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스크랩]무한도전 관련 자료 모음

[펌]신자유주의 시대 일상과 노동에 대한 리얼 버라이어티 쇼

ddolappa 2008. 3. 3. 09:42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http://blog.naver.com/caujun/60043223423

 


<무한도전>과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시대 일상과 노동에 대한 ‘리얼 버라이어티 쇼’

 


- 문강형준

 

‘리얼’의 도래


시청률 30%대를 넘나들며 매주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모토는 ‘국내 최초 리얼 버라이어티 쇼’다. 이 말 속에는 이전까지의 버라이어티 쇼들이 ‘리얼’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물론 <무한도전> 이전에도 많은 버라이어티 쇼들이 ‘리얼’을 표방했었다. 가령 강호동의 진행으로 남녀 연예인들이 서로 ‘짝짓기’를 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던 <연애편지> 같은 프로그램은 이들이 ‘정말로’ 서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고, 그것이 그 프로그램의 인기비결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것이 쇼에 불과했다는 것이 저절로 드러났고, 몇몇 다른 모방 프로그램들이 생겨나면서 연예인 짝짓기 프로그램은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은 즐겁게 쇼를 보면서도 그것이 ‘진짜’는 아니라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는데, <무한도전>은 여기서 ‘이것은 진짜입니다’라고 크게 말하고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다. 실제로 <무한도전>의 에피소드들은 ‘리얼’한 것 때문에 인기를 얻었다. 자칭 ‘대한민국 평균이하’라 일컫는 여섯 명의 연예인들은 매주 갖가지 ‘도전’을 시도하는데, 그중 한 편에서는 디자이너 이상봉이 연 패션쇼에 직접 모델로 서기도 했고, 자신들이 만든 노래들로 각종 행사에 직접 가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고, 가수이자 연기자 이효리를 여주인공으로 해서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으며, 농촌특집에서는 비를 맞으며 모를 심는 장면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시시때때로 멤버들 중 하나 또는 여럿을 대상으로 몰래카메라를 실시하고, 이들의 집에 갑자기 쳐들어가서 부스스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맥주 한 잔씩을 하며 서로 마음에 담긴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거의 모든 버라이어티 쇼들이 스튜디오 안에서 각본에 맞춰 진행을 하는데 반해, <무한도전>은 거의 언제나 야외로 나가서 그 주에 주어진 과제/도전을 수행하는 플롯으로 진행되고, 이것이 이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제나 연예인들은 카메라 앞에서는 서로 웃으며 이야기와 농담을 해왔지만, <무한도전>에서는 먹을 것 앞에서 서로 앞다투어 집착하는 모습을 담고, 서로의 뒷이야기를 카메라에 대고 공개해서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며, 그 중 한 명(박명수)은 아예 대놓고 호통을 치는 것으로 인기를 얻었다. 방송상에서 다른 멤버들에 의해서 ‘밤에 일하는 사람’ 혹은 ‘술집사장’과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웃음을 주었던 정준하는 최근 실제로 여성접대부까지 고용하며 영업을 하는 술집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 전까지 버라이어티 쇼에서 부분적으로만 표출되었지만 전면화하지 않았던 여러 요소들―도전과제 수행, 몰래카메라, 음주, 개인적 감정 표출, 사담―을 한꺼번에 아우르면서, 즉 연예인과 이들의 사생활, 그리고 이들이 방송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이를 ‘리얼’이라 이름붙인 <무한도전>은 그전까지는 이와 동일한 플롯과 영향력(인기)을 가진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한국 버라이어티 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무한도전>을 따라 ‘리얼’을 표방하는 <무한걸스>, <하이파이브>, <라인업> 등의 프로그램들이 쏟아지고 있다. 가히, ‘리얼’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어떤 ‘리얼’인가? 이 프로그램들이 표방하는 ‘리얼’은 진정한 ‘리얼’인가? <무한도전>의 과제 수행들 속에서 말해지는 ‘리얼’은 이 연예인들이 다른 연예인들, 혹은 일반인들이 하는 일을 매주 하나씩 해본다는 의미에서의 ‘리얼’일 뿐이다. 이들이 서커스를 하는 일, 모델을 하는 일, 모를 심는 일, 면접을 보는 일, 영어마을에 가는 일, 드라마를 찍는 일 등을 가지고 우리는 이들이 진정한 삶의 ‘리얼리티’를 체험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껏 스튜디오에서만 서로 농담을 하면서 인기를 얻었던 이들에게는 신기한 ‘리얼’일지 몰라도, 실제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가상이자 쇼일 뿐이다. 이 프로그램의 메인 진행자를 맡고 있는 유재석은 <무한도전>이 국내 버라이어티 사상 최초의 ‘3D’(Dirty, Dangerous, Difficult) 프로그램 이라고 자괴하지만, 이런 종류의 ‘3D’를 체험하면서 회당 몇 백만원을 출연료로 받는다면 이를 마다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이 프로그램을 정말로 ‘3D’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이미 멤버교체가 몇 번씩 되었을 것인데, 여섯 명의 멤버들은 매주 빠짐없이 카메라 앞에 서고 있지 않은가? <무한도전>의 ‘3D’는 현재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는 ‘3D’와 완전히 다른 의미, 아니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무한도전>의 ‘리얼’은 여전히 가상이고, 여전히 쇼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판타지로서의 ‘리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무한도전>의 가상적 ‘리얼’은 현 시기 한국사회의 가장 ‘리얼’한 어떤 풍경, 다시 말하면 신자유주의적인 풍경을 드러낸다. ‘신자유주의적인 풍경’이라는 말은 길게는 90년대 초반 이후, 짧게는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성격, 즉 세계화, 경쟁, 자본의 자유, 노동권의 몰락, 비정규직 확산, 빈익빈 부익부, 복지의 축소, 삶의 교환가치화와 그로 인한 전쟁같은 삶의 측면들을 일컫는다.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변화함으로써 경제나 사회영역 뿐 아니라 대중문화 영역 내부에서도 이런 변화를 징후적으로 반영하게 되는데, <무한도전>을 비롯한 일련의 ‘리얼’ 프로그램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신자유주의적인 현실을 어쩔 수 없이, 그러나 아주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무한도전>이 ‘국내 최초 리얼 버라이어티 쇼’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무한도전’의 시대


