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 양식발전사 문제 - 르네상스와 바로크 비교 by 하인리히 뵐플린
어느 시대든 대상을 사실적으로 '잘' 구현하기 위한 방식이 존재하였다. '미술사의 기초 개념'에서 뵐플린이 언급한 "인간은 항상 '원하는 대로' 볼 뿐이다"라는 말처럼 그 시대에 허락되는 회화적 양식만이 가능하였고 시대가 선택한 최선의 방식이 그 시대의 작가들에게 쓰였다.
하인리히 뵐플린은 자신의 책에서 개인과 민족적, 국가적인 특성을 아우르는 시대적인 특성, 즉 가장 일반적인 재현 형식들을 규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양식사적 조명은 개개인의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각 작가들이 아름다움을 구현하는데 까지 영향을 미친 주된 계기들을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근세 미술사 연구는 작가와 작품을 중심으로 집중 조명 되고 있었기에 그들을 모두 아우르는 양식사적인 접근, 즉 모든 작가를 다섯 가지 쌍에 의해 구분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미술사 조명 방식이라 하겠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미술이다. 이 두 시기는 뵐플린이 설정한 다섯 가지 구분의 기준에 의해 대조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는 다섯 가지 분류의 쌍을 소개하기에 앞서 두 시기는 절대 발전사적인 개념에 의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음을 언급하며 각 카테고리마다 절대 예술적 가치의 언급에 있어 무엇이 더하고 덜함이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뵐플린이 열거한 다섯 쌍의 개념은 1.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의 발전. 2. 평면적인 것에서 깊은 것으로의 발전. 3. 폐쇄적 형태에서 개방된 형태로의 발전. 4. 다원성에서 통일성으로의 발전. 5. 대상에 대한 절대적 명료성과 상대적 명료성. 이다. 다섯 가지 쌍에서 전자는 16세기에 후자는 17세기에 해당하는 특징으로 뵐플린의 말에 의하면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은 자연스러운 진행과정이고 역행하여 일어날 수 없다. 뵐플린의 개념쌍을 이해하여 작품을 분석함에 있어 주로 뒤러와 렘브란트의 작품을 예로 들었으나, 각 개념의 특징을 더 잘 드러내는 작품이 있을 경우 추가적으로 예시에 사용하였다.
1.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 뵐플린은 이 두 쌍을 촉각상과 시각상으로 구분한다. 촉각상이라는 것은 대상의 테두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여 눈으로 대상을 만지듯이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들을 서로 명료하게 구분된다. 시각상이라는 것은 더 이상 윤곽선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 대상의 명암이나 색채를 통해 그 어른거림을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적인 시각과 반대로 대상들의 형태 간에 구분이 명료하지 않아 형태는 연관성을 지니게 되고 사물 사이를 넘나드는 운동감이 포착된다.
* 뒤러와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통해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림 1. 뒤러 - 자화상 1498) (그림 2. 렘브란트 - 두 개의 원을 배경으로 한 자화상 1665)
콧날과 눈매의 뚜렷한 선, 머리카락의 세세한 컬과 옷 주름의 선명한 윤곽, 모자와 옷에서 드러나는 색채의 뚜렷한 구분 지어짐이 매우 명료하다. 따라서 검은색으로 칠해진 뒤 배경으로부터 뒤러의 몸은 완전하게 분리되어 나온다. 같은 장르로 자화상을 비교하는데 있어 렘브란트의 예가 가장 탁월하다고 하겠다.
뒤러의 자화상에서 뒤러의 신체가 배경과 뚜렷하게 구분되어 떨어져 나오는 것과 같은 시각적 파악이 렘브란트의 자화상에서는 불가능 하다. 옷의 주름 또한 어디에서 접혀 나오고 들어가는지, 어디까지가 그림자이고 어디까지가 옷의 본래 색채인지 알 수 없다. 팔레트를 든 손의 형태는 뭉개져 있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들어갔는지, 소매에 감추어 졌는지 불분명 하다. 하반신, 즉 조명을 받지 못한 부분은 배경의 벽과 함께 어둡게 처리되어 배경과 함께 스며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렘브란트의 손과 하반신이 그 어디쯤 '존재'하고 있음을 안다. 배경 또한 뒤러의 자화상에서 창틀과 창 밖의 풍경이 구분된 것과 대조적으로 배경을 두고 딱히 무어라 명료하게 얘기할 수 없다.
* 우리의 눈은 대상을 명료하게 인식 함에 있어 상대적인 거리를 갖는다. 하지만 선적인 것은 객관적 명료함을 추구하기 위해 이러한 상대적 거리감을 배제한다.
