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빈, 세기말에 대한 회화(Part II)
글쓴이: Ms. Anscombe
IV. 전쟁
1. 논리학의 문제들
다시 영국의 비트겐슈타인에게로 돌아갑시다. 『수학의 원리』의 중심 주제는, 순수 수학 전체가 몇 개의 근본적인 논리적 원리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논리학과 수학은 하나라는 것이죠. 러셀은 이러한 견해가 프레게에 의해 예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러셀은 아마도 이를 알아낸 최초의 사람일 것입니다. 프레게의 논의는 학계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죠. 프레게는 죽으면서 아들에게 자신이 남긴 저작들과 자료들을 보물을 다루듯 귀하게 보관하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유언은 현실이 됩니다. 오늘날 프레게는 현대 논리학의 중요한 창시자로 떠받들여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1911년,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를 만나기 위해 예나로 떠납니다. 프레게는 비트겐슈타인을 격려해주었으며, 케임브리지로 가서 러셀에게 배울 것을 권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가 자신을 무참히 꺾어버렸다고 말하고 있죠. 이 결정은 비트겐슈타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러셀의 인생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선생을 필요로 하던 그때, 러셀은 제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보기 드문 천재임을 파악하고, 논리학으로 수학을 정초하려는 그의 계획을 비트겐슈타인에게 맡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빈의 독특한 환경에 영향을 받았고, 이는 러셀이 철학을 하던 케임브리지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명료함에 대한 갈망을 공유했고, 언어에 대한 오용을 배격했습니다. 그러나 러셀이 관념론에 대한 배격으로 형이상학을 부정한 것에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의 언어가 삶의 문제들에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고자 했습니다. 러셀이 마흐에 가깝다면, 비트겐슈타인은 마우트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엥겔만(Paul Engelmann)이 지적하듯이, 『논고』는 과학의 언어를 표준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엥겔만에 따르면, ‘논고’의 중심 메시지는 언어를 오용함으로써 생기는 혼란스러운 사고들을 조롱함으로써 언어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크라우스의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생활했던 노르웨이 오두막으로 가는 약도
이는 1936년 10월에 비트겐슈타인이 무어에게 보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로 건너가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정리하였습니다. 그의 수많은 수고들은 칩거 상태에서 이루어진 사고의 결과물들이라고 할 수 있죠. 무어는 노르웨이로 가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받아 적어갑니다. 무어는 구술의 결과물인 ‘논리학’이 학사 학위 논문으로 이용될 수 있는지 알아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플레처(W. M. Fletcher)와 상담했는데, 그는 무어에게 논문 규정들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현재 상태로는 학사 학위 논문으로서 자격을 갖출 수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논문은 서문과 원전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어느 부분이 독창적이고 어느 부분이 다른 글에 근거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글들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어는 이러한 소식을 적어 비트겐슈타인에게 보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읽고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무어에게 이러한 답장을 씁니다.
당신이 몇 가지 어리석은 세부사항들에 대해 나를 예외로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대로 지옥으로 가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데, 당신이 예외를 만들지 않았다면, 당신이 거기가 가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무어가 이러한 비난을 받을 짓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그의 말을 받아서 전달해주었고, 결과를 알려주었을 뿐이니까 말이죠. 무어는 이 답장에 큰 상처를 받고 답하지 않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완곡한 언어로 사과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무어는 답장을 보내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후에 비트겐슈타인의 귀환이 이루어질 때 까지는.
2. 전선에 서서
전쟁은 그의 삶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14년 6월 28일, 페르디난드 대공의 암살 이후,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 통첩은 7월 23일에 전달되었고, 그 조건을 수용하는 최종 기한은 7월 25일 토요일 6시였습니다. 세르비아는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게되죠. 일주일 안에 전 유럽이 전쟁에 휩쓸렸음에도 아직 이 단계에서는 이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영국 사이의 관계에 미칠 영향을 사람들은 대체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처음에는 오스트리아를 벗어나서 영국이나 노르웨이로 가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실패했을 때, 지원병으로 군대에 가게 되죠. 비록 애국자였지만, 비트겐슈타인이 군대에 들어간 동기는 조국을 지키려는 소망보다 더 복잡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러시아와의 전쟁 소식을 아무 거리낌없이 기쁜 마음으로 환영했다거나 이 당시 유럽 몇 국가들을 사로잡았던 신경질적인 외국인 혐오증에 굴복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의미로든 전쟁을 환영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비록 이것은 민족적이라기보다는 주로 개인적 이유들 때문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의 군인 신분증
동부 전선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비트겐슈타인은 후에 ‘그림 이론’이라 불리게 될 것의 원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후에 친구인 폰 리히트(Georg-Henrik von Wright)에게 말해주면서 알려지게 됩니다. 어느 날, 비트겐슈타인은 한 잡지에서 파리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에 관한 소송 기사를 읽게 되었고, 이 재판에서는 사고 모형이 재판정에서 제시되었습니다. 그 모형이 사고를 표상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모형의 부분들(소형의 집, 차, 사람들)과 실제로 있는 것들(집, 차, 사람들)사이에 대응이 성립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떠오르게 되죠. 이런 유비에 따라, 명제가 사태의 모형, 그림으로 이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생각에서 나오는 결과들을 개발해서 이를 논리적 묘사 이론으로 불렀으며, 이것이 그림 이론의 출발이 됩니다.
