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 눈치챘겠지만 영화 ■터미네이터2■에 나오는 액체금속 사이보그 T-2000에 대한 이

야기다. 총량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원자들의 배열과 배치를 바꾸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괴물! 그 괴물은 미래에서 왔지만 또한 과거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Back To The Future!

인물이란 사상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그릇이지만 원자론의 창시와 유물론의 토대를

닦았던 과업은 아마도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기원전 460년

경 트라스의 아브데라에서 테어난 데모크리투스는 ‘세계가 원자들(atoms)과 허공(void)으

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그로부터 백여년 뒤 원자론은 다시 에피쿠로스(Epicurus)라는 유물론자에 의해 주장되었

다. 그러나 시간은 데모크리투스에게 부여했던 영광을 에피쿠로스에게 나누어주는 것에 인

색했다. 사람들은 그를 단순한 쾌락주의자로 몰아세웠으며 학자들은 그가 데모크리투스와

공유하고 있는 지반을 표절이라고 불렀고, 그가 새롭게 내놓은 학설들은 위대함에 대한 변

덕과 타락이라고 비난했다. 그도 “세계는 원자들과 허공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의 말이 유물론의 전통에서 하나의 커다란 지진이 될 것임을....

비트는 힘을 만나는 것은 역사에겐 큰 행운이다. 맑스가 1840년부터 1841년 사이에 쓴 박

사 학위 논문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주)(이하 ■논문■)에서 그동

안 묻혀 왔던 에피쿠로스 철학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고 원자론의 첫 발설자라는 것을 제외

하고는 모든 유물론의 영광이 에피쿠로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 지진의 의미가 분명

해지기 시작했다.

*주) {{K. Marx,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eischen

Naturphilosophie", Marx Engels Werke, Ergänzungsband, Schriften bis 1844,

(Berlin, 1981). 아래에서 인용할 경우에 (논문: 쪽수) 형식으로 본문에 표기한다.}}

맑스가 에피쿠로스 연구를 시작한 것은 1839년 초로 보인다. 그가 논문을 쓰기 전에 작성한

■에피쿠로스 철학에 관한 노트■*주)(이하 ■노트■)는 모두 7권으로 되어있는데 이 ■노트

■를 통해 우리는 에피쿠로스 철학에 대한 연구동기와 과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에피

쿠로스에 대한 연구 동기는 직간접적으로 헤겔 철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 등이 속했던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 철학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철학사에

서 하나의 ‘정신적 시민권’을 인정할 수 있는지(논문: 267), 아니면 저물어 가는 고대철학의

끄트머리로 봐야할 지에 대해서 헤겔은 분명히 전자의 입장에 섰던 것이다. 맑스는 이 시기

에 헤겔의 ■논리학■과 ■엔찌클로페디■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 ■■K. Marx, “Epikuireische Philosophie”, Marx Engels Werke,

Ergänzungsband, Schriften bis 1844 (Berlin, 1981), pp. 16-255. 아래서 인용할 경

우 (노트 권수: 쪽수) 형식으로 표시한다.■■

그러나 곧바로 헤겔은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을 진부한 것으로 비판하고, 에피쿠로스가 우연

성을 주도적인 원리로 만듦으로서 모든 법칙의 필연성과 세계의 목적을 부정했다고 비판한

다*주). 헤겔에게 한 사상의 특이성이란 단지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반(反)’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이 딛을 한 계단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이다. 반면에 맑스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독자성 뿐 아니라 그 위대성을 부각시켰는데, 이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주) ■■G.W.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II.

Hegel-Werke Bd. 19, (Frankfurt 1971), Philosophie des Epikur: pp. 297-335 (김

진, 1990: 57에서 재인용).■■

그 비밀은 아마도 맑스의 논문에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대한 가장 탁월한 주석가로 평가되

고, ■노트■ 4권과 6권*주1)에서 자세히 인용되고 있는 루크레티우스(Lucretius)에게 있

는 것으로 보인다. 루크레티우스 저작을 접하면서 맑스는 에피쿠로스에 대한 그의 유물론적

해석에 매료된 것 같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De rerum natura■는 맑

스에게 유물론의 전통을 통해 헤겔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급진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맑스가 헤겔의 ■엔찌클로페디■에서 작성한 ■자연철학■

에 대한 목차의 세 버전(version)은 이러한 변형을 시사해준다. 기계학, 물리학, 유기체학

에 대해 ■노트■ 6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목차들은 버전이 올라갈수록 변형이 심해져서 마지

막 버전의 경우에는 사실상 헤겔의 것과는 완전히 상이한 것이 된다*주2).

*주1) ■■김진에 따르면 발견된 노트들 중 다섯 권의 표지에는 분명하게 1, 2, 3, 4, 7 권

이 표기 되어 있었다. 그런데 MEGA 제1판의 편집자가 베를린에 있는 SED 문고에서 발견된

표지 없는 원고를 정리하면서 임의로 순서를 정했고, 이후 출판물이 이것을 따르면서 5권과

6권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의 연구를 참조하면 이 글에서 인용되는 노트 6권은 실제로는 5

권이 되는 셈이지만, 일단은 MEW에 맞추어 그냥 6권으로 표기했다. 영어판 전집도

(Collected Works, Vol. 1. (Progress 1975)) 역시 MEW의 편집에 따랐다. 자세한 내용

은 김진(1990: 52) 참조.■■

*주2) ■■이 목차들은 맑스가 헤겔의 ■논리학■을 공부했다는 근거가 되지만(김진, 앞의

책, 55쪽), 사실상 영어판 편집자가 밝히고 있듯이(Collected Works, vol 1.(Prgress,

1975), p.756) 헤겔 철학과는 완전히 상이한 모습으로 변형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맑스가 에피쿠로스 사상의 위대함을 끌어낸 것은 헤겔이 그토록 싫어했던 유

