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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터페이스의 황당한 연대기5-컴퓨터라는 새로운 이미지 도구 : 프랭크 게리(Frank Gehry)와 그렉 린(Greg Lynn)

ddolappa 2008. 8. 20. 02:43
인터페이스의 황당한 연대기
컴퓨터라는 새로운 이미지 도구 : 프랭크 게리(Frank Gehry)와 그렉 린(Greg Lynn)

“유전학적으로 프로그램된 건물의 복제(cloning)를 상상해보라. 아마 건물의 복제가 인간의 복제보다 더 쉬울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슈퍼기능주의이며, 가상적 기능주의다. 그것은 낡은 유기적 및 사회적 기능, 사용 가치 등등의 기능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무엇이다. 건축이 희생양으로 바쳐지는 과정을 목격한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데이터를 어떻게 유의미하게 다룰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_장 누벨

건축과 영화
어디에선가 르 꼬르뷔지에는 19세기 말에 발명된 영화가 모더니즘 건축의 특성을 표현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매체라고 이야기합니다.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모더니즘 건축의 장점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영화 매체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실제로 르 꼬르뷔지에는 1929년에 자신의 친구 피에르 슈날(Pierre Chenal)과 함께 모더니즘 건축을 선전할 목적으로 <오늘날의 건축 L'Architecture d'aujourd'ui>이라는 영화를 찍기도 하지요. 또한 아벨 강스(Abel Gance)나 장 뤽 고다르 같은 영화감독들은 영화의 공간적 배경으로 르 꼬르뷔지에가 설계한 별장들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르 꼬르뷔지에의 영화에 대한 언급은 좀 더 확대 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모더니즘 건축이 화에 포토제닉한 무대를 마련해준다거나, 활동사진이야말로 모더니즘 건축의 공간적 구조를 탁월하게 재현해 준다는 식의 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몽타주 이론을 창조해서 새로운 시공간의 경험을 만들어냈던 에이젠슈타인이나, 표현주의적 색채로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암울한 음화를 그려냈던 프리츠 랑이, 고전주의 건축과 모더니즘 건축 간의 혈투가 벌어지던 시기에 건축가로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암시하는 것은 건축적 상상력과 영화적 상상력 간의 복잡한 영향 관계일 것입니다.

건축 역사가 베아트리츠 꼴로미냐(Beatriz Colomina)는 이 관계에 주목하면서, 르 꼬르뷔지에가 건축의 전통적 스타일에서 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덕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르 꼬르뷔지에는 영화의 촬영 및 편집기법을 건축 공간의 재배치 원리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즉 영화를 촬영하듯이 내외부의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공간을 재구성했다는 것이지요. 아니 르 꼬르뷔지에가  디자인할 때 부지불식간에 카메라의 영화적 시선에 의존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영화적 시선은 매체의 특성상 시간의축에 따라 움직이면서 스크린의 평면 위에 공간의 경험을 연속적으로 배열합니다. 르 꼬르뷔지에는 그 시선을 따라가면서 건축 내부 공간을 일종의 '미쟝 시퀀스(mise-en-sequence)'로 구성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간을 더 이상 표피적인스타일로 장식하지 않은 채 입체적인 시각경험의 장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영화에 대한 르 꼬르뷔지에의 언급은, 자신의 모더니즘 건축이 영화의 편집 기법을 모방했다는 자기 고백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박물관

