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4> 무한도전과 그 적들
유쾌한 카니발적 세계
무한도전 <가족> 편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 매니저의 집은 어디인가?>는 출연자들이 부친상을 당한 최종훈 코디(정준하의 코디네이터)를 방문해서 함께 슬픔을 나누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 코디는 이미 박명수의 매니저 정석권 실장, 유재석의 코디네이터인 신미소 코디 등과 더불어 무한도전 내의 제 7의 멤버로 거론될 정도로 무한도전의 한 식구와 다름 없었기 때문에, 이번 에피소드는 그들의 끈끈한 가족애와 형제애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이번 에피소드에서 정작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따로 있다. 몰래 카메라 형식을 통하여 정준하가 어째서 동네 바보형인지를 보여주는 과정도 재미있었지만, 최 코디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유재석의 차량 탈취 사건은 현란하고 긴박한 편집 기술과 재기발랄한 자막 사용을 통해 무한도전 제작진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무한도전의 전반부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는 패러디이다. 일단 전반부의 제목부터 이란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패러디로 시작된다. 또한 유재석이 박명수 반장을 대신해서 잠시 진행자 자리에 복귀하자 등장한 <진행의 제왕 왕의 귀환>은 <반지의 제왕> 3편에 대한 패러디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유재석의 차량 탈취 사건은 K본부의 <1박2일>에서 김종민이 벌인 도피 행각를 패러디하고 있다. 김종민은 영월을 향하던 기차에서 떨궈져서 홀로 정선 역에 남게 되는데, 그는 이 때의 앙갚음으로 <평창>편에서 나머지 멤버들을 남겨둔 채 홀로 차량을 타고 도망을 치게 된다. 이 부분이 패러디인 까닭은 이처럼 사건의 전체 구조가 유사하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최코디의 집 앞에서 박명수가 진행을 할 때, <TV는 사랑을 싣고>, <7시 내 고향>과 같은 K본부의 대표적 프로그램들이 분명히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1박2일>의 에피소드를 단순히 차용하거나 표절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원본에 대한 독창적인 재해석을 통하여 "패러디" 본래의 의미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김종민의 차량 탈취가 그 특유의 어리바리함과 강호동의 밀어붙이기 식의 진행으로 인해 재미는 있었지만 다소 어이없게 끝나버렸다면, 무한도전은 멤버들이 본래의 "무한 이기주의"에 충실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들의 관계가 수시로 역동적으로 뒤바뀌게 되면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특히 유재석과 다른 멤버들의 역동적 움직임을 끊임없는 교차편집을 통해 화면에 담아낸 부분은 백미 중 백미라 할 수 있다.
또한 유재석의 차량 탈취 사건을 조선의 건국 초기에 일어났던 1,2차 왕자의 난에 빗대어 <메뚜기의 난>으로 부른 점은 <1박2일>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왕자의 난을 패러디하고 있는 <제1차 메뚜기의 난>, <양쪽에서 밀려드는 관군>, <제2차 메뚜기의 난(2008年 1月)>, <메뚜기, 맹꽁이 연합군 결성>이나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를 패러디하고 있는 <3분 천하로 끝난 메뚜기의 난> 등과 같은 자막들은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무한도전의 이번 에피소드를 <1박2일>에 대한 표절이나 차용이 아닌 독창적 패러디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재치가 빛났다고 평가한 부분은 <제2차 메뚜기의 난>이란 자막에 밑줄과 별표를 그려넣음으로써 마치 학원에서 역사 강의가 이루어지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왜 무한도전의 차량 탈취 사건을 <1박2일>의 단순한 표절이 아닌 독창적 패러디로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앞선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무한도전의 에피소드는 <1박2일>의 그것과 부분적으로 유사하지만 전체적 맥락에서 전혀 다른 의미와 전혀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근대 서양의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면, 이 작품의 패러디 작품인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로빈슨 크루소>와 유사한 사건과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지만 원작과 정반대로 서양의 식민주의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담고 있다. 따라서 <방드르디>는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독창적인 패러디 작품으로서 포스트모던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무한도전의 자막은 이처럼 타방송사의 프로그램들이나 역사적 사실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질적 장르들을 무한도전의 세계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다. <속보 박반장 밴 장악>과 같은 보도 형식, 미국의 유명 드라마인 <섹스 앤 더 시티>의 패러디인 <썩소 앤 더 시티>, 일본 만화인 <신의 물방울>의 패러디인 <꼬마의 물방울>, <이산 특집>에서 박명수의 NG 퍼레이드 중에 등장한 애니메이션인 <니모를 찾아서>, <빵상, 허본좌, �>과 같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용어들 등등이 그 예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인용되고 있는 이러한 자막들은 무한도전의 세계를 흡사 바흐친적 카니발의 세계로 보이게 한다.