물론의 전통 속에서라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헤겔 변증법에 빚지지 않고서도

유물론 전통 안에서, 바로 데모크리투스와의 비교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빛을 발한다. 헤겔

에 대한 맑스의 급진적 비판이 가능했던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채권자 앞에

서 채무자는 날카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문■ 제1부에서 맑스는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철학을 동일시했을 때의 난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록 ■논문■의 제1부의 4장과 5장이 유실되기는 했지만, 3장까지 그는

두 철학자가 같은 지식을 같은 방식으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인간지식의 확실성,

대상의 진리에 대한 이론적 판단, 사유와 존재의 상호 관계 등에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특히 데모크리투스의 모순적 입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데모크리투스는 한편으로는 감각적인 현상(나타남, Erscheinung)만이 진정한 대상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각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그것이 주관적인 가상(Schein)일

뿐이라고 본다. 유물론자로서 초월성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또한 감각에도 확실성의 믿음을

주기는 어려웠던 탓이다. 그렇다보니 진리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

었던 것도 당연했다. 유물론자로서 경험적 관찰의 중요성을 인정해서 세계 곳곳을 방랑했지

만 그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지식은 내용이 없고

그에게 내용을 주는 지식에는 진리성이 없었다”(논문: 273). 그럼에도 그에게 필연성은 포

기할 수 없는 가장 중심적인 범주였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감각들을 참된 것의 고지자라고 주장하고 감각에 대항하는 것이 무모

한 일이라고 비판한다(Epicurus, 1998: 18). 또 진리란 어디 먼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

라 그의 곁에, 바로 그의 정원에 있는 것이며, 삶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필연성에 대한 어떤 주장도 거부했는데, 그가 볼 때 원인은 여럿일 수 있으며 성급한 판단은

독단을 불러 올 뿐이었다.

맑스는 이러한 대조적인 태도가 두 사람의 철학을 더 이상 동일하게 보기 힘들게 한다고 생

각했다. 남아 있는 제1부는 단지 차이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1부의 ‘일반적 차이’라는 망

원경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제2부의 ‘세부적 차이’라는 현미경을 통

해서만이 놀랍고 때로는 당혹스러운 사건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2. 자유의 정신 -클리나멘

■논문■ 제2부의 첫 번째 장을 장식하는 것은 원자들의 직선으로부터의 편위(declination),

즉 클리나멘(clinamen)이다. 데모크리투스는 원자들의 허공에서의 운동을 두가지로 기술

하였다. 우선은 수직 낙하하는 직선운동이며, 두 번째는 원자들간의 충돌에 따른 직선 운동

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그 중간에 직선으로부터 벗어나는 편위 운동을 집어넣었다. 클

리나멘이란 접선으로부터 이탈하는 곡선의 미분각이다. 원자가 직선으로부터 갑자기 벗어

난다는 편위 운동은 당시 사람들이나 이후 주석가들에게 곧잘 농담으로 받아들여졌다(논문:

278).

그러나 데모크리투스의 말대로 원자들이 중력을 받아 평행한 수직 낙하만 한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충돌할 수 있을까? 다소 애정어린 사람들은 에피쿠로스가 한편으로는 원자들의 충돌

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연과 운명에 맞서는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편위 운동을 전제했다고 생각했다(논문: 280). 그러나 루크레티우스는 ‘편위 없이는 원자들

이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편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편위 운동은 자유에 대한 설명으로

부적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은 충돌을 설명하기 위해 오히려 강제된 운동이며 차라리

결정론적 입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맑스는 루크레티우스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듯이 고려될 문제는 편위 운동 자체라고 주장

했다(논문: 280). 편위 운동은 원자들 간의 충돌 이전에 원리로서 정립되며, 그 원리에 따

라서 원자들의 충돌, 바로 세계의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편위 운동은 어쩌다

일어나는 우연적 운동*주), 혹은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운동이 아니다. 맑스는 편위 운동이

야말로 근본적인 원리이며 에피쿠로스 물리학 전체를 관통하는 법칙이라고 주장한다(논문:

282).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투스가 말한 원자들의 운동에 또 다른 운동을 하나 첨가시킨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리 자체를 바꾼 것이다.

*주) ■■우리는 편위 운동, 즉 클리나멘이 ‘돌발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우연(contingency)

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지각할 수 있는 시간보다도 더

짧은 시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G. Deleuze, 1990a: 270) 맑스가 “가

능한 최소의 공간과 시간에서 일어난다”(논문: 282)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우연이라

기 보다는 규정할 수 없음(unbestimmt, unassignable)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제 세계는 원자들의 클리나멘과 그로 인한 마주침으로 생겨난다. 마주침의 유물론!

(Althusser, 1996) 세계에 대한 제1원리와 목적은 거부되고, 기원에 대한 물음은 척결된다

(Althusser: 41). 역사의 시간을 목적을 위해 꿰맞추는 것은 관념론의 몫이다. 관념론자는

역사의 출발역에서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을 다 꿰고 있는, 다시 말해 역사의 기원과

목적을 아는 사람이다. 반면 유물론자는 달리는 기차에 올라탄 사람으로 어떤 목적도 알지

못하며 오히려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사건들에 끼여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백승욱,

1995: 117-118).

