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화(神話)관
※ 자료출처 : 중국 신화관의 변천과정 연구 (宣 釘 奎)
□ 序 言
신화가 인류의 정신문화의 모태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 민족의 시원과 그 민족의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는 첩경이 바로 신화이며, 서양문화의 근저를 흔히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찾는 것도 이와 같은 연유에서이다. 서양에서는 기원전 6세기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에 의해 최초로 寓意說이 제시된 이래 21세기가 열리는 오늘에도 레비-스토로스(Claude Levi-Strauss)의 구조주의 이론과 죠지 두메질(Georges Dumezil)의 三元構造論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화에 관한 이론이 제시되어왔다. 한마디로 신화는 인류의 정신문화에 영향을 준 모든 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 신화의 본질과 가치에 대해 인식하고 긍정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에 비롯된 것이다. 중국 역사상 신화의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 약간의 미미한 인식이 비록 있긴 하였지만 총체적으로 신화를 왜곡하거나 부정하여 역사화 종교화 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전통시기의 신화연구가 특정인들에 의한 山海經 주석과 주로 '神怪'에 관한 고증을 하는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엄격한 의미로 말하자면 고대 중국에는 전문적인 신화의 관념이 전무하였으며, 중국의 신화연구는 서양문화의 이입의 산물로, 금세기 초에 맹아하기 시작한 신흥 학문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통시기의 중국 신화관이 비록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가치 인식의 수준이 저급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의미있는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 환경과 개인의 학문성향에 따라 다양한 신화관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근 현대에 이르러서는 연구의 역사가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종사하는 인원과 방법 그리고 이론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미 상당한 학문적 성과가 누적되었고 또 새롭게 발전해 가고 있는 추세에 있다.
※ 이에 대해 종경문은<中國神話學文論選萃 序言> 중에서 "이러한 (신화학의 기초를 세우는) 공정이 비록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미 튼튼한 기초를 확립하여서 이민 선진 세계신화학의 학술광장에 선명한 중국의 깃발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학술사상 경축할 만한 일이다."라고 자평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일관된 하나의 전통 바로 文化 一元主義로 표현되는 '中華意識'이 고대 중국이나 근 현대를 막론하고 연구목적과 그에 따른 신화관의 저변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고는 先秦에 淸代를 거쳐 근 현대 시기에 이르기 까지 각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인사들의 신화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고찰함으로써 중국의 역대 신화관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중국에 있어 신화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크게는 중국인들의 사유체계의 흐름을, 작게는 각 시대에 따른 그들의 상고 역사관을 살펴보는데 일조를 하는것에 그 목적이 있다. 중국의 고대 전적에는 '신화'라고 하는 어휘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역대 학자들은 소위 '怪異' '虛妄之言' '神怪之說' '古今語怪之祖' 등의 어휘로 신화현상을 설명하거나 자신들의 신화에 대한 견해를 밝혀 왔다.
※ 예를 들면 論語 述而 편의 "子不語怪力亂神"이나, 莊子 逍遙遊 "齊諧者, 志怪者也", 史記 大宛列傳 의 "禹本紀, 山海經所有怪物, 余勿敢言之也" 등이다. 소위 "怪"에 신화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러나 "怪"字의 함의가 단순히 신화의 범주에만 그치지 않고, 기타 황당무계하고 괴이한 것과 종교적 미신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異"字에는 신화와 "常"과 대립되는 일체의 사물을 개괄하였다. 때문에 "怪異"는 중국 고대의 신화관념을 대표할 수 있는 자휘이긴 하나 그 범주는 오늘날에 말하는 신화와는 크게 다르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결코 과학적이거나 체계적인 연구나 이론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논저와 시문을 통해 피상적인 인식이나 견해로서 밝히고 있을 따름이다. 이 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殷周
殷商 시대는 중국신화사의 입장에서 보면 신화가 그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각종의 祭儀를 통해 살아 숨쉬는 시대이다. 즉 汎神論에서 발전된 자연관※중국 원고시대의 범신론적인 자연관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문헌이 산해경이다. 다만 작자와 성립시기 및 그 성격과 문화적 배경에 관해서는 역대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여 일치된 정론을 내릴 수 없을 정도이다. 다만 지금까지 논의된 대로 그 문화적 배경이 초문화이든 북방문화이든 아니면 고대문화의 백과사전이든 간에, 그리고 그 성격이 고대의 地理書건 巫書이건 아니면 민속학적인 성격을 지닌 地方志이건 간에, 또 그 저자가 一人이 아니고 성립시기가 商代에서 魏晉南北朝에 이르는 1,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있드라도 가장 중요한 관건은 "고대에서부터 전승되어 온, 문화의 발전에 따라 수반된 '오염'을 거치지 않은 아득한 옛날의 지식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지식이 "반영하고 있는 의식형태가 주로 종교성질을 띠고 있는 신의 신앙으로, 사람이 죽은 후는 물론 山水海澤, 風雲日月, 昆蟲鳥獸 등도 모두 신이 있다"는 汎神論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 조상 숭배에서 승화된 上帝 관념이 지배하던 시기로서, 연구의 대상으로서 化石化된 신화의 시기가 아니라 신화가 시대를 장악하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기 "殷人들의 上帝는 바로 帝 으로, 至上神(최고신)으로서 祖上神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비록 그 신격이 비록 조상신에서 전화되어 왔다고 할 지라도 자연계와 인간계의 최고의 主宰였다."
즉 殷人들의 관념 속에서는 신화는 단순한 전승의 의미가 아니라 神聖의 존재로서 생활 자체였다. 비록 巫覡의 힘을 빌려야 하였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는 인간과 신이 단절되고 고립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사를 전달하고 교왕할 수 있는 동일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들 자연신들은 죽은 조상이 승화되어 형성된 帝 혹은 上帝의 통수를 받는다. 아울러 "帝나 上帝는 천지간의 모든 일과 인간화복 즉 농산물의 수확, 전쟁의 승부, 도시건설의 성패의 주재자이자 殷王에게 화복과 아울러 기근과 질병 및 홍수를 주재하는 최고의 권위이다." 또 "上帝는 그의 帝政을 가지고 있어 日月과 風雨 등의 자연신을 그의 관리로 사용하여 그의 의지를 인간세상에 시행한다. 殷王이 帝에게 기원할 때에는 반드시 제정으로서 제사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동시에 죽은 先王만이 '賓'을 통하여 上帝를 직접 알현할 수 있다. 殷王은 풍년제나 기우제를 지낼 때에 그 기원을 알리고, 선조는 上帝에게 '賓'을 행함으로써 人王의 기원을 전달한다." 아울러 죽은 조상은 직접 神界에 도달할 수 있다. 살아있는 왕이 죽은 조상에 대해 의식을 거행하고 죽은 조상은 다시 '賓神'한다. 때문에 商人들은 조상의 세계와 신의 세계는 직접 통할 수 있으나,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의 세계와 조상의 세계 사이, 또 살아있는 사람의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에는 巫覡의 의식을 통해서만이 소식을 전달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 마디로 '人神交往'의 시대이자, 巫師 巫覡에 의해 신화가 재생되던 '참된신화' (※'참된 신화'란 인생에 대한 본질적이고도 결정적인 사물을 대상으로하여 본질적인 종교적 기초와 진실성을 갖춘 신화를 말한다.) 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國語 楚語 등의 문헌에 重과 黎에 의한 "絶地通天"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楚의 昭王이 대부 觀射父에게 묻기를, 周書에서 말하는 重과 黎가 天神과 地民을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만약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상의 사람이 하늘에 오늘 수 있다는 말인가? 觀射父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周書에서 말하는 것은 이러한 뜻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백성의 일을 다스리는 관리와 神明을 받들어 모시는 관리가 서로 뒤섞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精明하고 한결같은 그런 사람들은 신에 대해 줄곧 엄숙하며 내심으로 경건하여, 그들의 지혜는 天神과 地民으로 하여금 제각기 있을 자리에 있게 하였으며, 그들의 도덕은 널리 대지를 비추었으며, 그들의 안력은 천지를 통찰하고 그들의 청력은 일체를 통달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신명이 바로 그에게 내려오는데, 남자를 覡이라 부르고 여자를 巫라 불렀습니다.
