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Anscombe의 비트겐슈타인 이야기
비트겐슈타인 이야기(2008. 9. 15. ~ 2008. 9. 29.)
1. 하마는 존재하는가?
2. 완성형 프로토스는 김씨이다(?)
3. 논리는 함수다
4. 러시아의 수도는 러시아의 수도이다?
5.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6. 철학자들이여 헛소리를 멈출지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추천 서적)
제1장 하마는 존재하는가?
1. '논리-철학 논고'에 대하여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살아있는 동안 단 한 권의 저서만을 남겼습니다.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이하 논고)가 그것이죠. 이 책은 매우 짧으며, 문장도 간결하고, 난해한 신개념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20세기 철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 중 하나인 '논고'는 이러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가장 난해한 철학서 중 하나로 꼽힙니다. 짧고, 단정적인 표현들은 결코 친절하지 않죠. 이 글이 갖는 배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글씨로 보일 따름입니다. 그저 '이렇다, 저렇다'라고 할 뿐,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하지 않으니까요. 이 점은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아마 이 책 속에 표현된 사고들을 - 또는 어쨌든 비슷한 사고들을 - 스스로 이미 언젠가 해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이 책은 그러므로 교과서가 아니다. - 이 책의 목적은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어떤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달성될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논고'를 이해하는 것은 그의 사상의 절반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합니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죠.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코스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쉬워보이는 '철학적 탐구'(이 또한 결코 쉽지 않은)를 찾게 되겠죠. 우리가 결국 얻는 건 뭔가 있어보이는 몇 마디 말들 뿐입니다. 예컨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논고)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철학적 탐구)
이것은 표현들을 '소비'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과연 이 말들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고 쓰는 것일까요? 하나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모든 지식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왜곡을 가져오게 되죠. 문제는 '논고'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의 사상 또한 역사의 산물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글을 그 자체로만 보고 멋대로 해석하는 것 또한 문제이지만, 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내버려두는 것 또한 잘못입니다. 그가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를 다른 사상과의 연계 속에서 바라본다면 최소한의 수준에서 이해에 이르는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2.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자, 첫머리의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하마는 존재하는가?
물론 하마는 존재합니다. 우리는 동물원에서 하마를 볼 수 있지요. 하마와 호랑이가 하나의 우리 속에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이를 보고, '하마는 존재한다', '호랑이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우리를 구성하는 것은 하마와 호랑이일까요? 하마와 호랑이의 존재만으로 그 우리가 설명될까요? 하마와 호랑이는 그저 어떤 생물체일 뿐입니다. '하마 + 호랑이'가 우리 전체를 대변하지는 못하죠. 이는 '한국'이 '한국인들의 집합'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더군다나 '하마는 존재한다'는 말은 단지 '하마'라는 생물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마가 저기 있다는 어떠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하마의 존재와는 다르죠.
대상들은 지시하는 것은 지시에 멈출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세계라고 가정해 봅시다. 세계는 호랑이와 하마의 총체라는 기술은 옳은 것일까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호랑이와 하마라는 생물을 지시하는 것에서 멈춥니다. 오히려 '호랑이가 저기 있다', '하마가 저기 있다'는 진술이 더 진실에 가깝죠.
'논고'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우리는 세계를 사물들의 집합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구'란 무엇일까요? 9명의 선수들의 집합체가 야구일까요? 9명의 선수들, 그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 글러브, 배트 등등의 집합체는 야구에 관해서 무언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기술, 야구라는 경기의 규칙, 규칙 속에서 그들이 갖고 있는 역할들에 대한 기술이 야구에 대해 더 적합한 설명일 것입니다.(뭐, 이러한 설명은 '논고' 보다는 '탐구'에 가깝습니다만)
따라서 우리는 세계가 단순히 어떤 개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 개체들에 대한 어떠한 사실들의 집합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지 부시는 미국의 대통령이다
브라질은 월드컵에서 5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러한 기술들은 세계에 대한 사실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부시는 미국의 대통령이며, 브라질은 월드컵에서 다섯번 우승했죠. 실제로 이런 식으로 세계를 기술할 수는 없을지만, 원리상으로는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건, 이것이 새로운 관점의 전환이라는데 있습니다. 세계가 단순히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입니다. 차라리 현상들의 집합이라는 게 옳겠죠. '논고'에서는 현상이 단순히 사물들의 모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기술될 수 있는 사실로 존재한다고 봅니다. 즉, 물리적 개체가 아니라 기술될 수 있는 '문장'의 수준에서 세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이제 우리는 세계를 언어로 기술될 수 있는 것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조지 부시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부시가 미국의 대통령인지, 그가 선거에서 정당하게 승리했는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의도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언어적인 작업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이는
부시는 앨 고어와의 선거에서 부당하게 승리하였다
부시가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석유 때문이다
와 같은 기술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며, 이 점에서 언어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기술들은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겠죠. 중요한 건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조지 부시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조지 부시'란 조지 부시라는 인간에 대한 사실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겠죠.
좀 더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면, 사실이 아닌 명제(독일어의 Satz는 '명제', '문장'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논고'에서 쓰이는 Satz는 명제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들의 세계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사태'라고 부릅니다. 사태는 일어나거나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술들입니다. 사실들은 이 사태가 '실제로' 일어난 경우이죠.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명제는 하나의 사태를 표현하며, 그 사태가 실제로 세계에서 구현되어 있을 때(즉 참일 때), 사실이 됩니다.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이 명제는 하나의 사태를 표현합니다.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거나 아니겠죠. 그런데 (정말 유감스럽지만) 실제로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입니다. 따라서 이 명제는 하나의 사실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겠죠. 이와 비슷하게 우리들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실들을 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좀 더 세분화되어 나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4년마다 열리는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는 자리이다
월드컵은 4년마다 열리는 축구대회이다
'조지 부시는 미국의 대통령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분석하려면 부시가 누구이고, 미국이 어디에 있으며, 대통령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즉, 이 문장은 하나의 복합체이며, 좀 더 단순한 문장들로 나뉠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최종적으로 가장 단순한 문장에 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바라보는 명제의 성격입니다. 여기서의 명제란 전형적으로 기술적이며, 참이거나 거짓으로 확인될 수 있는 기술들을 의미합니다. 세계에는 현상들이 존재하며, 언어적인 기술들(명제)이 이 명제에 대응하게 되죠.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고전적인 대응이론을 따르지만, 인간의 의식(감각, 이성)이 아닌 언어와의 대응을 따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주1)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존재 문장'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하마는 존재한다'와 같은 경우죠.
주2) '조지 부시는 미국의 대통령이다'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같은 말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가 사용하는 대상, 이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런 논의는 피하면서 단순화의 오류를 저지르고자 합니다.
제2장 완성형 프로토스는 김씨이다(?)