1916년 3월 말쯤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오랫동안 바라던대로 러시아 전선에 있는 전투 부대에 배치됩니다. 6월에 러시아는 오랫동안 계획했던 대공격을 시작하는데, 작전을 짜고 이끌었던 장군의 이름을 따 ‘브루실로프 공격’으로 알려졌던 1차 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연대가 속했던 오스트리아 제11사단은 그 공격의 선봉을 맞아 싸워야 했기 때문에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연구의 본성이 바뀐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죽음에 직면하는 경험이 당시에 작성되고 있던 『논고』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죠.
18세 때의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1918년 3월이 되어서야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6월 15일에는 트렌티노 산맥에 있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군을 공격하는 포대의 관측을 맡았는데, 그의 용기는 또 한 번 인정되었죠. 그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의 오스트리아판인 금성무공훈장의 후보로 추천되었지만, 대신 군봉사메달장을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탈장 수술 경력으로 인해 후방에 있어야 했지만, 전방에 나가기를 자청했고, 매우 용감한 병사(장교로 제대하지만)였습니다. 이 공격은 비트겐슈타인이 참가한 마지막 공격이었고, 오스트리아군의 마지막 공격이기도 했는데, 금방 격퇴당하게 됩니다.
연합군의 최종 승리 후에 많은 수의 군인들이 동족들 사이의 전쟁에 등을 돌렸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돕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오스트리아 장교들은 부대원들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죠. 비트겐슈타인의 형인 쿠르트는 부하들이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자 총으로 자살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드문 게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평화를 애원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이탈리아는 7천 자루의 총과 50만명의 포로들을 잡았는데, 비트겐슈타인도 그들 중 한 명이었죠.
3. 교사가 되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그를 변화시키길 바라면서 참전했고, 정말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하기도 했고, 종교적인 깨달음을 경험했으며, 다른 이들의 삶을 책임지기도 했고, 결코 같은 열차 칸에 타지 않았을 사람들과도 오랜 시간 함께 있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고, 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게 되죠. 가족들은 전쟁에서 돌아온 그의 변화한 모습에 당황합니다. 그들은 왜 그가 초등학교 선생이 되기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러셀이 인정한 철학적 재능을 갖고 있는, 철학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그가 왜 이제 와서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기를 원할까? 누나인 헤르미네는 이는 나무상자를 여는 데 매우 정밀한 도구를 사용하길 원하는 사람 같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누나는 닫힌 창문을 통해 밖을 보는 사람이 그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사람은 거기에 어떤 종류의 폭풍이 몰아치는지, 또는 그 지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힘겹게 버티고 서있는 것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전쟁 전 가족의 재산을 미국 채권으로 이전한 아버지의 재정적 기민함 덕분에 유럽에서 제일 가는 부자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른 은퇴가 선견지명임이 증명된 셈이죠. 사업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전쟁으로 인해 알거지가 될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에서 돌아온지 한 달만에 전 재산을 처분합니다. 그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누나인 헬레네와 헤르미네, 형인 파울(그레틀은 부유한 사업가 스톤보로와 결혼했기 때문에 제외됨)에게 넘겨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가족들과 회계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원하던 대로 교사가 되었고, 트라텐바흐라는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귀족같은 비트겐슈타인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교육 기법에 있어서도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에 동의하지도 않고, 따르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러한 운동을 주동하는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의 교육 방식을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누나인 헤르미네에 따르면, 그는 타고난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졌으며, 무엇이건 그것의 가장 중요한 면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명확히 드러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단지 강의만 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소년들이 옳은 해결책을 찾도록 이끌었다. 한 번은 소년들에게 증기기관을 만들게 하기도 했고, 철판에 탑을 설계하기도 했고,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가 아이들에게 불러일으킨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핵심적인 방법은 아이들이 단지 선생이 말한 것을 반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해 혼자 힘으로 사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고양이의 뼈를 조립함으로써 해부학을, 밤에 하늘을 바라봄으로써 천문학을, 시골길을 걸으면서 식물의 이름을 맞춤으로써 식물학을 배웠습니다. 또한 빈으로의 수학여행 동안에는 건물 양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게 되었죠.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을 통해 아이들에게 모든 것에 호기심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자신과 동일한 정신을 심어주려 노력한 셈입니다. 이러한 방식이 개혁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푸흐베르크 시절 학생들과 찍은 사진
