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세계/미학

[펌][서양화 읽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ddolappa 2008. 11. 24. 15:06

[펌][서양화 읽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글쓴이 : 불같은 강속구 
출처 : http://www.pgr21.com/zboard4/zboard.php?id=ACE&no=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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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송석희 입니다.
요즘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씨의 파이프 그림에 대해 말이 좀 많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6분의 석학을 모시고 문제의 그림을 보면서 같이 말씀 나눠 보겠습니다.

우선 출연자 소개부터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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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bucket 서양철학사의 큰 기둥이시죠. 플라톤 선생님 나와 주셨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씨와 아주 닮으셨네요.1) 착각할 뻔 했습니다.
손모양은 오해를 부를 수도 있으니 내려주셨으면 좋겠는데...2)
예?... 아... 하늘 위 이데아를 가리키시는 것이라고요? 알겠습니다. 저번에 아테네 학당을 갔더니 제자분인 아리스토텔레스께서는 땅을 가리키고 계시던데...

Photobucket 아하... 이번에 제가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학당을 하나 세웠는데 오픈 하우스때 오셨군요. 그때 라파엘로씨도 와서 학당 그림을 그리고 갔어요. 내가 선전차 들고 왔는데.....잠깐 소개 좀 드릴까요?

Photobucket 나중에 시간을 좀 드릴테니 그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다음 출연자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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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철학을 재건했다는 평을 듣는 분이죠. 칸트 교수님 나와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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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을 정립하신 후설 교수님도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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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을 창시하고 발전시키셨죠.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피카소 화백 나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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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이시죠. 소쉬르 교수님입니다. 카메라 쪽을 좀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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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사회에서 담론, 타자 같은 용어를 유행시키신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이시죠.  푸코 교수님입니다.





Photobucket우선 마그리트씨의 그림을 볼까요. 화면 준비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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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rahison des images (Ceci n'est pas une pipe)
1929, Oil on Canvas, 64.45 × 93.98 cm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이미지의 배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저 그림인데요, 작가는 파이프를 그린 다음에 밑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말을 써넣었습니다. 이 그림의 진의가 무엇이냐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항간에는 파이프를 그리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다니 애들 장난이냐, ‘이것은 파이프이다’ 를 잘못 쓴 거 아니냐. 심지어는 벨기에에서 왔다더니 불어를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신공격성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플라톤 선생님께 여쭤볼까요.

Photobucket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데아란 무엇입니까?

Photobucket 비유를 하나 들까요. 여기 동굴이 있는데 거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묶여 평생을 동굴 안에서만 살아온 죄수들이 있어요. 그 죄수들 뒤편에는 횃불이 타고 있고. 그래서 항상 그림자만 보고 살지. 이제 죄수 하나를 풀어주고 그가 보아온 동굴 벽의 이미지는 그림자였음을 설명해줍니다. 평생을 그림자만 보아온 죄수는 그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할 겁니다. 그림자를 사물의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고집할 테니까. 그를 끌고 동굴 밖으로 나와 진짜 나무와 산과 들을 보여주면 결국 동굴안의 세계가 모두 엉터리라는 걸 알게 되겠죠.
하지만 그 죄수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다른 죄수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설명해주어도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그 죄수를 바보로 여기거나 심지어 쓸데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다고 죽일지도 모르죠.  내 스승이신 소크라테스는 그래서 몽매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동굴 속은 현실세계이고 동굴 밖은 이데아입니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사물의 외양을 보는데 그것은 사실 허상일 뿐이죠. 그 허상들을 존재하게 하는 원본이 바로 ‘이데아’라는 것입니다.

Photobucket 아 그렇군요 .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Photobucket 내 이데아론을 잘 생각해보세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데아의 모방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방의 세계인 현실계를 모방한 예술은 더욱 조잡한 것이겠죠. 그런 것들은 잘못하면 향락과 타락의 길로 이끌 수 있으니 검열을 해야 합니다.

Photobucket 저.......조만간 간행물윤리위원회나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선생님을 모시러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저 그림을 어떻게 보셨나요?

Photobucket 저 그림은 현실의 모방입니다. 파이프라는 것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을 모방한 것이 현실세계의 파이프이고 그 현상(現象)의 파이프를 모방한 것이 저 그림이란 말이죠. 즉 화가는 동굴 벽에 비춰진 파이프를 보고 그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 그림은 ‘파이프’라는 것의 실재(實在)의 참모습이 아니겠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써놓은 걸 보면 르네 어쩌고 하는 화가가 내 이론을 잘 이해하고 있나봅니다. 그런데 영등위에서는 언제쯤?...