물론 르 꼬르뷔지에가 언제나 영화 카메라의 이동 시점을 의지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도시 전체를 조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면 언제나 오래된 투시도법의 망원경을 꺼내들었지요.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과학 사회학자 브루노 라투어(Bruno Latour)의 이미지 도구라는 개념을 주목할 만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는 현실의 시각적 재현이나 현실과 무관한 환상의 묘사와 연관된 것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하지만 라투어는 이미지가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미지는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외부의 대상을 제어하고 조작하는 수단, 혹은 단순히 기존의 현실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는 청사진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재현의 테크놀로지를 통칭해 이미지 도구라는 명칭을 붙입니다. 라투어가 보기에 이미지 도구의 대표적인 사례는 투시도법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투시도법의 기원은 기하학적 원리에 따라 평면 위에 현실의 삼차원 공간을 재배치하는
기호 시스템이었지만, 이후에는 건축 디자인이나 도시 계획에서 새로운 구축물을 설계하는데 필수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지요. 그러니까 투시도법의 원리 그 자체가 현실 공간의 구성 원리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투시도법과 더불어 영화 매체는 르 꼬르뷔지에의 디자인에 있어 중추적인 이미지 도구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디자인 프로세스의 자동화?
그렇다면 디자인과 컴퓨터의 관계는 어떨까요? 컴퓨터 역시 영화처럼 디자인의 이미지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이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디자인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컴퓨터 과학이 한창 군산 복합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주목받기 시작했던 1960, 70년대로 말이지요.
컴퓨터 과학이 처음으로 실질적인 파급 효과를 미친 디자인 분야는 1970년대 디자인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디자인 방법론 운동의 영역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와 존 크리스 존스(John Chris Jones) 같이 컴퓨터에 능통한 디자인 이론가들이었지요. 이 이론가들은 디자인이 나름대로 전문적인 지식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 과거와 단절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담론의 형태로 명확하게 언어화되지 않은 채 도제식으로 전승되던 그리기 위주의 디자인 전통은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이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데카르트적인 의미의 방법을 택합니다. 일본의 철학자 나카무로 유지로가 지적했듯이, 데카르트적인 방법이란 기억과 습관에 의지하지 않고 특정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지식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디자인 방법론자들은 바로 이 데카르트적 방법의 틀로 디자인 행위를 단일한 프로세스로 체계화합니다. 그들에게는 얼마나 뛰어난 디자이너에 의해 디자인되느냐보다는 얼마나 체계적인 프로세스로 디자인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또한 이런 시도를 통해 체계화된 프로세스는 자동화된 프로세스의 동의어이기도 했습니다. 디자인 프로세스가 체계화되면 될수록, 그 내부의 의사 결정에서 디자이너 개인은 큰 변수로 작용하지 못합니다. 디자인 방법론의 논리에 따르자면, 그/그녀는 그저 시스템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기존의 디자인 행위가 지닌 자의성이나 즉흥성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디자인의 방법론의 목표가 컴퓨터 프로그램의 플로우차트나 알고리즘을 염두에 둔 디자인 행위의 자동화된 프로세스의 구축이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지요.그리고 이런 식의 개념은 당시 미 국방부가 연구하던 의사 결정 자동화 프로그램이나NASA에서 진행되던 조직 관리 연구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방법론의 주도자들이 이런 시도들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디자인 문제는 명확하게 재현될 수 없으며, 매우 복잡한 확률적 패턴의 형식으로 사후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라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이러한 명제는 세미라티스라는 개념에 집약되지요. 여기서 세미라티스는 단지 확률로만 인접 관계를 드러낼 뿐인 변수들의 복잡한 그물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디자인 문제는 고정된 구조로 확정될 수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 개념에 따르면, 디자이너가 그 문제에 개입하는 순간 이미  문제의 일부, 즉 세미라티스의 수 많은 변수들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지요. 결과적으로 알렉산더가 세미라티스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디자이너가 인식론적으로 투명한 상태에서 체계적인 디자인 프로세스를 거쳐 디자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편, 디자인 방법론의 또 다른 주창자 중 한 명이었던 존 크리스 존스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읽으면서, 체계적인 디자인 방법론으로 창조된 사회가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의 모습을 띌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시스템의 계획과 통제에 따라 모든 사람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외견상 질서정연해 보일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전체주의적 사회의 모습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는 결국 자신의 디자인 방법론을 폐기하고 양심에 따라 대학 교수직도 그만둡니다. 데카르트적인 의미의 '방법'이 동반할 수 밖에 없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할까요.


카티아 프로그램으로 구현된 빌바오 구겐하임의 3D 모델
    와이어 프레임으로 표현된 사각면들은 실제 시공에 필요한 티타늄 클래딩쉬트
한장 한장을 표현한다.

