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칼 마르크스

[스크랩] 맑스와 루만의 경제시스템 개념과 현실

ddolappa 2008. 5. 17. 05:40

 

맑스와 루만의 경제시스템 개념과 현실

진보평론 제15호
하노 팔(Hanno Phal)(브레멘대학 사회학과 박사과정)

* 번역: 박장현?브레멘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1. 도입

이 글은 필자의 석사논문과 박사논문계획서에 담긴 고찰들을 요약하고 있다. 이 글이 기안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논의의 ‘방향’은 이미 정해진 상태이고, 대강의 논지도 이 글에 담겨 있는 바와 같을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토대로 현대 사회학 이론들(하버마스 Habermas 및 루만 Luhmann)을 비판하는 것이 이 글의 관심사이다. 필자는 진보평론 편집진에 속하는 남구현 교수로부터, 이 글의 주제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를 서로 연관시켜서 다루어볼 수 없겠느냐는 질의를 받은 바 있다. 필자의 현재 연구를 통하여 이런 연관관계를 직접적으로 해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이 글이 약간의 시사점은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루만의 시스템이론은, 오늘날의 지구화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부정적인 측면들을 거의 외면하고 있는 (독일에서) 가장 저명한 이론들 중의 하나이다. 이 글은 루만의 이론을 이데올로기 비판식으로 고찰할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루만의 경제개념을 집중적으로 비판할 예정인데, 루만은 경제를 사회의 자기생산적 부분시스템(autopoietisches Subsystem)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다음 차례로 루만의 사회개념 전체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작업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맑스와 대조적으로 루만은 경제시스템에게 사회시스템의 중심이라는 우선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의 ‘기능적 분화’를 대등한 부분시스템들의 독립적 분화로 보고 있으며, 이를 현대사회의 보편적 발전원리라고 설파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실재하는 시스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시스템을 루만의 경제개념으로는 해명할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필자의 주된 테제이다. 맑스가 ?자본론 강요?(MEW 42)에서 발전시킨 ‘단순순환’(einfache Zirkulation) 및 ‘매개순환’(vermittelte Zirkulation) 개념을 빌어서 보자면, 루만은 자신의 경제시스템 개념으로 ‘단순순환’ 차원만을 다루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루만은 경제의 사실상의 시스템적 성격을 다룰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루만은 가상(Schein)을 실상(Sein)으로 주장하고 있는 셈인데, 이 글을 통해서 필자는 바로 이점을 입증하고자 한다.


 

2. 분석적 시스템개념과 본질주의적 시스템개념의 일반적 구별과 사회시스템들의 일체성 문제에 대하여

경제시스템의 실재성(實在性) 및 일체성(一體性)에 대하여 고찰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스템개념의 두 가지 용어법을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첫 번째 시스템개념은 오늘날 R. 뮌히(R. M?nch)나 J. 알렉산더(J. Alexander) 등의 신(新)파슨즈주의자들이 자명한 듯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으로서, 필자는 이를 ‘분석적’ 시스템개념이라고 지칭할 것이다. 두 번째 시스템개념은 ‘본질주의적’ 시스템개념으로서, 이 개념은 예컨대 루만의 방대한 이론작업의 근저에 깔려 있는 시스템개념을 지칭한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학위논문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해야할 사실은, 루만 자신도 이 구분을 조건 없이 수용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분석적’인 시스템/환경 분화와 구체적으로 주어진 시스템/환경 분화 사이를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실재세계 바깥에서 인식의 확고부동한 근거를 구하는 ‘주관주의적’ 인식이론과 결별함으로써 또한 ‘분석적’과 ‘구체적’ 사이의 구분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적어도 상대화되어야, 즉 실재세계로 다시 연계되어야 한다(SoSy 246쪽). 이와 관련해서는 루만의 인식론을 ‘유럽의 옛 전통’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분석적 시스템개념은 대상의 구조나 존재양식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분석적 개념은 이론가들이 연구보조도구로 삼고 있는 개념으로서,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상적 유형(Idealtypus)에 비견될 수 있다. 이 도구를 사용할 경우 모든 대상들이 시스템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컨대 Detel 2000, 183쪽 참조.
이와 관련해서는 하버마스가 이른바 ‘실증주의논쟁’ 과정에서 행한 분석적 시스템개념에 대한 비판을 일별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자면 분석적 시스템개념에서 대두되는 것은 “체제도식들(Ordnungsschemata)로서, 이런 도식들은 구문론적 요건만 충족시킬 경우 얼마든지 임의로 구성될 수 있다”(AwuD, 157쪽). 이런 분석적 시스템개념은 “본래 이 개념의 사용 의도가 그러하기 때문에 실증적으로 검증될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분석적 시스템개념은 가상적인 상호연관 틀을 필수전제로 상정한 뒤에, 다시 이를 근거로 여러 가지 가설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가설들이 이론적으로 증명된다고 하더라도 그 전제의 타당성 여부, 즉 사회구조 그 자체가 전제에 상응하는 상호연관 틀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전혀 입증될 수 없다”(ibid). 여기서 하버마스는 개념과 대상 사이의 ‘구조동형성’(Isomorphie) 문제를 핵심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분석적 시스템개념에 따르자면 개념과 대상 사이의 구조동형성 여부는 원칙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문제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은 채 배제되고 있다.