영원한 것은 없다. 맑스는 에피쿠로스 철학으로부터 ‘영원한 것의 죽음’(노트 4권: 180)*

주)을 끌어낸다. 그것이 마주침에 의해서 생겨났다면 그것은 다른 마주침, 다른 충돌에 의해

서 깨어진다(Lucretius, 1997: I. 580-583 ff).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어떤 세계, 어

떤 국가의 법들도 영원하지 못하다. ‘패는 다시 분배되고 주사위가 던져질 날이 올 것이

다’(Althusser: 47).

*주) ■■이 표현은 맑스가 이념이나 범주를 영속적으로 파악하는 형이상학적 방법을 비판

하면서 ■철학의 빈곤■에서 다시 사용한다.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생성’한다. 불

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 바로 “불사(不死)의 사(死)

(mors immortalis)”. (K. Marx, 1988a: 115).}}

결정론을 비웃으며 주사위를 던지는 거대한 자유정신*주)! 맑스가 ■논문■의 1841년 서문

에서 말한 ‘제우스에 맞서는 프로메테우스’의 정신!(논문: 263) “원자의 저항과 고집”, “원

자의 가슴에 있는 어떤 것”(노트 4권: 170), ‘원자들의 영혼’(노트4권:168), 이 모든 것들

이 클리나멘이다.

*주) ■■니체는 고정불변의 딱딱한 원자를 찾아나서는 원자론자들의 태도를 조롱하면서

(1994a: 376-377, 1994b: 207), 결정론에 맞서는 자유정신을 강조했지만(1995:301),

주사위 놀이와 자유정신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혼이라니! 그는 다시 관념론으로 돌아서는가? 영혼의 물질성을 믿지 않는 조급한 유물론

자들에게는 충분히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에 대한 해명은 뒤에서 하기로 하고 우선적으로

오해를 피하자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 영혼을 스피노자가 말하는 일종의 코나투스

(conatus)라고 이해해야 한다(Deleuze, 1990a: 269). 코나투스란 개체가 자신을 실존하

게 한 원인이 더 큰 외부적 원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을 말한다(Spinoza,

1990: 139-140).

그것은 ‘가슴 속’에 있는 것, 바로 내재하는 것이며, 초월적으로 부과되는 것에 저항한다. 그

것은 총체화를 거부하는 특이적(singular) 본질이다(Althusser: 56). 전체(Whole), 존재

(Being), 일자(the One)와의 대결!(Deleuze: 267) 맑스는 데모크리투스가 그것의 운동

을 강제된 운동으로 변화시켜 맹목적인 필연성으로 바꾸었다고 비판하고, 에피쿠로스만이

그 반발의 본질을 알았다고 주장한다(논문: 284). 총체나 구조가 자신의 우위를 확립하는

것은 마주침이 응고의 과정에 접어들었을 때 뿐이다. 응고하면 세계는 존재의 왕국에 들어

서며, 조건에 따라 각각의 특성을 부여받는 존재들로 구성된다(Althusser: 76~77).

그러나 응고는 영원하지 않으며 원자들은 다시 클리나멘과 그로 인한 충돌로 허공으로 흩어

지고 다른 관계 안에서 모이게 된다. 사태를 안정화 시켰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겐 항상 우발

적으로, 하지만 원자들의 역학 상 지극히 당연하게도 사건(événement)이 발생한다. 사건

이 발생하면 모든 의미들은 다시 부여된다. 단순히 돈 덩어리를 많이 가졌던 중세의 상인과

자본가가 다르며, 중세의 제화공과 근대 자본주의에서의 제화공이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원자들은 계속 진동한다.

하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의문이 있다. 클리나멘의 운동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원자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비틀 수 있을까? 영혼의 힘으로? 맑스는 원자들이 운동을 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점이 아니라 선이라고 말한다(논문: 280). 점은 모든 직선 안에서 지양

된다. 개체의 성격은 상실되며 점은 선의 방정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원자들은

그 자체로 실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자는 곧바로 직선을 부정하면서 편위 운동

을 하게 된다. 직선은 개별 원자에 대한 부정이며, 편위는 직선에 대한 부정인 셈이다.

우리가 이 진술을 변증법적으로만 이해한다면 논리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의미는 여전히 모

호하다. 변증법은 사건을 자주 신비화시킨다!*주) 차라리 우리는 맑스의 주장으로부터 원

자 운동의 역학이 개별 원자 자체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클리나멘의 부드러운 곡선 운동은

직선 운동의 역학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세르(Serres)가 루크레티우

스에 관한 책을 쓰면서 새로운 역학의 탄생을 말했을 때, 우리는 클리나멘의 운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역학과 만난다(Serres, 1977).

