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론/문화의 이론들

[스크랩]문화연구와 스튜어트 홀

ddolappa 2008. 12. 13. 00:04

 

다시 들여다보는 '문화연구'1)

 

 

원용진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문화연구를 다시 들여다 볼 필요성을 요즈음처럼 강하게 느낀 적이 있을까. 필자가 몸담고 있는 언론학에서의 문화연구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 구태만을 반복한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언론학은 문화연구를 제도화하는 데까지 이르지도 못했고, 이를 공식적 패러다임으로 인식시키는데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문화연구를 매체 연구에 활용한 맥락이 서구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언론학이 문화연구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던 때는 문화연구 패러다임에서도 소위 수정주의 패러다임이 강세를 떨칠 즈음이다. 영국의 문화연구 수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즈음해서 소위 ‘포스트 주의’ 인식론이 세계를 휘감았는데 수정주의 패러다임이 바로 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초반 해외 유학을 통해 문화연구 세례를 받았던 학자들이 국내에 진출하면서 수정주의 패러다임 하의 대중 매체 논의를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국내의 상황에 적용하는 노력들이 이루어졌다. 국내의 문화연구 패러다임 하 매체 논의가 대체적으로 수정주의적 혐의를 받고 초기 문화연구가 지녔던 이념에서 많이 후퇴한 것 처럼 보이는 것은 그 같은 배경 탓이었다. 그럼으로 인해 문화연구를 응용한 언론학 연구는 당연히 수정주의적 연구처럼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오해가 일기 시작했다. 당연히 문화연구는 수정주의적 입장인 것처럼 등식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혐의 탓인지 언론학 내부에서도 문화연구적 입장은 아직 변방으로 밀려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수입 초기의 열기마저 식은 감이 있다.


언론학 내부에서의 문화연구에 대한 오해로 인해 문화연구가 패러다임으로 자리잡는데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겠지만 실상 책임은 문화연구자들에게로 행해야 할 것 같다. 문화연구자들은 수정주의라는 혐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았다. 방어 자체가 필요없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적절한 방어논리를 가지지 않은 탓에 혐의를 흘려 보냈을 수도 있다. 사실 그 같은 오해, 지적을 백 번 양보해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수정주의 연구가 비난받는 만큼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수정주의적 연구는 양(兩) 겹의 문화연구중 한 부분이기에 부정할 수 없는 패러다임임에 틀림없다. 문화연구는 70년대 이후 발전을 거듭하면서 이제 정확하게 ‘이것이 문화연구다’라고 밝힐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애초 버밍햄 대학의 현대문화연구소(CCCS)가 지녔던 고민을 원조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전(canon)으로 삼아 다른 문화연구의 양상을 평가하는 것도 상당한 위험을 수반한다. 다만 지금까지 진행된 문화연구의 흐름을 크게 두 경향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는 있겠다. 그 첫째는 맑스주의적 진보성의 색채를 띠면서 사회변혁을 강조하는 합리성 강조의 문화연구 경향이다. 이는 (계급, 성차, 인종, 성, 지역 등) 지배/피지배의 구도가 자본주의 사회 구성의 기본으로 보고 이를 역전 혹은 민주적인 구도로 되돌리려 하는 작업이다. 이 경향성안에서는 지배의 작동방식을 폭로하고 그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타진하고 있다. 두 번째의 문화연구 경향성은 인구를 구성하는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권력작용을 자본주의 구성의 큰 흐름으로 보고 있다. 이 경향성에서는 다양한 권력 작용을 추적하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다른 흐름을 가진 권력 작용을 부추기고자 한다. 수정주의는 두 번째의 경향성과 유사성을 갖는다. 여기서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경향성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수정주의라 부르는 교조적 태도다. 교조적 태도에서는 자신들의 것을 거시적인 면이라고 칭하고 수정주의를 미시적 접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태도에서는 거시적인 것이 미시적인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결정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결정주의는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변혁을 추진하는데 큰 도움이 되질 못한다. 거시-미시의 관계는 언제든지 역전될 수도 있다. 그들간 관계는 단선적이고 점층적인 것이 아니라 국면에 따라 유동적일 수 밖에 없다. 만약 수정주의가 문제가 된다면 수정주의에만 더 탐닉하면서 수정주의 저 편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탓일 것이다. 즉 문화연구를 다시 수정주의 중심으로 재영토화한 것이 문제가 될 뿐인 것이다. 이처럼 문화연구는 양 겹의 문제 설정을 지니고 있기에 어느 한 쪽이 더 옳고 더 나쁘다라고 규정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국내의 문화연구가 수정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수정주의’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는 뉘앙스를 근거로 공격받을 만한 것은 아닌 셈이다.


거듭 강조되지만 수정주의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하고 오해를 증폭시킨 데는 국내 문화연구자들 특히 언론학의 문화연구자들 잘못이 크다. 수정주의 연구가 아직은 미완의 프로젝트이고 앞으로 더 다듬어져야 하는 분야임을 밝혀두는 솔직함이 필요했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 국내 언론학의 문화연구자들은 양 겹의 문제설정을 인식하는데 까지는 이르렀지만 직접 팔을 걷어 붙이고 그 문제에 천착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양 겹의 문제설정은 근대적 프로젝트와 탈 근대적 프로젝트의 결합처럼 보이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긴 여정이 필요하다. 최근 들어 국내 문화연구가 침체기에 들어선 것 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문제설정이 막다른 길처럼 연구자들을 막아선 탓이 아닐까 짐작된다.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사고했던 근대적 프로젝트와 욕망을 중심으로 사고했던 탈 근대적 프로젝트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동거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한 침체는 상당히 오래갈 것 같다. 만약 이에 대한 고민없이 여전히 이데올로기만을 얘기하거나, 욕망만을 논의하는 분리주의적 담론이 생산된다면 문화연구는 매체 연구에서 큰 기여를 하지 못한 채 한 때의 유행처럼 취급받을 수도 있다.


이상이 문화연구의 ‘붐’을 일으킨 진원지라고 생각되는 영국의 문화연구 특히 스튜어트 홀을 다시 들여다 보고 정리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다. 마침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에서 문화연구의 자리 찾기’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연다기에 이 생각들을 언론학에 걸어 정리해보리라 의도했다. 언론학이 원래 시작으로 잡았던 CCCS에서의 문화연구를 재점검해보고 그로부터 새로운 길 찾기를 모색해보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프로젝트는 아니다. 오히려 복습에 가까운 일일 뿐이다. 다만 예전에는 툭 트인 공간에서 학습을 했다면 이번에는 막다른 골목을 눈 앞에 둔 채 복습을 벌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가 예전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영국의 문화연구를 읽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복습하는 셈이다.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영국의 문화연구와 그 정점으로 삼는 스튜어트 홀을 통해 문화연구를 복습할 경우 얻게되는 이점들을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나머지 장들에서는 영국의 문화연구와 홀의 작업들이 전해주는 함의들을 적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문화연구적 언론학이 새롭게 꾸려가야 할 작업들을 정리해보았다. 언론학이 주 소재이긴 하지만 타 학문영역이나 비평계에서 문화연구를 거론하는 이라면 자신이 몸담은 영역으로 치환하더라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기대한다. 


1. 영국 문화연구와 홀


문화연구가 일반 연구자들에게 알려지기 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이유는 문화연구가 일반적 이론들과는 달리 이론적 일관성을 결여한 듯이 보이고, 한 두 거장에 의해 매끈하게 제시된 이론적 틀을 지니고 있지도 못했고, 또 그들의 연구결과를 체계적으로 실어내는 고정된 학술지 등의 공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2) 기존의 제도권 학술관행에 익숙해 있는 연구자들은 이 같은 문화연구를 두고 패러다임의 형성이라기 보다는 학술적 태도에 불과할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여전히 의혹 혹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남아 문화연구는 그 본래의 모습을 추적하려는 연구자들의 추적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연구내 학자들은 그 같은 추적 행태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 것이 뻔하다. 자신들의 작업을 하나의 교조적 이론체제로 파악하는 일을 반대할 것이고, 언제나 처럼 아직 문화연구는 진행중에 있음을 강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연구가 내걸었던 소명의식이나 문제틀, 문제제기 등은 징후적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다. 재구성이 필요한 것이다.