루만은 자신의 대표작 ?사회시스템?의 제1장을 다음과 같은 첫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본 고찰은 시스템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SoSy 30쪽). 이 문장을 두고 볼 때, 루만의 시스템개념을 단순히 방법론적 연구보조도구로, 다시 말해서 분석적 용법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문장을 단순히 존재론적 명제로 오해해서도 안된다. 근본적 구성주의 입장에서 제기된 비판은 J. 슈미트 참조(Schmidt 1989, 30쪽).
구성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루만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론적 명제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루만은 첫 문장에 이어 즉시 후속문장을 첨부하여 의미를 제한하고 있다. “명제와 대상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되며, “명제란 명제일 뿐이고, 과학적 명제란 과학적 명제일 뿐”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의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ibid). 오해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루만이 시스템개념을 파슨즈처럼 분석적 용법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스템이론은 현실분석의 방법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편협한 해석은 방지되어야 한다.” 이처럼 루만의 시스템개념은 “시스템이 실제로 무엇인가”하는 것을 서술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현실에 견주어 명제를 검증해야할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파슨즈에 맞서서 루만은, 파슨즈에게는 신규출현적 실재(emergente Realit?t)와 개념분석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들이 해명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WdG 234쪽)
루만의 시스템개념이 가진 인식론적 및 존재론적 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의 인식론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봐야 할 것인데, 이런 작업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작업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특히 A. 나세히의 탁월한 글을 참조할 것(Nassehi 1992).
여기에서는 이 글의 목적과 관련하여 중요한 몇 가지 측면들을 짧게 일별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루만은 자신이 고안한 ‘제2차원의 관찰’(Beobachtung zweiter Ordnung)을 근거로 하여 이론가의 개념적 추상화와 “대상의 자기추상화를 구별”하고 있다(ibid 16쪽). 이 두 가지 추상화를 엄격히 구별할 경우 다음 차례로 “개념적 추상화가 어느 정도로 대상의 자기추상화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양자 사이에 어느 정도 구조비교가 존재하고 있는지”를 검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ibid). 달리 말해서, 제2차원의 관찰자는 자신이 운용하고 있는 개념현상들과 구조동형적인 현상들이 실제로 자신의 관찰대상―제1관찰차원(Beobachtung erster Ordnung)―속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관찰자(예를 들어 과학자)의 시각에서 본 시스템/환경 분화와 시스템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시스템/환경 분화를 구분할 수 있다”(ibid 25쪽).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기준거’(Selbstreferenz) 개념인데, 여기서 ‘자기’란 “어떤 요소, 어떤 과정, 어떤 시스템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 자체’라 함은 관찰자들의 첨삭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ibid 58쪽). 경제시스템에 관한 동일한 주장이 WdG 52쪽에 담겨 있다.
이런 식으로 루만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데카르트(Descartes)식 이분법을 깨고 있으며, 양자 사이의 연속성을 설정하는 역량을 선험적 인식주체가 아니라 각 시스템에게 부여하고 있다. 즉 “자기준거적 주체와 자기준거적 객체를 구조동형적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것이다(SoSy 595쪽).

객체 영역 차원에서 사회시스템들이 존재하고 기능하는 양식을 좀더 분명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70년대 초에 하버마스와 루만 사이에 이루어진 논쟁에서, 하버마스가 시스템개념을 비판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다(Habermas 1971/1982, 375쪽 이하 참조). 하버마스에 따르면, 사회영역에서 시스템개념을 단순히 분석적 용법 이상으로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 조건들은 물리영역 및 생물영역에서 사용되는 시스템개념과 구별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들이다. 사이버네틱스 모델을 ‘사회’를 분석하는데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영역의 시스템과 환경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스템의 경계선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정한 시간대에 시스템의 당위상태를 규정하는 목표치를 경험적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시스템의 당위상태 및 목표치 확인’). 예컨대 생물학에서는 생물체와 함께 경험적으로 측정 가능한 매크로시스템이 주어져 있다. 여기에는 사망이라는 경험적 사건이 있어서, 이를 기준으로 언제 시스템이 종료되고 언제 새로운 시스템이 시작되는지를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따르자면, 사회과학의 객체 영역에서는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이런 사실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정적으로 관찰되는 사회시스템의 실존 전제조건이 없다는 말이다. 그 대신에 사회시스템의 경우에는 역사적 및 문화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화적 자기이해의 규모가 문제로 대두된다. 만약 사회시스템들이 이처럼 자신의 실존 전제조건을 스스로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회시스템들의 경계, 당위상태, 그리고 목표치는 독립적 ‘자료’의 형식으로 단순하게 기록될 수는 없는 일이다(ibid 376쪽 이하).
루만도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루만도, 하버마스처럼, 사회시스템의 경우에는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의미의 경계가 기준으로 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생물체들은 생명을 토대로 하여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지만, 사회시스템들은 의미를 토대로 하여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사이버네틱스 모델들은 행위자들의 의미연관체제를 관찰 불가능한 사실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하여 루만은 현상학적 전통(슈쯔 Sch?tz?후설 Husserl)으로부터 유래하는 의미개념을 사이버네틱스 모델에 도입하여, 이 개념을 기능주의 테두리 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시키고 있다. 루만에 따르자면 사회시스템들은 오로지 의미의 형식으로 복잡성을 해결하고 자기 준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사회시스템들에 있어서 의미란 세계형식으로 된다”(Luhmann 1984, 95쪽). 의미개념을 기능주의 사회학에 통합해낸 것은 기능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루만의 ‘기발한 묘수’로 인정되고 있다. 이 점은 특히 슈쯔와 파슨즈 사이의 서신교환이 보여주듯이, 이 두 사람이 그들의 이론이 서로 통합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Sch?tz/Parsons 1977 참조).

이로써 우리는 본질주의자들이 사회시스템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부터 루만의 경제시스템이 가진 특수한 성격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3. 루만과 맑스의 경제시스템 개념: 어떻게 자기생산 시스템으로서의 화폐경제가 가능한가?