이 프로그램의 이름인 ‘무한도전’은 의미심장하다. <무한도전>의 모태가 되었던 <무모한 도전>이 매주 기상천외한 도전을 ‘무모’하게 벌인다는 데 초점을 맞췄던 데 비해, <무한도전>은 도전의 ‘무모성’보다 도전의 ‘무한성’을 강조한다. 도전의 ‘무모성’은 언제나 코미디의 단골소재였지만, 도전의 ‘무한성’은 새롭다. 프로그램의 멤버들은 언제나 끊임없이 무언가에 도전해야 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밥벌이가 된다. 다시 말하면, 시청률을 끌어 올려 개편 때마다 ‘잘리지’ 않기 위해 이들은 어떻게든 ‘무한도전’을 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롭게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토 역시 ‘무한도전’이다. 1994년 11월 동남아 순방길에서 ‘시드니 구상’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김영삼 전대통령이 ‘세계화’라는 말을 처음 대중화시킨 이후로, 우리의 경쟁상대는 한국의 누군가가 아니라 미국이나 중국이나 덴마크의 누군가가 되었다. 그 세계화의 장밋빛 그림이 우리의 삶을 파괴시킬 수도 있는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전측면이 철저히 신자유주의로 ‘구조조정’되면서,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한도전’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2007년 현재 한-미 FTA의 타결 이후 정부가 내보내고 있는 광고의 문구는 이를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당신의 솜씨, 4900만의 식탁에만 오르기엔 너무 맛있습니다. 당신의 기술 10만 Km의 도로만 달리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당신의 디자인, 90개의 백화점에만 걸리기엔 너무 멋집니다. 당신의 아이디어, 당신의 능력, 당신의 열정, 이제 더 큰 무대에서 펼쳐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영토를 넓힐 기회―세계와의 자유무역협정입니다!" (자유무역협정 국내대책위원회)


OECD 가입국 중 최장노동시간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게 이제 때로는 ‘한민족의 저력’을, 때로는 ‘당신의 솜씨와 기술과 디자인’을 호명하는 이 엄청난 프로파간다는 “더 큰 무대”로 나갈 것을 요구한다. 개개인이 부가가치를 창조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는 무한경쟁의 시대가 제대로 펼쳐진 것이다. 무한도전은 무한경쟁을 낳고, 무한경쟁은 무한이기주의를 낳는다. 이 새로운 신자유주의의 마태복음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시대를 얘기하고 있다.