1. 완성형 프로토스를 둘러싼 수수께끼
완성형 프로토스는 김씨이다.(이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며 현재에 대한 기술임을 기억합시다)
이 말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김택용 선수의 팬이라면 '당연'이라는 반응을 보일테고, 송병구, 도재욱, 손찬웅, 허영무 등 다른 게이머의 팬 분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거짓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완성형 프로토스란 없다'고 하시겠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완성형 프로토스가 없다'는 분들은 위에서 주장한 명제의 진리값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진리값이란 명제가 가질 수 있는 값으로, 참이나 거짓입니다. 예컨대, '박성준은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3회 우승했다'의 진리값은 참이며, '홍진호는 (이벤트전 제외)스타리그 우승 경력이 있다'의 진리값은 거짓이죠]
참입니까, 거짓입니까? 만약 참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완성형 프로토스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가 김씨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거짓이겠네요, 완성형 프로토스가 존재하지 않으니 그가 김씨일 수도 없죠, 있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있지도 않은 완성형 프로토스에 대해 '김씨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가능할까요? 완성형 프로토스가 김씨인지 아닌지 우리가 확인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해서 저 주장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도 미심쩍습니다. 분명히 거짓으로 보이는데 거짓이라고 말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이죠.
2. 러셀의 분석
이 문제를 풀어낸 사람이 바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입니다. 러셀은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고, 여러 차례 스캔들을 일으키는 등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지만, 실제 그의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러셀의 위대한 업적은 대부분 젊은 시절에 이루어졌는데, 이 업적들은 전문가들에게나 이해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죠. 대표적으로 '수학의 원리'(화이트헤드와의 공저)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룰 부분은 그렇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러셀은 친구인 무어(G. E. Moore)와 함께 20세기 초 영국 분석철학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거의 전설의 반열에 올라있으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스승이며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죠. 걍 한 마디로 무지 대단한 놈입니다. 그런 그가 이룬 업적 중 중요한 것이 여기서 다룰 분석 개념입니다.
다시 질문으로 되돌아갑시다. '완성형 프로토스는 김씨이다'. 그런데 실제로 완성형 프로토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문장은 참인가, 거짓인가? 직관적으로는 거짓인 것 같은데, 따져보면 참-거짓을 판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명제가 아니라는 얘기인가? 러셀은 여기에서 '분석'이라는 칼을 빼듭니다.
러셀은 이 문장이 하나의 문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 문장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체로 파악합니다. 즉, 여러 문장이 들어있기 때문에 진리값을 결정함에 있어 곤란을 겪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를 '분석'하여 낱낱의 명제로 나누면 비밀이 풀리게 됩니다.
1. 완성형 프로토스인 X가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
2. X 이외의 어느 누구도 완성형 프로토스가 아니다.
3. X는 김씨이다.
'완성형 프로토스는 김씨이다' 라는 명제는 사실 이러한 세 명제를 뭉뚱그린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우리는 참-거짓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지만, 분석에 의해 자명해졌습니다.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었던 이유는 1번 명제가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완성형 프로토스인 X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바꿔말해, 현존하는 프로 게이머(혹은 모든 사람) 중에 완성형 프로토스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명제가 주장하는 것은 완성형 프로토스이며, 김씨인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존재하지 않으므로 '거짓'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값을 판별할 수 없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요? '완성형 프로토스는 김씨이다'에서 우리들은 김씨인지, 아닌지에만 집착합니다. 그런데 이는 이미 완성형 프로토스가 존재함을 받아들인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완성형 프로토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이 명제의 진리값을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완성형 프로토스의 존재를 전제한 것입니다. 러셀은 이러한 부분들이 감추어져 있으며, 분석에 의해 비로소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그 외에도 그는 '마엘 스톰은 존재하지 않는다', 'So1 스타리그의 우승자는 오영종이다'와 같은 명제들이 분석에 의해 명백히 판별 가능한 진리값을 가짐을 보여줍니다. 마엘 스톰 명제의 경우,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죠. 그리고 오영종 명제의 경우 So1 스타리그의 우승자와 오영종은 동일 인물이므로 이는 A=A라고 하는 동어반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가 결코 동어반복으로 보이지는 않죠. 러셀은 왜 그런지를 명쾌한 논리를 통해 설명합니다.
[실제 예에서 러셀이 든 예는, '현재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웨이벌리'의 저자는 스코트이다'입니다]
남은 부분들도 알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덧붙이겠습니다.
여하간 중요한 건 분석의 개념입니다. 명제의 논리적 형식이란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이죠. 하나의 명제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여러 가지 명제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분석에 의해 단순한 명제로 쪼개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석된 개별 명제들을 파악함으로써 그 명제들의 집합체인 복합 명제의 진리값을 알아낼 수 있게됩니다. 혹은 진리값을 갖지 않는 비-명제임을 드러낼 수도 있겠죠.
분석의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은 물론, 분석철학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의 복합명제, 요소명제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인데,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재료가 더 필요합니다. 바로 프레게(Gottlob Frege)의 논리학이죠.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추가>
질럿은깡패다 님의 질문이 있었으므로 추가하죠.
'마엘 스톰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먼저 살펴봅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마엘 스톰'이라는 것이 어떠한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엘 스톰이 이름으로써 기능하려면 상응하는 대상이 존재해야겠죠. 그런데 이 명제에서 주장하는 건 마엘 스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이 아닌 플라톤적인 이데아에서의 마엘 스톰의 존재를 상정해야 할까요? 러셀은 이러한 해결책이 아닌 그만의 새로운 방법을 고안합니다. 즉, '한정 기술구'이죠.
러셀은 기술 이론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사실은 '기술구'와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의 스승'이며, 박정석은 '온게임넷 스카이 스타리그 우승자'가 되겠죠. 아리스토텔레스와 박정석은 이름으로, 하나의 명사로 보이지만, 이를 '알렉산더의 스승', '온게임넷 스카이 스타리그 우승자'로 바꿈으로써 이름의 자리에서 벗어납니다. 러셀에게 있어 이는 '진정한 이름', '지시'가 아닙니다.
기술 이론의 장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름이라고 여기는 명사들을 사용할 때, 이를 기술구로 대치함으로써 그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없도록 해준다는데 있습니다. '프로게이머 Ms. Anscombe은 저그 유저이다'라는 명제에서 '프로게이머 Ms. Anscombe의 존재는 전제됩니다. 이름이니까요. 하지만 이를 기술구로 대치하면 그의 존재를 전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프로게이머 Ms. Anscombe'은,
1. Ms. Anscombe 인 X가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
2. 오직 하나의 대상만이 X와 동일하다.
3. X는 프로게이머이다.
3이 거짓이므로, 우리는 Ms. Anscombe이 저그 유저라는 명제 전체가 거짓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마엘 스톰 문제로 돌아가봅시다. 마엘 스톰 명제는
'다크 아콘이 쓰는 어떠한 기술 x는 마엘 스톰으로 불린다'가 모든 x 값에 대해 거짓이 된다
고 바꿔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크 아콘이 쓰는 기술은 피드백, 마인드 컨트롤, 마엘 스트롬으로 불린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다크 아콘의 기술이 마엘 스톰으로 불린다는 말은 거짓이죠. 뭐, '~로 불린다'는 표현을 써서 좀 무리수를 두었습니다만, 내용은 대충 그러합니다. 러셀의 실제 예에서는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들었고, 황금산을 '황금으로 구성된', '산'으로 나누었죠. 이 경우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황금으로 구성된다'는 속성과 '산'이라는 속성을 모두 만족하는 x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바뀌었습니다. 이 명제는 황금산의 존제를 전제하지 않으면서도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동일한 주장을 펴고 있죠. 러셀은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마지막으로 오영종 명제를 살펴봅시다. '오영종은 So1 스타리그 우승자이다'라는 명제는 동어반복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오영종의 기술구가 'So1 스타리그 우승자이기 때문에, 'So1 스타리그 우승자는 So1 스타리그 우승자이다'라는 명제와 동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습니다.