1) 루만의 경제시스템

‘자기생산’(Autopoiesis)을 정의함에 있어서 루만은 생물학자 마투라나(Maturana)의 정의를 빌어쓰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자면, 자기생산이란 시스템이 자신의 구성요소들을 통하여 자신의 구성요소들을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구성요소들은 자기생산되는 시스템 속에서 소정의 기능들을 수행한다(WdG 49쪽 참조). 이때 사회란, 위에 서술된 것처럼, 의미를 토대로 하는 자기생산 시스템으로 파악되는데, “의사소통을 자기생산의 구성원리로 삼고 있는 시스템”은 사회밖에 없다(ibid 51쪽). 경제시스템은 사회의 부분시스템으로써 사정이 다르다. 경제시스템은 의사소통이 수행되고 있는 사회 내부적인 환경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것은 만약 의사소통을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면 경제시스템과 그것의 환경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부분시스템이 자기생산 시스템으로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만 유효하고 환경에게는 유효하지 않은 특유한 구성원리를 필요로 한다. 경제시스템의 경우에 루만은 ‘지불행위’를 시스템을 구성하는 ‘단위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지불행위는 자기생산 구성요소가 필요로 하는 모든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지불행위는 오직 지불행위를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지불행위는, 경제의 자기생산을 형성하는 반복 순환적 연관관계 속에서, 지불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 경제는 부단히 갱신되는 지불행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불행위가 더 이상 수행되지 않는다면 경제는 더 이상 분화된 시스템으로 존속할 수 없게 된다. 경제의 기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부단한 자기갱신을 강제 당하고 있다”(ibid 53쪽, 그리고 58쪽도 참조할 것). 여기서도 루만이 말하는 일체성은, 위에 이야기된 기본입장과 마찬가지로, 단지 분석적 또는 분류학적인 인공물이 아니라, 경제시스템 그 자체 속에서 자기관찰 및 자기서술 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가리킨다(WdG 76쪽).
2) 맑스의 경제시스템

이제 루만이 가진 경제시스템의 자기생산 개념을 맑스의 생각과 비교해 볼 차례가 되었다. 이를 통하여 필자는 위에 제시한 필자의 테제를 입증할 것이다. 루만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경제의 자기 준거적이고 자기 재생산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테제였다. 문제의 핵심은, 맑스가 제안하는 단순순환과 매개순환의 구분을 토대로 루만의 이론을 판단해 볼 때, 과연 루만의 경제구성요소, 즉 지불행위의 ‘부단한 자기갱신 강제’가 타당한 주장인가라는 점이다. 이 점을 규명하기 위하여 필자가 여기서 설정하려는 두 번째 테제는 다음과 같다. 맑스가 ?자본론 강요?, ?자본론?제1장 가치형식분석, 그리고 ?정치경제학비판? 등에서 보여주고 있는 경제범주들의 변증법적 발전은 경제시스템으로서의 자본가치의 생성 및 자기생산에 대한 서술 및 비판이다. 이 테제는 독일에서 ‘새로운 맑스 읽기’의 흐름 속에서 이미 다양하게 제기되었지만, 루만과 연관시켜 자세하게 논의된 적은 없다. 루만과 연관시켜 맑스의 화두를 다시 정식화해보면 이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화폐경제가 자기생산 시스템으로서 가능한가?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다. 필자의 의도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바탕으로 더 나은 시스템이론을 구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맑스가 루만과는 달리 경제시스템의 실재적 일체성을 더 잘 추론해낼 수 있고, 경제시스템의 자기생산적 성격을 더 잘 입증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필자가 늘 함께 고려하고 있는 사실은―비록 이 글에서 함께 다루지는 못하지만―맑스에게 있어서는 경제의 시스템적 성격이 결코 평온하고 조화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생산관계가 생산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초월적 존재로 되는 위기로 점철된 과정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과정이 사회를 계급사회로 분열시킬 수밖에 없는데 이 점에 대하여 루만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 테제를 일단 전제로 설정한 뒤, 이 글의 후반부에서 자세하게 입증할 것이다.

우선 지금부터 전개될 논의방향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맑스는 자본(본래는 자본가치)를 “모든 단계를 거쳐 가는 주체, 운동하는 단일체, 순환 및 생산의 과정적 통일체”로 정의하고 있다(MEW 42, 521쪽). 이것은 경제시스템의 단위가 지불 및 화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 차원에 선행하는 가치 차원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반하여 루만의 생각은 전적으로 지불 및 화폐의 차원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그러면 일단 단순순환을 살펴보자. 단순순환을 맑스는 “부르주아 사회(b?rgerliche Gesellschaft)의 표면에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순환이 표면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지속적으로 매개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맑스의 설명이 이어진다. “단순순환은, 그 자체를 두고 보자면, 이미 전제되어 있는 양단(兩端), 즉 상품과 화폐를 매개시켜준다. 그렇지만 단순순환이 양단의 전제조건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순환은 전체 매개과정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며, 이런 의미에서 단순순환은 매개되어진 현상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단순순환의 직접적 존재는 실은 순전히 허상에 불과하다. 단순순환은 자신의 배후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다”(MEW 42, 180쪽). 이 맥락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순환의 직접적 존재가 실은 순전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H. 라이헬트(H. Reichelt)가 거듭 지적하는 바에 따르자면, 맑스는 여기서 헤겔이 존재논리로부터 본질논리로의 이행을 서술할 때 사용한 표현양식들을 거의 단어도 바꾸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칼 맑스의 자본개념의 논리적 구조 최근 개정판 서문(Reichelt 2001, 10쪽 참조), 그리고 더 자세하게는 Reichelt 2002.
라이헬트에 따르자면, 헤겔에게 있어서는 본질로 이행하면서 존재논리의 전체영역이―직접적 자기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맑스도 ‘단순순환을’, 실은 생산과 순환을 포괄하는 자본가치의 매개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영역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앞에서 루만의 ‘부단한 자기갱신 강제’라는 공식이 인용된 적이 있다. 이 공식에 따르자면, 지불행위가 끊임없이 새로운 지불행위를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경제시스템은 시스템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게 되고, 이에 따라 사회시스템과의 차별성이 사라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소멸되게 된다. 루만의 공식에 대비시키면서 ‘단순순환’에 대하여 맑스가 이야기하는 구절을 하나 더 인용해보자. “순환은 그 자체 내에 자기갱신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순환의 구성요소는 순환 자신에 의하여 비로소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환 이전에 이미 전제로 설정되어 있다. 마치 연료가 끊임없이 불길 속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것처럼, 상품들이 끊임없이, 더구나 외부로부터 순환과정 속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하지 못하면 순환은 순환으로서의 차별성을 상실하고 무차별성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MEW 42, 179쪽 이하).

