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칼 마르크스

[스크랩] 레닌의 카이로스

ddolappa 2008. 5. 17. 05:36

 

레닌의 카이로스

 

조정환
 

 


1. 서론


맑스의 주된 분석영역은 자본권력과 국가권력의 합성, 특히 자본권력의 합성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 자본의 부단한 확장적 합성과정이면서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생산과정임을 치밀하게 규명했다. 그는 또 프롤레타리아의 증대를 가져오는 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진전이 산업예비군, 고정적 과잉인구, 극빈층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는 메커니즘임을 밝혔다.1) 그리고 이 증대하는 프롤레타리아가 자본관계의 매장자로서 기능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이러한 확장이 그것의 분할되고 복잡한 내적 구성 속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의 매장자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6부작으로 예정되었던 자본이론의 일부로 계획되고 있었는지 어떤지 역시 불명확하다. 레닌은 맑스의 작업성과를 계승하면서 자본을 생산하는 프롤레타리아와는 다른 프롤레타리아, 즉 자본을 파괴하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탐구를 자신의 탐구주제로 설정했다. 요컨대 『자본론』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수동태 속에 있다면, 그래서 그것의 능동적 측면이 간헐적으로 가정의 형상으로만 묘사된다면, 능동태의 프롤레타리아 혹은 프롤레타리아의 능동적 전환의 문제가 레닌의 주요한 탐구주제로 등장하는 것이다.2)

 

레닌의 획기적 팜플렛인 『무엇을 할 것인가?』는 프롤레타리아의 이 능동적 전환의 구상을 자생성과 의식성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치활동, 조직론, 전술과제 등 정치학의 모든 영역에 걸쳐 포괄적으로 서술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능동화의 메커니즘을 확정한 저작이다. 이 저작은 수 년 뒤에 레닌 자신에 의해 시대에 뒤진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 자신 속에서 이 저작의 맥박은 멈추지 않았으며 이후 20세기 전반에 걸친 좌파의 정치학과 정치실천에서 이 저작의 기본구상은 뿌리 깊게 전승되어왔다. ‘당’이라고 불리는 전위들의 정치조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필수불가결한 조직형태로 이해된 것, 그리고 (볼세비키 당이 권력을 장악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 당이 혁명을 지도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장악하고 또 운영할 주체로 설정된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레닌의 (실제로는 가변적이었고 실용적이었던 다양한 모습의) 정치학에서 후세에 살아남은 가장 영향력 있는 요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구성의 문제가 당구성과 당지도를 매개로 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과제라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핵심주제 그 자체이다.

 

나는, 이제 20세기 좌파운동을 지배해 왔으며 21세기까지도 유전되어 오고 있는, 계급구성의 경로에 대한 이 완고한 고전적 관념의 타당성과 유효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나는 이 관념을 역사적 과정 속에 해소시키는 한편, 레닌의 활동기인 20세기 초에 이미 이 관념의 타당성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과 비판들이 제기된 바 있었음을 상기할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나는 레닌의 볼세비키 당이 소비에트에 대해 취한 태도와 그 결과를 중심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소비에트는 1905년과 1917년에 자생적으로 등장한 일종의 ‘대중적 정치조직’으로서 볼세비키 당을 포함하는 다른 ‘전위적 정치조직’들과 연루되면서도 그것과 경합하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루와 경합의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양자관계는 어느 ‘하나’(일반적으로는 당)의 지배로 귀착되고 만다는 것이 러시아 혁명(및 독일 혁명)이 남긴 교훈이다. 당을 매개로 하는 계급구성의 과정은 계급형성 과정에 ‘하나’의 지배로서의 주권적 위계관계를 도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권력합성으로 귀결된다는 것,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들이 그러한 당주도적 계급구성 과정의 활동인자로 움직인다 할지라도 궁극에는 자본관계를 다르게(요컨대 국가자본주의적으로) 재생산하는 것 이상으로 결코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역시 지난 역사가 남긴 교훈이다.

 


2. 레닌의 시대와 정치적 계급구성론의 형성


레닌이 그 나름의 독특한 정치적 계급구성론을 제기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운동을 전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 노동운동의 제1기인 1884년에서 1894년 사이에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이 발생되어 다져졌고 제2기인 1894년에서 1898년 사이에 대중운동의 고양과 더불어 사회민주주의가 정당의 형태를 띠면서 사회적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1898년 이후에 분열과 해산과 동요를 겪는 제3기를 맞이했다고 보았다.3) 이러한 상황판단에서 레닌은 제3기에 종지부를 찍고 그것을 극복한 제4기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데 그것이 1902년에 출간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이 팜플렛에서 전개된 자생성-의식성 이원론, 정치활동론과 조직론, 그리고 전술과제론에서 레닌은, 러시아의 노동자 운동이 분열과 동요를 극복하고 단일한 계급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직업적 혁명가들로 구성된 전위당을 매개로 하여 노동계급이 사회민주주의적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일관된 생각을 발전시킨다. 이 생각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명제로 요약할 수 있는 판단들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노동자들은 현재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체제 전체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고 또 의식할 수도 없었다.

둘째 노동자들은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는 고용주에 대항하는 투쟁을 발전시키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셋째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민주주의적 의식성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외부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져야만 한다.