1. So1 스타리그에서 우승한 프로게이머(x)가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
2. So1 스타리그에서 우승한 프로게이머(x)는 기껏해야 하나이다.
3. 오영종은 x와 동일하다.
이는 So1 스타리그 우승자를 변항(x)으로 파악함으로써 동일성 명제와 다른 형식을 갖게 됩니다.
제3장 논리는 함수다
1. 러셀 기술 이론의 함수적 성격
지난 번 글에서는 러셀의 기술이론을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러셀의 주장의 핵심은 일반적으로 주어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주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현재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라는 문장에서 '현재의 프랑스 왕'은 주어로 보이며,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대상이 존재해야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러셀은 이처럼 '주어처럼 보이는 것'(이를 표층 문법이라 부릅니다)이 분석에 의해 주어로 사용되지 않는 문장으로 대체될 수 있음을 보여줌(이를 심층 문법이라 부릅니다)으로써 문제를 해소합니다. 그것이 분석의 방법이죠. 즉,
프랑스 왕인 X가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
프랑스 왕인 X는 기껏해야 하나 존재한다
X는 대머리이다
우리는 프랑스 왕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X는 대머리이다'는 명제를 확인하지 않고도 '현재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명제가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러셀이 '변항'의 개념을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수학 시간에 함수에 대해서 배웁니다. 예컨대, y = x+ 1 이라는 식이 있을 경우, y는 x의 함수가 되죠. x와 y의 값은 결코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 점에서 '변수'입니다만, x의 값이 말 그대로의 변수인 반면, y의 값은 x의 값이 무엇이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x와 같은 의미의 변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y의 값은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또한, y = x + 1 은 완성된 식이 아닙니다. x의 값이 무엇일지를 기다리고 있는 미완성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x에 어떤 값을 대입하는 식으로 '동일한 형식'의 식을 구성해 볼 수는 있습니다.
2 = 1 + 1
이는 x에 1을 대입하고, y의 값이 2가 되는 경우입니다. 이는 참이죠.
5 = 2 + 1
이는 x에 2를 대입하고, y의 값이 5가 되는 경우입니다. 이는 거짓입니다.
y = x + 1 은 그 자체로는 말해주는 것이 없지만, 하나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x 자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무엇이든(물론 자격 조건을 달 수 있겠지만) 담을 수 있는 하나의 틀과 같은 것이죠. 러셀이 상정하고 있는 X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X라는 변수(논리학에서는 '변항'이라고 합니다)가 프랑스 왕이 수행하던 주어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프랑스 왕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도 문장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X를 주어로 사용하면서도 이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X는 변항이니까요.
2. 프레게의 개념과 대상 구분 : 술어 논리학
러셀과 함께 비트겐슈타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프레게(Gottlob Frege)입니다. 그는 독일의 수학자, 논리학자이며, 현대 형식 논리학의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죠.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해서 보면 그리 인정받지도 못했고, 이해받지도 못한 인물입니다. 소수의 인물만이 그의 논리가 갖고 있는 탁월함을 알아챘고, 그것은 사후에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죠.
여기서는 프레게 논리학의 세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개념에 대한 것으로 위에서 다룬 변항과 비슷한 논의이고, 둘째로, 단순명제와 복합명제의 논의, 셋째로 뜻과 지시체(의미)의 구분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 우리는 명제의 기본 형식이 함수와 비슷한 것이라는 점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봅시다.
김택용은 프로토스 유저이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김택용과 프로토스 유저를 하나의 명사로 파악합니다. 프레게와 러셀 모두 하나의 이름이란 어떤 대상을 지시한다는 입장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김택용, 프로토스 유저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대상들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명제 A ( ) 는 프로토스 유저이다
이 경우 우리는 ( )속에 다양한 말들을 넣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는 러셀의 논의에서의 변항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명제 B 송병구는 프로토스 유저이다
명제 C 박지수는 프로토스 유저이다
B는 참이고 C는 거짓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송병구와 박지수는 프로게이머인 어떤 사람을 지시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죠. 그렇다면 프로토스 유저는 무엇을 지시할까요? 프레게에게 있어, 송병구와 프로토스 유저는 갖고 있는 지위가 다릅니다. 명제 A에서 변항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 )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송병구와 박지수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프로토스 유저'는 송병구가 프로토스 유저라는 것을 말하고 있죠. 즉, 술어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인 문법에서 송병구와 프로토스 유저는 무언가를 지시하는 명사이고, '~이다'가 술어, '는'은 조사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 그런 구분은 무시됩니다. 송병구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름이며, '( )는 프로토스 유저이다' 전체가 하나의 술어가 되는 것이죠. 프레게는 이러한 형태의 술어를 '개념'이라고 부릅니다. 송병구라는 게이머는 프로토스 유저라는 개념에 속한다는 것, 프로토스 유저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술어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전통적인 논리학과 프레게 논리학을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가 됩니다.
그렇다면 변항은 언제나 주어여야 할까요? 다른 뭏?들어봅시다.
명제 D 이명박은 ( ) 을 죽였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주어는 이명박이지만 변항은 ( )이며, '이명박은 ( ) 을 죽였다'가 하나의 개념이 됩니다. 우리들은 ( )에 여러 가지를 채워넣을 수 있죠.
명제 E 이명박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죽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주어인지, 목적어인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명제 F ( )은 이명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는 명제 D와 다른 모양을 갖고 있지만 의미하는 바는 똑같습니다. 수동형, 능동형 같은 것은 논리학의 관심이 아니죠. 중요한 건 어떠한 것이 변항이고, 어떠한 것이 술어인가 하는 것 뿐입니다. 이러한 명제는 변항을 하나 가지고 있으며, 일항 술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도 가능하겠죠.
명제 G ( )는 ( )을 죽였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변항은 2개이며, 따라서 이항 술어입니다. 용어는 어려워보여도 별 것 아니죠? 자, 완성해 봅시다.
명제 H 강만수는 대한민국 경제를 죽였다
개념은 그 자체로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습니다. 변항에 어떠한 대상이 들어감으로써 참이거나 거짓인 진리값을 갖게 되죠.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의 '명제'가 됩니다.
하나 덧붙이면, 개념들도 주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명제 I 모든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명박을 지지한다
여기에서 '모든 한나라당 의원들'이 주어이며, '이명박을 지지한다'가 술어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다음과 같이 서술해보면,
명제 J 만약 그가 한나라당 의원이라면, 그는 이명박을 지지한다
여기에서 한나라당 의원은 하나의 술어로 사용됩니다. 개념이 늘 (겉보기의) 술어로 사용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죠.
3. 명제에 대한 분석 : 진리함수 개념
이상에서 살펴본 것은 명제에 대한 분석입니다. 여기서는 대상과 개념(술어)이 단위가 되었죠. 그래서 이를 술어 논리학이라 부릅니다. 이번에 살펴볼 것은 명제를 하나의 단위로 합니다. '모든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명박을 지지한다'는 단지 명제 I일 뿐이며, 그 내용을 분석하지는 않습니다. '강만수는 대한민국 경제를 죽였다'도 명제 H일 뿐, 그 내용을 분석하지는 않죠. 요컨대, 최소의 단위가 명제에 놓여있다는 것이며, 이를 명제 논리학이라 부릅니다.