이제 루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루만이 경제를 단순순환으로 파악한다면―루만에게는 경제적 가치개념 또는 자본개념이 부재하기 때문에 달리 파악할 수가 없다―경제의 자기생산이라는 루만의 이론적 발상은 경제시스템의 실제적 자기재생산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루만은 지불행위를 경제시스템의 근본적 구성단위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 지불행위도 또한―맑스가 이야기하는 단순순환 차원에서 가치가 그러하듯이―무차별성 속으로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스템을 구성하는 단위로서 지불행위가 가진 형식적 요건이 상실되어서 무(無)로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주장도 가능하다. 루만은 경제시스템 이론의 구상을 실재하는 허상에 근거하고 있다. 맑스의 설명은 이러하다. ‘교환시스템’, 즉 단순순환이 그 토대, 즉 자본으로부터 분리된 채 “표면에 현상하고 있는 대로만, 마치 독자적인 시스템인 양” 고찰되기 때문에, 이 시스템은 순전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허상은 ‘필연적인 허상’, 즉 관찰되어진 객체의 구조 그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허상이다(MEW 42, 417쪽).

3) 루만의 소통매체로서의 화폐와 맑스의 가치형식으로서의 화폐

앞에서 필자는 가치 차원을 고려해야 할 필연성을 몇 차례 암시한 바 있다. 이제 루만과 맑스에게 있어서 화폐이론이 가진 논리적 위상을 살펴보고, 이와 함께 가치와 화폐의 연관성에 대하여 고찰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이 작업은 곧 이어 설정될 테제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파슨즈, 하버마스 그리고 루만은 화폐가 소통의 일반적 매체라는 구상을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시킨 바 있다. 루만의 화폐매체 개념을 파슨즈의 그것과 구별하는 문제는 WdG 68쪽 및 230쪽 참조.
이 구상은 80년대 및 90년대에 상당히 호경기를 누렸지만, 그 동안 이에 대한 비판도 점차 늘어났다. 지금으로서는 화폐를 소통매체로 보는 관점이 기껏해야 화폐가 지닌 교환수단 및 지불수단으로서의 속성을 파악하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가 널리 공유되고 있다(Deutschmann 2001, 68쪽, Barben 2001, 122쪽). 이에 반하여 화폐가 지닌 가치저장 기능 및 자본으로서의 기능을, 소통매체로서의 속성에 근거하여, 엄밀하게 규정하는 작업은 해결 불가능한 난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Ganßmann 1986, Reichelt 1998, Riese 1998 참조. 루만의 화폐개념을 발전시켜 자본을 화폐가 구조적으로 접속된 것으로 파악하려는 D. 배커의 시도를 필자는 차라리 해결불가능성 또는 파생문제의 표출로 해석한다(Baecker 2001, 313쪽 참조). 그러나 이와 관련된 상세한 논의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학자 도이취만은 화폐를 “오늘날 사회학의 허점”이라고 말하고 있다(Deutschmann 2001, 16쪽). 이점에 있어서는 사회학과 경제학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학자 H. 리제(H. Riese)는―그리고 점점 더 많은 수의 이론가들이―화폐를 “국민경제의 마지막 수수께끼”라고, 그리고 “심층부에 깔려 있는 사유틀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Riese 1998, 48쪽). 필자는 이 입장에 공감하면서, H.-G. 박하우스(H.-G. Backhaus)처럼 이 입장을 다시 한번 극단화하고자 한다. 박하우스가 거듭 인용하고 있듯이, 맑스에 따르자면 “자본주의 과정에서는 모든 것들이, 심지어는 가장 단순한 구성요소조차도… 이미 거꾸로 뒤집어져 있다”(MEW 26.3, 498쪽). 만약 맑스의 이 주장이 옳다면―바로 이것이 다음 번 테제인데―화폐의 수수께끼는 화폐이론 차원에서는 풀 수 없으며, 화폐이론에 선행하는 가치 차원을 고려해야만 풀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소통매체로서의 화폐가 가진 수수께끼도 마찬가지이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예컨대 ?자본론? 앞부분의 귀신 쫓기를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Hanfer 1999, 138쪽). 이곳에서 맑스는, 헤겔의 본질논리학에 등장하는 성찰규정들을 원용하여, 자신의 이론에 핵심적인 이중화 정리(二重化 定理, Verdoppelungstheorem)를 서술하고 있다(상품의 상품과 화폐로의 이중화). 라이헬트가 상술하는 바에 따르자면, 맑스의 서술은 불완전하고 미해결인 상태로 남아 있으며, 따라서 비판적인 새 구상을 요구한다(Reichelt 2002 참조).

