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비트겐슈타인

[스크랩]비트겐슈타인, 빈, 세기말에 대한 회화(Part I)

ddolappa 2009. 1. 15. 11:33

비트겐슈타인, 빈, 세기말에 대한 회화(Part I)

 

 

 

 

글쓴이 : Ms. Anscombe 


출처: http://www.pgr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1&sn1=&divpage=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343

 

 

 

들어가기 전에

1주전에 약속한대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대강이라고 했는데, 상당한 스크롤 압박이 있을 것입니다.

일단 이전에 제가 쓴 '논리-철학 논고'에 대한 7편의 글(목록)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다섯등분은 할 수 있는 분량이지만, 한 번 장편의 글을 올려보기로 했습니다.

만, 올려보니 다 올라가지 않네요.. 분량 제한이 있는 모양이네요.. 그래서 둘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즐겨주시길...

프롤로그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는 물론이고, 서양 철학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철학자입니다. 그에 대한 높은 평가는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흥미로운 부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철학적 성취의 성격 때문이기도 합니다. 데이빗 피어스(David Pears)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당대의 철학자나 그 이전의 철학자들이 했던 작업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고 말하면서, 특히 서로 다른 두 가지 철학을 생산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21년에 출간한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하 『논고』)에 담겨 있으며, 나머지는 그의 사후 2년 뒤인 1953년에 나온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이하 『탐구』)에 담겨 있죠. 물론 이들 사이에는 많은 연관성이 있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진 두 저작이 각각 20세기의 지배적인 철학 조류를 형성했다는 것이죠. 『논고』는 논리 실증주의로 알려진 빈 학파에, 『탐구』는 일상 언어철학으로 알려진 옥스퍼드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철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논리 실증주의는 이제 와서는 역사적 가치를 가질 뿐이고, 일상 언어철학은 이제 시들해졌죠. 그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들과 다른 형식을 갖고 있어 하나의 입장으로 형식화되기 어려운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앨런 재닉(Allan Janik)과 스티븐 툴민(Stephen Toulmin)은 탁월한 비트겐슈타인 전기이자 19세기 오스트리아에 대한 연구서인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Wittgenstein's Vienna)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연구는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빈(오스트리아의 수도인 이 도시에 대해서는 ‘비엔나’라는 표기가 더 정확하지만, 글자 수가 긴 관계로 ‘빈’으로 통일하겠습니다)이라는 배경을 고려해야 더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재닉과 툴민은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활동했던 영국에서는 선입관들로 인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보통의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천재이거나 별난 사상의 소유자라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그의 사유들은 출처가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빈이라는 것이죠. 오히려 이는 문화 충돌의 증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인들이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빈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라는 게 재닉과 툴민의 주장이며, 그러한 부분들이 적절히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그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러셀(Bertrand Russell)과 무어(G. E. Moore)가 이끌었던 영국의 분석철학과 독일의 논리학자인 프레게(Gottlob Frege)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는 빈의 분위기가 그에게 미친 영향만큼이나 큽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영국적 특성만이 주로 다루어졌던 분위기에서 빈이 갖는 의미를 드러내려는 재닉과 툴민의 시도는 높이 평가할 부분입니다.

한 사람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그 사람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더 잘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됩니다. 레이 몽크(Ray Monk)는 가장 유명한 비트겐슈타인 전기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천재의 의무』(Ludwig Wittgenstein : The Duty of Genius)의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관심이 크지만 그의 생애를 알지 못한 채 그의 철학만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그의 삶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의 철학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양극단으로 나누어진 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이 이 간극을 메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에 쓴 7편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글들은 『논고』를 다루었으며, 관련된 배경 지식으로 프레게와 러셀의 논리학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비트겐슈타인을 낳은 19세기 오스트리아에서 출발해볼까 합니다.

I. 비트겐슈타인 가(Wittgenstein 家)

1. 비트겐슈타인가의 공기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ph Johann Wittgenstein)은 1889년 4월 26일에 빈 합스부르크의 가장 부유한 가문들 중 한 가정에서 막내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위로는 4명의 형과 3명의 누나가 있었습니다. 4명의 형은 한스, 쿠르트, 루돌프, 파울, 3명의 누나는 헤르미네, 마가레테, 헬레네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집안은 쉽게 말해 명문가였습니다.(역사적인 ‘뼈대’라는 의미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지만) 19세기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은 할머니인 패니(Fanny)의 사촌이었는데, 그를 양자로 맞고, 작곡가인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에게 보내 배우게 했습니다. 멘델스존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헤르만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당신이 호흡하는 공기를 그가 호흡하도록만 하십시오!”

요아힘을 통해 비트겐슈타인가는 브람스(Johannes Brahms)에게 소개되었습니다. 브람스는 헤르만과 패니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비트겐슈타인가가 주관하는 저녁 음악 모임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클라리넷 5중주가 비트겐슈타인가의 저택에서 초연되었죠. 이러한 것이 비트겐슈타인가의 사람들이 호흡한 공기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인 칼 비트겐슈타인(Karl Wittgenstein)은 칼 비트겐슈타인은 사업의 천재로서, 오스트리아 강철 회사 카르텔의 중추를 이루며 강철 가격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했습니다. 19세기 마지막 10년에 이르러서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의 하나이자 철강업을 이끄는 인물이 되었죠. 칼의 성공은 그의 탁월한 사업 수완 뿐만 아니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는 부지런함에도 기인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그린 근대적 자본주의 사업가의 전형인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실행하는 금욕주의자’였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베버는 금욕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았다.



비트겐슈타인가의 재산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습니다. 빈에서 비트겐슈타인네보다 더 부자는 저 유명한 로트실트(Rothschild)집안 뿐이었죠. 영어식 표현인 로스차일드로 잘 알려진 로트실트는 독일 출신 은행가로, 로트실트 은행을 창설하여 각국에 지점을 두었고, 오늘날 국제 금융자본의 바탕을 마련한 사람입니다. 비트겐슈타인 가족들은 귀족처럼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인의 거리(아르겐티니어 슈트라세)가 된 비엔나 알레가세(Alleegasse)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집은 외부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 궁전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어느 백작을 위해 만들어진 집이어서 정말로 궁전 같았습니다. 물론 칼은 거대한 부를 뽐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집’이라고 불렀지만 말이죠.