명제 논리학에서는 명제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예컨대,
명제 K-1 E 이고 H 이다
는 두 개의 명제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명제이죠. 이를 풀어쓰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명제 K-2 이명박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죽였고, 강만수는 대한민국 경제를 죽였다
명제 논리학의 수준에서는 이명박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관계 같은 것은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명제 전체의 진리값이 무엇인지만을 살펴볼 뿐이죠. 만약에 이명박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죽였고, 강만수가 대한민국 경제를 죽였다면 위 명제는 참입니다.
명제 L 박지수는 프로토스 유저(C)이거나 송병구는 프로토스 유저(B)이다
명제 L은 C와 B중 적어도 하나가 참이면 참입니다. 실제로 송병구가 프로토스 유저이므로 L은 참이죠.
그렇다면 왜 L이 참인지, 그리고 K-2에서 E와 H가 참일 때 참이 되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 우리는 명제가 참-거짓 두 개의 진리값 중 하나의 진리값만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개의 명제가 관계를 이루어 나올 수 있는 진리값의 경우의 수는 몇가지 일까요?
명제 P와 Q가 있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경우가 가능합니다.
1. P가 참-Q가 참인 경우
2. P가 참-Q가 거짓인 경우
3. P가 거짓-Q가 참인 경우
4. P가 거짓-Q가 거짓인 경우
4가지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P * Q 라는 명제가 위 각각의 경우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16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검토하는 것은 P와 Q가 어떠한 식으로 관계(*가 그 관계를 표시합니다)를 맺어 생기는 명제인 P * Q 이며, P, Q가 갖는 진리값의 경우의 수에 대해 P * Q가 갖는 진리값의 경우의 수는 16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1-참, 2-참, 3-참, 4-참(1)
1-참, 2-참, 3-참, 4-거짓(2)
1-참, 2-참, 3-거짓, 4-참(3)
.
.
.
.
1-거짓, 2-거짓, 3-거짓, 4-거짓(16)
이를 표로 만든 것이 프레게의 진리표입니다. 예컨대,
P Q 1 2 3
T T T T T
T F T T T
F T T T F
F F T F T
이런 식으로 구성해 보면 16가지의 경우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우는 다음의 경우들입니다.
P이고 Q이다
이는 P가 참이고 Q가 참일 때 참이고, 나머지 경우에 거짓인 그 경우를 말합니다. 16가지의 경우 중 하나이죠. 그 경우에 대해 우리는 P * Q에 있어 *가 갖는 의미를 '~이고'(AND, ^)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P이거나 Q이다
이는 P나 Q 중 적어도 하나가 참일 때 참이고, P와 Q 모두가 거짓일 때 거짓인 그 경우를 말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거나'(OR, v)로 표시합니다.
P이면 Q이다
이는 P가 참일 때 Q가 거짓인 경우에만 거짓이고, 나머지 경우엔 참인 그 경우를 말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면, ~이다'(IF, ->)로 표시합니다.
P가 아니다
이는 P가 참일 때 거짓이고, P가 거짓일 때 참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아니다'(NOT, ~)로 표시합니다.
중요한 건 이러한 기호들은 사실 특수한 경우들을 표시한 것에 불과하며, 다른 경우에 대해 우월함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경우들이 선택된 건 단지 일상 언어와 유사해서이죠. 여기서 살펴본 AND, OR, IF 등을 '연결사'라고 부르며, 일상 언어에서의 '그리고', '이거나', '이면'과 비슷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어디까지나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이 얘기를 왜 하느냐? 다음을 살펴 봅시다
명제 M P 이거나 Q 이면 P 이고 R 이다
이 명제는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복잡해보이지만, 우리가 P, Q, R의 진리값만 알고 있다면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각각의 진리값이
P=T(참)
Q=F(거짓)
R=(참)
이 명제의 전체 형식은 (P이거나 Q) 이면 (P이고 R) 입니다. 첫번째 괄호를 A, 두번째 괄호를 B라고 할 때, A이면 B의 형식이며, 따라서 A가 참이고, B가 거짓일 때 거짓이며, 나머지 경우엔 참임을 알 수 있습니다.
A는 참입니다. 왜냐하면 P가 참이므로, P, Q 중 최소한 하나가 참인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죠. 이는 '이거나'(OR)라는 연결사의 속성에서 도출됩니다.
B도 참입니다. P, R이 모두 참이며, 이는 '~이고'(AND)의 속성에 따라 결정됩니다.
A, B 모두가 참이므로 명제 M은 참입니다. 이는 '~이면'(IF)이라는 연결사의 속성에 따라 그렇죠.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복잡한 명제라도 개별 명제들의 진리값과 연결사의 속성이 분명하다면, 전체 명제의 진리값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복잡한 명제의 경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겠지만, 원리상 알아낼 수 있습니다. 복잡한 명제들은 단순한 명제들의 복합체일 뿐이며, 따라서 어떠한 명제든 우리는 이를 단순한 형태로 잘게 쪼갤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명제란 일종의 함수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제 M은 P, Q, R을 변항으로 갖는 함수인 셈이죠. 연결사들은 +, -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이를 '진리함수'라 부르죠. 진리함수 개념의 중요성은 어떠한 형태의 명제이든, 우리가 각 명제들의 진리값을 안다면, 전체 명제의 진리값은 기계적인 연산에 의해 도출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프레게의 진리함수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형태의 명제를 요소 명제라고 부르며, 요소 명제들이 일정한 관계(연결사)에 의해 연결된 명제를 복합 명제라고 부르죠. 러셀의 개념을 따른다면, 복합 명제를 요소 명제로 나누는 것을 분석이라고 할 수 있겠죠. 러셀의 분석이 술어 논리학의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면, 비트겐슈타인은 명제 차원에서의 분석을 행하는 셈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논고'에서의 진리함수 개념은 다음에 살펴보죠. 더불어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의미) 구분도 살펴보겠습니다.
제4장 러시아의 수도는 러시아의 수도이다?
앞선 글에서는 프레게의 논리학, 특히 형식 논리학(술어 논리학, 명제 논리학)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충분치는 않습니다만, 형식 논리학의 입문 수준에서의 핵심은 어느 정도 다뤄보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자화자찬!!)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프레게 얘기를 덧붙이고, 다시 '논고'로 돌아가봅시다.
1. 프레게의 뜻과 지시의 구분
논리학에서 프레게의 독창적인 공헌 중 하나가 바로 뜻과 지시체의 구분입니다. 독일어로는 Sinn과 Bedeutung으로 쓰이며, 영어로는 sense와 reference(meaning)로 번역됩니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뜻과 지시체(의미)이지요. 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봅시다.
프레게의 의문은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시하는 표현은 그 의미를 어디에서 얻는가?
2. A = B 는 동어반복에 불과한가?
프레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철학자들 모두가 이름의 의미는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의자'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의자라는 물체이며, '사자'의 의미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고양이과의 동물이죠. 그렇다면 '유니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러셀이 제기한 문제, 즉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 왕이 대머리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가와 같은 의문입니다. 둘 모두 이름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는 가정을 공유하고 있죠.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프레게의 '개념' 사용이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유니콘은 하나의 뿔을 갖고 있다'는
어떤 것이 유니콘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뿔을 갖고 있다
는 표현으로 바꿔쓸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니콘은 하나의 '개념'(술어)이 되죠. 마찬가지로 하나의 뿔을 갖고 있다도 개념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변항)에 존재하는 것을 넣어볼 수 있죠. 이건 러셀과 같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러셀이 명목상으로 보이는 주어를 '분석'을 통해 바꿔버리는 방법을 쓴 반면, 프레게는 다른 방법을 취합니다. 즉, 이름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별개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이름의 의미는 곧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것입니다. 프레게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은 두번째 의문 때문입니다.