*주) ■■베르그송(Bergson)은 변증법을 ‘헐렁이는 양복’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모두의

몸이 다 들어가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옷”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의 특이성

(singularity)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모호하다. (Deleuze, 1996a: 58).}}

 

 


3. 원자들의 폭포: 고체에서 액체와 기체로

세르는 클리나멘을 불합리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네 가지 이유를 든다(Serres: 9-11). 첫째는 논리적 불합리성으로, 클리나멘이 모든 사물의 존재에 앞서서 자기 원인으로 정당화 없이 도입되었다는 점, 둘째는 기하학적 불합리성으로, 루크레티우스의 정의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며, 셋째는 역학적(mécanique) 불합리성으로, 외부적 힘이 없다면 운동이 계속된다는 관성의 원리와 충돌하는 것이고, 넷째로는 물리적 불합리성으로, 실험을 통해서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자들의 폭포(cataracte atomique)가 만들어지면 사태는 돌변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원자(그 자체)를 제외하고 극복할 수 없는 고체성이란 없다’고 말했다(Serres, 1977: 12). 폭포가 되면 원자는 흐르는 유체(fluid)가 된다. 문제는 ‘흐름’으로 돌변하고 단단한 고체 역학은 유체 역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 딱딱한 자동차들이 만들어내는 교통의 ‘흐름’을 보자. 개별 자동차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움직임(move)과 정지(rest), 빠름과 느림(Spinoza, 1990: 82)의 흐름일 뿐이다. 신호등은 그 흐름에 대한 미분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원자’를 다루는 역학이 아니라 ‘흐름’ 자체를 다루는 역학이 필요한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들의 비’, ‘원자들의 폭포’로부터 맑스가 말하는 ‘노동자들의 흐름’에 이르기까지 ‘유체역학’이 작동한다. 유체역학 모델은 아르키메데스에서 토리첼리(Torricelli)에 이르기까지 정통 과학사에서는 배제되고 변방으로 계속 밀려나왔다.(Serres, 1977: 11-12). 그것은 이 모델이 안정적인 것, 영원한 것, 동일한 것, 불변적인 것에 맞서는 생성과 이질성의 모델이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Deleuze and Guattari, 1987: 361).

유체 역학은 매끄러운 공간에 대한 흐름을 다룬다. 고체 역학에서 지배적인 것이 점이라면 유체 역학에서 지배적인 것은 흐름이다. 전자에서 선은 두 점을 사이를 잇는 것에 불과하지만, 후자에서 점은 흐르는 선에 종속된다(Deleuze and Guattari: 478). 맑스가 말하는 점과 선의 역전, 직선과 곡선의 역전과 대립!

국가는 이러한 ‘흐름’을 어떤 식으로든 포획하고 그것을 계산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야 했다. 모든 움직임들이 하나의 정교한 척도로 포착되어야 했다. ‘평행하게 내리는 비는 모두 지구의 중심을 향해서만 떨어져야 했다’. 로마가 수로를 만들면서 사용한 방식, 바로 ‘도관과 파이프, 둑을 이용해서 흐름들을 포획하고, 유체를 고체 안에 가두는’ 방식이 국가에게는 필요했다(Deleuze and Guattari: 363).

농촌에서 발생한 노동력의 흐름을 어떻게 도시의 공장으로 안정적으로 흐르게 할 수 있을까? ‘노동력의 흐름의 운동에 대한 조절, 그 흐름을 수로와 도관들로 분배하는 것’. 때로는 강제적인 인력 동원으로, 때로는 유기체적인 회사를 형성해서 국가는 흐름을 통제하였다(Deleuze and Guattari: 368). 맑스의 ■자본론■ 1권의 ‘시초축적에 관한 장’들 곳곳에 흐름들의 분배가 나타난다(Marx, 1994: 897 이하). 어디 노동력의 흐름 뿐이겠는가, 화폐의 흐름, 정보의 흐름, 에너지의 흐름, 그리고 근본적으로 욕망의 흐름!

그러나 흐름은 항상 수도관을 뚫고 새기 시작하며, 새로운 소용돌이를 만들기 시작한다*주). 프리고진(Prigogine)의 비선형 열역학에 대한 연구들은 평형에 대한 작은 교란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를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 어떻게 새로운 질서의 창출로 나가는지를 보여준다(Prigogine, 1994, 1996). 클리나멘은 필연성의 쉐마(schéma), 영원한 것, 불변의 것을 깨고 난류(turbulence)를 들여온다.

*주) ■■에피쿠로스는 천체들, 세계가 소용돌이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한다(Epicurus: 84).}}

맑스가 그의 ■노트■에서 바다에 새로운 아테네를 건설하자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이야기를 높이 평가했던 것은 자유를 위한 투쟁과 해양의 모델 사이의 어떤 관계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노트 6권: 492). 아테네가 파괴의 위협에 처했을 때 테미스토클레스의 반대자들은 군사력을 축소하고, 그것을 분할함으로써 평화협정을 맺어 손실을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파괴의 위협에 있는 아테네를 버리고 바다에 새 요소로 새로운 아테네를 건설하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맑스는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s),(하나의 난류, 새로운 소용돌이) 이후에는 (그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결정하는) ‘철의 시간’이 온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거대한 투쟁으로 특징지워질 때 그 시간은 행복하게 되며, 그렇지 못할 때 비통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유를 향한 거대한 투쟁은 왜 바다를 향했을까? 비릴리오(Virilio)는 ■속도와 정치Vitesse et politique■에서 프롤레타리의 해양적 기원과 그 모델을 보여주었다(Deleuze, 1996b: 158). 해양은 대지의 고체성과 대립한다. “자신을 대지 위에 붙박는 탯줄을 끊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또는 노동자는 도처에서 한 사회 안에 작동하는 경제적이고 상업적인 이해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것을 변형시킬 수 있는 조건을 재구성할 수 있다”(Deleuze, 1996b: 159).