당연히 國語 楚語 에 기록된 昭王에 대한 觀射父의 대답은 "絶地通天"의 신화적 관념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부정으로부터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絶地通天"의 신화는 觀射父에 이르러서는 이미 이성적으로 인식되고 해석되어 신화 본연의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巫覡을 중심으로 한 단순한 종교적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重과 黎에 의해 "絶地通天"이 있기 전에는 천상과 인간의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아, 상호 교왕하였다는 신화가 보편적으로 전승되어 신봉되어 왔음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점은 詩經 의 대표적인 史詩로 일컬어지는<大雅>의<生民>,<公劉>,,<皇矣>와<大明>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즉 이 5편의 史詩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周민족의 창업 개국의 역사를 읊은 시가로, 周민족 조상의 탄생으로부터 開創과 발전을 거쳐 紂王을 타도하고 周朝를 건립하기 까지의 기원전 21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는 약 천년 좌우의 역사를 祝頌하고 있다.
趙沛霖의 분석에 따르면, 이 5편의 史詩를 관념의식의 발전의 각도에서 보았을 때 그 저작이 후대로 갈수록 신화적 요인은 체감되는 대신 종교신학의 요인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즉 生民에서는 사람, 신은 물론 나아가 설사 조수와 산림 차거운 얼음 조차도 모두가 예외 없이 感知 慾望과 意志를 갖추고 있어 왕성한 생명과 활력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생명과 활력이 그것들로 하여금 선험적인 신비의 연계 속에 처하게 하였으며, 신기로운 가공의 신화세계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신분의 高低尊卑의 구분이 없으며, 사람과 神, 鳥獸, 山林이 각자 자기의 의지와 바램에 따라 행동하며 그 권리는 완전히 평등하다. 그러나 비교적 후작에 속하는<皇矣>그리고<大明>은 이와는 전혀 다른 관념을 보이고 있다. '원시 선민의 심성'과 '신비스러운 초자연적인 사고력'을 구비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반되게 종교적 설교가 전편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유일한 목적은 周왕권의 통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어서 강렬하고 편협한 공리주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때문에 시 속에는 생명형식의 관통과 '生命一體化'의 감정이 근본적으로 없거나 있을 수 없으며, 아울러 人神間의 등급이 삼엄하고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다. 이는 神聖의 시대에서 점차 理性의 시대로 전화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그 명확한 분리의 시점을 지적할 수 없지만, 대체로 殷商에서 周初에 이르는 시기에 이미 遠古 신화는 그 본질적인 생명력을 상실하고 차츰 종교나 정치 등과 같은 본질외적인 목적에 원용되거나 또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윤색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東周 시대에 접어들면 이러한 人神交往의 관념은 더욱더 완전한 변화를 가져와서 신과 인간은 마침내 격절되고 분리된 세계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上帝의 관념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 天 祖 관념의 분리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周人들의 조상 세계는 다시는 하나로 混融되지 않으며, 人王을 天子로 삼고서는 上帝와 조상을 다시는 二位一體化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東周 시대는 이미 '선조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를 막론하고 모두 巫覡의 힘을 빌려야만이 신의 세계와 교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商周 신화 전반을 살펴보면 아주 중요한 관건적인 변화로서 조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가까워졌으나, 신의 세계와는 직접적인 교왕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렸음을 설명하는 신화가 등장한다는 것이다"人文 정신의 발달과 종교 관념의 변화로 말미암아 東周는 이미 神聖의 시대가 아닌 理性의 시대인 것이다. "絶地通天"은 바로 殷商 시대가 강력한 神聖의 시대였음을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반증이라고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殷商에서 東周에 이르는 기간은 그 시대 사람들이 비록 '신화'라는 어휘를 사용하지는 않았고 또 그것의 본질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선험적으로 신화를 체감하여 신봉하였고, 마침내 신과 인간 존재를 이성적으로 재인식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民神雜' '民神同位'로 표현되는 신화세계로부터 출발하여 '絶地通天'이라는 신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民神不雜'이라고 하는 신과 인간이 제각기의 영역에서 존재할 뿐 다시는 공생할 수 없다는 신화관의 발전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2) 春秋戰國
일반적으로 중국신화의 散亡의 여러 원인 중의 하나가 孔子로 대표되는 유가의 신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論語 述而 에서 말하는 "子不語怪力亂神"으로 대표되는 儒家의 "重實際, 輕玄想"의 실리적 사고가 신화연구에 장애요인으로 지적되었다는 말이다.
신화라고 하는 것이 한 시대의 총체적인 문화의 상징물이기 때문에 특정 인물이나 유파에 의해 쉽게 훼손되거나 亡失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戰國時代 이래로 中原에서의 儒家의 절대적인 위치나 '復古的 思惟'가 儒家의 가장 특징적인 사유중의 하나라는 점, 그리고 孔子의 후세 유가에 대한 영향 등을 고려할 때 孔子의 신화관이 곧 儒家의 신화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실 孔子는 자신의 사상과 학설의 설득력을 제고하기 위해 신화를 견강부회한 점이 없지 않다. 신화의 보존과 전파에 대한 功過를 논하자면 그는 功보다는 過가 더 많은 부정적인 신화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大戴禮記 와 韓非子 에 실려있는 孔子의 신화에 대한 해석을 보면 이를 증명할 수 있다.
宰我問于孔子曰, 昔子予聞諸榮伊, 黃帝三百年, 請問, 黃帝者人耶?, 抑非人耶? 何以至于三百年乎? ……孔子曰 ……生而民得其利百年, 死而民畏其神百年, 亡而民用其敎百年, 故曰三百年.(大戴禮記 五帝德) (재아가 孔子에게 묻기를 "옛날 제가 榮伊에게 듣기로 '황제는 삼백년을 살았다'는데 황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이라면) 어떻게 삼백년이나 살 수 있는가요"…… 孔子가 말하기를…… "살아서 백년동안 백성이 이로움을 얻었고, 죽어서 백년동안 백성이 그 신령을 경외하였으며, 죽은지 오래되도록 백성이 그 교화를 향용하니 고로 삼백년을 살았다고 하는 것이다.")
哀公問于孔子曰, 吾聞夔一足, 信乎? 曰夔人也, 何故一足? 彼其無他異, 而獨通于聲, 堯曰, 夔, 一而足矣, 使爲樂正. 故君子曰, 夔有一, 足. 非一足也.(韓非子 外儲說左下) (魯 哀公이 孔子에게 묻기를, "夔는 다리가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정말입니까?" 孔子가 말하기를 "夔는 사람인데 어떻게 다리가 하나이겠습니까? 夔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다른데가 없지만, 단지 그가 음악에 정통했습니다. 그래서 堯가 '夔한테 이런 능력이 있으면 되었다.'라고 하고, 그를 음악을 관장하는 악정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군자들이 '夔는 한 가지 장점이 있으니 되었다.'라고 한 것이지, 夔가 결코 다리가 하나인 것은 아닙니다.")
