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칼 마르크스

[스크랩] 역사유물론의 재구성과 법 : 맑스와 하버마스

ddolappa 2008. 5. 17. 05:23

역사유물론의 재구성과 법 : 맑스와 하버마스

 

홍 성 수 (고려대학교 법학과 박사과정)

 

 

 

Ⅰ. 머리말

 

자본주의 정치-경제체계의 극복을 이론적-실천적 목표로 삼았던 맑스(K. Marx)에게서 문화, 법, 이데올로기, 종교 등 소위 상부구조 등은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유물론적 역사관은 상부구조는 자본주의적 토대에 종속되는 것일 뿐이며, 자본주의가 극복된다면 그 기능이 대폭 전환되거나 소멸된다고 보기 때문에, 상부구조에 관한 논의는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상부구조보다는 토대에 대한 연구에 집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1) 그래서 그는 혁명가로서의 활동과 저술활동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제의 근원인 '자본주의'를 연구하는데 여생을 바친다. 물론 그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글을 남겼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현상에 단편적인 서술에 불과하고, 특히 우리의 관심사인 '법'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진술이 거의 없었다. 자신(과 엥겔스)이 쓴 글이 전집으로 100여권에 가까울 정도로 다작가였던, 그리고 세상의 모든 대소사를 하나의 이론으로 꿰차려고 했던 거대이론가였던 그였지만, '법'이라는 사소한(!) 주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열정을 바칠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20세기를 대표하는 사회-철학자 하버마스(J. Habermas)에게서 '법'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그가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비판이론의 상속자인 점을 고려해 보면 이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와 위기를 분석하는데 맑스주의를 활용하지만, 하버마스에게서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 조절과 통제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법은 자본주의의 단순한 종속변수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행정체계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중요한 의미를 새롭게 획득한다. 더 나아가 법은 자본주의적 토대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역사와 발전경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버마스가 평생의 연구를 정리해야 할 나이가 되어서 느닷없이 '법'에 대해 수년간 연구역량을 투입하고, 법을 주제로 두툼한 단행본(Faktizität und Geltung, 1992)까지 내게 된 것은 그런 사정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론적으로 일정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상가가 '법'에 대해서 매우 상반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법'을 경제적 토대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법이 사회에서 독자적이고 필수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 사람이 법을 철저하게 무시했다면, 다른 한 사람은 '법'연구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연구역량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물론 하버마스가 여전히 맑스주의의 전통에 서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렇게 상반된 견해를 펼치고 있는 것은 어쨌든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이는 한 때 크게 유행했던 맑스주의 법학이 현재에도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수많은 맑스주의 법학 관련 저작이 쏟아져 나왔고 논의도 활발했지만, 지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열기가 완전히 식어버렸다. 법의 의미를 재발견한 하버마스의 법이론을 통해 우리는 맑스주의 법학의 근본적인 한계와 함께 법학의 새로운 과제 설정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먼저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관과 그의 법사상, 그리고 그를 둘러싼 논쟁사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비판적 평가를 제시한 후(Ⅱ), 하버마스의 법이론의 개요를 맑스주의와 비교해 보면서 살펴 보고(Ⅲ), 이러한 작업의 의의와 그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해 보는(Ⅳ) 순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겠다.

 

 

Ⅱ. 역사 유물론과 법 : 맑스

 

1. 역사유물론과 맑스주의 법이론

 

1) 역사 유물론

맑스주의는 근대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려고 하는 거대이론이며, 그 핵심에는 유물론적 역사관(역사 유물론)2)이 놓여 있다. 맑스는 근대사회를 해부하는데 있어 유물론적 관점을 도입한다.3) 그리고 그 출발점은 바로 '인간의 노동'이다. 맑스는 노동을 대상세계를 변화시키는 일련의 활동으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인간이 노동을 한다는 것이야 말로 ― 동물과 구분되는 ― 인간의 삶의 기초이자 유적 본질이라고 본다. 그런데 노동의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협업이 필요한데(노동의 사회적-협업적 성격), 그 협업의 방식, 다른 말로 하면 생산이 조직되어 있는 방식을 '생산관계'(Produktionsverhältniss)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관계가 생산력과 결합하여 인간의 삶의 기초를 이루며 사회분석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적 생산관계(토대)를 사회분석의 기초로 삼는 역사관을 두고 맑스는 스스로 '유물론적 역사관'이라고 했던 것이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이러한 역사관의 일반적 결론을 정식화한다. 즉,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와 실제적 토대를 형성하고, 그 위에 법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MEW Bd.13, 8쪽)하며, 따라서 결론적으로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의 일반적 조건이 된다"(MEW Bd.13, 8-9쪽)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역사관은 지난 세기 동안 전세계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는 '정치적 지침'이기도 했지만, 이론적-학문적 수준에서도 이와 관련된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실제로 맑스는 토대의 어떤 요소들이 상부구조의 어떤 요소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의 구체적인 해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었다.4) 예컨대, 경제적인 요인(토대)이 어떤 방법으로 상부구조를 결정하는가를 놓고, '경제적 결정론'과 '경제적 원인론'이 대립되어 왔다. 전자가 토대가 상부구조를 완전히 그리고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을 뜻한다면, 후자는 이러한 인과관계를 완화시킨 것이다. 후자의 경우 토대가 상부구조의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이데올로기론으로 설명하는 견해로 확대되기도 했고, 토대와 상부구조의 상호작용에 특별히 관심을 집중했던 견해도 있었다. 또한 상부구조에 영향을 주는 경제적 토대 중 특별히 어떤 요소가 지배적인가를 놓고 '기술적 결정론', '생산력 결정론', '생산양식결정론'으로 대립되어 오기도 했다. 그 외에도 토대가 상부구조에 일방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극단적인 견해에서부터, 정치와 문화가 반대로 토대에 미치는 영향을 특별히 강조했던 견해까지 실로 다양한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

 

2) 맑스주의 법이론

 

이러한 유물론적 역사관에 의하면 법 역시 상부구조의 요소로서 "물질적 생활관계에 뿌리 박고"(MEW Bd.13, 8쪽)있으며, "법은 고유의 역사를 갖지 못한다."(MEW Bd.3, 63쪽, 539쪽) 즉, 법은 물질적 토대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맑스주의 법이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명제로 정리5)할 수 있으며, 아래에서는 그 의미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방법으로 맑스주의 법이론의 개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법은 경제관계를 반영 또는 표현한다

② 법의 절차와 내용은 직-간접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③ 법은 자본주의의 몰락과 함께 고사한다(법고사론)

 