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사실과 허구, 진지함과 장난, 성스러움과 속됨이 마구 뒤섞인 채 서로 충돌하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춤추듯 날아다니는 자막의 언어들은 흥겨운 리듬을 형성하며 기존의 질서체계를 전복시키면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무한도전을 감히 누가 국민들을 저질스럽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라고 비난할 수 있으랴!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 그래서 차마 묻지 않았던 것 - "Real"
무한도전은 이미 초기부터 현실과 오락, 버라이어티쇼와 리얼리티쇼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왔다. 상이한 두 형식들은 "롤링페이퍼"나 "무한뉴스", "친해지기 바래" 등의 장치를 통해 쇼가 펼쳐지는 외부 세계, 즉 실제의 현실 속에서 멤버들의 성격이나 관계가 폭로됨으로써 서로 결합될 수 있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무한도전과 관계된 사람들, 가령 담당 PD인 김태호 PD, 동동 카메라 감독이라 불리는 메인 카메라 감독, 무한도전의 작가인 김태희 작가, 출연자들의 매니저나 코디네이터 또는 노홍철의 친형인 노성철, "융드옥정"이라 불리는 하하의 어머니인 김옥정 여사 등과 같은 그들의 가족들은 수시로 무한도전에 등장해서 출연자들의 실제 성격이나 모습을 증언해주면서 두 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리고 이들은 <환장의 짝꿍> 편에 대거 등장해서 한편의 에피소드를 만들 정도로 대중적 인지도를 쌓았고 어느 정도 캐릭터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표방하는 무한도전의 독특한 형식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케이블 방송을 통해 해외 리얼리티쇼가 들어와 인기를 얻고, 최근에는 본격 오락전문 채널을 표방한 tvN까지 개국하면서 한국 오락 프로그램은 버라이어티쇼에서 리얼리티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중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리얼리티쇼들은 현재 한국 시청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생각하는 리얼함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은 채 해외 리얼리티쇼의 콘셉트를 가져오는 데만 급급했다. 그래서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면서도 설정만 더 자극적일 뿐, 오히려 시청자에게 작위적이고 비상식적이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무한도전>은 바로 그 과도기적 과정에서 한국 오락 프로그램이 놓친 ‘잃어버린 고리’를 찾았고, 그것은 그 어디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한국 최초의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탄생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한국도 언젠가는 리얼리티쇼가 정착될 것이고, <무한도전>도 흘러간 프로그램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 빛나는 과도기적 작품은 한국의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오락 프로그램으로 남을 듯하다.>(강명석, '무한도전' 한국형 쌩얼)
강명석의 지적 대로 무한도전은 1999년 미국에서 <Big Brother>가 빅히트를 치며 전세계적으로 "리얼리티쇼"의 붐이 일었고, 한국의 케이블 방송이 그것의 부정적 외형만 수용하게 되었다는 맥락에서만 그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무한도전은 버라이어티쇼에서 리얼리티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한국의 쇼 오락 프로그램이 놓치고 있었던 연결고리를 창조적으로 발견해냈고, 그런 점에서 <한국 최초의 리얼 버라이어티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무한도전 이후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표방하는 오락 프로그램들은 그것이 "생야생 로드 버라이어티"이건 "생계형 버라이어티"이건 간에 무한도전이 개척한 안전한 길을 쫓아서 걷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위 기사에서 주목할 대목은 "한국의 시청자가 원하고 생각하는 리얼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방영되고 있는 리얼리티쇼를 한 번이라도 시청한 사람이라면 이 질문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리얼하다"는 것은 일상생활과 똑같이 화가 나면 욕을 하고, 배가 아프면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한 이불 속에서 섹스를 하고, 자기 집에서처럼 옷을 벗고 샤워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리얼한 모습이 그대로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이 된다면, 그대는 웃고 즐길 수 있겠는가?