액체가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들뢰즈는 소련의 유물론자 베르토프(Vertov)의 영화에서 “에피쿠로스적 유물론의 클리나멘”을 발견한다(Deleuze, 1996b: 166). 베르토프는 액체적 이미지의 제약마저 넘어서며, 그것을 기체적 지각으로 발전시킨다. 분자들, 원자들은 자유를 획득하면서 발생기호가 된다. 문자소(gramme), 기억 흔적소(engramme), 사진소(photogramme). 그것은 단순한 운동의 선을 넘어서 ‘진동’들을 추출해낸다(Deleuze, 1996b:169). 인상주의 화가 쇠라의 점묘화를 보라. 원자들은 화소가 되어 대상들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자유로워진 유체들의 흐름! 그런데 맑스는 ■논문■에서 클리나멘을 설명하면서 왜 ‘원자들의 영혼’, 혹은 ‘자기 의식’, ‘주체성’ 등 관념론적인 단어들을 사용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바로 에피쿠로스 물리학이 정통 과학의 역사에서 밀려나면서 과학밖에 서 있는 과학의 지위를 차지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 “우리는 차라리 (에피쿠로스의 사실들이 속한) 자연을 자연의 밖, 즉 영혼과 주체 안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물론 그 반대를 긍정하는 것이 유물론을 기초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들은 영혼들이 아니며, 영혼 그 자체가 원자적이기 때문이다. 클리나멘에 대한 비물리적 해석은 (오히려) 관념론적 본질이다”.(Serres, 1977: 141)
세계가 원자들과 허공으로 이루어진 이상 무(無, 허공)라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영혼 역시 원자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제 유물론자들은 자유롭게 영혼과 의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반면 관념론자들은 영혼에 대해 비물질적으로, 비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이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


4. 영원성을 깨뜨리는 영원성

니체는 원자론의 시도가 ‘고정불변의 원인’을 찾으려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비난했지만(Nietzsche, 1994: 376-377), 맑스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통해서 고정불변하는 것의 죽음, ‘영원한 것의 죽음’을 깨달았다(노트 4권: 478, 논문: 62). 사실 맑스의 저서들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형이상학과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형이상학은 세계를 이분하고 ‘이 세계(차안, this world)’의 변화와 유동성에 대비되는 영원불변성의 세계(피안, that world)에 진리를 위치시킨다. 형이상학자들은 영원불변성의 세계만이 참된 세계, 즉 실재계(real world)라 부르고 그 세계에 비추어 이 세계를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우리는 형이상학자들이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이 세계’를 평가절하는 하는 방식이 곧 그들이 ‘이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이다. ‘이 세계’는 ‘저 세계’를 닮도록 노력해야 하며 현실은 논리학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보편적 국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환상을 비판한 ■헤겔법철학비판■과 피안적 진리를 차안의 진리로 세우고자 하는 그 책의 ■서문■, 정치경제학의 형이상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 ‘모든 단단한 것들의 죽음’을 말한 ■공산당 선언■ 등 형이상학은 맑스 저작들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원자들’은 어떻게 형이상학의 비판을 벗어날 수 있을까? 원자들은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아니던가?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원자들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가 원자들로, 그것도 죽지 않는 원자들로 구성되었다는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맑스의 ■노트■에 인용된 루크레티우스의 글은 세 가지의 영원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질료를 이루는 원자들(atoms)이고, 그것이 움직이는 빈공간(void)이고, 그 두 가지가 이루는 우주의 총합이다(노트 6권: 490, Lucretius: II권, 352 f). 이 세 가지의 ‘영원성’이 어떻게 ‘영원성’을 끝장 낼 수 있는가? 이 모순적 과제는 가능한 것일까?
우선 우리는 적어도 두 개의 상이한 ‘영원성’과 대면하고 있다. 형이상학의 영원성은 ‘고정불변한 것’의 영원불멸성이지만, 에피쿠로스에게서 영원성은 ‘변화’의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일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어떤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니체에게 그것이 ‘힘’이었다면*주) 에피쿠로스에게는 ‘원자’였다(Epicurus: 55).

*주) ■■니체의 친구였던 도이센(Paul Deussen)은 베단타 체제를 언급하면서 “세계가 분해되더라도 힘은 남아서 다른 세계를 형성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고병권, 1997: 85). 에피쿠로스가 더 이상 분해되지 않은 요소로 원자를 추론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거대한 원자들의 바다! 그것이 차라리 세계의 바른 모습일 것이다. “세계란 증대하는 일도 없으며 감소하는 일도 없고,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변전하기만 하는, ...자기 스스로의 한계 외에는 에워싸는 것이 없는, ... 여기에 집적되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고, 스스로의 속으로 광포하게 밀려들고 넘쳐드는 대양”(Nietzsche, 1994a: 606-607).

원자들의 강렬도(intensity)가 하나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형상이 생겨나고 그것이 다시 다른 공간으로 흩어지면 소멸한다. 그것이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영원성은 불가능하다. 영원하고자 한다면 원자로 구성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원자로 구성되지 않는 어떤 것도 실존할 수 없다. 원자들의 영원성은 변화의 영원성으로 이어질 뿐이다.

원자들의 영원성을 목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감각이야말로 원자들의 구성을 통해 가능한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원자를 감각할 수 있겠는가? 원자들 자체는 실존(existence)하지 않으며 오히려 실존이 원자들로 구성된다. 원자는 실존을 구성하는 요소(elements)다.