비트겐슈타인이 살았던 알레가세 저택의 내부



비트겐슈타인가의 사람들은 예술, 그 중에서도 음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저녁 음악 모임(‘집’에서)을 열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집은 말러(Gustav Mahler)와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베베른(Anton von Webern), 알반 베르크(Alban Maria Johannes Berg), 브람스의 도시 빈에서 손꼽히는 음악 살롱 중의 하나였습니다. 슈만(Robert Schumann)의 아내이자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말러, 지휘자인 발터(Bruno Walter)는 자주 오는 손님이었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는 비트겐슈타인의 형이자 피아니스트인 파울과 이중주곡을 연주하곤 했습니다. 라벨(Maurice Ravel)은 후에 전쟁으로 오른팔을 잃은 파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장조를 쓰게 되죠. 또한 오르간 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요제프 라보(Josef Labor)는 그를 굉장히 존경했던 비트겐슈타인가의 후원 덕분에 경력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칼 비트겐슈타인은 1898년 모든 철강 회사들의 이사회로부터 사임하고 모든 투자액을 주로 미국의 회사로 이전시키면서 은퇴하는데, 이후에 음악과 시각 예술에 걸쳐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클림트(Gustav Klimt)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마가레테 비트겐슈타인(이하 그레틀)이 결혼했을 때, 클림트가 그녀의 결혼 초상화를 그려주었습니다.



클림트의 ‘마가레테 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초상’



2. 가족들

형제들의 능력 또한 출중했습니다. 맏딸인 헤르미네는 뛰어난 화가였고, 한스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휘했죠. 루돌프와 헬레네의 음악성도 뛰어났습니다. 파울은 집안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에 성공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죠. 그레틀은 가족 중에서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최근의 발달 과정을 좇아가면서 새로운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연장자들의 견해에 도전할 수 있게 된 지성인이었습니다. 쿠르트는 가장 재능이 없다고 여겨졌는데, 후에 아버지의 공장의 감독이 됩니다.

막내인 루트비히는 비범한 혈통 중에서 가장 둔한 자식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음악, 미술, 문학에서 재능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고, 4살이 될 때까지 말조차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가문 남자들의 특징이었던 반항심이나 고집스런 성격을 갖지도 못했죠. 이 점은 형인 한스와 루돌프와 매우 대조적인 부분입니다. 칼은 자신의 회사를 한스와 루돌프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음악가가 되고 싶어했던 이들은 아버지와 격렬한 다툼을 벌였고, 그 결과는 자살이었습니다. 그것이 쿠르트가 사업 경영을 맡게 된 이유였죠.(그도 전쟁 중 자살하게 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들과 달리 아버지가 형들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했던 실용적인 기술들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최소한의 응용력과 어느 정도의 손재주를 갖고 있었습니다. 10살 때는 나무 조각들과 철사 조각들을 가지고 움직이는 실 짜는 기계를 만들기도 했죠. 그는 루트비히는 파울이 다닌 빈의 문법학교가 아니라 린츠의 실업학교를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기에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 관계는 매우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아기 시절 모습



비트겐슈타인은 1908년 봄, 항공학 연구를 위해 맨체스터로 떠납니다. 자신이 고안한 비행기를 만들어 날리기 위해서였죠. 이 과정에서 그는 수학을 공부하다가 러셀과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쓴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읽게 되고, 이는 공학도 비트겐슈타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II. 세기말 비엔나

1. 빈의 공기

비트겐슈타인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가 살았던 19세기 말 합스부르크 제국(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 중에서도 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기말의 빈은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데, 이는 당시의 팽팽한 긴장상태가 20세기 유럽을 지배했던 것들을 예견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긴장 상태로부터 유럽 역사의 틀을 형성한 지적 문화운동의 대부분이 튀어나왔던 것이죠. 칼 크라우스(Karl Kraus)의 구절대로 ‘세계 파괴를 위한 실험실’, 시온주의와 나치즘의 탄생지,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정신분석을 개발한 곳, 클림트, 쉴레(Charles Sheeler), 코코슈카(Oskar Kokoschka)가 예술의 유겐트식 공예운동을 일으킨 곳, 쇤베르크가 무조 음악을 개발한 곳, 아돌프 루스(Adolf Loos)가 근대 건축물을 특징짓는 삭막하며 기능적이고 무장식의 건축 양식을 선보인 곳이었습니다. 20세기가 19세기로부터 출범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죠. 이러한 분위기를 데이빗 에드먼즈(David Edmonds)와 존 에이디노(John Eidino)는 공저인 『비트겐슈타인은 왜?』(Wittgenstein's Poker)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루스와 모더니즘 건축 프로젝트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싶으세요? 아니면 알반 베르크와 12음 음악을 논하고 싶으신가요? 카페 무제움이나 헤렌호프에 한번 가보세요. 칼 크라우스가 ‘횃불’에 쓴 번득이는 논문에 관해 저자 자신과 논쟁하고 싶다면, 저녁 때 카페 센트럴에 가면 됩니다. 그는 거기서 저녁으로 아주 매운 소시지를 먹고 있는데, 기꺼이 대화에 응할 겁니다. 잊지 마세요. 크라우스는 밤새도록 일하고 대낮까지 잔답니다. 아마 페터 알텐베르크도 거기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아마 친구들에게 엽서를 쓰고 있을 테죠. 괴델 같은 수학자들은 커피하우스의 하얀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등식들을 끼적거리고 있습니다. 체스 한 판 두시겠습니까? 커피하우스의 단골인 정치 망명객 레프 브론슈타인과 한 번 대결해보시죠. 누구냐고요? 나중에 혁명가 트로츠키로 더 잘 알려지게 될 인물이죠. 대중지의 형사 사건 담당 기자에게 관심이 가신다면 조금 더 아래로 내러가서 기름에 절어 있는 카드, 커피 냄새, 오코치머 맥주, 값싼 시가, 막대 과자가 요제프 로트의 카페 뷔르츨 같은 곳에서 찾아보십시오. 여기서 기자들은 카드를 들여다보면서 제보자들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를 낳은 음악의 도시 빈의 오페라 하우스

빈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나다.



