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도시, 역공간, 사이버공간-결연의 실험장
강내희(중앙대 교수, 문화이론)
1. 공간의 정치학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문화환경의 변화는 사회적 실천과, 특히 정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정치는 문화와 어떻게 연결되며, 문화는 어떤 방식으로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가? 정치적 실천과 문화적 조건 사이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가? 정치는 어떻게 그 처소를 정하며, 어디에서 어떤 양상을 띠며 나타나는가? 정치와 문화가 만나는 장소는 어디이며 정치의 공간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 글은 이런 질문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살피기 위하여 마련된 한 시도이다. 이 시도는 문화환경과 정치를 한데 묶어서 사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문화정치학'을 구성하는 것이겠지만 제기한 질문들을 특히 공간 문제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간의 정치학'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런 종류의 문제제기가 별로 없었고 또 얼핏보아 생경해 보이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사실 공간환경이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하는 생각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서양어에서 '정치'가 장소를 가리키는 말인 '폴리스'(polis)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치는 공간의 문제로 인식되어온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늘 공간과 정치를 함께 제대로 사고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이것은 비판이론의 대표격인 맑스주의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맑스주의는 정치를 다른 분야들과 접합하여 사고하는 데 탁월함을 보이는 경향이 있지만 에드워드 소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공간분석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반공간주의적 전통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공백과 오류를 메꾸거나 시정하고 있는 몇몇 이론가들의 작업에 힘입어 공간이 정치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는 목적을 지닌다.
'공간의 정치학'을 논의하려는 이러한 시도의 근저에는 최근 우리 사회의 진보운동이 질곡에 빠져든 데 대한 반성이 깔려 있다는 것도 밝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진보운동 퇴조의 한 원인으로 정치적 공간에 대한 유물론적 사고의 결여와 그에 따른 '진보적' 정치관의 경직성, 단순성을 지적하고 대중정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진부한 말같아도 정치란 것이 진실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면 진보적 정치는 마땅히 대중화 전략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치 공간을 한정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은 변화하는 공간환경에 비추어볼 때 대중정치의 활성화에 커다란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주변에 이전에는 생각치도 못하던 형태의 정치 공간들이 열리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그것들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봉쇄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치의 장을 미리 주어진 것으로만 사고하고 새로운 정치의 공간을 열어제낄 시도를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들은 분명히 현실성을 지닌 채 우리에게 다가와 공간의 정치를 사고할 것을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나는 국내 진보진영이 이 과제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공간의 정치적 함의를 숙고하는 것이 대중정치의 상을 새로이 잡는 적어도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시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나는 아주 거칠게나마 우리가 통념적인 정치적 실천에서 상정하는 공간의 형태, 그리고 이런 자명한 정치적 공간개념을 새로이 설정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간들의 출현을 중시하면서 그 함의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거리정치의 실종?
한국 최근세사에서 대중정치는 공개적 항의와 시위를 주로 하는 거리정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진보운동의 출발점을 이룬 1960년의 4월혁명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 나타난 중요한 운동 국면들--1980년의 광주항쟁, 1987년 6월의 시민항쟁, 그리고 1991년의 강경대 정국 등--은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외치던 구호들과 함께 기억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선거 유세나 시위 등의 대중집회로 뒤덮이던 것이 엊그제 같기는 해도 거리가 대중의 정치적 진출 장소로 사용되는 것은 과거의 일로 보인다. 지난해처럼 전국기관차협의회와 지하철노조, 현대중공업, 금호타이어 등의 파업, 우루과이라운드 국회비준 반대 시위, 12.12관련자 기소 요구 집회가 일어나는 것으로 봐서는 파업과 시위와 집회로 구성되는 거리정치가 소멸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요즘은 거리에 정치적 행위가 일어난다고 해도 옛날의 위력적 효과를 내는 것 같지는 않은 것이다. 1991년 강경대정국까지만 해도 정권타도를 외칠 만큼 위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리정치는 맑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지적한 "두 번 반복된 역사"가 지닌 희화성까지야 아니라고 해도 그 왜소함, 그것이 겪고 있는 외면, 소외감 때문에 무참함마저 들게 하고 있다.
