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이 인터뷰는 8월21일자 ‘류승완, 장남의 영화’ 제하의 기사에 이어지는 후반부 내용입니다.)
“한창 때고, 술도 한 잔 먹고, 자꾸 시비를 걸어오니까 더 이상 물러설 때도 없고, 그러니 액션 한 번 보여주고 가잔 말이지.”(‘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조직폭력배로 등장하는 배중식이 중학교 때 처음 싸움판을 벌이게 된 것을 회고하면서.)
-그동안 여섯 편의 장편 영화를 통해서 ‘액션’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장르적인 의미에서의 액션 영화는 ‘짝패’ 한 편 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 맞아요. 그런데 의외로 그렇게 보시는 분들이 없어요. 저를 생각하면 액션 영화가 저절로 떠오르시는 것 같아요.”
-감독님과 액션 영화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남들이 볼 때 잘 안 떨어지는 관계죠.(웃음) 그게 한때는 좀 스트레스였죠. 그런데 지금은 액션 영화 감독으로 불리는 게 자랑스러워요. 요즘은 오히려 반대로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제게 액션을 기대한다면 아예 마음 제대로 먹고 한 번 액션에 달려들어볼까 하는 거지요. 평생 액션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언제고 다시 꺼내보고 싶어지는,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영화를 몇 편 내놓는다면, 그것도 정말 영화 감독이 걸어볼 만한 길인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서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또 못할 일이죠. 우린 또 말을 꺼낸 뒤 책임져야 하는 것에 대해 부담 느끼는 사람들이니까요.(웃음) 어쨌든 예전만큼 액션 영화의 장르적 매혹 자체에 끌리진 않는 듯 해요.”
“밧데리 나갔어요.”(‘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이혜영이 형사 이영후의 전화가 삑삑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서.)
-감독님 영화의 액션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력을 다하느라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로 싸우게 되는 장면들입니다. 4부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3부에 해당하는 ‘현대인’ 부분이나, ‘짝패’의 마지막 액션 시퀀스가 대표적이죠.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최후 대결이나 ‘주먹이 운다’의 권투 결승전도 그렇고요. 그 과정에서 힘이 다 빠져 일어나다가 연거푸 넘어지거나 거듭 헛발질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하죠. 액션의 처절한 느낌에서 홍콩 거장 장철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장면들의 인물들에게선 일종의 숭고함까지 느껴집니다.
“제가 관객으로서 영화를 볼 때 그런 장면들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감독으로서 액션 장면을 찍다보면 결국 그렇게 되는 듯 해요. 액션을 반복해 찍다보면 실제로 저 자신을 포함해 배우들이 지쳐가는 것을 보게 되잖아요? 현장에서는 바로 그런 모습에 꽂히는 거죠. 저는 영화를 현장의 감각으로 만들기에 자꾸 그런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저는 준비를 철저히 해서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액션 연출은 자꾸 그렇게 됩니다.
“어떠냐, 좀 버틸만 허냐?” “말할 기운두 읎슈”(‘짝패’에서 한참 동안 수십명과 난투극을 벌이던 정두홍과 류승완의 대화.)
-이제껏 그런 액션의 처절함과 피로감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은 어떤 것이었다고 자평하세요?
“아무래도 ‘현대인’에서 극심한 피로가 가장 잘 드러난 것 같아요. 진짜로 피로해 보이거든요. ‘주먹이 운다’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선수가 너무 힘들어 서로 헛손질하는 장면도 만족스럽습니다. 권투 경기를 직접 보면 선수들에게 가드 올리라는 말을 하는 걸 자주 듣게 되는데, 정말 나중엔 손 올릴 힘도 없어지기 때문이죠. 홍콩 액션 스타 견자단이 ‘주먹이 운다’를 보면서 ‘영화에서 이런 권투 장면 처음본다’고 그랬대요. 그 영화의 권투 장면들은 사전에 합을 짜지 않고 사실적인 느낌을 최대한 살려 찍었기에 그렇게 느꼈을 거에요.”
