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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음 앞의 인간 - 필립 아리에스

ddolappa 2008. 5. 16. 04:00


 필립 아리에스

 

1.

[인문사회]‘죽음 앞의 인간’…죽음이란 삶의 또 다른 표현

이유선 기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서양철학)
 

“행복하게 죽기 위해서는 사는 법을 알아야 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인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1914∼84)가 삶과 죽음의 연관성을 말하기 위해 인용한 시구(詩句)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산업화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잘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 택하는 방법이란 어이없게도 과로사에 이를 정도로 열심히 일하거나, 일거리가 없을 경우에는 로또를 사는 정도다.


더 유감스러운 사실은 우리가 잘 죽으려고 해도 우리는 죽음에 관해 무지를 강요당하고 있고,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죽을 것인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 죽음은 일반적으로 전문가인 의사에 의해 판정되고, 산업사회의 일상성과 효율성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사회적으로 은폐된다. 20세기에 등장한 주요한 죽음의 형태, 곧 의학상의 죽음은 더 이상 필수불가결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실패로 인식된다.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병실의 죽음을 아리에스는 ‘역전된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역전되지 않은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몇몇 인도주의적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주장대로 죽음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그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과연 ‘자연적인’ 태도일까? 아리에스에 의하면 그런 태도는 기껏해야 18, 19세기에 등장한 낭만주의로의 회귀일 뿐이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람들은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에 익숙해지고 죽음과 더불어 잘 살아왔다.


죽음이 철저히 배척되는 오늘날에는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는 말이 일종의 저주처럼 들리지만, 죽음과 삶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죽음이 공동체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시대에 그것은 삶이 표현하는 ‘외침’이었다. 의학의 발달로 야생상태의 죽음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인의 착각이다. 아리에스는 오히려 중세 사람들이 길들여져 있던 죽음은 오늘날 야만적인 것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유럽의 성당은 그 자체가 마을 사람들의 거대한 무덤이었고 성당에 딸린 묘지는 사회적 공공장소인 동시에 오락의 장소였다. 프랑스 파리의 중앙시장이 묘지에 이웃해 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아리에스는 길들여진 죽음의 가시적 흔적을 중세의 관을 장식했던 횡와상(橫臥像)에서 찾고 있다. 횡와상은 단순히 종말론적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과의 연속성, 내세에서의 휴식이라는 두 주제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에스의 이런 지적은 충격적이다. 중세를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했던 시대라고 여겼던 믿음이 소박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리에스는 유럽과 미국의 성당, 묘지, 문학작품, 미술작품, 유언장 등 죽음과 관련된 거의 모든 역사적 유물과 자료를 철저하게 파헤침으로써 죽음의 의미가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개념적으로 삶의 문제를 포착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반성하게 한다는 데 있다. 삶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잘 죽는 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고민스럽다.

 

2.

 

 

[행복한 책읽기] '죽음 앞의 인간' 달라도 너무 달랐다  ㅣ 진중권기자 (문학평론가) ㅣ 2004-04-03 ㅣ [중앙일보]

 

로마에 가면 카푸치노 승단의 멋진 예배당을 볼 수 있다. 이 예배당은 실은 수도승들의 무덤이자 납골당으로, 내부가 인간의 뼈와 미라로 아름답게(?) 장식돼 있다. 검붉은 바닥 아래에서는 죽은 수도승들의 시체가 썩어가고, 말끔히 썩은 시체의 뼈는 제단이 되고, 벽의 장식이 되고,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된다. 복도의 끝에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생각하라)의 경구가 적혀 있었다. "우리도 한때는 너희와 같았었고, 너희도 언젠가 우리처럼 될 것이다."

우리 눈에는 몰취향한 '엽기'로만 보이나, '카푸치노' 커피를 마시며 산다는 그 승단의 수도승들에게는 다를 게다. 카타콤베(지하묘지)에 들어갔을 때 내 기분도 그랬다. 50만구가 넘는 기독교인들의 시체가 만들어낸 거대한 네크로폴리스(죽음의 도시).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 지하동굴이 으스스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기독교의 세례를 받고 자란 나는 거기서 묘한 포근함을 느꼈다. 죽어서 동료들의 뼈와 어지럽게 섞인 카푸치노의 수도승들도 같은 기분이 아닐까?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나, 이 불편한 진리를 처리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달라진다. 그리하여 죽음도 역사를 갖게 된다.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은 서구 기독교 문명 속에서 죽음의 역사를 추적한 작품으로 프랑스 미시사(微視史) 연구의 역작으로 꼽힌다.