먼저 문화연구가 제기했던 문제틀, 그리고 그에 맞춘 실천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현실정치에 대한 개입이다. 이 측면을 정치적 측면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문화연구는 영국에서의 신좌파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고, 영국의 지배 블록이 헤게모니를 재구성하는 과정에 비판적으로 개입코자 하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현실정치에 대한 개입은 거리를 나서서 자신들을 알리는 거리 정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현실 정치를 통해서 대중들을 읽어내고, 읽어낸 결과를 대중에게 다시 돌리며, 대중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둘째는 학문적 개입이다. 이 학문적 개입은 문화연구의 정치적 개입과 무관하지는 않다. 영국의 현실을 파악하는 기존 좌파적 입장에 대한 수정, 그리고 그 이후의 포스트 좌파적 입장을 경계하자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문화연구가 행했던 지식 생산 방식을 들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연구는 그 일관적 맥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이론적 시도를 행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페미니즘이나 인종 갈등 연구 등으로부터 제기된 이론을 수렴하는 개방적 태도를 취한다. 이 같은 실천과 태도는 분과학문 체제를 갖춘 기존의 대학 제도를 피하고자 운영했던 ‘센터(center)'적 방식 탓에 가능했다. 이는 연구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지식 생산 방식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이 낳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범적인 것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화연구의 이 같은 실천과 문제틀 설정 가운데는 스튜어트 홀이 있었다.3) 홀은 스스로 문화연구의 창시자나 설립자라 불리는 것에 심하게 저항한다. 그는 문화연구를 두고 한번도 설립되었거나 창시된 적이 없으며, 이론적 체계로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4) 그럼에도 우리가 스튜어트 홀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10년이 넘게 문화연구의 기반이 된 현대문화연구소(CCCS) 소장을 지냈고, 문화연구의 주요 입장(positions)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홀은 문화연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좌파운동의 핵심 활동가였고, 맑시즘의 재고(rethink)를 문화연구를 통해서 독자적인 형태로 행했다는 점에서 문화연구와 그를 떼놓을 수 없다. 문화연구를 들여다 보는 방식은 여럿이 있을 수 있고, 각 방식은 장단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홀을 통해 문화연구를 살펴보는 일은 상당한 이점을 선사해준다. 몇 가지 점에서 그렇다.


먼저 홀은 대중의 정치성을 강조하면서 대중, 대중문화 등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는 늘 패배적 개념인 대중(masses)이나 낭만적(영웅적) 개념인 대중(valorized people)을 피하고자 했다.5) 그런 점에서 그는 추상적인 대중을 이용하며 대중에게 미리 실망을 느끼는 프랑스의 지식인(특히 쟝 보르리야르 같은 이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그 같은 대중관을 가진 포스트 모더니즘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6) 마찬가지로 영웅적 대중관도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내세우는 대중에 대한 논의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체를 통해 말해지기도 한다는 실천과 구조의 접합 안에서 이루어진다. 대중의 정치성을 이처럼 설명하는 홀을 다시 읽어보는 일은 현재 우리 문화연구에서 간혹 찾아지는 역사의 종말을 논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 대중의 능동성만을 축복하는 대중 추수주의(populism) 경향을 동시에 점검하게 해준다.


홀을 통해 문화연구를 살펴봄으로써 얻는 두 번째 이점은 문화연구의 궁극적 지점을 점검해보는 일이다. 현재 우리의 문화연구는 문화현상과는 접합되어 있긴 하지만 현상에 개입하는 일, 정책적 개입 혹은 문화 운동 등과는 격리되어 있다. 홀이 신좌파 운동을 통해 대중문화를 살펴보는 일의 중요함을 역설한 것은 엘리뜨 문화 연구의 반향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홀은 엘리뜨 문화 대 대중문화의 대당을 강조하는 일 보다는 엘리뜨 문화가 고급한 것으로, 대중문화가 저급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데는 그를 설정하는 정치적 장과 세력이 있으며 그를 행하는 헤게모니 전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문화 영역 자체가 계급 등과 같은 사회적 모순, 갈등의 공간이 됨을 역설했다. 홀은 문화연구가 그 과정에기꺼이 개입하는 실천을 강조해왔다.7) 그러나 현재 영국 바깥의 문화연구, 우리의 문화연구는 그 같은 지점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문화적 작동 현상이라는 외피에만 머물고 있으며 그 외피에 대한 설명을 추상적 수준에서 행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문화연구를 문화현상의 분석을 위한 도구로 격하하고 그를 통해 스스로 기존의 학문 제도 안에 고착시키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홀을 통해 문화연구의 지향점, 정치성을 점검하는 일은 의미있는 일일 수 밖에 없다.


홀을 통한 문화연구의 독해가 가져다 주는 세 번째의 이점은 역사에 대한 천착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연구의 많은 성과가 서구 중심적이란 점을 자주 지적한다. 그가 행한 많은 연구들은 서구 의회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며, 제 3세계적 경험을 담고 있지 못한다고 고백한다.8) 더구나 포스트 모더니즘을 등에 업은 문화연구는 정치성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약점을 지닐 뿐만 아니라 역사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녔다고 지적한다. 현실을 언어적 작동에 비유하는 포스트 맑시즘은 비유를 넘어서서 현실과 언어를 동등한 것으로 치고, 언어적 작동이 현실을 대신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역사를 괄호치는 작업에 다름 아닌 것이라 홀은 역설한다. 즉 언어의 접합이 벌어지는 역사를 고민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늘 등가치를 가진 차이들의 접합이 자유롭게 벌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국면적 연구의 중요성은 역사를 감안하지 않은 문화연구를 배격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문화연구의 진부함은 역사의 상실로 인한 것이라는 지적을 감안한다면9) 홀이 문화연구를 역사와 함께 사고할 것을 요청했음은 귀담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의 이점은 이론적 중간서기(middle ground)로 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홀은 문화연구를 통해 끊임없이 중간서기를 행해왔다. 문화연구 전통 자체가 중간서기의 연속이었다고 밝히면서 그 스스로도 문화주의와 구조주의의 중간 지점을 모색하는 노력, 인간 주체와 구조를 화해시키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행했다고 말한다. 환원주의와 무차별적 비환원주의의 중간 지점에 서는 이론적 작업도 수행했다. 그의 중간 서기는 접합, 국면분석, 보증없는 맑시즘 등의 개념으로 표현된다. 이 개념들을 통해서 구조와 실천간의 관계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정해질 수 밖에 없으며, 그 어떤 법칙에 의해 그들의 관계가 미리 설정될 수 없음을 설파할 뿐만 아니라 환원주의로 알려진 속류 맑시즘과 무차별적 비환원주의인 포스트 맑시즘을 동시에 피하는 중간서기를 행한다.10) 그의 이 같은 중간서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론적 패션주의(또는 모리스가 주장하는 붐)을 피하며 역사성을 강조하며 맑시즘에 그의 뿌리를 두는 그의 학문적 입장과 닿아있다. 패션에 급급해 이미 정리되었던 이론적 체계를 한 번에 던져버리는 급격한 붐의 문화연구, 아직도 과거의 폐쇄적 학문체계에 맞추어 모든 것을 재단해버리는 변하지 않는 문화연구 등은 이 같은 중간서기를 통해 개방과 접합을 동시에 해내는 열린 연구로 지향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홀을 통해 본 문화연구는 시사점을 갖는 것이다. 


스튜어트 홀이 문화연구 전반을 대표했다고 볼 수는 없다. 홀도 그 같은 찬사를 부담스러워할 것이 뻔하다. 다만 홀을 통해 문화연구를 들여다 보는 것이 상당한 이점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홀이 천착하고자 했던 지점들과 문화연구가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들을 접합시켜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전략은 홀이 참가했던 영국의 문화연구를 더욱 명료하게 보게 해줄 뿐만 아니라 홀의 문화연구에 대한 입장도 면밀히 들여다 보는 장점을 갖게 될 것이다. 홀과 문화연구간 대화를 적는 이 글은 크게 세 개의 본문을 갖는다. 먼저 홀과 문화연구의 이론적 개입을 보증없는 맑시즘, 접합, 역사의 강조 등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 본문에서는 문화연구의 정치적 개입을 이데올로기론의 수정, 헤게모니론의 도입, 대중의 정치성 등을 엮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세 번째 본문은 홀과 문화연구의 지식생산방식을 중간서기, 통합학문 등의 개념과 함께 설명하려 한다.