논의가 여기까지 전개되어 왔으므로, 이제 경제범주들을 단순히 기능주의적으로 고찰하는 것에 맞서서 발생론적으로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적시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발생론적방식과 기능주의적방식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Peters 1993, 399쪽 참조.
발생론적 방식은 맑스의 저작 속에서도 근접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맑스는 화폐를 언어에 비유하여 개념규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데, 이같은 비유는 화폐를 소통매체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전형적이다. “화폐를 언어와 비교하는 것은 오류이다”(MEW 42, 96쪽). 이어서 맑스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그의 논거는 올바른 길을 가리키고 있다. “관념들이 언어로 전환된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관념들의 고유성이 해소되며, 관념들의 사회적 성격은 관념들 바깥에, 즉 언어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마치 가격이 상품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관념들은 언어와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관념들이 순환되고 교환될 수 있기 위하여 모국어로부터 타국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앞서 말한 것과 유사한 현상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때에도 유사성의 근거는 언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타국어라는 데 있다”(ibid). 여기서 맑스의 취지는 분명하다. 화폐와 언어 사이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사성이 있고, 그 유사성을 지적하는 것이 전적으로 오류는 아니지만, 그러나 문제는 양자의 종차(differentia specifica), 즉 화폐와 언어 사이의 차별성을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혹자는, 객관적 가치차원을 근거로 삼아 주관주의적 경제학자들을 비판할 수 없듯이, 같은 이유로 루만도 비판할 수 없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반박은 일리가 있다. 루만은 용어법상 가치개념을 일관성 있게 순전한 주관주의적 범주로, 종국적으로는 (한계효용 등등처럼) 심리적 범주로 사용하고 있다(WdG 55쪽, 238쪽 참조). 이 점은 그가 “등가가치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할(WdG 258쪽) 때뿐만 아니라, “재화 및 용역의 실제가치”를 이야기할 때에도 그러하다(ibid). 그렇지만 루만이 “의미구성요소들은 모든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활용 가능하다”(WdG 188쪽)라고 말할 때에도 이점이 타당할까? 오히려 이 지점에서 루만이 자신의 주관주의적 원칙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구체적으로는 규정할 수가 없는, 그러나 어쨌든 객관적인 ‘양’(Quantum)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체가 불분명한 질(Qualit?t)의 불특정한 양을 이야기한다면, 종국적으로는 객관적인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로서는 그 객관적 가치를 상세하게 규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규정하려는 노력을 회피할 수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많은 경제학자들이 주관주의에 입각하여 표면적으로는 객관적 가치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러나 모든 거시경제학자들이 뒷구멍으로는 객관적 가치개념을 다시 이론 속에 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은 H.-G. 박하우스가 오랜 시일에 걸쳐 이루어낸 업적이다. 박하우스에 따르자면, 이른바 ‘정밀한’ 경제학이 신봉하는 ‘양’이라는 것이 전혀 물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거나 ‘지각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거기서 다루어지는 것은 언제나 유사량, 유사용적, 유사집단, 유사용량, 유사순환량이다. 그리고 수량경제학의 관점에서는 측량대상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규정되는지를 전혀 대답할 수 없다. 측량대상들은 단지 비유 또는 허구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으면 이른바 유사실재물인가? Backhaus 2002, 115쪽.
이에 따라 경제시스템의 단위 규정이 루만 이론의 허점으로 입증되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학이 다루는 대상의 일체성을 구성하는 일은 루만 자신에게 있어서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일로 보인다(WdG 75쪽 참조).



4. 맑스의 ‘경제시스템의 자기생산’의 단위로서의 가치: 분석적/본질주의적 시스템 개념의 구분을 배경으로 살펴본 맑스의 단순순환 및 매개순환의 방법론적 기능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 이어서 다음 사항들이 간략하게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맑스는 ‘단순순환’과 ‘매개순환’의 구분을, 경제시스템의 차원에서, 다름 아닌 분석적 시스템개념과 본질주의적 시스템개념의 구분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둘째, 이 연관관계는 결코 필자에 의하여 임의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한편 경제시스템의 자기재생산 단위를 둘러싼 문제에 대한 맑스의 해결책이 간략하게나마 소개되어야할 것이다. 놀랍게도, 필자가 알기로는, 시스템의 실재성 및 통일성을 둘러싼 문제를 맑스의 두 가지 순환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관지어서 상세하게 논의한 글이 전무하다. 필자는 라이헬트가 지도하는 세미나들을 통하여 이 작업에 대한 기본구상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H.-G. 박하우스의 글들 속에서도 경제시스템의 실재성을 비슷한 식으로 파악하는 내용을 발견하였다(예컨대 Backhaus 2000 49쪽 이하).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필자가 알기로는 전무하다.
항상 맑스는 사물의 논리(Logik der Sache)와 논리의 사물(Sache der Logik)을 구분하고 있다. 이때 사물의 논리란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을 가리키며, 논리의 사물이란 사물을 “순전한 사유상의 연관관계”로 전환시켜 버릴 수도 있는 절차를 말한다(MEW 13, 620쪽). 맑스의 헤겔주의가 헤겔의 비판적 철학 뒤편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동구권의 정통 맑스주의와 달리 변증법을 무조건 존재의 보편적 운동원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물의 논리와 논리의 사물을 구분하는 것을 얄팍한 존재론적 명제로 취급할 수는 없게 된다. 이런 점을 유의하면서 이제 맑스가 ‘단순순환’ 차원에서 경제시스템의 통일성을 규정하는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자. (필자는 앞서 루만이 제시한 경제시스템의 자기생산 개념과 대비시키기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용부를 고딕체로 강조하고자 한다.)

(1) “단순순환은 일련의 동시적인 또는 연속적인 교환들로 구성된다. 이 교환들을 통일적 순환으로 간주하는 것은 실은 오로지 관찰자의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MEW 42, 537쪽).