프레게가 든 예를 봅시다.
금성은 개밥바라기이다
여기에서 금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별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개밥바라기 또한 마찬가지이죠. 둘 모두 동일한 것을 지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경우 금성은 '금성'과 '개밥바라기'의 지시체(reference)입니다. 그런데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대체 가능성'입니다. 즉, 동일한 것이라면 정말로 동일하다는 뜻이죠. 예를 들어,
1+1=2
는 1과 1을 더하면 2이다의 뜻을 넘어서 '1+1'과 '2'가 인식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2+3 대신
1+1+3
이라고 써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개밥바라기 대신 금성을 써도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이죠.
금성은 금성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단순한 동어반복으로 보입니다. 자, 다음 문장은 어떻습니까?
모스크바는 모스크바이다
이는 모스크바가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떤 대상은 그 자신과 같다는 동일성 원리의 반복이죠. 하지만,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이다
이 문장은 러시아라는 국가의 수도가 모스크바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일종의 정보적 가치를 주고 있죠. 그 점에서 위의 문장과 다㉣求? 그런데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러시아의 수도'와 '모스크바'가 지시하는 대상은 같습니다. 따라서 위 문장을
모스크바는 모스크바이다
혹은
러시아의 수도는 러시아의 수도이다
로 바꿔 쓸 수 있죠. 동어반복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러셀에게서도 제기되었음을 보았습니다. 프레게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프레게가 보기에 어떠한 이름은 지시체를 갖지만, 동시에 뜻을 갖습니다. '러시아의 수도'와 '모스크바'는 모두 모스크바라는 러시아에 있는 어떤 도시를 지시합니다. 그 점에서 같은 지시체를 갖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는 다르죠. 금성과 저녁별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유니콘'도 뜻을 갖습니다. 유니콘은 지시체를 갖지 않지만 뜻을 갖는다고 할 수 있겠죠.
온게임넷 스타리그 3회 우승 프로토스 게이머
는 지시체를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뜻을 갖죠. 프레게는 이처럼 이름이 지시대상(의미), 뜻을 별개로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박지수는 아레나 MSL 우승자이다
는 단순한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박지수'와 '아레나 MSL 우승자'는 동일한 지시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같지만, 뜻이 다르니까요. 이로써 프레게는 'A=B'가 'A=A'와 같은 단순한 기호관계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프레게의 이러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이후 콰인(W. V. O. Quine), 크립키(Saul Kripke)의 주장을 이해하는데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꼭 기억해두시길 바랍니다.
2. '논고'의 진리함수 개념의 사용 : 복합명제와 요소명제
우리는 앞서 러셀의 분석 개념, 프레게의 진리함수 개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개념들은 논고의 주요 주장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첫번째 편에서 우리는 세계가 사실들로 구성되며, 그 사실들은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보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세계에 대응하는 것은 언어이며,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에 대응하는 것이 명제입니다. 명제는 세계에 존재하는(혹은 존재할 수 있는) 사실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죠.
명제는 기본적인 속성 상 참이거나 거짓입니다. 그런데 명제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므로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참, 거짓을 가릴 수 있죠. 이를 가림에 있어 사용되는 것이 프레게의 진리함수 개념입니다. 명제는 매우 복잡할 수 있지만, 최소의 단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장 최소 단위의 명제를 '요소 명제'라고 부릅니다.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단순한 단위이죠.(이 점 때문에 논고를 '논리적 원자론'으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요소 명제는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들로 구성되지만,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름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그저 대상을 '지시'할 뿐이기 때문이죠. 이름의 의미는 언제나 문장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는 의미의 최소 단위인 문장(명제)을 다루는 것입니다.
진리 함수 개념을 따른다면, 어떠한 종류의 복합 명제라도 논리적 연산의 과정을 거쳐서 진리값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요소 명제의 진리값을 구함으로써 이를 수행할 수 있죠. 따라서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요소 명제의 진리값을 구한다면, 원칙적으로 우리는 모든 명제들의 진리값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조금 단순화시키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의 대응이론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명제와 사실이, 언어와 세계가 완전한 대응을 이루게되죠. 첫머리에 세계가 사실의 총체라고 했듯이, 그는 "명제들의 총체가 언어"(논고, 4.00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K. T. 판(K. T. Fann)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이를 잘 드러낸 그림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가 일종의 그림과 같다고 보았으며, 이 점에서 '그림 이론'(picture theory)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림은 현실에 잣대처럼 대어져 있다.
제5장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나름 네번째 차례가 되었군요.. 앞선 두 편의 글에서는 프레게와 러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분석철학이라는 철학 사조 속에서 이해될 수 있기에 이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했죠.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정리 + 요소명제의 상호독립성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사실을 기술하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언어는 명제들의 집합이며, 각각의 명제들은 어떠한 사태를 기술합니다. 명제가 말하는 바(뜻)는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집니다. 이 점에서 명제는 사태의 그림이죠.
명제들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분석을 통해 가장 단순한 명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소명제이며, 요소명제들 각각을 대응하는 사태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요소명제들은 일정한 연결에 의해 복합명제를 구성하며, 복합명제의 진리값은 요소명제들의 진리값에 의해 결정됩니다. 여하간 명제들은 참이거나 거짓인 것을 기술하며, 그러한 점에서 명확합니다.
여기서 하나 빠진 것이 요소명제가 갖는 독립성입니다. 하나의 요소명제는 직접적인 비교에 의해 진리값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요소명제들은 상호 독립적입니다. 하나의 요소명제의 진리값은 다른 요소명제의 진리값과 무관합니다. 예를 들어,
A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이다
B 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이다
이 두 명제는 서로 간섭하지 않습니다. 명제 A의 진리값이 어찌되었든 명제 B의 진리값은 비교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점에서 다음 명제들과 다릅니다.
C Ms. Anscombe은 남성이다
D Ms. Anscombe은 남성이 아니다
여기에서 명제 C의 진리값과 명제 D의 진리값은 상호 간섭적입니다. 만약에 C가 참이라면 D는 거짓이며, C가 거짓이라면 D가 참입니다. 우리는 D의 진리값을 모르더라도 C의 진리값을 통해 D의 진리값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C의 진리값은 D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명제들은 상호 독립적이지 않으며, 요소명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D가 더 분석될 수 있다고 말하죠. 즉 이 명제는 (연산) not 과 C가 결합된 것입니다.
2. 언어의 한계 = 사고의 한계
이러한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있어서 언어란 인식의 한계이며, 세계의 한계입니다. 그는 좌우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생각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죠. 그런데 우리는 언어는 명제의 집합체이며, 명제는 사실을 기술하고, 그것의 의미(진리값)는 비교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명제라도 개개 요소명제의 진리값을 확인하면, 진리함수의 과정을 거쳐 진리값을 알아낼 수 있죠.