2. 이론적 개입


홀은 자신의 중심을 항상 알뛰세와 구조주의에 두고 있다. 물론 그 틀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만약 그를 ‘포스트 맑시스트’ ‘후기 구조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러한 수준에서만 그렇다고 말한다. 홀의 이같은 입장은 홀이 이론적 개입을 두 가지 지점에 두고 있음을 추정케 해준다. 그 첫 번째는 알뛰세가 환원적 맑시즘을 떨치고자 했던 부분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그가 빠뜨린 부분들을 새롭게 이론화한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맑시즘의 위기로부터의 탈출이다. 두 번째는 알뛰세를 비롯한 서구 좌파의 테제를 넘어서고자 했던 - 홀이 보기에 지나치게 뛰어넘었던 - 포스트 주의를 견제하고자 했던 점이다. 이는 맑시즘의 와해에 대한 경계처럼 보인다. 사실 홀은 자신의 이론적 치열함을 알뛰세를 중심으로 보여 주었던 반면, 홀 이후의 문화연구는 그를 훌쩍 뛰어넘는 작업들도 감행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맑시즘 계열의 문화연구가 영국 바깥에서는 홀의 연구보다 더 환영을 받았던 점은 홀이 그처럼 우려하며 경계하고자 한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어쨌튼 홀은 맑시즘을 부여 잡으면서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론적 개입을 한정짓고 있었다.11)


홀이 알뛰세에 천착하게 된 일차적 계기는 맑스의 총체성을 복합적인 구조로 이해했다는 점이라고 밝힌다. 복합적인 구조내 여러 수준들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거나 직접적인 것이 아니며 - 그렇다고 모든 요소들이 다른 요소들과 무차별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의미도 아닌 - 일종의 지배 내 구조(structure in dominance) 안에서 벌어진다고 말한 부분에서 알뛰세와 조우했다고 말한다. 홀은 맑시즘 안에서의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는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 첫째는 상응 모델이다. 이른바 환원론으로 비판받는 이 모델은 사회 구성체 수준간의 필연적인 상응관계 necessary correspondence를 전제한다. 두 번째의 모델은 아무런 상응관계가 없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첫 번째 모델이 통합성(unity), 통일성을 강조한다면 두 번째 모델은 통합성을 부정하면서 차이(difference)와 차이 간의 미끌어짐(deference)를 강조한다. 이 두 모델 사이에 있다고 밝힌 바 있는 홀은 제 3의 모델을 제안한다.12) 이 모델은 필연성이나 통합이 보장받지 못함을 강조하고 차이들간의 통합(unity in difference)을 내세운다. 홀이 내세운 제 3의 모델은 통합이나 차이 만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차이들간의 접합을 통한 통합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통합과 차이를 동시에 사고하는 입장이다. 알뛰세의 <모순과 중층결정 Contradiction and Overdetermination>이 바로 홀이 주목하는 지점이다. 홀이 주목한 지점은 그가 평소에 내세우는 접합의 중요성과 일치한다. 즉 결정성을 유전학적 기원으로 보던 관점과 구조주의적 인과성 테제을 버리고, 불균등한 모순들간의 중첩결정 그리고 국면에 따른 그들 간의 접합을 강조한 것이다.  


홀은 알뛰세의 논의를 구조주의적 입장의 알뛰세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정리하고자 애를 쓴다.13) 홀이 스스로 그렇게 칭했는지는 알 길은 없으나 포스트 알뛰세적인 방식으로 알뛰세를 다시 해석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우선 홀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설정없이는 문화연구(가 관심을 갖는 문제영역)가 적절히 작동할 수 없음을 깨달은 셈이다. 국가가 시민사회의 동의를 기반으로 지배블럭을 유지하기도 하고, 또 유지하는데 실패하기도 하는 메카니즘을 포함시키지 않고서는 사회 구성체의 작동방식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을 홀은 꾸준히 지적해왔다. 그리고 접합의 개념을 도입시켜 모든 담론적 실천들은 특정 국면에서 상응관계없이도 접합될 수도 있음을 밝혔다. 접합의 자유도 탓에 계급이라는 모순 뿐만 아니라 성, 인종 등의 모순도 중요한 모순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언제라도 계급과 접합될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이는 환원론을 피하는 또 다른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홀은 ‘국면’을 강조해 그것이 담론 수준에서만 성공적으로 결합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담론적 접합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담론적 접합을 통해 찾아가는 주체가 과연 어떤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홀이 볼로시노프(V. Voloshinov)의 비판적 언어론을 따른 것은 무차별적 담론적 접합이 아니라 계급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담론적 접합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볼로시노프의 비판적 언어론을 따름으로써 홀은 이데올로기를 단선적인 모습이 아닌 다억양적인 것, 즉 그를 통한 저항이나 협상이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홀은 볼로시노프의 언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중적인 텍스트를 대하는 수용자의 역사적 경험이나 상황(positions)에 따른 해독의 차이도 주장했다. 홀의 encoding-decoding 모델이 바로 그 결과라고 하겠다.


알뛰세를 보완하고, 때로는 수정하는 홀의 포스트 알뛰세적 입장을 집대성한 결과가 <위기관리policing the crisis>다.14) 그 저술에서 홀은 국가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헤게모니의 상실로 인해 지배 블록이 흔들리게 되었을 때 국가와 언론, 그리고 지배 블럭은 그것의 재 구축을 위해 어떻게 강도, 시민사회의 질서, 국가 공권력의 필요성을 접합시켰는가를 추적한다. 국가가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접합 노력은 영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모순의 응축으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시민사회의 동의를 구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데 1970년대는 성공을 거두어 소위 대처리즘(Thatcherism)이라는 헤게모니적 순간에 이르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또 하나 관심있게 바라볼 부분은 강도(mugging)라는 사회적 요소가 계급적 요소로 변하는 접합 과정이다. 청소년 강도 특히 유색인종들의 강도가 지배블럭의 구성과 연결되는 것은 계급환원론적으로는 사고될 수 없는 것이며, 접합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어쨌튼 이 저술은 홀의 맑시즘, 포스트 알뛰세 주의, 친(親) 그람시주의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홀은 이 같은 작업이 맑시즘 전통의 보전이기도 하고, 맑시즘의 재고(rethink)의 일환이라고 사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홀은 재고의 수준을 넘어 맑시즘을 전혀 새롭게 변형시켜 가는 움직임 즉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맑시즘을 얼마 있지 않아 대하게 된다. 홀은 이들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일이 시급함을 깨닫는다. 맑시즘이 섬세하게 고민하지 못했던 언어, 모더니즘이 고민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재현의 문제 등이 그 안에 매혹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맑시즘의 기운은 문화연구 안으로도 전해져 왔다. 영국 바깥의 문화연구는 홀이 행했던 문화연구보다는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맑시즘에 기반을 둔 문화연구를 독서하고, 강의하고, 실천하는 경향이 강해 보였다. 홀은 자신과 이들을 분명하게 구분짓고자 했다.


우선 포스트 모더니즘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갖는 보수성, 서구 중심성, 낮은 수준의 단절을 부풀린 점 등을 비판한다. 홀은 료타르와 하버마스의 논쟁에서 그 어느 편에도 찬성하지 않음을 밝힌다. 하버마스가 계몽사상이나 근대성 기획을 방어한 것은 가치가 있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타당하게 지적한 현대 문화의 모순된 몇몇 경향들을 잘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근대성 기획에의 집착이 전향적 사고를 막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료타르의 경우 자신들이 설정한 단절 (혹은 변화)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축복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무비판적 자세에 머문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언급한 것처럼 지금이 과연 큰 시대적 단절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점검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홀은 모더니즘이 한 목소리로 단순화될 수 없음을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토론과 대립으로 설명한다. 모더니즘은 다양한 경향으로 파생되어 갔는데 포스트 모더니즘이 말하는 단절은 단절은 아니라 그 다양한 경향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비록 모더니즘적 사고로 파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두고 전혀 새롭고 통일된 것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완전한 단절이라기 보다는 연속성 혹은 변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입장인 셈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낮은 수준의 단절이라는 비유 정도로 받아들이고, 장기 지속의 한 단면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홀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단절을 지니치게 강조하는 것이 갖는 효과를 이데올로기적 효과라고 본다. 단절을 강조함으로써 세계의 종말, 역사의 종말로 이끌게 되고 그 안에서는 아무런 것도 할 필요가 없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설파한다는 것이다. 아직 근대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모색은 필요없게 되는 셈이다. 역사도 없고, 저항도 없고, 모색도 필요치 않는 것처럼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를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내는 장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홀의 입장이다. 보드리야르 등 기호의 재현능력을 놓고 벌이는 포스트 모더니즘 또한 홀은 이데올로기적 공세로 돌리려 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재현, 전자복제 등을 두고 보드리야르는 의미화의 과정이 소멸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기호화의 다양성이라는 양태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 홀의 주장이다. 의미 규칙들이 다원화되었음을 두고 재현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규칙들의 다원화를 두고 고민해야 하는 새로운 형태의 자성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까지 이르지 못하고 역사를 종결짓는 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토대/상부구조의 이분법적 패러다임을 탈출하고자 한 포스트 맑시즘과 푸코 등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홀은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환원론적 맑시즘을 탈출하려 한 일련의 포스트 맑시즘과 자신의 관계 설정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는 단호히 말한다. 포스트 맑시즘은 사회가 언어처럼 움직인다라는 비유를 사회는 언어다라고 잘못 확대해석하는데서 오류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홀은 사회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렇게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과 사회(적 실천) 자체가 언어라고 말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음을 밝힌다. 사회와 언어의 비유는 유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비유가 지나쳐 현실작동 방식과 언어를 동일시하는 일로까지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 같은 지나침을 두고 담론주의라고 밝히면서 위로 향한 환원론이라고 단호히 선을 긋는다. 즉 조잡한 유물론에 대한 반발로 사용된 사회는 언어처럼 작동한다는 비유가 사회는 언어다라고 환원되어 역 경제주의 환원론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라클라우15) 등의 포스트 맑시즘이 언어를 이론화시키지 못했던 맑시즘에 전해주는 잇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접합 등의 소중한 개념을 전달했음을 높이 사더라도 여전히 차이만을 인정한 통합의 가능성, 접합의 주체 등 역사를 감안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홀의 입장이다. 담론과 담론이 접합되어 이데올로기를 자아내는 담론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특별한 역사적 상황 하에서 그럴 뿐이다. 그것이 감안되지 않은 접합은 의미없는 담론체를 양산할 뿐이고 적절한 담론 대상체를 찾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홀의 포스트 맑시즘에 대한 이같은 비판은 푸코 등의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고 있다. 홀이 보기에 푸코가 이분법적 패러다임을 피하고자 담론성의 영역으로 이동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지배성이 어떻게 구조화되는가는 문제에는 직면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후속적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우선 지배성이 구조화되지 않는 지점에서 저항의 개념은 유지될 수가 없고, 세력의 장이 개념화되지 않기에 권력 관계가 명료해지지 않으며 정치 자체가 부정되는 모순으로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진리체제가 복수로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적절한 것이었지만 복수의 존재들이 벌이는 세력의 장, 관계가 명료해지지 않는다는 주장인 것이다. 