Photobucket 그럼 다음은 칸트3) 교수님께 질문 드려볼까요. 교수님께서는 ‘물자체’(Ding an sich)라는 것과 ‘현상’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Photobucket 우리는 사물에서 비롯되는 감각자료들을 눈, 귀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입니다. 이 감각기관은 일종의 거울이죠. 이 거울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현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휘어진 거울이나 얼룩진 거울을 통해 사물을 보면 그 사물도 휘어지거나 얼룩이 묻어있는 것처럼 보이겠죠? 그게 현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물의 본질이나 궁극적인 실재를 알 수는 없습니다. 현상을 넘어서는 본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경험도, 지각도, 인식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거울에 비춰지기 전의 완전한 사물, 근본적인 실재를 ‘물자체’ 라고 개념 지은 겁니다.

Photobucket 말씀을 들어보면 앞서 플라톤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신 이데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죠. 어떤가요?

Photobucket 예, 이데아와도  중세철학에서의 보편자와도 비슷한 개념입니다. 다만 플라톤 선생님은 철인들의 경우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철인이고 뭐고 물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 눈에 비치지 않는 것을 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이성의 힘으로도 사물자체를 꿰뚫어 볼 수는 없는 겁니다. 플라톤 선생님 이래로 우리는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물자체와 일치하느냐를 고민해왔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얼룩이 묻어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추면 ‘얼룩 있는 얼굴’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얼룩있는 얼굴이 원래의 진정한 얼굴의 모습과 일치하느냐 아니냐를 고민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왜  얼룩있는 얼굴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는지 그 판단방식을 연구해야...

Photobucket 그건 칸트씨가 진정한 철인이 아니기 때문이지. 철학자의 이성은 이데아의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니까.

Photobucket 저...플라톤 선생님, 다른 분이 말씀하실 때는 경청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발언기회를 나중에 또 드릴 테니까요.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손을 좀...
칸트 교수님 계속 말씀해주시죠.

Photobucket 음...음...  어쨌든 말이죠, 저 그림에 보이는 파이프의 모습은 어느 한쪽의 모습입니다. 저 일면만 그려진 물체가 파이프의 실체냐 아니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저것을 파이프라고 생각하게 하는 우리의 판단형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진리는 외부의 대상에서 찾을 게 아니라 대상을 만드는 우리의 판단형식에서 찾아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앎의 근원은  인식 주체의 바깥에서 온다는 게 기본적인 믿음이었죠. 실체는 언제나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정신은 그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라고요. 하지만 저의 발상은 그런 구도를 완전히 뒤집어서 정신이 대상을 구성한다고 보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Photobucket 코페르니쿠스는 무슨...

Photobucket 플라톤 선생님!

Photobucket 우리의 정신 안에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커니즘이 존재하거든요. 그것을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하는데 좀 더 설명을 드릴까요?

Photobucket 아...교수님.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습니다. 간략하게 정리를 좀 해주시죠. 그럼 저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Photobucket 에...예를 들어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본다고 합시다. 이때 선글라스는 과연 세상에 속한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보는 사람에 속한 것입니까?... 우리에게 씌워진 선글라스는 ‘선험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글라스의 색깔대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파이프라는 물건의 실체가 어떻든 우리 눈에 저것이 파이프로 보이는 한 저것은 파이프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쓰고 있는 선글라스가 저 물체를 파이프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선글라스를 저는 ‘선험적 조건’ 이라고 부릅니다.  결론을 얘기하면 우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 인식의 내용을 구성할 수 밖에 없고 이를 넘어서는 ‘물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플라톤 선생님의 생각대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문장을 ‘실체를 모방한 이것(파이프 그림)은 파이프(이데아,물자체)가 아니다’ 로 해석하여 저 명제를 옳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아니다 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Photobucket 사회자 양반 !!

Photobucket 아...이번엔 발언을 요청하시려고 손을 드셨군요. 칸트교수님께서 플라톤 선생님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셨으니까 다시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Photobucket 진리를 그렇게 주관화 하면 말이죠,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Photobucket 시간관계상 자세히 말씀은 못 드렸는데요.
모든 주체가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고 경험과 인식의 기초가 되는 공통된 필수형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주관화이면서 주체의 객관화죠. 그 필수형식이라는 것은...

Photobucket 거 참...남 얘기하는데 끼어들지 말고, 그럼 우리 존경하는 칸트교수님이 얘기하는 현상과 물자체는 어떤 관계인가요?

Photobucket 그러니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니까요.

Photobucket 그럼 우리가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들이 누구든지 오인하는 선험적 허구일 가능성은 없나요? 모든 사람이 다 공유하는 선험적 허위는 진리로 간주해도 되냔 말이죠.

Photobucket ...................................;;;;;;;;;;;;;;;;;;;;
어...어쨌든 저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현상계에만 적용할 수 있는 개념들로 본체의 세계까지 다루려고 한 것은 잘못이라 봅니다.

Photobucket 아...계속 같은 얘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요, 이제 두 분 말씀은 그쯤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Photobucket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Photobucket 예, 후설 교수님 말씀하시죠.