“주차장에서 발견했을 당시부터 쭈욱 두 분 모두 저러고 계십니다.”(‘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앉은 채로 몸이 굳어 있는 김영인과 백찬기를 가리키며 의사가 안성기에게.)
-제가 이번에 감독님 영화들을 쭈욱 보면서 액션 신이 몇 개인지를 일일이 세어보았습니다.(웃음)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겠는데, 일방적인 린치 장면을 제외하고 모두 61번 정도의 액션 신이 등장하더군요. 그렇게 세어보았던 것은 감독님 영화에서 액션 신의 장소로 어떤 곳이 선호되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였습니다. 통계를 내보니, 골목길에서 10번, 체육관이나 링 위에서 9번, 넓지 않은 공터나 공사장 혹은 철거 현장에서 8번, 주차장에서 6번 연출되었더군요. 링이 많은 것은 권투 영화 ‘주먹이 운다’ 때문이니, 결국 감독님은 액션 장소로 골목길이나 주차장 혹은 작은 공터나 공사장을 선호하신다는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이 장소들의 공통점은 모두 좁다는 것이죠.
“우와, 그걸 다 세셨어요?(웃음) 아마 실제로 그런 장소들에서 싸움이 많이 일어날 거에요. 부분적으로 열린 공간 같은데, 사실 적막한 곳들이죠.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는 당사자들만 존재하는 것 같지만, 어느새 다른 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개입되기도 좋은 공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뻥 뚫려 있는 공간에서 액션 장면을 찍는 것을 두려워하는 편이에요. 좁은 공간에선 액션이 벌어질 때 카메라가 움직여도 뭔가가 프레임 속에 이미 채워져 있으니 부담이 덜하죠. 골목은 어렸을 때 주로 싸움판이 벌어졌던 곳이라서 자연스럽게 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웃음)
주차장도 독특한 느낌이 있죠. 저는 지금도 주차장에 가서 차 문을 열 때 마다 뒷통수가 순간적으로 서늘해지는 것을 느껴요. ‘피도 눈물도 없이’의 클라이맥스에서 경선(이혜영)이 독불(정재영)의 목을 자동차 열쇠로 찌르는 묘사가 나오는 것도 저의 그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거에요. 제가 한동안 주차장에 들어설 때면 뭔가 불안해져서 손가락 사이에 자동차 열쇠를 그렇게 끼고 다녔거든요.”
“나한테 쌓인 건 나한테 풀어.”(‘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류승완이 동생 류승범을 소모품처럼 쓰려는 조직폭력배 친구 박성빈에게 거칠게 쏘아붙이며)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부분은 액션이 이뤄지는 공간에 쓰레기 더미나 폐자재 같은 것들이 쌓여 있을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상환(류승범)이 주차장에서 지갑을 빼앗으려 사채업자를 마구 때릴 때 피해자는 쓰레기 더미 위로 쓰러집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상환(류승범)의 친구들과 침묵맨(정두홍)이 공터에서 싸울 때도 옆엔 폐자재들이 쌓여 있죠. ‘피도 눈물도 없이’의 마지막 액션이 벌어지는 곳엔 폐타이어들이 있습니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라스트 신에서는 장풍이 난무할 때 쓰레기장의 쓰레기더미들이 터져나가기도 하고요.
“격렬하게 액션을 찍다 보면 주변의 것들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잖아요? 쓰레기 더미가 액션 신에 좋은 것은 안전하면서도 부딪쳤을 때 강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이죠. 격투의 와중에 내용물이 쏟아져나오면 시각적으로도 풍부해지고요.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쓰레기 더미들을 터뜨린 것도 시각적인 효과 때문이었습니다. ‘주먹이 운다’에선 피해자가 살기 위해 쓰레기 더미 안으로라도 기어들어가서 발버둥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겁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장면처럼 건축자재들이 쌓여 있으면 굳이 배우가 부딪치지 않더라고 위험한 데서 싸운다는 느낌을 줄 수 있죠. 액션을 만들 때는 주위의 소품 배치가 참 중요한데, 그 공간에 있을만한 것들을 얼마나 잘 배치해서 시각적으로 활용하는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 브루스 리도 ‘사망유희’에서 압둘 자바랑 맞짱 뜰 때 그냥 기습적으루다가 급소를 노린 거거든.”(‘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류승범이 친구들과 싸움 방법에 대해 논하며.)