홀의 이론적 개입은 일관성을 갖는다. 알뛰세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맑시즘의 허점을 메우고, 개방시켜 나갔다는 점이다. 알뛰세에 모자라거나, 지나치게 넘치는 것들을 점검해 비판해나간 홀은 다른 어떤 이론가보다 일관성이라는 장점을 지닌다. 그 일관성으로 인해 맑시즘을 사고하는데 방향을 설정해준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행하며 이론적 개입을 할 수 있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라클라우의 접합, 볼로시노프의 다억양성(multi-accentuality) 등의 개념을 통해 비환원론적이며, 역사성을 감안하며, 쌍방향적인 세력간 갈등을 도출해내는 그야말로 독특한 작업을 수행해냈다. 홀이 문화연구와 함께 수행했던 부분은 이 같은 개념들을 통해 ‘보증없는 맑시즘’이란 이론적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었고 지금도 그 성공적인 구축은 비판 이론 중에서도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3. 대중 정치


문화산업이 발전하고, 노동계급이 안정화되어 갔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비판적 학자들은 절망하기 시작했다. 그 절망의 표현은 여러 형태로 발전하지만 대체로 비젼없는 사회적 전망으로 자리잡아 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내 일군의 학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러나 홀은 이와는 반대의 경향성을 보인다. 문화산업의 발전, 노동계급의 안정화는 역사의 끝이 아니라 새롭게 역사를 인식할 필요성을 전해주는 조건으로 본 것이다. 벤야민을 말을 빌어 이제 대중이 정치적 무대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되고 있음을 주장한다. 대중이 고려되지 않고서는, 대중에 대한 실망만이 존재해서는 그 어떤 것도 진행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16) 물론 그 대중이 당장 세계를 인수해서 자신들의 의지대로 현실을 재구성한다는 뜻으로 한 것은 아니다. 홀이 뜻한 바는 대중을 알지 못하고, 대중으로부터 얻지 않고서는, 대중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 시기를 맞게 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대중에 대한 홀의 이같은 관심은 두 가지 방식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대중 정치의 가능성을 자신들의 변명으로 사상시키는 우를 범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시도다. 홀이 보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은 대중을 이야기하지만 그 방식은 자신들이 비판적 사상을 버렸음을 변명하는 쪽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자신들이 비판적 사상을 버린 것이 마치 대중으로부터 얻은 힌트인 것처럼, 대중과 함께 하기 위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중을 설명하려다 잘 못 찾은 막다른 골목에 갇혀버린 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트 모더니즘과 대중의 관계는 일종의 수탈적 관계로 까지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중들로부터 표현 수단을 빼앗았고, 수동적인 세력으로만 남아 있게 만든 점을 반성하지 않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대중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그런 적도 없는 반 대중적 작업이라고 일축한다. 대중을 제대로 대하기도 전에 대중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퇴행적 작업이라 비판하는 것이다.


홀은 대중들은 자극제와 같은 존재라고 본다. 만약 이 자극제를 경험하지 않고 비켜가는 전술을 사용한다면 역사가 끝났다느니, 더 이상 현실 정치는 없다느니 등의 언설을 펼치게 된다고 본 것이다. 대중성은 투쟁이 수반되는데 그 투쟁을 위해서는 대중들의 실제 의식, 상식, 생활과 그것들이 변화해서 생길 수 있는 것을 간극을 드러내야 한다. 즉 대중들의 의식, 상식, 생활에 입각해 비젼을 보여주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작업은 대중과 더부는 작업일 뿐 대중을 비켜가거나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작업이 아닌 것이다. 대중을 자극제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의 변명의 소재로 사용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런 점에서 대중정치를 표방하면서도 결코 대중적이지 않은 움직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홀이 생각하는 대중 정치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은 알뛰세에 대한 오해로 부터 비롯되어 보인다. 알뛰세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방식이 잘못 진행되면서 대중의 정치는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홀은 여기저기서 토로한다. 그는 먼저 알뛰세가 이데올로기 과정을 무의식의 과정으로만 이해했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알뛰세를 라캉을 통해 독해하는 과정에서 즉 ‘생물학적 존재에서 인간 존재로의 이행’ 과정에서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완벽하게 봉합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공식을 ‘무의식은 언어, 문화, 성적 정체성, 이데올로기 등등에 들어가 있는 것과 동일하다’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 비판한다. 완전 봉합을 통해 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의 완벽한 성공을 말하고, 지배적 체제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그같은 완전한 봉합은 어디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다. 알뛰세의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과정을 라캉 식으로 이해할 경우 대중 정치의 봉쇄, 이데올로기의 기능성만 논의될 뿐 대중 정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과정, 라캉적인 언어 과정은 비유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홀의 주문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가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고 표현하는 것 보다는 지배내 사회가 손쉽고 매끄럽게 기능적으로 재생산되도록 한계를 설정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 비유를 통해 구조를 구조화로 변경시켜 설명할 수 있으며, 기능주의적 설명을 피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구조를 변경시키는 힘을 찾아내는 이점을 얻게 된다. 즉 구조만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면 접합점을 찾아낼 수도 없고 사회 변화의 국면을 얻지 못하게 된다. 알뛰세의 무의식 테제를 비유적으로 읽을 경우, 구조와 실천 간의 이중적 접합을 꾀할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구조로부터 한정당하면서도 실천을 감행할 수 있도록 집단적 의지를 만들고 넓은 범위의 다양한 함축을 농축시키는 담론을 만들어 내는 일만이 남게 된다. 이는 자신이 포진된 위치에 의한 즉자적 의식 뿐만 아니라 대자적 의식을 만들어내는 일에 해당한다.17) 구조와 실천의 접합을 통한 대중정치는 단순히 계급적 위치가 계급적 실천을 가져올 수 있다는 단선적 인식을 넘어선다. 다양한 계급을 집합적 의지로 낚아낼 수도 있으며, 분산된 실천을 효과적으로 결집해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문화연구 등이 대중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와 같은 대중의 결집 전략, 대중을 위한 담론적 전술을 마련하는 일이다.


만약 알뛰세를 이와 같은 지점에서 이해한다면 대중 정치의 가능성은 활짝 열린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몇몇 비유에 알뛰세를 가두는 일은 손실을 가져올 뿐이다. 이제 새로운 이해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장은 항상 교차하는 강조점들과 지향점이 다른 사회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장으로 파악된다. 이데올로기적 계산의 매체인 언어는 계급 등으로 단순환원될 수 없다. 만약 이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면 이데올로기적 투쟁이나 의식 변혁 등은 꿈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 홀이 그람시를 빌어오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관념들이 어떻게 ‘인간 대중을 조직하며, 인간이 운동하고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의식을 얻고, 투쟁을 벌이곤 하는 지형을 만들어내는가’를 분석하는 일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특정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은 늘 지배블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대체로 단편적이고 삽화적인 파편들, 상식적 요소들이 대중의 사고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문화연구가 벌이는 담론적 실천 혹은 개입적 실천은 대중들이 오랫동안 지녀왔던 - 지배블럭의 이익에 대변할 수 밖에 없었던 - 기억들, 상식들, 흔적들을 수집하고, 그의 분열을 꾀하는 일이다.