Photobucket 제가 현상학을 정립한 사람으로 유명한데요, 칸트교수님이 말씀하신 분야로 좀 좁혀서 말씀드리죠. 현상학적 인식이라는 것은 사물자체에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자료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의식내에서 경험적 현상을 종합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 인식의 진리성도 대상에서 구해지는게 아니라 의식의 종합적 판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원뿔은 옆에서 보면 삼각형이고 위에서 보면 원입니다. 그런데 이 원뿔을 원뿔로서 인식하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옆에서 본 삼각형과 위에서 본 원을 한데 뭉뚱그릴 수 있는 의식 내부의 작용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주어진 현상을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죠.4)

Photobucket 저는 후설 교수님의 이론은 잘 모르지만 지금 말씀을 들으니, 제가 했던 작업이 바로 현상학적 작품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제가 그린 그림을 하나 들고 왔는데 보여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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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Demoiselles d'Avignon
Paris, June-July 1907, Oil on canvas, 243.9 x 233.7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아비뇽의 처녀들> 이라는 그림인데, 최초의 큐비즘 작품입니다. 착각하는 분들이 좀 있는데 아비뇽 유수라고 옛날에 교황청이 옮겨왔던 프랑스의 그 아비뇽은 아니고요, 제 고향인 바르셀로나의 거리 이름입니다.
여성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시면 알겠지만 얼굴의 윤곽이나 눈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지만 코는 옆을 향해 있거나 얼굴은 옆모습인데 눈은 정면이거나 또는 얼굴은 정면인데 몸은 등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깊이를 담으려는 전통적인 회화의 방식을 과감하게 바꾸어 원근법을 버리고 오히려 2차원성을 강조했습니다. 대신 그 2차원 평면과 3차원 공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각도에서 본 시각적 단편을 모아 하나의 평면에 종합했습니다.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무시한 평면화의 의도는 마티스도 같았지만 그 친구는 색채의 변형을 꾀했고 저는 형태의 변형을 추구한 것이죠. 저와 이러한 뜻을 같이 한 친구가 브라크이고 둘이서 이 생각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것이 분석적 큐비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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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que, Georges
Man with a Guitar
1911, Oil on canvas, 116.2 x 80.9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브라크의 그림인데 제목이 없으면 뭘 그린건지 금방 알 수 없죠. 예? 제목을 봐도 모르겠다고요? 마음이 착한 사람은 다 보입니다.
선배인 세잔의 가르침을 따라 대상을 순수하게 조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각각의 면으로 분해하고 재구성 한 겁니다.
이로서 인상주의에서부터 차츰 허물어지기 시작한 ‘재현’ 이라는 회화의 강박이 저로 인해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이후로 저의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는 없을 겁니다. 껄껄껄.

<아비뇽의 여인들>에서 제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여인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입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처럼  특정 시점에서 본 모습만 그린다면 삼각형이나 원만 그려놓고 원뿔이라고 하는 격이죠. 후설 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경험적 현상을 의식이 종합하듯이 저는 여러 시점을 2차원 평면에 종합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 그림은 파이프의 전체적이고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서 본 그 일부분일 뿐이고 지금 그려진 파이프 만으로는 실제의 파이프 할 수가 없겠네요. 저라면 저렇게 그리진 않았을텐데...

Photobucket 예, 말씀 잘들었습니다. 아 ! 소쉬르 교수님께서도 말씀 하시겠습니까?

Photobucket 우리는 ‘담배를 넣고 불을 붙여 그 연기를 빨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기구’를 흔히 ‘pipe’ 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즉 기호와 그 지시체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관련이 없습니다. pipe라고 하지 않고 moon이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pipe를 pipe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인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언어체계에서 정해진 약속 때문입니다.  pipe를 bird라고 부른다고 그것이 날아다닐 수는 없는 것이죠. 즉 언어가 실제의 그 대상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낱말자체에는 본질적 의미가 없기 때문에 낱말의 의미는 언어체계속의 다른 낱말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정의됩니다. ‘화요일’은 월요일과 수요일로 인해 의미가 규정됩니다. 또 밤이라는 개념 없이 ‘낮’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언어는 고정된 의미가 없고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저의 이런 언어학이야 말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들 합디다. 칸트 교수님처럼 자칭이 아니고 후학들이 그렇게 평가 해준다네요. 헐헐.5)

Photobucket 그놈의 코페른지 뭔지는 참 잘도 갖다 붙이는구먼. 언어기호가 자의적이라는 것은 나도 말한 적이 있는데.....

Photobucket 플라톤 선생님~~!! 나중에 발언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Photobucket 이렇게 볼 때 마그리트씨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한 것은 우리가 파이프라고 부르는 저 물체를 파이프라고 하던 ‘빨대’ 라고 하던 ‘굴뚝’ 이라고 하던 어차피 실제의 의미를 표시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봐야겠죠.

Photobucket 예, 그럼 여기서 방청객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분이 말씀해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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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Photobucket 예, 자기소개 간단히 해주시죠.

Photobucket 서울에 사는 진중건 이라고 합니다.

Photobucket 예, 진 선생님. 어떤 의견이 있으십니까?

Photobucket 우선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를 구별해야 합니다.