신화상에서 삼백년의 장수를 누린 黃帝를 역사화시켜 살아서(生) 죽어서(死) 그리고 망해서(亡)까지 백성을 삼백년 동안 교화한 것으로 견강부회하여 儒家의 이상적인 군주로 확고부동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며, 夔는 주지하는대로 山海經 등에서 말하는 다리가 하나인 신화상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실존의 인물로 이상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과연 孔子가 '黃帝 三白年'이나 '夔一足'과 같은 '語怪'에 대한 無知로 인해 이처럼 견강부회 하였을까? 國語 魯語 에는 孔子가 防風氏의 大骨을 논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吳國이 越國을 정벌하여 會稽省를 무너뜨리고 大骨을 하나 획득하였는데 뼈 한 마디가 수레 하나에 가득하도록 거대하였다. ……오국의 사자가 뼈를 하나 집어들고서 孔子에게 묻기를 "어떤 뼈가 가장 큰 것 인지요?" 孔子가 대답하기를 "내가 듣기로, 옛날 禹임금께서 천하 각국의 신들을 회계산으로 소집하였는데, 방풍씨가 늦게 도착하였다. 우임금이 그를 죽여 시체를 여러 사람 앞에 전시하였는데 그 뼈 한 마디가 수레 하나에 가득하였다. 이것이 큰 것이다."
禹가 防風氏를 주살한 것은 禹신화의 일단인데, 孔子가 중인들 앞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黃帝나 夔를 설명한 것과 같은 견강부회가 전혀 없다. 또 "후세의 사람들이 說苑 辯物 에 기록된 '萍實' 과 孔子家語 辯政 에서 언급한 '商羊' 의 두 고사, 太平御覽 卷902에서 인용한 韓詩外傳 에 기록된 '玉羊'의 고사 , 繹史 卷86에서 인용한 波傳 에 기록된 '九尾鳥'의 고사 등등 대략 智者들이 널리 들었던 고사들을 모두 수집하여 孔子에게 의탁함으로써 孔子를 索隱之宗, 내지 語怪之首로 만들고 있다." 이는 비록 袁珂의 견해대로 "孔子가 신화에 대해 농후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 흥미에 따라 그것을 전파했다" 고는 볼 수 없지만, 최소한 신화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견강부회는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孔子는 神怪(神話)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不語'한 것은 아니다.
기실 孔子는 신화에 대해 긍정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즉 孔子의 주요 관심사가 자연으로 대표되는 우주와 세계의 본질에 있지 않았다는 것과 그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전통 종교적 사상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철저하지는 못했지만 인문주의에 따른 "理性精神") 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沒理解". 및 '天命觀에서 야기된 宿命論"이 孔子의 신화관을 결정지은 가장 큰 요인이다.
각도를 바꾸어 말하면 孔子는 신화에 대해 선택적으로 '語怪'했다고 볼 수 있다. '萍實'을 오로지 覇者만이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거나, 一足鳥 商羊이 큰비를 예견하여 백성의 재앙을 막아주는 것임을 부각시킨 것과, 그리고 이미 앞에서 열거한 禹와 상관된 防風氏, 黃帝 및 등에서 孔子가 언급하고 있는 바를 종합하여 보면 특정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語怪'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며, 이 선택의 기준은 三大 盛世와 성군의 미화나 합리성의 강화와 아울러 현실정치에 대한 합법성의 인정이라고 유추된다. 즉 孔子는 신화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무긍정 무비판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긍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春秋時代는 孔子를 대표로 하는 儒家에 의한 '신화의 선택적 부정과 긍정의 시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戰國時代에 접어들어 중국신화는 이미 신화로서의 본질적 기능보다는 變容을 통해 활용화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莊子와 屈原이다. 莊子는 "十餘萬言, 大抵率寓言"( 史記 老子韓非列傳 )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자신의 "天人合一" "物我同一"의 철학적 사유를 표현하는 구체적인 수단으로 고대 신화를 광범위하게 활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屈原은 <離騷>와 <天問>에서 대량의 고대 신화를 매개로 하여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의 증거로 삼기도 하였고, 혹은 가슴 속의 회포를 발설하는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특히 天問 에서 女, 禹, 共工, 后, 啓, 簡狄, 后稷, 伊尹 등에 관한 신화고사에 대해 끊임없는 회의와 부정을 통해, 오히려 이러한 신들과 역사인물에 대한 屈原 자신의 강열한 애정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屈原의 이러한 회의와 부정이 단순히 경험적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신화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天文, 地理, 人事에 관한 기존의 전승에 대해 회의하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주장을 은유적으로 천명하고, 이를 통해 초국의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과 공격을 표현해 내고자 하였다. 수많은 神들을 수종으로 삼은<離騷>의 神遊가 결국은 현실 세계의 갖가지 모순과 葛藤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점이나, 또 강직하여 죄를 입은 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바탕으로 하는<天問>의 질문 등이 이를 증명한다. 이점에서 莊子와 屈原은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 철저하게 신화를 변용하여 철학과 시가에 활용하였고, 이로 인해 외면상 중국의 고대신화는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했지만 내면상 새롭게 소생했다고 할 수 있다. 즉 戰國時代는 신화가 철저하게 변용되어 철학화, 시가화 되었던 시기였다.
3. 秦漢의 신화관
先秦 시대의 신화관이 漢代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는 정확하게 규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후 司馬遷을 비롯한 漢代의 대부분 사학가, 유학자들은 신화에 대해 실증적 차원에서 회의 하든지, 아니면 실록으로 맹신하든지, 그도 아니면 허망한 것으로 극렬 반대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예를 들면 司馬遷은 <大宛列傳>에서, "禹本紀와 山海經에 실려있는 괴물에 관해서는 나는 감히 언급하지 못하겠다") 至禹本紀山海經所有怪物, 余不敢言之也.고 하여 사학자로서 실체를 증명할 수 없는 기록들에 관해 황당무계하다는 회의감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반대로 山海經 을 교감했던 劉歆(秀)은 上山海經表 에서, 山海經 이 堯舜시대의 禹가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거쳤던 지역과 그 지역에서 보았던 경물들을 益과 공동으로 저작한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상반되게 東漢 초기의 王充은 論衡 에서 수차례에 걸쳐 지극히 엄숙하고 근엄한 태도로 모든 신화 전설을 허망한 것으로 부정한다. 대표적으로 천둥의 신 雷公에 대한 당시 세간에 대한 믿음 ---천둥이란 하늘이 노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벌주기 위한 것이라는 속설을 痛烈하게 반박한 부분을 살펴보면 王充의 자연현상에 대한 놀라운 과학정신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또한 王充의 입장에서는 부득이한 일이었겠지만 전승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인 관념을 지녔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兩漢 시기는 유가가 국가종교로서 사상적 통제가 엄격하였지만, 전승된 신화에 대해서는 통일된 견해나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신화를 인식하고 평가하였을 따름이다. 이러한 신화에 대한 無定見은 때로 신화에 대해 자못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즉 楚辭를 철저하게 五經에 의거하여 주석하였던 王逸과 같은 사람 조차도 신화에 대해 부정적 태도로만 일관하지 않고, 오히려 신화로서 초사를 주석하는 비교적 용납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天問 의 '崑崙縣圃'를 "곤륜은 산이름으로 서북에 있으며 元氣가 나온다. 그 정상을 현포라 하는데 하늘과 통한다."라고 주석한다든가, 또 '燭龍'을 "하늘의 서북에 어둡고 해가 없는 나라가 있는데, 용이 촛불을 물고서 그곳을 비춘다." 라고 주석한다든가, 또 羲和를 日御로 주석하는 등 도처에서 신화적 전고를 인용하고 있다. 특히 <天問>의 주석에서는 실전된 傳 을 인용하여 河伯과 의 신화고사를 완벽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王逸의 긍정적 신화관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4. 中世의 신화관
1) 魏晉南北朝
魏晉南北朝는 한편으론 신화를 실존의 역사로 맹신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론 신화를 통해 서정을 발로시킨 정서적 긍정의 시대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신화관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저작으로 郭璞의 注山海經敍 과 陶淵明의 讀山海經 을 들 수 있다. 먼저 郭璞의 注山海經敍 에 나타난 신화관을 보면 이 글의 서두에서 山海經을 읽는 세상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책이 황당무계 하며 기괴하고 유별난 말이 많기 때문에 의혹을 품지 않는 이가 없다.