홀이 문화연구를 대중과 더불어 사고하는 지점을 크게 세 가지로 들 수 있겠다. 그 첫 번째는 문화연구는 대중을 자극제로 사고하고 있으며 그를 감안하지 않은 담론적, 이론적, 개입적 실천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중을 비켜가며 침묵하는 다수로 파악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정치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을 구조적 담지자로 파악하는 인식을 넘어서서 구조적 제약 속에서 실천을 펼치는, 그 실천 마저도 이전 구조, 조건에 의해 제약된 구조와 실천의 접합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문화연구 즉 유기적 지식인들이 취해야 할 대중에 대한 태도다. 유기적 지식인은 전통적 지식인과의 경쟁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필요한 부분을 대중들의 소리로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어쩌면 문화연구가 학문적 실천 뿐 아니라 그 외 또 다른 실천을 행하는 것이 요청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창작, 비평 등의 활동을 통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그것이 결집된 형태인 문화운동의 필요성도 제기되는 것이다. 홀이 대중을 정치의 중심에 내세우는 것은 담론적 실천을 통한 문화연구의 투쟁과, 가능한 개입적 실천을 통한 문화연구의 투쟁 모두를 포괄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4. 새로운 지식생산방식


1960년 <New Left Review>가 창간되었고 홀은 초대 편집장이 된다. 이 저널은 50년대 중반부터 홀과 함께 교조적 맑스주의나 스탈린 주의에 반대하던 사무엘(R. Samuel), 테일러(C. Taylor) 등이 만든 <Universities and Left Review>와 톰슨(E. P Thompson) 등이 주도하던 <New Reasoner>가 합쳐진 저널이었다. 이들은 노동당이나 공산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독립적 좌파들이었는데 주로 맑스주의를 재고하는 수고를 보여왔다. 당시 소련의 권위주의가 맑시즘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따지는 일과 자본주의 중심지역에서 노동계급의 혁명 기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진보적인 운동이 계급 선을 따르기 보다는 성, 인종, 환경, 민족주의 등을 따르고 있음을 목도한 그들은 맑스주의를 새롭게 사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어쩌면 홀이 오랫동안 거대이론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것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홀은 직간접적으로 윌리엄즈, 호가트 등과 교류를 가지면서 실천적 작업, 운동을 모색한다. 이전부터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 프로그램을 이끌어 왔던 윌리엄즈의 경험, 문학 연구를 사회적 과정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왔던 호가트 등과 함께 홀은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표현 양식이 사회에 드러내고자 하는 바, 그리고 그것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을 점검하고 자신들의 관심이 사회내 문화적 토양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18) 홀은 자연스럽게 호가트가 설립한 버밍행 현대문화연구소에 합류했다. 홀이 1964년 버밍엄 현대문화연구소에 참여했을 때 연구소의 일파들은 보다 구체적인 영국적 현실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일종의 문화적 전환을 목도한 것이었다. 그것은 대영제국의 쇠퇴, 젊은 층의 반란과 사회 정체성 쟁점을 둘러싼 문화갈등의 폭증 등이었다. 사회적 갈등은 문화를 통해 분출되고 있었으며 문화는 사회 갈등의 중심이 되는 듯 했다. 문화를 한 켠으로 미루어 두었던 맑시즘이 막상 문화를 통한 사회 갈등에 입을 열지 못함을 보고 맑시즘을 다시 한번 고민케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문화연구의 제 1세대들이 가진 문제의식이 재연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센터는 이를 단순히 맑시즘적 관점에서 문화를 보아야 한다는 교조적 자세를 떨치고자 했다. 그 교조적 자세를 떨치는 방편 중 하나가 통합학문적 접근, 학제적 연구 태도였다.


그가 현대 문화연구소에 적합한 임무를 부여코자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용어가 유기적 지식인의 양성이었다고 한다.19) 그러나 그는 이 임무는 수사적이며 허위에 가까운 것이라며 곧 수정한다. 연구소는 한번도 유기적 지식인을 양성한 적이 없으며 유기적 관계를 맺을 사회적 운동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앞으로 있을 새로운 국면을 준비해 유기적 관계를 맺을 워밍업을 하며, 그 때를 기다리는 그야말로 노스탈지어에 젖어있거나 의지 혹은 희망에 가득차 있는 지식인의 형세를 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연구소는 곧 연구소의 목표를 수정하여 연구소가 전통적 지식인과 학문적(이론적) 투쟁을 치열하게 벌일 것, 대중을 찾아가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말하고 그들을 위하는 앙가쥬망을 취할 것을 내부 지침으로 삼게 된다. 


그 내부 지침을 수행하기 위한 첫 단계로 센터는 이전의 전통적 지식 생산과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유기적 지식인은 먼저 다양한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열려진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전통적 지식인 보다 더 많은 사회적 변인들을 연구에 포함시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다양한 문제들의 복잡성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학제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학제적 연구는 기존의 대학 제도로서는 행하기 힘든 것이어서 센터라는 정체성에 자신들을 한정하고자 했다. 학제적 연구를 위해 마련된 센터는 학제적 연구를 위한 구체적 방식으로 공동 작업을 강조했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언제든 새로운 영역에서 제기된 문제틀을 순발력있게 흡수할 수 있게 했다. 문화연구가 페미니즘과 인종의 문제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센터라는 체제, 학제적 연구풍토, 공동작업의 강조 탓으로 보인다.


센터는 고립, 격리되고 개인화된 연구들이 기존의 인문사회과학 연구 수행에서 지배적이었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집단 연구를 강조했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서로 다른 개인들이 경쟁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업단위를 집단으로 묶고 각자가 나름의 방식대로 연구하되 동시에 지식의 영역 전체 발전에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지식의 공유를 위해 집단적인 아이디어 구축, 집단적 연구, 집단적 글쓰기가 구체적으로 부가되었다. 이를 위해 개인의 관심사를 먼저 추출해내고 공동관심사를 가진 학자들이 함께 강독, 토론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 틀 속에서 개인적 관심사와 집단적 관심사가 적절히 통합될 수 있게 하였다.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한 연구집단은 강의보다는 스터디 그룹운영을 더 선호하는 입장이었는데 스터디를 통해 학생들은 과제물을 제출하고 평가받기 보다는 스터디의 결과를 반드시 집단으로 인쇄화하도록 재촉받았다.


각 연구집단은 결산 보고서를 제출하고 평가받았다. 그 평가과정에서 센터는 각 소집단들이 공동으로 지니는 주제와 문제의식을 추출할 수 있었다. 즉 각 집단의 전문화된 연구들을 다시 일반적인 연구로 걸러내는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센터의 저널 발행은 이러한 관행이 지속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각 집단이 보여주었던 전문적인 주제에 대해 독립성을 주되 저널을 통해 각 집단들이 일반적으로 보여온 관심사를 서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연구팀간의 집단적 유기성이 강조되었고, 다음 연구를 위한 주요한 출발점을 얻기도 했다.


이 같은 기존 학문전통과의 단절은 영국의 학문적 지형에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문화연구의 새로운 지식 생산 방식은 학제적 연구, 통합학문적 연구, 공동연구 등을 통해 문화 영역을 폭넓은 사회적 실천과 역사의 장으로 확대하게 되었는데 각 분과학문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받게 된다. 문학과 사회학과 같은 분야에서는 문화연구에 대해 비관적이고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특히 문학 분야에서는 문학연구가 아닌 변절적 사회학 연구라는 지적을 받았다. 미국식 사회학 전통 테두리 안에서 공동체와 문화를 점검하던 사회학계에서는 센터의 연구를 ‘이데올로기적 글쓰기’로 규정짓고 거부반응을 보였다. 연구소에는 몇몇 사회학자들로부터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문화연구가 본래의 경계를 넘어서 진정한 과학적 통제없이 현대 사회에 대한 연구를 한다면 부당하게 영역의 한계를 넘은 데 대한 보복을 초래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다.20)


홀은 문화연구라는 학문적 실천을 기존의 대학 제도에서 행하는 지식 생산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해내고자 했다. 학제적 연구, 통합학문적 연구, 집단 연구 등을 통해 기존의 지식 생산 방식을 견제하고자 했으며, 새로운 기운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 같은 생산 방식은 일정 정도 성과를 냈다. 학제적 연구 성격을 가진 문화연구는 다양한 분과학문들에 영향을 미쳐, 연구 영역의 확장을 초래했고,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을 각 분과학문들로 하여금 실감케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 개방성이 활성화되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문화연구나 홀이 천착하고자 했던 이데올로기, 주체 문제는 각 분야로 빠른 속도로 번졌으며 기존 대학내 커리큘럼의 변화를 초래했다. 물론 그 같은 성과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학에 가해지는 기능적 지식 생산 압박의 정도를 감안해볼 때 그 같이 미미한 기운마저도 제대로 평가될 필요가 있겠다.