서구에서 죽음은 다섯 가지로 얼굴을 바꾸어 왔다. 공동체의 품안에서 부활의 신앙으로 묶여 있던 초기 중세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죽음, 즉 공동체 밖에서 죽는 '객사'나 회개할 틈도 없이 죽는 '급사'였다. 중세 말에 이르러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구원의 약속에 회의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차차 죽음에 공포를 갖게 된다. 기독교가 공인된 지 1000년이 되던 종말론의 시대, 인구의 3분의 2를 휩쓸어간 페스트의 시대에 죽음은 비로소 무서운 것이 된다.

바로크 시대는 바야흐로 자연과학의 시대. 이 시기의 죽음은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앙을 잃은 인간들은 죽음에 엄청난 공포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거기에 마음이 끌렸다. 대학에서는 연일 해부학 공개 강의가 열렸으며, 연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이 끔찍한 장면을 구경하러 다녔고, 무덤은 종종 싱싱한 시체를 도난 당했다. 교회의 벽에 걸린 잔혹한 순교의 그림은 표면의 종교적 메시지 아래로 은밀히 신도들의 사도마조히즘 욕망을 만족시켜주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조차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이라는 안경을 통해 들여다 본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는 그 쓰라림 속에서도 묘한 달콤함이 있다. 여기서 죽음은 서서히 동경의 대상으로 변해간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달콤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시체는 아름다운 것이다. 바로크 시대에 은밀히 모습을 드러내던 네크로필리아(시체 선호)가 이제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여성들 사이에서는 '시체 같은 아름다움'이 미의 이상이 된다. 시적 수사법으로 죽음을 미화하던 낭만주의의 전략은 산업사회의 산문적 분위기 속에서 힘을 잃게 된다. 온갖 미사여구에 닳고닳은 현대인에게 시적 수사는 그저 촌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종교적 전략이 실패하고, 미학적 전략마저 사라진 오늘날, 우리는 죽음을 끔찍한 것으로 경험한다. 그토록 아름답던 죽음은 다시 무서워졌다. 이제 길은 하나, 그것을 잊는 것뿐이다. 그래서 오늘날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터부가 되었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자료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결론'부터 읽고 들어가는 게 좋다. 아리에스 자신이 펴낸 도판집 '죽음 앞에 선 인간'과, 서양예술에 나타난 죽음의 도상을 정리한 필자의 책 '춤추는 죽음'을 참고한다면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 책에 대한 부분적 비판을 담은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권한다.

죽음의 공포에 맞서는 글쟁이의 전략은 역시 불멸의 책을 써 불후의 명성에 도달하는 것. 8년 전에 이 책에 빠져 모든 일 제쳐두고 3일 밤낮을 온전히 바친 후에 이렇게 푸념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책을 쓴다면 당장 죽어도 원이 없겠다."

 

3.

중세보다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공포가 더 크다  ㅣ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ㅣ 2004-04-03 ㅣ [조선일보]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인류 역사상 시대별로 죽음의 의미는 제각각이었다”는 것이 10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책의 화두다. 현대 프랑스 역사학계의 대표적 지성인 필립 아리에스가 펴낸 이 책은 과거 역사학에서 역사 서술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죽음을 역사학의 대상으로 삼은 기념비적 저작이다.
아리에스는 문학사와 종교사의 일화들뿐만 아니라 유언장과 같은 개인적 자료·묘비명 등 다양한 자료들을 섭렵, 중세 초기부터 현대까지 서구 기독교 문명권에서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분석했다.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죽음을 앞둔 사람은 유한성이라는 숙명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수많은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원탁의 기사’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중세 문학에 등장하는 왕이나 기사들이 대범한 자세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로 인해 묘지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나 마을 내부에 공존할 수 있었다.