고 하여 당시의 세간에서는 山海經 의 각종 신화고사를 신빙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이러한 인식의 원인을 지식의 부족으로 인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郭璞 자신은 山海經 이 결코 황당무계하고 기괴한 것이 아니라 우임금께서 "조화의 원리를 탐구하여 온갖 변화를 다 이룩함에 있어 사물을 본떠 괴이함에 대응하고 비추어 심오한 이치에 막힘이 없도록 하고, 속 깊은 情理를 자세히 다하여 神도 숨길 수 없는" 위대한 책임을 극력 피력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이책을 주석한 이유를 "대체로 이 책은 7代의 세상을 거치고 3,000년의 세월이 지난 끝에 비록 잠시 漢代에 나타났다고는 하나 얼마 안 있어 역시 내버려졌다. 이 책에 실린 산천의 명칭과 위치도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많아져 오늘날과 다르고 전통적인 해석 방식도 전해지지 않아 마침내 인멸될 지경에 이르렀다. 진리가 담긴 책, 세상 사람들이 이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郭璞이 山海經 을 '진리가 담긴 책' (道之所存)으로 철저하게 신봉하였고, 자연히 신화를 신화로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실존하였던 信史로 인식하였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산해경의 신화를 주석하는데도 그대로 반영된다. 즉 大荒南經 의 "희화는 帝俊의 처로 10개의 태양을 낳았다" 는 十日神話를 주석함에 "열명의 아들을 낳아 각각 해의 이름으로 그들을 명명하였기에, 고로 열 개의 해를 낳았다고 말한 것으로 (해의) 수는 열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신화를 실존의 인간사의 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陶淵明은 비록 신화를 주석하거나 직접적인 견해를 밝힌 바는 없지만 그의 讀山海經 13首를 통해 고대 신화에 대한 그의 태도를 간접적으로 들어내고 있다. 周知하는 바와 같이 讀山海經 13首 중 제1수는 隱居讀經의 즐거음을, 제2수부터 제12수까지는 山海經 과 穆天子傳 에 기록된 신화전설을 통한 개인 서정을, 그리고 마지막 제13수는 齊 桓公이 管仲의 유언을 듣지 않고 간신배를 임용하여 자신의 멸망을 초래한 역사를 歌詠한 連作詩이다. 그 중에서 특히 제1수는 陶淵明이 신화를 대하는 출발점이 郭璞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들어내고 있다.
孟夏草木長, 繞屋樹扶疎. 초여름 초목 무성하고, 초가를 둘러싼 나뭇가지 사방에 퍼졌네.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 뭇 새들은 깃들 곳을 기뻐하고, 나는 내 초가를 사랑하네.
旣耕亦已種, 時還獨我書. 파종도 다 마쳤으니, 내 책을 읽을 시간 돌아왔네.
窮巷隔深轍, 頗回故人去. 거친 누항에 기거 하기에, 옛 친구 마저 수레 돌려 돌아가네.
歡然酌春酒, 摘我園中蔬. 지난 봄 담구었던 술을 즐거이 마시며, 채전의 야채 따 안주삼네.
微雨從東來, 好風與之俱. 이슬비가 동쪽에서 내리니, 시원한 바람도 함께 불어오네.
氾覽周王傳, 流觀山海圖. 가볍게 목천자선 훝어 보고, 두루 산해경도를 살펴보니,
附仰終宇宙, 不樂復何如. 경각에 우주를 끝까지 볼 수 있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음을 느끼리오
郭璞이 성현의 유지를 밝힌다는 투철한 사명의식으로 山海經 을 주석하고 圖讚을 發題하였다면, 陶淵明은 생활의 여가에서 오는 즐거음의 일환으로 山海圖 을 '두루 살펴 보았고(流觀)', 穆天子傳 도 '가볍게 훝어 보았다(汎覽)'하였다. 경전을 읽듯이 엄숙하고 경건한 것도 아니며, 벼슬을 구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독서가 아니라, 마치 소설 등과 같은 純文學 작품을 읽듯이 유쾌하고 즐겁게 '欣然亡食'의 경지로 열람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빠져들어 신화 인물과 더불어 시공을 초월하여 遠古의 세계로 되돌아가 세계를 주유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附仰終宇宙, 不樂復何如.) 또 제2수에서 제12수까지는 無皐, 扶木, 湯谷, 羲和를 비롯 刑天, 瓜父, 精衛, 西王母 등을 題材로하여 신화고사 본래의 줄거리에 자신의 독특한 感受를 주입하고 용해시켜 개인의 기개와 회포를 발설하고 있다. 때문에 陶淵明에게 있어 신화는 생활의 여가를 향유하는 수단이자,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우주를 넘나들게 하는 통로였으며, 자신의 이상을 기탁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였다. 또한 신화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의의가 상징성에 있다는 점에서 陶淵明은 신화를 가장 긍정적으로 이해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唐代
詩體의 형식으로 신화관을 들어낸 사람은 陶淵明 외에 唐代의 柳宗元을 들 수 있다. 天問 의 회의와 문제 제기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저술된 유일한 작품인 天對 를 통해 柳宗元의 신화관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신화관은 근본적으로 신화에 대한 이해도 없었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신화를 부정하였다. 예를 들면 天問 의 서두에 "먼먼 원고의 상황은 누가 전해 왔는가? 천지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규명하였는가? 밤과 낮이 나누어지지 않았고 한 무더기 혼돈이었다는데 누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하여 柳宗元은 "천지 형성 이전의 갖가지 황홀하면서 근거없는 상황은 모두가 황당한 사람들이 전해온 것이다. 천지개벽의 신령스러운 事跡은 모두가 혼란스럽고 분명하지 못한 傳述인데, 무슨 이야기할 만 한 것이 있다는 말인가?" 로 대답하여 근본적으로 혼돈과 천지개벽의 신화를 부정하고 있다. 즉 "그는 '元氣'가 천지의 본원임을 제기하며 우주를 물질로 보고 있다. 또 우주는 변계도 없고, 중심도 없으며, 구석도 없다고 여겨 우주가 무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태양이 떠오르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태양의 방위와 같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여 명백한 地動思想을 가지고 있었음도 보여주고 있다. 天對 의 여러곳에서 선명한 無神論的 사고와 天命論에 반대하는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九重天, 八柱 등의 天地運行은 물론 나아가 月中有兎, 女岐無合, 息壤, 應龍, 西王母, 不死의 仙人, 九辯九歌, 射十日, 化黃熊, 共工의 天柱折斷 등 굴원이 제시한 신화전승과 역사전설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천문의 "日安不到, 燭龍何照?"(어디가 태양이 비추지 못하며, 촉룡은 어떻게 비추는가?)에 응대하여, "修龍口 , 爰北其首, 九陰極冥, 厥朔以炳."(長龍이 입 안에서 빛을 내는데, 그가 북방에 거처하여 극히 어두운 북방으로 하여금 이로 인해 빛이 있게 한다."라고 長龍發光을 인정한 것 뿐이다.