이러한 결론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는 위에 언급한 언어를 떠나서는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를 방해하는 하나의 장애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물을 직접 인식하고자 했죠. 그들이 갖고 있던 모델은 대상과 이를 인식하는 주체의 관계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본질과 이성을 말했고, 다른 이들은 현상과 감각을 말했죠. 어찌되었든 세계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도구로 그들이 사용한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어는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이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으며, 그 한계 속에서 사고한다는 생각은 칸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각종 범주들이 인간의 인식을 제한하며, 그 속에서 우리들이 사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물론 그에게서도 오성, 감성 같은 요소들이 중요하긴 합니다만. 비트겐슈타인을 해석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그를 이러한 칸트적인 모델에서 파악하고자 합니다. 칸트가 말한 범주들이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언어가 되는 셈이죠. 이 점에서 언어학적 칸트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데이빗 피어스(David Pears)가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 동조하건 안 하건 간에, '한계'는 '논고'를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관점과도 비슷해보이는데요, 중요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구별되는 어떠한 '생각'이라는 대상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하는 '생각'이 있고, 이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기에 언어는 생각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생각을 직접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죠. 소쉬르(F. Saussure)가 이러한 입장을 취합니다. 보통의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표현된 것과 별도로 존재하는 그 생각을 배제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머리 속에서 하는 생각은 언어로 표현된 것 자체와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언어로 표현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목소리(음성)와 글(기호)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죠. 그런데 언어와 별개로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이 단지 표현되는 형태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언어 없이도 생각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 차이가 있는 것이죠. 언어 없이 생각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능할 것 같지만, 정말로 시도해보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언어 없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만약에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요? 결국 가능한 것은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무언가(텔레파시 같은)일텐데, 이것이 명확성을 가질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말을 하면 사람을 사자로 둔갑시킬 수 있는 그러한 말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말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말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그 말을 가르쳐주면 그와 우리 모두 사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사자는 말을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수 없죠. 즉, 그 말을 알게 되는 순간 사자가 되며,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그 말을 알게 되었을까요?
언어없이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위의 예가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언어를 벗어나서 사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의 사고는 곧 언어의 한계라는 주장과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은 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건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할 뿐입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어찌되었든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으니까요. 참이건 거짓이건 간에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전체 혹은 전반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논고'의 머리말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또는 차라리, 생각이 아니라 사고의 표현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면 우리는 이 한계의 양 측면을 다 생각할 수 있어야 - 따라서 우리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제6장 철학자들이여 헛소리를 멈출지어다
탐구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존재(being)이며, 그 외에는 무(nothing) 밖에 없다. 다만 존재 뿐이고 그 이상은 무이다. 유일하게 존재만이며, 존재를 초월해서 무이다. 이러한 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 무는 부정하는 것, 즉 부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는 부정하는 것과 부정에 선행하여 존재한다. ... 우리들은 어디에서 무를 찾는가? 우리들은 어떻게 무를 발견하는가? ... 우리들은 무를 인식한다. ... 욕구는 무를 드러낸다. ... 우리들이 욕구하고 있는 그것과 욕구하게 만드는 그것은 실제로 무이다. 실로 무 자체는 현존한다. ... 이러한 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무는 스스로 무화시킨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자, 위의 글이 이해되십니까? 뭔가 대단한 걸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기가 힘듭니다.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요? 하지만 단지 전문적인 지식이 모자라서라고 하기에는 의심쩍은 구석이 있습니다. 위에서 쓰이는 용어들은 전문적이지도 않으며, 전문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난해한 물리학 이론이나 수학 이론을 볼 때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스스로의 무능력을 탓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이데거의 글이기 때문이죠. 그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우리가 멍청해서일 것입니다.
1. 형이상학은 헛소리 덩어리
그러나 카르납(Rudolf Carnap)은 하이데거의 말 중에 의미있는 문장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저 무의미한 말들의 나열일 뿐입니다. 뭔가 대단한 걸 얘기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카르납은 이를 보여주기 위한 설명을 시도하는데, 그 내용은 건너뛰고, 카르납이 가졌을 느낌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우리들은 하이데거의 인용문과 같은 성격의 글들을 여러 철학 서적에서 보게 됩니다.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말들이죠. 철학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도 대개 그럴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대체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무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뭔가 대단한 걸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입장 모두 이 말들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시하는 입장은 알아먹지 못할 말들의 나열에 이해를 포기하며, 대단하다고 보는 입장은 거창한 말들의 사용에 매료되어 이미지들을 소비할 뿐이죠.
그렇지만 이들 모두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합니다. 무시하는 사람들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심을 갖지 않을 뿐이죠. 왜냐하면 그들은 하이데거이고, 사르트르이며, 라캉이니까요. 그들은 엄청난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고 징징거려도 하는 수 없습니다.
자, 자격지심에서 벗어납시다. 그들의 말이 어려운 건 우리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서입니다.
세계는 존재이며, 삶이란 우주적인 욕망의 추구이다. 욕망의 끝없는 연쇄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고 있으며, 존재를 현존재로 존립시킨다.
이러한 말이 헛소리입니다. 온갖 거창한 말들이 사용되고 있지만, 대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애쓸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면 무의미하며, 헛소리일 뿐입니다.
카르납은 '사회학 이야기'편에서 자주 언급했던 비엔나 학파(논리 실증주의)의 핵심적인 인물입니다. 카르납과 비엔나 학파는 기존의 철학, 즉 형이상학에 반감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들은 미사여구만 찬란할 뿐 세계에 대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오히려 세계에 대한 올바른 기술은 과학이 수행하고 있죠. 철학이 할 일은 어떠한 말들이 세계를 기술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가려주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말들을 의미의 차원에 두고, 그렇지 않은 말들을 무의미의 차원으로 내쫓는 것이 철학이 할 일인 셈이죠. 이들이 보기에 형이상학은 무의미한 말들의 나열일 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와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입장은 결코 똑같지 않으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 한정한다면 그리 차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논고'에서 언어는 어디까지나 세계를 기술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죠.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인 주장들이 대개 헛소리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것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세계를 그리는 형식을 갖고있지 않으며, 명확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고 있지 않죠. 그러한 문장들은 무의미(nonsense)합니다. 의미가 전혀 없는 헛소리일 뿐이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벗어나 존재하는 그 무엇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문장은 말 그대로 헛소리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있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2. 논리학의 무의미
그런데 무의미한 문장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무의미한(nonsense) 문장과 의미가 없는(senseless)문장이죠. 무의미한 문장은 말그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의미가 있는 척 가장한다는 점에서 헛소리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형이상학들이 그러하죠.
철학적인 것들에 관해 씌어진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물음들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 없고, 다만 그것들의 무의미성을 확립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물음들이나 명제들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의 언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선이 미보다 다소 동일한가 하는 물음과 같은 종류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의미가 없는 문장의 예는
A 내일은 비가 오고 비가 오지 않는다
혹은
B 내일은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은 현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진리값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A는 실제로 비가 오고의 여부와 무관하게 거짓이며, B는 참입니다. 우리들은 명제란 세계를 기술하며,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진리값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위 문장들은 세계를 기술하지도 않으며, 세계와 비교하지 않고도 진리값을 결정할 수 있죠. 그 점에서 이 말들 또한 하나마나한 말들입니다. 그 점에서 의미가 없죠. 그런데 이것이 헛소리와 다른 이유는 이 문장들은 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제 A는 'A이고 A가 아니다'와 같은 형식으로, 명제 B는 'A이고 A이다'와 같은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A를 모순 명제, B를 동어반복 명제라 부를 수 있죠. 이들 명제 또한 프레게의 진리표에 나와있는 16가지의 경우의 수에 속하지만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A는 무조건 거짓, B는 무조건 참이니까요.
