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칼 마르크스

[스크랩] 20세기와 잃어버린 마르크스주의

ddolappa 2008. 5. 17. 05:39

 

20세기와 잃어버린 마르크스주의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이윤을 동기로 움직이는 사회는 정말 끔찍하다. 그러나 행복을 강요하는 사회는 더 끔찍하다. -레셰크 코와코프스키Leszek Kolakowski

노동 운동이 정말 새롭게 다시 시작하려면 초현실주의자들의 유명한 슬로건인 '노동 타도!'가 핵심 슬로건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조셉 야블론스키Joseph Jablonski

 


Ⅰ. '근대'의 두 얼굴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로렌스D. H. Lawrence는 무너지는 근대 문명의 상실감에 몸서리치면서 아스키스Cynthia Asquith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과거의 그 많은 아름다움과 열정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새롭게 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내 영혼은 부서지고 있습니다. 〔……〕 지난 이천 년 동안 우리는 봄과 여름을 즐겼지요. 이제 겨울은 어떤 모습일까요?" 토마스 하디Thomas Hardy에게 그 시대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보다 더 잔인한 시대"이며 "무관심 속에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뒤로 돌아가는 시계 바늘이나 바라보게 만드는 시대"였다. 1차 대전은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 믿었던 근대 문명이 프랑켄슈타인적 마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현실로 드러난 이성의 광기에 비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러우며 불투명하다. 그리고 만화경의 그림처럼 끊임없이 뒤섞인다"는 『팽 드 시에클』지의 선언은 차라리 애교 섞인 것이었다. 문명의 단꿈에서 깨어나 『묵시록』의 세계 속에 던져진 유럽의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보여준 반응은 두 가지였다. 그 첫째는, 이탈리아 '미래파'나 영국의 '소용돌이파Vorticism'에서 보듯이 기계 문명의 '잔인한 새로움'을 탐미적 시선으로 받아들이는 전위주의의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재즈 시대'의 특성인 경쾌한 몸놀림으로 일상의 안락함과 정신의 가벼움을 즐기는 것이었다.1) 전자가 윤리적 판단을 유보한 채 근대의 기획을 극한까지 지지함으로써 물질 문명의 파국을 추인하였다면, 후자는 헤도니즘의 통로를 따라 내면의 신비주의로 침잠함으로써 문명의 석유 냄새 나는 안락함을 즐겼다. 어느 것이든 이들은 모두 윤리적 상상력을 폐기하는 전략을 밑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과 세계 공황을 거치면서, 공간과 시간의 질서 정연한 관계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이성적 우주관은 이처럼 파산 선고를 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이 합리주의가 명하는 코드에 따라 움직이리라는 고귀한 꿈이 곧 실현된다고 믿는 순간, 갑자기 합리주의의 종말이 온 것이다. 좌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로 표상되는 우파의 합리주의 세계관이 파멸했다고 환호했다. 계몽 사상의 적자는 사회주의뿐이라는 생각이 전후의 지식인들에게 비교적 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좌파의 승리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때 20대의 문학 청년 하벨Vaclav Havel을 사로잡았던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와 같은 열렬한 지지자들을 가장 큰 적으로 돌렸다. "과학적 지성의 지배로, 즉 모든 정권 중에서 가장 귀족적이고 독재적이며 오만하고 남을 얕보는 정권"으로 귀착될 것이라는 바쿠닌Mikhail Bakunin의 오멘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성은 가족까지 공공화시킨 고도화된 국가 권력의 도구로 전락했고, 계획 경제의 파산은 근대적 이성이 자랑하는 정확성의 신화가 사실 무근임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좌파의 합리주의도 패배한 것이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사실상 운명적 적수가 아니었다. 비록 길은 달리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계몽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유럽 지성의 고상한 꿈을 실현하는 현실적 기제였다.2) 같은 '미래파' 운동이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의 지지 세력이 되고 러시아에서는 볼셰비즘에 친화력을 지녔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생산 체제의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생산력 중심주의에 기초한 '근대'의 경제가 있을 뿐이었다. 근대적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생산력 중심주의의 서로 다른 얼굴일 따름이라는 이마무라 히토시의 지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3)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각각 표방하였던 시장 합리성과 계획 합리성은 근대성이라는 공통 분모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보다는 공유하는 것이 더 많았다. '전근대'를 탈출하여 '근대'라는 공통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양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 뿐이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패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근대 이후'를 겨냥하지 못하고, '전근대'를 탈출하는 이념적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더 이상 자본주의적 '근대'를 극복하는 해방의 이데올로기이기를 그치고, 자본주의적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 그것은 사상의 패배였다. 이 패배는 일차적으로 사회주의가 낙후된 저개발국에서 실현되었다는 역사적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마르크스가 도모했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길에 잠재된 위험이기도 했다. 생산성과 물질적 진보를 달성하기 위한 인류의 헌신적 노력을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영웅관은 노동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신성시한다. 이 점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마르크스의 영웅이자 부르주아지의 영웅이었다. '일을 달라!'가 노동자들의 구호인 한, 그리고 '노동 타도!'가 '자본 타도!'와 한 쌍의 구호로 묶이지 않는 한, 사회주의는 더 이상 노동 해방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노동을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로 남을 뿐이다. 마르크스의 문화적 영웅을 프로메테우스에서 오르페우스나 나르시소스, 디오니소스로 대체하자는 마르쿠제의 빛 바랜 지적이,4) 요즈음의 내게 새삼 절실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1929년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티리옹Andre Thirion이 '노동 타도!'의 슬로건을 제시했을 때, 1935년의 혁명 러시아는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Aleksei Stakhanov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7톤의 할당량 대신 102톤에 이르는 경이적인 양의 석탄을 캐낸 돈바스 탄광의 전설적 광부 스타하노프가 해방된 육체 노동자였다면, 노동을 거부한 초현실주의자 티리옹은 '초'해방된 지식 노동자였다. 스타하노프와 티리옹은 각각 프로메테우스적 해방과 디오니소스적 해방을 상징한다. 양자 택일하라면, 나는 기꺼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기계 문명의 진보는 노동 억압과 착취의 물신주의를 낳을 뿐이다. 현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노동을 착취하는 물신론적 진보관을 공유함으로써, 다시 한번 자신들이 같은 뿌리임을 드러냈다. 차이가 있다면, 각각 노동 영웅과 성과급이라는 서로 다른 당근을 썼다는 것뿐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신의 문화적 영웅을 프로메테우스에서 디오니소스로 대체할 때, 인간 해방과 노동 해방의 이데올로기로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근대'의 물적 진보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의 토대가 될 때, 명징한 이성이 술에 취할 줄 아는 지혜와 결합될 때, 순백한 이성이 감성의 인간적 얼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방법주의의 정확성이 에세이적 스타일의 유연한 사고에 포섭될 때, 인간과 자연을 기계화하는 총체적 사물화(事物化)라는 근대의 고질병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파멸의 방법을 통해 무의미의 위대함을 일깨워준 디오니소스의 채로 걸러지지 않은 진보는 '진보를 위한 진보'라는 진보의 물신화로 귀착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영웅 프로메테우스가 그 비극적 숭고함을 되찾기 위해서는, 문명의 진보를 위한 그의 헌신이 디오니소스적 삶의 환희와 접목되어야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것이야말로 프로메테우스를 현실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영웅관에서 구출하여 21세기 문명의 영웅으로 소생시키는 길이 아닌지……