-아시아에서 액션을 찍는 사람들이라면 이소룡과 성룡의 자장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감독님 영화에서 이소룡은 두 차례 직접 강력하게 언급되죠.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대사로 한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고교생 패싸움 장면에서 포효하는 이소룡의 얼굴이 아주 짧게 인서트되면서 또 한번입니다. 반면에 성룡은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그의 출연작 ‘오복성’이 언급되는 정도입니다. 성룡이나 이소룡에 대한 애정을 그동안 많은 자리에서 표해오셨는데, 이제 ‘폴 매카트니냐, 존 레넌이냐’ 혹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같은 일차원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네요. 성룡이 더 좋으세요, 아니면 이소룡이 더 좋으세요?(웃음)
“출연작으로 따지면 성룡의 영화를 훨씬 더 좋아하죠. 특히 80년대 성룡 영화들은 정말 대단했잖아요. 실로 엄청난 스턴트들이었죠. ‘프로젝트A’의 1편과 2편, ‘폴리스 스토리’의 1편과 2편은 말 그대로 최고입니다. 이 네 편은 전부 성룡이 직접 감독까지 맡은 작품들인데, 그가 온전히 영화 전체를 장악한 영화들이었죠. 그가 도달하고 싶었던 버스터 키튼의 세계를 포함해, 성룡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소룡 영화론 ‘용쟁호투’를 좋아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영화가 아니라 이소룡 자체를 더 좋아하는 거죠.”
-사실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들은 그 자체론 결코 훌륭하다고 볼 수 없죠.(웃음)
“뜯어보면 ‘사망유희’같은 작품도 참 이상한 영화에요. 하지만 이소룡이 입었던 ‘노란 추리닝’의 아우라가 대단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거죠. 이소룡은 동양인 무도가로서 정말 짧고 굵게 갔잖아요? 한 마디로 폼 나는 거죠.(웃음)”
-제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으셨네요.(웃음) 출연작이 아니라 액션 스타 그 자체로서 누가 더 좋습니까.
“이건 너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에요. 하나를 고르면 다른 쪽을 배신하는 건데, 그럴 순 없죠. ‘척 노리스냐, 스티븐 시걸이냐’면 모를까.(웃음)”
-그건 열등 비교죠.(웃음) 저는 그래도 감독님이 성룡을 택할 거라고 예상했는데요.
“최근에 나온 영화들이나 그의 발언들에 너무 실망해서요.(웃음) 제가 이제껏 세 번 성룡을 직접 만났어요. 처음은 ‘미러클’의 국내 개봉 때 팬클럽 회원이었던 제가 내한한 그와 악수 한번 해 봤던 경우였죠. 두번째는 ‘엑시덴탈 스파이’ 때 그 팀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서 촬영 현장에 잠시 가본 것이고요. 그리고 세번째는 부산 영화제에서였습니다. 제가 오우삼이나 정소동을 만날 때도 전혀 떨지 않았는데, 그땐 진짜 떨리더라고요.(웃음) 하지만 그날 많이 실망하고 말았어요. 술을 먹고 게슴치레해진 그 눈을 잊을 수가 없어요.”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인데...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인연’의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웃음)
“맞아요. 정말 우상은 마음 속으로만 품고 있어야 돼요.(웃음)”
“그날따라 아르바이트 하는 애가 못 나와갖고, 왕재가 직접 서빙까지 뛰었댜.”(‘짝패’에서 이범수가 정두홍에게 안길강이 살해당했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짝패’는 감독님이 직접 서빙까지 뛴 작품입니다.(웃음) 연출 뿐 아니라 주연까지 맡아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연기를 하셨으니까요.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도 직접 주연을 맡았죠. 한때 배우로서의 꿈도 있으신 걸로 아는데, 지금은 어떠신가요?