(그림 3. 반 아이크 - 성모자와 롤랭) (그림 4. 벨라스케스 – 시녀들)
뒤러의 자화상에서 뒤러의 옷깃의 윤곽과 머리칼의 컬이 극명하게 묘사 되었듯이 반 아이크의 성모자와 롤랭 작품에서는 객관적인 명료함을 추구하기 위해 명확하게 보기 위한 상대적인 거리 유지를 무시해버렸다. 근경에 있는 롤랭 신부와 성모자, 중간의 기둥, 그리고 원경의 배경은 모두 같은 시점에서 관찰 된 듯 똑같은 명료성을 지니고 있다. 마치 접사용 카메라를 이용해 대상의 모든 부분을 각기 촬영하여 하나로 합성해 놓은 듯 하다. 반면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는 그러한 명료함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벨라스케스는 대상을 묘사할 때 윤곽선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없다. 거울에 비친 멀리에 있는 왕과 왕비의 상은 거울을 한번 거친 이미지라는 것을 감안함해서 보더라도 대상의 윤곽선을 근경에 있는 공주와 시녀들의 모습에 비해 상대적으로 흩트려 놓는 것으로 '멀리 있음'을 표현하였다. 공주의 드레스의 세세한 장식이나 머리카락의 표현 또한 확대해서 보면 그저 불규칙적인 붓 터치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특정 거리에서 바라 보았을 때 그 붓 터치들이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 할 수 있다.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 까지 한다.
* 빛의 사용됨에 따라서도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차이는 드러난다.
(그림 5. 뒤러 - 성 제롬) (그림 6. 렘브란트 - Philosopher in meditation)
같은 소재가 다뤄진 뒤러의 '성 제롬'과 렘브란트의 'Philosopher in meditation'을 보자. 비슷한 공간, 같은 방향에서 들어오는 빛이지만 뒤러의 작품에서의 빛은 대상의 '꺾어짐'을 극명하게 하여 윤관선을 강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반면 렘브란트의 작품에서의 빛은 조형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몽롱함을 만들어낸다. 빛을 통해 대상들 간의 구분이 사라지고 서로 연계되며 운동감을 갖고 흐른다.
2. 평면성과 깊이감
: 16세기 화가들은 분명 깊이감을 드러내는 원근법 등의 방식과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 속에 대상들을 평면적인 위치에 배치시켜 화면 속에 깊은 공간감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화면의 프레임을 시작으로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에 반해 17세기에는 이러한 평면성을 배제하며 사선구도, 원근의 강조, 색채의 변화와 명암, 빛의 조작 등으로 어떻게 해서든 감상자를 프레임 안쪽의 깊숙한 세계로 그 시선을 안내한다.
(그림 7.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최후의 만찬)
(그림 8. 틴토레토 -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보면 테이블, 벽과 창문, 그리고 원경의 배경으로 3단의 평면으로
구분되고 각 평면은 화면의 프레임과 나란히 수평 위에 놓였다. 철저한 원근법과 투시도법이 사용되었지만 좌우 대칭을 이루는 이 투시도법은 철저하게 짜 맞춰진 프레임과의 수평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틴토레토는 16세기의 화가이지만 17세기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점에서 17세기 깊이감있는 작품의 예로 선정하였다. 틴토레토의 작품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구도이다. 오른쪽 끝에서 왼쪽 위로 이어진 테이블을 따라 인물들이 산발적으로 배치되었으며 투시도법의 소실점 또한 한쪽으로 치우쳐있다.
* 아담과 이브라는 2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소재 또한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그림 9. 뒤러 - 아담과 이브)
(그림 10. 틴토레토 - 아담과 이브)
뒤러의 작품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동일 선상에 서있다. 나무 또한 마찬가지이다. 뒤 배경에는 숲이 나타나지만 나무들의 배열을 통해 원근감이나 깊이감을 느낄 수 없다. 게다가 화면의 아래 수평선과 같은 선상에 고양이를 가로로 눕혀 놓아 수평적 구도를 다시 한번 반복하여 강조한다. 마치 두 인물이 좁은 폭의 무대 위에 서 있고 그 뒤로는 나무가 그려진 휘장이 드리워진 듯 하다. 반면 틴토레토의 그림을 보면 가장 근경에 그려진 아담을 시작으로 이브를 거쳐 배경의 둔덕을 지나 저 멀리의 하늘 배경까지 아주 깊숙하게 시선이 들어간다. 아담과 이브가 앉아 있는 석단의 사선 배치 또한 병립 배치로 인한 평면적 인상을 기피하는 장치로 보인다.