Photobucket 대상언어와 메타언어 라는 게 무엇인가요?

Photobucket 현실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을 대상언어라고 하고 이 대상언어를 가리키는 말을 메타언어라고 합니다.
‘ceci n'est pas une pipe’에서 ceci(이것)를 대상언어로 사용하면 ceci 는 그림속의 파이프=Photobucket를 가리키게 됩니다. 그러니까 'Photobucket 은 파이프이다’ 라고 해야 참이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면 Photobucket= ~Photobucket(A=~A)가 되는 셈이니 거짓인 문장이죠.
하지만 ceci를 메타언어로 보면 대상언어인 ceci라는 단어자체를 가리키게 되죠. 그래서  ‘ceci라는 단어는 pipe가 아니다’ 의 의미가 되니까 참입니다. ceci≠pipe 이니까요. 여기서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를 구별해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6)

또 다른 측면에서 말씀드릴 것은,  칼리그램(calligram) 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글을 통한 '말하기'와 이미지를 통한 '보여주기'를 동시에 함으로써 도상과 문자라는 두 개의 끈으로 ‘대상과 기호’ 사이를 단단히 동여매려는 시도입니다. 전형적인 칼리그램의 예를 보여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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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PhaNt 라는 문자를 코끼리의 이미지와 겹쳐놓았죠. 여기 계신 피카소 화백과도 친분이 있는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칼리그램으로 된 시를 여럿 남겼습니다. 시의 공간화를 추구하여 시의 시각적인 가능성을 부각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죠. 유명한 작품 하나를 보실까요. ‘시’ 이지만 ‘보기’ 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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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다(Il pleut)> 라는 제목의 시인데 시를 읽으면서 시각적으로도 비가 내리는 풍경을 느낄 수 있죠.

저 마그리트씨의 그림도 문자(ceci n'est pas une pipe)와 도상(Photobucket)이 공존하기 때문에 일종의 칼리그램입니다. 하지만 그림이 가리키는 것을 문자가 부정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칼리그램과는 다르죠. 이 칼리그램에서는 문자와 도상이 서로 충돌하고 그래서 기호는 현실을 가리키는 데에 실패합니다.7)

마그리트씨의 다른 작품을 들고 왔는데 보시죠.
Photobucket       Photobucket
<꿈의 열쇠>라는 일련의 작품들입니다. horse를 door로 clock를 wind로 표시해놓았습니다. 이름과 상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마그리트의 세계에서 ‘유사성’은 현실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파이프의 그림은 더 이상 파이프를 가리키지 못합니다. 가방은 하늘(ciel)이 되고 주머니칼은 새(oiseau)가 되고 나뭇잎은 탁자(table)가 됩니다. 이렇게 칼리그램으로 칼리그램을 파괴하는 것이죠. 이로써 마그리트씨는 근대적 사유와 예술의 종언을 말합니다. 파괴된 칼리그램은 텍스트를 ‘자연의 거울’ 로 만드는 재현적 인식론과 작품을 ‘자연의 모방’으로 보려는 재현적 예술론의 죽음을 암시합니다.8)

제가 마그리트씨와 좀 친분이 있어서 그 분의 작업노트를 좀 봤는데 “사물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건 아니다” 라고 써 놓으셨더군요. 그런데 왜 각각의 네 번째 그림에서는 이름과 형상을 일치시켜놓으셨나요? 라고 물어봤더니  “사물은 그것의 상과 마주치고, 또 그것의 이름과 마주친다. 사물의 상과 이름이 서로 우연히 만나는 수가 있다.” 고 하더군요.9)
즉 우연히 만날 뿐이고, 말은 사물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Photobucket 오! 내 생각과 같군요.

Photobucket 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방청객이신데 아주 많은 준비를 해오셨고 마그리트씨와도 잘 아신다니 패널로 모실걸 그랬습니다. 실례지만 진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Photobucket 미학을 전공했습니다. 원래는 여기저기 글도 쓰고,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하는데 요새는 쥐를 잡느라고 아주 피곤합니다.
이놈의 쥐가 옆 동네 공사판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고 큰 놈인데 몇 달전부터 갑자기 우리집에 들어와서 부엌이고 화장실이고 하수구를 다 갉아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더럽히는 통에 아주 골치가 아파요. 얼마 전에는 쓰레기통에서 상한 고기를 물고 들어오는 바람에 촛불까지 켜고 이곳저곳 쥐약을 많이 놓았거든요. 그걸 처먹고 거의 빈사상태까지 갔다가 요샌 다시 살아났는지 또 설치고 다니네요. 이러다 집 못쓰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Photobucket 설마 쥐 한 마리 때문에 집을 못 쓰게 되기야 하겠습니까.

Photobucket 근데 이 놈의 쥐가 옆집 교회에서 패거리들을 데리고 왔어요. 제가 해외에 나갈 일이 있어서 집에 달러를 좀 찾아다놨는데 교회에서 건너온 쥐가 그걸 왕창 갉아먹고 난리도 아니네요. 저번에 '어린쥐'를 내�기는 했는데 두목쥐가 버티고 있으니 소용이 없습니다. 빨리 쥐를 잡아 묻고 침을 뱉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요.