 


Ⅱ. 노동 영웅: 사회주의 근대화의 프로메테우스?

 

스탈린은 1931년 2월의 유명한 연설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발전 전략을 밝힌 바 있다. "러시아는 그 후진성으로 인해 모두에게 짓밟혔다. 군사적 후진성, 문화적 후진성, 정치적 후진성, 공업적 후진성, 농업적 후진성이 그것이다. 〔……〕 우리는 선진 제국보다 50년 또는 100년 뒤처져 있다. 우리는 이 격차를 10년 안에 메워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해내든가 아니면 굴복하든가 그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5) 스탈린의 이 연설에서 인간 해방과 노동 해방을 향한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사회주의는 실종되었다. 연상되는 것은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론'이다. 박정희 체제를 '시장 스탈린주의' 혹은 '부르주아 스탈린주의'라 명명한 서구 좌파들의 지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경제 개발, 자립 경제, 국방력 강화라는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목표는 급속한 공업화, 군사 강국, 자급 자족 경제 체제autarky를 지향했던 스탈린의 발전 전략과 정확히 일치한다. 박정희 체제와 스탈린 체제는 그 이데올로기적 양극성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근대화론'의 쌍생아였다.6) 프레오브라젠스키E. A. Preobrazhensky의 '사회주의 본원적 축적론'은 사회주의 근대화론의 이론적 변형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농업 부문을 수탈하여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하고자 했다면, 현실 사회주의의 그것은 비단 농업 부문만이 아니라 노동력의 국가적 수탈까지 포괄하는 전사회적인 것이었다. 즉 국가 자본의 증식을 위해 노동자 계급의 내핍을 강요하고 2천 5백만 농민을 국가 자본의 국내적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공업화가 그들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28년의 27%에서 1932년에는 110%로 수직 상승한 잉여가치율의 추이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국가의 착취 정도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가 상징하는 것은 사회주의 근대화의 목표에 동원되어 소모되고 탈진한 비극적 인간상이다. "볼셰비키가 부수지 못할 요새는 없다"는 구호와 함께 대대적으로 선전된 이 노동 영웅의 초인적 노력에서 바람직한 영웅상으로서의 프로메테우스를 읽어내는 것은 노멘쿨라투라의 독해법일 뿐이다. 그것은 레닌이 정예 당원들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러한 종류의 정치적 헌신과 기율을 모든 시민들에게 똑같이 요구했던 스탈린주의를 정당화시키는 선전 기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독해법은 달랐다. 1970년대 중반 폴란드의 세계적인 영화 감독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가 만든 영화 「벽돌 인간Czlowiek z Marmuru」에 폴란드 시민들이 보여준 열렬한 반응에서 그것은 잘 드러난다. 거의 모든 폴란드인들이 가족 단위로 관람했다는 이 영화는 평범하고 순진한 폴란드의 한 노동자가 어떻게 당과 관료들에 의해 동원되고 궁극적으로는 산업화의 소모품으로 희생되는가를 생생하게 그린 영화이다. 요컨대 폴란드의 스타하노프가 맞은 비극적 삶이 그 주제이다. 이에 대한 폴란드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노동 영웅을 프로메테우스로 읽자는 당 관료들의 독해법을 거부한다는 의사 표시였다. 혹은 프로메테우스적 영웅관 자체를 거부한 것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영웅주의에 녹아 있는 장엄한 비극성은 대중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것이었다. 역사학의 특권인 되돌아보는 관점에서 볼 때, 스타하노프주의는 예정된 길이었다. 서유럽의 혁명이 좌절되어 일체의 외부 원조가 중단되고 전 러시아가 '포위된 요새' 증후군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적대적인 자본주의 강국들과의 군사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업화를 추진해야만 한다는 지상 과제 앞에서 대중의 희생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인적 자원과 노동력은 소련이 가진 유일한 밑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타하노프주의는 볼셰비즘의 사회주의 경제관에 이미 그 맹아를 두고 있었다. 스탈린의 소련을 관료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수탈하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트로츠키조차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계획 경제가 의무 노동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노동의 군대화'를 옹호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국민에게 군대의 헌신과 규율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1968년 독일 학생 운동의 영웅이었던 두취케Rudy Dutschke가 레닌주의에서 피터 대제의 근대화론을 읽은 것이나, 레닌주의의 특징을 러시아 인민주의의 가치와 근대화론의 접합으로 보거나 자본주의 및 그 제도들과의 타협으로 보는 최근의 논의들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된다.8) 노동 해방이 아니라 동원과 착취에 기초한 급속한 산업화 정책은 소비에트 체제의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생산자 민주주의의 전형인 공장위원회가 노동조합의 하부 기관으로 전락하고, 그나마 전시 공산주의하에서는 노동조합마저도 당의 하부 기관으로 포섭되어 국가 기구로 편입되었다. 밑으로부터 나오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노동조합이 위에서 하달되는 당의 명령을 전달하는 컨베이어 벨트로 타락한 것이다. 