동양과 서양의 이러한 문화적, 윤리적 차이에 대한 고민없이 리얼리티쇼 형식을 그대로 차용했을 경우, 이 장르가 원래 의도하고 있던 도전 정신이나 복잡한 인간 관계에 대한 성찰은 사라지고 시청자들에게 선정적이고 저급한 욕망만 불러일으키는 소위 "막장 방송"이 된다. 한국의 케이블 방송이 시청자들의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반면에 무한도전은 시청자들과 오랜 시간 동안 교감을 주고받으며 포맷의 변화를 추구해왔기 때문에, 아무리 과도한 설정을 하더라도 막나가지는 않을거라는 최소한의 믿음을 시청자들에게 주었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보다 자유롭고 과감한 형식실험을 해왔다.
그러나 무한도전과 그 이후에 등장한 아류작들이 표방하는 "리얼"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의 "리얼"이 아니었고, 이러한 사실을 감지한 것은 놀랍게도 배국남 기자였다. 그는 <‘무한도전’과 오락프로 변화, 문제는?>(2007-10-25)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지만 시청자가 리얼한 것들이고 믿는 출연자들이 하는 멘트나 행동에는 보이지 않는 연출의 힘이 작용하고 방송용을 위한 출연자의 몸부림 즉 자신의 내부적 연출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출연자의 꾸밈없는 멘트와 행동들은 편집이라는 가장 인위적인 연출에 의해 재구성된다.
리얼버라이어티쇼에서 우리가 날것이라고, 진짜 리얼한 것이라고 믿고 웃음 짓는 그 모습은 철저히 인위와 설정 그리고 연출의 힘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인 것이다. 다만 문양이 리얼한 것 뿐이다.>
배국남 기자는 다분히 비판적 의도에서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에서 내세우는 "리얼"이 실제는 연출된 것이고 가짜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데, 그는 절반의 진실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는 셈이다.
가령 <1박2일>의 경우 지난 주에 방영된 <마파도> 편에서 출연자들이 방송국에 모여 잠을 자도록 권유받았을 때, 위에서 지적한 은밀한 비밀이 강호동의 입을 통해 암시되었다. 담당PD가 편히 쉬도록 하라고 말하자 강호동은 "그러면 카메라를 꺼주시던가 해야 편히 쉬지요" 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다시 말해 카메라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된 강호동의 이미지는 자연인 강호동과는 상이한 것이다.
<1박2일>은 "리얼"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게 있는데, 대표적으로 강원도 화천에 있는 소설가 이외수의 집을 찾았을 때 그러한 징후가 가장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복불복 게임에 의해 이수근, 은지원, MC몽 등은 영하의 강추위에 야외에 설치된 텐트에서 자야만 했는데, 제작진은 밤새 텐트 주변에 내린 눈을 아무도 밟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혹시라도 눈 위에 발자국이라도 남으면 시청자들로부터 실제로 야외에서 잔 게 아니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는 노파심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1박2일>이 생각하는 "리얼"의 의미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 프로그램에서 "리얼"은 매서운 추위, 강한 비바람, 생사를 넘나드는 높은 파도와 같은 자연 현상들, 까나리 액젖이나 간장, 고추냉이, 식초 등이 혼합된 음료를 마시고 괴로워 하는 출연자들의 육체적 고통, 일정한 한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을 정해놓음으로써 그들이 겪게 되는 배고픔이나 굶주림 같은 것들이다. 다시 말해 <1박2일>의 출연자들이 텔레비전에 아무리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등장하더라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연출된 결과일 뿐이다. 왜냐하면 <1박2일>은 쇼 오락 프로그램이지 다큐멘타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박2일>의 제작진은 시청자들이 알고 있는 "리얼"한 세계와 보고 싶어 하는 "리얼"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을 정도로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여행"과 결합시켰을 때, <1박2일>에서 시청자들이 발견하게 되는 현실은 상당 부분 낭만화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건 그들이 여행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현실이 대부분 농촌이나 어촌 지역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여행으로 인해 들뜬 분위기는 도시의 삭막함에서 느낄 수 없었던 휴식과 해방감, 그리고 사람 냄새가 나는 따뜻한 온정이 남아 있는 지방의 풍경들과 결합되어 그들이 아무리 혹독한 자연 환경 때문에 "생야생"에서 고생을 하더라도 낭만적인 경험으로 채색되고 있다.