Photobucket 참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루빨리 쥐를 퇴치하셨으면 좋겠네요.

Photobucket 예,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bucket 방청객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푸코 교수님 말씀도 들어볼까요?
교수님께서는 저 그림에 대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제목의 비평서도 내셨다고 들었는데 설명좀 해주시죠.

Photobucket 칼리그램은  알파벳을 보완하고 , 수사학의 도움 없이 되풀이하고, 사물을 이중적 書記의 덫으로 사로잡기라는 삼중의 역할을 합니다. 그림이 재현하는 것을 텍스트로 하여금 말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수사학처럼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어반복입니다.
칼리그람은 우리의 알파벳 문명의 가장 오래된 대립들, 그러니까, 보여주기와 이름 붙이기, 그리기와 말하기, 복제하기와 분절하기, 모방하기와 의미하기, 바라보기와 읽기라는 대립들을 놀이로 지워버리려고 듭니다.10)
그 외 마그리트가 칼리그램을 구성하고 해체했다는 점은 진중권씨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 생각엔 15c 이후부터 20c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재현회화를 지배해 온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14)  

첫 번째 원칙은,
조형적 재현과 언어적 지시 사이의 분리입니다. 쉽게 말해서 도상과 문자가 하나의 화폭에 함께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수태고지]그림에는 요즘의 만화처럼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내용이 그림 속에 써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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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e Martini 와 Lippo Menni,
The Annunciation(수태고지), 목판에 템페라, 1333, 우피치 미술관
잘 보시면 천사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죠? 그리스도를 잉태했음을 알려주는 것이겠죠.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는 ‘가시적’ 공간의 재현을 목표로 삼게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말’은 화폭에서 사라져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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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
Annunciation, Tempera on wood, 1472-1475, 98 x 217 cm
Uffizi, Florence
보시는 것처럼 다 빈치의 <수태고지>안에서는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그림과 텍스트는 한 화면에 동시에 나타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조형적 요소와 언어적 지시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텍스트는 이미지에 의해 규제(묘비나 책속의 글자를 그린 그림 등)되거나 혹은 반대로 이미지가 텍스트에 의해 규제(내용에 해당되는 삽화를 넣은 책)되게 되었습니다.    
이 원칙을 부순 사람이 파울 클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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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 [언젠가 밤의 어스름 속에 나타나], 마분지에 붙인 종이에 수채, 22.6*15.8cm, 1918
위 그림을 보시면 색채조형 안에 독일어로 된 시 텍스트의 알파벳이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알파벳이 조형적 요소로 취급되는가 하면 거꾸로 조형적 요소가 알파벳처럼 처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화살표는 방향을 지시하는 문자 텍스트처럼 사용되기도 합니다.
Photobucket     Photobucket
Paul Klee, Arrow in the Garden, 1929,           Paul Klee, <동경의 신전의 벽화>, 1922
oil and tempera on canvas, 70 x 50.2 cm,
Georges Pompidou Center, Paris

두 번째 원칙은,
유사하다는 사실과 재현적 관계가 있다는 확언 사이의 등가성입니다. 쉽게 말해서 ‘유사의 원리’ 라고나 할까요. 그림은 되도록 실물을 닮아야 하고, 그 닮음으로써 그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 icon 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원근법,색채론, 광학, 해부학 등을 통해 치열하게 사물을 닮게 그리려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파괴한 사람이 바로 추상화의 선구자인 칸딘스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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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llow-Red-Blue,
1925, oil on canvas,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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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osition VIII
Oil on canvas, 140 x 201 cm,1923,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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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rovisation 7
1910,  Oil on canvas, 131 x 9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칸딘스키의 그림들은 현실의 대상을 닮지 않았고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목도 그저 <노랑-빨강-파랑>이거나 <구성>, 혹은 <즉흥>이니까요.

사회자께서는 마그리트의 그림과 클레나 칸딘스키의 그림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Photobucket 글쎄요, 언듯 보아서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군요.
우선 마그리트의 그림은 두 화가에 비해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Photobucket 겉으로 보기엔 그렇죠. 마그리트의 그림은 클레나 칸딘스키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은 도상과 문자가 하나의 공간에 있으므로 클레와 닮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파이프를 그려놓은 뒤에 파이프가 아니라며 파이프의 재현임을 거부함으로써 ‘유사의 원리’를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칸딘스키와 닮았습니다.
칸딘스키는 추상적인 형태를 통해 유사성을 파괴함으로써, 유사성을 바탕으로 가능해지는 재현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마그리트는 외계 사물의 정확한 재현이라는 고전적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사실은 클레나 칸딘스키와 같은 내용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재현회화의 원리를 파괴하면서 마그리트는 무엇을 하려고 한것일까요?