하지만 디자인 방법론이 완전히 쇠락하고 만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디자인 평론가 존 타카라(John Thackara)의 지적대로, 오히려 디자인 프로세스의 디지털화, 즉 컴퓨터를 통한 디자인 프로세스의 자동화를 향해 더욱 빠르게 진화했지요. 이런 맥락에서 학술 저널 <디자인 스터디스 Design Studies>의 편집장으로 현재 디자인 방법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나이젤 크로스(Nigel Cross)가 맨체스터 공대의 대학원생 시절, 존 크리스 존스의 지도를 받으며 연구했던 주제가 “기계가 디자인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학자 앨런 튜링이 튜링 머신의 가설을 통해 인공 지능의 가능성을 실험했듯이, 크로스는 튜링의 가설을 이어받아 기계 디자이너의 가능성을 실험했던 것이지요.

물론 디자인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성적 측면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며, 따라서 인공 지능이 디자인을 행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컴퓨터 과학의 성과를 과소평가한 결과이거나 디자인의 인간적 차원을 과대평가한 결과일 따름입니다. 이를테면 필립 스탁의 기본 형태 어휘와 그 변형물을 데이터베이스로 갖추고 필립 스탁의 디자인 사고방식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구현한 인공 지능 프로그램이 스탁보다 더 스탁스러운 디자인을 해낼 수 있으리라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제껏 우리가 보아온 필립 스탁의 디자인은 필립 스탁이라는 이름의 인공 지능 프로그램이 창조해낸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프랭크 게리의 카티아
한편, 9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디자인계는 다른 방향에서 컴퓨터의 효용성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 핵심에는, 새로운 SFX 테크놀로지의 개발에 골몰하던 헐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 덕분에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되던 워크스테이션 그래픽 소프트웨어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발맞춰 디자인계는 디자인 문제를 해결하는 인공 지능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 생성의 엔진으로서 컴퓨터의 가능성을 주목하게 되었지요. 특히 건축 분야에서 그러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해체주의니 하는 다양한 이름의 형태 실험들이 모더니즘의 기하학적 성채에 타격을 가하긴 했지만 그것을 대체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자, 이제 디지털 혁명의 강력한 엄호 사격을 받아가며 새로운 형태 언어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프랭크 게리(Frank Gehry)와 그렉 린(Greg Lynn)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프랭크 게리의 디자인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프랭크 게리의 작품들 중 지난 10년간 가장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박물관일 것입니다. 철근과 모르타르의 유토피아에 최종적인 파산을 고한 티타늄과 유리의 네오-바로크적 스펙터클, 투시도법으로는 도저히 포착될 수 없는 비정형의 구조물, 곡면의 촉수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유기적인 조각 오브제, 금발 뱀 머리의 메두사로 환생한 마릴린 먼로의 입체 추상조각. 이런 수사들의 성찬에도 우리의 시선은, 끊임없이 **아드레날린을 내뿜으면서 격렬하게 활개를 펼치는 저 곡면들의 움직임을 뒤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궁금증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겠죠. 저 곡면 뒤에 숨어있을 공룡의 뼈대 같은 보강 구조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는 의문 말이지요. 여기에 바로 프랑스의 항공 우주 기업, Dassault 시스템이 개발한 카티아(CATIA) 프로그램의 마법이 숨어 있지요.
게리는 디자인 초기 단계에서 보통 간단한 썸네일 스케치나 종이 스터디 모델로 자신의 조형적 아이디어를 전개한다고 합니다. 빌바오의 뒤엉킨 곡면들도 그렇게 해서 탄생했지요. 게리의 예술적 감수성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이후 작업은 수십 명의 구조 역학 엔지니어와 카티아 전문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전담해서 수행합니다. 그들은 먼저 스터디 모델의 좌표 데이터를 삼차원 스캐너로 입력하고, 이를 바탕으로 컴퓨터로 구조 역학적 계산을 행합니다. 그 후 설계의 적합성을 고려해 본래의 모델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지요. 그리고는 쾌속 조형 공정(rapid prototyping)을 거쳐 삼차원의 축소 모델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영화의 포스트프로덕션 단계에서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들이 감독의 구상에 따라 화면에 각종 특수 효과를 입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요.

