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삶과 죽음/회화의 세계

[스크랩] 예술품 뒤에 숨은 권력자들을 생각하다 [2] - 바로크 · 로코코 특별전

ddolappa 2016. 8. 30. 00:14

특정 문화가 특정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기 위한 요건은 무엇일까. 일단 그러한 문화를 창출해내는 능력있는 문화인들-화가, 작가, 음악가의 존재가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가 특정 시대의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적절한 시대 상황이 연출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거기다가 그 문화의 탄생과 지속을 위한 나름의 사상적 기반, 즉 시대 정신 역시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이처럼 문화사를 다루는 데 있어 문화인, 시대 상황, 그리고 시대 정신은 중요하게 취급되며, 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 또한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들 못지않게 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눈길을 그리 많이 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후원자'이다. 문화를 창조하는 데 후원자들은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화가가,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작가가 할 일이지, 후원자는 이들의 작업을 그저 간접적으로 도와줄 뿐이다. 후원자들은 문화인, 시대 상황, 그리고 시대 정신의 뒤에 숨어있으니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특정 문화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어떤 모습을 취하는가, 그리고 왜 사라졌는가의 문제는 후원자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후원자를 쉬이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세의 성직자, 바로크의 절대 군주, 로코코의 귀족, 19세기의 시민 계급이라는 존재에 따라 문화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앞서 필자가 한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크 로코코 시대의 궁정문화' 특별전시회는 문화의 형성에 있어 후원자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됨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의 뒤에 숨은 채 이들을 배후 조종해가며 문화의 창조를 유도했을 절대 군주 및 귀족에 약간의 관심을 기울인다면, 전시실의 각종 화려한 유물들을 보는 시각의 깊이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킬 것이다.



본 기사는 후원자에 대한 독자분들의 이해를 조금이라도 도울 의도에서 작성한 것이다. 1부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바로크 시대를 연 루이 14세와 찰스 2세에 대해 다뤘다면, 이번 2부에서는 로코코 시대의 주요 후원자라 할 수 있는 퐁파두르 부인, 그리고 서구의 궁정 문화를 자국에 유입시켜서 권위를 드높인 프리드리히 2세, 표트르 1세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보기로 하겠다.



3. 표트르 1세 (생몰 : 1672년 ~ 1725년)



△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흑인 시동. 인종을 초월한 표트르 1세의 자비심을 한껏 부각시켰다.



러시아를 유럽의 주역으로 올려놓는 데 큰 공헌을 한 군주이다. 1682년 10살의 나이로 이복형 이반 5세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이복누나 소피아의 섭정을 받아야만 했다. 그의 집권 초기는 소피아와의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어, 한때 그녀에 의해 유폐당하는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소외당하는 동안 표트르 1세는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면서 각종 파격적인 기행을 벌이고 다녔는데, 이는 소피아를 비롯한 정적들의 자신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뜨림과 동시에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 형성을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1689년 드디어 소피아를 물리치고 정치적 실권을 쥔 그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 즉 터키와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표트르 1세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1697년 마침내 그는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직접 서유럽으로 가서 온갖 문물들을 섭렵한다. 대학, 박물관, 천문대 등 여러 지식의 보고를 찾아 러시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되어 있는 서구의 학문을 익혔으며, 심지어는 조선소의 직공이 되어 직접 배를 만드는 수고를 하면서 항해술, 조선술, 포술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이런 그의 경험은 후에 강력한 함대를 조성해서 스웨덴을 격파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1698년 소피아가 근위대를 움직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치자, 표트르 1세는 급히 러시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소피아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뒤 그는 러시아의 오랜 풍속을 단숨에 서구화시키는 개혁에 착수하게 된다. 귀족들의 긴 수염을 손수 잘랐고, 귀족들에게 외국어 교육을 강제시켰으며, 복장도 서유럽식으로 입게 하는 등 수백 년 간 이어져온 오랜 전통을 하루 아침에 뒤집으려고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내부적으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타개할 수단으로 표트르 1세는 전쟁을 선택했다. 당시 북유럽을 주름잡고 있던 강대국은 스웨덴이었는데, 표트르 1세으로서는 스웨덴을 물리쳐야 러시아의 개혁과 팽창이라는 작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덴마크, 폴란드와 공조한 표트르 1세는 1700년 스웨덴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니 곧 '북방전쟁'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전황이 불리하였으나 1709년 폴타바 전투, 1714년 항코 해전에서 스웨덴 군을 궤멸시킴으로써 20여년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전쟁의 기간 동안 표트르 1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신도시 건설을 계획하게 되니, 이렇게 해서 탄생한 도시가 곧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스웨덴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늪지대 위에 세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초였는데, 표트르 1세는 이곳을 단순한 방어진지 역할을 넘어 '새로운 러시아'의 수도로 삼고자 야심찬 공사를 벌이게 된다. 서유럽의 훌륭한 기술자들을 데려와서 서유럽 식으로 궁전을 만들고 도시를 조성하게 되니, 이 과정에서 서구의 바로크 문화가 러시아에 유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는 황제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최대한 웅장하게 조성되었다. 이렇게 차르의 도시가 어느 정도 그 면모를 갖추게 되자 표트르 1세는 1712년 보수 성향의 귀족들이 아직 득세하고 있던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이전하게 된다.