이걸 알기 위해서 먼저 유사(類似, ressemblance) 와 상사(相似,similitude) 의 개념을 설명드려야 겠네요.  둘다 ‘비슷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명확히 개념 지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사에게는 근원이 되는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 근원에서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한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되기 때문에 그 근원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 됩니다. 반면 상사는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됩니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합니다. 상사는 되풀이에 쓰이며, 되풀이는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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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Decalcomania, 1966, oil on canvas, 81 x 100 cm.
그림을 보면 붉은 커튼은 정확히 왼쪽 신사의 모습으로 오려져있습니다. 마치 저 신사는 커튼의 잘려나간 조각인것 처럼 말이죠. 오려진 커튼의 공간속으로는 신사가 보고 있는 해변이 보입니다.
유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인정하게 하지만, 상사는 친숙한 실루엣이 감추는, 못보게 하는,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보게 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것은 왼편에 있고, 왼편에 있는 것은 오른편에 있습니다. 이쪽에서 숨겨져 있는 것이 저쪽에서 눈에 보이고 오려진 것이 양각되어 있고 붙은 것이 멀리까지 확장됩니다. 유사는 단일하고 똑같은 것에 집착하지만 상사는 상이한 확언들을 배가시킵니다. 그 확언들은 함께 춤춥니다. 서로 기대면서 서로의 위에 넘어지면서.

Photobucket 예....알듯 모를 듯 좀 어렵군요.

Photobucket 제 한국어가 좀 서툴러서 어렵게 느껴지나 봅니다.

Photobucket 저 혹시 방청객 의견을 주셨던 진중건 씨께서 좀더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Photobucket 예, 한번 해볼까요.15)
'유사'에는 반드시 원본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원본과 복제 사이에 위계와 서열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사의 원리는 원본과 복제간의 ‘동일성’에 집착하게 됩니다.  반면 '상사'의 관계에는 원본이 없고 따라서 위계질서도 없습니다. 또한 복제들 사이의 ‘차이’를 전개시킵니다.
'유사(類似)'는 할아버지-아버지-아들의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들(복제)이 아무리 아버지(원본)를 닮아도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처럼 생길 수는 없죠. 따라서 원본과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상사'는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들 간의 관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닮았지만 큰형이 막내의 원본일 수는 없죠. 따라서 원본과 복제간의 위계질서가 없고 차이만 있는 수평적 관계입니다.

마그리트 작품속의 형상은 유사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아까 제가 가지고 온 그림을 보시면 가방을 닮은 형상이 가방을 지시하지 못하고, 나뭇잎을 닮은 형상이 나뭇잎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유사’로서 실물을 지시하는 대신에, 그 수직적 의무에서 풀려나 ‘상사’의 수평적 놀이를 즐깁니다.

유사가 원본과 복제, 대상과 표상, 실재와 사유의 일치를 전제한다면 , 원본을 증언할 의무가 없는 상사는 이 근대적 형이상학의 붕괴를 함축합니다.
유사의 개념이 세계에 대해 유일하게 올바른 객관적 기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상사의 개념은 그런 절대적 기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서로 조금씩 차이를 내며 무한히 반복되는 다양한 해석들의 놀이뿐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유사가 근대 의식철학의 원리라면 상사는 그것을 대체한 현대 언어철학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회화에 대입시켜보면 르네상스 이래 19c까지 유럽 전통회화는 자연의 모방을 추구한, 즉 원본을 재현한 유사의 예술입니다. 그래서 회화는 얼마나 원본을 닮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회화는 원본을 재현할 의무가 없습니다. 형태와 색채는 닮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유희합니다. 설사 닮음이 있어도 상사, 즉 원본 없는 복제들 사이의 닮음이 됩니다.

클레는 자기의 조형기호를 배치하기 위해 재현의 공간을 붕괴시켰고 칸딘스키는 추상성을 가지고 유사성을 파괴함으로써 재현의 원리를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는  재현공간을  유지하고 재현의 방법도 그대로 사용하면서 오히려 대상성과 재현성의 파괴가 가장 급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그리트씨의 저 파이프 그림은 유사성을 통한 재현이라는 전통적인 회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유사가 아니라 상사의 닮음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푸코 교수님이 지적 하시는 것은 바로 그 것입니다.  

마그리트의 다른 작품을 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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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은총>                                                                  <눈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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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침>