종래의 거리정치가 최근 들어 이처럼 약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대중정치의 새로운 상 개발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대중정치는 이제까지 주로 권력의 핵을 장악하거나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동안 "가자 청와대로!"나 "가자, 시청으로!"와 같은 구호가 거리에 난무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때 권력은 심장 비슷한 것을 가진 것으로, 대중정치는 그 심장부를 향해 돌진하는 중심을 가진 집단 행위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실 권력은 무작위적으로 분산되어 있지는 않아도 하나의 핵으로 단일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대중정치는 그 표적을 대체로 놓칠 수밖에 없다. 권력의 복잡한 구성은 사실 역사와 사회의 복잡한 구성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역사는 단일한 시간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대들로 이루어지며, 사회도 중층결정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알튀세르의 지적도 있다. 서로 다른 자율성들을 지닌 역사적 시간과 사회적 층위들이 구조화된 총체를 이루고 있다는 이 말이 맞다면 권력을 단일한 핵을 지닌 위계질서로 간주하고 그 중심부에 접근하고자 하는 전략은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거리정치는 이러한 접근법의 한계로 왜소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거리정치의 왜소화 또는 거리 풍경의 변화는 우리한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어서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70년대 이후부터 나타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1960년대까지 거의 일상으로 대도시 스펙터클을 이루던 대규모 저항 운동들이 사라지고 소비공간 중심의 새로운 도시 경관이 형성된 미국이 그 한 예에 속한다. 데이비드 하비의 말대로 60년대 미국에는 "근대주의적 도시재개발과 주택사업들을 둘러싸고 소용돌이친 도시의 불만들을 불타오르게 한 땔감"으로 작용하던 "민권 시위들, 거리 폭동들, 도심 폭동들, 대규모 반전 시위들, 반문화 이벤트들(특히 록 컨서트)" 등이 거리를 뒤덮었지만 도시의 스펙터클은 "1972년경 이후 아주 다른 세력들에 의해 장악되어 완전히 다른 용도에" 쓰이게 된 것이다. 하비는 도시의 스펙터클을 다른 용도로 사용한 한 예로 볼티모어시가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 후 도심도 재개발할 겸 시의 공동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주요 정치인, 전문직종인들, 기업가들을 모아 '볼티모어 도시 축제'를 기획한 것을 들고 있다. 이런 종류의 행사가 늘어나면서 거리의 모습이 바뀐 것은 당연하다. 거리에는 이제 시위, 투석, 폭동 등 저항운동의 풍경이 아니라 소비를 주제로 한 새로운 축제 경관이 들어서게 되었고, 거리의 의미와 용도가 이처럼 바뀌게 되면서 종전 방식의 진보적 대중정치 대신 부르주아 정치가 거리를 지배하는 경향이 커지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서울 시내에서 시위가 빈발하던 명동과 신촌에 '명동축제'나 '신촌축제'가 조직되어 연례행사로 개최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는 이제 만인이 공유한다기보다는 소비만 허용하는 전유공간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압구정동, 대학로, 영등포시장, 화양리 등지에서 새롭게 조성된 거리들이 전통적 의미의 대중정치를 무화하지는 않을지라도 크게 약화시키며 널리 퍼져 있다. 이 경우 부르주아 정치는 국회와 같은 정형화된 정치의 장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공간에서도 추진된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서 거리에는 새로운 풍경이 들어서고 새로운 사건들이 발생한다. 거리의 시위가 왜소해지는 것도 그 한 요소겠지만 또한 '지존파 사건'이나 잇단 성폭력 사건들처럼 예전에는 좀체로 일어나지 않던 일들이 발생한다. 이런 변화는 거리의 의미가 예컨대 1980년의 '광주항쟁' 때와는 아주 다르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당시 전남도청 앞으로 나있는 금남로는 도청으로 향하는 통로였으며, 거기서 일어난 시위와 투쟁은 도청으로 나아가는 길을, 그리고 국가권력과 시민사회에 발언할 언로를, 항의와 저항을 전달할 수단을 얻기 위한 실천이었다. 거리나 길, 즉 금남로 자체가 증오의 대상이 되거나 공격의 목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길과 거리는 그 자체가 공격 대상이라도 된 듯 그 위를 지나가는 '그랜저'가 공격 대상이 되고 택시를 타는 여성승객이 폭행 대상이다. "가자, 청와대로"나 "가자 시청으로"는 이제 "압구정동놈들 다 때려 잡자"라는 구호로 바뀐 셈이다. '지존파'가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백화점 고객을 그 폭력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것을 증명하는 단지 한 예일 뿐이다. 압구정동은 그 자체로 증오의 대상이고, 대학로나 신촌일대처럼 특정한 계층, 연령층, 집단들이 모여드는 많은 장소들은 그 자체로 계급, 성, 연령의 욕망, 갈등, 모순과 직접 연루되어 있는 애증의 대상이다. 따라서 오늘날 진보정치가 거리에서 실종했거나 약해졌다는 것은 부르주아정치가 거리를 지배한다는 말이며 지존파의 범죄행위는 그것에 대한 극단적 항거라고 할 수 있다.
시위와 다른 형태의 저항의 한 예를 199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로드니 킹' 사건의 인종차별적 판결로 촉발된 흑인계 및 라틴계 민중의 '봉기'(uprising)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흑백간 빈부간 갈등으로 빚어진 이 봉기는 재미교포들이 크게 봉변을 당하여 국내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지만 한편에서 보면 미국에서 흑인빈민들이 수십년간 벌여온 해묵은 싸움의 일환이라고 하는 새로울 바가 별로 없는 대중의 저항이다. 그러나 지배세력--부르주아 백인 중년 남성이 중심이 되는--이 '폭동'(riot)으로 규정하는 이 사건의 양상은 60년대의 진보적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벌이던 시위와는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의 시위는 거리 자체에 대한 저항, 반항이라기보다는 거리를 바탕으로 한 시위였고 거리 위에서 다른 표적을 향해 항의하는 시위였다. 60년대 미국의 거리 시위의 특징 하나는 크리스토퍼 래쉬가 지적하는 것처럼 해프닝, 스트리킹, 화형식과 같이 연극적 요소들로 스펙터클이 형성되었다는 것인데 이런 눈끌기를 통해 새로운 상징체계와 담론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지배체제에 대한 항의가 조직되었다. 반면에 1992년의 '봉기'는 스트리킹이나 화형식과 같은 '한가한' 몸짓들보다는 약탈, 방화, 폭력, 살인 등 극단적이고 범죄적인 행동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지존파의 범죄처럼 그 표적를 거리 자체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거리는 시위꾼이 점거하여 반전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논쟁을 벌이는 '확보된 장소'가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를 배반한 대가로 처벌을 받아야 할 장소, 그래서 침범과 파괴 대상이 된다. 이런 거리에서는 시위가 일어나면 곧 폭동이라는 극한의 모습을 띤다. 폭동은 여론환기, 토론 등 통상 정치에 필요하다고 보는 절차를 거칠 것을 거부함으로써 합리적 의사소통 과정을 파괴하여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유발시킨다. 합리성은 여기서 일찌감치 사라지고 말며 오히려 도착적, 분열적인 증세가 정상처럼 보인다고 하겠다.
3. '정치'를 넘어선 정치
오늘날 저항의 한 특이한 형태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빈민의 '폭동'이, 서울 압구정동에서는 지존파류의 '범죄'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치적 의제를 가진 시위는 사라진 반면 의미없고 이해할 수 없는 난동만이 나타났다는 것인가? 진보정치는 이제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인가? 대체로 폭동이나 난동에 대해서는 보수편이건 진보편이건 간에 정치적으로는 부정적인 효과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의 형태이다. 왜 하필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저항을 시도한단 말인가? 호소나 항의, 시위, 토론과 같은 좀더 합리적인 방법은 어떤가? 봉기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특정한 정치적 형태를 합당한 정치로 보지 않는 이와 같은 관점이 개입하고 있다.