수학에 능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방법이 아무리 학습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들 모두에게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똑똑하지 못했거나 열정적 가르침으로도 흥미를 일으킬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그는 폭군과 같은 존재였죠. 그의 난폭함이 알려졌을 때, 마을 사람들의 반감은 증대되었습니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체벌을 용인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버릇이 없는 소년이 잘못 행동해서 뺨을 맞을 수는 있어도, 대수를 못하는 소녀가 뺨을 맞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실제로 소녀가 대수를 이해해야 한다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비트겐슈타인은 두 곳의 학교에서 더 가르쳤고, 마지막으로 가르친 푸흐베르크의 학교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사전을 만들게 함으로써 어휘 수준을 향상시키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의 어휘력이 떨어지는데다가 방언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표준적인 사전의 활용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가 어휘를 칠판에 적으면 아이들이 이를 받아적었는데, 이것이 모여 사전이 되었습니다. 이 사전은 『초등학생을 위한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꽤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초등학생을 위한 사전』의 어휘 목록들
비트겐슈타인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논고』는 학계에서 주목받는 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V. 떠오르는 스타
1. 빈 학파
『논고』를 가장 주목한 것은 후에 빈 학파로 불리게 되는 연구자들의 집단입니다. 이들은 경제학자, 사회과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자연과학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노이라트(Otto Neurath), 파이글(Herbert Feigl), 카르납(Rudolf Carnap), 괴델(Kurt Godel), 프랑크(Philipp Frank), 한(Hans Hahn)같은 쟁쟁한 사상가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회원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았죠. 이들 이질적인 인물들로 구성된 집단을 하나의 학파로 만들 수 있는 데에는 그 자신 뛰어난 학자였고, 온화한 성품의 슐릭(Moritz Schlik)의 공이 컸습니다. 카르납은 기호와 부호를 능란하게 사용한 논리학자였고, 노이라트는 빈 학파의 정치적인 예각을 이루었습니다. 지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것은 괴델로, 그의 유명한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을 논리학에서 도출하려는 러셀의 시도가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구성원들을 한데 묶어준 것은 철학에서 과학적 방법이 중요하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빈 학파의 적은 피히테, 헤겔 그리고 칸트의 일부 측면을 포괄하는 독일 관념론 전통이었고 이 점에서 러셀과 같은 지점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표면상 『논고』가 이러한 입장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실증주의, 신경험주의의 초석이 되죠. 그러한 경향은 과학적 지식이야말로 합리적인 인간이 믿어야 할 모범이라고 주장한 콩트(Auguste Comte)와 그의 19세기 추종자들이 느슨하게 표현했던 실증주의를, 러셀과 프레게의 명제 논리를 올바르게 적용한 새롭고 더욱 엄격한 기반 위에 정초시키는 철저한 반 형이상학적 운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무어와 러셀은 특별히 실증주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관념론을 배격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철학적 마구간을 완전히 치우고, 새롭고 애매하지 않은 용어들로 철학을 재구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과제는 철학에 사용할 감염되지 않은 언어를 끌어 모으는 것이었죠. 정의할 수 있는 용어들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의를 고집하고, 정의할 수 없는 용어들을 정의하려는 오도된 시도들을 반박하며, 일상의 언어가 우리의 사유에 덧씌우는 문법과 구문론의 기만적인 외투 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문법적 형식과 명료성을 드러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분석철학의 기본 목적이었죠. 슐릭을 비롯한 빈 학파의 목표는 이러한 무어와 러셀의 초기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교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실증주의자들은 과학 이론에서 가치가 입증되고 있는 방법들을 일반화함으로써 철학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철학은 과학의 확실한 통로를 따라가야 하며, 물리학, 생물학 등과 함께 단일한 통일과학으로 통합되어야만 했죠. 빈 학파의 철학은 『논고』의 논리학에 마흐의 감각론적 지식이론을 결부시킴으로써 완성됩니다. 『논고』는 이상화된 형식 언어의 요소 명제에 대응하는 사태 개념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사태나 요소 명제를 어떻게 인식하게 되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죠. 앞서 살펴본 것입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를 보수하기 위해 마흐의 감각 이론, 러셀의 직접지 이론으로부터 실마리를 얻은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사태를 확고한 자료와 같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주장은 빈 학파에 의해 다음과 같이 재해석됩니다. ‘형이상학자들이여, 입을 다물라’
2. 쿤드만가세
러셀을 비롯한 몇몇의 사람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는 수수께끼의 사람의 작품인 『논고』가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동안, 그 당사자는 누나인 그레틀의 집을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특유한 천재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루스의 방식을 따라 장식을 배격했으며, 안락함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되었습니다. 저택의 특징을 이루는 명료성, 엄격함, 정밀함이란 특성들은 정말로 거주 공간에서보다는 논리학의 체계에서 추구하는 것들이었죠. 비트겐슈타인은 거의 광적인 정확성을 요구하며 그것들의 제작을 감독했는데,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열쇠 구멍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엔지니어 선생! 말씀 좀 해보세요. 1밀리미터 더 크고 작고의 차이가 선생한테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트비히는 크고 강한 목소리로 ‘그렇소!’ 하고 대답했다. 질문한 사람은 거의 놀라 자빠질 뻔했다.