재닉과 툴민은 쇼펜하워와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 12음계 음악, 현대적 건축 양식, 법실증주의와 논리 실증주의, 비구상적 회화, 정신분석학의 출현과 같은 일이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단지 우연인가에 의문을 표하며, 이것은 빈을 둘러싼 특정한 공기와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19세기 내내 빈은 심각한 주택 부족 현상을 겪었고, 노동 계층의 주택 보급 사정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구질구질한 거처를 벗어나고 싶어 했고, 그 욕구는 널려 있는 따뜻하고 쾌적한 카페들로 충족되었습니다. 카페들의 매력은 시민들이 겪던 고달픈 삶의 현실의 또 다른 얼굴이었던 셈이죠. 재닉과 툴민은 이와 유사한 이중성이 빈 생활의 여러 측면을 특징짓는다고 봅니다. 겉으로 보기에 뚜렷이 드러나는 세속의 감각적인 호사와 번영은 그곳의 비참한 상황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었죠.

재닉과 툴민은 이를 유발한 핵심 요인이 합스부르크 왕가가 하느님이 부리는 지상의 도구라는 이념을 견지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를 현실화한 것이 프란츠 1세 때 가동된 ‘메테르니히 체제’로서, 합스부르크 영토 내에서 혁명과 혁명적인 사고방식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장치였죠.(메테르니히와는 거의 무관하지만) 프란츠 1세의 목표는 경찰국가의 ‘법과 질서’(Ruhe und Ordnung)였습니다.(딱 누구 생각이 납니다) “나의 왕국은 벌레 먹은 집과 비슷하다. 만일 어느 한쪽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그 다음에는 얼마나 더 많이 무너져 내릴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프란츠 1세 사후에도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정책을 집행하는 역할을 계속했고, 그 결과는 1848년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18세의 프란츠 요제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68년의 기간 동안 한층 개혁적인 수단들로 보이지만, 실상은 반동적 목적에 기여하는 정책들을 내 놓았죠. 이 기간의 안정은 눈속임일 뿐이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민족 분쟁과 황제의 아집은 커져갔고, 제국의 통치는 더욱 어려워지게 됩니다.

‘칠리 사태’는 하나의 적절한 예입니다. 1895년 경에 학교에서 가르칠 언어를 결정하는 일은 정부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만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슬로베니아인들은 자신들의 말이 교육 언어로 채택되는 김나지움을 원했지만,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이를 거부했죠. 이에 슬로베니아인들은 이를 제국 의회로 가져갔고, 의회는 그들이 원하는 학교를 건립하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로 인해 독일계 당파가 연정에서 탈퇴하고,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라틴어 대신 독일어를 도입해 제국의 행정에 효율을 기하려는 노력은 헝가리와 체코의 문화적 민족주의를 낳았고, 그 민족들의 정치적 민족주의로 발전합니다. 슬라브 민족의 민족주의는 독일 민족의 민족주의를 낳았고, 이어서 반유대 정책을, 그에 대한 반응으로 시온주의가 등장합니다. 합스부르크는 절대적인 통제를 옹호했고, 비타협적 자세를 유지했는데, 이는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의 비타협적 자세를 낳게 되죠.



유럽 절대왕정의 한 축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기부터 멸망까지의 6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쇤부른 궁전.

바로크 양식의 외관과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실내 장식이 융합된, 거대한 구세대 제국주의 황금문명의 상징이다.



2. 자유주의: 몰락의 시작

당시 빈을 지배했던 계급은 자유주의를 견지한 부르주아 계급이었지만, 그들이 상류 계급에 대항하여 고안해낸 프로그램이 낳은 결과는 하층 계급의 폭발이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저항 에너지는 그들의 숙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향해 폭발한 것입니다. 그들이 위층의 적을 겨냥하여 쏠 때마다 아래로부터 적대적인 폭격이 가해졌습니다. 귀족계급의 국제주의에 맞서기 위해 게르만 민족주의를 고안했지만, 그들이 받은 답변은 슬라브 애국주의자들의 자치권 요구였죠. 자유주의자들이 다민족 국가에 유리하도록 게르만주의의 어조를 완화하자 반자유주의적인 게르만계 프티 부르주아는 그들을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찍습니다. 경제를 과거의 족쇄로부터 풀어놓기 위해 고안된 자유방임주의는 미래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을 불러들입니다.  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덕분에 해방되고 기회를 얻고 현대성에 동화될 수 있었던 유태인조차 은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자유주의의 실패로 유태인은 희생양이 되었고, 그 희생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민족의 고향으로 도피라는 시오니즘의 제안이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위족에 있는 옛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대중을 다시 불러모으기는커녕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전반적인 해체의 힘을 불러냅니다. 자유주의는 낡은 정치질서를 해체하기에는 힘이 충분했지만, 그 해체 덕분에 풀려나 새로운 지방분권적 운동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세력을 장악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새로운 반자유주의적 대중운동(체코 민족주의, 범게르만주의, 기독교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시오니즘)은 아래로부터 솟아올라 정치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역사의 합리적 구조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확신을 훼손하기 시작합니다.

빈의 지도급 인사들 대부분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빈은 오래 전부터 상업의 중심지였고, 대규모 행정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죠. 빈의 부르주아 계급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독자적 성격을 획득하였다. 당시는 산업 팽창의 시기로, 엄청난 부가 창출되던 시기였습니다. 토대기(Grunderzeit)라 불리는 이 시기는 다음 세대가 재미로 예술에 탐닉할 때 의지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하게 됩니다. 금전적 성공은 가부장 사회의 기반이 되었고, 부르주아의 결혼은 사업상의 합병과 같이 진행되었죠. 성공은 개인의 능력에 비례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남성이 소유한 재산을 통해 가시화되었습니다.

