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미술의 태동
현대미술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요? 모두 다 알다시피 미술은 고대에도 있었고, 심지어 원시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시미술"이란 게 있지요. 그런데 미술의 역사에서 언제부터를 "현대미술"이라고 부를까요? 사실 여기에 대한 이렇다할 정답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피카소부터다, 어떤 사람은 세잔부터다, 혹은 인상주의부터다, 제각기 다른 견해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언제부터 진정으로 새로운 미술이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미술, 그리고 그 이후의 미술이 나갈 방향을 제시해준 미술을 인상주의자들, 세잔, 피카소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특징을 과거와의 단절, 전통에의 도전이라고 볼 때, 현대미술의 정신은 멀리 19세기 낭만주의 미술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8-19]
낭만주의의 대표작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고전적인 그림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인체를 묘사한 방법을 보면, 근육질의 몸매, 균형잡힌 인체비례 등 이상적인 인간의 신체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겐 별로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충격을 불러 일으켰었습니다. 그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건 이 그림이 인간의 격렬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좁다란 뗏목위에 중첩되어 있는 인물들의 군상이 보입니다. 그들은 무언가 - 아마도 그들을 구조해줄 배였겠죠 - 를 발견하고는 손을 뻗어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몹시 지치고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화면 하단의 사람들은 거의 죽어가거나 이미 죽은 시체들인 것 같습니다. 삶을 거의 체념한 듯 팔을 괴고 있는 노인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처럼 죽음의 문턱에 선 고통의 현장을 묘사함으로써 보는 이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미술은 이전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고전주의 미술은 이상적인 인간과 이상적인 자연을 묘사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상적인 인간은 곧 이성적인(rational) 인간을 뜻합니다. 지나친 감정의 표현은 대개 자제되었죠. 고전주의에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에 고대의 역사나 신화, 혹은 성경에서 가져온 교훈적인 이야기가 묘사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계도하고자 했습니다. 다음의 그림을 봅시다.
[쟈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악법도 법이다"를 외치면서 용감하게 독배를 받아 마셨던 소크라테스가 이 그림의 주제입니다. 정치적 음모의 희생자로 억울한 죽음을 맞았던 소크라테스는 대의명분을 위해 죽어간 고대의 영웅입니다. 이 그림은 훌륭한 역사화의 한 예가 됩니다. 인체 묘사를 봅시다. 제리코보다 훨씬 명확하고 또렷하게 해서 마치 고대의 조각상처럼 보이죠. 그래서 배경과 구분이 더 잘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제리코는 그의 선배 다비드보다 윤곽선을 불분명하게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또 전체 구도를 비교해 봅시다.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에선 왼쪽 하단으로부터 오른쪽 상단으로 향하는 대각선의 상향 운동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적인 구성에 비할 때,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수평적 구도를 취하고 있는 다비드의 그림은 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결과적으로 제리코의 그림은 다비드의 그림보다 정서적인 효과가 훨씬 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고전주의 양식과 달리 낭만주의 양식은 상당히 감성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제리코의 그림으로 돌아가보죠. 이 장면은 당시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묘사한 것입니다. 1816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메두사호 침몰사건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냈던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배가 난파하자 선장을 비롯한 고급 장교들은 구명보트를 타고 피신했지만, 하위직 선원들은 선체에서 뜯어낸 나무조각으로 뗏목을 만들어 타고 바다 위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13일, 처음엔 147명이던 선원들이 대다수 사망하고 15명만이 살아 남아 구출되었죠. 메두사의 뗏목은 죽음의 뗏목이었습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옥같은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들의 승리는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합니까? 프랑스 당국에서는 이 사건을 쉬쉬하며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을 1819년 제리코가 이 그림을 그려 세상에 공개한 것입니다. 미술가가 당대에 일어났던 사건에 주목하고 사회고발적 행위를 한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매우 현대적인 사실입니다.
낭만주의 이전에는 미술이란 체계적인 규칙에 따라 세계를 재현하는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 내용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런 것만이 정당하게 미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죠. 그런데 낭만주의에 이르면 미술은 미술가의 자기표현(self-expression!)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격한 고통과 정서의 표현이 많아지게 되고, 미술가의 개성도 더욱 중요시됩니다. 그리고 이제 미술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표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현실에선 볼 수 없는 공상의 산물도 좋고, 금기시되던 이교도의 설화도 무방합니다.
[프랜시스 고야, <자식을 삼키고 있는 사투르누스> 1700년대 말]
거인은 이미 사람의 머리와 왼팔을 먹어 치우고, 오른 팔을 우적 우적 씹고 있군요. 이 끔찍스러운 장면은 스페인의 낭만주의 화가 고야가 그렸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사투르투스 혹은 크로노스는 신들의 제왕 제우스의 아버지입니다. 올림퍼스의 신들의 세계가 도래하기 이전에 거인족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크로노스는 자기 아버지를 해치우고 거인족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잡아 먹었습니다. 혹시 자신도 자식에게 당할지 모르니까요. 그의 여섯번째 아들이었던 제우스는 어머니 레아가 태어나자 마자 빼돌려서 운좋게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우스에 의해 최후를 맞고 말지요.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는 자식들을 통째로 삼켰고 나중에 모두 토해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야는 이 식인의 장면을 잔혹한 캐니벌리즘으로 그려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고야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고 이 그림을 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끔찍스러운 그림을 그렸을까요? 인간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잔혹하고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럴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이 그림은 원래 고야의 별장에 벽화로 그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야는 다른 누구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렸던 겁니다.
요컨대 고전주의는 더이상 유일한 기준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술가는 정해진 규칙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따라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천재니까요. 그러므로 예술가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창작할 것을 강요하는 일은 더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실들이지만, 그 당시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구미술의 전통은 낭만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이후의 미술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도전을 받습니다. 계속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미술의 "현대성"입니다. 자, 그럼 낭만주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고요, 다음시간에는 인상주의에서 현대성이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The pictures above were captured from Mark Harden's artchive and Jim's Fine Art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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