겉보기엔 간단한 라디에이터를 배달하는 데는 1년이 걸렸는데, 오스트리아에선 비트겐슈타인이 구상하?대로 제작할 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각 부품들의 주조물들은 해외에서 구입했죠. 가장 충격적인 것은 헤르미네의 다음의 증언입니다.
설계된 대로 정확하게 하려는 루트비히의 무자비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아마도 그가 완성된 집을 막 청소하려고 할 바로 그 때에 한 방의(이 방은 거의 홀이라고 할만큼 컸는데) 천장을 3센티미터 들어올리게 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쿤드만가세에 지은 그레틀의 저택.
그레틀은 1928년에 입주하게 되는데, 헤르미네에 따르면, 그것은 그녀에게 장갑처럼 꼭 맞았다고 합니다. 그 집은 그레틀의 개성을 외현화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레틀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집을 보고 아주 감탄을 하긴 했지만, 한시도 그곳에서 살고 싶지도 않고 또 살 수도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이지 그 집은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인간보다 신들을 위한 숙소처럼 보였습니다. 처음에 나는 내가 ‘논리학을 구현한 저택’으로 부른 이 집에 대해서, 이 완벽한 기념비적인 작품에 대해 어렴풋이 생겨난 내적인 적대감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후에 이 저택은 아들 토머스 스톤보로의 소유가 되었고, 이 집이 주거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헤르미네의 생각에 동의했던 스톤보로는 집을 팔아 허물게 했지만, 빈 유적 위원회가 국가적 기념물이라는 캠페인을 벌여 허물어질 운명에서 구해내게 됩니다. 현재는 불가리아 대사관의 문화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3. 귀환: 신이 도착하다
‘자, 신이 도착했다. 나는 그를 5. 15 기차에서 만났다.’
이것은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비트겐슈타인의 귀환을 부인에게 알리는 편지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케인즈는 비트겐슈타인의 절친한 친구였죠. 비트겐슈타인은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에 머물기 위해서는 학위가 필요했고, 『논고』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기로 합니다. 무어와 러셀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는데, 심사 과정은 한 편의 희극이라 할 만합니다. 먼저 세 사람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러셀이 무어에게 말하죠. ‘자, 질문 좀 해보시죠. 그래도 당신이 교수 아닙니까.’ 다소 횡설수설하는 식의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에 비트겐슈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심사위원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걱정 마세요. 절대로 이해 못 하시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무어는 시험관의 보고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비트겐슈타인씨의 논문은 천재의 작품이라는 것이 내 개인적 의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다치고 그 논문은 케임브리지 철학 박사 학위가 요구하는 기준에 분명히 부합합니다.
이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이 됩니다.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비트겐슈타인은 늘 케임브리지를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논고』에서의 입장과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인 피에로 스라파(Piero Sraffa)가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라파는 뛰어난 경제학자였고, 당시 수감 중이던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친구였습니다. 무솔리니 정권에 대한 공격으로 모국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스라파를 케인즈가 킹 대학에 초대하였고, 케임브리지는 그를 위해 경제학 교수직을 신설하게 됩니다. 케인즈의 소개로 그는 비트겐슈타인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의 서문에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생각들이 스라파의 자극을 받았다고 쓰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는 비트겐슈타인이 말콤(Norman Malcolm)과 폰 리히트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한 대화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와 그것이 기술하는 것은 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스라파는 이에 대해 ‘그것의 논리적 형식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며,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 행동을 합니다. 이는 나폴리 사람들이 타인을 경멸할 때 쓰는 행동이었죠. 이는 명제란 그것이 기술하는 실재의 그림이어야 한다는 『논고』의 생각에 비트겐슈타인이 더 이상 집착하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케임브리지 거리를 걷고 있는 스라파.