무한경쟁과 무한이기주의는 <무한도전>의 플롯이 가지고 있는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한민국 평균이하’들이 게임과 경쟁에서 각종 반칙을 쓰며 게임의 규칙 자체를 무너뜨리고, 그 와중에 서로를 물어 뜯으면서 결국 누군가는 목표를 달성하는 모습을 재밌게 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무한도전> 멤버들 각자의 입담이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웃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리얼’한 삶의 모습도 그와 닮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들의 그런 모습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지칭하는 ‘무한이기주의’는 박명수에 의해 가장 극적으로 재현된다. 오랜 무명생활을 딛고 <무한도전>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박명수는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답게 ‘인기’라는 목표를 위해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전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캐릭터이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연예인으로서 치명적인 것이었을 이런 비신사적인 박명수의 캐릭터가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그의 행동이 ‘무한도전’의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색한’ 정형돈이 자주 ‘편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


생존이라는 명제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응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과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것은 <무한도전>의 핵심 이데올로기인데, 이것은 방송의 가상 플롯을 넘어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대중문화 영역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은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여서 이들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정규직’ 보장이 없다. 일단 인기를 얻으면 소득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인기가 사라지는 순간, 그래서 불러주는 이가 없는 순간 이들은 어느새 ‘백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생기는 긴장과 불안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다양한 연예 프로그램에 최대한 많이 출연하여 인기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연예인 외의 생계수단을 병행하는 것이다. <무한도전>의 모든 멤버는 다른 프로그램에도 꾸준히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고, 정준하나 박명수, 하하 등은 가수, 연기자, 뮤지컬 배우 등으로 노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며, 정준하, 박명수는 각각 주점과 피자체인사업 등을 통해 다른 생계수단을 확보하고 있다. 이렇게 연예인 노동의 특성상 이들은 ‘인기’에 연연해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들이 <무한도전>에서 매번 ‘무한이기주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 그들 노동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 나아가 정규직 노동자에게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인기’가 없으면 ‘잘리는’ 연예인들처럼, 신자유주의시대의 노동자들은 부가가치창출이 안 되는 순간 ‘구조조정’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노동자 안에서도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할되어 단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불안정한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안정적인 것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독자적인 자신만의 능력을 갖거나 자신을 확실히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을 잡아야 할 것이다. 역시 박명수가 보여주는 캐릭터는 이를 반영한다. 그는 자신의 인기를 위해 끊임없이 유행어를 개발하고, 상황극을 만들어 내는, 생산성이 높은 연예인이다. 하지만 불안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지켜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유행어나 행동 등을 다른 멤버들이 할 때마다 호통을 치며 ‘자기 것’이라는 영역표시를 한다(지적재산권). 또, 인기가 많은 ‘국민 MC’인 유재석 밑에서 언제나 ‘2인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유재석의 진행능력을 분석하며 배우려고 하고, 그와의 관계를 언제나 돈독히 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것은 다른 멤버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실은 철저히 자신의 노동이 가진 불안요소를 최소화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소위 ‘라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연예계에서 일종의 문화권력이 된 진행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이 잘 봐주는 후배들이 그들과 함께 프로그램에 동반출연하게 되고, 이것이 소위 ‘규라인’(이경규)이니 ‘용라인’(김용만)이니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무한도전>에 도전장을 내며 등장한 <라인업>이라는 프로그램은 소문으로만 떠돌던 연예계 ‘라인’을 직접 거론하면서 아예 ‘규라인’과 ‘용라인’을 중심으로 한 연예인들을 모아놓았다. 이 과정에서 ‘라인’의 핵심인 두 진행자들은 무한권력을 행사하면서 패널 연예인들을 매주 ‘천국’과 ‘지옥’으로 보낸다.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꼼짝 못하고, 폭력까지 감내하면서, 지옥으로 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동하는 모습을 우리는 <라인업>의 패널 연예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몸’의 정치학: ‘몸개그’, 포스트포디즘, 생체정치