① 법은 경제관계를 반영 또는 표현한다

명제 ①의 입장을 흔히 경제결정론 또는 속류유물론이라고 한다. 이 입장은 결국 법은 경제적 토대(물질적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며, 따라서 법은 독자적 가치를 갖는 그 무엇이 아니라 경제적 토대의 반영이자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유물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며, 맑스 이후에도 엥겔스(F. Engels)와 레닌(V. I. Lenin), 그리고 몇몇 소련 맑스주의 법이론가에 의해 이러한 입장은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이 명제는 그 내용 자체가 불명확하고, 편협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토대가 법을 결정하는 방식에 대한 정식화의 부재, 토대에 대한 법의 반작용에 대한 문제, 경제적 토대로 환원되지 않는 법의 문제 등이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문제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반영한다고 했을 때, 그 결정-반영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일단 맑스의 역사 유물론이 토대와 상부구조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주장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토대와 상부구조가 관계를 맺는 과정에 대한 맑스의 기술은 대개 다양한 중간요소들 ― 예컨대, 투쟁, 의사소통, 이데올로기 등 ― 을 상정하면서 이루어져 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물질적 토대가 법의 형태와 내용을 결정하는 방식을 정식화하는데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7) 맑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규정할 때 "결정한다", "표현한다", "발생한다", "조건을 이룬다", "조응한다" 등 여러 가지 용어를 일관성 없게 사용했고, 그 방법과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바가 없다.8) 어쨌든 토대가 법 등 비경제적 상부구조의 형태와 내용을 결정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부재한 것은 맑스주의 법이론의 중요한 공백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를 반대로 해석해 보면 이 관계를 보다 자세히 규명하는 것이야말로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 법이론의 재구성에 필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9)

 

두 번째, 상부구조가 토대에 반작용을 하지는 않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통 맑스주의의 입장에서도 비교적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10) 예컨대, 엥겔스는 "경제적 운동이 전체적으로 자신을 관철시키지만, 또한 스스로 만들어냈고, 상대적 독자성을 가진 정치적 운동으로부터 반작용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MEW Bd.37, 490쪽)11) "상부구조의 다양한 계기들이 (…) 역사적 투쟁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많은 경우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한다"(MEW Bd.37, 463쪽)고 하여, 맑스주의가 단선적인 경제결정론을 아님을 주장한 바 있고, 맑스도 국가와 정치의 상대적 자율성을 보여주거나(MEW Bd.8, 111-207쪽), 법이 지배계급의 이익에 (일시적이긴 하지만) 반하는 내용을 담기도 한다는 점을 분석(MEW Bd.23, 10장, 13장)함으로써, 상부구조와 토대의 일방적인 인과관계를 부정한 바 있다. 이외에도 법은 토대를 반영하는 상부구조라기보다는 경제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부구조라기보다는 생산관계의 일부로서 토대에 속하는 것이라는 주장12)이 제기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법의 내용에는 경제적 토대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즉, 경제관계의 반영이나 표현이라고 볼 수 없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13) 예컨대,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범이나(정부조직법, 교통질서법, 선거법 등), 사회적 소수자 보호를 위한 불가피한 규범(사회복지법, 장애인보호법), 개인간의 침해행위를 규율하는 규범(폭행, 상해, 강간, 아동학대 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규범들이 경제적 토대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복잡한 이론을 떠올리지 않고서도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이러한 ①번 명제의 문제점은 서구 맑스주의 진영에서 끊임없이 고민이 되었던 것이었는데, 그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알튀세(L. Althusser)의 맑스주의였다.14) 알튀세는 경제적 토대로 모든 것을 환원하려고 하는 본질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는 여러 심급(instance)들이 서로 얽혀있는 복합체로서, 어떤 심급도 다른 심급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어떤 심급도 다른 심급의 본질일 수 없다고 본다. 또한 모든 심급들은 각기 구조이며 사회적 전체는 이 구조들로 이루어진 구조, 즉 구조들의 구조라고 본다. 그리고 이 구조들은 위계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상대적인 독자성을 전제로 하여 서로 '접합'(articulation)되어 있다고 한다. 이 구조에서 다른 부분들을 항상 지배하는 절대적이고 특권화된 중심이 없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의 본질을 꼭 경제적 토대에서 찾아야 할 필요성은 없어진다. 설사 토대가 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토대가 법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인 영향(중층결정)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알튀세의 견해에 따르면, ①번 명제에 대한 유연한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알튀세 외에도 수많은 사상가들도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내놓았지만, 알튀세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15)

 

② 법의 절차와 내용은 직-간접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②번 명제는 흔히 '(법적) 도구주의'의 입장으로서, 법은 경제적 토대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계급이 자신들이 배타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제도적 장치라는 점에서 '법은 지배계급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적 소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형법은 가장 폭력적이고 직접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장치이고, 사적 소유의 형태와 내용을 규율하는 각종 사법조항들은 사적소유가 '착취'가 아니라 '중립적 법질서'라는 점을 위장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창조물이다.

 

이러한 도구주의는 경제결정론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는 해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결정론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방법과 절차를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도구주의는 지배계급이 상부구조의 내용을 결정한다고 함으로써, 그것을 좀더 구체화시키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견해를 좀 더 유연하게 해석해 본다면, 지배계급의 입장은 ― 자신들의 입장이 전일적으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 반드시 피지배계급과의 역관계 속에서 법에 관철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전체적으로 보아 자본주의의 법에는 자본가계급의 입장이 관철되는데 사실이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피지배계급과의 역관계 속에서 그 수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전체적으로 볼 때 지배계급의 의사에 반대되지 않지만, 피지배계급의 입장이 일정 정도 반영되어 있는 법제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 진다. 예컨대, 맑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한 공장법(MEW Bd.23, 10장, 13장)이나, 노동3권을 규정한 법제, 각종 사회보장법제도 등은 지배계급의 의사가 일방적으로 반영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렇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역관계 속에서 법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이라면, 법은 "계급투쟁의 장(forum)"16)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도구주의는 지배계급이 어떻게 하나의 집단으로 스스로를 의식하고 그 인식을 공유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는지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으며,17)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 법영역의 문제18)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③ 법은 자본주의의 몰락과 함께 고사한다(법고사론)

마지막 ③번 명제는 이른바 '법고사론'이다. 노동과 생산을 사회분석의 기초로 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소외를 문제삼는 것이 맑스주의의 출발점이라면, 그 최종 목표는 자본주의의 폐절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몰락과 함께 국가와 법은 고사한다는 것이 맑스주의의 기본적 입장이다. 법이 자본주의 또는 지배계급의 반영물이라면 법고사론은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과연 법이 그렇게 남김없이 고사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엥겔스다. 자본주의가 폐지되고, 새로운 생산양식이 도입되면 모든 계급억압의 기구들은 소멸하는데, 특히 계급억압의 핵심적 장치였던 국가와 법은 고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엥겔스는 특별히 "(법과) 국가는 '폐지'(abschaffen)되는 것이 아니라 '고사'(枯死, absterben)된다"(MEW Bd.20, 262쪽; MEW Bd.19, 224쪽)고 했는데, 여기서 '고사'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우리말로 풀어 보면, '말라 비틀어 죽는다'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즉 나무가 도끼나 톱에 의해 잘려지는 것(폐지)이 아니라, 수분과 양분의 공급이 중단되어 서서히 그 힘을 잃고 말라 비틀어져 그 형태를 잃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뿌리까지 흙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맞을 것이다. 국가와 법도 혁명에 의해 단칼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성이 없어져서 서서히 그 기능을 잃게 되고, 처음에는 간신히 그 외양을 유지하다가 궁극적으로는 소멸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엥겔스는 '고사'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견해를 좀 더 발전시킨다.19)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단계를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 단계로 설정함으로써, 법이 고사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노동계급의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서 바로 법과 국가가 고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도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단계에서는 반혁명 세력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억압적인 법과 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이 힘을 잃는 것과 더불어 ― 즉, 공산주의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이행함에 따라 ― 억압적 법과 국가는 그 필요성을 상실하고 고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완전히 폐절된 단계인 공산주의사회에서는 법과 국가이라는 존재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엥겔스와 레닌이 상정한 '법'개념은 일상적인 의미의 법과는 다른 의미에서 쓰인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들에게서 법은 오로지 '자본주의적 법'이었을 뿐이었고, 이런 개념 규정에서라면 자본주의와 함께 (자본주의적) 법은 당연히 고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무관한 일상적 삶을 규율하는 법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레닌은 인간 공동생활의 간단한 기본규칙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함으로서, 사실상 법(또는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규범)의 지속을 사실상 인정한 바 있다. 다만 그 법들을 ― 더 이상 계급억압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 법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20) 이렇게 보면, 맑스주의의 법고사론을 더이상 '공산주의 사회에서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게 된다.