부르주아들이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부르주아지, 특히 자유주의세력은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패배를 겪었습니다. 1867년 이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알려진 이 복잡한 다민족국가에서 부르주아는 결코 확고한 대중적 기반을 수립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앞으로 거침없는 민족주의자들과 인종주의적 반유태주의자들, 편협한 정당정치인들이 승리를 구가하는 것을 목도해야 할 운명이었죠. 중간계급적 성격을 강조했던 프티 부르주아 정당인 기독교 사회당은 백화점의 등장으로 위축된 상점주들과 공업 발전으로 타격을 받은 수공업자들에게 호소하여 성공을 거둡니다. 그 당원인 기민한 반유태주의 정치가 칼 뤼거(Karl Lueger)는 1897년 빈 시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릅니다.

3. 반유태주의의 대두: 쇠너러와 뤼거

오스트리아 제국의 정치 지형의 변화에 있어 두 명의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오르크 폰 쇠너러(Georg von Schoenerer)는 1882년에 급진적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을 조직하여 극단적 반유태주의 정치로 끌어들입니다. 그는 한번도 강력한 정당을 결성하지는 못했지만, 반유태주의를 오스트리아 정치 생활의 중요한 파괴력으로 성장시키게 되죠. 쇠너러는 오스트리아가 만들어낸 반유태주의자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고 철저하게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고, 그 때문에 이 다민족 제국을 한 덩어리로 유지할 수 있었던 모든 통합 원리의 최대 강적이었습니다. 즉 그는 자유주의의 적이었고 사회주의의 적이며 가톨릭교의 적이고 황실 권위의 적이었습니다. 완전한 민족주의자로서 그는 제국에 만족지 못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황제는 자신의 영토를 민족적으로 분열하고 있는 민족들 사이에서, 또 그의 영역을 사회적으로 분열시키는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타협하는 존재일 뿐이었죠.

쇠뇌러는 자유주의가 우세한 시대에서 발생한 분열이라는 과도한 원심력의 첫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사회가 갖고 있는 파괴적 잠재력, 즉 계급, 이데올로기, 민족성, 종교 같은 것을 그처럼 최대한으로 지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민족주의는 쇠뇌러가 가진 신념의 긍정적 중심이 되었죠. 하지만 민족주의는 전면적 해체가 아니어도 만족했겠지만, 그의 시스템이 응집력을 가지려면 부정적 요소가 필요했습니다. 반유태주의가 그런 요소였고, 그것을 통해 그는 동시에 반사회주의자, 반자본주의자, 반가톨릭, 반자유주의자, 반합스부르크주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증오의 혁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쇠너러는 귀족계급의 엘리트주의와 계몽전제군주제, 반유태주의와 민주주의, 1848년의 대독일주의 민주정치와 비스마르크식 민족주의, 중세의 기사도와 반가톨릭주의, 길드의 규제와 공공시설의 국유제 등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했습니다. 19세기의 자유주의자라면 이렇게 쌍을 이루는 가치들이 모두 상충한다고 여겼을테지만 이런 이념적 갈등의 조합에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즉 자유주의 엘리트와 그 가치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죠. 쇠너러가 분노에 찬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데올로기적 몽타주는 분노한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합니다.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고 현재에서 위안을 찾지 못하며, 과거에 사기 당했다고 느끼는 기능공들, 자유주의 윤리 전통의 지루함에 만족하지 못하고 낭만적 반항주의에 물든 학생들, 우익지도자들은 이들과 함께 잔인한 소극을 연습합니다. 그리고 훗날, 그 소극은 무대에 올라 비극이 되고, 쇠너러를 숭배하는 히틀러가 주인공을 맡게 될 운명이었죠.

1873년 5월 주식시장이 무너지면서 유럽 전역의 은행과 투자자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됩니다. 반유태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오스트리아 금융시장의 동요가 유태인 투기꾼들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대학의 각종 단체는 물론 공직으로부터 유태인 투기꾼들을 추방하고 언론에 대한 이들의 지배를 종식시키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죠. 빈에서는 정치부패의 근절을 목표로 삼은 작은 부르주아 단체가 자발적으로 구성됩니다. 이 단체는 처음에는 유태인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점차 칼 뤼거(Karl Lueger) 같은 영리한 선동가로 인해 반유태주의 정당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뤼거는 1897년에 반유태주의적 정강을 앞세워 시장이 된 인물입니다.

쇠너러의 긍정적 업적 가운데 핵심은 구좌익의 전통을 변형시켜 신우익의 이데올로기로 만든 점이었습니다. 그는 민주적이고 대독일주의적인 민족주의를 인종적 범게르만주의로 변형시켰죠. 뤼거는 정반대입니다. 그는 구우익(오스트리아 정치적 가톨릭교)의 이데올로기를 변형시켜 신좌익인 기독교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었습니다. 쇠너러는 처음 시작할 때는 시골의 지지자를 조직하는 대가였지만 나중에는 도시에서 소규모 광신적 추종자들을 거느리는 선동가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뤼거는 도시의 선동가로 시작하여 도시를 정복한 뒤, 시골 지역에 안정적 기반을 둔 거대 정당을 조직하게 됩니다.

민주당의 선동가로 성공하게 되면서 뤼거는 점점 커져가는 자유주의 질서 전체에 대한 반대 속으로 더 깊이 끌려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사회적 분노가 극대화될 수 있는 구체적 사안을 포착하여, 경제적 질투심을 부추겨 민주주의자들의 원망감을 강화했습니다. 또 정치적 적인 자유주의자들을 고위급 금융계 인사들과 동일시시켜 분노의 초점이 향할 과녁을 마련하게 되죠.

특히 1895년 시장 선거에서의 승리는 빈 자유주의의 마지막 지푸라기라고 할 만한 2년의 교착상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뤼거가 시의회에서 합법적으로 시장으로 선출되었음에도 황제는 그의 취임 승인을 거부합니다. 온갖 방면에서 그를 반대하는 압력이 황제에게 가해졌기 때문이죠. 연방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고위 성직자가 주반대자였습니다. 빈 시민은 자신들의 선택을 재확인하기 위해 선거에 호소했고, 황제는 1897년까지 거부하게 됩니다.