(2) “단순순환이란 실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순환, 즉 직접 지각된 순환이지, 순환 그 자체로 설정된 순환이 아니다. 특정한 교환가치가―바로 그 실체가 특정한 상품이라는 이유 때문에―처음에는 화폐로 되고 이어서 다시 상품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화폐와 교환되는 것은 실은 언제나 불특정한 교환가치들, 불특정한 상품들이다. 이때 유통 또는 순환이란 상품과 화폐의 교환이 단순히 반복되는 것일 뿐이지, 현실상의 출발점이 다시 도착점으로 될 필요는 없다”(MEW 42, 185쪽).

단순순환의 차원에서 맑스는 순환의 통일성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통일성에 불과하다고, 즉 결코 경제시스템 그 자체의 통일성이 아니라고 파악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이로부터 맑스는, 단순순환이란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순환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전혀 순환이 아니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이 두 번째 주장은 위에 든 두 번째 인용부의 마지막 문장에 담겨 있다. 단순순환 차원에서는 특정한 출발점으로부터 출발해서 다시 이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사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에 들 맑스의 두 인용구절이 보여주듯이, 자본순환의 차원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1) “화폐순환은 무한히 많은 점들에서 출발하고, 무한히 많은 점들로 되돌아갔다. 여기서는 도착점이 결코 출발점으로 설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의 순환에 있어서는 출발점이 도착점으로, 그리고 도착점이 출발점으로 설정된다. 자본가가 다름 아닌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다. 화폐순환은 필연적으로 화폐 속으로 소멸하는데, 이것은 화폐가 운동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의 순환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항상 새로이 점화하며, 스스로를 다양한 계기들로 분화한다. 자본의 순환은 지속적 자기운동체이다. 화폐순환의 측면에서 본 가격설정은 순전히 형식적이었다. 왜냐하면 가치가 화폐순환과 무관하게 미리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의 순환은 형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가격을 설정한다. 왜냐하면 자본순환은 가치를 설정하기 때문이다”(MEW 42, 423쪽).

(2) “자본의 경우에는, 다름 아니라 자본이 순환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때문에 비로소 교환가치가 교환가치로 설정된다. 자본은 순환과정 속에서 자신의 실체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실체들 속에서, 상이한 실체들의 총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 자본은 순환과정 속에서 자신의 형식규정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모든 실체들 속에서 자기자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자본은 언제나 화폐인 동시에 언제나 상품이다. 자본은 언제나 상호 전환되면서 순환하는 두 구성계제, 즉 화폐와 상품, 양자이다. 자본이 이러할 수 있다는 것은 자본 자신이 다름 아닌 교환의 자기갱신적 순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자본은 단순교환가치의 순환과 구별된다”(MEW 42, 185쪽).
“?자본론 강요? 초두에 맑스는 화폐순환을 혈액순환에 비유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화폐를 혈액에 비유하는 것은―순환이라는 단어가 그럴 수도 있게 만들지만―로마제국의 메네니우스 아그리파가 지주귀족을 게으른 위장에 비유한 정도의 타당성을 가질 뿐이다”(MEW 42, 96쪽). 그러나 뒤에서 자본의 순환을 다루는 맥락에서는 맑스의 평가가 사뭇 달라진다. “만약 혈액순환에 비유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형식뿐인 화폐순환이 아니라 내용이 풍부한 자본순환이었다”(MEW 42, 424쪽).

이런 인용부들을 통해서 볼 때―앞서 3.3 장 말미에서 논의된 내용에 다시 연결시켜서 말한다면―맑스는 경제시스템의 순환적, 자기생산적 일체성 문제를 화폐 차원에서는 합리적으로 규명할 수 없고, 오직 자본가치 차원에서만 규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맑스에게 있어서 자본가치란 “상이한 계기들을 아우르며, 자신을 유지하고, 자신을 늘려나가는 가치”로서, 상품과 화폐를 자신의 운동형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MEW 42, 520쪽). 상품과 화폐는, 비록 이론이 이들을 독자적인 요소들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교환행위가 끝나면 자신들의 형식규정을 상실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자기생산적 성격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포괄적인 가치(bergreifender Wert)라는 개념은 자기생산적 성격을 해명할 수 있게 한다.