중세부터 17세기까지 사람들은 묘지에서 모임을 갖고 온갖 놀이와 축제를 벌였으며, 종교·사법·정치·상업적인 행사를 열었다. 당시 파리의 한 공동 묘지 풍경은 이러했다. “너비가 3m 정도 되는 아치형의 둥근 천장 아래로 대서소, 란제리 가게, 서점, 중고 옷가게들이 두 줄로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12~13세기에는 임종 직전에 수도원이나 학교에 기부하는 행위가 성행했다. 죽는 자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선 학교 아동들이 자신의 장례 행렬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기부했다. 또한 16~17세기의 유언장을 보면 이 시대 사람들이 장례 행렬의 절차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준다.

당시 유언장은 장례 행렬에 동원될 사람의 수와 촛불의 수, 장식의 종류 등까지 일일이 명기했다. 장례 행렬의 규모, 여기에 투자된 적선과 기부금의 액수가 고인의 부나 관대함의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16세기 이후부터 죽음을 관능적으로 탐닉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17세기의 판화나 회화 작품에서 자주 묘사되는 해부학 수업은 논문 심사나 학생들의 연극 공연처럼 온 도시 사람이 가면이나 음료, 오락거리를 갖고서 몰려들어 함께 구경하던 일종의 사회적 대행사였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죽음은 급기야 아름다운 것으로 격상된다.

한 귀족 가문의 딸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이랬다. “침실은 예배당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천사는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살아 있던 동안에도 그만큼 아름다웠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죽음은 외면과 은폐의 대상으로 변화했다.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은 죽어가는 보바리 부인의 비명과 구토,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죽음의 비참함으로 인해 그 불쾌감을 참아낼 수 있는 소수의 가족들만이 임종을 지키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인간은 집이 아니라 주로 병원에서 임종을 맞게 됐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공포는 중세보다 더 크고, 현대인들이 과거에 비해 죽음을 수용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닌가라고 이 책은 묻는다.

 

4.

죽음에 비친 ‘서구 정신史’  ㅣ 조장래기자 (joy@kyunghyang.com) ㅣ 2004-03-27 ㅣ [경향신문]

 

죽음을 말로 설명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기껏해야 소멸, 분리, 부활, 내세 같은 단어 주변만 맴돌다 지칠 일이다.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이고, 그래서 개운치 않은 뒷맛만 남긴 채 중도하차 하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필립 아리에스는 좀 무모해 보인다. 번역서 기준으로 무려 1,100쪽이 넘는 분량으로 풀어놓은 그의 죽음 얘기는 독자들을 초주검으로 몰고갈 기세다. 그가 차용한 시간과 공간은 방대하다. 지난 1,000년에다 라틴 문화권의 서구 전지역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굳이 나누자면 이 책은 역사서다. 죽음이란 창을 통해 들여다본 ‘서구 정신사’쯤 된다. 그가 정통 역사학계와 거리를 둔 ‘아날학파’라는 걸 알면 좀 더 감이 잡힌다. 왕조 대신 생활이나 풍습을 통해 역사의 뼈대를 세우는 데 집착한다.

역사 속에서 죽음이라는 사금파리를 캐기 위해 그가 사용한 쇠꼬챙이는 독특한 것이다. 유언장, 문학작품, 종교적 전례, 묘비명 등을 죄다 탐지봉으로 사용했다.

이 책은 ‘죽음을 둘러싼 사회현상’을 5가지, 혹은 그 이상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큰 뭉치는 2개다. 20세기 초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양쪽 풍경은 각각의 끝단에 서 있다. 한쪽은 잔잔한 강물이고 다른 한쪽은 급류다. “천년을 거쳐 죽음은 서서히 변해왔는데 오늘날 그 풍습이 역전되는 데는 한 세대로 충분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19세기까지 서구에서 한 개인의 죽음은 늘 사회적이고 공적인 사건이었다. 공동체는 죽음에 따른 슬픔과 상실된 힘을 회복해야 했다. 그래서 죽어가는 자가 누워있는 침상 주위로 집결했다.

현대로 들어오면서 사회는 죽음을 추방하고 있다. 저명인사가 아닌 바에야 개인의 죽음은 그저 육탈된 인골로 돌아가는 자연 소멸의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현대사회는 휴지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 개인의 소멸 역시 사회의 연속성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다.”(985쪽)

고대인들은 죽은 자와 가까이 하기를 꺼렸다. 혼령이 산 자들을 혼란스럽게 할까봐 담을 쌓았다. 이렇게 해서 고대의 묘지들은 늘 도시 밖 어딘가에 놓였다. 그러다 5세기쯤부터 18세기 말까지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저자는 이를 ‘길들여진 죽음’이라 일컫는다. 이 시기 묘지들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나 마을 내부로 침투했다.