빈 시청의 모습.

반유태주의자 뤼거의 시장 당선은 자유주의자들을 모순된 상황으로 이끌었다.



그동안 대의제 정부를 옹호해오던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극히 모순적인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유주의 헌정 질서가 초래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교회 주교들에게 의존해야 하며, 그리고 다음으로는 선거권자들의 의지가 달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의 지시에 의지해야 한다는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죠.

오스트리아의 유태인에게 1848년 이후는 유태교 예배가 공인되고 부담스런 세금이 폐지되었으며 교수직과 공직이 개방된 희망의 시기였습니다. 1870년 자유주의자들이 빈에서 정권을 잡게 되자 유태인의 전망은 최고로 밝아졌죠. 당시 반유태주의는 아직은 그다지 해롭지 않은 주변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870년대 초 장차 유명한 극작가가 될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가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 그의 반에서 반유태주의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으며 급우들은 이 소년을 거만하고 어리석다고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양상은 차차 달라지게 되죠.

자유주의 사회 자체 내에서도 자유주의 오스트리아의 무능력에 대한 절망이나 혐오감의 신음소리와 뒤섞여 개혁을 호소하는 외침이 울려나오고 있었습니다. 1870년대에는 집단적인 오이디푸스적 반란이 폭넓게 시작되어 오스트리아 중산계급 전체로 확산되죠. 반란자들 스스로가 고른 공통의 이름인 “젊은이(Die Jungen)”라는 명칭이 여러 분야로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게 됩니다. 이는 1870년대 후반 헌정당의 신우익이라는 형태로 등장합니다.

III. 저항들

1. 예술: 세대 갈등

칼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했듯이 예술품에 대한 가장 진지한 수집은 상층 부르주아의 몫이었으며, 이 일에 상당액을 할애했습니다. 독일과 러시아의 부유한 기업가들과 맨체스터와 파리, 암스테르담, 뉴욕, 시카고의 유복한 상인들은 가장 실제적인 방식으로 예술가들을 지원합니다. 1870년대부터 독일의 부유한 유태인들, 특히 제임스 시몬(James Simon)과 에두아르트 아른홀트(Eduard Arnhold)는 예술품 수집과 자선행위로 명성을 얻습니다. 베를린의 상층 부르주아 집단에 안착하려는 그들의 소망은 예술가 후원과 박물관에 대한 막대한 기부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유태인이 최근에서야 정치적, 법적 평등을 인정받았던, 그러나 아직도 상류 사회로부터는 대체로 배척당했던 나라에 살고 있었고, 이런 행위를 통해 상류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신분사냥이란 그들에게는 기껏해야 부차적인 동기였습니다. 그들은 예술을 사랑했기에 예술작품을 수집했던 것이죠.

부르주아들은 예술에 높은 관심을 보였고, 물질적인 지원도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예술에 기여하려는 노력에는 인색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가의 형제들이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킨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칼은 분명 예술에 높은 관심을 쏟았지만, 아들들이 음악을 하는 것에 격렬히 반대했죠. 칼은 문화를 획득하는데 만족하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문화에 기여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양식이 없었기 때문에 단지 과거를 흉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시대의 미술품을 모방한 물건들로 집안을 채웠죠. 단순한 것보다 복잡한 것, 실용적인 것보다 장식적인 것을 선호하게 되면서, 살아가기도 어려운 방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왜 그런 유행을 따라야 하는지는 의문시되지 않았죠. 이를 통해 신흥 부르주아들은 귀족 사회를 향한 경쟁 심리를 표출하였습니다. 나아가 예술가에 대한 후원까지 부와 지위의 상징이 됩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에 와서 예술은 하나의 생활 양식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술은 예술일 뿐이며, 사업은 예술과 먼 따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토대기 세대가 과거의 가치를 따르는 예술을 지향하고 집을 박물관과 같이 꾸몄다면, 젊은 세대는 앞을 내다보고, 혁신적이었던 셈입니다.

젊은 빈의 지식인들은 기성세대의 부패를 알았고 과거처럼 일들이 행해지도록 두지 않았기에 그들과 단절합니다. 쇤베르크의 무조 체계는 기존 작곡체계는 종착역에 도달했다는 확신에서 나왔고, 루스는 건물을 바로크식으로 치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확신에서 치장을 거부했으며, 프로이트가 무의식적인 힘을 가정한 것은 사회의 관습과 많은 형상들 밑에는 아주 실제적이고 중요한 그 무엇이 억압되고 거부되고 있다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었죠.

불필요한 장식에 반대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감정의 강도를 이해하고, 그것이 그에게 갖는 윤리적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빈 사람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이든에서 슈베르트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느 지역보다 우월했던 빈의 고귀했던 문화가 19세기 후반부터 ‘가짜 저질 문화’로, 정반대로 바뀌어 장식과 가면으로 오용된 문화로 쇠퇴하는 현상을 말이죠. 젊은 빈 지식인들에게 불필요한 장식물들에 대한 혐오는, 공연히 젠체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타락한 문화에 대한 혐오라는 더 일반적인 반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잡문에 반대하는 크라우스의 운동, 미슐레 광장에 있는 악명 높은 루스의 무장식 건물은 이러한 투쟁의 예일 뿐입니다. 최소한 어느 정도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투쟁에 공감을 느꼈다는 것이, 이 두 대표적 주인공들의 작품을 숭배했다는 데서 나타납니다.