5. 고려해야할 방법론적 근본문제들: 맑스의 정체경제학 비판에 있어서 개념과 현실의 관계

지금까지 이 글은 맑스에 기대어 루만의 경제시스템의 일체성 개념을 비판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왔다. 비록 이 방법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하더라도, 좀더 상세하고 근본적으로 고찰해야 할 일련의 문제들이 남아 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신성불가침의 절대 진리로 전제하는 방법은 허용되기 어려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대두되는 문제는, 지금까지 맑스에게 가해진 다양한 비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치이론 일반의 타당성이나 양적으로 파악된 가치-가격 전환문제 또는 가치이론을 경험적 현상에 대한 분석에의 구체적 적용에서 대두되는 난제들을 둘러싼 여러 가지 비판들이 속한다. 이러한 각론 차원의 비판들에 대해서는 장차 필자의 학위논문에서 자세하게 논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은 그보다는 좀더 원론적인 차원에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맑스에 대하여 제기된 일련의 원론적인 반박들에 대하여 간략하게 논의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맑스에 대한 원론적인 반박들은 모두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과 현대 사회의 객관현실 사이의 관계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다. 가치 개념을 (그리고 ‘추상적 노동’,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 ‘가치의 대상성’ 등의 다른 핵심적인 개념들을) 도대체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또한 여기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이 글에서 필자는 맑스가 내세우는 경제시스템의 일체성으로서의 ‘가치’ 개념을 편의상 자명한 것으로 전제해 왔다. 이제 이 ‘신비한 실체'(Entitaet)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하게 논의할 차례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제일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맑스의 유물론이 가진 독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예나 지금이나 완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말은 이른바 정통주의자들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추출해낸 사적유물론식 변증법(HISTOMAT)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이 변증법이 더 이상 시의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새로운 맑스 읽기’에서 전반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필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구사하고 있는 변증법과 헤겔의 변증법 사이의 연관관계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정통주의 유물론적 변증법(DIAMAT)은 “사유법칙과 존재법칙의 통일성"이라는 추상적인 공리를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는데(Kopnin 1973, 221쪽), 아도르노(Adorno)는 이런 변증법을 ”동구권의 공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지칭한 바 있다(Aspekte 15쪽). 이미 인식론적으로 시의성을 상실한 정통주의를 따르자면, "물질의 객관적 변증법"은 "모든 대상들에 내재된 보편적인 운동법칙"이며(Kopnin 1973, 225쪽), "주관적 변증법"으로 지칭될 수 있는 사유법칙은 객관적 변증법의 반영에 다름 아니다(ibid 220쪽). 그런데 정통주의는 정치경제학에 적용되는 ‘변증법적 방법’의 타당성을 사회적 상호행위의 ‘구조’로부터 내재적으로 입증해내는 것이 아니라, 방금 언급된 존재론적 전제들(모든 존재에 실재하는 변증법)로부터 형식논리적으로 연역해내고 있다.

부당한 존재론적 전제를 배제하면서도 맑스의 방법과 사회적 현실 사이의 상응관계를 어떻게 규명할 수 있을까? 문제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 보자. 맑스 자신의 입을 빌자면, 그는 ?자본론 강요?에서 ‘자본의 일반개념’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만약 가치, 추상적 노동 등 맑스의 근본개념들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배제한다면―맑스가 자본의 일반개념을 바탕으로 전개시켜나간 명제들과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 사이에 적실한 상응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형식적인 구조를 두고 보자면 맑스가 경제적 범주들을 전개시켜나간 것과 정통 관념주의자들이 시스템개념을 전개시켜나간 것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다. 분명한 것은 맑스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해답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라이헬트의 말을 들어보자. ‘자본의 일반개념’에 대한 맑스의 서술은 단지 내적 필연성을 가정하려는, 그리고 자본을 논리적-내재적 개념으로 규정하려는 이론적 구성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당할 여지가 크다. 이 점은 특히 맑스가 어떤 실질적 근거에 입각하여 자본의 실재성을 ‘자본의 일반개념’으로 번역하는지에 대하여 전혀 해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Reichelt 2001, 10쪽).
특히 “헤겔의 변증법을 뒤집는다”라고 하는 매우 모호한 암시가 방법론적으로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 문제에 대한 합의점이 도출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공식이 오히려 큰 혼동을 빚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공식은 헤겔의 변증법이 ‘거꾸로 뒤집힐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가정을 담고 있는데, 이 가정은 실로 의문스러운 가정이다. Institut f?r Methodenkritik 2002 참조.
만약 헤겔의 전제들이 타당하지 않다면, 이 전제들로부터 도출된 헤겔의 서술방법 및 전개방법을 맑스가 원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하여 아도르노의 제자 크랄(Krahl)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헤겔에 기대고 있는 맑스의 이론을 다루는 데 있어서 “헤겔의 범주들을 그대로 맑스의 이론 속으로 우겨 넣”거나, 그렇지 않으면 범주적 실재성을 “헤겔 철학 바깥에서 실제로 검증하는”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Krahl 1984, 178쪽). 만약 두 번째 경우가 아니라면 “맑스는 완전한 관념론자가 되어버린다. 이와 함께 그이 유물론 전체가 술을 빚으려다 식초가 된 꼴이 된다”(ibid). 이와 마찬가지로 바우만(Baumann)도 “가치비판이라는 절대지”(絶對智 absolutes Wissen)를 비아냥거리면서, 헤겔맑스주의(Hegelmarxismus)를 “가치-신학”(Wert-Theologie)이라고 지칭하고 있다(Baumann 1999, 4쪽). 헤겔맑스주의는 “인식과 대상 사이의 구분 문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에게 있어서 개념과 대상은 척도인 동시에 시험 대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맑스에게 적용되면서 “항상 마치 시험을 마친 의식내용 그 자체인 듯”이 되어버리는데, 이것은 “철저한 관념론에 유물론의 탈을 씌우는 꼴”이라는 것이다(ibid). 이런 비난들과 비슷하게 사회학자 클라우스 홀쯔(Klaus Holz)도 변증법 논리에 담긴 순환논리를 흠잡고 있다. 변증법은 출발점이 “도착점을 미리 포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운동과정 중에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들을 계산에 넣을 수 없다”(Holz 1993, 153쪽). 이 점을 홀쯔는 자본론의 헤겔맑스주의식 해석구조에서 확인하고 있다. 이 해석은 “동일성 논리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상품개념을 ‘자본’의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한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상품형식은 모든 모순들을 ‘잠재적’ 또는 ‘무매개적’으로 자기자신 속에 내포하고 있다. 이어지는 서술은 이 모순들을 전개 또는 매개시켜야 한다.… 뒤에 가서 발전된 자본개념이 드러내게 되는 모든 현상들이 이미 가치개념 및 상품형식의 모순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ibid 152쪽). 홀쯔는 자신의 비판을 근거로 일관성 있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만약 ‘자본론’이 유물변증법적 논리와 방법에 따라 쓰여졌다고 가정한다면, ‘자본론’은 맑스의 본의에 어긋나게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ibid 35쪽). 이에 따라 홀쯔는 역사적-발생론적 행위이론이 병행된 구조주의적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비난들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가지 길은 필자의 학위논문 속에서 자세하게 논의될 것인데, 여기서 그 윤곽만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1) 박하우스에 따르자면, 맑스의 방법론에 대한 판단, 즉 ”맑스가 변증법의 공식을 사물 속으로 우겨 넣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물로부터 읽어 내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방법론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존재론적 근본가정에 의거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그 대신에 이 문제를 실용주의(Pragmatismus)식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우선 방법론을 둘러싼 모든 논란들을 한 가지 문제로 압축할 필요가 있다. 그 한 가지 문제란 사회의 현실 속에 과연 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양식에 상응하는 것이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헤겔의 논리에 익숙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것을 부정하는 사회연구자들의 정신현상 속에도 과연 변증법적 운동양식이 담겨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Backhaus 1985, 각주 74, 66쪽). 만약 필자의 작업이 루만과 하버마스의 경제시스템 개념 속에도 ‘변증법적 논법’ 또는 적어도 그와 유사한 구성법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데 성공한다면, 첫 번째 접근법을 위하여 몇 가지 통찰을 제공하는 셈이 될 것이다.
(2) 맑스의 형식전개가 단지 사유상의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째 길은 좀더 내재적인 분석을 수행하는 길로서, 맑스가 주장한 “현실운동의… 모순”(MEW 26.3, 489쪽)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규명하는 길이다. 맑스는 현실운동과 사유운동의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보았으며, 현실운동의 존재형식이 무엇이라고 보았는가? 아마 이 길은 정치경제학 범주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맑스가 남겨놓은 매우 드문 언급들을 추적하는 길이 될 것이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범주들을 “존재형식들(Daseinsformen), 현존규정들(Existenzbestimmungen)”(MEW 42, 40쪽, 여기에 대해서는 루카치가 처음으로 주목) 또는 좀더 정확하게 “객관적인 사유형식”(MEW 23, 90쪽)들로 규정하고 있다. 맑스에게 있어서 정치경제학 범주들은 이론가들의 분석적 구성물 이상이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맑스가 독일 관념론으로부터 따와서 ?강요?에서 지나칠 정도로 사용하고 있는 ‘설정’(Setzung)이라는 개념도, 이론가들의 개념설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념규정들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과정을, 즉 개념규정들이 ‘세계-속으로-설정’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된다. 개념규정들(예를 들어 가격형식, 화폐형식, 임금형식 등)은, 행위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행위조건들로서, 라이헬트가 주목하듯, ‘실재하는 범주’이다. 오로지 이런 범주들 속에서만 행위자들은 ‘사회와의 물질대사 과정’, 즉 필수적인 생산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최근에 박하우스는 ‘경제차원’을 심리차원과 물리차원 사이의 독자적인 ‘중간차원’이라고 성격 지은 바 있다. 그리고 라이헬트는 ‘가치의 효력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실체론을 피하면서도 (리카도식이 아니라 맑스식의) 노동가치론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어쩌면 필자의 작업도, 루만의 ‘의미’와 맑스의 ‘가치’ 사이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이런 노력들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6. 간략한 전망