반면에 S본부의 <라인업>의 경우, 태안 방문 이후 처음의 기획 의도를 상실하고 제작방향이 다소 모호해졌기 때문에 그나마 애초의 콘셉트가 분명하게 남아 있는 초기의 에피소드에 국한시켜 "리얼"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재원 기자는 <'무한도전' 인기 비결에 대한 잘못된 재해석>이란 기사에서 라인업의 문제점을 다음처럼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전제한 ‘리얼리티’에는 친밀하다는 게 얼마든지 타인의 영역을 넘나들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예의없음과 일맥상통한다는 착각이 담겨 있다. 프리스타일의 개그와 유희가, 치밀하고 창의적인 ‘얘깃거리’의 제조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짠 개그’를 통달한 다음에야 가능한 고수의 영역이라는 점도 간과하고 있다. 또한 유명인에 대한 엿보기로 시청자를 몰입과 쾌감의 롤러코스터에 태우려면 해당 예능인의 재능과 노력에 대해 기본적인 존경심을 자아낼 수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이 연민과 애정과 웃음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호감있는 캐릭터로서 존재해야 한다.>
위 기사에서 알 수 있듯 초기의 라인업에서 "리얼하다"는 의미는 친밀성을 바탕으로 사적 영역에서 통용되던 언행을 방송이라는 공적 영역에서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김구라가 선배인 김경민에게 "X새끼"란 욕을 하고, 담당PD가 친절하게 강아지 그림을 삽입해서 가려진 의미를 누구나 쉽게 유추하게 만든 사건이 그것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경계가 느슨한게 리얼리티쇼의 중요한 특징이긴 하다. 하지만 초기의 <라인업>은 한국의 케이블 방송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리얼함"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선을 넘고 있다. 그것은 과도한 시청율 경쟁이 불러온 과욕의 결과라는 점에서 문제라 할 수 있다.
"Real"을 찾아라!
그렇다면 무한도전에서 "리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한 배국남의 기사에 그 힌트가 담겨 있다.
<‘무한도전’의 재미중의 하나가 어떤 것이 연출과 설정인가에 대해 김태호PD는 “우리 멤버들은 예능으로 치면 10단, 11단이 넘어가는 사람들이다. 어떤 설정이다, 어떤 흐름으로 갈 거다, 이런 건 머릿속에 전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물론 대본은 있다. 오프닝 멘트와 사이사이 멘트, 예상되는 상황들은 점검해 둔다”며 연출과 애드립, 그리고 현장에서 이뤄지는 리얼한 상황이 적절히 조합됐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무한도전에서는 <1박2일>이나 <라인업>에서와는 달리 "리얼"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게 존재하지 않는다. 라인업의 경우 태안 봉사 위조사건이 거짓으로 밝혀지긴 했어도, 프로그램이 표방하는 "리얼"의 가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로 인해 더욱 "리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1박2일>도 마찬가지이다.
대신에 무한도전은 리얼한 상황과 연출을 교묘히 섞어버림으로써, "리얼"하게 다가오는 사건이 실제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을 의도적으로 연출한다. 가령 <드라마 로망스 특집> 편의 중간 시사회에서 박명수가 “시청자들은 우리가 심각한 것보다 내복 입고 달리는 걸 원해!”라는 애드립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우연히 나온 것일까 아니면 연출된 것일까? 정답은 무한도전 1기 때 모습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제작진이 주문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때문에 박명수는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실제인지 연출된 상황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림으로써 거두게 되는 효과는 무엇일까? 강명석은 이러한 효과 때문에 시청자들이 오락 프로그램을 웃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몰입"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오락 프로그램의 열성적인 팬들은 오락 프로그램의 캐릭터가 계속 성장하면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며 친숙함을 느끼고, 그들이 현실과 맞닿는 접점을 가지는 순간 자신의 일처럼 몰입한다.> ('Show must go on 나의 쇼, 나의 세계')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서 강명석과는 약간은 다른 견해를 제시할까 한다. 실제와 허구, 진실과 거짓이 어느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때로는 감추어져 있던 진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 순간 시청자들은 드러난 진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가령 이번 에피소드에서 최코디의 집을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연출된 장면이고, 그의 어머니와 누나를 만나는 장면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상당 부분 연출이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최코디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무한도전 멤버들이 모두 조문했다는 사실은 기사를 통해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고, 그 에피소드는 그 이후에 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코디가 무한도전 팀의 방문을 사전에 동의했기 때문에 촬영이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설령 그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막상 그 날이 촬영날인 지는 몰랐던 것 같다. 그건 뜻밖의 방문이라는 듯 반가운 표정을 짓는 최코디의 표정 변화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눈시울을 붉히는 최코디의 모습에서 숨겨져 있던 진실(진심)인 따뜻한 동료애에 대한 감사한 마음, 애써 잊으려 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대로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어 감동을 받게 된다.