맑스 ■논문■의 제2부 3장은 이 문제에 관해 중요한 언급들을 하고 있다. 원자들의 ‘원리(archai)’와 ‘요소(stoicheia)’를 다루면서 맑스는 원자가 ‘분할불가능한 <요소>’지만 그것이 어떻게 초월적인 요소가 아닐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우선 그는 에피쿠로스가 퓌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 말을 인용한다. 거기서 에피쿠로스는 “모든 것들은 신체(body)이거나 허공(void)이다. 그리고 분할불가능한 요소들이 있다”(논문: 290, Epicurus: 90)고 말했다. 마치 ‘분할불가능한 요소’라고 이름이 붙은 제2종의 원자 혹은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문장에 대해서 맑스는 우리가 그렇게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맑스는 우선 신체와 허공은 ‘신체적인 것(körperlich, corporeal)’과 ‘비신체적인 것(leeren, noncorporeal)’의 구별이며, 신체적인 것은 ‘복합체(compound)’와 분할불가능하고 변하지 않는 ‘요소들(elements)’로 나누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논문: 291). 실존하는 것은 사실상 ‘원자들의 복합체’라고 이해할 수 있다*주).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원자들의 복합체’들이다. 원자들과 허공의 단순한 결정을 통해 ‘표현(expression!!)’되는 것이 ‘원리(Atomoi archai)’다.

*주) ■■에피쿠로스가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물체들은 복합체와 구성요소로 나뉘며, 그 구성요소는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으며, 변형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Epicurus, 1997: 55)은 이 구성요소들이 바로 원자임을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맑스의 설명은 ‘표현’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실존을 설명하는 방식을 통해서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원자’에 해당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존’을 구성하는 ‘단순체(simple body)’라고 할 수 있다(Spinoza: 84, Deleuze, 1990b: 207). 단순체란 실존을 구성하는 ‘요소’다. 어떤 양태도 다른 양태와의 관계없이 실존할 수는 없다. 이 말은 한 양태가 실존을 구성함에 있어 다른 양태와 관련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실존이 ‘매우 많은 수(a great number)’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실존이란 부분들(요소들)의 무한한 양으로 이루어진 조성체(composition)*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복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단순체(요소)는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실존하는 원자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주) ■■신체가 여러 요소로 구성된 복합체이고 죽으면 분해될 수 있듯이 실존하는 영혼 역시 복합체이다. 우리가 다른 개념과 관계 맺지 않는 어떤 한 개념도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실존은 ‘매우 많은 수’의 단순체들이 어떤 관계(relation) 안에 들어가 복합체를 형성할 때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실존을 관계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데, 이때 관계는 어떤 본질(essence)에 상응하게 된다(correspond). 보통은 본질이 실존하려는 경향이 있다거나 실존의 원인이라고 파악하지만 스피노자의 생각은 다르다. 본질은 실존을 결정하지 않는다. 만약 본질이 실존을 결정한다면 실존의 파괴에 대해서도 본질은 그 운명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 실존은 다른 실존과의 관계를 통해서 생겨나며 운동한다. 단순체들이 운동하면서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면 새로운 실존이 나타나며, 그때의 새로운 관계는 어떤 새로운 본질에 상응한다(Deleuze, 1990b: 208-210).

만약 어떤 운동의 결과로 하나의 관계가 깨지고 다른 관계가 만들어지면, 다시 말해서 단순체들이 다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이제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본질에 상응한다. ■헤겔법철학비판■에서 맑스는 헤겔이 실존의 차이와 본질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변질되면 다른 본질에 상응한다’고 말했다(Marx, 1988b: 139). 중세까지 존재했던 ‘농민’과 근대의 ‘공민으로서의 농민’은 전혀 다른 본질에 상응한다. 중세까지 존재했던 농민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존을 구성하는 관계가 바뀌어 더 이상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제는 다른 본질이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본질’의 표현은 전적으로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원자들의 운동의 결과에 달려 있다. 저 세계에 있는 어떤 것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것이 이 원자들의 조성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것 또한 원자여야 한다. 원자만이 원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신이 영원하고자 한다면 원자로 구성되는 것을 피해야한다. 그러나 원자로 구성되는 것을 피한다는 것은 이 세계로부터 완전히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추방된다(노트 4권: 176-178). 영원한 것들이여, 원자라는 괴물을 피하라!


5. 존재(Being)에서 생성(Becoming)으로

이제 우리는 맑스가 ‘원자들의 질(quality)’을 논하면서 그것을 원자들의 집합체(conglomeration)에 부여하고, 원자들의 조성(composition)과 관계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원자들이 감각적 공간에서 즉각적 차이를 보일 수 있고 차이를 갖기 위해서는 독특한 질을 가져야 하지만, 질이나 특성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는 ‘원자는 변하지 않는다’는 원자론의 주장과 충돌한다. 데모크리투스가 이 모순에 대한 별도의 고려 없이 현상의 세계에서 드러난 차이만을 가지고 조밀함(density), 형태(shape), 배열(arrangement)로 원자의 질을 규정한 데 비해 에피쿠로스는 질이 갖는 모순적 성격으로 인해 원자에 어떤 특성을 부여하자마자 원자의 개념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원자 자체의 질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에피쿠로스는 우선 위치(position)와 배열처럼 원자들 ‘사이’에서 논할 수 있는 특성을 제외하고 크기(size), 형태, 무게(weight)를 특성으로 들었다. 그는 특히 무게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무게는 원자들이 서로를 당기고 밀쳐내는 것, 바로 조성체를 구성하고 해체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성체, 복합체를 통해서만 원자의 질들이 갖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개별 원자 하나에 무게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원자들과의 관계(중력)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사물들에 크기가 있기 위해서는 원자 하나에 크기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원자‘들’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 기관(혹은 기타 도구)을 통해서 알 수 있을 정도로 커서는 안 된다는 것, 몇 가지 형태를 가질 수 있으나 그 형태를 통해서 바꾸어낼 수 있는 모양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등의 문제는 원자들의 ‘매우 많은 수’가 모여 무게를 형성하고 크기를 가지며, 모여드는 양상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가질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성이 변하면 원자들 자체가 변화하지 않으면서 조성체의 질들은 변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조성체의 형성에서 허공(void)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영향력은 원자와 원자 사이에서 행사된다. 이는 ‘존재하지 않은 것(無)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에피쿠로스의 선언(Epicurus: 54)과도 통한다. 허공에서는 무거운 것이나 가벼운 것 모두 같은 속도록 움직인다. 허공이란 아무 힘도 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힘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허공이 아니라 원자다.
이 점에서 영혼은 명백히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허공은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며, 다만 다른 물체가 자신을 통과하도록 허락할 뿐이다. 영혼이 비물질적이라는 것은 헛소리다. 영혼이 비물질적이라면 어떤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을 것이다.”(Epicurus: 75-76)