이처럼 표트르 1세가 걸어온 길은 루이 14세의 그것과 비슷하다. 둘 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부국강병과 절대 왕권을 확립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기는 불만들은 외국과의 전쟁을 통해 해결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새 도시를 개발했고 궁정을 그곳으로 옮김으로써 보수 귀족층과의 대결에서 한층 유리한 고지를 점하였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엄청난 체제 모순을 안고 있었다는 점 또한 닮은꼴이다. 표트르 1세의 개혁은 러시아를 유럽의 주역으로 부상시켰지만, 농노제 등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정치적 · 사상적 근대화 또한 큰 진전이 없었다. 루이 14세의 절대 왕권이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불길로 연결됐듯이, 표트르 1세가 이룩한 '불완전한' 개혁은 결국 300년 뒤에 일어나는 볼셰비키 혁명의 씨앗이 되고 만다.



4. 프리드리히 2세 (생몰 : 1712년 ~ 1786년)



△ 코담뱃값. 코담배를 애용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300개가 넘는 코담뱃값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프로이센을 강대국의 반열에 올린 대표적인 계몽전제군주이다.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지나친 기대와 가혹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학문과 예술을 경시하고 귀족 세력들을 억눌렀으며 상비군 확충 등 왕권 강화를 위해 거침없는 정책을 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과격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도 자기처럼 행동하기를 원해서, 어린 아들에게 군인 제복을 입게 한 뒤 함께 말을 타며 군대를 사열하곤 했다. 스파르타식으로 프리드리히 2세를 가르쳤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들에 대한 폭행 또한 서슴치 않았는데, 그는 이런 강압적인 교육을 통해 아들도 자기처럼 '피도 눈물도 없이' 프로이센을 철권 통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래 예술가적 기질이 있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 몰래 예술을 즐기고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바흐, 헨델, 비발디로 대표되는 바로크 음악에 심취했으며, 본인 또한 뛰어난 플룻 연주자이기도 했다. 미술과 철학에도 크나큰 관심을 보여서, 마키아벨리 등 르네상스 철학자들을 연구하고 이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책을 스스로 저술할 정도였다. 또한 당대 가장 유명한 철학자였던 볼테르와도 서신 왕래를 즐겨 하는 등 프리드리히 2세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는 정반대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런 아들의 '탈선 행위'를 적발할 때마다 크게 나무랐고, 이에 반항심을 품은 프리드리히 2세는 국외 탈출까지 도모하다가 붙잡혀서 한때 처형될 위기까지 맞게 된다.