“예전에 꿈이 있었죠. 그러나 지금은 배우로선 은퇴선언을 한 상태입니다.”
-왜요?
“ ‘주먹이 운다’를 통해 엄청난 배우들을 눈 앞에서 직접 봤는데도 그 꿈을 계속 유지하면 미친 거죠.(웃음) ‘짝패’는 좀 특이한 경우라서, 마지막으로 원없이 하고 싶었던 작품이었어요. 제 연기의 강점은 발차기였는데 이젠 그것도 잘 안 되니 뭘 더 하겠어요.(웃음)”
“너, 니 형 빽으로 큰대메?”(‘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형인 류승완이 경찰관임에도 불구하고, 폭력조직에 들어간 류승범에게 친구가 이죽거리면서.)
-지금 류승범씨는 연기가 운명인 것처럼 느껴지는 좋은 배우입니다. 하지만, 감독님이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우연히도 동생인 류승범씨를 출연시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처럼 배우의 길을 걷진 않았을 듯 하지요. 아무래도 형제지간인만큼 형의 눈으로 오랜 기간 동생을 바라보셨을텐데, 그로부터 독립해서 언제부터 류승범씨가 자질이 뛰어난 배우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까.
“사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때는 동생을 출연시킬까에 대해서 갈등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결국 동생을 캐스팅했는데, 그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승범이가 칼에 찔려 죽어가는 장면을 연기하는 걸 볼 때는 정말 멍해지더군요. 그게 사실이 아니라 연기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 정신이 없어지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감독으로서 그런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승범이를 배우로 바라본 게 아니었겠죠. 그런데, 그 영화가 공개되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승범이의 연기를 좋아하더라고요. 이어서 ‘다찌마와리’의 인터넷 버전을 찍을 때 배우로서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러다 ‘주먹이 운다’를 찍으면서, ‘얘가 위대한 배우가 될 수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배우로서 류승범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죠.”
“예, 김금복입니다. 예, 오늘 저녁에요? 예예, 감사합니다.”(‘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사채를 굴리는 신구가 걸려오는 전화를 공손히 받으며.)
-감독님 영화의 악역들은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악당과 좀 다릅니다. 대표적인 예가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의 김금복(신구)과 ‘짝패’에서의 필호(이범수)일 텐데요, 평소엔 따뜻하고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인상적입니다. 이를테면 ‘생활인 악당’이라고 할까요.(웃음)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흡사 서로 친구나 가족 사이인듯 가깝게 얽혀 있는 것도 그렇고요.
“일단 저는 이 세상 어떤 악인도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 묘사들은 제가 어린 시절 그런 ‘동네 삼촌’과 ‘동네 형’들을 보며 성장했기에 제 피부에 직접 와닿은 삶의 방식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강한 사람에게 부딪치면 부러지니까 생존을 위해 잠시 휘어져 있다가, 상대가 뒤돌아섰을 때 일격을 가하는 식이었죠.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안이 몰락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거나 배신당하는 광경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게 뼈 속에 배어버렸나봐요. 사실 제가 사람들과 쉽사리 친해지지 못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는 편인데, 그런 성향도 제 과거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요.”
“아, 일수쟁이 김영감! 그 노인네가 이 동네 나가요들하고 웬만한 업장주들한테 전부 일수놓고 사는 전주거덩? 동네 골목만 한 바퀴 돌아도 현금으로만 몇백씩 땡길 거다.”(‘주먹이 운다’에서 누가 현금이 많은지를 묻는 류승범의 질문에 동네 사람이 답하며.)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걷으러 다니는 모습이 감독님 영화에서 자주 묘사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인상적인 것은, 수금하러 다니는 사채업자에게 가게 주인들이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하는 모습을 그리신다는 거지요. 차림새까지 서로 비슷한 그 사채업자들은 가게 주인들의 그런 인사를 인자한 미소로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받고 말이죠. ‘피도 눈물도 없이’나 ‘주먹이 운다’ 뿐 아니라 ‘짝패’에까지 그런 스케치 장면이 있는데요.