“나는 쇤베르크를 믿지 않는다. 브루크너나 말러는 곧바로 이해했는데, 이제 내가 좌절해야 한단 말인가?” 슈니츨러는 쇤베르크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슈니츨러는 자신이 무조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책임을 작곡가에게 돌렸습니다. 그리고 쇤베르크는 진정한 현대 작곡가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결론지어버리죠. 변화무쌍한 문화적 혁신의 시대에 나타난 도발적인 회화에 대한 그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로 분명했으며 이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는  피카소 전시회를 보기 위해 현대미술관을 찾았는데, “초기작들은 훌륭하다.” 그러나 “현재의 큐비즘에 대해서는 맹렬한 거부감이 든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쇤베르크, 큐비즘 시대의 피카소, 쉴레에 대한 슈니츨러의 유보적인 태도를 역사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20세기에 대한 19세기의 저항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회화와 조각, 시와 연극, 소설과 음악, 건축을 비롯한 예술의 전 분야에서 격정적이고 투쟁적인 성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청년 빈파“는 1890년대 경 19세기 문학의 도덕주의적 태도에 도전하고 사회학적 진실과 심리학적 개방성을 선호한 문학 운동이었습니다. 슈니츨러의 플레이보이와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의 탐미주의자는 모두 그 아버지들의 세계관에 대한 아들들의 신뢰가 무너진 결과물이었습니다. 1890년대 중반이 되어서는 전통에 대한 반란이 예술과 건축에까지 퍼지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술인협회 내에서 “젊은이”들은 학계 주류의 굴레를 조직적으로 깨뜨리고 회화에 대한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태도를 지지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 기반은 그 아버지들의 고전적인 사실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현대 인간의 진짜 얼굴을 찾으려는 것이었죠.

구스타프 클림트는 구식 화풍의 젊은 거장이었지만 일찌감치 시각 예술에서 “젊은이”들이 일으킨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897년에 그는 기존의 예술인협회에서 “젊은이”들을 이끌고 나와 분리파를 결성하게 됩니다. 이 새로운 화가연대가 내세우는 이데올로기 개발에 화가뿐만 아니라 문학인과 좌파 자유주의 정치인도 같은 비중으로 가담했다는 것이 바로 빈 식 문화 상황의 전형적 특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는 화가가 세계를 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변형시키는 데 공헌하게 됩니다.



빈 분리파 회관

예술의 위계질서와 경계를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계획, 건축, 가구, 생활필수품 등 모든 국면에서 총체예술을 확립하고자 했던 빈 젊은이들에게 분리파 회관은 예술 애호가에게 조용하고 우아한 피신장소를 제공해줄 예술의 신전이었다.



2. 비판의 적용: 크라우스, 루스, 클림트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비판’은 빈의 지식인들이 행해야 할 중요한 활동이 됩니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앞서 몇 번 언급되었던 잡지 ‘횃불’의 칼 크라우스입니다.

크라우스는 빈을 세계 파괴의 실험장으로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증세를 진단하는 것에서 나아가 목숨을 건 수술만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논쟁과 풍자는 그의 가장 주요한 무기였죠. 빈 사람들은 예술, 특히 문학, 연극, 음악을 중시했는데, 크라우스는 이러한 취향이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있던 이중성을 반영한다고 보았습니다. 앞서 재닉과 툴민이 말했던 그런 이중성입니다.

예컨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빈에 성행했던 매춘부들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해 왔습니다. 결혼이 늦은 혼전의 젊은 부르주아들에게 매춘부들은 유일한 성욕의 배출구를 제공했기 때문이죠. 이러한 매춘은 비도덕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필수 항목이었으며, 불법인 동시에 경찰의 비호를 받는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매춘부 본인은 마담과 포주의 착취뿐 아니라 만연한 질병에도 직면해 있었습니다. 크라우스는 이러한 상황이 부르주아 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그는 매춘부야말로 군인보다 영웅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군인들이 부상, 질병, 죽음과 싸우며 사회 질서에 헌신하는 반면, 매춘부들은 유사한 일을 하면서도 오히려 사회적, 법률적 제재의 대상이 되니까요.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라우스는 개인의 성적인 행위는 그 자신의 문제이고,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진정한 성도착자와 날강도는, 경찰과 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이런 약자들을 박해하는 험담꾼들입니다. 크라우스는 빈 사회가, 자기 아내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이런 사실을 정부(情婦)에 대해서는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은근히 요구하며, 그럼으로써 금지된 이 일이 사적으로는 은연중에 조장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슈니츨러는 새로운 세대를 대표했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이러한 이중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그린 몇몇 여주인공은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남자들보다 품위 있었으며, 그중 한둘은 더 지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집필 도중 판단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애인 두세 명에게 몇 구절을 읽게 하기도 했죠. 그러나 그의 일기 속 솔직한 기록은 그 역시 인습적인 빅토리아 남성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여성이란 신뢰할 가치가 없고 고도의 상상력이 없으며, 거의 예외 없이 창녀라는 것이죠. 자신과 같은 남자들이 여성을 창녀로 만든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던 셈입니다.

크라우스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정신분석이 이러한 이중성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프로이트와 그의 일파는 성욕에 관한 부르주아들의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적 신화를 정신분석이라는 형태의 또 다른 신화로 대체하고자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크라우스가 보기에 정신분석학은 빈의 중산층을 괴롭힌 정신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라기보다 그런 문제들이 야기한 또 다른 질병이었습니다. 크라우스는 빈의 부르주아 여성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이 문제의 실질적 뿌리가 부르주아 식 결혼의 정략적 특성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식의 결혼에서 배우자의 인간적 만족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에 부부 간의 욕구 불만은 예고된 것이었고, 엄격한 사회라면, 특히 여자 쪽의 불만이 더 심하게 마련입니다. 여성들 사이에는, 오로지 음탕하고 타락한 여성만이 성적인 희열을 요구하고 즐길 수 있다고 여겨졌으니까요. 정신분석은 여성과 남성, 이성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균형을 왜곡시킬 뿐입니다. 크라우스는 정신분석학의 접근 방식이 사회 적응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가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염려하였습니다.

크라우스가 특히 격렬하게 비난한 대상은 언론입니다. 크라우스는 언어를 매우 중시하였고, 비판은 근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죠. 성격상의 결함 뿐 아니라, 논리적 오류까지도 작문 양식과 구사하는 문장의 구조에 반영된다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양식, 그것은 인간 그 자체’라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칼 크라우스

크라우스는 빈의 세기말적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창간한 ‘횃불’에서, 논쟁과 풍자를 무기로 꿈의 도시에 감추어진 위선을 폭로했다.