무한도전은 "리얼"한 실제를 오락 프로의 법칙에 따라 은폐하거나 왜곡시켜 재현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러한 은폐와 왜곡을 통해 보이는 것 너머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드러낸다. 진실이 드러나는 바로 이 순간은 우리가 전부라고 믿고 있었던 보이는 세계, 텔레비전이 구현하고 있는 이미지의 세계가 파괴되는 순간이다. 그들의 익숙한 이미지가 파괴되는 순간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리얼"의 세계는 때로는 시청자들에게 뜻밖의 우연성으로 인해 긴장감을 주지만 동시에 그 동안 시청자들이 깨닫고 있지 못했던 그들의 진심을 보여주게 된다. 다시 말해, 무한도전의 세계 내에서 허구와 뒤섞인 실제는 시청자들이 발견해야만 하는 혹은 무한도전을 시청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나아가 실제와 허구를 교묘히 섞어놓고 시청자들에게 마치 이 들 중 어떤 것이 진짜인가 하고 묻는 듯한 무한도전의 전략은 <빅 브러더>나 <트루먼 쇼>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문제를 시청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즉 우리가 실제라고 지각하는 현실의 구조가 사실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이고, 미디어에 의한 현실의 구성과 구성의 현실은 사실 동일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빅 브러더>의 출연자들이 기거하는 콘테이너 박스나, 트루먼이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스튜디오는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이다. 우리가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인터넷 등의 매스 미디어에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들이 전달하는 메세지를 바탕으로 구성된 현실을 실제의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듯이 말이다. 바로 이 점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리얼"이 거짓이고 가짜라는 사실을 폭로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배국남 기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절반의 진실이다.
왜 무한도전을 시청하는가?
그대는 왜 무한도전을 시청하는가? 토요일 오후 황금같은 시간에, 애인과 데이트을 할 수도 있고, 친구들과 모여 술을 마시며 일주일 간의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고, 당구를 치거나 게임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케이블 방송을 포함하며 그 시간 대 방송되는 수많은 프로그램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무한도전을 시청하는가?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거나, 무한한 감동을 느끼려한다거나, 커다란 사회적 공익성을 찾으려 애써서는 곤란하다. 그러니까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기본은 재미이며, 의미, 감동, 사회적 공익성은 그에 따라오는 부산물들일 뿐이다. 적어도 "재미있다/재미없다"라는 변별기준으로 판가름이 나는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 만약 내가 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한다면, 이러한 기준 대신에 "유익하다/유익하지 않다"라는 구분방식을 가지고 판단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 혹은 기자들은 오락 프로그램을 "재미있다/재미없다"라는 기준 대신에 다른 판별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려고 한다. 가령 "시청율이 높다/낮다", "유익하다/유익하지 않다", "저질스럽다/저질스럽지 않다" 등등의 예들이 있다.
첫 번째 기준은, 대다수의 기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분 방법이다. 시청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광고 수익율이 높다는 것이고, 한마디로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문화산업"으로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지닌 "산업"으로서의 가치를 따질 수는 있지만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는 맹목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문화적 가치에 대한 등안시는 역으로 콘텐츠의 질을 떨어뜨리게 되고 결국에는 산업적 가치 역시 손상시키게 된다. 한류 붐이 불었을 때, 유명 연예인을 출연시켜 마구잡이로 찍어댄 드라마나 영화가 이러한 예에 속한다.
두 번째 기준은, 비교적 상식적인 차원에서 통용되고 있는 판별기준이다. 이러한 가치 기준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재미"와 "의미"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들이다. 재미를 추구할수록, 사회적 공익성, 감동, 진지한 의미는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론 그 힘을 의미 있는 곳에 써주세요"하고 애교스럽게 요구하기도 한다.(정덕현 기자, 리얼 버라이어티쇼, 웃음만으론 부족하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돈을 많이 벌었으니 기부 좀 하라고 요청하는 악플과 다를게 없다. 이게 왜 악플인가 하면, 기부를 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 가식적이라 비난을 하고, 정말 남 몰래 선행을 하고 있더라도 알려지지 않으면 기부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식의 진퇴양난을 만들어놓고 흘리는 떡밥이기 때문이다. 오락 프로가 의미만을 찾다 재미가 없어져서 시청율이 떨어지면 어떤 책임을 질텐가?