아마 이런 관점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는 이론가가 하버마스일 것이다. 하버마스는 공공성(Offentlichkeit)을 보장하는 메커니즘의 원형이 18세기초에서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출현한 부르주아 공론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장이 이제 파괴되었다고 보며 그 회복을 위해서 미완으로 남아 있는 계몽주의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하버마스가 제출하는 '공론장' 개념은 사회-경제적, 사회-성적 불평등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들의 참여는 이들이 당하고 있는 불평등이 일단 유예된다는 것을 전제로 가능하다는 입장을 담고 있다. 그의 이런 입장은 낸시 프레이저의 말대로 정치적 영역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과정과 비정치적 또는 전(前)정치적 과정들--경제, 가족, 비공식적 일상생활에 특징적인--을 격리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이런 관점에서는 폭동 형태를 띤 정치란 있을 수 없다. 폭동으로는 의사소통이 일어날 수 없으며 언어나 담론을 통한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중의 봉기를 '폭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것을 정치로 볼 것을 거부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 특히 그것이 비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행태는 정치와는, 특히 합리적이고 정당한 정치와는 거리가 먼 병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하버마스의 관점과는 달리 의사소통의 정치, 그리고 그것이 강조하는 담론의 정치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정치가 사라졌다고 하는 지점에서 정치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지를 펼치고 싶다. 이런 관점에 서야만 정치가 거리에서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거리가 정치적 행위를 옛날과는 다른 형태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을 꿰뚫어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명동축제]나 [신촌축제]가 부르주아 정치라는 것은 부르주아 정치가 스펙터클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기도 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비부르주아 정치 또한 자명한 정치적 형태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오늘날 대중의 정치는 그 편린을 '폭동'의 형태로, 지존파와 같은 '비정치적' 집단의 비이성적인 '범죄행위'와 같은 것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와 비슷한 생각을 우리는 'LA 봉기'를 분석한 존 피스크한테서 볼 수 있다. 피스크는 미국에서 흑인 빈민의 정치적 행위가 폭동, 약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공적 발언 기회가 봉쇄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지배세력들은 그 특권적 위치 때문에 어느 때건 어디서건 또 어떤 방식으로건 거의 마음대로 공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반면 피지배세력들은 공적인 발언을 할 통로를 쉽사리 마련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공개된 장소에서 하는 의도적 파괴 행동은 우리 사회의 가장 박탈당하고 또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매체를 타는 유일하지는 않다고 해도 가장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매체를 탄다고 해도 피억압자들의 발언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며 혹시 그들의 발언을 언론이 그대로 실어주거나 들려준다고 해도 이번에는 언론의 그런 '책임없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나 제제가 사방에서 가해지기 때문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스크는 그래도 대중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나 침묵을 강요당하기만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보고, 로스앤젤레스의 흑인봉기를 부당한 침묵을 거부하는 행위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피스크의 설명은 왜 대중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서 '폭동'이라는 극단적 시위 형태를 띠게 되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다. 피스크는 공개적인 파괴행위가 매체를 타기 위한 여론 환기 기능을 수행한다고 봄으로써 폭동을 여전히 의사소통의 한 행위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나는 이 점이 그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폭동은 '의사소통' 구조 자체에 대한 항의로서 '매체'를 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매체 바깥을 지향하는 운동, 즉 하버마스류의 담론의 정치를 거부하는 운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싶기 때문이다. 폭동처럼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가장 박탈당하고 억압받는' 흑인 또는 라틴계 빈민뿐만 아니라 더 많은 다른 대중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행위 방식은 아닌지 물어봐야 한다. 오늘날 진보정치는 비정치적 행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점에서 마이클 라이언이 하버마스에게 가하는 비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듯싶다. 라이언은 실제 상황에서는 하버마스가 강조하는 정당성의 의미가 의사소통의 문제설정 안에서만 해석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정당성의 의미는 늘 그것이 놓여 있는 물질적 상황, 재현의 망, 해석의 틀에 매여 있다. 도시 게토의 흑인 젊은이 사이에 정당하다고 치부되는 것은 백인 전문인집단에게 정당한 것과는 크게 다를 것이다. 그 까닭은 정당성이란 것이 결코 발언의 형식상 특징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언제나 특정한 우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놈의 것 더 이상 못참겠어"와 "여보, 우리 투자 신탁 다시 해야겠어"는 둘다 정당한 진술들이지만 그것들의 정당성은 비례하지 않는다.
라이언의 말대로 경우에 따라서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정당할 수 있으며,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들이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맥락에 따라서 정당성의 의미가 변할 수 있다면 정당성과 같은 가치의 의미를 둘러싼 차이들은 사회적 차이들에서 나오며 이들 차이들은 대체로 권력 차이와 신분 불평등과 관련되어 있다. 절차가 정당해야 된다거나 정치적 담론 또는 행위가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이런 차이와 불평등을 관리하는 특정한 방식이며, 특히 물질적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이 라이언의 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폭동'이라는 극단적인 정치적 행위는 의사소통 구조 바깥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요점은 폭동이 해결책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한적 정치의 한계를 벗어나는 시도의 하나라는 점이다. 아마 이런 관점에 서야만 우리는 거리에서 진보정치가 왜소해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자명하게 정치적이라고 하는 공간에만 있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인 정치틀 속에서 진행되는 거리정치와 같은 대중정치 기획은 오히려 정치를 협소화하는 효과를 낳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정치를 넘어선 정치를 사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리에서 전통적인 정치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른, 폭력을 동반한 봉기와 같은 극한 상황이 발생해야만 정치적 개입 효과가 발생하는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거리정치가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비정치적인' 형태를 띨 때에 비로소 정치적 실천 효과를 내게 되는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서 보면 기존의 거리정치로서는 개입의 통로를 마련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리고 기존의 거리정치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리정치가 정치를 협소하게 규정하여 거리에서 일어나는 대중정치의 복잡성, 크기 등을 제한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폭력적 봉기가 일어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이 제한에 대한 항의인 셈이며 또한 정치란 언제나 자명한 정치의 장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 대한 증명이다.
