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 김태호 PD와 무한도전의 미래
13년간 수많은 시청자들의 토요일 오후를 책임지던 무한도전이 종영했다. 언젠가 그 끝을 맞이하게 될 거라 예상해왔지만 항상 느닷없이 찾아오는 이별과 죽음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느 때인가 무한도전의 생명은 이미 다했고 이럴 바에 차라리 끝내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멤버들은 노쇠하고 지쳐 있었고, 기획은 전혀 신선하거나 새롭지 않았고, 웃음은커녕 안쓰러운 감정만 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스스로 호흡기를 떼라고 권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당사자보다 더 본인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3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애써 외면하고 무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가 부고장이 날아오면 적당한 예의를 갖춰서 이미 많은 성취를 이룬 고인의 삶을 반추하고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조금 짜증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제작진이 무한도전의 종영 사실을 공식화하기도 전에 수많은 매체들이 서둘러 부고 기사를 남발했고, 그 과정에서 MBC 사측이 무한도전 측에 보여준 태도 역시 여간 탐탁치 못했다. 무한도전을 '1박2일'처럼 시즌제로 하겠다는 논의도 그렇고, 김태호PD 없이 출연진들만 남겨서 간판만이라도 유지시키겠다는 발상도 못마땅했다. 암울하기 짝이 없던 이명박근혜 기간 동안 공영방송국으로서 MBC의 마지막 품위를 지켜준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도 모자라 여느 예능프로그램처럼 홀대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 아닌가.
그래도 최승호 신임 MBC 사장은 무한도전의 종영을 앞두고 "13년의 긴 세월 동안 대한민국 예능의 최고봉이었을 뿐 아니라 MBC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줬다. '무한도전이' 아니었으면 MBC는 아마 진작 잊혀졌을지 모른다"고 그간 무한도전의 노고를 치하하는 인사말을 남겨서 섭섭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김태호 PD 역시 무한도전이 종영하기까지 이루어진 논의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밝혀 오해를 해소시키고 일말의 희망마저 품게 만들었다. 이번 종영이 무한도전의 끝은 아니며 또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사실 무한도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기획도 새롭지 않고 그것을 구현할 캐릭터들은 노쇠했고, 그 결과 무한도전이 신선한 스토리 텔링을 더 이상 들려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수차례 확인하게 되었을 때였다. 도전 자체가 모토인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도전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없다면 그것은 프로그램의 생명이 다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무한도전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반드시 시청해야 할 프로그램 목록에서 사라졌다. 다만 궁금했던 건 아직 개화되지 않은 김태호 PD의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향후 어떻게 구체화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김태호 PD는 나영석 PD에 의해 시즌제가 정착되기 이전부터 예능 프로그램의 시즌제를 주창했고, 출연자들의 캐릭터 상품화, 영화나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와의 크로스오버, 외부 감독 영입을 통한 프로그램 제작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해왔다. 무한도전의 종영보다 아쉬웠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이디어들마저 프로그램과 함께 사장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김태호 PD의 인터뷰에서 무한도전의 부활 가능성을 희망해볼 수 있게 된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태호 PD는 외부의 영입 제안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를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에 대한 자신의 사랑 때문이라고 했다. 돈이나 명예보다 사랑을 택한 김태호 PD는 또한 시스템주의자이기도 하다.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뛰어난 개인보다는 역량있는 작가들과 카메라 감독들 등 수많은 사람들의 재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요구에 맞는 제작환경을 찾아 나가는 대신 자신이 지금 속해 있는 환경 속에서 그런 이상적 제작 시스템을 구현해나가길 바랬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재능있는 후배 PD들이 다양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만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공간. '무한도전'이란 브랜드는 바로 이러한 김태호 PD의 꿈을 실현시켜줄 일종의 디딤목이자 구현체 그 자체로 기능할 수 있다. 마치 마블 유니버스처럼 다양한 PD들이 무한도전 출연자들과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제작하고 그것이 거대한 무한도전 유니버스로 연결된다면 이미 기력이 쇠한 무한도전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태호 PD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론칭시켜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도 있지만, 이미 대중들의 기억 속에 '무한도전의 김태호 PD'로 각인된 상태에서 무한도전이라는 막강한 브랜드를 활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어쩌면 김태호 PD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거대한 사람일 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위대성은 그가 이루어낸 업적 자체보다 그가 제기한 문제의 위대성에 있다.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했던 프로그램이 종영을 알리던 날에도 눈물을 훔쳐내는 대신 담담한 표정으로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스스로가 제기한 문제 앞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김태호 PD의 시선은 일희일비하는 세속의 시간을 넘어 무한도전의 먼 미래를 보고 있는 듯하다. 아직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꿈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그 미래를 말이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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