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한 것'에서 미학은 완성된다
-〈추의 역사〉움베르토 에코 지음·오숙은 옮김/열린책들·5만5000원
무엇이 '추'(醜)인가. 아름다움의 결핍인가, 악의 표상인가. 아니면 혐오와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속성들의 총체인가.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가 출간 1년 만에 우리말로 번역됐다. 비례와 균형의 원리 위에 축조된 고대 그리스 세계부터 지옥과 악마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던 중세, 마성(魔性)으로 상징되던 '추'가 억압의 주술에서 풀려나는 낭만주의를 거쳐 미추의 경계를 지워버린 현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추에 대해 사유하고 표현해 온 모든 것이 책에 담겼다. 3년 전 출간된 <미의 역사>의 후속편이다.
미에 대한 철학적·종교적 인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상세히 소개한 전작과 달리, 이 책은 회화와 조각, 문학작품을 통해 '재현된 추'를 충실히 보여줄 따름이다. 오랜 기간 '미의 결여'나 '미가 아닌 것' 정도로 이해돼 온 탓에 독자적인 '추의 철학'이 전승되지 않은 현실의 제약 때문이다. 에코는 결국 추를 표현한 수많은 도상(圖像)의 벽돌에 문학 텍스트가 대부분인 방대한 인용문을 접착제 삼아 견고하고 거대한 '추의 만신전'을 축성했다.
에코가 기술하는 추의 역사는 세속화와 해방의 역사다. 물론 "추조차도 전체의 만족감에 기여한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거나 "추는 우주의 조화에 이바지한다"(스콜라 철학)는 긍정론이 고대나 중세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 전까지 악마나 고문, 지옥 등으로 형상화된 추에는 어두운 본능을 억압하고 인간을 종교적으로 계도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는 것이 에코의 진단이다. 추가 극단적으로 실현된 지옥의 참상을 세밀히 묘사함으로써 죄의 잔혹한 대가를 상기시키려 했던 단테의 <신곡>이나 로마네스크 수도원과 고딕 대성당의 프레스코화가 대표적인 경우다.
성적인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체미를 강조하기 위해 성기를 공공연하게 재현했던 고대 그리스에서와 달리 중세에는 성기가 수치심을 유발하는 대상으로 간주됐는데, 이런 사회에선 성기의 무분별한 사용, 곧 성적 음란함 역시 추의 표상으로 가혹하게 징치됐다. 근대 초기까지 유럽과 북미 식민지를 휩쓸었던 마녀사냥에서 음란함(악마와의 성교)이 마녀의 추함을 입증하는 증표로 활용된 사실이 이를 증언한다.
상황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역전된다. 악마는 '순수하고 반항적인 에너지의 모델'로, 음란의 표현인 외설은 '신체에 대한 자랑스런 권리주장'으로 전환된 것이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사탄은 타락한 미와 굴종하지 않는 자존심을 소유한 존재로 그려지는데, 이런 경향은 20세기 하위문화의 '사탄 숭배'에서 절정에 이른다.
음란 역시 19세기 리얼리즘에서 거리낌 없이 다뤄지는 예술적 소재로 자리잡은 뒤, 금기에 맞서 육체성의 모든 측면을 용인받고자 했던 20세기 현대 예술에 이르러선 창작의 지배적인 모티브로 부상한다. 그뿐인가. 죽음과 질병, 괴기와 잔혹 같은 추의 형상들 역시 억압에서 풀려나 예술적 찬미의 대상으로 전환되는데, 그 정점이 아방가르드 예술이다.
실제 미래주의는 현대의 추를 찬양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에 열광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부르주아 세계의 부패와 위선을 고발하기 위해 집요하리만치 초췌하고 불쾌한 얼굴들을 묘사했고, 다다는 콧수염 달린 모나리자 같은 '꼴사나운' 것들을 만들어내 관객의 감수성을 모욕했다. 한마디로 "추를 통해 세계를 탄핵하기 위해 지금까지 추하다고 선언됐던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았"던 것이다.
에코는 그러나 '추의 해방'을 기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한층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현대인들은 어떻게 고전미에 충실한 예술과 현대적 추의 예술에서 동시적인 만족과 쾌락을 느끼는가. '추의 상대성'이나 '미추의 경계 소멸' 때문이란 답변은 지나치게 현상 추수적이다. 에코의 의문은 이어진다. "우리는 그것(예술과 대중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추의 표상)을 통해 우리를 엄습해 질겁하게 하는 더욱 심오한 추를, 무시하고 싶은 어떤 것을 떨쳐 버리려는 것은 아닌가." 이 책의 '열린 결말'은 답변을 온전히 독자들 몫으로 남겨둔다.(이세영 기자)
-한겨레신문 (200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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