3. 폐쇄된 형태와 개방된 형태
: 16세기의 작품에서는 수직과 수평의 요소들을 사용하여 주제를 강조했다. 혹 중앙의 축이 없이 화면이 구성되는 경에도 좌우의 균형이 맞춰졌다. 이러한 균형에 화폭의 수직, 수평의 프레임 또한 일조한다. 17세기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수직과 수평의 두드러짐, 중심 축, 화폭과의 연계성을 어떻게 해서든지 기피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16세기 작품에서는 구축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며 잘 짜여진 화면인듯한 느낌이 드는 반면 17세기 작품에서는 마치 우연의 순간을 포착한 듯 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게 된다. 뵐플린이 말하는 개방된 형태는 구축성과 비구축성 따위라기보다는 형태나 화면 전체가 특별히 ‘의도적’으로 고안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은 수직 수평의 구도, 정대칭 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림 11. 라파엘로 - 아테네학당)
(그림 12. 렘브란트 - 엠마오의 저녁식사)
(그림 13. 카라바찌오 - 성 토마의 의심)
화폭의 수평과 맞춰 배치된 바닥의 무늬와 뒤 배경에 사용된 건축물의 수직은 화면을 정리하는 느낌을 준다. 더군다나 인물의 배열 또한 두 단계로 나뉘어 동일한 위치에, 정해진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모두가 자유로운 제스처와 표정을 하고 있지만 누구 하나 정해진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소실점은 정 중앙을 향하고 있으며 좌우에 건축물의 부조가 놓임으로써 화면의 균형을 맞춘다. 인물의 구성 또한 좌우의 무게감이 치우치지 않도록 조정되어 있다. 하지만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오면 십자가상이나 최후의 심판 등의 어쩔 수 없는 대칭구도가 사용되더라도 대칭적 구도가 이전처럼 강력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17세기에 들어서면 16세기에 추구했던 이러한 요소들이 철저히 배제되며, 화면의 균형을 깨기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 렘브란트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는 분명 탁자의 수평과 벽체의 수직으로 인해 중심축이 강조될 수 밖에 없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의 선택에 있어 화면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그 중심축을 정 중앙에 두지 않았다.
카라바지오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16세기의 작품에서 빛의 사용함에 있어 어느 부분이 강조되면 그에 대응하는 빛을 꼭 등장시킨 데 반해 카라바지오의 '성 토마의 의심'에서는 핀 조명을 내린 듯 그림의 주제가 되는 부분만을 강조한다. 이 그림에서 예수를 비롯한 3사람의 배치는 그림을 중심으로 균형적이지만 광원의 극적인 사용으로 인해 전혀 대칭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한 곳에 몰려 있음으로 화면의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급격하게 쏠린다.
4. 다원성과 통일성
: 다원성과 통일성은 상대적인 구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차이는 결국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보는 시각과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의 대비이다. 첫 번째 구분의 쌍인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구분과 비슷하게 대상의 얼굴에서 눈코 입을 볼 때 코와 눈매의 윤곽을 볼과 뚜렷하게 구분하여 보는 것과 얼굴 전체적인 형태를 흐르듯이 보는 것의 차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 이러한 다원성과 통일성의 특징은 많은 인물을 다룬 그림에서 잘 드러난다.
(그림 14. 미켈란젤로 - 최후의 심판)
(그림 15. 렘브란트 – 야경)
미켈란젤로의 그림의 수 많은 인물들은 각기 다른 포즈로 뒤엉켜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각자의 제스처는 다른 인물상의 제스처에 방해되지 않도록 아주 정교하게 짜여져 있어 마치 하나의 법칙 하에 놓여 있는 것처럼 각자가 도드라짐과 동시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브란트의 그림은 그러한 하나하나의 두드러짐이 보이지 않는다. 군상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며 서로에게 스며들어 융합되어 있다. 특히나 조명의 극적인 효과를 아주 잘 사용한 렘브란트의 그림은 빛이 어느 한 부분을 극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군상의 덩어리감을 강조하고 빛이 내려지지 않은 부분은 서로 얽혀 들어가며 정확히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개별적인 인물인지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어 개별 대상의 윤곽선보다는 빛을 통해 그 전체적인 분위기를 인식하게 한다.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룬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그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림 16. 루벤스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그림 17. 렘브란트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려짐에 하나같이 동참한다. 어느 누구 하나 쓸데 없이 등장시키는 법 없이 각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을 하며 뚜렷이 '등장 인물' 로써 존재한다. 반면 렘브란트의 그림에서의 군중은 그저 거기에 '군상이 있음'만 인지 될 뿐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에게만 합리적이지 않은 묘한 광원을 선사 함으로써 그림의 주제를 부각시켰고 그로 인해 어둠에 묻힌 인물들은 그 위계를 잃어 버리고 그림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빛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렘브란트가 빛을 이용해 강조하고자 했던 인물상을 부각시키는데 빛과 함께 일조하게 된다. 루벤스의 동참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색채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16세기에는 각 색채가 대비됨과 동시에 통일감과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체계아래 명료하게 자리매김해 있다. 반면 17세기 바로크 양식에서는 색채들이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고요하게 운동하여 전체를 아우르는 빛을 한 꺼풀 덮어 쓰고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또한 구도 면에서 좌우 대칭이나 중앙집중 성을 벗어나려 했던 바로크적 특징처럼 색채에 있어서도 어느 한 색채를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이었다면 어느 색채 하나만 불거져 나오는 도발적인 면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크 회화에서는 더 이상 특정 색채의 도드라짐에 있어 그에 대응하여 균형을 이룰 만한 색채가 필수적이지 않다.