4. 요새와 유사도시: 공간정치의 종말?
종전의 거리정치 시각에 비추어 도착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또한 정당하지도 않은 폭력적 거리장악이 정치가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늘날 정치는 도시공간 자체를 그 한 기반으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싶다. 이 점을 놓고 우리는 종래의 거리정치와는 다른 공간정치의 출현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서는 정치가 공간분할의 형태를 띤다고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이때 정치는 공간을 둘러싼 투쟁이며 이렇게 볼 때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위나 폭력 또는 축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행위들인 셈이다. 로스앤젤레스의 일부 거리가, 또 서울의 압구정동이 증오나 시샘 혹은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런 공간들이 빼앗긴 공간들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간 문제를 파악하는 대표적인 예를 로스앤젤레스가 무력까지 동원하는 등 도시인구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공간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다고 분석하는 마이크 데이비스한테서 찾을 수 있다. 잠깐 데이비스의 말을 들어보자.
이 도시는 악의로 가득차 있다. 잘 단장된 웨스트사이드의 잔디밭에는 '접근하면 발포함'이라는 무시무시한 작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골짜기와 언덕에 있는 부자 동네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무장한 청원경찰과 최첨단 전자감시 시스템이 보호하고 있다. 도심에서는, 공공정책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도시 르네상스'가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드는 기업들의 성을 지어놓고, 흉벽과 해자를 통해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가난한 이웃들을 격리시키고 있다. 이들 중 주로 흑인이나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거주하는 몇몇 지역은 경찰이 바리케이드와 검문소 등을 동원하여 다시 봉쇄해 버렸다. 헐리우드에서는 건축가 프랭그 게리가 도서관을 마치 외인부대 요새처럼 만들어 놓았다. 와츠에서는 알렉산더 하겐이라는 개발업자가 현대의 판옵티콘이라고 할 만한 절대로 안전한 쇼핑몰을 만들었다. 이 쇼핑몰은 중압탑에 자리한 경찰지서가 감독하고 있는 움직임 탐지기와 강철로 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 소비주의의 감옥이다. 한편 도심에서는, 관광객들이 흔히 호텔로 착각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연방감옥이 들어섰다.
약간 길게 인용했지만 이 귀절에서 데이비스는 로스앤젤레스 봉기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것인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지배세력이 최신 첨단무기로 무장된 헬레콥터--데이비스는 이 이미지로 로스앤젤레스경찰을 '우주경찰'로 규정한다--등으로 부자동네나 쇼핑몰로 흘러들어오는 무주택자, 거지, 또는 부랑자들을 감시하면서 밖으로 내쫓는 일을 체계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이비스는 여기서 로스앤젤레스에서 빈부격차와 인종차이에 따른 공간 분할이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이런 분석은 피스크가 대중매체의 관심을 받기 위해 빈민들이 활용하는 수단의 하나라고 본 폭동의 정치경제학적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그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대중의 정치로서 폭동이라기보다는 지배세력의 정치로서의 군사화 또는 요새화라는 점이 피스크와는 다르다. 이것은 물론 대중의 패퇴를 의미하며 지배세력의 승리를 의미한다. 데이비스의 이런 분석은 겉으로 평온해보일지 모르는 미국의 대도시가 사실은 이와 같은 투쟁의 와중에 있다는 점을 환기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대중을 언제나 패퇴당하고만 있는 것으로, '요새'를 어떤 개입할 지점도 남기지 않고 봉쇄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인데 이 문제점에 대해서는 차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 트레버 바디는 데이비스가 요새로 파악하는 도시공간을 '유사도시'(analogous city)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유사도시'는 거리를 대체하는, 지하 및 고가 보행로 구축에 의한 새로운 보행체계가 만들어내는 공간으로서 디즈니랜드를 그 원형으로 하고 있지만 장 보드리야르가 지적하고 있듯이 미국 전역이 디즈니랜드가 된 오늘날은 수많은 도심지역들을 포괄하는 공간이다. 이 유사도시는 도시에서는 사회 모든 계층이 공존하는 최종 보루라 할 도심 거리들을 대체한 '지상 및 지하의 봉쇄 영역' 공간으로서 바디에게 이런 공간의 출현은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행사할 공공영역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디는 유사도시 출현을 가리켜 7-80년대에 일어난 도심 쇼핑센터와 공공 하부구조에 대한 집중 투자의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라며 전지구적 자본이 재규합하여 점점 더 일괴암적인 구조로 형성되고 있는 증거로 간주한다. 그리고 공공영역에 어울리는 쾌적함과 안전함을 갖춘 좋은 환경조건을 구축하겠노라며 애초에 내건 선전과는 달리 이런 새로운 공간에서는 인종과 계급 층별화 촉진경향만 나타난다고 꼬집는다(124). 여기서 파악되는 '유사도시'는 슬럼이 된 도심을 재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추진되는 도심 고급화(gentrification)인 셈이다.
지금까지 고립되어 있던 새 개발 군락들이 육교로 연결되면서 소매 화폐들은 유사도시망의 외부보다는 그 안에서 쓰이는 경향이 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이제 주변부의 사회집단 및 정치활동이 공공영역으로 통하던 장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또한 단일 계급, 단일 형태, 그리고 확연히 단조로운 은둔적 군도들이 모두 뜨거운 여름 태양과 거센 겨울 바람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편의를 가장하여 우리는 다른 삶의 양식들, 다른 가치들을 위한 마지막 남은 중요한 도시의 피난처인 도심의 거리들에 중간계급의 폭정을 강요하고 있다(150).