살아남기 위한 이 연예계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들의 노력의 백미는 ‘몸개그’에서 나타난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어떤 ‘도전’에서도 몸개그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들은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빅재미’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빅재미’는 시청률이고, 시청률은 이들에게 인기이자 돈이다. 결국 이들은 인기/돈/생존을 위해 몸개그를 하는 셈인데, <무한도전>의 몸개그는 말 그대로 자기 온 몸을 던져서 땅에 넘어지거나 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는 행위다. 이것은 슬랩스틱과는 또 다르다. 슬랩스틱은 철저히 계산된 각본과 플롯에 따라 몸을 던짐으로써 계속되는 웃음의 고리를 만들어내지만, 몸개그는 각본이나 플롯이 있다기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무작정 몸을 던지는 행위라는 점에서 슬랩스틱보다 더욱 원초적이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농촌에 가서 비오는 날 100미터나 되는 논두렁을 그릇 쟁반을 이고 달린다. 그 과정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들은 미끄러져 쓰러진다. 또 다른 편에서 이들은 겉으로는 판단이 어려운, 물이 가득찬 축구공과 일반 축구공 중 하나를 선택하여 헤딩을 하는데, 물 축구공을 선택한 사람은 그 충격에 바로 쓰러질 수밖에 없다. 이런 몸개그에서 나오는 ‘빅재미’는 사실 다른 어떤 계산된 유머보다도 강력하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원초성에는 어떤 처절함이 담겨있다. 이 몸개그가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의 어떤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디어를 내고, 어떤 인기를 누리고, 어떤 보수를 받는다고 해도, 결국 이 연예-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팔아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몸’이다. 이들의 ‘몸’은 결국 자신들이 가진 유일한 ‘생산수단’이다. 논두렁에서 쓰러지고, 물공을 헤딩하다 넘어지는 이들의 몸개그에는 몸을 유일한 생산수단으로 가진 노동자들의 처절함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마빡이’(현재는 ‘귀신이 산다’)와 ‘헬쓰보이’는 모두 ‘몸’을 웃음의 핵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무한도전>의 몸개그와 닮아있다. ‘마빡이’는 20분 넘는 시간동안 개그맨들이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얼굴이 빨개지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웃음을 유발한다. ‘헬쓰보이’는 평범한 몸을 가진 남자 개그맨 세 명이 매주 자신의 몸을 단련한 결과 ‘근육남’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못생긴 얼굴이나 몸매를 가지고 웃음을 유발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 두 코미디는 자신의 몸을 반복적으로 학대하거나 자신의 몸을 꾸준히 관리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화면에 담는다. 대중문화 혹은 문화일반이 가지는 어떤 창조성을 거부하고, 자신의 몸을 반복과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코미디는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FTA 광고에서 보이듯, 우리 시대는 ‘창조’를 최대 과제로 설정하는 듯하지만, 실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극소수의 창조자와 대다수의 노동자일 뿐이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이 부가가치 창조의 시대에 여전히 가장 반복적인 노동을 수행해야 하고, 거기에서라도 쫓겨나지 않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몸과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반복적인 노동을 수행하지 못하는 자(‘마빡이’)나 꾸준히 자신을 관리하지 못하는 자(‘헬쓰보이’)는 이 시대 어느 곳에도 설 데가 없다 (역에 가면 누울 데는 많다).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던지지 못하는 자(<무한도전>) 역시 인기를 누리며 노동을 계속할 수 없다.


<무한도전>의 몸개그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변치 않는 육체노동의 원초적 처절함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제 것이 아닌 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무한도전>의 다른 측면은 포스트포디즘 시기 노동의 한 특질을 포착하기도 한다. 포스트포디즘 시기의 노동은 포디즘 시기와는 달리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인해 노동의 기능이 다변화되고, 노동자에게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에 맞는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능력까지 요구된다. 반복과 관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동시에 다양성과 창조성 역시 겸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신자유주의 시대 가치 창조의 핵심적 요인으로 선전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누구나 ‘지식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에게는 ‘지식’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이들은 다양한 버라이어티 쇼 분야에서 인정받은 연예인이라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게 그 어떤 ‘도전’에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능력을 가졌다. 눈밭에서도, 논밭에서도, 스튜디오에서도, 콩트에서도, 모델로도, 체육관에서도, 녹음실에서도 이들은 그 상황에 최적으로 적응하면서 거기서 자신의 캐릭터를 살려낸다. 기실 문화산업의 종사자들에게 이러한 포스트포디즘적 직무능력은 포디즘 시절부터 요구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가지고 있는 포스트포디즘적 성격(매주 다른 과제, 매주 다른 형식, 매주 다른 장소―버라이어티!)은 이들의 노동을 더욱 확실히 부각시켜준다.