반면에 禹를 기점으로 하는 夏朝의 역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긍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때문에 禹父子에 관해서는 전통적인 설법대로 의 무능을 가혹하게 비판한 반면에 그의 아들인 禹의 영명함을 지나칠 정도로 옹호하고 있으며,) 天問의 "不任汨鴻, 師何以尙之?"( 이 치수의 임무를 맡을 수 없었는데, 어째서 뭇사람들이 그를 천거하였나?라는 물음에 대해 天對는 "惟 , 隣聖而 , 恒師 蒙, 乃尙其 ."(곤이 늘상 사람들과 다투어 비록 성인과 근친이었지만(堯와 은 숙질간이다), 그 자신이 흉포하였다. 중인들이 곤의 실제 상황을 알지 못하고 이런 극악한 사람을 추천하였다.)라고 대답하였고, 또 "伯禹腹 , 夫何以變化?"(伯禹는 의 배에서 태어났는데 어째서 아버지 과는 다른 성취를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氣 宜害, 而嗣續得聖, 塗而 , 夫固不可以類."(곤의 기질이 흉악하여 반드시 재난을 받았으나, 그의 아들은 오히려 아주 聖明하였다. 진흙 속에서도 연꽃이 피듯 본래 두 사람을 동류로 취급할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으며, "禹之力獻功, 降省下土方. 焉得彼塗山女, 而通之于台桑? 閔妃匹合, 闕身是繼, 胡爲嗜不同味. 而快 飽?"(禹는 치수의 공업을 완성하기 위해 진력을 다했고 지방에 내려가 각지의 상황을 성찰하였다는데, 어떻게 이런 바쁜 과정에서 도산씨의 딸을 얻어 태상에서 그녀와 통혼하였는가? 어째서 禹의 사랑은 衆人과 서로 달라 보통사람과 같이 男女之歡을 탐익하지 않았는가?)라는 다소 비아냥 어린 질문에 대해서 柳宗元은 "禹懲于續, 塗婦 合. 離厥膚, 三門以不視, 呱呱之不隙, 而孰圖厥味?"(禹는 후사를 걱정하여 서둘러 도산씨의 딸과 결혼하였다. 우는 다리의 솜털이 모두 달아 없어질 정도로 근면하게 노력하였고, 3차례나 집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우는 呱呱하게 우는 아들의 울음소리 조차 외면하였는데 무슨 情慾을 탐익하겠는가?)라고 대답하는 등 도처에 에 대한 힐문과 폄혜, 그리고 禹에 대한 찬사가 나타나고 있다.
또 夏后 相의 帝位를 탈취하여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는 夷 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폄혜하고 있으며,) 천문의 "帝降夷 , 革孼夏民, 胡射夫河伯, 而妻彼 嬪?"(천제께서 예를 내려보는 것은 夏民의 재난을 구제하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河伯을 쏘아 눈멀게 하고 洛神을 처로 삼았는가?)라는 질문에 天對에서는 "夷 滔淫, 割更后相. 夫孰作厥孼, 而誣帝以降! 震 厥鱗, 集矢于 . 肆叫帝不諶, 失位滋 . 有洛之 , 焉妻于狡."(예는 오만 방탕하여 相의 帝位를 탈취하였다. 이 모든 죄업은 모두 예가 저지른 것인데도 어떻게 천제가 그를 파견하였다고 멋대로 말하는가? 용의 백린이 번쩍이고 있어 예가 그의 눈을 쏘아 맞추었다. 예가 쏘아 맞춘 것은 단지 한 마리 용이지 하백이 아니다. 때문에 하백이 천제에게 控訴하였다는 전설은 진실이 아니다. 용이 그가 마땅이 거처해야 할 심연을 떠났기에 이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한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舜에 대해서도 지극히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여 강조하고 있다. 柳宗元의 이러한 부정적 신화관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東漢의 王充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다만 신화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가지 수 없었던 시대적 제한과 더불어 어렴풋하게 인식하였던 자연과학적 지식, 그리고 그가 韓愈와 더불어 견지하였던 道通主義로 말미암아 더욱더 철저하게 신화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天問 에 회의와 의문에 일일이 응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기 때문에 그 부정의 강도가 훨씬 광범위하고 극렬하게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宋代
宋代의 신화관은 洪興祖와 朱熹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양자의 견해는 대단히 상반되어 있다. 北宋의 洪興祖는 楚辭補注 를 저록함에 있어 철저하게 五經의 취지에 입각하여 초사를 주석한 王逸의 楚辭章句 를 원본으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王逸이 전혀 참고하지 않았던 山海經 과 烈女傳 등을 '補注'의 주요 근거로 삼아<離騷>와<天問>등에 등장하는 신화 부분을 주석함으로써 楚辭의 신화적 색채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天問의 "何肆犬體, 而厥身不危敗"(개만도 못한 象이 멋대로 모해할려고 하였는데도, 舜은 피해를 입지 않았는가?)의 구절을 洪興祖는 烈女傳 "與象謀殺舜, 使塗 , 舜告二女. 二女曰, 時唯其 汝, 時唯其焚汝, 鵲如汝裳衣, 鳥工往. 舜旣治, 旋階, 焚, 舜往飛. 復使浚井, 舜告二女. 二女曰, 時亦唯其 汝, 時其掩汝. 汝去裳衣, 龍工往. 舜往浚井, 格其入出, 從掩, 舜潛出.(고수와 상이 순을 모살하려고 창고를 수리하도록 시키니, 舜이 娥皇과 女英에게 이를 알렸다. 二女가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을 해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불태워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그림이 그려진 옷을 입고 가세요!' 라고 하였다. 舜이 창고를 수리하자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고수는 창고를 태워버렸으나, 순은 새처럼 날아가 목슴을 구했다. 다시 순에게 우물을 깊이 파고 치우라 시키니, 舜이 다시 二女에게 알렸다. 二女가 말하기를 '이 역시 당신을 해치려 하는 것으로, 당신을 묻어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옷을 벗어 버리고 용이 그려진 옷을 입고 가십시오.' 라고 했다. 舜이 가서 우물을 깊이 파자, 들고 나는 사다리가 올라가 버리고 묻히게 되었으나 순은 잠수하여 나왔다.)의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홍흥조가 인용한 烈女傳 의 이 부분은 현존하는 烈女傳 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특히 순의 신화적 이적이 강조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洪興祖는 비록 신화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직접적으로 피력한 적은 없었지만, 楚辭의 신화적 浪漫性을 가장 먼저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로 인해 부수적으로 이룩된 원고 신화 재료의 전승과 보존 부분에 대한 그의 공헌 역시 지워 버릴 수 없을 것으로 인정된다.
이에 비해 南宋의 朱熹는 철저하게 理學的 義理 차원에서 楚辭를 주석하고 전인들의 주석을 비판 수정한 사람이다. 이에 따라 그에게 신화는 신빙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虛誕之說'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南宋의 신화관은 北宋에 비해 크게 퇴보하였다고 할 수 있다.