이는 일당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대중 조직간의 갈등이 국가의 승리로 귀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내용이 규정되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독재로 읽혀졌다. 무엇이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것인가는 국가와 융합된 당이 결정했다. 견제되지 않는 정치 권력의 음험한 메커니즘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국가와 당을, 당과 국가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로 도치시켰다. 운동의 목표였던 프롤레타리아트는 이제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파울 레비Paul Levi는 법정에서 1차 대전 당시 반전 운동으로 기소된 로자 룩셈부르크를 변호했을 뿐만 아니라, 볼셰비즘의 관료적 중앙 집중제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비판 전통을 계승한 소수파 사회주의자 중의 하나였다.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에게 보낸 1921년 9월 23일자 편지에서 그는 "(볼셰비즘의 오류에 대해) 우리가 지금 침묵한다면 그건 러시아를 돕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해 죽을 죄를 짓는 것"이라고 썼다. 그는 러시아의 혁명이 사회주의의 신용을 떨어뜨릴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레비가 세상을 떠나고 독일 의회에서 그에 대한 추모사를 읽을 때, 공산당 의원들은 나치당 의원들에 동조하여 퇴장함으로써 레비의 비판에 유치한 복수를 했다.9) 그러나 사회주의 혹은 좌파라는 개념에서 반노동자주의를 연상하는 오늘날 동유럽 인민들의 정서는 레비의 불길한 예언이 적중했음을 드러내준다. 소련식의 사회주의 근대화 프로그램은 2차 대전 이후 소비에트 블록에 편성된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1차 5개년 계획 기간(1949~1953) 동안 폴란드의 공업 생산량은 158%로 증가하였다. 헝가리의 경우는 성장률이 무려 210%에 달했다. 그러나 성장의 혜택은 노동자의 몫이 아니었다. 같은 기간 동안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10~20% 가량 감소했다. 고도 성장과 생활 수준의 하락이라는 수수께끼의 비밀은 간단했다. GNP 대비 자본 축적률에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평균이 20%인 데 반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무려 그 2배에 달하는 40%였기 때문이다.10) 요컨대 현실 사회주의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노동 대중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국가에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노동자들에 종속된 국가가 노동자 파업과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했다는 현실 사회주의의 역설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제3세계에 이르면, 사회주의 근대화론은 무게중심이 완전히 근대화론으로 수평 이동한다.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앞지르자"라는 중국 대약진 운동의 구호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세 차례의 5개년 계획으로 이룩한 수준을 우리는 두 차례의 5개년 계획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독려한 1958년의 김일성 연설 등은 앞서 언급한 스탈린 연설의 복사판이라 하겠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사회주의가 주변화의 압력에 놓여 있는 저개발국이 자본주의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발전 전략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볼셰비즘이 자본주의의 발전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급속한 경제 발전 이데올로기로 변형되었다는 홉스봄Eric J. Hobsbawm의 지적이나 현실 사회주의를 제3세계의 '개발독재'의 형태로 바라보는 오오니시 히로시의 시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제3세계의 고유한 역사적 딜레마는 왜 사회주의가 그곳에서 본격적인 근대화론으로 탈바꿈했는가를 잘 설명해준다.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의 상태에서 벗어나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해야만 했던, 그러나 급속한 근대화를 위해서는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발전 전략인 자본주의적 모델을 취해야만 했던 제3세계 인텔리겐치아의 당혹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1917년 이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제국주의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발전 전략을 따라야 한다는 이 곤혹스러운 모순을 일거에 해결해준 것은 다름아닌 10월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은 민족 해방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웠을 뿐 아니라, 후진국 근대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제국주의를 모방하는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아니라,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그와 다른 방식의 근대화가 가능하다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은 제3세계 인텔리겐치아에게 실로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서구적 근대화에 집착함으로써 제국주의의 동조자라는 낙인이 찍힌 식민지 부르주아지의 전철을 밟지 않으면서도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회주의가 이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한마디로 '비서구적 서구화' 혹은 '전근대적 근대화'였다.11) 유럽의 사회 사상사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서구 중심적인 사회주의 사상이 제 3세계에 이르러서는 비서구적이며 심지어는 반서구적인 것으로 읽히는 기이한 역설이 성립한 것이다. 