문화연구를 분과학문 체제와 긴장 관계에 있게 하고, 집단 연구라는 새로운 지식생산 방식을 채택하게 한 데는 홀이 그 가은 기존 지식생산방식에 대한 비판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식 생산이 대체로 개인의 창조적인 열정의 산물로 비쳐지거나 사회적적 대상을 반영하는 의식의 실천으로 간주했던 관행에서 벗어나 지식 자체의 생산과정에 주목하는 것, 그리고 지식 자체가 대상이 되어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도록 만들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울러 지식을 기능적 수단으로 변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 분과학문 체계를 견제하고자 하는 심산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지식은 한 개인의 창조적 열정의 산물, 혹은 학문적 평가를 위한 업적으로 비춰져 사회 내 권력관계로 이끄는 일이 불가능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대상을 반영하는 의식의 실천으로만 여겨지게 되었는데 분과학문 편제는 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분과학문 체계로 인해 지식이 지식인의 자아를 강화하고 지위를 고양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 점도 있다. 더 나아가 힘있는 관료들과 경제적 편의를 제공하는 고용주들에 봉사하는 지식 생산으로 격하되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지식과 지식생산에서 도출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분과학문 체계에 넘겨 버릴 수는 없지만 그것이 자아낸 폐해에 대해선 문화연구 뿐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지적하고 있으며 상당한 합의도 이루어지고 있다.21)


홀과 센터의 노력은 문화연구를 유사학문분과(quasi-discipline)로 불리우며22) 기존의 학문분과 어디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형태로 다시 말해 통합학문적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이 분야의 대학 제도 내 도입으로 인해 편제가 전향적으로 변했거나 새로 꾸려진 적이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분과학문체재, 개인적 학습에 의해서 문화연구는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나마 센터로 남아 있던 영국에서 마저 센터가 분과체제로 편입되고 말았다. 홀이 개방 대학의 강의를 통해 대중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겠다는 의지로 센터를 떠난 후의 일이다. 이제 그가 의도하던 그 지식생산방식은 중요성에 대한 인식효과만 남겼을 뿐이다. 이제 그 인식 효과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기존 제도 내에서 잘 펼쳐내느냐 하는 과제가 문화연구자들에게 큰 부담으로 와 닿고 있다.


5. 다시 언론학의 문화연구로 돌아와서


국내의 문화연구는 초기의 호기심 시기를 지나자 마자 줄기차게 문화연구의 딜렘마 혹은 위기로 규정되어 논의되어 왔다. 논의에서 많은 문화연구자들은 텍스트나 해독(혹은 수용자) 중심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문화생산의 맥락과 역사의 문제에 천착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23) 국내의 문화연구에 대한 이 같은 우려 그리고 제안은 외국에서도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화연구가 지나치게 거시적인 접근들을 외면함으로써 얻는 불이익을 논의하는 연구자들이 늘고 있다. 맥클래플린 같은 이들은 최근 문화연구들에서 행하는 페미니즘 연구들을 가리켜 지나치게 문화연구의 작은 한 부분을 침소봉대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로 인해 맑스주의와 정치경제학적 연구 등 거시적 이론과 결론들이  페미니즘에 줄 수 있는 장점 마저도 외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들도 비슷하게 학문적/이론적 담론 실천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문화생산, 정책 등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갈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한 대안으로 문화공학적 입장, 문화정책 연구 등을 내세우고 있다. 공학적 접근을 통해 문화운동 등에 문화생산방식을 새롭게 전유할 가능성을 열어주는 실천적 문화연구를 지향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문화연구가 문화정치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라면 문화연구는 문화정책에 개입할 당위성을 가질 수 밖에 없음을 밝히고 정책적, 제도적, 법적 대안을 내놓으며 때로는 문화운동을 통해 정책적 방향성을 돌려 놓는 일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디어 연구를 근대성에 걸어볼 것을 제안하는 유선영의 논의도 위의 지적과 맥을 같이 한다.25) 자주적 근대성 논의를 주장하는 유선영은 사회과학 분야의 근대성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경제층위 즉 자본 및 노동계급의 형성이나 민족국가 기획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고 지적한다. 식민지 주체구성에 대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힌다. 우리의 문화와 정체성, 그리고 주체구성은 식민화와 근대화의 두 과정의 접합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문제의식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대한 논의는 개화기에서 일제 식민시대까지의 집단적 문화정체성의 변형과정을 통해 사회적 무의식의 형성, 변화 등을 추적하는 논문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문화 안에서 인간이 주체로 구성되는 양식들의 변화와 장기적 추세를 분석할 것을 제안하며 구체적으로는 당시의 담론들을 통해 형성되는 사회적 무의식을 구성해내고 있다. 이 같은 유선영의 연구들은 부분적으로 문화연구로 향하고 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연구의 미디어/정체성 연구들은 서구 보편주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민족주의 서사를 결핍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문화연구 등에 의존함으로써 국내의 많은 미디어 연구가 탈 역사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셈이다. 그리고 결론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은 역사와 정신분석학의 절충적 결합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증상들로 이해하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대중매체의 소비, 동기 등을 작동시키는 힘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무의식일 수 밖에 없는데 이미 무의식의 정체가 파악되었다면 그를 중심으로 처방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문화연구 내 미디어 연구에 대한 또 다른 지적 및 비판은 미디어를 다르게 사고하자는 주장으로부터 행해진다.26) 이동연은 학계 내 문화연구의 배치를 인문학, 사회학, 그리고 매스컴학으로 나누고 있다. 인문학은 의미화 실천의 다양성, 복수성, 세속성을 제기하면서 위계 질서화한 문자 중심의 서사 체계를 전복시키고 휴머니즘 중심의 제한 인문학의 범주를 확대하려 기획한다고 적고 있다. 사회학은 정치경제학의 방법적인 전화와 사회이론의 세속화를 모색하고 사회 구조의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생성 시스템’에 주목한다고 지적한다. 매스컴학은 주로 미디어의 이데올로기적 작동 과정과 국가 장치로서의 미디어의 정책 과정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이동연이 이러한 배치를 구분한 이유는 문화 연구의 목적했던 학제간 네트웍킹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분절적이라는 지적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분절은 문화연구로 하여금 제도적 실천이나, 대중들의 문화적 권리 신장을 위한 일상적 실천 그리고 문화학의 교육적 실천을 가로 막고 있다고 말한다. 서로 독립되어 있는 문화연구 내 학제적 배치를 종합한 교육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 담론적 실천을 넘어선 정치적 실천을 담을 제도(혹은 정책) 개입을 위한 노력, 그리고 대중들의 일상에 대한 담론생산과 개입을 요청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감하고 있다. 이 같은 이동연의 지적은 영문학계에서도 변방으로 대접받는 탈인문학 기획으로서의 문화연구를 전향적으로 주창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응숙은 이동연의 이 같은 지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매체를 테크놀러지와 같이 놓거나 혹은 테크놀러지의 산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매체의 확장을 통해 문화연구가 더욱 윤택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점쳐보고자 한다.27) 생활맥락의 총체성에서 사물로서의 매체가 아니라 경험의 종류들로서의 매체가 갖는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다.


정재철은 국내의 드라마 연구들이 기호학에 기댄 텍스트 분석과 민속지학을 업은 수용자 연구로 대별되고 있었음을 밝히면서 그것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28) 기호학-텍스트, 민속지학-수용자로 대별되는 간단한 도식을 벗어날 필요성이 텔리비젼 드라마 연구에 요청된다 하겠다. 래드웨이(J. Radway)가 행했던 정신분석학과 민속지학의 절합을 통한 연구나 앵(I. Ang)이 행했던 두텁게 읽기와 같은 심층 해석 등도 도입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행해진 텍스트 분석이나 수용자 분석이 사회성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해석의 두께, 사회성, 역사성의 강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정재철은 구체적으로 ‘문화연구 하기’의 방법을 언급하면서 지금까지는 그 방법들이 너무 협소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국내 언론학이 행한 문화연구에 가해진 지적들을 종합하면 약 4가지로 압축되는 듯 하다. 첫째, 텍스트, 수용자 연구에 집중되어 있는 바 맥락과 역사 그리고 운동성을 상실하고 있다. 둘째, 장기 지속을 통해 이루어진 사회적 무의식 등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일회적 연구에 그치고 있다. 셋째, 미디어에 대한 정의가 지나치게 협소해 미디어 문화 전반을 읽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넷째, 연구를 위한 방법론 등에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까지의 언론학내 문화연구들을 종합한 논문의 결론과 이 같은 지적들을 대비해보았을 때 몇몇 비판 및 평가들은 여전히 유효함을 알 수 있다. 다만 기존의 평가들을 약간씩 수정해 더 구체적이고 전향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텍스트, 수용자에 대한 연구를 역사와 운동성에 연관짓자는 주장은 약간 다른 식으로 수정될 수 있다. 텍스트나 수용자 연구의 집중이 - 우려한 바와 같이 - 문화연구의 약점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보다는 텍스트와 수용자 연구들이 다른 범주의 연구들과 절합(articulation)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것 같다. 즉 여러 연구들을 서로 구체적으로 접합시켜 보는 노력을 해보자는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에 대한 정의가 협소하게 이루어지고 몇몇 매체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점차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디어 문화 전반을 읽어낼 수 있는 지평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은 유효해 보인다. 국내 언론학의 문화연구의 빈 공간인 매체가 메시지가 되는 과정이라든지, 미디어 제도, 문화산업 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서 보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를 통해서 대중들이 처해있는 미디어 환경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고, 새롭게 연구 영역을 키워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연구 방법론은 문화연구 내 매체 연구들이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사안으로 부가되고 있다. 이 부분은 꾸준히 문제점으로 지적되면서도 대안 제시가 부족한 형편이라 아직도 미궁을 헤맨다는 느낌을 주는데 연구의 다양성, 양적인 증가를 통해 본격적인 논의를 펼쳐야 할 부분처럼 보인다. 문화연구가 아직 언론학계 내에서 완벽하게 시민권을 획득한 패러다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더 많은 연구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직접적인 원인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더 많은 논의, 메타 논의들을 양산해야 할 것이다.