朱熹의 신화에 대한 부정적 관점은 楚辭集注 와 楚辭辯證 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離騷의 羲和를 "堯임금때의 四時를 주관하는 관리로, 해를 맞이하고 전송하는 사람이다") 로, 그리고 崑崙을 "肅州 酒泉縣 西南쪽에 있으며 땅의 중앙" 이라 하여 실존의 지명으로 언급한다거나, <遠遊>에서 "九陽은 舊說에서는 '湯谷 위에 扶木이 있는데, 아홉 개의 해는 윗 가지에 거처하고, 하나의 해는 아랫 가지에 거처한다'라고 하였으나, 역시 寓言일 따름이다."라고 주석한 것은 모두 朱憙의 신화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특히 <天問>의 신화에 관련된 인물, 지명, 사물 등에 대해 모두 '怪妄', '妄言', '不足論' 이나 寓言으로 치부하여 신빙하지 않고 있다.) 天問 " 焉彈日, 烏焉解羽?"(예는 어떻게 해를 쏘아 떨어 트렸고, 까마귀는 또 어떻게 깃털을 벗어 떨어 뜨렸는가?)의 구절에서 淮南子 등에 등장하는 射十日의 신화를 소개하고서는 "彈日之說, 尤怪妄不足辨"이라 하였고, 그리고 "胡射夫河伯, 而妻彼 嬪"(예는 어찌 하백을 쏘았으며, 낙빈을 아내로 맞이하였는가?)의 구절에서는 王逸이 인용하였던 傳 에서 보이는 "하백이 용으로 변하여 놀다가 예에게 활을 맞고, 예가 락수의 신 복비와 교접하는 것을 꿈구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는 "亦妄言也"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女 有體, 孰制匠之"(여와가 인류를 창조하였다는데, 그의 형체는 누가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에 "怪甚不足論"이라하여 논증할 가치 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日安不到, 燭龍何照? 羲和之未揚, 若華何光?"(태양은 어째서 비추지 못하는가? 촉룡을 어째서 그것을 비출 수 있는가? 일신 희화가 빛을 아직 비추지 않았는데, 약화는 어떻게 빛날 수 있는가?)의 구절에 대해서는 "此章所問, 尤是兒戱之談, 不足答也?"(이 단락에서 묻는 바는 특히 어린아이의 작난과 같은 말로 답할 필요가 없다)라고 극언하고 있다. 그는 오로지 經傳에 그 출처가 있는 것과 비록 상견되는 사항은 아니나, 이성으로 분석하여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과 유사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姜嫄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서 周의 시조 후직을 낳은 것이, 簡狄이 제비가 떨어트린 알을 먹고서 殷의 시조 契을 낳은 것은 是非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이는 理의 변화일 따름이다.) 若姜嫄, 簡狄之生稷契, 則又不可以先後言矣, 此理之變也. (이 구절은 朱熹가<天問>의 "女岐無合, 夫焉取九子"(女岐는 남편도 없이 어떻게 아홉 아들을 낳았는가?)에 대한 주석이며, 강원과 간적의 이적은 詩經 에 출현한다.)
不死之人은 山海經 과 淮南子 에서 누차 언급하고 있으나, 본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에 전하기를 산중에 년노해도 죽지 않은 사람이 있어 자손이 그를 닭장 속에 가두어 두었다 하니, 혹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있으니 그다지 괴이한 것만은 아니다.) 不死之人, 則山海經, 淮南子屢言之, 固未可信, 然俗傳山中有人, 年老不死, 子孫藏之鷄 之中者, 亦或有之, 不足怪也. (이 구절은 천문의 "何所不死, 長人何守?"의 구절을 주석한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도학적 관점에서 신화를 받아들였기에 그 의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몰이해는 자연<天問>의 각종 신화고사에 대해 괴이하고 망령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또한 신화를 긍정적 차원에서 이해하였던 洪興祖의 治學 방법에 대해서 조차 격렬한 비판과 분노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天問篇에서 묻는 것은 비록 괴이하고 망령된 것이나 理致로 미루어 보거나 사물에 비추어 볼만한 것도 아직 많이 있다. 그러나 舊注의 주장은 공연히 異聞을 많이 아는 것만을 功勞로 삼았으니<天問>에서 질문하는 까닭의 本意를 다시는 알 수 없게 해버려서 오늘에 있어 그것에 상대하여 법을 밝히는 바이다. …… 洪興祖의 補注와 같은 견해는 그 크게 어지러움이 택할 바를 알 수 없으니 더욱더 극심하다. 此篇所問, 雖或怪妄, 然其理之可推, 事之可鑒者, 尙多有之. 而舊注之說, 徒以多識異聞爲功, 不復能知其所以問之本意, 與今日所以對之明法. …… 若補注之說, 則其 難不知所擇, 又愈甚焉.( 楚辭集注 天問第三 離騷十三 解題)
九辯은 경전에 보이지 않아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九歌는 虞書, 周禮, 左氏春秋에 저록되어 있으니 그것이 舜과 禹의 음악임은 의심할게 없다. 그러나 屈子가 離騷를 저작함에 이르러서 이에 啓의 九辯九歌之說이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 오류임은 의심할 바가 없다. …… 洪興祖가 楚辭補注 를 저작함에 이르러서 경전에 근거하여 두 사람의 오류를 혁파했어야 함에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생각건대 오히려 山海經 의 三嬪之說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으니 크게 요망한 것이고 그 오류가 더욱 심한 것이다. 山海經 을 지은 자는 본래 이 책에 근거하였으나 그것을 견강부회하였는데, 이 조문에 있어서 오히려 그 잘못된 저본을 사용하였니 그와 같이 잘못되고 망령된 것을 증험할 수 있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고금의 諸儒들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屈原이 山海經 을 널리 사용했다고 말하니 더욱 가소롭게 되었다.) 九辯, 不見於經傳, 不可考. 而九歌著於虞書周禮左氏春秋, 其爲舜禹之樂無疑. 至屈子爲騷經, 乃有啓九辯九歌之說, 則其爲誤亦無疑. …… 至洪氏爲補注, 正當据經傳以破二誤, 而不唯不能, 顧乃反引山海經三嬪之說以爲證, 則又大爲妖妄, 而其誤益以甚矣. 然山海經者, 本据此書而傅會之, 其於此條, 蓋又得其誤本, 若 謬妄之可驗者亦非一, 而古今諸儒, 皆不之覺, 反謂屈原多用其語,尤爲可笑.( 楚辭辯證 離騷經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漢代 이래로 魏晉南北朝, 唐宋에 이르기까지 신화에 대한 관념은 거의 대동소이하여 변하지 않았다. 東漢의 王逸이나 王充, 劉秀 이래로 山海經 에 대해 가장 집중적인 주석을 한 郭璞을 비롯하여<天問>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인<天對>의 작자 柳宗元, 南宋 초기의 路史 의 저자 羅泌) 羅泌 역시 신화 전설 인물과 역사상의 인물을 一視同仁하여, 신화 전설을 통한 중국 상고 역사의 복원을 도모하였던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전인들의 신화관과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서술을 생략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자 朱熹에 이르기 까지 약간의 개인적 차이나 있으나, 대체적으로 山海經 의 성격, 작자, 저작시대를 기본으로 '語怪'에 대한 실증과 훈고학적인 교감, 아니면 역사화된 신화를 맹신하거나 반대로 신화 전설의 역사화를 통해 중국 상고 역사를 복원하는 것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 元代는 말할것도 없고 明代의 少室山房筆叢 의 胡應麟등과 山海經 주석을 행했던 淸代의 汪 , 畢沅, 懿行 등에 이르기 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들 역시 신화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거의 없었다. 이들은 "이왕에 과학적인 안광으로 신화 전설의 탄생의 원인을 탐구할 수도 없었고", 극히 제한된 소수를 제외하고는 "또 문학 예술의 심정으로 신화 전설의 미감을 감상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漢代이래 淸代에 이르는 시기의 신화관은 회의와 맹신 그리고 부정이 교차되는 혼돈의 시대이며, 오로지 시가 창작을 통해 山海經 의 신화의의를 체감하였던 陶淵明과 山海經 을 통해 초사의 신화적 낭만성을 최초로 긍정하였던 洪興祖 만이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았던 신화관의 선각자였다고 할 수 있다.