* 전신상 작품 또한 장신구와 각 신체 부위가 작용하는 것으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림 18. 티치아노 – 우르비노의 비너스)
(그림 19. 벨라스케스 – 비너스)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비너스는 완벽하게 마련된 실내에 자신의 신체를 빠짐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두 팔과 다리, 얼굴과 머리카락, 그리고 다리를 꼬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쪽 발목 뒤로 드러낸 오른쪽 엄지발가락까지, 각 신체 부위는 완벽하게 연결되며 어느 것 하나 뒤쳐짐이 없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신체의 몇 부분만 보여줄 뿐 인체의 각 부분을 똑같이 다루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살짝 감춰지고 가려진 신체 덕분에 벨라스케스의 비너스는 보다 더 운동감 있게 느껴지며 몇몇 특징적인 부분에 악센트가 가해졌다. 티치아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각 부분이 완결성을 지니고 있어서 따로 떼어 놓아도 그 의미가 소멸하지 않지만 벨라스케스의 비너스나 프랑수아 부셰의 '누워 있는 소녀'의 그림 같은 경우에는 각 부분이 통일체 안에 서로 의지하고 있어 한 부분을 떼어서 보려 하면 그 의미가 소멸되어 버린다.
5. 명료성과 불명료성
: 르네상스 시대의 명료성이란 늘 형태를 완벽하게 드러내며 모든 재현 수단은 이 형태를 완벽하게 드러냄에 동원된다. 반면 바로크의 명료함은 르네상스와 같은 적나라함은 의도적으로 기피한다. 오히려 형태를 모호하게 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았으며 그것은 운동감으로 만들어지는 불명확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명료함은 르네상스 회화에 있어서의 명료함에 상대적으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본래부터 르네상스가 명료함의 절대적인 개념이 아님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6세기와 17세기의 명료함 추구의 차이는 실루엣을 비교하는 것으로 뚜렷하게 확인된다. 4번째의 개념이었던 다원성과 통일성에서의 개념과 상응하는 것으로 17세기에 추구한 상대적인 불명료함은 감상자에게 해당 형태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뚜렷한 형태가 결코 화면 안에서 압도적인 요소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온갖 장치가 설치된다.
* 빛의 사용은 이번 개념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발견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고전적 시기에는 대상을 명료하게 하지 못하는 상황은 고려되지 않았다. 대신 밤 풍경이 그려지더라도 빛이 없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대상이 뚜렷한 형태를 지니게 그려졌다. 색채 또한 마찬가지로 대상을 뚜렷이 드러나게 하는 재현요소로만 작용하였다. 하지만 바로크미술에서는 어둠 속의 대상은 어렴풋이 우리 눈이 인식 가능한 부분까지만 묘사될 뿐이며 색채는 더 이상 형태에 종속된 개념이 아닌 대상을 운동하게 하며 유동성 안에서 대상을 드러내는 주된 성격을 가진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앞서 예로 들었던 뒤러의 성 제롬과 렘브란트의 Philosopher in meditation도 그 특징을 극명히 보여주는 비교 쌍이 될 수 있겠다. 또한 렘브란트의 야경도 어둠을 다룬 바로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
'이미지의 삶과 죽음 > 회화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예술품 뒤에 숨은 권력자들을 생각하다 [1] - 바로크 · 로코코 특별전 (0) | 2016.08.30 |
---|---|
[스크랩]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_기획특별전 리히텐슈타인박물관 명품전 전시리뷰 [2015 블로그기자 김혜지] (0) | 2016.08.30 |
[스크랩] 서양미술 바로크의 거장 (0) | 2016.08.29 |
[스크랩] 바로크 미술의 거장 (베르니니) (0) | 2016.08.29 |
[스크랩] 테마로 보는 미술(시조와 장르) / 바로크 미술 (0) | 2016.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