 

2. 맑스주의 법이론의 한계

 

여기서 우리는 맑스주의 법이론이 하나의 독자적인 이론체계로서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도구주의나 경제결정론의 이론틀 내에서는 독자적 법이론이 성립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는 극복의 대상이다 → 법은 자본주의의 반영 또는 지배계급의 의지이다 → 자본주의가 극복되면 법은 소멸하거나 그 내용이 완전히 바뀐다>는 식의 공식 하에서는 독자적인 법이론이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논리구조에서 가능한 법이론의 결론은 1) 법이 자본주의적 토대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2) 혁명투쟁의 목적과 법은 대립한다는 것, 3) 법을 무기로 사용하는 혁명전략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21) 특히 국가와 사회를 ― 부정하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 어떻게 새롭게 조직할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법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떠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맑스주의 법이론은 별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요컨대, 맑스주의 법이론은 '부정과 비판'의 철학은 될 수 있을지언정, 미래지향적이고 대안적인 그 무엇을 제시할 수는 없는 내재적인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법고사론을 배타적으로 고수할 수 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맑스주의 법이론 자체로는 더 이상의 논의는 불가능한 것이다.

 

알튀세 등 서구 맑시즘도 이러한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서구 맑시즘의 경우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문화, 계급투쟁 등의 요소를 활용하여, 토대와 상부구조의 연관성을 밝히려고 노력했지만, 이것은 애초부터 문제설정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어떤 두 영역의 인과관계, 결정관계를 성립시키려면, 양립하는 두 가지 분야를 분리하고, 이 중 어느 것이 다른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맑스의 유물론은 이렇게 두 가지를 서로 분리시켜 놓고,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를 지배-결정한다는 식의 설명은 아니다.22) 실제로 맑스가 토대-상부구조론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일정한 토대 위에서는 일정한 상부구조가 생길 수밖에 없고, 토대가 형성되는 가운데에서 그에 따라 일정한 상부구조가 영향을 받아 변화하게 되며, 토대가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면 그것은 상부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상식적인 수준의 분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신 수준의 분석을 넘어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모종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예컨대 그 인과관계를 과도하게 인정하다 보면 경제결정론의 오류를 답습하게 되는 문제가 생기게 되고, 그렇다고 인과관계를 너무 느슨하게 설정해 버리면 유물론의 핵심 자체가 무의미해져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토대-상부구조를 분리시키고 이들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시도보다는 물질적 토대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을 인정하면서 상부구조의 독자적인 발전경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쪽이 이론적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나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 더욱 바람직하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23) 즉, 유물론의 정식이 작동하는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그것 역시 이론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법'의 문제에 적용시켜 보면, 한편으로 법이 물질적 토대의 반영물 혹은 계급지배의 도구로서의 성격을 갖는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물질적 토대로 환원되지 않는 법의 독자적인 가치, 어떤 정치-경제체계인가와 무관하게 가치를 지니는 법의 의의가 있음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버마스의 역사유물론 재구성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다음에서는 하버마스가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하고 의사소통행위론을 정초하면서, 결국 법의 독자적 의의에 주목하게되는 과정을 '맑스주의 법이론의 공백을 메우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Ⅲ. 의사소통행위이론과 법 : 하버마스

 

1. 역사 유물론의 재구성

 

앞에서 살펴보았다시피 맑스의 역사 유물론은 기본적으로 노동(그리고 생산)을 역사파악에 중심 축으로 놓으면서 이론을 전개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생기는 것도, 그것을 극복할 전망을 찾는 것도 모두 인간의 노동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노동에서 출발하는 맑스주의 역사관의 한계를 지적한다. 맑스는 생산력의 발전과 계급의 성장을 통한 물적 토대의 마련에서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을 찾았지만, 하버마스는 경제적 토대로는 환원되지 않는 규범구조의 발달에 주목하지 않고서는 현대산업사회의 변화에 적합한 미래사회의 발전모델을 제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맑스는 진화에 중요한 학습과정을 객관화된 사고, 기술화-조직화된 지식, 도구적-전략적 행위의 차원, 즉 '생산력의 차원'에 국한시키고 있지만, 학습과정은 또한 도덕적 통찰, 실천적 지식, 의사소통적 행위, 그리고 행위갈등의 합의적 규율의 차원에서도 발생한다는 것이다.24) 그래서 하버마스는 ― 피아제(Piaget)와 콜버그(Kohlberg)의 발달심리학이론에 힘입어 ― "규범구조는 재생산과정의 발전국면이나 체계문제의 형태에 단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여하튼 하나의 내적 역사를 갖고 있다"(RHM, 31쪽)고 주장한다. 규범구조들은 단순히 재생산 과정의 발전 경로를 따르지도 않고, 단순히 (경제적) 체계에 종속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의 진화는 노동(과 생산력)의 발전으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언어적 의사소통에 내재한 규범구조의 발전으로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하버마스는 이를 자신의 의사소통행위론과 관련하여 논증한다. 하버마스는 행위를 '목적합리적 행위'와 '의사소통적 행위'로 나눈다.25) '목적합리적 행위'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 평가는 목적달성에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에 따른다. 목적합리적 행위는 다시 그 행위의 연관대상이 객체, 즉 자연이나 사물일 경우 '도구적 행위', 그 연관대상이 주체, 즉 다른 인간인 경우에는 '전략적 행위'로 분류된다. 반면 순수하게 이해를 지향하는 행위, 즉 서로의 사유와 행위를 이해함으로써 상호관계를 지향하는 인간행위가 있는데, 하버마스는 이를 '의사소통적 행위'라고 부른다. '의사소통적 행위'란 서로 대화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이러한 대화를 통해 상호이해(Verständigung)라는 인격적 관계에 들어서며,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계획과 행위를 합의를 통해 조정하기 위해 행위상황에 대한 상호이해를 추구한다(TKH1, 128쪽). 이 때의 목표는 오직 상호적인 대화를 통한 이해의 도달이며, 성취나 도구적 목적은 배제되게 된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해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증하며 규범적 합의를 해나가는 상황을 하나의 이상상태로 상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합리화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사회의 진화는 이러한 두 행위론의 차원에서 발전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RHM, 32쪽 이하). 즉, 한편으로 목적합리적 행위의 차원에서 합리화는 수단의 합리성과 결정의 합리성이라는 척도에서 이루어진다. 맑스가 생산력의 증대라는 사회진화의 척도를 발견한 것은 사실 이러한 목적합리성의 확대라는 측면에서였다. 다른 한편, 의사소통행위의 차원에서 합리화는 도덕적-실천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확대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인류의 역사 발전이 목적합리성의 증대라는 차원에서만 평가될 수는 결코 없으며, 따라서 "의사소통적 행위의 차원을 사회적 협업에 결합되어 있는 도구적-전략적 행위의 차원에서 분리시켜야 한다"(RHM, 160쪽)는 결론이 도출된다. 실제로 인류는 지금껏 도덕적-실천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학습수준을 제도화하고 있는 법체계와 같은 제도들을 확립해 왔으며, 이러한 사회의 조직원리(Organisationsprinzip)는 사회통합의 새로운 수준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 생산력발전을 사회진화의 척도로 보았던 맑스주의적인 사회진화론과는 달리 ― 도덕적-실천적 의식영역에서의 학습과정이 오히려 사회진화의 "속도조절자기능"(Schrittmacherfunktion)을 한다는 점을 주장한다(RHM, 176쪽).