5. 近 現代의 신화관
근대적 의미의 중국신화학의 발생과 발전) 최근 馬昌儀는 中國神話學文論選萃 에서 중국신화학의 발전 윤곽을 대략 4분기로 나누어
① 맹아기(1903년 에서 1923년 까지)
② 기초기(1923년 에서 1937년 까지)
③ 확장기(1937년 에서 1940년 까지)
④ 저조기(1940년 에서 1970년 까지)로 분리하였는데,
맹아기는 주로 근대시기, 그리고 기초기 이후 오늘에 이르는 시기는 현대시기로 대략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맹아기는 주로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신화의 개념에 대해 초보적인 소개를 하고, 인류학파인 안드류 랭, 테일러, 프레이저 등의 저작을 번역 소개하던 시기이다.
기초기는 중국신화가 독립된 연구대상이 되었던 시기로 魯迅, 矛盾 등의 문학가에 의해 이론적인 기초가 마련되고, 高 剛, 楊寬 등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古事辯"신화학파가 성립되었던 시기이다.
확장기는 항일전쟁으로 서남지역으로 이주하게된 학자들이 소수민족의 신화에 대한 현장연구와 다방면적인 종합연구를 통해 신화학연구의 시야를 크게 확대시켰으며, 아울러 중국신화의 영역을 문헌에만 국한시키기 않고 소수민족의 구두전승에까지 확대하여 중국신화연구에 허다한 실마리와 열쇠를 제공하였던 시기로, 聞一多, 芮逸夫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저조기는 신화자료는 예전에 비할 수 없이 광대하게 수집되었으나, 이론관점에 있어 지나치게 천박한 사회학과 좌파의 교조주의적 사조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학술연구의 전개와 연구수준의 제고에 장애가 되었던 시기를 말한다.
은 중국의 전통적인 학문체계가 아니라 근대 서양과 일본의 학술사조 내지 신화유파의 변천과 더불어 인류학, 고고학, 민족학의 전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중국의 문화개방풍조와 지식계급의 중국문화에 대한 자각과 반성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세기 초, 서양학문의 대대적인 유입의 풍조에 따라, 원시시대의 문화를 탐구하고 인류진화의 궤적과 종족의 근원을 찾아서 상고시기 인류의 각종 기현상을 해석하는 것을 주로 하는 서양신화학의 중국의 전래는, 중국학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에 족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화연구열의 흥성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 왕효렴은 5가지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① 아편전쟁 이래 동탕불안의 시대환경의 영향을 받아 현실과 전통의 충돌중에 지식분자들의 전통의 고사관념에 대해 재사고와 재비판의 동기를 자극하였다.
② 청대 중엽에서 민국 초기의 의고학파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고사와 전적을 불신임하는 기풍의 전승아래 "古史辨"의 고사연구가 탄생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당시와 이후의 신화전설연구를 인도하였다.
③ 서양과학의 치학방법과 신사관의 유입의 영향을 받아, 이로 말미암아 당시 학자들로 하여금 신화학연구상의 각종 학설과 연구방법을 알게 하였다.
④ 당시 고고학의 영향을 받아 출토된 유물과 갑골 금문 등이 고전서적 중의 신화기재에 진실한 물중을 제공하게 되었다.
⑤ "古史辨"의 영향을 받았는데 "고사변"이 고사에 대한 전복과 파괴공작으로 말미암아 신화전설의 환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근대시기의 중국신화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民族主義 神話學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엽 淸末 시기는 阿片戰爭의 치욕으로 인해 민족 독립사상이 급속하게 형성되던 시기이다. 이에 따라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는 淸朝 타도의 수단으로 민족주의가 고양되었고, 민족주의자들은 漢族의 種族 根源을 밝히기 위해 종족문제에 비상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각 민족의 조상 기원신화는 漢族이 인종이나 문화상에서 우월하다는 근거가 되었다. 예를 들어 章炳麟은 書 序種性上 에서, 서양의 토템주의로 원시모계제의 이론을 해석하여 중국고대의 感生神話를 분석하였는데, 그 목적은 '모든 종족은 각기 다른 기원이 있어 종족과 종족사이에는 필연적인 차별이 있다'는 것으로 滿淸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혹은 반봉건적 관점에서 정치나 계몽의 수단으로 신화연구를 진행한 것은 淸末 시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맥락으로 전승되어 왔다고 보이는데, 潛明玆가 정리한 대표적인 신화학자들의 연구목적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魯迅은 협량한 민족주의 입장에서 신화담론을 시작한 것은 아니어서, 滿淸의 대부분 학자들과 원칙적인 구별이 있긴 하다. 그는 일찍이 서양의 근대민족학과 사회심리학의 민족성에 관한 연구성과 중에서 합리적인 부분을 받아들여 不同 민족은 不同한 심리소질이 있으며 동일민족에는 상동한 심리소질이 있다고 보았으며, 종족주의 편견을 버리고 중국 봉건사회 형성의 전통심리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신화연구나 활용을 현실투쟁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는 것은 滿淸의 기타 학자들과 일치된다. 다만 魯迅은 그들보다 더욱 깊이 있게 보고 신화의 적극적인 반항정신을 발양하여, 중국 근대사상의 계몽운동에 있어 중국의 원고신화가 커다란 작용을 발휘하게 하였다. 중국의 현대신화학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평가되는 茅盾이 중국신화연구에 매진하게 된 동기 역시 애국열정에서 였다. 구주문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희랍, 북구신화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오천년 문명고국의 중화민족이 신화가 없을 수 없다"는 다분히 민족적 애국열정으로 중국신화연구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聞一多 역시 중국 현대 신화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헌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神話與詩 를 개괄해 보면, 그의 신화 연구의 중점은 고대 신화의 본래 면목을 환원하는데 있으며, 그 목적은 원고 문화로부터 중화 민족 문화의 공동 원류를 찾아냄으로써 각 민족의 긴밀한 단결을 촉진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는 문화사의 각도에서 신화를 고증하는데 대단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민족주의 신화관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사람중의 하나는 顧 剛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古史辨'의 '古史神話學'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일원론적 민족관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즉 부동종족에 부동의 시조가 있다는 것이 고대신화로서 충분히 증명될 수 있어 소위 일통관념은 후에 생긴 것이고, 소위 중화민족이 공동의 조상을 갖는 것도 민족융합의 결과이지 결코 원래의 면모는 아니다. 다음으로는 신화의 역사화를 진실된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중국 상고사는 대부분이 역사화된 신화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가 무조건 황금시기였다는 관념을 타파하는 것이다. 원고의 사회는 황폐한 야만의 시대로 후세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렇게 아름다운 대동세계는 결코 아니었다. 顧 剛은 소위 고대의 황금세계는 秦 이후의 학자들이 만들어내서 군왕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顧 剛의 이러한 擬古의 목적은 反封建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古史辨 작업을 봉건주의에 대한 철저한 파괴로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古書는 단지 古書일 따름이지 현대의 지식은 아니었다. 古史는 단지 古史일 따름이지 현대의 정치와 윤리는 아니었다. 古人은 단지 고인일 따름이지 현대사상의 권위자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顧 剛을 중심으로 하는 古史辨 학파에 대한 신랄한 반박이다. 당시의 직접적인 반론은 고사하고라도 최근까지 상당수 학자들이 여전히 "진실로 학술이 정치와 등호를 그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학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든지 진공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다. 顧 剛는 학술을 위해 학술을 했음으로 말미암아 禹를 한 마리 벌레라고 보는 결론이 만들어낸 좋지 못한 객관적 효과를 그 스스로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했다." 