스라파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있어 비트겐슈타인의 중요한 조언자였다.
스라파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세부적 내용을 다루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관점을 바꾸는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비트겐슈타인의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 과장이겠지만,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새로운 관점을 갖는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4. 몇 가지 일화들
비트겐슈타인의 기이함은 천재성의 표현이면서 명료함에 대한 집착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잘 알려진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합니다.
#1.
비트겐슈타인은 음악에 대해 매우 까다로운 성향을 갖고 있었고, 절대 음감이 있어 레코드의 첫 음이 나오는 즉시 그것이 정확한 음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위대하다고 평가한 작곡가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덧붙여 그가 존경한 라보) 뿐인데, 뒤에 가서는 브람스에게서도 기계 소리가 들린다며 비판하게 되죠. 그는 휘파람을 부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서 브람스 교향곡의 전 악장을 휘파람으로 불 수 있었고, 특히 좋아했던 것은 브람스의 성안토니오 변주곡이었다고 합니다.
#2.
『탐구』의 원형으로 여겨지고 있는 『청색책』(The Blue Book)과 『갈색책』(The Brown Book)은 그의 구술을 학생들이 받아적은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개설 강의에 너무 많은 학생들이 몰리자 자신의 강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 소수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구술하고, 그것을 복사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을 제안합니다. 이렇게 해야 학생들이 비록 머리에는 넣을 수 없지만, 손에 들고 갈 것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요. 이는 이후 『청색책』이 됩니다. 1934-5년 동안에는, 후에 『갈색책』으로 알려질 것을 구술합니다. 이는 강의의 대체물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 연구 결과를 체계화시키려는 것이었죠. 이는 스키너(Francis Skinner)와 앰브로즈(Alice Ambrose)에게 구술되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하나로 묶여서 『청갈색책』(The Blue and Brown Books)으로 알려져 있는데, 『탐구』의 내용을 대개 담고 있으면서도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료입니다.
#3.
한번은 비트겐슈타인이 그레틀의 아들인 조카 존 스톤보로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뒤에 앉아 있던 조카는 어떤 노인네가 배낭 메는 것을 도와주는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고집스럽게 배낭에 달린 모든 끈을 하나하나 제자리에 가져다놓았기 때문이죠.
#4.
어느 날 폰 리히트의 주치의인 비번의 부인이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한 트리니티 칼리지 리셉션에 초대받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녀가 리셉션에 가려고 입은 코트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위를 가져다가 단추 두 개를 잘라냈는데, 그러고 나니까 코트가 훨씬 우아해 보였다고 합니다.
#5.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 교사로 일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마을에 있는 공장의 증기 기관이 고장났는데, 많은 기술자들이 왔지만 그것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소식을 들었고, 감독관의 허락을 받고 기관실을 말 그대로 둘러 보았습니다. 이어 그는 4명만 불러달라고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망치를 주며 그들에게 각자의 번호와 장소를 지정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들은 각자에게 할당된 지점에 망치지를 했는데, 이렇게 해서 기계의 고장을 고쳤다고 합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기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어려움도 겪지 않았습니다.
VI. 다시 전쟁
1. 언어의 행위적 성격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는 후기에 이르러 행위, 행동이 먼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행동으로서의 언어에 주의를 집중하게 됩니다. 상이한 표현들의 사용을 지배하는 실천적인 규칙들, 그러한 규칙들이 작용하는 언어 게임들, 궁극적으로 그런 언어 게임들에 유의미성을 부여하는 더 폭넓은 차원의 삶의 형식들을 분석하는 데 몰두하게 되죠.
『논고』에서는 단순 기호들과 그것들에 대응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당연히 생각했지만 이는 표상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형식적 분석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형식화된 표상이 실제 삶의 언어적 행동 속에서 사용되는 방식들을 간과하고 맙니다. 실제로 언어적 표현들은 동료 인간들과 세계에 실천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표현들에 확정적인 용법들을 제공해 주는 절차들을 통해 구체적인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이죠.