사회주의 근대화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따라서 고유의 전근대적 민족 전통 속에서 사회주의의 요소들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것은 민족 사회주의로 귀결되었다. 노동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로 읽혔다는 점에서, 제3세계의 사회주의 역시 소련이나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와 다를 바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신생 민족 국가가 발전을 위한 자본 축적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소련의 국가주의와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유일한 차이는 전자가 후자에 비해 유독 민족과 전통을 강조하고, 사회주의적 대의보다는 민족의 이름으로 노동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지니는 감정적 호소력 때문에 조국 근대화를 위해 민중을 동원하는 데는 더 유효한 측면도 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낡은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는 인민주의였다. 이제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하급 동맹자가 되었다. 미얀마의 불교 사회주의, 탄자니아의 농업 사회주의, 마오 쩌둥의 수호전 사회주의, 알제리의 파농주의Franz Fanonism 등은 민족 사회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지도부 대부분이 추장의 자식들이라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중국 황제의 내궁인 중난하이에 마련된 마오의 서재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책이 한 권도 없었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파농의 탈식민주의적 담론 체계가 프랑스 극우파 '악시옹 프랑세즈'의 담론 체계를 단지 '네그리튀드Neritude'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주체 사상의 역사 서술이 남한의 극우적 재야 사학에 대해서 가지는 친화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3세계의 사회주의에서 '민족'은 지양되어야 할 낡은 전통을 권력의 필요에 따라 불러내어 복권시키는 주술이었으며, 인민들의 일상적 삶과 의식을 지배하는 낡은 전통과 그에 기초한 음험한 정치 권력을 보위하는 위대한 수사였다. 물적 기반이 거의 전무한 저개발 국가의 전형적인 상황에서 사회주의 근대화론을 표방한 인민주의자들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혁명기의 볼셰비키가 그러했듯이, 인민이 전부였다.12) 인민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소련이 '노동의 군대화'를 통해 군사적인 방식으로 산업화를 추진해나갔다면, 제3세계는 돌격대 방식 혹은 빨치산 방식을 선호했다. 소련이 세계에서 가장 큰 공장과 발전소를 건설하고 싶어했다면, 제3세계는 김정일의 '통 큰 사업'이나 쿠바의 도르티코스Oswaldo Dorticos가 선호했듯이 최대의 인력을 투입해서 최대의 산출량을 얻고자 했다. 노동을 해방시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었다. 최대한으로 노동을 동원하는 것-그것이야말로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지상 과제였다. 민중은 진보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을 뿐이다. 레닌주의로부터 주체 사상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간의 주체적 능력을 강조하는 '주의주의Voluntarism'적 마르크스주의는 동원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표현일 뿐이었다. 그것은 '하면 된다Can Do Spirit'라는 남한식 근대화 구호에 사회주의의 옷을 입히고 철학적으로 약간 세련화시킨 것뿐이었다. 사회주의가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고 해서, 제3세계 혁명가들의 헌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똑같은 헌신성이 민중들에게 요구될 때, 이들의 헌신성 또한 사회주의의 동원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강화하는 논리가 된다는 것이다. 혁명 후에 쿠바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된 체 게바라Che Guevara가 32층짜리 중앙은행 사옥 신축 공사 과정에서 보여준 일화는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게바라는 이 고층 빌딩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하다는 건축가 퀸타나Nicolas Quintana의 논리를 끝내 수긍하지 못했다. 천식을 앓는 자신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면 건강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못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던 '60년대의 영웅' 게바라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영웅적 헌신을 일반 노동자 대중에게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라는 "자기 희생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쿠바 국민들이 자신과 같은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의 길을 걸을 것을 요구했다.13)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메커니즘 속에서 결국 '전인민의 노동 영웅화 혹은 프로메테우스화'는 근대화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디오니소스적 삶에 대한 인민들의 절실한 욕구를 억압하는 신화적 기제였을 뿐이다.