 

결국 맑스의 유물론은 행위론의 관점에서 노동(도구적 행위)과 상호작용(의사소통적 행위)이 서로 독자적인 역사와 발전경로를 갖는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고 의사소통적 행위를 도구적 행위로 환원하는 오류26)를 범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데 하버마스는 생산력발전을 사회진화의 중심으로 파악하는 기존의 유물론은 도덕적-실천적 차원에서의 사회진화의 독자성에 주목하는 새로운 이론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버마스의 역사유물론 재구성의 핵심인 것이다.

 

"인류는 생산력의 발전에 대해 기술적으로 유용한 지식의 결정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상호작용의 구조에 결정적인 도덕적-실천적 의식의 차원에서도 학습한다. 의사소통행위의 규칙들은 아마도 도구적-전략적 행위의 영역에서의 변화에 반응하면서 발전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의사소통행위의 규칙들은 고유한 논리를 따른다."(RHM, 162-163쪽)

 

2. 하버마스의 법이론

 

1) 사회통합과 체계통합의 문제

 

그렇다면 하버마스가 경제적 토대와 독자적인 차원의 문제로 주목한 규범구조의 발달은 우리의 관심사인 '법'의 문제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통합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버마스는 사회의 통합(Integration der Gesellschaft)에는 '사회통합'의 문제와 '체계통합'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먼저 '체계통합'(Systemintegration)의 차원에서는 물질적 재생산과 조정이 핵심이다. 즉 체계통합이란 삶의 물질적 기초를 재생산하는 문제에 연관되는 것으로서, 행동결과의 기능적 조직을 통해 의도치 않은 행위연관을 안정시키는 것을 뜻하며, "사회를 자기조정적 체계모델에 따라 표상하는 개념전략"(TKH2, 226~229쪽)을 채택한다. 이는 단순히 기능적인 통합이므로 규범이나 동의와 무관하며, 행위자들은 자신의 행위나 행위의도와는 무관하게 통합된 세계 내에서 기능적 의미만을 부여받는다. 맑스주의나 체계이론에서 주로 문제삼는 것은 바로 체계통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체계통합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통합'(Sozialintegration)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통합이란 삶의 상징적 맥락을 재생산하는 문제에 연관되는 것으로서, 사회구성원들의 행위방향정립(Handlungsorientierung)을 서로 동조시키는 것이며, 여기서는 "의사소통행위로부터 출발하며, 사회를 생활세계로서 구성하는 개념전략"(TKH2, 226쪽)이 선택된다. 사회통합은 행위자들의 동의를 통해 구성되며, 행위자들은 기존 규범에 동의하거나 의사소통을 통해 새롭게 동의된 규범을 확보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사회통합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과정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사회통합이 일어나는 장소로 생활세계(Lebenswelt)라는 개념을 설정한다.

 

결국 하버마스는 사회의 통합을 사회통합과 체계통합의 두 차원으로 나누면서, 이 두 통합방식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법은 두 통합의 차원에서 각각 자기 기능을 하게 된다. 이를 하버마스는 '매체(Medium)로서의 법'과 '제도(Institution)로서의 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TKH2, 536쪽 아래, 544쪽). '매체로서의 법'은 경제법, 상법, 행정법처럼 사회를 기능적, 사회기술적으로 조종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법이다. 이런 법들은 자기 스스로가 자본과 권력이라는 매체가 수행하는 조종기능의 역할, 즉 조종매체의 역할을 떠맡고 있으며 체계통합적 기능을 담당한다. 이에 반해 '제도로서의 법'은 헌법이나 형법, 형사소송법처럼 생활세계의 정당한 질서 그 자체에 속하는 법이다. 이 법은 많은 경우 도덕에 근접해 있는 구성요건을 갖고 있고, 비공식적인 행위규범과 함께 의사소통적 행위의 배후근거를 형성함으로써 사회통합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이중적 기능을 하는 셈이다. 즉, 법은 한편으로는 체계에 의해 매개되는 사회관계를 조종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사회의 규범적 통합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원으로서의 기능을 갖는다.27) 다시 말해, 법은 경제체계의 조종도구로 기능하는 측면도 있지만, 의사소통적 진화의 과정에서 의사소통의 배후근거를 형성하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결국 (근대)법에 요구되는 것은 (체계의 요구를) 집행하는 도구적 효율성과 (생활세계의) 민주적 규범적 정당성을 결합시키는 것이다.28) 이러한 하버마스의 생각은 '경제(행정)체계의 반영물로서의 법'과 '의사소통의 배후근거로서의 법'을 분리하고 대립시킨다는 점에서 ― 법을 전자의 측면에서만 파악하는 ― 맑스주의 법이론과 뚜렷하게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2) 체계와 생활세계

 

한편 이러한 법의 두 기능은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화과정을 통해 다시 설명된다. 하버마스는 기본적으로 생활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자유롭게 평등하게 토론하여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가는 합리화의 과정이 사회진화이며, 해방이며, 동시에 사회통합이라고 본다.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합의를 이루게 되는 동의와 반대의 결정이 ― 다른 어떤 것(권력이나 자본의 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 그 참여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 과정에서 나오게 된다면, 그만큼 그 관계들은 합리화된 것이고, 사회통합이 의사소통을 통해 산출될 동의에 의해 조정되는 만큼 그 사회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사소통적 합리화의 증대는 사회통합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기능적으로 취약하다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즉, 생활세계의 합리화에 따른 의사소통행위자들이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상호이해의 비용도 늘어나며, 의사소통에서의 불일치에 따른 위험부담도 동시에 증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사소통의 기초인 일상언어는 위험부담이 대단히 높고, 비용이 많이 들며, 수행능력이 제한되어 있는 행위조정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29) 따라서 본래 생활세계의 일부분인 물질적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체계영역)에서는 언어가 아닌 다른 형태의 조정매체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근대 이후에는 생활세계와 체계의 분화가 진행된다. 체계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조정매체를 통해 행정체계와 경제체계를 조절하게 되고, 이에 따라 체계의 메커니즘은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된다. 본래 생활세계에 통합되어 있던 것이 이제 체계로 분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비판이론진영에서는 신화와 전통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한 계몽의 기획이 체계의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억압적 요인의 증대로 인해 좌초되고 만다고 비관적으로 바라본다.30) 하지만 하버마스는 체계가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우연성과 의견불일치의 증대로 인한 생활세계의 위기는 사회통합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데, 행정-경제체계가 분화는 이 부담을 덜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생활세계의 합리화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화과정의 합리화에는 일상과 생활세계를 물화시키고 형식화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성찰되지 않고 반성되지 않는 전통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왔다는 진보적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행위자들은 항시 비합리적인 전통규범(종교, 친족체계, 관습)에 얽매여 있었으며 경제영역이나 행정영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자율적인 시장메커니즘과 관료제가 등장하면서 경제체계와 행정체계가 탈규범-탈언어적 조절매체인 자본과 권력을 통해 작동하기 시작했고, 이점은 오히려 사회의 통합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TKH2, 457~460쪽). 결국 근대사회는 사회통합을 위해 언어적 의사소통 외에도 자본(경제체계)과 권력(행정체계)이라는 새로운 조정매체를 갖게 되는 셈이다.31)