넷째 이 사회민주주의 이론은 유산계급의 교육받은 대표자들, 즉 지식인들에 의해서 조탁된 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경제적인 이론으로부터 자라나온다.4)

 


이 네 가지 판단에 기초하여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를 자생성과 싸우는 것으로 설정한다. 레닌의 진단에 따르면 자생적 노동계급 운동은 그 자체만으로는 단지 노동조합주의를 생성시킬 수 있을 뿐이다. 노동조합을 조직적 수단으로 삼는 노동운동이 경제적 요구투쟁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조합주의적 정치활동에 머무르곤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속한다. 그리고 조합주의적 정치활동이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으로 나아가기보다 주로 그 원리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에 머물렀다는 것도 경험적 사실에 속한다. 레닌은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노동계급의 노동조합주의적 정치활동은 노동계급의 부르주아적 정치활동일 뿐”5)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조합주의적 계급구성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한 비판으로는 날카로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력 상품의 판매조건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조직으로 탄생했고 그로 인하여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투쟁과 계급구성이 노동자의 단결을 가져올 때조차 주권지향적인 경제적 단결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그것의 객관적 효과는 자본의 개혁을 촉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에 대한 반성을 통해 레닌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경제적 영역으로서의 노동조합적 영역과 구분되는 정치적 영역, 국가를 둘러싼 영역으로 발전함으로써 노동조합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끌어 냈다. “노동조합주의적 투쟁으로부터 노동계급 운동을 이탈시켜서 그것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날개 밑으로 인도하는 것”6)이 사회민주주의자의 과제라는 생각은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나 자생적 노동계급 운동이 그 자체만으로는 단지 노동조합주의를 생성시킬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역사적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레닌은 노동조합을 조직적 수단으로 삼는 노동운동의 한계를 노동운동의 자생성의 한계와 동일시하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이 역사 속에서 외부로부터의 어떤 지도도 없이 노동조합주의적 한계를 넘는 투쟁들을 전개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레닌은 1902년 당시에는 1870년에 파리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조직인 코뮌을 구성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잊고 있다. 프랑스에서의 이 경험은 1905년과 1917년에 러시아에서 생성된 소비에트들에 의해, 1918년에 헝가리와 독일에서 생성되었던 노동자 평의회에 의해, 1953년 사회주의 동독에서 생겨난 노동자 평의회에 의해, 1968년의 프랑스와 1969년의 이탈리아에서 생성되었던 노동자들의 비노동조합적 자율조직들에 의해, 1980년과 1991년에 이란과 이라크에서 생겨난 평의회들에 의해 여러 차례 다르게 반복된 바 있다. 레닌은 노동조합적 투쟁의 한계를 자생적 투쟁의 한계로 오인함으로써 자생성=노동조합주의=경제투쟁, 의식성=사회민주주의=정치투쟁이라는 거친 이분법을 만들어 낸다.

 

이 이분법에 기초하여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조직론적 노력은 레닌에게서 당조직론으로 표현된다. 레닌은 정치투쟁을 이끌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당조직은 경제투쟁을 위한 노동자의 조직과는 다른 종류여야 하며 혁명가의 조직은 혁명활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새로운 유형의 조직의 공통성은 직업이나 신분에 있지 않고 참여자의 사회민주주의적 의식성에 있으므로 여기에서 노동자와 지식인간의 모든 차이는 소멸되어야 한다고 보았다.7) 이러한 논거 위에서 당조직이 프롤레타리아의 경험으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이 정당화된다. 당은 경험주체들을 대신해서, 그들을 위해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대의(representation)가 당의 원칙적 권리로 정립되는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농민에 의해 수행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연속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에 커다란 관심을 쏟았다. 그렇다면 혁명의 연속성은 어떤 힘에 의해 보장되는가? 레닌은 그것이 경험주체인 프롤레타리아들보다는 경험에서 독립해 있는 이들 대의주체들, 즉 당조직에 의해 보장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혁명의 잠재력을 삶과정에 내재하는 갈등하는 욕망들 자체에서 찾기보다 그 욕망들을 중재하는 층위인 정치적 수준의 갈등에서 찾은 것에서 따라 나오는 당연한 귀결이다. 당조직이 혁명의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정치경찰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8) 그래서 레닌은 “혁명활동의 지속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 뿌리 뽑을 수 없는 것은 수많은 대중들이 아니고 정치경찰과 싸우는 기술을 직업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 즉 ‘지도자들의 안정된 조직’이다.”9)라고 말하게 된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직접적인 경험주체인 다수의 사람들의 집합적이고 직접적인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행동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서 정치적 수준에서 움직이는 부르주아적 전위들과 프롤레타리아적 전위들 사이의 갈등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개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구성물이고 수동적으로 합성된 계급성원들임을 레닌은 정확하게 인식했다. 레닌은 이 수동적으로 구성된 계급성원들이 어떻게 능동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인가를 실천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혁명가였다. 그런데 레닌은 이 능동적 전환, 수동적 계급구성에서 능동적 계급구성으로의 전환이 노동하는 다수의 사람들 자신의 투쟁을 통해, 즉 그 수동성의 파괴와 탈출을 통해 경험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부정했다. 이것은 노동조합 투쟁의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한계를 노동자들의 자생성의 일반적 한계로 오인한 것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그는 계급의 자기구성의 문제를 계급 외부로부터의 정치적 이념적 구성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통한 통치라는 부르주아 지배의 이분법을 자신의 혁명적 정치학 속에서 재생산하게 된다.