 


Ⅲ.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1990년대 들어 과학적 지식의 절대성과 상대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사회 구성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 그리고 전통적인 실재론적 과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과학 전쟁'의 이념적 지형도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한 가지 보여준다. 과학 지식의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사회 구성주의자들?포스트모더니스트?다문화주의자?페미니스트?신좌파 등의 공격에 맞서 보수주의자들과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론적 인민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14)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이 기이한 연합 전선은, 따지고 보면,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세기말'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자연과학으로부터의 유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논하려는 실증주의적 경향을 드러낸 바 있다. 콜레티Lucio Colleti의 표현을 빌리면, 마르크스가 강조한 '역사적 경향'이 카우츠키Karl Kautsky에 이르면 자연적 필연성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주의 선전 서점의 진열장에는 다윈의 책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나란히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페리Enrico Ferri의 회고는 19세기말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분위기를 잘 드러내준다.15) '자연과 사회에 대한 법칙적인 이론적 지식 체계'로서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계몽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의 부르주아 실증주의와 출발점을 공유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사조들이 신비주의?신낭만주의?반주지주의 등의 다양한 형태로 실증주의를 부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도 잘 입증된다. 과학과 이성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는 점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는 사실상 콩트Auguste Comte적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경제 합리성과 기술 합리성에 의거해 체제를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는 발상 또한 과학적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성의 힘에 대한 무한한 신뢰 때문에 실증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들 또한 '정확성'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정확성'에 대한 강박관념은 수학적으로 엄밀하고 일관된 사상 혹은 이념 체계를 낳았다. 모순 덩어리인 현실 세계를 순수한 이념에 따라 기계적 정확도를 지닌 사회로 구축하는 것-그것이 이데올로기의 목표였다.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었던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와 이성에 의해 기획된 19세기의 실험적 유토피아를 가르는 경계도 바로 이 근대적 정확성의 유무였다. 사실상 모어의 유토피아는 목가적 심성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근대화에 저항하고 그것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서 19세기의 실험적 유토피아는 이성에 의해 잘 기획된 짜임새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시몽Saint-Simon과 오웬Robert Owen의 선례가 있었지만, 근대적 체계성을 본격적으로 갖춘 최초의 것은 카베Etienne Cabet가 제시한 '이카리아 공동체'였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을 아메리카에서 실험했던 오웬의 '뉴 하모니 공동체'가 실패로 끝났듯이, 카베의 '이카리아 공동체' 실험도 실패로 막을 내렸다. 비교적 짜임새 있는 카베의 유토피아조차 실험에 실패했다는 것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삶을 기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신호였다. 이성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인간의 사고가 완벽하지 않은 이상, 이성의 기획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학적 강박관념에 따라 유토피아적 기획을 정밀하게 시도하면 할수록, 그 기획은 유연성을 잃고 기계적인 체제를 지향한다. 근대 유토피아에서 국가주의 혹은 군대 조직의 성격을 자주 발견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것이 요구하는 스파르타적 삶은 공동체를 위해 영웅적 자기 헌신을 다짐한 성원들만이 견딜 수 있는 삶이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기획이 자주 '전인민의 프로메테우스화'를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삶의 리얼리즘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요구일 뿐이다. 결국 이성의 기획이 순수하고 정확할수록, 그것은 일상적 삶의 현실과 멀어진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자신의 기획을 완성하기 위해 공동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계획하는 이념의 순수주의는 결국 그것을 거부하는 성원들을 배제함으로써,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를 배태한다. 군대식으로 잘 조직된 벨라미Edward Bellamy의 유토피아적 산업 사회에 대한 모리스William Morris의 신랄한 비판은 이 점에서 주목된다. 모리스에 의하면, 벨라미의 유토피아는 '철저한 중앙 집권 기구에 의해서 운영되는 국가 공산주의'이며, 기계적인 생활을 우리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모리스는 『유토피아 소식News from No-where』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기획의 체계성이라는 면에서, 그것은 카베나 벨라미의 구상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기계적인 노동을 즐거운 습관으로 바꾼다거나, 군대식으로 조직된 대공장의 노동을 공방의 예술가적 노동으로 대체하자는 그의 유토피아 상은 소박하기만 하다.16) 그러나 나는 바로 그 못 미친다는 점에서 모리스의 구상을 높이 산다. 다른 유토피아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머문 반면, 모리스의 유토피아는 '근대'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모리스는 자본주의 문명과 결은 같이하면서 길만 달리하여 또 다른 '근대'를 지향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근대 이후'를 탐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모리스의 낭만적 사회주의가 '전근대적'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지만, 낭만주의는 '전근대적'이면서 동시에 '근대 이후'를 겨냥하는 양면 칼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도 사실상 어느 편이었냐 하면, 벨라미보다는 모리스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침에는 사냥, 낮에는 고기잡이,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 비판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결코 사냥꾼이나 어부, 목동 또는 비판가가 되지 않아도 좋은"(『독일 이데올로기』),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다"(『공산당 선언』),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의 자유로운 발전"(『파리수고』) 등의 구절들을 보면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마치 비공업적인 사회를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근대'를 지향하는 것으로 비출 수도 있지만, '근대'의 성과를 딛고 선다면 '근대 이후'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어느 면에서는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의 미래상에 대한 세세한 전략적 디테일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가 그토록 광범위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17) 그러나 그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20세기의 역사에서 실현된 것은, '근대'를 따라잡기 위해 수입된 저개발국의 급속한 산업화 전략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였다. 