 

그런데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의 결과로 경제체계와 행정체계가 생활세계에 대해 진화론적 우위를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후기자본주의에서는 경제 및 국가라는 하부체계가 자본주의 성장에 따라 더욱 복잡해지고, 이에 따라 경제와 관료의 합리화가 과잉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고유한 문제(대표적으로 공황)들로 인해 체계위기가 나타나는데, 이 위기는 과잉성장한 경제-행정체계가 생활세계에 개입하면서 극복되어 간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개입은 필연적으로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을 침해하고 사회적 병리현상을 유발한다는 것이다(TKH2, 565~586쪽). 왜냐하면, 생활세계의 지평에 있는 행위영역은 행위조종의 메커니즘으로서 상호이해에 의존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TKH2, 488쪽). 그래서 생활세계의 지평에서 벌어지는 의사소통은 결코 자본과 권력 같은 체계메커니즘에 의해 대체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32) 결국 자본과 권력 매체를 통한 경제체계와 관료적 행정체계의 명령이, 상호이해를 통해 조정되고 의사소통행위를 통해 재생산되는 생활세계의 영역까지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식민화(Kolonialisierung der Lebenswelt)"(TKH2, 522쪽)라고 불렀다.

 

3)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사회국가적 법제화

 

하버마스는 이러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병리적 현상이 사회국가적 법제화의 과정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의사소통적으로 구조화된 생활세계의 영역이 체계에 절대명령에 의해 장악될 때,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법제화'(Verrechtlichung)라는 것이다.33) 법은 체계와 생활세계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데, 경제체계와 생활세계가 만나는 지점에는 사법(私法)이, 정치체계와 생활세계가 만나는 지점에는 공법(公法)이 놓이게 된다. 물론 법이 이렇게 매개 역할을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법이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본과 권력의 조종매체 역할을 하면서 생활세계의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본래 근대 자유주의국가에서의 '형식법'(formal law)은 자유의 테두리만을 설정할 뿐 실질적 요소를 법에 개입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형식법은 사회적 결과에 대해 맹목적이라는 한계로 인해 그 수정이 요청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형식법은 실질화(materialization)된다. 이렇게 실질화된 법은 사회적 연대성의 관점에서 법에 실질적 기준들이 투입된 형태이며, 결과적으로 사적 자치에 내맡겨져 있던 많은 일들이 국가와 법의 임무로 편입된다. 사법의 영역에서는 본래 계약자유의 원리에 의해 규정되던 계약법에 사회적 약자(노동자, 임차인, 소비자 등)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치체계의 정책 ― 예컨대, 노동법, 주택임대차보호법, 소비자보호법의 등장, 공법의 영역에서 급부행정의 증대, 형법의 정책도구화34) 등 ― 이 투입되게 되고, 공법의 영역에서는 국가행정이 시민의 삶을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일련의 법변화 과정을 '사회국가적 법제화'라고 부를 수 있다.35)

 

그런데 법이 이러한 매개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체계의 논리를 과도하게 생활세계에 적용하게 되고, 이에 따라 모든 생활영역에 법적 규율의 침투를 허용하게 되면, "사회가 자율적으로 작동되는 공간에 대한 제한을 초래하게 되는 현상"36)이 초래된다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사회의 자율적인 공론영역에서 결정되어야 할 문제들이 체계의 독립적 작동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면, 정치체계는 사회통합을 유지하는데 실패하게 된다.37) 본래 사회통합은 언어와 민주적 의사소통절차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업무부담이 증대한 국가는 입법, 사법, 행정 절차에서 민주적 절차를 점점 더 축소하게 되며,38) 이에 따라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은 관료주의, 관청, 조직, 체계 등의 상징적 표상, 즉 유사언어(quasi-language)로 대체된다.39) 예컨대 행정권력의 투입에 있어서는, 법적 규율의 정당성이라는 척도 대신, (경제적) 효율성의 척도가 자리잡게 된다.40) 이런 식으로 법이 "기능적 통합의 문제를 ― 단지 이 문제만을 ― 해결하는 수단으로 후퇴하게 되면"(FG, 518쪽) 생활세계 내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41)

 

4) 절차주의적 법패러다임

 

하버마스는 이러한 위기를 '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 병리현상을 야기했던 법의 기능을 '생활세계의 방호벽'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즉, 다양한 삶의 영역들을 법제화할 때 생활세계로 체계의 절대명령이 침투하는 것을 막는 방호벽이 형성될 수 있도록, 바꿔 표현하면 규범과 가치에 관한 의사소통이 자본과 (행정)권력에 의해 파괴되거나 왜곡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방향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려 보면, "가치, 규범, 상호이해과정을 통한 사회통합에 기능적으로 의존하는 삶의 영역들이, 고유한 원동력을 가지고 성장하는 경제와 행정이라는 하부체계의 절대명령에 복속되는 것을 막고, 아울러 조정매체의 성격을 띤 법이 그런 삶의 영역들을 그것들에 대해 역기능적인 공동체형성의 원칙들에게로 변환시키는 것을 막는다는 것"(FG, 547쪽)이다.

 

이러한 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버마스는 '절차주의적 법패러다임'이라는 새로운 법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으로 완성한다. 하버마스는 사회국가적 법제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법모델을 구상하면서 기존의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등의 정치학적 이념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42) 시민들이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촉진시키는 새로운 모델을 정립한다. 하버마스는 법이 생활세계에서 언어적 의사소통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에 대해서 과도한 법제화를 감행하게 되기 때문에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생활세계의 고유논리를 파괴하는 것을 문제삼으면서, 법이 생활세계를 직접적으로 규율하려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발상이라고 본다. 하버마스는 법이 생활세계를 체계의 논리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생활세계의 합리화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고 하면서도, 법이 직접 생활세계의 영역에 개입하여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촉진시킨다는 것에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한다.43) 결국 사회(복지)국가의 기획은 '평등하게 구조화되고, 개인의 자기실현과 자발성을 위한 자유영역을 열어줄 삶의 양식'을 창출해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으나, 사실 이를 법을 통해 직접적으로 시행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으며, 이것은 법이라는 매체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였다는 것이다.44)

 