 

 

3. 레닌의 정치철학: 과학적 사회주의 당의 혁명적 실용주의


이제 1902년에 그 개요가 드러난 레닌의 정치학의 이후 발전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정치철학의 인식틀을 살펴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확인되는 것은 물질개념의 물리학화와 유물론의 인식론적 전환이다. 레닌은 “1)물리적 세계는 인간의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고 또 인간에 선행하여 어떠한 ‘인간의 경험’에도 선행하여 오래 전부터 존재하여 왔고 2)심리적인 것, 정신 등등은 물질(즉 물리적인 것)의 최고산물이며 인간의 뇌수라고 불리어지는 특별히 복잡한 물질의 덩어리의 기능이다.”10)라고 말함으로서 물질 개념을 물리중심적인 것으로 정식화한다. 그에게서 심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물리적인 물질의 산물로 파악되고 그것에 종속적인 것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유물론의 중심문제는 존재의 자기운동에 관한 것으로서보다는 그 물리적 물질과 인간 의식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 설정된다. 객관적 진리 개념과 반영이론은 유물론에 대한 이러한 재정의의 필연적 결과이다. “모든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감각으로부터, 지각으로부터 유래한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객관적 실재는 ‘지각에 속하는가?’, 즉 그것은 지각의 원천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당신이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유물론자이다.”11) 레닌에 따르면, 의식은 자신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가 인간의 경험, 감각, 지각을 거쳐서 두뇌에 도달한 것의 결과이다. 의식은 스스로 생산하는 물적 힘일 수 없고 오직 물리적 세계와의 관계에 의존하면서 반영기능을 수행하는 물질의 속성일 뿐이다. 따라서 어떤 의식의 진리성은 객관적 실재와의 대비를 통해 검증될 수 있는 객관적 성격의 것이다.

 

물론 레닌의 객관적 진리 이론은 인식내용과 인식대상 사이의 기계적 상응의 이론은 아니다. 레닌은 이 양자의 상응관계를 실천 개념을 매개로 하여 변용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치학에 강한 실용주의를 도입한다. 인식내용과 인식대상의 상응관계가 실천을 기준으로 하여 평가되며 실천에서의 성공과 실패, 즉 유용성이 그 평가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식이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진리를 반영할 때만, 생물학적으로 유용할 수 있고 인간의 실천에 유용할 수 있으며 생명의 유지와 종의 보존에 유용할 수 있다. 유물론자에게 인간 실천의 ‘성공’은 우리의 표상과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의 객관적 본질 사이의 조응을 증명한다.”12)는 말로 표현된다. 실천의 성공과 실패를 기준으로 삼는 레닌의 이 실천적 실용주의는 정치적․전략전술적 결정이라는 관점을 글쓰기와 사유의 초점에 놓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진술들에 커다란 유연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그 정치적 결정의 관심과 유연성은 실천 개념이 다수의 사람들 자신의 사회적 삶에서의 자기실천으로서보다는 당의 정치적 실천으로 협소하게 정의됨으로써 정치주의적으로 제한되곤 했다.

 

그렇다면 레닌은 당시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영역이 어떻게 합성되고 있으며 사회와 어떤 관련을 맺는다고 보았을까? 이에 대한 레닌의 답은 『국가와 혁명』과 『제국주의론』에서 주어지고 있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맑스의 생각을 빌어, “국가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통치하고 지배하기 위한 기관이며 그와 동시에 계급 사이의 갈등을 조절함으로써 이러한 억압을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는 기관으로서 이른바 질서의 창출자이다.”13)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가 화해 불가능한 계급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 권력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가,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14)고 보았던 것도 국가의 존재 그 자체가 계급적대의 실존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 적대를 폭력적으로 관리하는 집중적 기관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요컨대 레닌에게서 국가는 부르주아 권력의 집중점이자 근대적 주권형태로 이해되었던 셈이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의 강조점은 제2인터내녀설 우파와 중도파의 인식, 즉 부르주아 국가는 사멸하는 것이므로 파괴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비판하는 데 두어져 있다. 레닌은 “부르주아 국가는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폐지되는 것이다. 혁명 후에 사멸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 또는 준국가(semi-state)이다.”15)라고 말함으로써 엥겔스의 국가사멸론에 대한 당시 주류 사회민주주의의 해석을 비판했다. 그가 폐지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던 부르주아 국가기구들은 관료제와 상비군, 그리고 의회제였다.16) 이로써 그는,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이행이라는 개념에 따라 의회를 통한 국가권력 장악과 이것의 점진적 사멸을 주장했던 베른쉬타인-카우츠키적 정치학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 시기에 레닌은 맑스의 파리코뮌론에 의지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정부형태로서의 코뮌, 소비에트, 평의회의 혁명적 의의를 재평가하고 이것들을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전진한다. 이 점에서 레닌은 맑스의 경험을 두 번 반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05년의 레닌은 『공산주의자 선언』의 맑스, 1848년의 맑스를 반복한 바 있다. 맑스가 룩셈부르그 평의회를 부정했던 것처럼 레닌도 1905년 소비에트를 부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1917년에 레닌은 소비에트를 권력기관으로 긍정함으로써 1871 파리 코뮌을 프롤레타리아가 마침내 발견한 정부형태로 긍정했던 맑스를 다시 한 번 반복한다.

 

그러나 레닌은 이 과정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해방과정을 부르주아지의 지배체제의 거울 이미지에 따라 그려가고 있다. 부르주아 국가의 폐지와 더불어 형성될 프롤레타리아의 준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표현한다. “맑스 국가론의 본질은 단일 계급에 의한 독재가 모든 계급사회 일반을 위해서나 부르주아지를 타도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를 분리시키는 완전한 역사적 시기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는 아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다. … 부르주아지의 독재 ….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다.”17) 그리하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기관으로 설정되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루어 나갈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정치형태로 이해된다.18) 그는 무정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코뮌이 근대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그것을 대신해서 상비군의 폐지, 그리고 선출되고 국민소환에 복종하는 관료를 통해 보다 강화된 민주주의를 실시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19) 그는 이 민주주의가 무정부주의의 연방제와는 달리 중앙집권제를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20) 중앙집중의 원리는 레닌의 사고 속에서는 혁명의 전 과정에 걸쳐서 작동할 보편적 원리로 설정된다. 그래서 혁명은 ‘주권’의 형태, 글자 그대로의 ‘독재’(‘주권적 하나’의 지배) 형태를 경유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독재가 과연 어떻게 사멸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즉 주권 사멸의 메커니즘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남겨놓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레닌은, 민족국가 주권이 영토를 넘어서 나아가는 확장적 형태로서의 제국주의에 대해 탐구한다. 그는 제국주의적 주권을 ‘자본주의의 특수한 단계’와 연결짓는다. 그가 파악한 제국주의적 주권형태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독점체의 형성--금융과두제의 형성--자본수출--국제적 독점자본가단체의 세계분할--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전 세계의 영토적 분할’이라는 선분을 따라 발전한다.21) 세계를 분할하고 있는 국제적 독점자본가 단체는 민족국가와 융합하여 움직인다. 이 점에서 제국주의적 주권형태는 민족국가적 주권의 지리적 확장이다.

