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0일에는 6.10항쟁 21주년을 기념하여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촛불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침 촛불집회 행진을 막기 위하여 세종로 일대에 설치된 컨테이너 장벽을 사진으로 보니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마치 콘테이너 박스 위에 올라서 계신 것 같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보니 하늘에 계신 그 분에게 부끄러운 후손들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 같아 낯이 다 화끈거리더군요. 뭐 그래도 현명한 후손들은 콘테이너 박스 담벽을 "경축 08년 서울의 랜드마크 명박산성"이라 부르고, 그 앞에서 사진도 찍고 토론도 하며 유연하게 대처는 했습니다. 그래도 6.10 촛불집회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가 참 인상적이죠.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들은 참 남다른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통의 단절을 상징하는 컨테이너 박스 무더기를 본 국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는 지 예상보다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그 날의 촛불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서울에서만 촛불집회 주최측 추정 70만명, 경찰 추정 8만명의 인원이 참가한 이 날의 평화 시위에서 시민들은 가뿐하게 "명박산성"을 점령해버렸습니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 중에 "히드라 웨이브"라는 전술이 있는 데, 시민들의 물결이 그들 앞에 가로놓인 민주주의의 장벽을 뛰어넘어 버린 것이죠.
그런데 "그 분"은 참 이상한 것 같습니다. 지난 5월 22일에 있었던 대국민 담화에서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며, 국민과의 소통을 다짐하지 않았나요? 물론 그 담화 역시 잘못된 정책 운영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라기 보다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겠다는 삐뚫어진 고집이 엿보이긴 했지만 말이죠.
그리고 그 뒤로 "국민의 소리"를 들어보겠다며 각개 각층의 인사들을 만났지만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는 이상한 소통 방식을 보였다죠 아마. 그런데 "그 분"이 정작 만났어야 할 사람들은 광장에 보인 시민들이 아니었던가요?
저는 사실 "그 분"이 TV에 나와 국민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을 때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힘있는 사람들에게 워낙 고개를 잘 수그리시는 습관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강재섭 대표에게 90도 각도로 절하며 악수하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 인사하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고개 숙인 방우영 명예회장
귀엣말 전하는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일왕에게 고개 숙인 이명박 대통령
6월 22일 대국민 담화 발표장에서 국민들에게 고개 숙인 이명박 대통령
그런데 30일 밤 중국순방에서 돌아온 후 촛불집회 보고를 받고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며 버럭 화를 냈다고 하는 걸 보면 "그 분"에게 국민들은 아직 두려운 상대가 아닌가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민들이 모두 광우병 괴담에 현혹되어 있거나 불순한 배후세력의 조종을 당해서 촛불집회에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학생들부터 70세의 연세가 넘는 어르신들까지 손에 촛불을 든 까닭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지는 현재로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분"도 한 때는 나라의 치욕스러운 외교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나왔던 경험이 있는 분이십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경제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과 굴욕적인 협정을 맺은 것을 항의하기 위하여 청와대 길목에서 군경과 대치중인 대학생들 (1964. 6. 3.)
6.3 시위 관련해 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청년 시절 이명박 대통령(가운데)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었던 "그 분"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 세대의 당연한 의무였다"라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더군요. (참고: 청와대 '진격 투쟁' 배후에 있던 청년 이명박,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15374&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NEW_GB) 그러셨던 분이 정의감에 충만해서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의 배후를 조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라는 속담이 맞는 것인가요 아니면 "화장실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르다"라는 속담이 맞는 것인가요? 무지렁이 백성들이 지난 세월 축적된 민주주의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규모 집회를 평화롭게 끝낸 마당에 한 나라의 지도자께서 그러한 소중한 역사적 경험을 망각하시면 곤란한 일 아닌가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 분께서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진 현장에는 꼭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던 것 같네요.
서울 시장 시절 숭례문 개방 행사에 참석하신 이명박 대통령(2006.3.3.)
뭐 그 뒤로 숭례문은 불에 타서 없어졌지만 말이죠. 뜬금없는 상상이지만 "그 분"의 손은 혹시 마이너스의 손이 아닐까요? 마이더스의 손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하게 만들었지만, "그 분"께서는 손 대는 건 무엇이든 잿더미로 만드는 재주를 지니셨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 분"께서 올해 4.19 기념일 때 이 나라에 안 계셨던 것도 어쩌면 고매한 뜻이 계셔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하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4.19 기념식날 한 일
역사나 전통과 같은 구질구질한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도덕성 논란에도 "그 분"을 선택했던 것은 땅 값이나 많이 올려서 돈이나 손쉽게 많이 벌게 해주고, 일자리나 많이 만들어서 국민들 배 부르고 등 따뜻하게 해주면 괜찮다고 이미 국민들이 동의한 일 아니었던가요? 그러니 지금과 같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 사전에 "익스큐즈"되었던 셈이지요.
그래도 카트를 모는 "그 분"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뵈니 저 연세에도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으신 분이 아닌가 합니다. "역겹다", "쥐대가리다", "뇌용량이 2MB도 안된다" 라며 폭언을 서슴지 않는 분들도 계시긴 하지만 그건 시선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있지도 않은 권위를 내세우며 잔뜩 똥폼을 잡는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희극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들뢰즈 같은 프랑스의 철학자는 독일의 문학가 카프카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웃음의 요소를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할까 합니다. 저 콘테이너 바리케이트가 혹시 누구의 작품인가 알고 계신가요? 예, 바로 어청수 경찰청장의 작품이라 합니다. 2005년 11월 부산APEC 반대 시위 당시 부산청장이었던 어 청장은 그 때에도 콘테이너를 이용해 방벽을 쌓았다고 하네요. 물론 시위대가 컨테이너 10여개를 넘어뜨리는 과정에서 전경과 시위대 수십 명이 다치기도 했지만 당시 컨테이너벽 설치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뭐 사람들이 조금 다친 게 대수이겠습니까. 살수차를 동원하건, 방패로 비무장한 시민들을 내리찍건 간에 불순 세력들의 도발만 성공적으로 원천봉쇄하면 됐지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래서 아마 "그 분"께서도 그런 어청수 경찰청장이 마음에 드셔서 이번 촛불집회 진압을 맡기셨나 봅니다.
제53주년 현충일 추념식에서 어청수 경찰청장과 악수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그런데 다들 다음 수 정도는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지금 어떤 생각들을 하고 계신 지 무척이나 궁금하군요. 누가 GG를 치건 간에 아무쪼록 서로 무탈하게 게임을 마치셨으면 합니다. 저는 계속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며 지켜보고 있을랍니다.
#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 추가합니다.
- 경찰은 왜 하필 '그리스'를 칠했을까?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61101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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