그래서 하버마스는 법이 적극적으로는 생활세계의 규범적 요구를 체계(정치와 경제)로 구속력 있게 전달하고, 소극적으로는 체계의 논리가 생활세계로 개입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호벽의 역할을 하는데 그쳐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위해 체계와 생활세계간의 교류관계에 체계의 침범을 막아내는 저지선을 구축하고, 감지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생활세계의 관심사들이 보존되고, 생활세계의 욕구들이 제도화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법은 "상호이해지향적 행위의 구조에 적당한 분쟁규율절차, 다시 말해 대화적인 의지형성절차, 합의지향적 행위절차-결정절차"(TKH2, 544쪽)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 그리고 법은 이렇게 형성된, 비공식적인 '의사소통적 권력'을 공식적인 '행정적 권력'으로 전환시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해주며, 공론영역의 다양한 여론을 의회 등의 공식적인 정치-행정 제도 속에서 ― 법을 매개로 ― 행정적 권력으로 전환함으로써 정치-행정체계를 직접 제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법패러다임의 성공은 의사소통적 절차와 조건의 적절한 제도화에 의존하게 되며,45) 법의 정당성은 이제 더 이상 자연법이나 이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화적 조건'에 의해서 확보되는 것이다.46)

 

여기서 법은 '의사소통적 전제조건을 마련하는 틀'로서 작용한다. 우선, 법은 사회적 상호행위에 법적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을 경우,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법절차에 호소할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시민들은 법적 제도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항변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법은 국민의 정치적 참여권을 법적으로 제도화하고 보편화하는 역할을 한다. 법은 선거권은 물론이고, 시민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자유롭게 결사체를 만드는 등의 정치적 참여권을 보장하는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법이 이러한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해낼 때,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저지할 수 있기도 하다. 이처럼 법이 정치적.사법적 참여권을 보장함으로써 의사소통의 그물망으로 형성된 생활세계의 약한 '사회통합'을 보다 공고하게 응집된 통합으로 만드는 전환체로 작용할 수만 있다면, 법은 생활세계의 고유한 논리를 지키는 방어막 역할을 하면서 체계에다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흐름을 유입시킬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즉 법은 "행정과 자본에 의해 조정되는 경제의 특수코드가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생활세계의 기원으로부터의 심부름을 수행하는 것"(FG, 108쪽)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생각은 그가 법의 기능을 묘사할 때 쓰는 ― 생활세계의 요구를 체계에 전하는 ― '전달띠'(Transmissionriemen)(FG, 102~103쪽), '변환기'(Transformator)(FG, 78쪽)라는 표현 속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요구를 체계의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시키는 것 역시 반대한다. 자유로운 대화적 절차에 근거한 의견-의사형성의 과정은 생활세계-공론영역 등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뿐, 체계의 영역에까지 제한없이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하버마스는 체계의 영역 역시 그 고유한 논리를 가진다는 점을 인정하며, 의사소통적 권력이 그것을 침범하는 것 역시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행정체계와 경제체계 역시 고유의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다치게 할 경우에 그 결과는 생활세계의 행위주체들의 의식에 특수한 방식으로 반작용하여, 결국에는 사회통합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작용은 단지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으며 기능적 체계의 고유한 작동방식과 조직화된 영역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FG, 450쪽). 의사소통적 권력은 오직 간접적으로만, 즉 행정적인 권력의 수행을 제한하는 형식으로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FG, 630쪽). 이것은 시민사회와 공론영역의 과제가 정치체계와 경제체계와 같은 하부체계를 대체하거나 전복하지 않으면서 단지 영향만을 미치는, 다시 말해 '포위'(Belagerung)하는 모델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47)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의사소통적 권력으로 변형되는 여론은 그 스스로는 지배할 수 없으며, 단지 행정적 권력이 사용되어야할 특정한 방향을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FG, 364쪽)

 

즉, 시민사회와 공론영역의 민주적 과제는 하부체계를 민주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에는 미치지 않으며, 법매체를 통해 그것을 간접적으로 조정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48) 하버마스의 이렇게 시민사회, 공론영역, 체계의 역할을 각각 분리하여 상정함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이 완전히 시민들의 심의(deliberation)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는 식의 급진적 민주화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49) 결국 하버마스는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민주적 조직화의 과제를 상정하면서도, (국가)행정체계의 완전한 고사,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완전한 폐지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맑스와 하버마스는 법에 대한 매우 상이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하버마스가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하면서 의사소통행위론을 정립하는 논리는 맑스주의 법이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법이론을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맑스주의 법이론의 핵심은 법의 경제적-계급지배적 측면에 대한 강조였으며, 자본주의의 소멸과 함께 자본주의 법 역시도 고사할 것이라는 결론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법학의 독자적 학문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문제가 있으며, 한 사회를 조직하는데 있어 법의 역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는 비단 맑스주의에 비판적인 진영뿐만 아니라, 맑스주의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고 있는 진영에게도 문제가 된다. 만약 맑스주의 법이론을 '비판의 잣대'가 아닌 '하나의 완결된 이론체계'로서 본다면, 사회를 조직하는 법의 중요한 기능에 대해 맑스주의 법학은 손을 놓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50)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도 ― 레닌의 고백처럼 ― 공동체를 규율할 법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과거의 소규모 공동체사회에서의 그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사회조직과 국가체계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고 복잡해졌다. 국가공동체를 관리할 중앙조직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조직할 것인지, 시민들의 공론이 이러한 조직에서 어떻게 반영될 것인지, '권력분립', '법치주의', '인권'과 같은 자본주의의 제도이지만 보편적인 정당성을 갖는 제도와 이념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행정관료제의 폐해는 어떤 식으로 극복할 것인지, 현재의 법질서 중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의미있는 것과 자본주의에서만 의미있는 법은 무엇인지……. 결코 쉽지 않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법이 경제적 토대와 관련되어 있다'는 맑스주의 법이론의 틀 내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흔히 정치학에서는 '맑스주의에는 민주주의론이 없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곤 하는데, 같은 맥락에 있는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맑스주의 법이론의 한계는 우리가 법이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존속되어야 한다고 가정할 때, 그리고 나름대로의 법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할 때 드러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전복보다는 개혁을 추구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사회에서 법이 일정한 역할이 있다고 가정할 때 맑스주의 법학은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51) 80년대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명맥을 유지했던 맑스주의 법학이 그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게 된 것52)은 ― 단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때문이 아니라 ― 이러한 내재적인 한계에서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53)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론적 재구성이 필요하다. 먼저 맑스주의의 법이론에서 '법고사론'은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그 정당성을 잃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법에 대한 생산적 논의를 위해서라도 필수적이다. 법의 경제적-계급지배적 측면이 인정된다고 해도, 과연 법이라는 형태의 규범이 완전히 고사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법고사론에 대해서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맑스주의에서 법은 오직 '자본주의 법'을 말한 뿐이라든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도 (법이라는 이름을 달지 않은) 일정한 규범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식의 구차한 옹호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론구조 하에서는 법의 민중참여를 실현하는 제도, 예컨대 동지법원제도, 입법과정에의 인민참여제도, 법관선거제도, 인민배석판사제도 등의 대안54) 이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러한 대안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한다고 해도,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감안해 볼 때 그런 식의 부분적이고 소극적인 대안이 법의 미래를 대신할 수는 없다. 고도로 관료화되고 복잡화된 현대국가를 조직하고, 시민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여러 가지 법적 구조에 대한 연구는 경제적 토대의 변혁과 무관하게 중요성을 갖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55)

 