그 뿐 아니라, <무한도전>은 촬영의 시간과 장소를 전혀 가리지 않음으로써, 멤버들의 ‘모든 것’을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삼는다. ‘빨리 와주길 바래’ 코너를 통해 카메라는 멤버들의 집까지 가서 이들을 깨우고, 정형돈이 이사를 갈 때는 멤버들을 동원하여 직접 이삿짐을 나르게 하며, ‘빨간 하이힐의 비밀’을 캐기 위해 멤버들은 노홍철의 집을 기습 방문한다. 다시 말하면, <무한도전> 멤버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프로그램의 일부로 사용해야 한다. 일상이 노동이 되고, 노동이 일상이 되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생체정치’(biopolitics)의 <무한도전> 버전이다. 그러니까, 자본(방송국/PD)은 이제 노동자(<무한도전> 멤버들)의 노동시간만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일상까지도 노동에 귀속되게 하여 노동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어 일상/삶/몸의 영역까지도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회사가 끝나자마자 회사가 끊어준 어학원에 가고, 헬쓰클럽에서 몸을 단련하여 지덕체 모두를 완벽히 관리해야 하는, 자신의 시간과 몸을 온전히 자본에게 바쳐야 살 수 있는 이 시대 노동자들에 비한다면 멤버들에 대한 카메라의 빈번한 습격과 이들의 당황해하는 모습 속에서 유발되는 웃음들은 생체정치의 가장 유머러스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의 몸과 일상을 쥐락펴락하며 ‘판을 깔아준’ PD들은 방송자막을 통해 이들을 진정한 ‘평균이하’로 묘사하며 조롱을 일삼는다. 몸개그까지를 포함한 생체노동 과정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이들이 이 노동과정을 실행하는 이들에게 행하는 조롱은 (비록 그 행위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일지라도) <무한도전> 멤버들의 노동이 매주 명백하게 소외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죽도록 일하라고 해서 죽도록 했더니 죽도록 했다고 비아냥대는 꼴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의 최종 결과는 여기 아닐까? 도전하고 경쟁해서 가치를 창조하라고 닦달하더니 그렇게 열심히 하다가 아무런 결과물을 못내거나 지쳐 쓰러진 자들에게는 한없이 비정한 현실 말이다. 자유는 보장하되 분배는 아직 이르고, 노동은 강조하되 복지는 알아서 하라는 신자유주의의의 무책임함은 열심히 뛰어다니는 <무한도전> 멤버들에게 중식제공을 하지 않아 바나나 하나 가지고 서로 싸우게 만들고 이를 한발짝 물러서서 조롱하는 제작진의 태도와 너무나 닮아있다.


요컨대, <무한도전>은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의 일상과 노동에 스민 다양한 풍경들을 ‘리얼 버라이어티 쇼’라는 형태로 그리는 풍경화다. 그 속에는 무한도전의 시대 속에서 서로 무한경쟁해야 하는 무한이기주의가 있고, 자신의 노동을 다각화함으로써 생존 확률을 높여야 하는 노동자들의 선택이 담겨 있으며, 능력 있는 자의 ‘라인’에 기대거나 편을 가름으로써 살아남거나 분할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있다. 기본적으로 몸을 던져야 하는 노동의 원초적 처절성이 있고, 동시에 다양한 기능분화를 통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거나 일상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고 철저히 자본의 권력 앞에 동일화되는 과정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노동을 강요한 자본에 의해 다시 소외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무한도전>의 ‘리얼 버라이어티’는 한편으로는 수익 좋은 연예인들의 가상적 ‘리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2007년 오늘 한국 노동자의 현실과 노동양상을 드러내는 진정한 ‘리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 아래에는 ‘생존’이라는 절대명제가 버티고 있으니, 이것은 <무한도전>의 연예인과 그것을 웃으며 보는 시청자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의 ‘실재’(the Real)다. 우리의 평일을 장악하고 있는 이 ‘실재’는 <무한도전>의 ‘리얼 버라이어티’로 주말까지 우리와 함께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박명수’적 인간이 되는 그 날까지 이 ‘리얼’의 행진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문화과학』52호 (2007년 겨울) '문화분석': 377-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