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가 남긴 짧은 우화
그러던 어느날 A는 자신의 도끼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져보았지만 A가 아끼던 도끼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허탈한 심정으로 마당에 나와 있던 A에게 이웃인 B가 정답게 인사를 했다.
그 다음날 아침 A는 자신의 창고 한 켠에서 그토록 찾던 도끼를 발견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도끼를 손질하기 위해 잠시 창고에 넣어두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도끼를 손에 들고 마당에 나와 있던 A에게 B가 또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어제와 달리 B의 행동은 평소처럼 다정다감했고, 농담은 유쾌하게 들렸다. B의 행동 하나하나가 A에게는 예전과 같은 정다운 이웃처럼 보였다.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편견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대하고 세상을 관찰한다. 그래서 그러한 편견으로 인해 때로는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되거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게 되기도 한다. 고집스러운 편견 앞에서 이성과 논리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한낱 장식물로 전락하게 된다. 브레히트가 우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바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 안에 내재한 선입견 혹은 학습된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진실과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한다.
자, 이번에는 당신이 주인공이 되어 보도록 하자. 상황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한 남자가 갑자기 시끄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 남자는 버스에 탄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떠들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급한 업무 때문에 흥분한 상태인 것 같다.
만일 그 날따라 당신의 컨디션이 엉망이었고 고된 하루를 보낸 뒤였다면, 당신은 그 남자의 행동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또 만일 그가 당신도 잘 아는 불한당같은 남자였다면, 혹은 반대로 그가 너무나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면, 당신의 반응은 똑같았을까?
이번에는 당신이 MT를 떠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야간열차를 탔다고 하자. 대학 신입생이 되어 처음 떠나는 여행에 들뜬 당신과 친구들은 함께 노래도 부르고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한다. 같은 객실에 탄 몇몇 승객들은 그럴 나이라며 양해를 해주었지만, 몇몇 승객들은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 때 한 중년의 남자가 벌떡 일어나 당신과 친구들을 심하게 꾸짖는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예전에 '개똥녀 사건'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지하철에 개를 안고 탄 한 여자가 자신의 개가 지하철 안에서 실례를 한 것을 치우지 안고 그대로 내린 것을 폰카로 찍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그 여자의 인터넷 홈피는 네티즌들의 뭇매를 맞았을 뿐 아니라 개인 신상정보까지 유출되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인터넷 시대가 낳은 집단광기 혹은 익명의 집단이 한 개인에게 행한 마녀사냥의 대표적 사례로 외국에서조차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개똥녀'가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은 것도 맞고, 그녀에게 개의 배설물을 치우라고 요구했을 때 그녀가 보여준 무례한 행동 역시 비난받아 마땅한 만한 행동 이었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에게 '정의의 이름'으로 일종의 집단 린치를 가했던 것은 올바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여자가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하니 비난을 해도 좋다는 논리는 정당한 것일까?
그런데 혹시 자신은 정의롭기 때문에 그 여자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를 비난해야만 자신은 정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비난하는 무리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되었기 때문에 이성이 마비된 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일말의 반성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사건에서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징후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좌와 우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논리 하에서는 '개똥녀'를 비난하는 사람만이 정의로운 사람으로 입증되고, 그의 개인적 입장을 고려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에서는 성찰을 통한 성숙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고, 끝없는 희생제의만이 반복될 뿐이다.
결국 개개인은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생각할 지 모르나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개똥녀'에게 가한 폭언과 비난은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또 다른 범죄였을 뿐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 때 역시 언론은 '개똥녀 사건'을 가십거리로 다루면서 사건을 더욱 증폭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인터넷 블로그나 게시판에 자극적인 글이나 동영상이 나타나면, 네티즌들은 그것을 이곳저곳으로 퍼다 옮기고, 기자들은 그것을 자극적인 제목과 선정적인 내용으로 기사화해서 더 많은 대중들에게 유포시키고, 그러한 기사들은 다시 인터넷 여론을 더욱 확대 증폭시키면서 악의 순환 구조가 완성된다.
그러나 한 사회가 도덕적으로 엄격함을 요구할수록 그것은 오히려 그 사회의 불건전성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사회 지도층이 법과 질서를 스스로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사회적 귀감이 될 만한 윤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면, 일반 시민들의 삶 역시 온화하고 너그러워 진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일반 시민들은 지배층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감시자 역할을 자청해서 나서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엄격한 칼날에 희생당하는 것은 부패한 지배계층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도 자신들이 휘두른 칼에 희생양이 되고 마는 역설적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범죄자가 희생자로 탈바꿈되고, 징벌자가 오히려 범죄자가 되는 이러한 역설적 상황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편견이 한 사람의 죄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해야 하고, 일의 경중과 전후 사정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하며, 분노에 감염된 집단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어서 그들을 관찰해야 하고, 집단의 주장이기 때문에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집단이 정의로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에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진지한 성찰보다는 성급한 행동이 먼저 이루어지는게 작금의 현실이라는 사실이 씁쓸할 따름이다.
by ddolapp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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