또한 맑스주의 법이론은 법의 모든 것을 경제적 토대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과감히 포기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과 법학이 갖는 독자적인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 하버마스는 민주적 법치국가를 속류민주주의로 폄하하면서 자유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에 무관심했던 것은 맑스주의자들의 가장 큰 오류라고 보는데, 이는 상당히 중요한 비판이다.56) 근대사회에서 경제적 토대로 환원될 수 없는 성격의 법은 엄연히 존재하며, 그 중에는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는 법원리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 현재의 경제.행정체계에 대한 태도와 무관하게 ― 일정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으로 경제적 토대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에서 법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그 법이 (경제)체계의 논리가 사회를 전일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벽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하버마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하버마스는 법이 사회통합의 핵심기능을 하면서 시민사회-공론영역에서 민주주의의 제도적 조건보장의 배후가 된다고 함으로써, 토대와 무관하게 지속가능하고 또 지속되어야 하는 '법'의 합리적 핵심을 근거짓고 있는 것이다.57) 결국 하버마스의 주장은 자본주의 경제체계가 문제가 있는 것을 사실이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가시적인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그것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며, 여기서 법이 체계를 통제하는 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하버마스의 주장은 자본주의 체계 내의 지배구조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없고58), 시장경제, 관료행정, 대의민주주의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여 자본과 국가권력 자체에 대한 진정한 민주화를 사실상 포기한다는 점59)에서, 소극적이고 수세적이라는 비판60)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본주의적 경제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체계에 대한 대안을 ― 적어도 현재로서는 사실상 ― 찾기 힘든 상황에서, 하버마스가 경제체계의 근본적 변혁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의 도마에 오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 법이론의 위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독자적인 가치는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데, 그것은 맑스주의 법이론이 오직 '비판'의 무기로서 활용될 때만 그러하다. 설사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해야 한다는 '혁명론'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법의 문제를 '경제적 토대'와 연관하여 이해하려는 맑스주의 방법론은 충분한 가치가 있고, 법실무와 법이론에서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컨대 법의 정치성, 법의 계급성을 맹렬하게 비판했던 미국의 비판법학운동(Critical Legal Studies)61)은 맑스주의 혁명론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 비판적 방법론을 법분석에 잘 활용해 냈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맑스주의 법이론의 주장을 법의 지배의 정당성을 재검토하게끔 하는 중요한 잣대로 활용하려는 것62) 또한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으로서의 맑스주의 법이론'은 여전히 대안을 제시하는 문제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맑스주의 법이론이 '비판'을 넘어,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면, '자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식의 혁명론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 설사 이러한 혁명론의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 학문으로서의 법학은 의미가 없어진다.63) 결국 법학자가 학문으로서의 법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맑스주의로부터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법분석을 경제적 토대와 연관시켜라!'는 지침64)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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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

 

1) 이 점은 맑스주의 법이론에 대한 연구물에서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다; Hunt, "Law, State, and Class Struggle", Marxism Today 20(1976), 178쪽; Mazurek, "Marxistische und sozialistische Rechtstheorie", in: Kaufmann & Hassemer(Hrsg.), Einführung in Rechtsphilosophie und Rechtstheorie der Gegenwart(1985), 327쪽.

 

2) 맑스의 표현은 정확하게 "유물론적 역사관"(materialistische Geschichtsauffassung)이며, '역사유물론'이라는 표현은 훗날 소련 맑스주의자들이 유물론을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으로 분류하면서 등장한 것이지만, 아래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한다.

 

3) 이하는 주로 Marx & Engels, "Die deutsche Ideologie", in: Karl Marx / Friedrich Engels Werke Bd.3(1969), 20쪽 이하, 28쪽 이하, 69쪽 이하 참조. ― 이하에서 MEW로 줄여서 본문에서 인용.

 

4) 이러한 쟁점에 대한 간략한 정리로는 김창호,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현대적 쟁점들」, 『사회철학대계 2』(1993), 최형익, 『마르크스의 정치이론』(1999), 제2장 참조.

 

5) 비슷한 정리로는 Hunt, "Marxist Theory of Law", in: Patterson(ed.), A Companion to Philosophy of Law and Legal Theory(1996), 355쪽; 홍준형, 「법의 지배와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에 관한 연구」, 『아주사회과학논총』 제1호(1987), 106쪽.

 

6) 이 점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은 황태연, 「칼 맑스와 혁명사상」, 『사상』 2002년 봄호, 253쪽 이하 참조.

 

7) Collins, 『마르크스주의와 법』(1986), 35쪽.

 

8) 맑스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은, 이것이 사회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은유(metaphor)일 뿐, 사회과학적 분석의 엄밀성이 뒷받침된 '이론'이나 '공식'은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지적으로 Cain & Hunt, 『맑스와 엥겔스는 법을 어떻게 보았는가』(1991), 85-89쪽 참조.

 

9) Spitzer, "Marxist Perspectives in the Sociology of Law", Annual Review of Sociology 9(1983), 110쪽.

 

10) 하지만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맑스주의가 단선적인 유물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가정한 채 비판을 전개하곤 한다. 예컨대 법과 토대의 단선적인 인과관계를 비판하는 Weber, Wirtschaft und Gesellshaft(1956), 448쪽, 505쪽, 511쪽 참조; 이와 관련해서는 이상돈·홍성수, 『법사회학』(2000), 85-90쪽 참조.

 

11) 엥겔스는 이 편지에서 법률을 예로 들면서, 법이 경제적 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한다는 점을 제시한다(MEW Bd.37, 491-492쪽).

 

12) Vincent, "Marx and Law", Journal of Law and Society 20-4(1993), 382-383쪽; Plamenatz, German Marxism and Russian Communism(1954), 2장 참조.

 

13) Vincent, 위의 글, 382쪽; Collins, 『마르크스주의와 법』, 130쪽 참조.

14) 이하 설명은 Althusser, 『맑스를 위하여』(1997), 101-136쪽, 191-262쪽; Althusser & Balibar, Reading Capital(1979), 91-118쪽 참조.

15) 1970년대 법과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진영에서의 논쟁에 대한 정리와 평가는 Jessop, "On Recent Marxist Theories of Law, the State, and Juridico", International Journal of the Sociology of Law 8(1980) 참조.

16) Thompson, Whigs and Hunters(1975), 265쪽; Weitzer, "Law and Legal Ideology", Berkley Journal of Sociology 25(1980), 138쪽.

17) Collins, 『마르크스주의와 법』(1986), 42쪽 이하 참조.

18) Vincent, "Marx and Law", Journal of Law and Society 20-4(1993), 382쪽.

19) Lenin, 『국가와 혁명』(1992), 137-138쪽.

20) Collins, 『마르크스주의와 법』(1986), 130쪽.

21) Cotterrell, Law's Community(1995), 114쪽.

22) 강유원, 『근대실천철학 연구』(1998), 188쪽 이하 참조.

23) 후술하겠지만 유물론적인 생산패러다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상호작용패러다임의 문제를 제기한 하버마스의 주장이 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 다소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 자본주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근대적 규율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거나(Foucault, 『감시와 처벌』<1994>), 이를 활용하여 물질적 생산양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주체생산양식'(이진경,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 제4장) 또는 '문화영역'(심광현·이동현 편, 『문화사회를 위하여』<1999>)의 문제를 말하는 것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24) Habermas, Zur Rekonstruktion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1976), 11-12쪽. ― 이하에서는 RHM으로 줄여서 본문에서 인용.