세 번째 기준은, 최근에 한 주교가 제시한 판별기준이다. 2년도 더 지난 방송을 지금까지 기억하셨다가, '서울매스컴 위원회 창립대회' 축사에서 무한도전에 대한 시청소감으로 내놓으신 견해이다. 공식적 행사에서, 그것도 무책임한 언론을 성토하는 맥락에서 발언한 말씀치고는 너무나 무성의하고 무책임하다. 그 자리가 분명 개인의 시청 소감이나 발표하는 자리는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그 주교의 발언은 배국남 기자가 상당히 공들여 쓴 <'무한도전'은 국민을 저질화시켰나?>란 기사에서 적절하게 비판되었다고 본다. 간단히 요약하면, 보좌주교가 무한도전이라는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평가절하한 것은 그가 "오락 프로그램 축소가 곧 방송의 공익성을 보장한다"는 다분히 엘리트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고, 오락 프로에 대한 생산미학적, 작품내재적, 수용미학적 해석 없이 단순한 인상비평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것은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주교가 언론에 요구되는 정도의 신중성이나 객관성을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요구하는 것은 두 영역들 간의 차이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글을 썼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결국 두 번째 평가 기준과 세 번째 평가 기준은 동전의 앞 뒤면일 뿐 사실은 동일한 판단기준을 내세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재미가 많아지면 의미는 사라진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1938)에서 놀이를 노동이나 휴식과 구분되는 독차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재미라는 요소가 놀이의 본질을 규정"하는데, 이때 "재미"란 말은 네덜란드어로 "천성" 또는 "본질"을 뜻한다. 다시 말해, 놀이 혹은 유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천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질서가 도래하며, 인간의 모든 활동은 "노동"의 관점에서만 평가받게 되었다. 그 결과 놀이는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잠시 쉬는 여가활동 정도로 평가절하 되었다. 다시 말해, 놀이는 물건을 만들고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활동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의 목적을 지닌 활동으로 더 이상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근대의 산업사회가 놀이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받아들인 까닭은 자기 목적적인 놀이가 자본주의 질서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라. 놀이에만 몰두하고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호이징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재미가 많아지면 의미가 줄어든다는 도식은 결국 자본주의적 질서에 의해 왜곡된 놀이의 문화이다. 본래의 의미에서 놀이는 불교 용어로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자재의 경지"를 뜻하는 "유희"나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현대의 자본주의나 노동자 계급의 지위는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를 지니게 되었다. 오락산업 역시 대중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하려는 기제로 파악하는 비판적 시각(대표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이 존재하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문화적 성취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존재한다. 따라서 오락 산업에 대한 문화비판적 시각은 대중들의 문화적 취향을 지배계급의 이익에 알맞게 교정하려는 시도로 혹은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순수한 오락적 가치를 부정하고 사회적 공익성이나 진지한 의미를 강요하는 문화 보수주의적 시각들이야말로 어떤 면에서 대중문화의 적들이라 말할 수 있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 논쟁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문화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 태도나 분석 태도 역시 순수한 재미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받아들일 경우, 재미 외적 의미들로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 의미구조가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락 프로그램을 시간을 때우기 위한 소모용품이 아니라 하나의 대중적인 예술작품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나 스웨덴 등지에서 무한도전의 포맷을 수입하려는 까닭 역시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이 작품으로서 지닌 바로 이러한 독창적 가치를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점에서 무한도전이 다른 유사 프로그램들과 경쟁을 펼쳐야만 하는 환경은 오히려 스스로의 독자적 가치를 획득해나갈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다. 차량 탈취 사건을 통해 <1박2일>과 차별화되는 무한도전만의 역량을 보여주었다면, 다음에는 <라인업>이다. <특전사 특집> 예고편에 <군대 특집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자막이 나갔는데, 설 특집으로 <라인업>이 군 병영을 방문한 것과 비교가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다. 그것이 <창조적 모방>이 될지 <하찮은 모방>이 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다음 주에는 하하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떡국도 먹고 더욱 힘을 내서 전진하길 바란다. 무한도전!
by ddolappa
'무한도전 > 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전하지 못한 사랑의 편지 (0) | 2008.02.10 |
---|---|
무한도전과 그 적들 2 (0) | 2008.02.09 |
무한도전을 동네북이 아니다! - 한 주교의 무한도전 비판 (0) | 2008.02.05 |
<3> 몸개그의 귀환 (0) | 2008.02.05 |
<2> 무한도전이 꿈꾸는 이산, 이산이 꿈꾸는 무한도전 (0) | 2008.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