 

물론 제국주의론은 레닌의 발견물이 아니다. J. A. 홉슨이나 힐퍼딩, 부하린에게서 이미 자본주의의 특수한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개념의 많은 요소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레닌의 이론적 고유함은 오히려 제국주의의 역사적 위치를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에 입각하여 규정한 것에 있다. 레닌은,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세계의 영토적 분할이 국제적 갈등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그는 선진자본주의 열강에 의한 세계분할이 그에 대항하는 후발 자본주의국의 도전을 낳고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전쟁에 직면하여 좌파 국제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방어전쟁을 명분으로 하여 사회애국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에 주목했다. 그는 이것을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항이라고 비판하면서 “전쟁이 빚은 전반적인 폐허로부터 성장하고 있는 전 세계적인 혁명적 위기는 아무리 길고 험난한 도정들을 거칠지라도 결국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그 승리로 종결될 수밖에 없을 것”22)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제시했고 이러한 전망 하에서 제국주의를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23)라고 규정했다.

 


4.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소비에트와 당에 대한 레닌의 태도

 

제국주의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야로 파악한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볼세비키당의 전술 슬로건으로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상황에 대처했다. 그런데 실제로 1917년 2월에 짜르를 타도하고 임시정부를 가져온 것은 볼세비키의 지도 없이 아래로부터 분출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의 자생적 투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전개된 노동조합주의 비판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의 전개였다.24) 소비에트는 노동조합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에트와 당의 관계에 대한 레닌의 견해와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변화 속에서 불변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구상이 갖는 성취와 한계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가. 1905년 소비에트와 레닌

 

레닌은 이미 1905년에 소비에트의 출현을 경험한 바 있다. 소비에트는 당시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1905년 1월 9일 동궁행진과 ‘피의 일요일’ 이후 노동자들의 불만원인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확정하기 위해 구성된 쉬들로프스키 위원회를 비롯하여 자연발생적 스트라이크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지도하기 위하여 탄생한 초기적 형태의 다양한 노동자 위원회들도 소비에트의 일종이었다. 이 노동자위원회는 대표들의 모임, 선거인단 위원회, 공장조장들의 평의회, 대의원들의 평의회, 스트라이크 위원회, 공인된 대의원, 노동자 대표 평의회 등 많은 이름을 갖고서 나타났다.25)

 

소비에트의 본격적 출현은 1905년 5월 중순 모스크바의 섬유공단인 이바노보 보스네센스크에서 출현했다. 그것은 섬유노동자, 기계부문 노동자, 조판공 등에서 선출된 110명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그해 10월에는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소비에트가 형성되었다. 처음부터 정치적 색채를 띤 이 소비에트는 시민적 자유, 헌법제정, 정치적 사면, 제헌의회를 요구했다. 이 소비에트의 형성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요소들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는 자연발생적으로 선출된 노동자대표들, 둘째로는 혁명적 자치정부를 위한 멘세비키들의 선전활동, 그리고 셋째로는 모스크바 인쇄공 노동자 평의회의 선례. 1905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는 러시아 산업도시들 여기저기에 지방 노동자평의회가 형성되었다. 이 중 12월 봉기 때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8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180명의 대표로 구성된 모스크바 평의회였다.26) 그러나 1905년의 소비에트들은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지 않고 제헌의회 소집에 역점을 두고 활동했다. 즉 권력기구로서보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치정부기구이자 혁명기구로서 활동했다. 1905년 12월에서 다음해 1월 사이에 짜르 정부가 시베리아에 토벌군을 파병하여 자신의 권위를 재구축하는 데 성공할 때까지 이들은 짜르 정부에 무장력으로 대응했다.

 

1905년의 소비에트에 비교적 쉽게 호응한 정치조직은 볼세비키가 아니라 멘세비키였다. 멘세비키들은,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후진적이므로 당면 혁명에서 부르주아지가 지도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은 부르주아지의 의지에 혁명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27) 이들은 이러한 전략적 관점에 입각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변화의 계획에 따라 전국 러시아 노동자 회의를 기반으로 혁명적 자치정부를 수립하려는 전술적 태도를 취했다.28) 물론 멘세비키들도 소비에트를 상설조직으로 보지는 않았다. 러시아 노동자 회의는 유럽식 대중노동당을 건설하기 위한 기반 혹은 그에 필요한 수단 정도로 사고되었을 뿐이다.