스튜어트 홀은 미디어 연구를 세 겹의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Hall, 1980). 첫째, 미디어 생산자가 의도한 의미를 통해 미디어를 연구하는 층위를 들 수 있다. 즉 생산과정을 주도하는 문화적 코드를 찾아내고 그를 통해 미디어를 규정하는 것이다. 둘째, 미디어에 드러나는 불평등한 사회의 정당화를 찾아내는 층위다. 셋째는 미디어 텍스트의 소비과정을 추적하는 층위다. 홀은 이 같은 층위들에 대한 관심이 분절적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제안한다. 이와 같은 세 겹의 과정을 모두 추적해 문화연구의 미디어 연구를 집대성한 연구가 <위기관리> (Policing the Crisis : Mugging, the State, and Law and Order) 이다 (Hall et al. 1978). 1970년대 초 영국의 국가 위기를 매체는 강도(mugging)와 접합시켰다. 강도는 사회의 무질서와 도덕적 붕괴의 징후로 매체에 의해 규정되었다. 강도는 사회를 어지럽히며 영국의 가치를 거스르는 민중의 악마로 규정되었다. 이 같은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도덕 교육 강화, 규율 강화, 사회적 환경의 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매체의 이 같은 규정과 주장을 통해 국가는 권력 사용에 대한 시민적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지배집단은 사회위기의 근원을 숨기고 그들의 지배와 정당성을 유지하고 시민충성을 구해냈다. 소위 대처리즘 등장의 토대가 형성된 것이다. <위기관리>는 홀이 주장한 세 겹의 과정을 될 수 있는 한 섭렵하려 한 연구다. 특정 담론의 생산조건으로부터 시작해서, 담론의 내용, 그리고 사회적 순환에 이르는 과정을 모두 포괄했다. 문화연구에서 미디어 연구를 <위기 관리>처럼 집대성한 경우는 많지 않다. 이후로는 오히려 생산자, 텍스트, 독해 등에 대한 각론적 연구가 더 많아졌다. 문화연구가 연구소 중심의 간학문적 협동 연구의 관습을 벗어나자 CCCS의 미덕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연구소를 벗어난 많은 학자들은 대학의 제도권 학과로 스며들었다. 그로 인해 오히려 분과학문적 전통이 문화연구 안에 삼투되어 각론 연구가 붐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의 미디어 연구 탓에 문화연구는 (신) 수정주의라는 비난에 봉착하게 된다.


지금까지 논의된 대부분의 문화연구 패러다임 미디어 연구들도 수정주의 혐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위기 관리>에서 보여주었던 치열함에 비하면 ‘맥이 많이 빠졌다.’ 수정주의라는 용어가 갖는 함의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근래의 문화연구에서의 매체 논의는 ‘이념적 퇴행’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도 하다. 하지만 스튜어트 홀의 문화연구적 미디어 연구에 대한 제안은 어디까지나 7, 80년대 영국 상황에 맞춘 제안일 뿐이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국제적 질서, 정치 경제적 상황 등은 상상키 어려울 정도로 바뀌었다. 국면적 연구를 미덕으로 내세우는 문화연구에서 원전을 찾고 그를 규범으로 잡아 특정 시간대의 특정 지역의 문화연구를 평가한다면 덜 문화연구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연구적 미디어 연구는 다르게 요청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홀이 논의했던 이른바 중간서기의 시도가 좀 더 치밀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겠다. 수정주의적 미디어 연구들이 지나치게 즐거움이나 욕망에 천착하면서 이데올로기 등을 주변으로 밀어냈는데 밀어내기가 아닌 중간서기 혹은 둘 간의 접합이 요청된다. 미디어 텍스트를 통한 즐거움이 중요한 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고 전향적인 미디어 텍스트 그리고 성찰적인 비판 등도 소중하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이는 감성과 이성의 구분이나 차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 간의 접합의 가능성을 점치는 일이 필요한데 실제는 그런 고민이 부족하다. 문화운동을 벌이는 문화연구자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문화운동을 벌이는 연구자는 문화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또 그런 만큼 미디어를 즐기는 하위집단의 즐거움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한 연구자가 보여주고 있는 서로 다른 형식의 비판 혹은 저항을 어떻게 수렴해낼 것인가 하는 일이 필요하다. 즉 수용자 전략을 인정하면서도 제도의 합리성 추구라는 부분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언론학계의 문화연구에서는 거의 고민하지 않고 있다. 수용자 연구의 중요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수용자의 능동성에만 기댈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부추김(empowerment)도 필요하고 그에 맞추어 운동성을 가진 조직화, 조직화를 통한 제도의 개선, 감시 등도 요구된다. 욕망의 정치와 생산의 정치를 연결짓는 심각한 고민이 필요함을 말한다.


두 번째는 매체를 확장해서 인식하는 일이다. 이 또한 홀의 주문과도 통한다. 일상에서의 상징을 매체로 확장하는 움직임을 최근 몇몇 연구들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진 못하고 있다. 그에 더해 특정 미디어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 일종의 - 소재주의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특히 매체 전반의 환경 즉 미디어 정경(mediascape)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져야 할 것 같다. 미디어 정경이란 매체의 병렬이 빚어내는 사회적 조건, 매체간 차이로 인해 생성되는 파열, 신 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구 매체의 변화 등등을 의미한다. 매체 정경에 관한 관심은 우선 분과주의적 학문작업을 소멸시켜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분과학문주의 탓에 연구로부터 소외되는 매체가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신문방송학과라는 명칭은 다양한 매체를 언급할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고 있다. 사이버 매체(인터넷, 가상현실), 전시공간(박물관, 백화점, 테마파크, 엑스포 등), 인체 활용 매체(의상, 액세서리, 문신 등), 공간활용매체(벽화, 낙서, 설치미술 등)... 사실 이 같은 매체들은 대중매체와 상당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대중매체는 이들 매체들을 통해 생산된 성과물들을 재현해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 창작의 예술, 제도적 예술창작, 대중매체에 의한 대중문화물 생산, 독립 프러덕션에 의한 대중문화물 생산, 그리고 문화예술 교육, 테마파크/박물관/백화점 등과 같이 대중들이 직접적으로 문화예술물들을 대할 수 있는 공간 등등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어떤 고리로 접합 혹은 탈구(dis-articulation)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겠다. 그리고 전향적 변화를 위해 탈구를 재접합(re-articulation)할 수 있는지를 전략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세 번째는 문화연구가 담론적 실천으로 그치지 않고 문화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홀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문화연구가 애초 사회적 개입을 전제로 한 그람시에 기대 큰 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그람시적 실천은 사라지고 그람시적 이론만 남는 영역이 되고 말았다. 행정적 매체 연구가 훨씬 더 유기적으로 정책 등에 개입하고 있는 사이에 문화연구의 매체 연구는 행정적 매체 연구를 - 은연중에 - 비판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문화연구가 실천과 개입의 현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연구는 개입해낼 수 있는 현장을 발굴해내고 운동으로 진전시키는 실천성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담론적 실천을 폄하하고자 함은 아니다. 하지만 담론적 실천은 여전히 조직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담론적 헤게모니마저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 현장을 만들고 조직적 개입을 도모하는 일은 더 미룰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네 번째, 전 지구화되는 경향에 맞서는 지방화(localization)의 전략을 도모하는 일이다. 이는 홀과 영국 문화연구가 결여하고 있는 가장 약한 고리인데 이 부분은 아무래도 국내 언론학자, 문화연구자들에 의해 치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 같다. 국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보여 주었던 10여전 관심에 비하면 전 지구화 경향이 강하게 진전되는 지금의 관심은 참으로 보잘 것이 없다. 문화연구가 애초부터 국제적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오지 못했던 것은 서구 중심의 학문적 배경이란 점을 감안해 인정해줄 수는 있지만 국내 연구들 조차 이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비판의 소지를 안고 있다 하겠다. 전지구화를 제어할 힘이 없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대응을 마련하는 일을 필요하다. 최근 벌어졌던 스크린 쿼타 문제 등에 문화연구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문화제국주의론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 논의해보자는 제안들이 있었긴 하지만 여전히 추상성에서 머물고 있으며 구체성을 띠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문화연구자들이 내세우는 탈 식민주의 논의들을 수입해보기도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서구 속의 제 3세계(diaspora)라는 점, 페미니즘 등과의 마찰 등으로 인해 현실에 적용하기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결국 전 지구화에 관해서는 적절한 이론적 체계와 구체적 연구 모두를 결여하고 있는 셈이다. 테크놀러지의 진전으로 인한 전 지구적 공진화(co-evolution) 그리고 민족 국가의 문제, 전지구적 문화확산에 따른 욕망의 정치의 세련화, 그에 맞선 단위 국가 내 저항 등등을 한데 고민할 수 있는 연구 패러다임의 수립이 절실하다 하겠다.