원자와 허공의 ‘차이’는 매우 심오하다. 그것은 결국에는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적대’ 보다 심오하다. 원자와 허공은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 허공은 원자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니 적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Being), 일자(the One), 전체(Whole)를 내세우는 자들은 무(無)를 존재에 통합시킨다. 이들은 ‘존재는 무다’고 말하기도 한다(Deleuze, 1990a: 268).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존재나 일자는 있을 수 없다. 맑스는 무게에 관한 루크레티우스의 언급을 소개하면서 원자들의 ‘무게’로부터 놀라운 결론이 유도된다고 말한다(논문: 289, 349). 무게는 원자들에 내재한 속성이며, 중력의 실체적 중심이라는 사실로부터 “모든 것이 세계의 중심을 향해 싸운다는 생각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향해야 할 중심성이란 없으며 중심은 ‘곳곳에’ 있다. 원자들이 모이는 강렬도의 지대들이 모두 중력의 중심이 된다. 또한 중심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이동한다. 문제는 존재나 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맑스는 “현존재(Dasein) 속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현존재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주)(논문: 294). 차라리 우리는 ‘존재로부터의 자유’를 말해야 할 지 모른다.

*주) ■■김진은 ‘현존재의 자유(Freiheit des Daseins)’라고 말했는데(김진, 1990: 94), MEW 원문 확인 결과 ‘현존재로부터의 자유(Freiheit vom Dasein)’였다. 현존재의 자유와 현존재로부터의 자유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우리는 결합하는 두 양상을 구분하는 것을 통해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그 두 양상이란 바로 ‘Be-동사’와 ‘접속사’다(Deleuze, 1990: 267). ‘A is B’라고 할 때, ‘Be-동사’는 A와 B를 동일화시키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접속사는 동일하지 않은 것들 사이의 동맹이고 결합이다. 그것은 동일화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루크레티우스는 “모든 사물들은 다양한 접속들, 무게들, 충돌들, 마주침들, 운동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작동한다”고 말했다(Lucretius, 1997: 1권 632-635ff).

어떻게 접속되느냐에 따라 원자들은 상이한 것이 될(becoming) 수 있다. 맑스는 원자가 진정으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실체(substance)라고 말했다(논문: 294). 모든 것은 원자들로부터 생겨나며 다시 원자들로 분해된다. 원자들은 ‘하늘과 바다, 땅, 강, 태양을 구성’한다(노트 4권: 159-160, Lucretius: II, 820f). 또 “하늘, 바다, 토지, 강, 태양을 구성하는 같은 원자들이 신체, 나무들, 동물들을 조성(구성)한다”(Lucretius: 1권, 820-823ff). 원자들은 땅이 될 수도 있고, 강이 될 수도 있고 바다가 될 수도 있으며, 산이 될 수도 있고, 나무가 될 수도, 동물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생성이다. 무언가 생겨나는 것은 또한 다양해지는 것이다. 전체마저도 재배열을 통해서 다른 것이 된다. 변화하는 전체!
헤겔은 생성을 존재와 무의 통일로 이해한다(Hegel, 1994: 102). 무엇인가 사멸하고 무엇인가 생겨나는 것을 생성이라고 이해할 때, 그것은 바로 자신 안에 무를 포함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생성은 존재에서 무로, 무에서 존재로의 소멸이다. 이때 아무런 규정성도 없던 존재가 규정성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존재다. 현존재란 바로 비존재(無)를 포함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세계는 원자와 허공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은 서로를 절대 포함하고 있지 않다. 원자가 없는 곳이 허공이다. 따라서 무(無)인 허공은 원자들의 조성을 해체하는 데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원자들의 조성을 깨는 것은 다른 원자들이다. 에피쿠로스가 앞에서 말했듯이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존재는 무를 포함할 수 없다!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죽음을 걱정하는, 죽음 앞에서 근심(Angst)을 가진 이들에게 보내는 충고다. 죽음이란 원자들의 분해일 뿐이다(Epicurus: 13). “우리가 존재하는 한 무(無)인 죽음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죽음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원자와 허공의 심오한 차이 때문이다.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Epicurus: 44).