 

멘세비키와는 달리 볼세비키들은 소비에트에 대한 강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볼세비키는 우선 소비에트의 활동이 정치적 활동으로 나아오지 못하도록 제한하려 했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당의 정치적 지도 아래 종속시켜 그것의 독립성을 해체시키려고 했다.29) 왜 볼세비키들은 소비에트를 의심했던 것일까? 이 의심은 볼세비키의 전략관에서 연유한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공화국을 위한 투쟁에서 지도권을 장악해야 하고 혁명을 사회주의의 입구까지 진전시켜야 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임시혁명정부 형태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를 수립하는 것을 당면 혁명의 목표로 설정했다.30)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연속혁명이 필요하며31) 혁명이 이렇게 연속적으로 발전하려면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볼세비키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는 사회민주주의적 목적의식에 의해서만 담보될 수 있는 것으로 전위당에 의해서 보장될 수 있이지 소비에트가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장봉기를 통해 전개될 혁명의 연속을 위해서는 기술적 안정성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것은 비밀경찰과 싸우면서 사회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직업적 혁명가들의 안정적 지도에 의해서만 뒷받침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시에 공장 노동자로 당을 충원해야 한다는 레닌의 제안이 볼세비키 내부에서 거부되기도 했던 것은 비밀활동 능력이 연속혁명의 필수조건으로서 얼마나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졌던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32) 바로 이러한 인식과 정서가 소비에트에 대한 의심의 원천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볼세비키 중에서 소비에트 현상을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혁명이론과 전술 속에 끌어들이려 했던 유일한 인물이 레닌이었다.33) 그는 1905년 경험에 기초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되었던 조직이론을 수정하면서 소비에트에 관한 이론을 정립한다. 그는 볼세비키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소비에트냐 당이냐’ 식의 양자택일 논리는 폭이 좁은 것으로 간주하고 사회민주주의자와 혁명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사이의 동맹을 강조하면서 소비에트에 임시혁명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중핵집단을 형성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의도는 소비에트로 하여금 자신을 임시혁명정부로 선포하도록 만듦으로써 소비에트에 의해 창출된 임시혁명정부가 무장봉기로써 짜르체제를 타도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34)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레닌이 이 당시에 소비에트의 성격과 역할을 무엇으로 파악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1905년 11월부터 1906년 여름 사이에 레닌은 소비에트를 노동자들의 의회나 프롤레타리아트 자치정부가 아니라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조직, 봉기의 기관, 새로운 혁명세력의 세포조직으로 파악했다.35) 그 후 혁명의 쇠퇴가 나타나면서 레닌은 소비에트보다 당의 지도에 좀더 강조점을 두면서 당이 노동운동 내부에서 권력에 대한 요구를 제기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으로 복귀한다.36) 그렇지만 레닌이 플레하노프로 대변되는 결정론적 관점들보다 민중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갖고 있었고 이상주의적 열정을 표현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는 이 점에서는 나로드니키-사회혁명당 혹은 무정부주의자와 유사한 태도를 보이면서 민중의 창의성을 믿는 태도를 보였다.37) 하지만 레닌은 소비에트가 당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에게 소비에트는 당이 노동대중을 통제하기 위한 매개조직으로만 사고되었고 혁명의 연속은 단일정당의 지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가, 봉기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지도자들에게 체포의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38) 1907년에서 1916년까지 소비에트에 관해 침묵했던 것은 소비에트를 혁명의 수단이자 당의 통제대상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나. 1917년 소비에트와 레닌

 

1907년 이후 혁명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1910년 쇠퇴의 정점에 이르렀지만 1912년부터 노동운동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노동운동을 고양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15년 여름에 전선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 일기 시작한 반전운동은 광범위한 파업운동을 수반했다. 1916년 초에는 전쟁중지의 요구가 표면화되었고 파업자는 급격히 증대했다. 1917년 1월 16일 중앙노동자 그룹 대표들이 체포된 것을 기화로 하여 2월 혁명이 폭발한다.

 

당시 전쟁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플레하노프와 많은 사회혁명당원들, 그리고 멘세비키의 대부분은 전쟁 기간의 혁명행동에 반대하면서 국민방위적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해 레닌과 볼세비키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킬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방위산업위원회에 노동자들이 참가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렇지만 그는 1915년 10월 당시에 소비에트의 창설에도 반대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지도자들을 비밀경찰에게 넘겨주어 결국 혁명을 유산시키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17년 2월 혁명은 볼세비키나 여타의 정치조직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해 2월 18일 페트로그라드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의 자생적 파업에서 시작된 사회적 소요에 2월 하순까지 일부 군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노동자 편에 가담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2월 혁명은 두마위원회와 소비에트라는 두 개의 의회체제를 발생시켰다. 마침내 1917년 3월 1일에는 입헌민주당과 10월 당 주도로 임시정부가 구성되면서 그 달 3일에 열린 제헌의회 결의에 따라 짜르 제정이 붕괴되었다. 소비에트는 1917년 2월 27일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그것은 공장들, 반란군 부대들, 민주주의적 및 사회주의적 정당들과 그룹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로 구성되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는 러시아에서 정치적 자유와 민중지배를 위한 투쟁에서 민중세력을 조직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설정했으며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로 선출되는 제헌의회 소집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였다.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는 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는 한편, 부르주아 정부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두마위원회에게 강령상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투쟁했다. 그 결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임시정부와 나란히 혁명적 민주정치의 통치기관으로 되는 이중권력이 형성되었다.