얼핏 보기에 유사도시는 화려함, 안락, 쾌적함, 부산함 등을 드러내고 있어서 사회적 적대와 모순과는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바디의 분석은 그런 모습들이 '여과를 거치고 미화된' 것임을 보여준다. 예컨대 이처럼 '미화된' 공간에서는 부랑자나, 거지, 앵벌이, 지피족 등 수많은 주변부 계층들은 배제되어 있다. 이런 배제의 목적은 주변부로 내몬 계층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위생처리'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바디는 그가 '유사도시'의 예로 든 미네아폴리스의 도심 고급화가 도심을 하층계급으로부터 방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140). 그리고 그는 미네아폴리스의 예를 따라서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샬롯에 조성된 오버스트리트 몰을 실질적인 공간적 아파르트헤이트로 보는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이 오버스트리트 몰과 또 디트로이트의 르네상스 센터, 마이애미 도심 등지에서 중산층 백인과 흑인/빈민의 공간적 분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것을 '도심 교외화'로 파악한다(150).
도시공간 구성을 둘러싼 대중정치의 조건 변화와 관련하여 데이비스와 바디의 진단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논자들은 도시 문제, 나아가서 삶의 문제는 부자와 빈자,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의 공간 사용 분할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파악은 이미 엥겔스가 이미 1845년에 출판한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에 나오는 것으로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로서 지적할 점은 데이비스와 바디가 엥겔스의 공간 개념--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계급적 관점을 지닌--에서 여전히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일텐데 나는 여기서 이들이 오늘날 도시에서 '공공성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점과 관련하여 몇 마디 덧붙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제의 위기감은 전통적 거리에 대한 향수를 동반한 채 거리의 복원이라는 정치적 기획과 연결된다. 바디는 '유사도시'를 구성하는 새로운 공간환경을 벗어나 전통적 거리를 되살리는 것이 문제의 해결인 것으로 보며 이 점은 로스앤젤레스 전체가 군사도시화되고 있다고 보는 데이비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리로 돌아가자는 이 구호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주의자의 구호처럼 들리지는 않는가? 바디 자신의 분석대로 많은 거리들이 이제는 지하도로나 광장, 고가도로 등 새로운 보행체계로 대체되고 있다면 공공영역으로서 거리를 복원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유효할른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바디의 '유사도시' 또는 데이비스의 '요새'가 어떤 식으로 '위생처리'되었는가, 과연 위생처리라는 것이 가능한지 따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소비경관의 확대, 도심의 재개발 또는 고급화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유사도시'들이 추진한다고 하는, 무주택자와 중상층 소비자의 층별화 또는 분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따져야만 층별화와 분리에 대한 극복이나 저항도 제대로 사고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위생처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의 한 의미는 어떤 구체적 공간에 특정 인간군--실제로는 지피족(지하철피서족), 무주택자, 걸인, 앵벌이 등 사회의 무수한 타자들--의 참여가 배제된다는 것일 것이다. 이때 '유사도시' 공간은 그 외부에 대해 배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배타적 환상선(loop)의 내부로 인식된다. 이 환상선은 그 내부에 안락함, 편의, 안전함, 화려함, 멋, 기회 등을 제공하여 그 범위 안에 들어온 대중을 관리하고자 하는 분할 전략이다. 이런 공간에는 다양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중매체가 여론수렴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단일한 의견을 관철시키듯 그 자체로 어떤 단순함 또는 빈곤함을 안고 있는 다양성이다. 유사도시가 위생처리된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바디가 말하는 대로 중산층화, 교외화, 고급화가 일어난다는 것, 그래서 여러 다양한 계층, 집단들이 단일한 집단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한다. 바디와 데이비스는 이 중산층화를 비판하고 있으며 대중정치를 위해서 거리의 복원을 바란다. 그러나 나는 거리의 복원이라는 기획의 중요성 못지 않게 이들이 부르주아 공간으로만 파악하는 환상선 내부 공간을 위생처리된 동질 공간, 즉 상실한 공간으로만 파악하기보다는 그 자체 모순을 지닌 공간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5. 역공간
나는 여기서 '공간정치'를 사고하기 위해서 '유사도시'보다는 '역공간'(역空間: liminal space)이라는 개념을 수용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역공간은 쥬킨이 설명하듯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문화와 경제 그리고 시장과 장소들을 결합하고 이것들의 경계를 말소"하는 공간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하지만 어떤 지침(guide) 없이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영역'이다." 대도시의 새로운 보행체계들은 바디가 말하는 대로 중산층화가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 환상선 내부 공간을 '유사도시'로 전환하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사실 누구든 그곳 출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는 배제하고 있지 않다. 이런 곳은 전통적 거리와는 달리 분명히 사유화된 측면이 강하지만 또한 만인에게 출입이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공개성과 폐쇄성, 공과 사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예컨대 서울 신촌 로터리 옆에 세운 그레이스백화점으로 들어가는 지하도로는 한편으로는 사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곳이지만 또한 신촌의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공로이기도 하다. 그리고 백화점 내부도 반드시 소비라는 경제적 활동 이외에 주부교실이 열리거나 미술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문화적 행사들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곳은 사적 영역이면서도 개방성을 지니고 또 그렇다고 하여 순수한 공공영역이라고 하기에는 독점자본의 지배가 강한 곳이다. '역공간' 개념은 이처럼 바디와 데이비스가 위생처리 및 요새화로 배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보는 공간에 약화되기는 했을망정 외부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즉 거기에 어떤 경계 소멸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역공간에서 '배제'란 사실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앵벌이, 장님껌팔이, 지피족, 거지 등 우리가 유사도시와 같은 역공간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보는 '타자들'까지도 패션거리, 지하철내, 역주변, 또는 백화점 주변으로 진출하며 내부 출입을 감행한다. 그들이 유사도시 안에까지 진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출입문에서 사설경찰이 지키고 있어 축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축출당하고 있다는 사실, 즉 그들의 타자화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배제라는 것이 완결되고 안정화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데이비스가 말하는 로스앤젤레스의 군사화 또는 요새화도 바로 이런 과정의 일환인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점으로, 데이비스가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배제는 외부로 밀어내기 형식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요새화된 호텔, 빌딩, 쇼핑몰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 관리, 경비, 청소, 또는 소비의 행위자들로 참여하고 있지만 이들의 참여가 온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내부적 배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배제 외에 또다른, 아니 어쩌면 더 근본적이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역공간' 개념과 함께 떠오른다. 