스탈린주의를 본격 모더니즘의 기획 전반에 들어 있는 모든 독재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것의 구현으로 보는 그로이스Borys Grois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온당하다.18) 계획 경제에 대한 중앙 통제 방식은 이성의 힘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관료들의 이해가 개입된 것은 그것이 부동의 메커니즘으로 정착되고 난 후의 일이었다. 대숙청 또한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서는 불순 분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념의 순수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한 원인이었다. 독재는 유토피아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후에 시인이 된 트바르도프스키Alexander Tvardovsky가 소년 시절 자신의 아버지를 인민의 적으로 고발할 정도로 가족 관계의 공공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스탈린이 제시한 유토피아적 기획에 대한 인민들의 자발적 호응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밟혀 죽은 군중은 물론이고, 구소련의 양심적 지식인을 대변했던 사하로프Andrei Sakharov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흘린 눈물이 입증하는 바이기도 하다. 현실 사회주의가 근대화 과정에서 수천 수만의 스타하노프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것의 유토피아적 기획이 갖는 호소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영웅적 헌신성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면, 일반 대중들은 그 누적된 삶의 피로를 감당할 수 없게 마련이다. 그것은 체 게바라와 같은 초인적 영웅에게나 가능한 요구이다. 초인적 영웅은 글자 그대로 인간이 아니다. 단지 초인일 뿐이다. 평범한 대중에게 초인이기를 요구하는 유토피아는, 그들이 그것을 거부할 때 독재로 전환한다. 영웅적 노력이 강요하는 삶의 긴장과 피로에 지친 대중들이 태업의 형태로 저항했을 때, 이 유토피아 권력은 전직(轉職)과 무단 결근조차 형사범으로 다스렸다(1940년 6월에 공포된 소련의 법령). 디오니소스적 삶의 육성과 환희에 대한 대중들의 자연스러운 갈구는 부르주아적 혹은 아메리카적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매도되곤 했다. 이제 존재하는 것은 유토피아를 위한 유토피아이며, 대중들의 눈에 비친 그 실체는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열렬한 청년 사회주의자 쿠론Jacek Kuron과 모젤레프스키Karol Modzelewski가 '폴란드 통합 노동자당'에 보낸 1965년 3월 18일자의 공개 서한은, 유토피아적 이념과 디스토피아적 삶의 참담한 괴리에 대한 분노에 찬 고발장이었다.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에게도 쿠론과 모젤레프스키의 공개 편지에 대해 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이자 근거라고 보았다. 모든 인간 활동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인간화된 자연'으로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과정이며, 인간의 불변하는 속성은 '노동 인간homo laborans'인 것이다. 정치경제학에 이르면, 그것은 엥겔스가 라부아지에A. L. Lavoisier의 산소 발견에 필적하는 과학적 발견이라고 강조했던 '가치 법칙'으로 전화된다. 가치 법칙은 노동 가치의 중심성을 낳았으며, 노동 이외의 여타 인간 행위와 존재 양식을 소홀히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자아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했다고 해도,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론은 노동의 물신화로 떨어질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전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노동의 집으로 개조하려 했다는 아도르노Theodore Adorno의 비판이나, 노동을 강조하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연 지배라는 면에서의 진보만 알았지, 사회의 진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 파시즘에서 엿보이는 기술 관료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비판은 실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준다.19) 노동의 물신화 경향은 마르크스의 자연관에도 일정한 한계를 부과했다. 마르크스가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노동을 통해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비유기적 신체'로 삼는 과정, 즉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과정에서 달성된다고 보았다. 바꾸어 말해서 자연은 인간의 노동이라는 매개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자연화된 인간'보다는 '인간화된 자연'이 마르크스의 주요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노장(老莊)적 합일을 느긋하게 즐긴 디오니소스가 아니라, 문명의 진보를 위해 자연의 정복 정신(신석기 혁명에서 볼 수 있듯이, 불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주요 도구이다)에 불타는 프로메테우스가 바로 마르크스의 영웅인 것은 이 점에서 당연하다. 그것은 다시 근대 문명의 생산성과 기술 진보라는 그리고 자연의 지배라는 화두에 매몰되어 있는 사회주의 근대화론을 정서적으로 뒷받침하는 철학적 기제였다. 생산성과 진보를 추구하는 산업 사회가 초래한 환경 파괴의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보여준 침묵에 가까운 무관심, 더 나아가서는 최악의 환경 파괴를 가져 온 현실 사회주의의 자원 낭비적인 외연적 공업화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한편 아도르노와 마르쿠제 혹은 벤야민에 앞서, 노동의 물신화를 정면으로 거부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Paul Lafargue였다. 물레토의 피가 섞인 이 독특한 사회주의자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노동의 물신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노동과 놀이의 조화에 기초한 푸리에의 '매력적 노동' 혹은 모리스의 '예술가적 노동'관을 추구했다.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사랑하고 한잔 하는 일만 빼고/그리고 정말 게을리 해야 하는 일만 빼고"라는 레싱Gotthold E. Lessing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는 이 걸작에서, 라파르그는 노동에 대한 근대 문명의 맹목적인 열정이 "인간을 자유롭게 해줄 기계를 자유로운 인간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기계"로 변질시켰다고 개탄하였다. 전근대의 노동자들에게는 오히려 "땅의 기쁨을 향유하고, 사랑을 나누고, 쾌활한 게으름의 신을 찬미하기 위해 향연을 벌일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근대 기계 문명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은 본능을 무시하고 노동 숭배에 빠져 스스로 재난을 자초했다는 것이었다.20) "오! 게으름이여, 이 오랜 고통에 자비를 베푸소서! 예술과 고귀한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이 인간의 고통에 위안이 되어주소서!"로 끝맺고 있는 이 삐딱한 팸플릿의 맨 마지막 구절은 마치 디오니소스에게 올리는 제문을 연상케 한다. 부르주아지의 노동 물신화와 금욕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디오니소스적 노동 해방을 부르짖은 이 저작이 20세기의 사회주의 근대화론에 시사하는 바는 간단하다. 스탈린주의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주술에 걸린 현실 사회주의의 노동 영웅들을 구출하고, '사방이 술에 잠기는 축제'를 통해 그들의 탈진한 원기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을 동원하고 착취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자기 정체를 감추는 은폐물이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순수주의?영웅주의?엄숙주의?경건주의적 문화 풍토의 위선을 벌거벗기고, 디오니소스적 축제와 놀이 속에 노동을 녹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근대화론을 통해 노동 영웅들의 디스토피아로 전락한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를 노동 해방의 이데올로기로 재구성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근대 문명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는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디딤돌이 될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차별 공세에 맞서 자신의 진정한 역사적 성과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Ⅳ. 다시 '근대'의 지평에서