언어적 표현의 의미 획득의 원천인 언어 게임(language game)에 맥락을 제공하는 것으로서의 삶의 형식(Lebensformen)이라는 개념은 놀라울만큼 루스적인 개념입니다. 삶의 형식이라는 용어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빈적 어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서 루스에 대한 언급에서 루스가 생활 형식(=삶의 형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을 보았죠. 실제로 ‘횃불’의 필자인 오토 슈퇴슬(Otto Stoessl)의 연구서인 『삶의 형식과 글쓰기의 형식』의 제목 중 일부분이며, 그 책이 나온 직후 등장한 에두아르트 슈프랑거(Eduard Spranger)의 『삶의 형식』은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날 무렵 2만 8천부가 팔린 상황이었습니다. 슈퇴슬과 슈프랑거 같은 사람들은 삶의 형식이 철학의 궁극적인 자료이며, 우리의 기본적인 범주와 사유 형식들은 그러한 삶과 문화의 형식들과 맺게 되는 관계로부터 의미와 적용을 획득한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삶의 형식(forms of life)이라는 개념은 후기의 작품인 『탐구』와 『확실성에 관하여』(on certainty)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2. 오스트리아 합병
1936년 노르웨이로 떠난 비트겐슈타인은 이듬해 12월 오스트리아로 돌아오는데, 이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바로 2차 세계대전이죠.
2차 대전은 단순히 전쟁이라는 차원을 떠나서 유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라는 측면이 더 중요한데, 유태인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집안도 이러한 숙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우리는 빈에서 반유태주의가 생겨나는 과정을 쇠너러와 뤼거의 성공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근대 반유태주의의 발생에는 인종주의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인종이라는 특별한 개념은 이미 반세기 전부터 유행하고 있었고, 따라서 누구나 인종 문제를 건드릴 수 있었고 거의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자와 그 지지자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만들었던 변명은 바로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었죠.
유태인에 대한 증오는 친숙하고 뿌리 깊은 질병이지만, ‘반유태주의’라는 단어는 19세기 중엽의 발명품입니다. 종교적 반유태주의는 인종차별로 인해 더욱 강화됩니다. 예전에 유태인들은 열광적 개종운동가들이 부추기거나 강요한 기독교로의 개종을 통해 자민족의 집단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반유태주의자들은 유태인들이 지울 수 없는 인종적 오점으로 저주받아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해버리죠. 오스트리아에서도 인종주의적 반유태주의는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슈니츨러가 경악할 정도로 빠르게 정치세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반유태주의는 1938년 독일과의 합병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독일은 1936년에 이탈리아와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약속하였지만, 오스트리아와의 긴장은 고조되어갔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제국과의 합병을 바라는 오스트리아 내 독일 민족주의자 사이에 존재하는 열광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1938년 2월에 오스트리아의 총리인 쿠르트 폰 슈슈니히(Kurt von Schuschnigg)는 히틀러와의 회담이후 3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선언하고, 동시에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오스트리아가 국가적 독립을 유지한다는 내용의 투표 문안을 작성하게 됩니다.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연기할 것과 문안을 변경할 것, 그리고 권력을 나치에 우호적인 아르투르 자이스-인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1938년 3월, 합병을 선언하는 히틀러.
독일과의 합병은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슈슈니히 총리가 이를 거부하자 인크바르트는 자기가 임시정부 수반임을 선언하고 독일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죠. 히틀러는 독일군에게 진군 명령을 내리면서, 오스트리아 군에게는 독일군에 저항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3월 12일에 독일군이 진주해 들어갔고 이튿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이 선언되었으며, 3월 14일, 드디어 히틀러는 그가 불행하고 목적 없는 청년기를 보냈던 빈에 승리를 구가하며 입성하게 됩니다.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이 무혈 침공으로 오스트리아 병합이 완수되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항의하는 것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자신의 영토에 병합하게 되면서 이는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게 됩니다. 폴란드에 대한 역사적인 전격전에 대한 교두보를 마련해 준 셈이니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매우 분노하였습니다. 당시 영국 총리인 채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이 뮌헨에서 귀국하며, ‘우리 시대는 평화롭다’고 선언하는 모습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인 길버트 패티슨에게 체임벌린과 그의 부인의 사진이 담긴 엽서를 보냅니다. 아래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평화의 순례자. 만세! 체임벌린씨.’ 뒷 장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적습니다. ‘네가 구토제를 원한다면, 여기에 그것이 있다.’
특히나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에게 합병은 치명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반유태주의의 고삐가 풀렸던 것입니다. 뒷날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국’이라 일컬어지는 오스트리아에서, 유태인들은 독일에 사는 형제들보다 훨씬 더 참혹한 대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빈의 많은 유태인들은 합병이 몰고 올 결과들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태계는 주류에 동화되어 있었고, 많은 유태인들이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이죠. 비트겐슈타인의 큰 누나인 헤르미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이후 회고에서 어떻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죠.