고 말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들은 顧 剛이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군국주의 시대 일본학자들이 고의적으로 중국의 上古史를 말살하려고 했던 것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은연중에 여기고 있다. 이는 어떠한 진실도 민족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을때는 회피되거나 호도될 수 있다는 것으로, 중국신화연구의 출발점과 종결점이 어디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當代 중국의 신화 연구에 있어 가장 많은 업적을 축적한 학자는 袁珂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상고신화의 주석과 편찬, 영쇄한 신화자료의 재구성 그리고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화연구이론인 廣義神話論 등으로 볼때 이 시대를 대표할만한 중국 신화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그의 많은 연구성과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중국신화와 중국문학과의 관계에 관한 그의 업적이다. 그는 중국신화는 중국의 "거대하고도 휘황찬란한 문학의 유산" 이며, "문학예술 양식 중의 하나" 로서 신화란 문학의 시원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문화의 시원이지만 "신화 자체의 내용과 성질로 보아서 확실히 문학의 범주에 든다" 는 기본관점에서 출발하여 신화와 중국문학과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袁珂의 많은 업적 중에서 '고대 신화의 재구성'에 관해서는 토론하여야 할 여지가 많다. 혹자는 그의 신화의 재구성에 대해 "문학의 필묵으로 각종 신화를 체계적으로 묘사하여 순서있게 연결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역사감과 정체감 그리고 진실감을 주었다" 고 극찬하고 있으나 이는 신화 보존의 차원에서 보면 완벽한 훼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국신화가 훼손되고 散亡된 가장 큰 이유는 "신화가 역사로 전화되어 버렸고, 이는 대부분 孔子를 위시한 유가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학설에 적응시키기 위해 신을 人化시켜 신화 전설에 논리적인 詮釋을 가한데 있다" 고 그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신화를 '문학의 필묵'으로 재구성 한 것과, 철학가 역사가들이 자의적으로 신화를 역사화 하여 원고신화 본래의 모습을 훼손한 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럼에도 그는 中國神話傳說 의 저작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서에 주석 인용한 신화전설의 편단이 천 개 가량이다. 인용은 했지만 주석하지 않은 것을 함께 치면 실제로는 천 개 이상이다. 이러한 (신화의) 조각들을 차례로 배열하여 고증과 정정을 가하고 중복되거나 모순되는 것을 제거하였으며, 역사가 철학가 신선가들에의해 가해졌던 연막을 제거함으로써 그것들의 본래의 면목을 되돌려서 적당한 위치에 안배하고, 예술의 화로불과 지혜로 그것을 용광로에 녹여 결정의 정체가 되게하였다.
신화는 갖가지 요인에 의해 끊임없이 유동 변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고대 중국이 실지로 다민족이 발전 융합된 공동체라는 점과 고대 중국문화가 결코 일원적인 문화가 아니라 다원적인 문화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중국에는 근본적으로 체계적인 신화가 존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상호 모순되고 중복되는 신화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袁珂는 중복되고 모순되는 것을 모두 없애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예술의 화로불과 지헤로 신화들을 용광로에 녹여 결정의 정체가 되게하였다'고 하였으니, 오히려 수많은 신화자료들이 인위적으로 훼손되었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불필요하고 복잡한 작업을 왜 하였을까? 이에 대해 스스로 분명하게 언급한 바는 없다. 그러나 그가 "세계의 몇몇 고대 문명국가인 중국, 인도, 희랍, 이집트 등은 고대에 모두 풍부한 신화가 있었으며, 희랍과 인도의 신화는 더욱 완정하게 보존되어 왔다. 오직 중국의 신화만이 원래부터 풍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중간에 散佚되는 과정에서 오로지 자질구레한 조각만이 여기저기 고인의 저작가운데 산재해 있어 전혀 아무런 체계와 조리가 없어, 각 희랍신화와 그 아름다음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아주 유감스럽다" 고 밝힌 것으로 미루어, 그 역시 문명 고국인 고대 중국에는 반드시 체계적이고 아름다운 낭만에 가득찬 신화가 존재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지고, 이러한 의식은 결국 근대의 중국 신화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문화 우월주의의 역설적 사고의 결과라고 보여진다.
6. 結 論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국의 전통시기 신화관은 회의와 맹신, 긍정과 부정, 이해와 배격 등 다양한 궤적을 그리며 발전해 왔다. 중국의 신화는 人神交往의 참된 신화의 시대로부터 출발하여 絶地通天과 民神不雜의 자각의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그 원시의 생명을 상실하고 말았다. 마침내 본질적 기능이 제거되어 化石으로 남은 중국 신화는 先秦에서는 孔子에 의해 긍정도 비판도 없이 애써 외면당하거나, 아니면 선택적으로 긍정되었는가 하면, 莊子와 屈原에 의해 철학과 시가에 변용되어 새로운 생명을 이식받기도 하였다. 이후 실증적 차원의 회의와 맹목적 맹신, 서정적 이해와 사랑, 그리고 철저한 부정과 무의식적인 긍정이 교차하며 발전하는 혼돈의 신화관이 漢代에서 淸代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신화관이 어떠한 궤적을 그려 왔던지, 그것은 언제나 시대의 테두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종교적, 역사적, 사회적 환경이 陶淵明, 洪興祖 같은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전통시기 중국 인사들의 신화에 대한 인식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러한 시대적 환경을 총괄하는 의식이 바로 전통적인 中華意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를 긍정하고 맹신했던 시대는 물론이고, 부정하고 회의했던 시대 역시 그 부정과 회의가 단순한 부정과 회의가 아니라, 신화고사가 자신들이 신봉했던 중국 고대문화의 정통성과 합리성에 위배된다고 보는데서 우러나온 사고인 것이다. 중국 신화관의 근저에 中華意識이 깔려 있다는 것은 전통시기뿐만 아니라, 근현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근 현대 중국에 있어서 신화연구는 단순한 학문적 차원에서만 수행되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목적과 일맥상통하였고 또한 전통적인 중국학이 대부분 중화사상의 범주속에서 수행되었듯이, 중국신화학 역시 그러한 기저에서 출발했고 또 그러한 바탕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鍾敬文 등이 신화학에서의 '선명한 중국의 깃발'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본(중)국의 이러한 학문(신화학, 전설학 및 동화학 등)에 대해서 각별하게 노력하여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음을 더욱 느낍니다. 중국인은 오늘날 이미 학술 자각의 시기에 당면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자각 중에서 눈을 떴습니다. 우리들이 정치적인 방면에서 자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진 세계학술의 광장에서 우리 역시 선명한 중국의 기치를 수립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정된 관점은 고대 중국에 있어서는 신화의 존재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결과로 나타났고, 근 현대에 있어서는 신화연구가 주로 漢族의 정통성을 고취하거나 또는 문화적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한 학문외적인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화는 민족적 특성을 지울 수 없는 그 민족의 원시 문화의 총화이다. 때문에 그 연구의 과정에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다. 때문에 신화연구가 왕왕 민족의 정체성의 확립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화 연구가 오로지 전제된 목적만을 위해 진행된다면 이 원시의 진리는 그 진면목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 신화의 연구는 반드시 학문외적인 목적을 벗어나는데서 새롭게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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