디오니소스적 해방은 노동력의 동원에 기초한 '근대'의 기획으로서의 현실 사회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성과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아테네 시민들의 창조적 여가 생활이 노예 노동 덕분에 가능했듯이, '근대 이후'를 겨냥하는 디오니소스적 해방도 '근대' 문명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를 딛고 설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해방과 인간 해방의 이데올로기로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물적 진보를 위한 대중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은, 프로메테우스적 진보를 부정하고 디오니소스적 해방만을 긍정하는 대조 어법의 논리로 이 에세이를 끌고 나가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양자가 서로 배타적일 수만은 없다. 이복 형제 제우스에게 들이댄 프로메테우스의 날카로운 반역 정신은, '근대'가 전유한 '프로메테우스적 진보' 자신을 겨냥할 수도 있다. 프로메테우스다운 반역 정신은 현실 사회주의의 규율 권력에 포섭된 프로메테우스적 영웅관을 거부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점에서 프로메테우스의 가능성은 결코 소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오니소스적 해방이 '근대' 문명이 이룩한 물적 진보를 완전히 부정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중세 길드 노동자들의 '강제된 가난의 자족' 상태로 후퇴하는 것일 뿐이다.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전략 또한 대상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안으로 들어가 그것의 결에 맞추어 해체하는 전략이다. 디오니소스적 해방은 따라서 실상 모순 어법의 논리 위에 서 있다. 요컨대 '근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것이다. 세계사적 차원에서의 '근대'를 전면 부정한다는 것은, 남과 북이 모두 '근대'를 향해 피투성이의 포복으로 기어왔던 지난 1세기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남과 북이 모두 아직까지 '근대'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본다. 당대 독일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평가를 패러디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사상 속에서 그리고 철학 속에서만 근대를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인들은 근대의 역사적 동시대인이 아니라 철학적 동시대인일 뿐이다." 한반도 전체로 본다면, 관념상의 사회주의 근대 및 자본주의 근대가 일상적 삶의 전근대적 에토스와 섞여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아직 '근대'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동시에 '근대 이후'를 겨냥해야 하는 힘겨운 이중의 목표가 우리에게 주어진 셈이다. 20세기 현실 사회주의의 정체가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밝혀진 이상, 거기에 미래의 고민을 담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령의 신년사에서 쌀밥에 고깃국을, 그것도 당장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약속하는 수준의 북에서, 기아 선상에서 죽어가는 민중들 앞에서 강성 대국을 뽐내는 북의 전근대적 사회주의에서 "사방이 술에 잠기는 디오니소스적 축제"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순수 자본주의적 '근대'를 지향하는 IMF 체제의 남에서 표방하는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가 디오니소스적 해방을 담보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조국 근대화'의 슬로건으로 치장한 박정희 체제의 규율 권력이 시장 경제와 생산성의 우상화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이다. 전근대적 에토스를 담고 있는 고유 사상에서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길을 찾으려는 일부의 노력은 인간 해방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되돌리는 퇴행으로 귀착되기 쉽다. 인간 및 시민의 권리처럼 근대 부르주아 혁명이 획득한 최소한의 성과조차 무시하는 이 조류는, 전근대의 탯줄을 끊지 못한 남과 북의 규율 권력이 만나는 접점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위험하다. 탈이념의 시대에 이념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프로메테우스적인 자기 헌신과 반역 정신이 동시에 요구된다.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길이 디오니소스적 정서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적 정신으로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의 또 다른 역설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삶의 역설이기도 하다. 역설은 일직선적 진보의 논리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프로메테우스의 직선적 해방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휘돌아가는 곡선적 해방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각주)