“제가 어릴 때 집에 일수 찍으러 오시던 키작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을 선명하게 기억해요. 집에서 식당을 하다가 크게 망해서 전기까지 끊어졌는데, 그런 분들은 악착 같이 찾아오셔서 돈을 받아내려 하셨죠.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분들이 그럴 때마다 항상 부드럽게 웃으시고 우릴 걱정해주는 말을 하신다는 점이었어요.(웃음)”
'다찌마와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류승완 감독. ⓒ 이동진닷컴-사진가 김보배 |
“내 맘 내가 왜 이럴까. 몸과 맘이 따로 놀아.”(‘다찌마와리’에서 임원희가 자신의 마음 속에는 공효진이 있는데도 눈 앞에서 박시연이 적극적으로 대시하자 마구 흔들리며.)
-감독님 영화 속에서는 두가지 핵심적인 요소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장르 영화에 대한 원초적인 매혹과 삶을 보는 비관적인 시각이 한 작품 속에 뒤엉켜 있다고 할까요? ‘아라한 장풍대작전’ 당시 감독님을 인터뷰할 때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언뜻 모순될 것 같은 이 두 가지 요소가 기묘하게 어울리며 감독님 영화세계를 역동적으로 만들어준다는 거죠.
“처음엔 그 점을 의식하지 못했는데, 다른 분들이 지적하는 것을 들으면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고민도 있었어요. ‘한 편의 영화 속에서 질서가 성립되어야 보기 좋기 마련인데, 나는 왜 균형을 맞추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었죠. 제가 생각해도 무질서한 측면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현실을 사는 류승완과 직업인 류승완을 분리했을 때 답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현실에서의 류승완은 좀더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업인으로서는 일종의 기능공으로서 영화를 만드는 일에 충실해보자는 겁니다. 저는 앞으로 영화를 좀더 단순하게 만들어보고 싶은데, 연출할 때 가장 기초적인 것들로만 영화를 만들어 간다 해도, 제가 현실을 열심히 살아간다면 제 몸 속에 배인 게 어떤 식으로든 영화에 투영될 거라고 봐요.”
“가급적 초장에 끝내야 한다. 헛주먹 날리지 말고 탕탕, 먹히는 것부터 저거해야 한단 말이여.”(‘주먹이 운다’에서 변희봉이 신인왕전 결승전을 앞둔 류승범에게 주문.)
“형, 초반에 정면승부 하지 마. 알지?”(‘주먹이 운다’에서 임원희가 신인왕전 결승전을 앞둔 최민식에게 주문.)
-‘주먹이 운다’에서 마지막 대결을 앞두고 두 선수는 상반된 전술을 쓰려고 합니다. 상환(류승범)이 초반에 승부를 보는 방식을 선호하는 반면, 태식(최민식)은 좀더 길게 경기를 끌고가려 하죠. 일반적으로 감독님 영화는 프롤로그의 내용에서 촬영-편집 스타일까지, 초반부터 강력하게 시작할 때가 많았죠. 아라한의 도입부에서 보이듯, 그 장면의 맥락을 전체적으로 제시해주는 설정 쇼트까지 생략한 채 박진감 넘치게 밀어붙이는 경우도 감독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그런데, 6편의 영화를 찍으면서 조금씩 무게중심이 뒤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상환의 방식에서 태식의 방식으로 이동중이라고 할까요.
“정확히 보셨어요. 제가 데뷔 때 좀 요란했잖아요? 그 이후 지금까지 8년의 시간은 어쨌든 인생이 뜻대로 되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죠. 그 사이에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어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분명 변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제가 나이 칠십, 팔십이 되어서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일지 무척 궁금해요.”
“근데, 천하의 왕재도 나이는 먹을 거 아니냐?”(‘짝패’에서 이범수가 그동안 안길강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정두홍에게 설명하면서.)
-30~40년 후, 많은 나이를 먹었을 때의 자신의 영화가 궁금하다는 말씀이 무척 인상적이네요.