유사도시는 중산층화, 교외화, 고급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여러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안에 모순과 갈등을 지닌 역공간, 즉 '논쟁지형'이다. 오늘날 진보정치에 아주 중요한 많은 쟁점들이 여기에 걸려 있다. 우선 유사도시 내부에 계급 모순 이외의 모순이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해야 할 것이다. 유사도시는 부르주아 공동체라는 성격을 가진다. 데이비스와 바디는 그런 이유로 유사도시를 일종의 평정된 공간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르주아 공동체라고 하는 것도 결코 평정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셈이 된다. 이 점과 관련하여 발리바르가 말하는 "평등의 제도화에 의해 폐지될 수 없는 차이," "근대정치를 괴롭히는 억압된 모순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는 성의 분할이나 육체와 정신의 분할을 예로 들면서 이들 모순들은 "형상적으로 근대 정치에 대해 외부적인 것으로 제시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근대정치의 담론적, 입법적, 억압적 실천의 기저에 항상적으로 현존"하고 있다고 말한다(237). 특히 성분할과 관련하여 그는 근대적 공동체에 "여성들의 내재적 배제" 구조가 있다고 지적하는데(240), 발리바르의 이런 주장은 우리가 수용하는 역공간 개념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여성의 경우나 청소년의 경우 증산층화, 고급화로 결코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역공간에서 새로운 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 '역공간' 개념은 유사도시의 출현으로 어떤 배타적 환상선이나 일괴암적 공간이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새로운 모순과 갈등들이 표출되는 지형이 형성됨을 의미한다. 대중정치의 새로운 조건이 출현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데이비스나 바디가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공간 개념을 '장소'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장소'란 일종의 '타락 이전'(prelapsarian) 상태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참여하는 '마당'이나 '광장'과 같은 공간이다. 데이비스와 바디는 경제 능력이라는 특권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파악한 시장(market)과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는 장소(광장, place)를 분리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들은 이 분리를 극복해야만, '장소'를 회복해야만 민주주의가 실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이 장소라는 것이 광장처럼 또는 자연처럼 결코 원상복구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우선 장소라는 것이 이제는 그 안팎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그 구성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하비가 지적하는 대로 오늘날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공간의 '압축' 현상이 만연되어 어디서건 한 장소가 하나의 장소로 끝나는 법이 없다.
수많은 지역 식료품체계들이 전지구적 상품 교환에 편입됨으로써 재조직되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치즈는 1970년대만 해도 대도시의 몇 안되는 식도락 상점들 외에는 실제로 구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미국 전역에 걸쳐 팔리고 있다...이전에는 이국적이었던 음식들이 흔해졌으며 전에는 상대적으로 값쌌던 인기 지역 특미들(볼티모어의 경우는 푸른 게와 굴)이 역시 장거리 교역에 편입됨에 따라 가격이 급등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하나의 장소에 있다고 해서 그 장소에 국한된 경험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하비는 오늘날 문화의 지배적 형태를 띠고 있는 이런 '포스트모던' 현상은 바로 오늘날 문화가 자본의 장악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의 도시분석에서 하나의 장소가 가진 순수함이라는 것은 이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다.
'장소'라는 개념은 역공간과는 달리 참여와 대면 등 직접 체험을 상정하고 있지만 이런 관점은 역공간 안에서는 이미 가상이 되고 있다. 우리가 거리정치라고 한 대중정치가 바로 이런 '장소'에 기반을 둔 공간 개념을 가동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가상이기도 하다. 정치의 장소로서 거리가 사회의 정치 전반을 포괄해낼 수 없을 때 거리정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것까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고를 하고 있는 만큼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정치를 넘어선 정치를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면 거리정치와 같은 전통적 정치적 형태의 한계를 인식하고 폭동과 같은 비합리적 정치행위도 정치인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6. 신체정치?
나는 이 지점에서 '신체정치'라는 개념을 잠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글에서 검토 대상이 되고 있는 '공간의 정치'는 '장소'라는 자명한 공간을 벗어난 정치인데 이처럼 정치의 공간이 '장소'를 벗어날 수 있다면 당장 그런 정치는 신체마저도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몸담는 곳이 장소라면 그 장소가 정치공간으로서의 자명함을 상실할 때 정치는 신체를 넘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간의 정치가 또한 신체의 정치이기도 하다는 말이며 정치의 처소가 장소가 아니라면 신체도 거기서 배제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점을 따지기 전에 '신체정치' 개념은 '역공간'처럼 우리가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거리정치, 또는 장소의 정치가 사고할 수 없는 정치, 정치를 넘어선 정치를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또다른 길을 제시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거리정치의 실종을 신체정치의 공간적 재배치 문제로 사고하게 해준 미셸 푸코의 견해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자본주의화 과정은 시위, 항의, 폭동과 같은 거리의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지배세력이 거리 소제를 통하여 인구정책을 펼친 과정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재산소유자와 집권자들은 거리에 언제나 위험이 있으며 그 위험을 통제, 관리, 예방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권력과 재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이 예방책의 일환으로 지배세력은 흔히 '인도주의'라고 하는 인구양성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푸코의 역사기술에서 이 정책은, 절대주의 시대의 공개 처형처럼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탁월한' 능력을 통해 자신을 유지하는 권력과는 달리 생명을 유지시키면서 그 생명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교육하는 규율의 대상으로 삼는, 이른바 '생산적' 권력 개념으로의 전환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푸코가 중시하는 권력은 생체를 사체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생체를 관리하고 양성하며 훈련시키는 권력이다. 생체정치는 크게 보아 신체정치다. 푸코는 신체를 놓고 벌이는 권력 생산에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인간을 "신체형을 당하는 육체, 자신에 관한 표상이 조작되는 영혼, 훈육을 받는 신체"(198) 등 세 가지 형태로 구별한 형벌구조들인데 이중 마지막 것이 "주도적인 것으로 부각"(194)되었다는 것이 푸코의 판단이다.