프리고진의 뛰어난 책의 제목(Prigogine, 1994)이 말해주듯이 유물론은 ‘존재에서 생성으로’ 옮겨가야 한다. 이때 시간은 ‘생성’의 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성’이야말로 시간을 구성하고 가능하게 만든다.
맑스가 ■논문■의 제2부 4장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에 대한 태도야말로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잘 드러내 준다. 데모크리투스에게 있어서 시간은 별 중요성이 없다고 말한다(논문: 295). 오히려 데모크리투스는 시간을 부정하기 위해 시간을 설명했다. 원자들은 영원하며 원자 개념에 시간은 있을 수 없다. 영원한 것에서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에피쿠로스 역시 원자들의 영원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시간을 배제했으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원자들의 배치였다. 본질의 영역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으나 원자들이 실존을 구성하는 영역, 그곳은 항상 변화와 사건의 영역이었다. 맑스는 에피쿠로스에게 “시간은 현상의 절대적 형식이었다”고 말한다(논문: 295). 맑스는 이 문장에 “사물의 운동과 분리된 시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주석으로 달았다(논문: 355).

맑스는 시간이 사물들의 속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속성들의 속성’이며 “변화로서의 변화(change as change)”라고 말한다. 에피쿠로스가 ‘symptoms’이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사건(eventa)이라고 부를 수 있다(Deleuze, 1990: 276). 그렇다면 시간 그것은 ‘사건의 사건(event of event)’이다. 조성이 자연의 수동적 형식이라면 맑스는 시간이야말로 자연의 능동적 형식이라고 말한다(논문: 295).



6. 유물론에 반하는 유물론?

원자들(atoms)과 허공(void)이 있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원자들이 모여 하나의 텍스트가 되다가 다시 ‘적을 절멸시키기 위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단 한 개의 원자를 더하거나 빼지 않고 배열의 변화만으로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하물며 다른 원자들이 다시 개입한다면야 그 변화가능성은 짐작할 수도 없다. 신마저도 안전하고자 한다면 원자를 피해야 한다. 그것은 신도 어찌할 수 없는 괴물이다. 맑스는 ■논문■의 제2부 5장에서 천체들(meteors)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천체를 보며 영원성을 끌어내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쉽게 종교에 빠져드는 사람들에게 천체들 역시 원자들의 구성물인 한 영원하지 못하다는 에피쿠로스의 말을 일깨워준다(논문: 298-299, 301).

유물론이 종교와 미신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일 수 있는 것은 종교나 미신이 단순한 관념이나 의식이기 때문이 아니다. 헤겔철학이 아무런 물질성도 가지지 못했다면 맑스는 ‘해부용 칼’로 충분했을 것이다(Marx, 1988b: 190). 그러나 그것이 대중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것 또한 원자들로 이루어진 물질인 것이다. 그에게는 실재적인 파괴력을 갖는 원자들의 흐름, 바로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원자는 원자에 의해서, 무기는 무기에 의해 제압되어야 한다.

에피쿠로스에서 루크레티우스로, 그리고 맑스로 이어지는 유물론의 전통은 더 이상 정신을 비난하기 위해 물질을 동원하는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이나 영혼도 그 나름의 속성*주)을 갖는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뿐이다. 원자들의 복합체인 한 그것은 원자들의 동학, 유물론의 역학을 따른다.

*주) ■■영혼을 이루는 원자들은 아주 작고 몸의 나머지 구조와 잘 조화될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생각의 속도 이상으로 빨리 움직인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운동을 통해 현실화되는 가능성으로 인해 스스로 감각의 속성을 지니기도 한다(Epicurus, 1998: 73-74)..}}

‘삶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맑스는 말한다. 그러나 삶과 의식의 관계는 인간이 ‘물질적 생활 자체를 생산하고’, 이미 충족된 욕구 위에 ‘새로운 욕구’를 낳으며, 자신을 새롭게 생성시키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생성시킨다는 것, 사회적 관계가 하나의 생산력이라는 것 등의 전제 위에 인간이 의식을 가지며 그것 또한 물질적이라는 판단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맑스는 주지시키고 있다(Marx, 1989: 66-71). 삶이 의식을 규정하지만, 인간은 실천을 통해서 삶을 생산한다.

이 점에서 삶이야말로 생성(becoming)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삶을 생산하는 인간 역시 ‘발전과정상의 인간’이다(Marx: 66). 철학자들은 자주 인간 ‘본질’을 말하고 인간을 역사 단계마다 존재했던 개인들 대신에 끼워 넣어 역사의 추진력인 것처럼 묘사해왔다. 마치 분업에 포섭되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의 본질이라도 실현되는 것처럼, 마치 전체과정을 ‘인간’의 자기소외 과정인 것처럼.(Marx: 121).

역사에서 어떤 심오한 존재나 본질이 그 실현을 강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관념론적인 것이다. 원자들의 마주침으로 사건이 생길 때, 하나의 관계가 맺어질 때 ‘표현’되는 본질, 상응하는 본질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결정은 ‘저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관계를 바꾸기 위한 실천과 투쟁일 뿐이다.

데모크리투스의 문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어떤 것을 찾으려는 데 있었다. 그는 원자가 전체(Whole)로서의 자연에 대한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보니 원자는 추상적이고 순수한 범주가 돼버리고 능동적 원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논문: 305) 원자들은 그에게서 괴물이기를 멈추고 장식장 깊은 곳에 놓여있는 아름다움 보석이 되고 말았다.

그는 중요한 것이 원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배치를 바꾸어내는 능동적 실천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맑스가 모든 유물론자들에게 경고했던 것, 그것은 바로 대상과 현실, 감성이 단지 관조의 형식에서만 파악되고 실천적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Marx: 37).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에서 명백히 하듯이 ‘구태의연한’ 유물론과 ‘새로운’ 유물론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시키는 것’, 우리에게는 ‘해부용 칼이 아니라 적을 절멸시키기 위한 무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원자들은 이제 ‘낡은’ 유물론자들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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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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