마그리트에게 나뭇잎 그림은 나뭇잎이라는 실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 나뭇잎에는 나무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 있을 수 있고, 비둘기가 되기도 하고 새가 된 나뭇잎이 벌레에 갉아먹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사의 놀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 안에 들어 있는 무한한 조형적 잠재성을 깨닫게 됩니다.
유사에 입각한 재현은 나뭇잎 그림에서 나뭇잎을 보게 하는 동어반복이지만 상사에 입각한 전사(轉寫)는 우리의 눈을 상투성에서 해방시켜 일상 사물들 속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보게 합니다.
촛불을 켜고 벽에 손으로 그림자 놀이를 한다고 해봅시다. 손은 개가 되기도 하고, 토끼가 되기도 하고, 독수리가 되기도 합니다. 손안에는 이렇게 많은 형상이 들어있습니다.
마그리트는 대상 속에 감추어진 무한한 형상들을 펼쳐 보입니다. 이게 마그리트가 추구하는 상사의 진리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면, 마그리트는 볼 수 없는 것을 가시화한다는 현대 회화의 과제를 닮음을 통해 닮음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상사의 원리는 원본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들의 놀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앤디 워홀과 상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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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은 마릴린 먼로 연작으로 유명하죠. 워홀이 "여기 이 사람은 마릴린 먼로다" 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었을까요? 그가 노리는 것은 유사의 진리가 아닌 상사의 진리, 즉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내며, 동일한 이미지를 여러 번 반복할 때 얻어지는 어떤 시각적 효과입니다. 원본과의 일치가 필요 없는 복제, 시뮬라크르의 놀이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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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교수님의 저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언젠가 이미지 그 자체와 그것이 달고 있는 이름이 함께,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 상사에 의해, 탈-동일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캠벨, 캠벨, 캠벨, 캠벨.”

바로 워홀의 저 캠벨 연작 때문이죠. 워홀은 통조림을 생산하는 캠벨사의 깡통들의 복제이미지를 만들어 전시했습니다. 워홀의 깡통 이미지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실제의 통조림을 닮았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푸코 교수님의 말씀처럼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 상사” 의 놀이입니다.
과거의 예술가들이 유사의 원리로 자연의 거울이 되고자 했다면 워홀은 상사의 놀이로 현대적 지각의 특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겁니다.

Photobucket 저런 식의 접근은 인정 할 수 없어....예술은 이데아의 모방인데 하나의 객관적 진리가 아닌 무책임하게 잘못 비춰진 그림자들을 토해내다니...

Photobucket 플라톤 선생님 죄송합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너무 심하다는 항의가 들어오고 있네요.

Photobucket 나중에 얘기할 시간을 준다고 하더니만.....

Photobucket 다양한 관점에서 좋은 의견들을 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상 오늘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같은 자리에 모시기 힘든 분들인데 토론에 참가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그리트씨의 또 다른 그림을 보여드리면서 오늘 이 자리를 마칠까 합니다.
오랜 시간 시청... 아니 읽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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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ci n'est pas une pomme                                           The Two Mysteries
1964. Oil on panel. 142 x 100 cm, Private collection           1966, Oil on canvas. 65 x 80 cm, Private collection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두 가지 신비16)




- 참고도서
남경태, <철학-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들녘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진중권, <미학오디세이2,3>, 휴머니스트
진중권, <진중권의 현대 미학 강의-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아트북스
미셸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민음사

이 글은 몇년전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을 보고 제가 알고 있는 사상과 꿰맞춰보려고 공책에 끄적였던 낙서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낙서를 우연히 다시 보고나서 PGR에 쓰려고 처음 이 글을 구상했을 때는 등장인물들이 술자리에서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하면서 구어체로 쉽게 대화하는 구성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쓰다보니 완전히 제 능력밖의 작업이라는 걸 깨닫게 되더군요. 그렇게 된 제일 큰 문제는 저 스스로가 교양철학서를 제외하고 플라톤이나 칸트, 현상학, 구조주의 등 기타  본격철학서를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푸코의 책은 이번에 읽으면서도 제가 얼마나 그의 생각을 이해한것인지 알 수가 없더군요. 예전에 읽었던 진중권 교수의 책의 도움이 없었다면 푸코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 책의 번역 탓도 해보고 싶지만  고인이 되신 분께 실례가 될 듯하고 제가 감히 그런걸 지적할 깜냥이 전혀 안되기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정된 분야에서 너무나도 피상적인 지식(그것마저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만을 가지고 저 대철학가들의 생각을  쉽게 풀이해보고자 하는 시도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에 소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리저리 편집을 하고 부족한 것은 나름대로 다른 곳에서 찾아 끼워넣기도 하면서
작성했습니다.
제가 전에 써왔던 다른 글들은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글은 좀 자신이 없어서 올릴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다른 분들께서 이런 저런 지적을 해주신다면 저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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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 플라톤 그림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라파엘로는 플라톤을 그릴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모델로 하였습니다.

2)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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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손은 하늘위 이데아를 가리키고 있고, 현실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3) 이하 칸트의 견해는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p137-163 ,  
남경태, <철학-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p326-342에서 인용하거나 변형하였습니다.

4) 남경태, 앞의 책, p414-415 중에서 인용

5) 이진경, 앞의 책, p274-290
남경태, 앞의 책, p473-478 참조.

6) 진중권, <미학오디세이2>, p326-327 참조

7) 진중권, <미학오디세이3>, p199 참조  

8) 진중권, <미학오디세이3>, p199-200 중에서 인용

9) 진중권, <미학오디세이2>, p206-207 중에서 인용

10) 미셸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p34-35 중에서 인용.