 

1917년 소비에트가 1905년 소비에트와 무엇이 달랐을까? 우선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이 혁명적 투쟁의 기관으로 기능하는 것을 넘어 혁명적 민주주의의 통제기구이자 일종의 노동자 정부로서의 성격을 가지면서 정치적 사회적 수준에서 권력을 새롭게 재건하는 과제를 맡았다는 것이다.39)

 

1917년 2월 이후 혁명의 발전과정에서 볼세비키의 영향력은 (특히 급진적 노동자들 사이에서) 점점 커져갔다. 여기에는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가 보인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로 인해 얻은 반사효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국민방위적 입장에서 방어전쟁을 찬성한 까닭에 병사평의회가 급진화되어 지휘관을 병사평의회가 선출하고 그 결과 병사들이 방위전쟁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40) 또 이들은 당면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에 그칠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1917년 5월 1일 이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멘세비키는, 1905년의 레닌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를 새로운 민주적 기구의 구성을 위한 혁명조직으로만 간주할 뿐 새로운 권력 재구성의 주체로 간주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도 협동조합에 기반을 둔 의회공화국의 구상 하에서 소비에트를 방편적으로만 사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레닌이 제기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이 많은 급진적인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슬로건에서 레닌은 처음으로 소비에트를 혁명권력의 주체로 설정했는데 이것은 이전에는 어떤 정치조직도 제기하지 않았던 주장이었다. 레닌은 이러한 생각을 파리 코뮌을 바라보는 맑스의 시각에서 곧장 배워와 그것을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주권형태의 창출 문제로 정교화하고 있었다. 우리는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와 내놓은 「4월 테제」에서 이러한 생각의 집약을 발견할 수 있다.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소비에트 공화국으로의 연속적 전진을 주장하고 있는 4월 테제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임시정부 하에서도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므로 “계급의식을 갖춘 프롤레타리아”와 그의 정당은 전쟁지지를 철회해야 한다.

2) 러시아의 현 상황은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의식과 조직을 결여하고 있음으로 인해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던 혁명의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 즉 프롤레타리아와 가난한 농민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과도기이다.

3) 이제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중단하고 소비에트 권력, 즉 새로운 더 좋은 국가를 위해 임시정부와 투쟁해야 한다.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고 나라 전역의 밑에서부터 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

4) 이러한 과제 앞에서 아직 소비에트 내 소수파인 볼세비키 당은 대중의 실제적 필요에 맞춰 전술을 신중하게 조정하면서 전체 국가권력의 소비에트로의 이양을 선동하여 대중들이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41)


‘나라 전역의 밑에서부터 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은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에서 잊혀졌던 코뮌주의의 부활처럼 보인다. 부르주아지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을 세워나갈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레닌 자신의 초기 정치학에서부터도 멀리 나아온 것이며 『국가론 노트』와 『국가와 혁명』을 통해 비로소 획득한 생각의 실천적 표명이다. 그것은 기존의 국가기구에 대한 파괴를 전제로 그것을 수행한 민중들 자신이 밑으로부터 위에까지 행정체제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 그리고 정치적 삶의 모든 단계에서 민중들 자신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정에서도 그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찰, 관료제, 상비군 등 낡은 억압체제를 해체하고 보편적 시민군으로 구성된 민주주의적 행정체제를 세워내기 위해 의회공화국과는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필요한 것으로 설정된다.

 

그런데 레닌이 구상한 소비에트 공화국이 만약 구상 그대로 달성되었다면 어떤 사회가 출현했을까? 그것은 부르주아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를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레닌의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상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드러난 많은 차별들을 철폐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부르주아 사회를 개혁하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고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 이유는 레닌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도입하고자 하는 원리 자체에 놓여있다. 무엇보다도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을 포괄하는 국민적 신디케이트 조직의 노동자’로 된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 공화국은 부르주아 사회의 임금차별들을 철폐하지만 강제노동을 폐지하는 것은 아니며 동일노동에 대해 동일임금이 주어지는 임금평등을 실현할 뿐이다. 그리하여 이 공화국은 계산과 통제를 원리로 하는 사회로 구축된다. 레닌이 이 점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역시도 소비에트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단지 레닌은 국가자본주의로부터 더 높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이행의 힘이 노동자 통제에서 주어질 수 있다고 보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노동자 통제는 과연 레닌의 믿음대로 국가자본주의의 부르주아적 사회원리를 전복하는 이행계기로 될 수 있었는가? 만약 노동자 통제가 생산과 정치를 포함하는 삶의 전 영역에 대한 노동자 자신의 통제를 의미한다면 그것이 민주주의를 실질화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의 디딤돌을 만들어 나갔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는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자발적인 조직인 소비에트 외부에서는 주어지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4월 테제」 이후 소비에트에 대한 레닌의 관점과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7년 4월에 레닌은 소비에트를 투쟁의 조직을 넘어 권력기관으로 파악하는 소비에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지만 1917년 7월 이후에 레닌은 다시 소비에트를 투쟁기관으로서만 파악한 1905년의 관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 계기는 1917년 7월 3일부터 5일까지에 있었던 볼세비키 지역조직의 무장시위가 실패한 것에서 주어진다. 당시까지도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가 주도하고 있었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임시정부의 군대에게 이 시위를 진압해 줄 것을 요청했고 시위는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이것을 경험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평화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희망은 사라졌다고 천명하고 노동자들의 결정적 전투와 강력한 대중봉기만이 유효한 길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1917년 전반기에 볼세비키의 투쟁을 이끌었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슬로건을 철회하면서 볼세비키에 의한 권력장악의 노선으로 선회한다.42) 물론 이러한 선회는 1905년의 관점으로의 단순 회귀는 아니다. 레닌이 소비에트를 실질적 권력기관으로 더 이상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소비에트를 볼세비키 권력을 구체화하는 데 필요한 대중통합의 기구로, 볼세비키 권력의 외피로 파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17년 9월 레닌은 코르닐로프 쿠데타에 대한 대응으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가 연합하여 이끄는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제안했지만 두 당은 이를 거부한다. 또 그는 1917년 9월 14일에 중앙소비에트에 의해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집된 민주의회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했는데, 그것은 이 의회에 표면적으로는 타협안을 제시하면서도 이면적으로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자 본부에 근거한 무장봉기를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레닌의 정치적 실용주의는 이미 철회한 바 있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슬로건을 9월 하순에 다시 제기하는 데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표면적 슬로건은 4월 테제와 같았지만 그것의 정치적 내용은 사뭇 달랐다. 4월에는 소비에트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 반해 1917년 9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선거에서 볼세비키가 소비에트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제기된 소비에트 권력 구호의 내용은 ‘볼세비키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이었고 그것의 실질은 ‘볼세비키 권력의 수립’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17년 10월 핀란드에 망명하고 있던 레닌이 보낸 편지를 통해 입증된다. 그곳에서 레닌은 “이제 볼세비키는 두 대도시 노동자와 병사 대표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했으니 그들은 최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으며 장악해야 한다.”43)고 쓰고 있다.