명제는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여 주는데, 동어 반복과 모순은 자기들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동어 반복은 아무런 진리 조건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어 반복은 무조건 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순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참이 아니다.
동어 반복과 모순은 뜻을 잃은 것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알 때, 내가 날씨에 관해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동어 반복과 모순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 그것들은 마치 '0'이 산수의 기호의 한 부분인 것처럼 기호의 한 부분이다.
논리학의 명제들이 항진 명제(동어반복과 같이 무조건 참인)라는 사실은 언어와 세계의 형식적-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준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이러한 형식의 명제들은 그 자체 현실을 그리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실질적인 정보도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이 논리학이 갖고 있는 성격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논리학이 다루는 것은 개별 요소명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과학의 영역이죠. 논리학은 요소명제들이 어떤 식으로 결합되었을 때 진리값이 어떻게 되는지를 말할 뿐입니다. 즉 명제가 결합되는 '형식'을 다루고 있죠. 형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셈입니다. 러셀의 '변항' 개념처럼 말이죠. 동어반복과 모순명제는 무조건 참이되고, 무조건 거짓이 되는 명제의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지만, 논리학의 성격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그 점에서 의미가 없지만, 헛소리는 아닌 셈이죠. 그래서 단순히 무의미(nonsense)가 아닌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senseless)것이라고 말하고 있죠. 사실 이 부분이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3. 남은 문제들
비트겐슈타인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명제들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며, 형이상학적인 말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시도이죠. 그래서 그 말들이 헛소리가 되는 것이고요.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인지, 즉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를 가름하는 기준은 그것이 세계를 (올바르게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그리는 것인가, 그림을 그리는 형식을 갖고 있는가입니다. 굉장히 검증주의적인 모습인데요, 카르납이 하이데거의 문장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죠. 즉, 비엔나 학파의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러. 나.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실제로 비엔나 학파를 이끌었던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에게 비트겐슈타인은 '당신들(비엔나 학파)은 나의 주장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죠. 슐릭은 '논고'의 주장이 모든 명제들은 자연과학과 같이 과학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거든요.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이 비트겐슈타인과 논리 실증주의의 관계를 미묘하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며, 그를 단순히 한 학파의 일원으로 머물지 않게 합니다.(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학파의 일원 비슷한 것도 아니었지만) 다음에 다룰 주제입니다.
제7장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추천 서적)
지금껏 이야기하는 가운데 나온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정리해봅시다.
1. 다시 정리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했으며 이를 명백히 할 경우 실제 철학적 문제들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해결해야할'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해소되어야'하죠. 철학적 문제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둘째로, '논고'에서 그가 보여주는 언어관은 세계와 상응하는 언어로, 이는 실재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고 표현합니다. 현실에 부합하면 참,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겠죠. 이는 단순한 비유의 수준을 넘어서 정말로 그림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셋째로,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이 원자론적입니다.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이며, 사실들은 사태들의 부분입니다. 언어도 이에 상응하여,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이며, 명제들은 요소 명제들로 구성된다는 입장으로 나아갑니다. 사태는 대상으로 구성되며, 언어의 수준에서 대상에 상응하는 것이 이름입니다.
이에 덧붙여 6편에서 다루었던 논리적 형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논리적 형식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동어반복과 모순과 같은 '무의미한' 명제 속에서 보여집니다. 말할 수는 없고, 다만 보여질 뿐인 수준에 속하는 것이죠.
2. '논고'의 형식
논고는 시편과 같은 형식을 갖고 있는데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
1.2 세계는 사실들로 나뉜다.
.
2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
2.0272 대상들의 배열이 사태를 형성한다.
.
이런 식으로 죽 이어집니다. 1이 1에 해당하는 말들의 꼭대기에 놓여있고, 나머지(1.1, 1.2 같은)는 하위 명제에 속하는 셈이죠. 6.521은 6.52에 속하고요. 사실 각 부분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만 모아도 대강의 얼개가 나옵니다.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2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4 사고는 뜻을 지닌 명제이다
5 명제는 요소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요소 명제는 자기 자신의 진리 함수이다.)
6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수식을 표현하기 어려워 생략)] 이다. 이것이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자, '논고'의 대부분은 말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져있습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마지막 문장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으며, 또한 가장 유명한 말이기도 하죠. 그리고 다른 명제들과 달리 7은 하위 명제들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갖는 의미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죠. 한 번 살펴봅시다.
참된 명제들의 총체는 전체 자연 과학이다.(4.11)
이것은 말해질 수 있는 부분에 속합니다. 물론 '거짓된 명제들' 또한 말해질 수 있는 것이고요. 세계에 대해서 참인 명제들과 거짓인 명제들, 그 명제들의 복합체들의 전체가 말해질 수 있는 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명제들이 기술하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은 '사태'로 통칭하고 있죠. 사실은 존립하는(참인) 사태를 의미하고. 반복해온 말입니다.
이제 논리학의 명제는 자연 과학적 명제의 성격을 부여받는데, 이는 그 명제가 잘못 파악되었음을 나타내는 확실한 표시이다.(6.111)
논리학의 명제들이 동어 반복들이라는 점은 언어의, 그리고 세계의, 형식적-논리적-속성들을 보여 준다.(6.12)
이것은 말해질 수 없는 부분에 속합니다. 간단히 말해, 어떤 명제는 말해질 수 있지만, 그 명제가 갖고 있는 논리적인 형식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4.1212)
이 말이 그러한 내용을 함축합니다.
즉, 비트겐슈타인이 하고자 하는 작업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철학은 생각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그음과 동시에, 생각될 수 없는 것에 한계를 그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안으로부터, 생각될 수 있는 것을 통하여, 생각될 수 없는 것을 한계지어야 할 것이다.(4.114)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4.115)
익히 살펴본 바,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의 그림 이론이라는 것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명제들은 사태들에 대한 일종의 그림이며, 그 그림들은 사실과 맞추어보아 참-거짓(존립과 비존립)이 가려지게 됩니다. 그러한 종류의 명제들이 바로 '말해질 수 있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어의 한계 내, 생각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속합니다. "좌우간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생각될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4.116)
그런데 논리학의 명제들은 그런 종류의 명제들이 아니며(이 점에서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동어반복적인 명제, 즉 항진 명제와 모순 명제) 이런 명제들은 세계와 무관하게 진리값을 갖습니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말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역시 이미 살펴본 것들입니다.