이런 프로세스 덕분에 게리는 조각과 건축 간에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않는다고 호기롭게 말합니다. 그가 직관적으로 삼차원의 조각 오브제를 구상하면, 카티아 프로그램이 그렇게 구상된 오브제를 건축적 구조물로 변신시켜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렇다면 게리의 명성은 카티아 프로그램을 착취한 결과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카티아 프로그램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프랭크 게리라는 최상의 베타테스터를 값싸게 고용한 셈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한편에서 인간 건축가와 컴퓨터 프로그램 사이에 윈-윈 게임의 공조 체제가 구축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스펙터클이 되길 갈망하는 건축과, 브랜드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문화 자본 간의 암묵적인 협력 체계가 구축됩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무한 복제될 수 있는 거대한 조각 오브제, 그리고 그것을 감싸고 도는 프랭크 게리의 브랜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세계적 문화 자본의 로고로 전경화되는 것입니다. 포스트-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시대를 준비하는 구겐하임 재단이나, '라이프스타일'의 그래픽 디자이너 브루스 마우(Bruce Mau)와 함께 게리를 고용해 자사의 LA 뮤직홀을 짓게 한 월트 디즈니사, 흑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를 기리기 위한 시애틀 익스피리언스 뮤직홀의 설계를 맡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 공신이자 부사장인 폴 앨런 등이 브랜드 이미지로서의 프랭크 게리를 필요로 한 문화 자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프랭크 게리란 이름은 프라다나 베르사체와 같은 차원에 소비할 수 있는 하이엔드-브랜드 네임일 것입니다. 그 목록에서 빠져 있는 카티아 프로그램에겐 섭섭한 대목이지요.


그렉 린의<발생학적 집>의 스터디 모델

그렉 린의 모핑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함께 언급되는 건축가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그렉 린입니다. 린의 디자인이 게리와 유사하게 컴퓨터를 활용해 디자인을 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린은 컴퓨터의 활용에 있어서 게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급진적인 노선을 추구합니다.
프랭크 게리가 외부의 형태에서 내부의 기능으로 이동하는 방향으로 디자인을 전개하며 그 과정에서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렉 린은 전적으로 컴퓨터에 의지합니다. 그는 가변적인 대상이 수학적 알고리즘에 따라 모핑해 가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하고,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형상들을 건축적 해결안으로 제시하는 식이지요.