“저는 그때 만들게 될 영화가 궁금해서 지금 이렇게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듯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도중에 실패를 경험한다고 해도, 내 삶에 충실하고 또 옳은 것을 선택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그때 도달해 있는 제 삶은 어떤 식으로든 그때의 제 영화에 투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보거든요. 구로사와 아키라든, 클린트 이스트우드든, 노인의 시선으로 찍은 영화들이 있잖아요? 그 작품들에 무슨 정치적인 관점이 있고, 현란한 그 무엇이 있겠어요. 하지만 거기엔 끝내 살아남은 한 사람의 시선이 담겨 있잖아요.”
“내가 고시 공부한다고 했을 때, 끝까지 밀어준 건 왕재 뿐이 없어.”(‘짝패’에서 정석용이 안길강에 대해서 회고.)
-지금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헌신적으로 밀어준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부인이신가요? 부인인 강혜정 대표님과는 감독-제작자로 계속 일해오고 계신데요.
“당연히 그렇죠.(웃음)”
-아내가 아니라 영화적 동지로서 어떻게 강대표님을 평가하세요?
“솔직히 말하면, 뛰어난 제작자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주 건강한 기업가이긴 한 것 같아요. 원칙을 지키려 하고, 사술을 부리지 않으려 하고, 윤리를 지키면서 일하려고 하죠. 좀 고리타분하긴 하지만, 저희는 그게 무척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원칙이 무너지면 모든 것을 잃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업계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게 진리잖아요. 흐름도 많이 바뀌고요. 그렇게 불확실한 수치를 향해 달려간다고 해서 삶의 품위까지 저당잡힐 순 없죠.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포함해 제가 못하는 게 많은데, 저의 그런 부족한 부분들을 정말 많이 채워줍니다.”
“왜 이 직업을 택했는가, 왜 건달이 됐는가, 그 말입니까?”(‘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배중식이 인터뷰어의 질문에 되물으며.)
-왜 영화감독이 되고 싶으셨습니까.
“처음엔 그냥 액션 스타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누구도 저를 배우로 안 써줄 테니 내가 직접 찍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중학교 때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죠. 그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로부터 영화는 감독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어요. 그전까진 체력 단련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운동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거든요.(웃음) 그렇게 감독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영화 잡지도 보게 되고, 그러면서 영화를 보는 취향까지 바뀌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면서 자연스레 감독이 되고 싶어진 거죠. 그러다 20대가 되면서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는 한편 영화 일도 시작했죠. 그런데, 다른 일을 하면 한 달이면 지쳤는데 영화 현장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거기엔 늘 뭔가가 항상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때는 영화가 나를 일으켜 줄 것이란 확신이 있었죠.”
“꿈은 무슨 꿈입니까. 꿈이니 희망이니 그런 거 잊어버린지 굉장히 오래 됐습니다. 그냥 뭐, 열심히 잘 사는 거죠. 굴곡없이 사는 거에요. 무사안전주의.”(‘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경찰관 류승완이 꿈에 대한 질문을 받자.)
“꿈? 그런 거 생각할 여유도 없었어. 지금도 그렇고. 그저 애들한테 칼침이나 안 받았으면 좋겠어.”(‘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조직폭력배 배중식이 꿈에 대한 질문을 받자.)
-꿈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영화 감독이 되고싶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미 20대 때 이룬 상황이신데요.
“제가 어린시절의 꿈을 이룬 것은 맞죠. 그런데, 사람은 항상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아요. 지금은 80살이 되어서까지 영화를 계속 만들어서 제대로 된 작품을 남기고 싶은 게 직업인으로서의 제 꿈입니다. 정말 영화를 잘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제 가족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서 좀더 허락된다면, 저와 제 가족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서 무엇보다 살아남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도대체 지금 몇신줄 알아요?”(‘짝패’에서 김서형이 밤 늦게 술에 취해서 찾아온 정두홍에게.)
-오후 다섯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새벽 4시에 끝났네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드디어 끝났군요. 그동안 ‘부메랑 인터뷰’ 시리즈로 인터뷰한 감독들 중에서 제가 가장 오래 한 건가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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