1) Joanna Griffiths, "'Come, My Friend,' Said Smirnoff," London Review of Books, vol. 21, No. 7, 1 April, 1999, p. 31.
2) A. and M. Kroker, Ideology and Power in the Age of Lenin in Ruins(New York, 1991), p. x.
3) 이마무라 히토시, 이수정 옮김 , 『근대성의 구조』(민음사, 1999), p. 40.
4) H. Marcuse, Eros and Civilization: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Freud(New York, 1962), pp. 146~47. 그리고 특히 8장을 보라.
5) J. V. Stalin, Collected Works, 13 vols(Moscow, 1954~55), XIII: 40~41.
6) 스탈린의 사회주의 근대화론에 대해서는 차문석, 「역사적 사회주의와 근대성: 생산성의 정치」, 『정치비평』 3호(1997년 가을/겨울호); 앨릭스 캘리니코스, 김택현 옮김, 『역사의 복수』(백의, 1993), pp. 54~86 참조.
7) 와다 하루키, 고세현 옮김 ,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창작과비평사, 1994), p. 79.
8) J. Ehrenberg, "Class Politics and the State: Lenin and the Contradictions of Socialism," Science & Society, vol. 59, No. 3(1995); S. Clarke, "Was Lenin a Marxist?," Historical Materialism No. 3(Winter, 1998) 등을 보라.
9) 게트 쉐퍼, 「비정통적 이견을 지닌 서구 공산주의자들의 10월 혁명 평가」, 『무크 비판』 2호(1997), pp. 141~43.
10) A. Zauberman, Industrial Progress in Poland, Czechoslovakia and East Germany, 1948~60(London, 1964), pp. 40, 95 and passim.
11) 제3세계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구소련의 울리야노프스키Rotislav Ulyanovsky 교수가 이끄는 오리엔탈리스트들의 다음의 저작들을 보라: R. Ulyanovsky, National Liberation(Moscow, 1978); - ed., The Revolutionary Process in the East(Moscow, 1985); - ed., Revolutionary Democracy and Communists in the East(Moscow, 1990). 나의 독해가 너무 과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울리야노프스키 그룹이 제3세계 사회주의의 전근대적 동원 체제에 대한 비판에 빗대어 소련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12) 톰 네언, 임지현 엮음,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 민족 문제」, 『민족 문제와 마르크스주의자들』(한겨레, 1986), p. 265.
13) 강정석, 「복권 열풍의 혁명가 체 게바라」, 『역사비평』 44호(1998년 가을호), pp. 355~56.
14) 홍성욱, 「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 『한국과학사학회지』 19권 제2호(1997), p. 164.
15) 임지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몇 가지 인문적 단상: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인문적 마르크스주의로」, 『세계의 문학』 72호(1994년 여름호), 3장 참조.
16) 와다 하루키, 앞의 책, pp. 57~59 참조.
17) S. Holmes, "The End of Idiocy on a Planetary Scale," London Review of Books, vol. 20, no. 21, 29, Oct. 1998, p. 11.
18) 로빈 블랙번 편저, 김영희 외 옮김, 『몰락 이후』(창작과비평사, 1994), p. 77.
19) 마틴 제이, 황재우 역, 『변증법적 상상력』(돌베개, 1981), p. 101.
20) 폴 라파르그, 조형준 옮김, 『게으를 수 있는 권리』(새물결, 1997), pp. 49, 67, 69.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