11) 미셸 푸코, 앞의 책, p43 참조

12) 미셸 푸코, 앞의 책, p44 참조

13) 미셸 푸코, 앞의 책, p44-45에서 인용

14) 이하 푸코의 견해는 미셸 푸코, 앞의 책, p51-89 의 내용과 푸코의 견해를 해설한 진중권, <미학오디세이3> p200-205, 와  진중권, <현대미학강의> p153-170 의 내용을 섞어서 인용하거나 변형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푸코가 이야기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일부는 진짜 푸코의 이야기이고 일부는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15) 이하 진중권 교수의 견해는 진중권, <미학오디세이3> p203-215
진중권, <현대미학강의> p153-170 의 내용을 인용하거나 변형하였습니다.

16) 미셸 푸코, 앞의 책, p79-81
원래 푸코는 그의 저서<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본문 처음에 소개된 그림인<이미지의 배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와 마지막에 소개한 두 개의 파이프가 등장하는 마그리트의 또 다른 작품 <두 가지 신비> 를 같이 놓고 비평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그림에 대해서는 챕터5인 <확언의 일곱봉인> 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말을 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일곱 개의 해석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주체는 1.아래 캔버스에 담긴 파이프, 2.위에 그려진 파이프 3.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텍스트, 4.텍스트+아래 파이프, 5.아래 파이프+위 파이프, 6.텍스트+위 파이프, 7. 화폭또는 흑판  

▼ 원문을 보시려면

▲닫으시려면
우선 파이프 자신의 말: <여러분이 보는 것, 내가 그리는 혹은 나를 이루고 있는 이 선들,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듯 파이프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실재하건 실재하지 않건 진실하건 진실하지 않건, 그것은 모르겠지만, 여하튼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저기-그러니까, 내가 하나의 단순하고도 혼자 떨어진 상사체로 존재하고 있는 이 화폭 바로 위에 놓여 있는- 또 다른 파이프와 수직적인 상사관계에 놓여 있는 그림입니다.> 이 말에, 저 위에 있는 파이프가 응대한다(여전히 같은 언표 내에서): <모든 공간의 밖에서, 어떤 받침대로부터  도 떨어진 채로 여러분의 눈앞에 떠 있는 것, 캔버스에도, 종이 면에도 놓여 있지 않은 이 안개 같은 것, 그것이 어떻게 실제의 파이프일 수 있겠습니까? 속지 마세요. 나는 하나의 닮은꼴일 뿐이에요. - 파이프와 닮은 어떤 것이라는 게 아니라, 어떠한 것에도 귀속되지 않으면서, 여러분이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은 텍스트들과 저기 아래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그림들을 주행하며 상호 소통시키는 어슴푸레한 상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목소리로 두 번이나 분절된 언표가 이번에는 자신에 대해 말하기 위해 말을 한다: <나를 구성하는, 그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읽으려는 순간에는 그것들이 파이프에 이름을 붙여주기를 여러분이 기대하게 되는 이 문자들, 이 문자들은 자기들이 이름 붙이는 것과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어떻게 자기들이 파이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씌어진 글씨일 뿐이어서, 오직 자기와만 닮은 것이고, 자신이 말하는 것을 위해 특별한 값어치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더 있다. 이 목소리들은 둘씩 섞여 제3의 요소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텍스트와 아래의 파이프는, 그 둘을 함께 둘러싸고 있는 화폭 액자를 통해 연결되어, 공모에 들어간다. 말의 가리키는 능력, 그림의 보여주는 능력은 위에 놓인 파이프를 고발하고, 이 지표 없는 나타남에 파이프라는 이름을 부여하기를 거절하다. 준거점을 갖고 있지 못한 그것의 존재 양태는 그것을 말없게,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이번에는 두 파이프가, 서로간의 상사에 의해 연결됨으로써 씌어진 언표에게서 자신을 파이프라고 말할 권리를 부인한다. 그 언표 또한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과 하나도 닮은 데가 없는 기호들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텍스트와 위의 파이프는, 둘다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는 사실과, 하나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담론이며, 다른 하나는 사물 자체의 출현과도 같다는 사실을 통해 연결되어, 화폭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라는 단언을 형성하기 위해 단합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세 요소 외에도 자리 없는 하나의 목소리(아마도 화폭, 흑판 혹은 그냥 판의 목소리)가 이 언표 속에서 말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화폭의 파이프와 위로 솟아 있는 파이프에 대해 동시에 말하면서 이렇게 발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 (그 자체로는 그림이 아닌 파이프를 본떠 그려진) 파이프의 모의인 (그림이 아닌 것처럼 그려진) 파이프입니다.> 하나의 언표 속에 일곱 개의 담론이 있다. 하지만, 상사가 유사의 단언에 사로잡혀 있는 요새를 쳐부수려면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 책의 원문과 문장부호, 기호, 맞춤법이 틀린 부분까지 대조하고 확인해서 똑같이 쓴 것입니다. 원문도 문단이 나누어져있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