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삶과 죽음/회화의 세계

[스크랩] 예술품 뒤에 숨은 권력자들을 생각하다 [1] - 바로크 · 로코코 특별전

ddolappa 2016. 8. 30. 00:13

종교적 권위를 내세운 중세의 무거운 예술에 숨이 막힌 사람들은 인간, 가벼움, 그리고 그리스 · 로마로 대표되는 고전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 운동으로 이어진다. 이윽고 종교 개혁의 광풍이 불어닥쳤고 청교도 혁명, 네덜란드 독립 전쟁,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 등 갖가지 종교 전쟁이 유럽을 휩쓸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 기존의 최고 권력자였던 교회는 차츰 몰락하고, 왕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왕은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해 너무 '가벼워진' 사회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왕을 찬양하고 권위와 질서를 강조하는 장엄한 분위기의 예술이 주류로 자리잡았으니 이는 곧 바로크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콘도르 상. 작센의 선제후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제작된 자기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서막은 루이 14세가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보는 사람의 기를 꺾게 만드는 대규모의 웅장하고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했고, 그곳에서 왕의 권위와 위엄을 한껏 과시했다. 이런 그의 절대 권력은 타국의 군주들로 하여금 부러움을 사게 했고, 여러 국가의 왕정들은 프랑스의 이러한 사례를 한껏 모방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러시아의 표트르 1세 및 예카테리나 2세가 대표적이었으며, 이 시대의 예술-건축, 미술, 음악은 모두 왕을 찬양하는 쪽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직접적으로는 왕을 찬양하지 않더라도 '장엄'과 '웅장'은 이 시대의 주요 컨셉이었고, 이는 헨델과 바흐로 대표되는 바로크 음악에서 더욱 자세히 느낄 수 있다.

 

 

△ 성체 안치기. 요하네스 체켈에 의해 1705년에 제작된 용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18세기에 들어와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의 패배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절대 왕정은 점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바로크 시대의 너무 '무거운' 분위기에 차츰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대신 귀족들을 중심으로 가볍고 세밀하고 우아하고 아기자기한 것에 심취하기 시작했으니 이는 로코코 시대로의 전환으로 이어진다. 루이 15세의 즉위와 함께 섭정을 시작한 오를레앙 공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크 시대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궁정을 옮기는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궁정 문화의 주류는 바로크에서 로코코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로코코 시대는 18세기 예술의 상징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바로크와 로코코는 당시 사회를 지배한 기득권층의 주도 하에 일어난 선풍이었다.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장엄'과 '웅장'을 강조한 왕의 의도하에 꽃피운 것이 바로크요, 이러한 무거운 권위에 싫증을 느껴서 자기들만의 세밀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했던 귀족의 의도하에 탄생한 것이 로코코였다.

 

 

△ 찻잔 세트. 세브르 자기 공장에서 1758년에 제작되었다.

 

 

이렇게 사설을 늘여놓은 이유는, 한 시대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품 자체뿐만 아니라 그 예술품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시대적 배경까지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예술품 속에 스며든 시대 정신에 대한 탐구 없이 단순히 예술품의 외양만을 보게 된다면, 이는 나무만을 볼 뿐 숲은 보지 못하는 것이요, 따라서 개별 예술품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고 있을지언정 이것들을 통찰해서 종합적으로는 볼 수 없는 축소된 시야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8월 2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바로크 로코코 시대의 궁정문화' 특별전시회를, 그러한 예술품들을 만들라고 명령했을 절대 권력자들을 생각하면서 둘러본다면 더욱 알찬 감상이 가능할 것이다.

 

 

본 기사에서는 '바로크 로코코 시대의 궁정문화' 특별전시회에서 전시되고 있는 유물들과 관련된 절대 권력자들-루이 14세, 찰스 2세, 표트르 1세, 프리드리히 2세, 퐁파두르 부인의 행적을 두 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루이 14세 (생몰 : 1638년 ~ 1715년)

 

 

△ 루이 14세의 상아 초상 조각. 미셸 모야르에 의해 1683년경에 제작되었다.

 

 