크라우스는 당시의 언론이 뉴스의 객관적 보도라는 고유의 기능을 넘어서 과도한 역할을 사칭하며, 객관성을 유지할 때조차도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대표적인 타겟이 ‘신 자유신문’이었는데, 이 신문이 언론으로서 갖추고 있는 고도의 표준이,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시각, 보도 행태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검열의 두려움으로 그 신문은 정권의 은밀한 대변자가 되었고, 우아한 보도 방식은 기업주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편향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신문은 가장 지명도 있는 신문이었고, 그 점에서 탁월했는데, 크라우스가 보기에 이는 속임수에 탁월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매춘의 사회적 폐해에 더 거세게 비난한 기관은 없었고, (그들에 따르면)타락한 변태성욕자인 동성애자들이 빈의 거리를 활보한다는 사실에 대해 더 분통을 터뜨린 기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도한 언론은 지면을 따로 마련해 안마사 서비스나 안잠자기들에 대한 광고를 셀 수 없이 싣고 있었습니다. 언론 소유주들은 앞에서 욕을 퍼부은 사람들에게 뒤로는 돈을 챙기는 셈이었죠. 크라우스는 이런 언론에게는 차라리 가장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는 게 낫다고까지 말하게 됩니다.

크라우스는 잡다한 장식을 거부했고, 언어에 이를 적용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은 글을 쓰는가? 글을 쓰지 않을 만한 인품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돌프 루스는 이러한 정신을 건축에 적용하였습니다. 예술품과 실용적인 물건을 구분하는 것, 그것이 루스가 행한 모든 작업의 배후에 놓인 핵심이었습니다. 루스는 기능적인 물품에 붙어있는 모든 형태의 장식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문화의 발전이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들의 장식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루스에 따르면, 건축가는 조각가가 아닌 배관공을 자신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건이 모양 때문에 용도를 드러내서는 안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 물건에 어떤 기능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지만요. 이 시대에 치장은 사물을 왜곡하는 한 방편이 되었고, 무언가를 꾸민다기보다는 치장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물을 더는 실제 모습 그대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회만이 장식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루스는 좀더 건전한 앵글로색슨 세계에서는 용도가 우선이며, 장식은 부차적인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루스가 보기에, 물건은 수행하게 되어있는 기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며, 단순하고 쓸모 있어야 했습니다. 같은 작업을 두 명이 맡더라도 동일한 물건이 생산될 수 있을만큼 합리적이어야 하고요. 가재도구들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사용하기 위해 설계되는 것이므로, 특정 환경에서 통용되는 맥락, 즉 삶의 양식에 의해 결정됩니다. 물건의 형태는 사회의 삶의 양식을 반영할 따름입니다. 형태의 변화가 정당화되는 것은 삶의 양식이 변화할 때 뿐이죠. 이로써 루스는 단순히 변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삶의 요청에 근거하지 않은 설계의 혁명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루스 하우스. 현재는 은행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서 살펴본 클림트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던 회화 양식은 자연주의와 관학주의 그림들로, 이를 공부하려면 황실 예술원을 다녀야 했습니다. 이를 좌우하던 사람이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입니다. 마카르트의 미술은 매우 장식적이었고, 신화적인 주제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예술원은 엄격한 형식주의를 고수하고 학생들에게 이전 세대의 부르주아적 편견을 주입했는데, 이에 대해 예술원 학생들이 반기를 들게되죠. 1897년 클림트는 19명의 학생들과 예술원을 자퇴하고 분리파를 결성하게 됩니다. “시대는 그에 맞는 예술을, 예술은 그에 맞는 자유를”이라는 구호와 함께.

3. 언어 비판: 과학과 윤리의 구분

『논고』는 천재의 독창적인 창조물이지만, 여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상이 기여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의 말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논고』에서 쓰이는 금언체는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괴팅겐의 교수 리히텐베르크(Georg Christoph Lichtenberg)의 이 당시에 유행하였던 금언체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죠. 『논고』의 금언들 역시 시대적 조류를 보여주는 실례일 뿐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19세기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언어철학의 문제들은 다른 논의 주제들에 비해 근본적으로 2차적인 것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언어는 지식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부차적인 도구나 수단에 지나지 않았죠. 기존의 형이상학은 언어에 관한 문제를 모조리 피하면서 곧장 실재의 궁극적 본성이나 실존의 기본 범주에 관한 근본 원리나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언론인이자 정치 평론가였던 프리츠 마우트너(Fritz Mauthner)는 언어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유명론적 언어비판을 자극한 것은 국민, 정신과 같은 어마어마한 추상적 어휘들을 사용하는 정치적 주술들이었죠.(이 점에서는 러셀과 무어도 그러합니다) 마우트너는 이 과정에서 철학적 문제가 실제로는 언어에 대한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 개념은 개체들의 묶음을 명명하거나 기술하기 위해 채택된 단어들일 뿐입니다.

마우트너는 유명론을 확장하여 따라 언어까지 구상화된 추상체에 포함시키기에 이릅니다. 그에게 언어란 하나의 활동일 뿐 특정한 종류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어란 인간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는 행위라는 것이죠. 언어는 사회적 현상이며, 언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이 가진 다른 관습들과 더불어 파악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언어는 공동의 기억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휘 안에는 그 사회의 전통적 풍습과 관행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진정한 의미는 한 단어나 문장이 마법처럼 불러오는 이미지가 아니라, 단어나 문장이 제안하거나 명령하고 경고하거나 금지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언어는 본질적으로 애매합니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실천적 용무들에 있어서는, 언어란 의도를 충실하게 이행할만큼 명료합니다.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만큼 자신이 속한 문화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을 찾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지식을 감각으로 환원시키는 마흐의 견해는 그의 사유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모든 과학적 노력의 과제는 가장 단순하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감각자료를 기술하는 것입니다. 마흐는 철저하게 현상론적입니다. 그에게, 세계는 감관에 나타나는 것들의 총합이었죠. 마흐는 형이상학적 사변에 반대하면서, 형이상학은 신비주의이며 과학의 혼미라고 주장합니다. 물리 이론이란 경험을 단순화하는 감각자료의 기술들이며, 과학자는 그것을 통해 앞날의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에른스트 마흐

감각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료의 전부라는 그의 생각은 카르납을 비롯한 빈 학파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마흐의 생물학적 인식론이 그가 비난한 이론들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물리학자는 물리적인 세계에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물리 세계의 체계를 창조합니다. 플랑크가 보기에, 물리학의 기초를 감각자료의 기술에 두려는 마흐의 시도는, 물적인 상태가 어떤 식으로든 심적인 상태와 동일하다는 가정을 필요로 하고 있죠.