필자가 보기로는, 위에 언급된 원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아도르노가 말하는 “사회학 범주 비판”(LdS 136쪽) 기획에 새로 착수할 수 있을 텐데, 이 기획은 현재 거의 잊혀져버린 상태이다. 이 기획이 내포하고 있는 테제는 그 윤곽만 간략하게 그려보자면 이렇다. 인식의 대상, 즉 사회의 ‘구조’는 대상을 성찰하는 이론가들이 사용하는 범주들을 사전 구성하는 경향이 있어서, 잘못된 범주들은 ‘대상’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 유물론적 인식비판의 한 변형인 이 테제를 구체적으로 적용할 경우, 아도르노와 존-레텔(Sohn-Lethel)에 의하면, “관념론을 원용하여 만든 인식도구로 거꾸로 관념론 그 자체를 허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식의 논리를 역사의 산물로 입증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아도르노가 1937년 5월 21일에 호르크하이머에게 보낸 편지, Horkheimer GS 16). “통일적 범주화의 배후에 숨어 있는 비밀”은 사회의 ‘사실근거(Realgrund)’(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일체화, 즉 가치를 통한 일체화)에서 찾을 수 있다(Aspekte 23쪽). 이와 마찬가지로 이론도, 이론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채 역사적으로 규정된, 일종의 표현행위로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리구조의 효력문제에 대한 이런 유물론적 ‘해법’을 따르자면, 모든 이론들의 진리청구권은 역사적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입증될 수 있는데, 이 말은 관념주의적 이론뿐만 아니라 비판주의적-합리주의적 이론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학 범주 비판 기획을 루만과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루만은 선험적 입증의 객관성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이가(二價) 논리학의 한계도 지적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점과 관련해서는 ?사회시스템?의 마지막 두 장을 참조(SoSy 593-661).


아마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맑스 이론을 근거로 삼아 경제시스템이 ‘실재하는 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할 것이고, 경제시스템이 루만이 주장하듯 사회의 한 ‘부분시스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은 사회적 - 객관적 존재형식들의 실재하는 범주들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존재형식들은 오로지 인간들의 행위를 통하여 생산되는 것이지만, 또한 언제나 행위자들에게 전제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 입증이 되고 나면 이를 바탕으로 정통적 형태로는 쓸모가 없게 된 토대-상부구조 도식을 슬기롭게 개조하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작업을 위한 첫 걸음에 불과하다.

<참고문헌>
(괄호 속에는 본문 중에 사용된 약자 또는 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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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목련꽃이 질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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