전 유럽에 바로크 시대의 시작을 알린 프랑스의 절대 군주이다. 1643년 5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뒤 프롱드의 난 등 귀족 세력가들의 저항을 받아서 프랑스 각지로 쫓겨다녀야 할만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마자랭 추기경의 도움으로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잘 돌파할 수 있었고, 마자랭 사후인 1661년 본격적으로 혼자 권력을 행사하게 된 그는 귀족의 힘을 본격적으로 제압해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베르사유 궁전을 세우는 것이었다.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는 루이 13세 때 다소 확장되기는 했으나 파리에 비하면 여전히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힘이 아직까지 강하게 남아 있는 파리를 많이 의식했던 루이 14세에게 베르사유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할 훌륭한 곳이었기에, 그는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되자마자 베르사유로 궁정을 옮길 준비를 했던 것이다. 왕의 권위를 최대한 돋보이기 위해 그는 당대의 최고 기술자, 예술가들을 불러모아 베르사유 궁전 공사 현장에 보냈고, 이런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베르사유 궁전은 곧 유럽 최고의 궁전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베르사유 궁전 공사 외에도 루이 14세는 콜베르라는 유능한 재상을 등용하여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펴게 했고, 해외 식민지 개척 또한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나라 살림이 부유해지는 효과로 이어졌고, 덕분에 왕은 귀족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정치를 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귀족 세력가들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러들여 향락에 빠지게 했는데, 왕의 비호를 받으면서 사치스런 생활에 푹 빠진 귀족들은 점차 왕의 충견으로 전락하고 만다. 일부 불만이 있는 귀족들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루이 14세는 전쟁을 선택했는데, 외국과 수많은 전쟁을 치룸으로써 그들이 가진 불만의 방향을 해외로 돌리게 하였다. 이런 다양한 정치적 행동을 통해 루이 14세는 유럽 제일의 절대 군주로서 타 군주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동시에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을 억누르고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전쟁을 너무 많이 벌임으로써 나라의 살림은 차츰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욱이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수많은 신교도 기술자들이 영국과 네덜란드로 망명을 하게 되었고, 이런 인적 자원 손실은 프랑스에게 엄청난 타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에게 결정적인 정치적 실패를 안긴 사건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었는데, 당시 그는 자신의 손자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고 후에 그로 하여금 프랑스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치고자 하는 거대한 야심이 있었다. 이는 타국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프랑스 · 스페인 동맹군과 영국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네덜란드 · 포르투갈 동맹군 간의 국제전, 즉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스페인과 한 나라가 되는 길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의 여러 해외 식민지도 빼앗기는 등 루이 14세가 입은 손실은 실로 막대했다. 루이 14세는 패전의 울분 속에 종전 1년 후인 1715년에 세상을 뜨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 절대 왕정의 붕괴, 더 나아가서는 바로크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 찰스 2세 (생몰 : 1630년 ~ 1685년)

 

 

△ 찰스 2세의 흉상. 영국의 군주들 치고는 절대 권력을 누려왔으나, 이는 명예 혁명 발발의 시초로 이어지게 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일궈놓은 궁정 문화를 영국으로 유입시켜서, 영국의 바로크 문화를 꽃피운 군주이다. 청교도 혁명이라는 역사의 광풍 속에 왕세자 시절을 보냈다. 당시 그는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을 상대로 아버지 찰스 1세와 함께 필사적으로 대적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버지의 처형과 두 번의 망명이라는 시련을 게 된다. 프랑스로 망명한 뒤에도 이후 독일과 네덜란드를 전전하는 고생의 시절을 보냈지만, 이런 다양하고 국제적인 경험은 그의 정치적 시야를 넓혀주어서 향후 그가 영국의 절대 군주로 자리잡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크롬웰의 엄격한 청교도식 정치에 싫증을 느낀 영국 국민들은 왕의 통치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크롬웰 사후인 1660년 드디어 찰스 2세가 영국으로 귀환하자 그들은 새 왕을 위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한 청교도 의원들 몇몇을 사형시키고 크롬웰의 시신을 부관참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타 정치범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어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드높였다.

 

 

찰스 2세의 즉위는 영국 내부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했던 찰스 2세는 영국으로 귀환하면서 프랑스의 다양한 생활 양식들을 함께 들여왔는데, 이는 청교도 시대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 염증이 났던 영국 국민들에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연극 분야에서의 변화가 두드러졌는데, 프랑스 극의 영향으로 인해 영국 극장이 새 모습을 띠게 된 것이었다. 여배우가 등장한 것이며, 실내 극장이 등장한 것이며, 커튼 · 조명 등 여러 기구를 사용한 것 이 모두 왕정복고 시대로의 전환에 따른 극장 변화의 예이다. 철학 또한 홉스의 왕권 신수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을 경험한 찰스 2세의 전폭적인 후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오래 생활한 찰스 2세였기에 그의 종교는 가톨릭, 즉 구교였지만 영국 국민과 의회의 눈치 때문에 섣불리 자신이 구교도임을 밝히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성공회가 아닌 교도, 즉 비국교도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긴 했지만, 이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서 구교도들도 마음껏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고자 하였다. 이에 반발한 의회는 심사율과 인신보호법을 제정함으로써 왕의 전제 권력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국민들의 전폭적인 성원을 등에 업고 있는 찰스 2세라 찰스 1세 시대 때처럼 왕에게 대놓고 저항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을 놓고 토리당과 휘그당으로 의회가 분열되었고, 이러는 동안 찰스 2세는 영국의 군주들 치고는 상당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절대 권력은 왕권에 대한 반발, 종교적 갈등과 같은 불씨를 내포하고 있었고, 이는 결국 제임스 2세 때인 1688년 명예 혁명이라는 거대한 불길로 번지게 되었다.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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