언론학 내의 문화연구는 이제 태동기를 지나 청년기에 들어서고 있다. 이론의 수입 그리고 국내화, 정교화와 함께 실천화에 돌입할 단계라 생각된다. 최근 들어 동인 형태의 집단들이 생기고 그를 통한 출판 등의 연구가 왕성해짐은 그 같은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조짐으로 보인다. 좋은 조짐이 구체적인 성과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지식 생산이 단순히 책상머리에서의 은근과 끈기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주변 영역과의 경쟁과 투쟁, 집단 내 치열한 합의 생산, 그리고 학문세계에서의 동의 및 헤게모니 등으로 구성되는 정치적 영역임을 인식하는 일이 더욱 시급히 요청된다. 한층 성숙된 성인기를 맞기 위한 더없이 중요한 시간 속에 문화연구는 살고 있다. 이 논문의 중간점검이 유용한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

 

각주

1) 이 글은 <문화과학> 23호에 실린 ‘문화연구와 스튜어트 홀’과 <한국방송학보> 14-3호에 실린 ‘미디어 연구의 반성과 전망’을 종합하여 다시 정리한 것이다.

 

2) L. Grossberg, "History, Politics and Postmodernism : Stuart Hall and Cultural Studies," Journal of Communication Inquiry, 10, 2, 1986, pp.61-77.

 

3) 사이드먼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사회이론을 적은 한 사회학 교과서에서 과학과 정치학 사이라는 소제목으로 스튜어트 홀, 하버마스, C. 라이트 밀스를 언급하고 있다. 홀은 맑시즘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 인물로, 문화연구를 대표하는 인물로 사회학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스티븐 사이드먼, <지식논쟁 : 포스트 모던 시대의 사회이론>, 박창호 역, 문예출판사, 1999, 297-307쪽.

 

4) 그로스버그는 문화연구의 전통을 1) 문학적 휴머니즘(literary humanism), 2) 변증법적 사회학(dialogical sociology), 3) 문화주의(culturalism), 4)구조주의적 국면주의(structural conjunctural), 5) 포스트모던 국면주의(postmodern conjunctural) 등으로 나눈다. 그로스버그에 따르면 홀의 연구는 이중 3)4)의 전통에 걸쳐져 있다. 문화주의 연구에서는 주로 구조속 저항에 관심을 쏟았던 하위문화연구, encoding-decoding emdd[ 초점이 맞추어 졌다. 그리고 홀은 이 전통 시기에서 알뛰세와 그람시를 동시에 절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쳤다. 구조주의적 구면주의 전통에서는 푸코와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막중했고, 주체와 관련해서 국면주의, 혹은 접합을 강조했다. L. Grossberg, "The Formations of Cultural Studies : An American in Birmingham," in V. Blundell (eds.) Relocating Cultural Studies : Developments in Theory and Research, London : Routledge, 1993, pp.21-66.

 

5). S. Hall, "Notes on Deconstructing 'the Popular'" in R. Samuel (ed.) People's History and Socialist Theory, London : Routledge, 1981, pp.227-239.

 

6) L. Grossberg, on Postmodernism and Articulation : An Interview with Stuart Hall," Journal of Communication Inquiry, 10, 2, 1986, p.52.

 

7). S. Hall, "Cultural Studies and the Centre : Some Problematics and Problems," in S. Hall et al. (eds.) Culture, Media, Language, London : Hutchinson, 1980, pp.15-47.

 

8) S. Hall, "Gramsci's Relevance for the Study of Race and Ethnicity," Journal of Communication Inquiry, 10, 2, 1986, pp. 8-9.

 

9) M. Morris, "Banality in Cultural Studies," Discourse, 1988, 10, pp.3-29.

 

10). S. Hall, "The Problem of Ideology - Marxism without Guarantees," in B. Matthews (ed.) Marx 100 Years on, London : Lawrence and Wishart, 1983, pp. 57-86.

 

11). 앞의 글.

 

12). S. Hall, "Signification, Representation, Ideology : Althusser and the Post-Structuralist Debates," Critical Studies in Mass Communication, 2, 2, 1985, pp. 91-114.

 

13). 홀은 이 차이를 두고 알뛰세의 두 저작간 즉 For MarxReading Capital 간의 차이라고 보고 있다. 홀은 전자를 더욱 선호한다며 그 이유를 덜 구조주의적이고, 덜 환원적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4). S. Hall et al. (1979), Policing the Crisis : Mugging, the State, and Law and Order, London : Macmillan, 1979.

 

15). E. Laclau and C. 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 Towards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 London : Verso, 1985.

 

16). S. Hall, "Notes on Deconstructing 'the Popular'" in R. Samuel (ed.) People's History and Socialist Theory, London : Routledge, 1981, pp.227-239.

 

17). L. Grossberg, on Postmodernism and Articulation : An Interview with Stuart Hall," Journal of Communication Inquiry, 10, 2, 1986, p.54.

 

18) S. Hall, "Cultural Studies and Its Theoretical Legacies," in L. Grossberg et al. (eds.), Cultural Studies, New York : Routledge, 1992, pp.277-286.

 

19) S. Hall, "Theoretical Legacies" in Cultural Studies, p. 281

 

20) 임영호 편역, 150-1쪽.

 

21). 강내희, “분과학문 체계의 해체와 지식 생산의 절합적 통합,” <문화과학>, 11호, 1997, 13-35쪽.

 

22) I. 월러스틴 외, <사회과학의 개방> (사회과학 재구조화에 관한 괼벤키안 위원회 보고서), 당대, 1997, 87-9쪽.

 

23) 언론학에서의 문화연구에 대한 이같은 지적은 임영호, “한국 언론학의 영역주의와 정체성의 위기,” <한국언론정보학보>, 11호, 1998, 3-31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24) L. McLaughlin, "Beyond "Separate Spheres" : Feminism and the Cultural Studies / Political Economy Debate," Journal of Communication Inquiry, 23, 4, 1999, pp. 327-354.


25) 유선영, “홑눈 정체성의 역사 : 한국 문화현상 분석을 위한 개념틀 연구,” <한국언론학보>,   43-2호, 1998, 427-467.


26) 이동연, “한국 문화 연구의 과정과 실천 토픽들,” <현대사상>, 제 3호, 1997, 62-82.

 

27) 김응숙, “문화연구와 일상경험의 세계 : 발터 벤야민의 매체개념과 수용에 관한 논의,” <한국언론학보>, 42-3, 1998, 66-99.

 

28) 정재철, “한국 텔리비젼 드라마 연구 경향 분석 : 기호학과 민속지학 방법론을 중심으로,” 황인성, 원용진(편), <애인 : TV 드라마, 문화 그리고 사회>, 한나래, 1997, 257-284.


원용진 

경남 진해 산.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별 생각없이 상경. 신촌의 작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학부와 대학원 졸업. 졸업후 문화관광부 전문위원으로 국가홍보(?)에 잠깐 투신. 위스컨신 대학에서 ‘즐거운 문화론자’ John Fiske의 지도로 박사학위. 현재 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일들을 맡고 있음.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스크린쿼터 시민연대>, <영화인회의>,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등에서 일하고 있음. 펴낸 책으로는 <텔리비젼 비평론>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광고문화비평> <현대대중문화의 형성> <한국언론민주화의 진단> <애인>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