일단 모핑(Morphing)과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할 듯합니다. 먼저 메타모르포시스는 단일 개체의 생물학적 변형 과정을 의미합니다. 즉 특정한 개체가 배아기 이후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자체의 형태와 기능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이에 반해 모핑은 형태의 차원에서 한 개체가 자신과 무관한 다른 개체로 변형되는 인위적인 과정입니다. 린의 경우, 이 모핑 과정은 소스 데이터와 수학적 알고리즘에 의해 규정되며, 이런 과정을 거쳐 산출되는 산물은 다분히 기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건축가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인공의 산물이니 인간의 눈에는 낯설어 보이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기하학적인 모양을 띄지 않기 때문에 빌바오 구겐하임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의미의 파사드는 존재하지도 않지요. 이런 이유들로 린은 자신의 디자인 프로세스가, 해류, 난기류, 점도(viscosity), 저항과 같이 복잡한 힘들의 상호 작용을 계산하여 선박의 복잡한 몸통 모양을 설계해야 하는 조선 엔지니어의 프로세스와 유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제시하는 디자인 해결안이 입력 데이터의 변화에 따라 형태가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가변적인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즉 소스 데이터를 토대로 수학적 알고리즘이 구동되고, 이를 통해 형태의 연속적인 모핑 과정이 시뮬레이션되는 것이지요. 일종의 형태의 자기-변형 애니메이션인 셈이죠. 마치 <터미네이터 2>에서 T-1000이 다른 등장인물로 변신하는 연속적인 과정처럼 말이지요. 따라서 충분한 데이터와 시간만 주어진다면, 이렇게 모핑되는 형태들의 수는 무한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컴퓨터 그래픽은 형태 언어의 도서관을 창출해내는 무한 동력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린이 이와 같은 노선을 극단적으로 표명한 것은 <발생학적 집Embryological House> 프로젝트에서입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기본적인 모핑 알고리즘만 선택하고, 아이디어의 전개 과정을 전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에 맡깁니다. 그리고 컴퓨터가 무수히 많은 해결안을 생성해내면, 그 제안들 중 일부를 선택하는 클라이언트(?)의 역할을 수행하지요. 그렇게 해서 무려 1,054가지의 제안을 골라내고 이 중 몇 개를 전시합니다. 해체주의 건축가인 피터 아이젠만은 <애니씽 anything> 컨퍼런스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그걸 과연 디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그 프로세스에서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이냐”고 꼬치꼬치 따져 묻습니다. 이에 대한 그렉 린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해결안들을 평가하고 최상의 것을 선택하는 작업에 관해서 말하자면, 핵심 쟁점은 내가 그걸 행하기 싫다는 것이다. 1,054가지의 해결안 모두 쓸만하다, 확실히. 물론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비해 더 낫기도 하지만. … 핵심은 완벽한 해결안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른 것들을 비교해 볼만한 이상적인 해결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저 끝없이 펼쳐지는 일련의 해결안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질문과 대답은 근본적으로 컴퓨터 그래픽 테크놀로지에 대한 린과 아이젠만 간의 견해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아이젠만 역시 모핑 기법을 활용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기하학적 형태에 변형을 가하는 수준에 그칩니다. 그래서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대한 그의 견해는 게리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요.

비유하자면, 아이젠만과 게리가 조지 루카스에 가깝다면, 린은 제임스 카메론에 근접한다고 할까요. 주지하다시피 조지 루카스가 아날로그 방식의 SFX 테크놀로지들을 디지털화하는 데 그치는 반면, 제임스 카메론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제시하는 사유의 방식으로 SFX 테크놀로지를 전면 재배치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게리나 아이젠만에게 컴퓨터 그래픽 테크놀로지는 자신이 구상한 조각적 곡면을 기술적으로 실현해주는 도구인데 반해, 린에게는 바이너리 코드의 복잡한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위상학적 곡면들을 창조해주는 인간과 동등한 파트너이지요. 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 누가 디자인했느냐보다는 어떤 기종의 컴퓨터와 어떤 그래픽 프로그램이 사용되었느냐는 문제가 더 관심의 대상이 될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수학적 알고리즘이 형태적 해결안의 가능성과 범위를 규정할
것이니 말입니다.


2000년 제7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 전시된 <발생학적 집>의 3/1 스케일 모델

그러니 이런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에이전트 기반의 자율적 형태 생성 소프트웨어가 새로운 형태의 사물을 완벽하게 생성해 낼 것이라고 성급하게 예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모든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린과 같이 급진적인 방식으로 작업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도, 지난 세기의 영화가 그러했듯이  금세기의 컴퓨터가 우리의 시각적 상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만일 이 가정에 어느 정도 동의하신다면, 우리의 두뇌와 눈과 손이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의 명령어를 매뉴얼 삼아 형태를 사유하게 되는 상황을 떠올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인터페이스 상에서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이 디지털
시대의 지배적인 이미지-도구로서 디자이너의 시각적 무의식에 자리잡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르 꼬르뷔지에가 영화 카메라의 시점 이동에 의지해 공간의 연속적 배치를 구상했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미래상은 이미 일정 부분 현실화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사고의 흐름보다 더 빠른 손놀림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면서 익스프레스(Quark XPress)를 사용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나, 3D 렌더링 프로그램으로 곧바로 아이디어 스케치를 행하는 제품 디자이너를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테니 말입니다.

 

출처 : 세계의 디자인 축제 디자인코리아2005
글쓴이 : 디자인코리아2005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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