예전에 처형대에서는 수형자의 신체가 의식에 따라 가시화되어 있는 군주의 권력 앞에서 노출되어 있었고, 처벌의 무대 위에서는 징벌의 표상이 사회의 전체를 향해 항상 제시되어 있었는데, 이제 그것에 대신해서 나타난 형태는 국가 기구의 총체적 조직과 합치된 폐쇄적이고 복합적이며 등급화한 거대한 구조이다(177).
푸코의 논의에서 감옥 이전의 신체형벌들은 대체로 공개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광장과 거리에서 발생하는 형벌로 제시되고 있다. 권력이 만인중시하에 범죄자를 고문하고 공개처형하는 식의 '화려함'의 형태를 띠던 첫번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권력이 작용 지점을 옮겨 정신을 그 대상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의 정신 속에서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명확하고 필연적으로 확산되는 표상과 기호의 작용"(158)으로 나타나는 두번째의 경우에도 형벌은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후자의 경우는 경제성과 효율성의 법칙이 작용하고 또한 "범죄의 성질과 처벌의 성질 사이에는 정확한 대응관계가 필요"하다는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 점 등에서 전자의 경우와 다르지만 그 잔학성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첫번째 형벌의 "신체형을 그대로 연상시켜" 주고 있다(163). 그래서 징벌은 "자연스러워야 할 뿐만 아니라, 만인의 관심사가 되어야" 하며 "시민의 눈 앞에 끊임없이 보여"진다(168). 형벌의 이러한 공개성은 푸코가 말하는 세번째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감옥 안으로 사라지게 된다. 감옥을 중심으로 한 형벌은 공개적 고문이나 처형을 중심으로 한 모형과 표상, 무대, 기호, 공개, 집단을 중심으로 한 모형과는 달리 강제권, 신체, 독방, 비밀 등을 중심으로 한 모형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전체 과정을 통해서 푸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간의 신체를 통하여 형성되고 또 신체에 가해지는 권력이다. 거리의 정치가 감옥이라는 감금의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정치란 신체를 대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의 이런 정치 개념은 분명히 거리의 정치만 사고하는 것이 아닌, 거리를 벗어난 정치까지 생각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의 신체정치 개념은 병원, 학교, 나아가서 소비공간과 같이 거리와는 다른 곳에서 생겨나는 권력 관계를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푸코의 신체정치 개념은 근거리공학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오늘날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 또한 지니고 있어 보인다. 그는 근대적 권력 생산 메커니즘으로 벤담이 말한 '팬옵티콘'(Panopticon)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가시거리에서 작동하는 기재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원형감시탑은 드 코테의 말대로 "공간--감옥이든, 공장이든, 학교든--통제를 위한 보편적 체계"다. 그것은 중앙탑 쪽으로 문이 나있는 방들로 이루어진 원형 건물로서 빛이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반사를 하기 때문에 감시탑에서는 방 안을 볼 수 있지만 방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여기서 작동되는 것은 감시, 아니 검열인데 팬옵티콘을 이론화한 벤담에 따르면 이 검열은 "감각보다는 상상력을 타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유형이다. 푸코가 생각하는 공간통제는 신체참여를 통한 통제다. 팬옵티콘에서 감독자는 주체의 눈에 띠지는 않지만 언제나 그의 뇌리 또는 상상력에 현전하는 존재로 들어 있다. 주체는 이때 자신의 감시자로서의 권력자를 상상하고 그의 검열을 수용한다. 푸코는 이 가시 권력을 의사나 교사, 간수 등 감독자로 의인화하였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푸코의 이런 권력 해부가 오늘의 상황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7. 사이버공간과 사이보그정치
다나 해러웨이는 푸코가 개념화한, '원형감시탑'의 통제와 규율로 이루어지며 가시거리내 근거리공학에 따르는 신체정치는 오늘날 중요한 현상으로 부상하는 가상현실 안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의견을 제출한다. 해러웨이의 입장은 사이버공간과 같은 새로운 실천 공간이 출현한 오늘날 푸코가 말하는 '신체정치'는 이제 '사이보그정치'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러웨이의 이런 입장에는 새로운 형태의 공간 이해와 신체 이해가 상호작용하고 있다. 우선 그는 '사이버공간'이라는 새로운 공간 개념을 등장시켜 공간정치의 가능성을 구상하고 있다. 아마 우리는 이 사이버공간을 오늘날 대표적인 역공간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이버공간은 '장소'와 같이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역공간처럼 구획, 경계 한정, 분할들의 관계 설정과 같은 문제들을 내장하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해레웨이는 새로운 '신체'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으로 인간을 한편으로는 동물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와 구별하던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고 본다. 새로운 종류의 인간, 아니 인간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지기까지 하는 기계인간인 '사이보그'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푸코가 상정하는 공간이 신체참여적 공간이라면 해러웨이가 생각하는 공간은 푸코와는 달리 신체의 참여보다는 신체부재의 공간, 즉 사이버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신체가 자율성을 가진다기보다는 신체가 바로 기계가 되는 상황이 된다. 푸코한테서는 신체가 기계화된다기보다는 주체가 된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 양생법이 중요하다면 해러웨이의 신체는 그 동학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유전인자나 또는 정보 칩을 내장하고 있는 하나의 시스템, 즉 사이보그다. 그에게는 그래서 권력의 정보학(informatics of domination)이 더 중요하며 이에 따라 원거리공학이라 할 원격조정학(telematics)이 권력의 동학에서 더 큰 영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본다. 푸코가 분석하는 권력은 몸이 참여해야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가시영역에서 벗어나거나, 의식영역에서 벗어나면 권력의 작용이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반면 해러웨이가 생각하는 권력은 정보의 흐름이 발생하는 그 어디서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사이버공간에서는 특히 신체의 참여방식이 달라짐으로써 인간활동의 방식이 바뀌게 된다. 사이버공간의 '나'는 이제 나의 육체가 아닐 수 있으며 자동응답기처럼 '나'의 참여 없이 정보전달이 가능해진다. 자연 조건의 거리 또는 공간 구성은 더 이상 유일한 삶의 조건이 아니다. 가까운 예로 인터넷의 정보고속도로를 타게 되면 우리는 시공간의 압축 현상 속에 어쩔 수 없이 놓이게 된다. 손으로 글을 쓰던 시기라면 몇 년은 걸려서 할 작업이 이제는 단 몇 초로 단축되어 버렸고, 거기 사람이 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에 있는 '나'의 '친구'와 '채팅'을 나눌 수 있다. 해러웨이가 설정하고 있는 권력 환경은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작동할 수 있는 거의 무한대인 공간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의사소통도 신체적 참여보다는 기술적 통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여기서 소통이 기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물론 하나의 가상이다. 