 

권력을 장악하는 주체가 볼세비키라면 소비에트는 어떤 위상을 갖고 어떤 역할을 담당할 것인가? 볼세비키 당은 봉기를 수행하여 권력을 장악할 것이고 소비에트는 그것을 승인함으로써 대중을 통합하여 그 권력을 공고하게 뒷받침할 것이다. 이것이 레닌이 10월 봉기를 이해한 방식이었으며 실제의 혁명과정도 이에 일치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44) 10월 무장봉기는 성공했고 당은 권력을 장악하여 그 후 1918년 1월 28일에 소집된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게로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한 소비에트 대회와 소비에트에 대한 주도권은 이미 볼세비키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이후 소비에트가 당의 방패막이로 전락한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45) 정치적 실용주의에 따라 변화해온 소비에트에 대한 레닌의 가변적 관점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소비에트를 단지 봉기기구로서, 혁명적 권력의 도구로서만 파악한 1905년의 관점이었고 그것은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나타났던 바, 즉 자생성에 대한 의식성의 지도라는 관점의 연속적 변형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 변화된 상황 속에서 주어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응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18년 1월 5일에 포고된 내무 인민위원회의 주장은 이러한 응답으로서 레닌과 볼세비키가 그려낸 사회의 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전국은 소비에트의 망상조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그것들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각각의 이러한 조직들은 가장 작은 단위에 이르기까지 지역문제에 관해서는 완전히 자율적이지만 그것의 활동은 중앙집권화된 최고 소비에트의 일반법령이나 규칙과 상치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일관성 있고 완전히 통합된 소비에트 공화국이 건설될 것이다.46)


여기에서 ‘자율적인 소비에트들의 망상조직(네트워크)’이라는 자율적 조직화의 구상이 천명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의 활동의 자율성은 ‘중앙집권화된 최고 소비에트의 일반법령이나 규칙과 상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제한에 봉착하게 되며 이 자율적 네트워크는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관성’과 ‘통합성’, 즉 ‘지배하는 것은 하나여야 한다’라는 주권 원리에 꽁꽁 묶여 있다.

이러한 구상과 명령이 기층의 대중들로부터 얻은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대중들이 임시정부의 타도를 환영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환영이 볼세비키에 의한 권력독점과 독점적 지배에 대한 찬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막심 고리키가 발행하던 신문 『노바야 지즌』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1917년 혁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권력이 소비에트로 넘어간 것은 문서상 그런 것이며 허구이고 실제가 아니다. … 대회의 회기는 봉기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볼세비키는 총칼에 의존했다. 소비에트가 머뭇거리고 볼세비키가 다수를 확보하지 못한 지방도시에서는 볼세비키가 소비에트를 협박하여 굴복하든가 아니면 민주진영 내부에서 내전을 치르든가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고 가려 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구호는 사실상 ‘모든 권력을 소수 볼세비키에게로’라는 슬로건으로 탈바꿈했다.47)


이러한 인식이 몇몇 지식인들의 비판적 정서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혁명 과정에서 공장위원회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자율적으로 되어 가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여러 곳에서 독립적인 소비에트들이 출현하여 볼세비키 주도하에 있는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중앙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지역소비에트 공화국을 형성하려는 경향도 나타났다.48) 이것이 소비에트 중앙권력과 지역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다양한 코뮌들과의 갈등을 증폭시켰음은 물론이다. 이에 볼세비키는 노동조합을 통해 공장위원회를 흡수하여 통제하는 것으로 대응하거나 통합된 지도부와 소수에 의한 독재를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필수적 요소로 옹호하거나49) (트로츠키가 1918년 3월 28일에 연설을 통해 강조했듯이) ‘노동, 훈련, 및 질서가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할 것’50)이라는 생각에 따라 강력한 규율사회를 구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군대는 전쟁위원회의 중앙지도 하에서 재조직되었고 산업은 공장위원회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지도에 의해 재구조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전개는 짧은 기간 사이에 볼세비키 이외의 정당들의 소멸을 가져오고 중앙집권화와 관료화가 증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51) 아래로부터 대중들의 자발적 정치조직으로 탄생한 소비에트는 마침내 1920년대에는 당의 지배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전동장치로 전화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1920년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로 하여금 “우리는 대중들 스스로가 일을 처리하도록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그들의 창조적 재능의 허용을 두려워하고 비판을 무서워한다. 우리는 더 이상 대중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 관료 정치의 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52)고 자기비판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다. 크론슈타트 반란과 레닌53)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은 “모든 권력을 당에게로가 아니라 소비에트로!”, “자유로운 선거에 의한 소비에트 권력 만세!”, “소비에트 권력은 공산주의의 멍에로부터 노동하는 농민을 해방시킬 것이다”, “좌익과 우익의 반혁명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권력이 노동자들의 수중에 있다는 볼세비키의 신화를 파괴한다. 반란자들은 자신들의 투쟁 목적이 10월 혁명을 연속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롤레타리아는 10월 혁명에서 자유를 쟁취하기를 원했지만 볼세비키 정부는 ‘정치 위원과 관료들의 편안한 삶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 국가의 유명한 상징인 망치와 낫을 총검과 감옥으로 바꾸’54)고 자유 대신 억압을 선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반란에 대한 볼세비키의 대응은 봉기 발생 18일째 되는 3월 18일에 인민군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수 백 명을 총살하고 수 백 명을 구속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수 천 명의 사람들이 핀란드로 도피해야 했다. 레닌은 이후 크론슈타트 봉기자들에 대해 ‘그들은 백위군의 권력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우리[볼세비키-인용자]의 권력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다른 권력도 없었다’고 말함으로써 크론슈타트 봉기자들이 백위군의 권력을 지지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볼세비키 권력에 대한 저항이 진압될 필요가 있었음을 긍정한 바 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의 봉기는 볼세비키 혁명의 한계를 명백히 보여주면서 볼세비키 정치의 위기를 구조화하는 것으로 작용했다.