25) 아래 설명은 주로 Habermas, Theorie des kommunkativen Handelns Bd.1(1981), 384쪽 아래 참조. ― 이하에서는 TKH로 줄여서 본문에서 인용.

26) 맑스에게서도 상호작용은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기는 하다(RHM, 145쪽, 156쪽). 문제는 맑스는 상호작용의 문제가 독자적인 역사를 갖는다는 사실 자체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7) Forbath, "Habermas's Constitution", Law and Social Inquiry 23-4(1998), 992쪽; Eder, "Habermas's Contribution to the Sociology of Law", Law & Society Review 22-5(1988), 938쪽.

28) Salter, "Habermas's New Contribution to Legal Scholarship", Journal of Law and Society 24-2(1997), 289쪽.

29) Habermas,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1985), 405쪽.

30) Horkheimer & Adorno, Dialektik der Aufklärung(1969).

31) 사회통합의 세 가지 자원으로 '자본, 권력, 연대성(Solidarität)'을 제시하는 Habermas, Die neue Unübersichtlichkeit(1985), 158쪽 참조.

32) 법인식에서 생활세계의 지평이 축소-왜곡되는 현상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법률해석과 사실인정에서 해석학적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는 법이론을 펼치는 이상돈, 『법이론』(1997), 특히 6-8쪽, 23-27쪽 참조.

33) Rasmussen, Reading Habermas(1990), 81쪽.

34) 이상돈, 『형법학』(1999), 161-162쪽.

35) 이러한 법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은 이상돈, 『법학입문』(2002), 제2부; Teubner, Substative & Reflexive Elements in Modern Law, Law & Society Review 17-2(1983), 246-257쪽 참조.

36) Teubner, "Verrechtlichung", in: Kübler(Hrsg.), Verrechtlichung von Wirtschaft, Arbeit und sozialer Solidarität(1985), 303쪽.

37) Outhwaite, Habermas: A Critical Introduction(1994), 147쪽.

38) 특히 법인식에서의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상돈, 『법이론』(1997), 1-30쪽 참조.

39) Peters, "Law as Critical Discussion", in: Teubner(ed.), Dilemmas of Law in the Welfare State(1986), 275-277쪽.

40) Habermas, Faktizität und Geltung(1992), 517~518쪽. ― 이하에서는 FG로 줄여서 본문에서 인용.

41) 법제화에 의한 생활세계 식민화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는 이상돈·홍성수, 『법사회학』(2000), 120-129쪽 참조.

42) 자세한 것은 Habermas, Faktizität und Geltung(1992), Ⅶ장; 이상돈·홍성수, 『법사회학』(2000), 146-149쪽 참조.

43) 특히 '형법을 통한 생활세계의 합리화'에 대해 부정적인 이상돈, 『형법학』(1999), 51-61쪽, 90-91쪽 참조.

44) Habermas, Die neue Unübersichtlichkeit(1985), 151~152쪽.

45) Habermas, Die Einbeziehung des Anderen(1996), 287쪽.

46) Bohman, "Complexity, Pluralism, and the Constitutional State", Law & Society Review 28-4(1994), 903쪽; 한편 하버마스의 이런 절차주의가 단순한 사실과 형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Deflem, "Introduction", in: Deflem(ed.), Habermas: Modernity and Law(1996), 8~12쪽 참조.

47) Habermas, Strukturwandel der Öffentilichkeit(1990), 44쪽; 하버마스는 때로는 의사소통의 논리가 체계를 ― 단순히 영향을 미치는 차원을 넘어 ― 적극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수문모델, Schleusesmodel)를 전개하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체계의 기능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달고 있다. 이 두 모델에 대한 비교.평가는 선우현, 『사회비판과 정치적 실천』(1999), 271-275쪽 참조.

48) Baynes, "Democracy and the Rechtsstaat: Habermas's Faktizität und Geltung", in: White(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Habermas(1995), 217쪽.

49) Arato, "Procedural Law and Civil Society", in: Rosenfeld & Arato(ed.), Habermas on Law and Democracy(1998), 32쪽.

50) 그런 맥락에서 아나키즘(Anarchism)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맑스주의보다 더욱 현실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Bankowski, "Anarchism, Marxism and the Critique of Law", in: Sugarmann(ed.), Legality, Ideology and the State(1983) 참조.

51) Vincent, "Marx and Law", Journal of Law and Society 20-4(1993), 371쪽.

52) 우리의 경우 90년대 초반까지 그 관심이 이어졌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했던 『민주법학』은 대략 제6호(1993)까지 맑스주의적 경향의 논문이 많이 실렸지만, 그 이후로는 그런 경향의 논문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53) 비슷한 맥락에서 맑스주의는 법이론에는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없다는 점을 비판하는 Welzel, 『자연법과 실질적 정의』(2001), 279쪽 참조.

54) 조국, 「현단계 맑스주의 법이론의 반성과 전진을 위한 시론」, 『민주법학』 제6호(1993), 100-101쪽 참조.

55) 그런 점에서 '법의 지배(법치주의)'은 경제적 토대와 무관하게 일정한 가치를 갖는다는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으로는 Thompson, Whigs and Hunters(1975), 특히 266쪽; 톰슨의 법사상은 Fine, "The Rule of Law and Muggletonian Marxism: The Perplexities of Edward Thompson", Journal of Law and Society 21-2(1994) 참조; 이외에도 맑스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법의 지배'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온 Neumann, The Rule of Law(1986), 175쪽 이하 참조; 노이만의 법사상은 Tribe, "Introduction to Neumann", Economy and Society 10-3(1981) 참조.

56) Habermas, Die Nachholende Revolution(1990), 190쪽.

57) 비슷한 관점에서 (맑스주의 법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버마스 법이론의 의의를 해명하는 Sumner, "Law, Legitimation and the Advanced Capitalist State, in: D. Sugarmann(ed.), Legality, Ideology and the State(1983), 146쪽 이하 참조.

58) 선우현, 『사회비판과 정치적 실천』(1999), 294-301쪽 참조.

59) Kavoulakos, "Constitutional State and Democracy", Radicial Philosophy 96(1999), 40쪽; 비슷한 의미에서 하버마스가 해방의 가능성을 자본주의 정치-경제체계의 '혁명적 변혁'이 아니라, 그 정당하고 효율적인 관리(management)에서 찾는다고 보는 Fraser, "A Marx for the Managerial Revoloution", Journal of Law and Society 28-3(2001), 364-365쪽 참조.

60) 비슷한 지적으로 장은주, 「시민사회의 비판적 잠재력」, 『철학(한국철학회)』 제64집(2000), 264쪽 이하

61) 이에 대한 개괄적 소개로는 김정오, 「비판법학의 원천과 쟁점들』, 한국법철학회 편, 『현대법철학의 흐름』(1996); 한인섭, 「비판법학」, 『미국사회의 지적 흐름 : 법』(1999) 참조.

62) Collins, 『마르크스주의와 법』(1986), 167쪽; 홍준형, 「법의 지배와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에 관한 연구」, 『아주사회과학논총』 제1호(1987), 117쪽 이하 참조.

63) 이 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는 박홍규, 「법학의 연구동향과 과제」, 학술단체협의회 편,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현재와 미래』(1998), 309쪽 참조.

64) 김도균,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형성과 전개(Ⅱ)」, 『민주법학』 제4호(1990), 86쪽 참조.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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