3. 반유태주의의 발흥: 나치와 협상하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반유태주의를 보여주는 한 사건은 빈 학파의 지도자인 슐릭의 죽음입니다. 빈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모리츠 슐릭은 인간적으로 매우 매력적이었을 뿐 아니라, 학계에서의 영향력도 대단했죠. 그레틀은 비트겐슈타인이 슐릭과 만나도록 주선했고, 슐릭은 『논고』를 읽고 가치를 인정한 첫 번째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1938년 6월 21일, 슐릭은 강의를 위해 강의실로 향하는 도중 그가 지도한 적이 있는 요한 넬뵈크의 권총에 쓰러져 즉사하고 맙니다. 전말은 이렇습니다. 넬뵈크는 실비아 보로비츠카라는 동급생을 좋아했는데, 실비아는 그를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슐릭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저 해 본 말인지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당시 슐릭은 두 아이가 있었죠) 여하간 넬뵈크는 이 일로 슐릭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되었고, 취직 실패도 모두 슐릭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죠. 이 병력은 그의 취업에 심한 장애물이 됩니다. 넬뵈크는 전화를 슐릭에게 욕을 퍼붓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는데, 슐릭은 두려움으로 인해 경찰의 보호를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스토킹인 셈이죠. 이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자 경찰은 보호를 중단해버렸는데, 마침내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빈 학파를 이끌었던 모리츠 슐릭.
슐릭의 죽음은 빈 학파를 해체시켰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인 자체보다 살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언론은 이에 대해 슐릭이 유태인이며 ‘암살범’은 가톨릭 직분제 국가의 지지자라고 단정했습니다. 일부는 슐릭을 비방하며 살인범을 동정하고 찬양하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슐릭은 독일계 신교도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와도 무관했고, 주변이 온동 유태계 조교뿐이라는 주장도 거짓이었죠. 그런데 그 누구도 슐릭에 대한 비난에 맞서 슐릭이나 그의 동료들이 어떤 인종에 속하는지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간단한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넬뵈크는 범게르만주의의 영웅이 됩니다.
유태인을 골라내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률(Nurnberger Gesetze)은 독일에서는 1935년부터 시행되었습니다. 합병 이후인 1938년 5월 1일부터는 오스트리아에까지 확대 적용되었고, 이는 우리를 누가 감히 건드리랴 하는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의 믿음을 완전히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가족들은 3/4 유태인으로, 장래 수용소에 끌려갈 운명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유일한 현실적 희망은 재분류 신청이었고, 이를 위해 친조부인 헤르만 비트겐슈타인이 유태인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나치 당국자들은 족보 연구보다는 재산 연구에 더 관심이 있었다. 1938년에도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여전히 오스트리아에서 손꼽히는 부잣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앞서 살펴 본대로 칼 비트겐슈타인이 재산을 미국의 채권으로 대부분 전환시켜 놓았기 때문이죠. 물론 대공황으로 인해 재산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상대적으로 여전히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2억 달러 가량의 주식과 다량의 부동산, 채권 등을 갖고 있었죠. 1938-9년에 걸쳐 제국 은행은 비트겐슈타인가가 갖고 있는 엄청난 양의 외화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했듯이 몰수를 단행할 수 없었습니다. 재산들이 외국 자본의 형태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독일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이 과정을 가능하면 합법적인 형태로 진행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로써 베를린 당국과 비트겐슈타인가 사이의 긴 교섭이 시작되었죠.
비트겐슈타인의 형제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헤르미네, 헬레네, 마르가레테, 루트비히, 파울.