 


5. 맺음말


레닌과 볼세비키는 행사되는 것으로서의 구성적 활력 대신에 장악되는 것으로서의 권력에 강조점을 두었다. 자발성을 투쟁과 실천의 경험들을 통해 진화하는 것으로 보기보다 그 발전의 고정된 한계선을 긋고 그 외부로부터 자발성에 이어지는 목적의식적 지도력의 선분을 일종의 통합의 선으로 정립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이처럼 볼세비키와 레닌은 계급구성을 ‘사회주의 의식’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의 통일로, 그리고 그에 기초한 ‘사회주의 권력’의 수립으로 이해했다. 이 관점 속에서 계급은 부르주아 사회 속에 ‘노동자’라는 실체로 이미 존재하며 그것의 정치적 합성은 ‘사회주의 정치의식’과의 결합을 통해 완성된다. 이러한 관점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오직 ‘수단’으로서만 인정할 뿐인 볼세비키의 소비에트에 대한 실용주의적 태도를 규정한다. 목적은 수단 외부에서 수단들을 종속시키는 초월적 힘으로 있으며 실제로는 ‘사회주의 정치의식’(과 그 담지자로서의 당) 외의 모든 것이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 결과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은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리바이어던의 하나로 전화했으며 결국, 레닌의 혁명도 국가자본주의 소련의 급속한 발전을 낳음으로써 ‘지금까지의 모든 정치적 봉기는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인용한 바 있는) 맑스의 평가의 새로운 사례로 귀착되었다.55) 이것이 1991년 사회주의 도미노 붕괴 이후에야 뚜렷해진 ‘맑스레닌주의의 위기’의 원천이다.56)

 

지금까지 우리는 러시아 혁명에서 당과 소비에트 사이의 관계에 대한 레닌의 태도를 고찰하면서 당의 헤게모니와 당 독재로 이해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가져온 폐해를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가 직접적으로 코뮌, 소비에트, 평의회를 우리 시대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지나치게 단선적인 독해일 것이다. 레닌은 계급의 정치적 구성의 문제를 당대의 생산적 조직들이나 자발적 조직들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조직화의 주관주의적 경향을 드러냈지만 그러한 생산적 조직들 혹은 자발적 조직들을 당 주변에 포진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나 농민으로 당을 재구성하려는 노력, 그리고 노동조합이나 소비에트를 당의 외곽조직으로 만들려는 노력 등이 그것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는 공장의 생산원리를 당의 정치적 조직화의 원리로 응용하려 했다.57) 새로운 계급구성은 당대의 생산적 조직을 기반으로 그것의 성격을 역전시키거나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인 조직들을 원천으로 해서 성장해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코뮌, 소비에트, 평의회가 전통적 모델 그대로 새로운 조직화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까? 오늘날 생산은 전통적 코뮌들, 소비에트들, 평의회들이 기반했던 공장, 농촌, 병영의 기반을 넘어서 있다. 게다가 1917년 이후 서구 자본주의도 러시아에서 전개된 소비에트의 제도화 형식에서 교훈을 얻어 소비에트가 생산의 조직화의 수단으로, 노동 이데올로기의 지지대로, 계획화의 수단으로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것을 20세기 자본주의의 조건에 맞게 변형해서 사용한 바 있다. 예컨대 독일의 바이마르 입헌주의와 영미의 케인즈주의에서 노동의 구성력58)은 자본주의의 개혁을 추동하는 힘으로 활용되었다.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의 사회적 노동으로의 재구성에 따라 구성력이 드러내는 새로운 특질들--특이화, 다양화, 혼종화, 이동성--을 포착하기 위한 자본의 새로운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구성력이 점점 특이성들의 네트워크라는 조직형식을 드러내고 있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탈근대적 구성력이 드러내는 이 새로운 특질들이 오늘날 조직화의 움직임이 도약해야 할 디딤돌이다.

 

레닌은 노동자라는 사회적 존재가 부르주아 사회의 수동적 합성물임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레닌은 노동자가 수동성을 깨고 능동적 존재로 전화할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른바 ‘정치’의 개념을 노동운동 속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레닌은 정치를 생산과 분리된 영역에서의 의식중심적 활동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의 경험들 속에서 ‘좋음’과 ‘기쁨’을 찾는 다중들의 일상적인 윤리정치적 결정들의 중요성을 놓치게 되었다. 당대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외부에서 구성되어 그 사람들 속으로 주입될 수 있는 사회주의 정치의식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권력의지’일 뿐이다. 레닌주의의 붕괴는 결코 혁명적 가능성의 붕괴가 아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초월적 목적과는 다른 내재적 목적은 존재들이 자기진화의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창의에 따라 구성하는 것이며 그렇게 구성된 목적들이 다시 그 존재들이 진화하는 수단임을 통절하게 깨닫게 하는 역사적 계기로 되고 있다.59)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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