내일은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언제나 참인 명제(항진 명제)이지만, 그것이 전달해 주는 사실은 없습니다. 일상에서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이를 '무의미'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인 진리값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이 명제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명제들은 어떤 의미를 전달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미하지만,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명제들은 논리적인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 반복들이다."(6.1) "그러므로 논리학의 명제들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6.11)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미하지만, 논리적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가치 하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하는 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 과학의 명제들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6.53)
우리는 하이데거에 대한 카르납의 비판에서 이러한 입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형이상학적 진술들을 마치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함으로써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죠. 그러한 시도는 무의미합니다. 그런 식의 형이상학적 진술들은 '틀린'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7)
4. 말해질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실로 언표 불가능한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522)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6.52)
말해질 수 없는 것을 그는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것은 자연 과학의 雌┻?사실적인 것들)과는 엄격히 분리됩니다. 삶의 문제, 세계가 '왜' 있느냐, 도덕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이 그러하죠. 과학적인 대답이 윤리와 도덕에 대한 질문에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과학과 윤리를 엄격하게 분리하며, 이는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다만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의 구분에 상응합니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44)
자연 과학적인 명제들은 세계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느냐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마는 어떠어떠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죽었다' 등등.. 하지만 세계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답은 할 수 없죠. 도덕이나 윤리적인 문장들은 말해질 수 있는 영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불어 세계의 존재에 대한 물음(신비스러운 느낌)과 삶의 의미의 문제도 마찬가지이죠.
5. 규범과 강제
어떤 의미에서 그의 말은 '해야 한다'(must)는 말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너는 1, 2, 3 다음에 4라고 써야 해'라고 할 때, 이것이 사실에 대한 묘사를 하는 그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4라고 써야 한다'는 것은 사태의 그림을 그리는 그런 명제가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4라고 쓰는 결심을 하는 것은 그 행위가 자신에게 가져다 주는 의미의 수준에서 판단한 것이지, 산술의 체계에서 자연수의 집합은 1, 2, 3, 4의 순서대로 이어진다는 (어떤 의미에서의) 사실이 그 판단을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사실에 '따라서' 결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 판단을 '따라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죠. 이것이 위에 언급한,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6.52)
이 부분이 말하는 것입니다.
1+1을 계산한다고 할 때, 2라고 답해야만 한다, 혹은 '2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은 물리적인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체없이 1+1=3이라고 '쓸 수' 있으며, 그것을 물리적으로 제약하는 것은 없습니다. 뭐, 팔을 비틀어 3을 못 쓰게 물리적인 제약을 가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라고 쓸 수 밖에 없다'는 말은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에서 2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은 물리적인 강제, 필연적인 강제가 아니라 규범적인 강제입니다. 이 부분은 '논고'에서 논의하고 있지 않지만, 후기 저작인 '철학적 탐구'와 연계해서 생각해 볼 때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6. 최종 정리
정리하자면,
말해질 수 있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
으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논리학의 본질, 윤리, 세계의 존재, 삶의 의미와 같은 문제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 보여질 수 있는 것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말하려는 시도'는 헛소리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7). 윤리학을 일종의 과학으로 확립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막?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철학이 자연 과학적 방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책, 주장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의 말을 보면 논리 실증주의자들처럼 해석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위에 인용한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 과학의 명제들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6.53)
과 같은 부분이 그렇죠. 자연 과학의 명제들만이 유일하게 의미있는 말들이라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주장과 일치하니까요. 그러나 그가 철학이 자연과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님은 다음에서 드러납니다.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 과학의 명제들 - 그러므로 철학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어떤 것 -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6.53)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이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이 명료해짐이다.(4.112)
명제들을 분명히 하는 활동, 말한 것의 의미를 분명히 해 주는 활동이 철학의 과제입니다. 세상에 대한 참인 명제들을 말하는 것(자연 과학적 작업)은 철학과 무관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의 경계에 서서 그 한계를 분명히 획정해 주는 것이 철학이 할 일인 셈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비트겐슈타인도 자연 과학의 명제들만이 의미있다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그것(명제들)이 중요하며 다른 것들은 무의미하다고 말한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명제들은 다만 명제들일 뿐이고, 그것에 어떠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특별히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것은 다만 세계를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윤리나 종교와 같은 것들을 검증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무의미하다고 여긴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이것들이 무의미하지만, 그것은 이들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다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영역, 즉 말해질 수 있는 영역(언어의 한계)의 밖에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검증과 같은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종류가 다른 것들이라는 것이죠. 세번째로 인용하는,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6.52)
이 말이 결정적으로 보여줍니다.
7. '논고'의 언어관의 역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살펴봅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에 의하여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6.54)
유명한 사다리 비유입니다. '논고'의 언어관의 역설은 '논고' 자체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논고'의 명제들을 세계로 올바르게 보기 위해 필요한, 그러나 올라간 이후에는 불필요한 사다리에 비유하였죠. 그렇지만 어찌되었든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논리를 적용하면 '논고' 자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형이상학자들의 시도와 다르지 않은 셈입니다. 막스 블랙(Max Black)같은 사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논고의 명제들 자체를 항진명제나 모순명제와 같은 선험적 명제로 취급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것들은 경험적인 사실에 대해 말해주지 않지만, 언어의 문법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헛소리는 아니라는 것이죠. K. T. 판(K. T. Fann)은 비트겐슈타인이 독자들이 자신의 명제들이 헛소리임을 깨닫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깨닫기 전에는 세계를 올바르게 볼 수 없죠. 즉,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가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머리말에서
나에겐 여기서 전달된 사고들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나는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고 자신만만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끝부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 말끔하지 않음을 그 자신도 인식하고 있었죠. 비판적인 사람들에게는 사다리의 비유가 궁여지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철학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다는 (실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며 머리말을 끝맺고 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논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세계에 대한 어떠한 사실이 아니며,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할 뿐임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이 점에서 틀리지 않는다면, 이 작업의 가치는 둘째로, 이 작업은 문제들이 해결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적으냐 하는 걸 보여 준다는 점에 있다.
후기 : 추천 서적들
이번 글로 '논리-철학 논고'에 대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얼마 되지 않는 글로 '논고'를 전부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테지만, '대충 무슨 얘기군'이라는 수준에만 올라가도 좋은 게 아닐까요? 비록 쉽지는 않지만 원전에 도전하는 것도 좋을테고, 좋은 해설서를 읽는 것도 좋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함에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대적 배경도 그러하고. 이에 대한 훌륭한 글은
레이 몽크, '천재의 의무'(1, 2권)
이며, 그의 사고의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것은
앨런 재닉 & 스티븐 툴민,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비트겐슈타인은 왜?'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은 비트겐슈타인 사상의 오스트리아적인 분위기를 매우 강조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왜?' 는 분석 철학, 즉 러셀과 비엔나 학파와의 관계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존 히튼, '비트겐슈타인'(그림책)
은 쉬우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기에 좋습니다.
그의 철학에 대한 해설서로
M. K. 뮤니츠, '현대 분석 철학'
K. T. 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데이빗 피어스, '비트겐슈타인'
가 있으며, 뮤니츠의 책은 분석 철학 전반을 다루고 있어 강추합니다. 비트겐슈타인 부분도 훌륭합니다.
박영식, '비트겐슈타인 연구'
는 '논고'를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있어서, 정리하기에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저작을 읽는 게 좋겠죠. 다행히 대개의 저작들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논리-철학 논고'
'청갈색책'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철학적 탐구'
'문화와 가치'
'확실성에 관하여'
'쪽지'
'소품집'
'논고'를 읽는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박영식의 책과 이승종의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다면'(강추!!)을 추천합니다. '철학적 탐구'는 말은 쉬운데 이해하기가 꽤나 어렵습니다. '문화와 가치', '청갈색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은 수리철학을 다루고 있는데, 복잡한 수식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초보적인 수학지식만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상의 철학적인 소양이 필요하겠지만요.
- das En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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