이 협상의 결과는 비트겐슈타인의 누나인 헤르미네와 헬레네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이들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죠.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다른 누나인 그레틀은 미국인 사업가인 존 스톤보로와 결혼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당시의 신분으로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스라파는 그에게 섣불리 오스트리아로 가면 안 된다고 조언합니다.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는 영국 시민권이 필요했죠.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의 강사직과 함께 영국 시민권을 신청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케인즈가 큰 도움을 줍니다. 케인즈는 그와 친구라기보다는 후원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는데, 역시 친구는 잘 두고 볼 일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은 누나들이 처한 상황을 걱정하다가 병이 들 정도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협상을 위해 베를린, 빈, 뉴욕을 오갔고, 마침내 1939년 8월 30일, 헬레네와 헤르미네는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연푸른 색깔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그들이 1급 혼혈아임을 인증하는 서류였습니다. 그 대가로 비트겐슈타인의 재산 중 상당량이 스위스 은행에서 제국 은행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베를린이 접수한 오스트리아 전체 금 보유고의 2%의 액수(금 1.7t)가 나치에 제공되었습니다. 이는 오스트리아 유태인의 본격적인 압송이 시작되기 불과 1년 전이었습니다. 역사가인 라울 힐베르크(Raul Hilberg)는 이 시기가 그나마 유태인들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을 부릴 수 있었던 유일한 단계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헤르미네와 헬레네는 전쟁 동안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의 와중에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전쟁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배달 사원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의 일은 약들을 약국에서 병동으로 운반하는 일이었죠. 후에 그는 제조 실험실에서 약을 담당하는 기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의 임무들 중 하나는 피부과에서 쓸 라사르 연구를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그 곳에서 일한 한 직원은 누구도 전에는 그렇게 품질이 좋은 라사르 연고를 만든 적이 없다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1944년 비트겐슈타인은 뉴캐슬을 떠나서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갑니다.
VII. 이야기가 끝나다
전쟁 중 뉴캐슬의 병원에서 일할 때 그의 신분은 케임브리지 철학과 교수였습니다. 1939년 비트겐슈타인은 무어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철학 교수직에 지원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천재 철학자로 인정되어 있었죠. 이미 철학과 교수였던 브로드(C. D. Broad)는 이와 관련해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자리를 주기를 거부하는 것은 마치 아인슈타인에게 물리학 교수직을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브로드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죠. 그저 사실을 서술했을 뿐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여름 학기 중, 비트겐슈타인은 가르치는 것을 그만 두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폰 리히트에게 교수직을 사임할 것이며, 폰 리히트가 그 자리를 계승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학기 중에 한 강의는 그가 다음 2년 동안 몰두할 이슈를 소개해 주며, 『탐구』의 2부를 구성할 원고에 드러나 있습니다.
1929년 트리니티 칼리지로부터 연구비를 수여받은 후 찍은 사진
1949년, 당시 코넬에서 가르치던 말콤을 만나고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건강이 악화되어 비번 박사의 검사를 받게 됩니다. 최종 진단은 11월 25일에 나왔죠. 검사 결과는 전립선암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인생의 마지막 2년은 마치 마지막 장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사유하고, 사유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늘 혼자 있기를 좋아했던 비트겐슈타인은 최후의 2년 동안에는 친구와 제자들의 집에서 지냅니다. 이타카에서는 말콤과 케임브리지에서는 폰 리히트와 옥스퍼드에서는 엘리자베스 앤스컴(G. E. M. Anscombe)과 지내게 되죠.
임종시의 비트겐슈타인
병원에서 삶을 마치는 것을 두려워했던 비트겐슈타인은 바람대로 비번 박사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1951년부터 그는 비번 박사의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 때부터 기록한 그의 사유는 주로 『확실성에 관하여』에 담겨져 있죠. 『확실성에 관하여』의 마지막 단평은 이듬해인 4월 27일에 쓰여졌는데, 이 날은 비트겐슈타인이 의식을 잃기 하루 전이었습니다. 그 전날은 그의 예순 두 번째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 비번 여사와 산보를 마친 후, 그는 심하게 앓았고, 그녀는 그에게 영국에 있는 그의 친한 친구들이 내일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전해 주시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케임브리지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묘.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출판된 저서는 『논고』한 권 뿐이며, 색채에 관한 논문이 전부입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유고, 강의들은 그의 재산과 유고에 대한 관리인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지정한 세 명의 인물(몇 차례 언급되었던 폰 리히트와 앤스컴, 그리고 러쉬 리(Rush Rhees))에 의해 정리, 번역, 편집되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구태여 비트겐슈타인이 미친 영향에 대해 떠들어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삶은 지적으로 가장 격렬한 발전을 겪었던 19세기 말, 전래없는 증오와 학살이 자행되었던 두 차례의 전쟁,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의 합리화 과정, 유래없이 다양한 문화적 변혁이 일어났던 빈이라는 공간을 관통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참고서적
본 글은 어떠한 독창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이하의 첫 5권의 책에서 본문에 나온 문장들을 모조리 찾아볼 수 있습니다.
레이 몽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천재의 의무』(전 2권)
앨런 재닉 & 스티븐 툴민,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데이빗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비트겐슈타인은 왜?』
피터 게이, 『부르주아전』
칼 쇼르스케, 『세기말 비엔나』
데이빗 피어스, 『비트겐슈타인』
조지 로마노스, 『콰인과 분석철학』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메리 풀브룩,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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