우리에게 라디오 전파의 단위(Hz)로 익숙한 헤르츠(Heinrich Hertz)는 상, 그림의 개념을 통해서 수학적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그림 개념은 마흐의 감각 개념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헤르츠는 『공학의 원리』에서, 철학의 본성과 방법에 대해 칸트식 견해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는 뉴턴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힘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힘이 무엇인지를 직접 묻는 대신, 힘을 기본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뉴턴 물리학을 다시 씀으로써 그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흄(David Hume)식의 인상이나 마흐 식의 감각 같은 표상이 단지 발생하기만 하는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볼츠만(Ludwig Boltzmann)도 헤르츠와 마찬가지로 칸트적인 견해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한 물리 체계 내에 있는 각각의 독립적 속성이 다차원적인 기하학적 좌표 체계에서 별도의 좌표를 규정한다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볼츠만의 분석 방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론적 가능성의 공간 개념은 『논고』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논고』에 대한 해석들은 마흐의 철학적 후계자들인 빈 학파의 영향을 받았죠. 그러나 그들은 헤르츠와 볼츠만의 이론에서 파생된 논증을 마흐주의적 경험론의 인식론적 활용으로 왜곡하였습니다. 이는 후에 『논고』를 떠받들었던 빈 학파 사람들에 대해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그들이 자신을 심하게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게 된 이유가 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는 도덕성은 지성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윤리는 이성의 개념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되며, 실존하는 개인에게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도덕성은 사람들 각자와 신 사이의, 절대적으로 직접적인 관계 안에 있으니까요. 칸트가 이성의 사변적 기능과 실천적 기능을 구분하고, 쇼펜하워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의지로서의 세계를 분리함으로써 이어진 과정은 키에르케고르가 삶의 의미에 속하는 모든 것과 이성을 완전히 분리함으로써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톨스토이(Lev Tolstoi)는 이러한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각자 나름의 특수한 과학적 문제들의 답을 찾는 데만 관심이 있는 지식 분과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지성을 찬미하는 데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안에는 삶 자체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답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부터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의 분과들은 삶의 문제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이와 같이 인생의 의미가 과학이 다루는 것과는 다른 질서에 속하는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4. 『논고』의 종합

마우트너는 삶의 의미는 과학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키에르케고르와 톨스토이식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어에 대한 유명론을 극단으로 몰고 갔고, 그 결과 인생의 의미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은유적 기술을 넘어서는 모든 지식을 부정하게 됩니다. 과학과 논리학도 예외일 수 없었죠. 프레게와 러셀의 명제 계산법은 마우트너 식의 상대주의를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이를 언어의 형식적 모델로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언어비판을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논고』에서 제시되는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을 명제가 사실에 대한 스냅 사진이나 심상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오로지 감각 자료만이 존재한다는 마흐의 입장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핵심적 논의를 놓치고 있습니다. 『논고』에서 명제와 사실 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어휘들로 제시됩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그림이란 인공물로서의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을 그리는 명제를 언어로 구성하며, 그 명제는 우리가 그린 사실과 동일한 형식을 갖습니다. 둘째로,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한 그림 개념은 헤르츠의 모델 개념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대로, 헤르츠의 모델(그림) 개념은 마흐와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명제와 사실 간의 연결 가능성은, 삶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보여질 수 있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주장하거나 증명하는 문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전체로서의 언어에 있어서는 비판적 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 언어 밖의 언어가 제공될 수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사유의 한계를 확정한다는 말을 하고 있죠. 그리고 말할 수 없고 오로지 보여질 수 있는 것으로 삶의 의미와 같은 것들(신비로운 것)과 함께 논리학의 형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우트너는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과 진리 추구의 노력에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언어비판 개념은 그 비판이 언어 속에서 언어를 가지고 수행되어야 한다는 난관에 직면하게 됩니다. 언어비판은 모순 속에 잉태되고 침묵으로 끝을 맺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언어비판이 향해 가는 종착점은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신성한 침묵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진정으로 말해야 할 것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침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도 언어와 세계의 관계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명제들은 모델화 될 수 있고, 그래서 실재를 기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실재를 어떻게 기술하는지는 기술할 수 없죠.

논리학의 명제들이 동어 반복들이라는 점은 언어의, 그리고 세계의, 형식적-논리적-속성들을 보여 준다.(『논고』, 6.12)

언어는 명제를 이용해 사실을 표상할 수 있고, 대신에 시를 통해 감정을 전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논고』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함으로써 그것들을 혼란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했습니다.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논고』, 6.52)



어린 시절의 비트겐슈타인



정리하면, 『논고』는 20세기초에 몇십 년간 진행된 빈 식의 사회 비판이 근거를 두고 있던, 이성의 영역과 환상의 영역 간의 차이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과 가치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극단적인 분리는, 칸트로부터 시작되었고, 쇼펜하워에 의해 예리해졌으며,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러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된, 자연과학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을 구분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의 종착점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비트겐슈타인은 칸트와 마찬가지로 마우트너의 회의주의에 맞서 과학적 도구로서의 언어의 적절성을 옹호하는데도 주안점을 두었다. 헤르츠와 볼츠만이 영감을 주었고, 프레게와 러셀이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었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말해주는 것과 보여주는 것 사이에 절대적인 선을 긋는 한편, 과학적 언어에 확고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삶의 의미는 비트겐슈타인에게도 더는 학문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껏 이성에 의해 답해지지 않았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의해서만 해소되기 때문이죠. 모델 이론은 마우트너의 회의주의를 논박함으로써 과학의 객관성을 회복시켜 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의 주관성을 확립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