1740년 프로이센의 왕으로 즉위한 뒤 그는 문화 부흥 정책을 추진한다. 오페라 극장 건설, 베를린 아카데미 부활, 언론 검열 폐지 등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베를린은 곧 '북방의 아테네'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된다. 그는 해묵은 종교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독일은 30년 전쟁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구교와 신교 간의 대립이 심했는데, 신교가 우세했던 프로이센에서는 구교도들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히 이루어져 이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 차별 금지 정책을 폄으로써 구교도들의 불만을 해소시켰고, 이는 왕에 대한 지지도 상승, 내부 단결력 강화로 이어져 향후 큰 반발 없이 국방력을 증가시킬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내부의 힘을 기른 프리드리히 2세가 그 다음에 벌인 일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녔으되 아버지가 벌인 국방력 강화 정책에는 심히 공감하였던 그였다. 그는 프로이센을 중부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터줏대감이었던 오스트리아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마침 오스트리아의 여걸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이어받게 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구실삼아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니 곧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발발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자국의 영토로 삼아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다. 복수심에 찬 마리아 테레지아는 숙적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프리드리히 2세는 재차 전쟁을 선언하니 곧 '7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에서 한때 베를린이 포위당했고 프리드리히 2세 본인부터가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된 때도 있었으나, 다소의 행운이 작용함으로써 결국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쟁을 마무리짓는다.



프리드리히 2세의 존재 덕분에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 제후국들을 이끄는 쌍두마차의 하나가 될 수 있었고, 근 100년 후에는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된다. 그러나 예술을 사랑하고 평화를 지향한다고 공공연히 떠든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이웃과 잦은 전쟁을 벌인 그의 행적은 당시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이는 독일에 거주하고 있던 수많은 사상가, 예술가들이 프랑스로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처럼 총칼로 이웃을 제압해간 프리드리히 2세의 정책 방향은 이후 비스마르크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이런 호전적인 경향은 결국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진다.



5. 퐁파두르 부인 (생몰 : 1721년 ~ 1764년)



△ 퐁파두르 후작 부인. 책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교양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프랑스의 로코코 시대를 이끈, 당시 유행을 선도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잔 앙투아네트로, 그녀의 출신은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였다. 이런 '비천한' 출신 성분은 그녀의 가장 큰 핸디캡으로 작용하여 이후 궁정 생활에 있어 수많은 귀족 부인들의 멸시를 받게 된다. 어쨌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택에 그녀는 수녀원에서 다양한 예술과 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교양 수준은 당시 여자들치고는 상당한 수준으로까지 올라가게 된다. 거기다가 빼어난 외모에 능수능란한 화술은 사교계에서 그녀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하였고, 이는 곧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루이 15세의 정식 왕비는 폴란드 출신이었던 마리 레진스카였는데, 복잡하고 변덕이 심한 성격인 루이 15세와 단순하고 조용한 성격인 레진스카 왕비 간의 관계는 별로 좋지 못했다. 게다가 결혼 생활이 10년을 넘어서자 이들 부부는 극심한 권태기에 시달렸다. 정력적이었던 루이 15세는 왕비를 대신하여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줄 여러 여자들을 섭렵하기 시작했고, 이랬던 그의 귀에 잔 앙투아네트의 명성은 당연히 들려올 수밖에 없었다. 잔 앙투아네트 또한 루이 15세에게 접근하여 베르사유에 입성하고픈 욕망이 있었고, 서로를 원했던 이 둘 간의 만남은 결국 1745년 2월 24일 가면 무도회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때부터 잔 앙투아네트는 왕의 허락을 받아 '퐁파두르 후작 부인'으로 불리어지게 된다.

 

 