소통은 또한 기술에 의해서 조절되고 통제된다는 또다른 현실 인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텔레커뮤니케이션 등 고도기술의 발달로 대리정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대리 또는 대의 정치가 인간 신체의 물리공간적 격리 문제를 그 절대적인 조건으로 삼고 있다면 이제 가상현실 속에서 정치는 더 이상 신체정치의 한계에만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직접민주주의가 더 교묘한 가상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아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텔레커뮤니케이션에서도 권력의 동학이 작용하며 송수신 과정에서 송신자와 수신자의 동등하고 자유로운 의견교환만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적 환경 속에서 명령하달과 항의 또는 저항의 새로운 역학구조가 발생한다. 고도기술은 참여의 권리만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의 편의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권력은 범죄인, 시위대와 직접 맞닥뜨리지 않고서도 공공장소의 시설물들 곳곳에 설치해놓은 감시카메라로 감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부재' 감시가 언제나 일방적 승리만 거두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의 가동은 또한 '부재'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공 장소는 인간들의 직접 참가라는 형태로 유지되기보다는 일종의 시스템 체계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 접근하는 것은 몸으로 하기보다는 교신으로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의 16세 소년이 한국의 원자력연구소 컴퓨터 시스템에 침입한 것이 바로 그런 사례다.
이런 것은 신체정치가 그 위력을 상실해가고 있으며 이 신체정치에 기반한 근대적 정치는 새로운 차원의 정치로 전환하고 있거나 혹은 새로운 조건을 맞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신체나 신체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이보그에서도 신체는 부분적으로 기계로 바뀌었을망정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방식을 전환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이보그로 존재하는 신체는 더 이상 우리가 자명하게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신체, 특히 인간주의적 관념에서 생각하는 신체는 아니다. 그래서 아마 어쩌면 우리는 신체 부재의 정치까지 상정해야 하지 않을까, 또는 우리 몸의 직접 참여를 상정하지 않고 발생하는 정치를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8. 결연의 정치
공간 개념은 이제는 새롭게 다듬어져야 하고 그에 따라 정치도 새로운 상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거리, 장소, 신체참여 공간 등 전통적인 공간에서 벗어나고 있다. 거리는 더 이상 만인이 공유하는 장소가 아니며, 시장의 형성, 특히 역공간의 형성으로 장소는 그 단순성을 상실했고, 사이버공간의 출현은 공간에 신체가 참여하는 것조차 어렵게 또는 불필요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공간은 그래서 역공간이 아니면 사이버공간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 때문에 바디나 데이비스가 제시한 거리로 귀환한다는 것을 가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다시는 '기원' 또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소, 거리, 신체와 같은 '기원들'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를 실망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원의 신화들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맞게 된 것으로, '고향상실'을 통해 하나의 출발점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언급해야 할 것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실천 전략을 구사해야 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해서 기원 신화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황은 바로 이산 상황이라는 것, 즉 누구든 고향을 떠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는 사실 이산의 상태에 살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기원적인 것을 언제나 이미 상실한 채 거리를 떠난 유사도시, 아니 역공간에서, 또는 우리의 신체를 떠난 사이보그의 형태로 살고 있는 것이다. 해러웨이가 오늘날은 '이산 속의 생존'(survival in diaspora)이 중요하다고 한 것도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이산 상황에서 생존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새로운 정치적 실천 전략을 필요로 한다. 이 전략을 나는 '결연의 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해러웨이가 말하고 있듯이, 그리고 우리가 살펴본 역공간이 보여주고 있듯이 오늘날 '장소'는 단순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으며 이 '장소'에 참여하는 방식도 신체로서만 일어나지 않고, 또한 전적으로 참여한다는 것도 간단하지가 않다. 원거리공학이 보여주고 있듯이 참여는 부재의 방식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권력은 늘 변신하는 상태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도처에서 다양한 양식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팬옵티콘으로도 혹은 컴퓨터 칩에 내장된 정보의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실천 역시 새로운 형태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혈연의 정치, 즉 고향 중심의 정치보다는 '결연'(affiliation)의 형식을 취하는 정치를 사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결연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다른 맥락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종교적인 공동체 구성의 형식이라기보다는 세속적 공동체 구성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연, 혈연을 떠나서 새로운 관계의 망을 형성하는 것을 사고하는 것 말이다. 앞에서 우리는 발리바르의 말을 빌어 역공간에서 노동의 정치와는 다른 정치들이 그 안에서 여전히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다.
문화의 차이들이 뒤섞이고, 외부와 내부가 서로 교통하며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장 자연스런 것은 어쩌면 고향상실의 상태, 즉 이산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면, 아니 사실 고향이라는 것이 가상일진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언제나 이미 새로울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새로운 연대를 모색해야, 즉 결연을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이때 결연이란 해체를 전제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고향이나 장소라는 영토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흐름들을 찾아서 끊임없이 영토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민'처럼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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