퐁파두르 부인은 당시 로코코 문화를 선도한 패션리더였다. 그녀가 선호하던 색깔인 핑크와 페퍼민트 색은 당시 가장 유행하던 색깔이었다. 자신의 취향을 한 시대의 유행으로 퍼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세브르 도자기였다. 르네상스 때부터 중국과 일본 자기들은 권력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수집 물품이 되어 있었고, 이는 바로크 · 로코코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들도 아름다운 동양의 자기들을 수집하는 데 큰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들을 수입하는 데에는 만만찮은 비용이 들었던지라, 유럽의 장인들은 동양의 질 높은 자기들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는 없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곧 동양 자기의 색깔, 강도 등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유럽인들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질 높은 자기를 완성시킬 수 있는 기술력을 갖게 되었다. 이윽고 유럽 곳곳에는 도자기 공장이 들어서게 되며, 퐁파두르 부인은 아예 왕실 도자기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제조창을 따로 마련하게 되니 이것이 곧 세브르 도자기의 탄생이었다. 퐁파두르 부인의 개인적인 취향이 지극히 반영된 세브르 도자기의 선명한 분홍색, 우아한 꽃 모양, 섬세한 그림 등은 곧 상류층 전반으로 퍼져 로코코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되니, 그녀가 로코코 문화 형성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그녀는 또한 계몽사상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부르주아라는 그녀의 출신 성분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디드로, 볼테르, 루소와 같이 당시 관점으로 볼 때는 지나치게 '혁명적인' 사상가들과 많은 교류를 맺었다. 이 시대 계몽사상가들이 주력했던 작업은 '백과전서' 편찬이었다. '백과전서'에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 정보뿐만 아니라 교회 · 귀족과 같은 권력층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도 담겨져 있기에 왕실 측에서는 이를 불온서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이 국민들에게 널리 읽혀진다면 왕실로서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퐁파두르 부인은 '백과전서'의 제작을 지원했고, 루이 15세에게 '백과전서'의 유용성을 거듭 강조하는 등 계몽사상가들의 행위를 옹호했다. 그녀의 이러한 행위는 계몽사상가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어, 후에 퐁파두르 부인이 죽자 볼테르는 그녀의 사망을 애도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의 눈에 퐁파두르 부인은 왕의 혜안을 흐리면서 사치나 일삼는 '여우'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그녀가 선도하는 로코코 스타일의 패션은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분명 상대적 박탈감을 안기는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국민들의 미움은 '7년 전쟁'의 패배로 한층 더 격화된다. 정치에까지 개입하게 된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에게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에 맞설 것을 주장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숙적 오스트리아와도 연합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곧 영국 · 프로이센 동맹군과 프랑스 · 오스트리아 · 스웨덴 · 러시아 동맹군 간의 '7년 전쟁'이 터지게 되었고, 초반 전황은 프랑스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탈,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프랑스군의 질 등으로 인해 결국 영국 · 프로이센의 승리로 '7년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해외 식민지 대부분을 영국에게 빼앗긴 프랑스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막대한 빚밖에 없었다. 사치와 패전에 대한 비난, 치열한 궁정 생활은 퐁파두르 부인을 강하게 압박했고, 이런 세간의 비웃음 속에 그녀는 1764년 43살의 나이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로코코라는 아름다운 문화 형성을 유도해냈으며 계몽 사상을 지원하고 정치에까지 관여한 그녀는 실로 비범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과도한 사치, 패전에 따른 막대한 빚,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아끼고 후원했던 계몽 사상은 30년도 지나지 않아 가공할 만한 비수가 되어 왕실을 향해 되돌아온다. 프랑스 대혁명 발발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권력자 5명의 생애를 간략히 언급해보았다. 바로크 · 로코코 문화는 이런 절대 권력자들의 후원 속에 꽃피고 발전할 수 있었다. 절대 권력자들의 권력이 정점에 달해있을 때 바로크 · 로코코 문화는 전성기를 맞이했고, 절대 권력자들이 무너지자 바로크 · 로코코 문화 또한 몰락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사례를 다루면서 우리는 특정 문화와 그 문화를 후원하는 후원자 간의 관계는 지극히 밀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단 과거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 특정 문화를 지지하고 이끌어가는 이들 모두를 '후원자'라고 본다면 후원자의 변화에 따른 문화의 변화는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20년이라는 짧은 세월 속에 '신세대 문화', 'X 문화', '디지털 문화' 등 다양한 문화들이 흥망성쇠를 거쳐오지 않았던가. 이처럼 문화사를 다룰 때 그 문화를 지지하고 받쳐주는 '후원자'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면 더욱 깊이 있는 공부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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