중세때의 묘지는 죽은 자의 안식처이면서 동시에 산 자의 광장이고 산책장이었다. 지역사회 주민의 오락을 위한 회합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7세기 연극을 보면 연인들이 묘지나 무덤 속에 들어가 스킨십을 나누기도 한다. 묘지는 이렇듯 욕망에 우호적인 장소였다.

저자는 또 유언장을 한 시대의 사고체계와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중세때는 유언장을 통해 사후에 재산상속권을 이행하는 사례가 수없이 많았고 그 규모도 상당했다. “중세인들의 구원에 대한 강박증과 지옥에 대한 공포를 잘 반영하는” 현상이다.

재산의 자연스런 재분배는 이렇게 이뤄졌다. 기독교인들에게 내세의 삶과 종교적 신앙이 분리된 것은 현대로 넘어와서 생긴 일이다. 산업화, 합리주의, 인간존중 사상은 내세의 삶을 살짝 은폐하고 있다.

저자 아리에스는 63세에 이 책을 내고 이듬해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연구주임 교수가 됐다. 학사 출신으로 이런 파격적 대우를 받은 게 이 책 때문일 거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의료화된 죽음, 병원에서의 죽음이라는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진 현대에서 죽음은 더 이상 과거의 죽음이 아니다. 그게 안타까웠던 걸까. 아리에스는 책 마지막에 자신의 소망인 듯한 말을 적고 있다.

“죽음이란 평온한 자가 우호적인 사회로부터 빠져나가는 은밀하지만 품위있는 출구가 되어야 한다.”

 

5.

[북월드]삶의 집착이 '죽음의 공포'부른다  ㅣ 황계식기자 (cult@segye.com) ㅣ 2004-03-27 ㅣ [세계일보]

 

현대인은 대부분 삶에 집착하는 관계로 코앞의 죽음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평생 죽음은 언제나 혐오스럽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1914∼84)는 최근 완역된 저서 ‘죽음 앞의 인간(고선일 옮김)’에서 현대인의 이 같은 죽음에 대한 관념은 20세기 이후 현대에 들어서야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리에스는 기독교 문명이 지배하는 서구 사회의 중세 초부터 현대까지 살피면서 시대별로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죽음의 변천사를 기록했다.

그에 따르면 중세 초 죽음은 일상적이고 공개적이어서 개인은 기독교공동체 품에서 비교적 편안하고 외롭지 않게 생을 마칠 수 있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은 이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면서 많은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다른 공포감 없이 눈을 감았다. 따라서 묘지도 사람들의 생활공간에 자리잡았다. 시장으로 상업적인 기능을 하거나 종교·정치·사법 행사가 열리는 공공장소로도 이용돼 한쪽에서는 매장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떠들썩한 행사가 열리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아리에스는 이를 ‘길들여진 죽음’이라 불렀다. 당시 서구인은 모든 삶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고, 죽음을 개인적 차원의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행사로 여겼다. 공동체 의식에 빠진 나머지 이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공동체 밖으로 밀려나는 일이었다. 객사하거나 영생의 약속을 보장받는 종부성사도 받지 못할 만큼 갑작스레 죽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중세 초 서구인의 죽음에 대한 관념은 한쪽에서는 망자를 위한 요란한 통곡 소리가, 다른 한편에서는 산 자를 위로하는 조문객의 야단법석 잔치가 벌어지는 우리네 장례식과 닮았다. 먼 훗날 과학의 힘으로 부활하길 바라는 오늘날의 냉동인간은 이 같은 전통을 잇고 있는 셈이다.

11세기 이후 중세 후기로 접어들어 서구는 공동체가 점차 해체되고, 자의식과 함께 개인주의가 팽배해진다. 따라서 아리에스가 ‘자신의 죽음’ 혹은 ‘나의 죽음’이라 부르는 현상이 ‘길들여진 죽음’을 대신한다. 개인주의로 인한 삶에 대한 무절제한 집착은 죽음의 공포를 키워 갔고, 적어도 영혼의 형태나마 현세와 내세의 연속성, 즉 불멸을 보장받고자 했다. 따라서 당시 신대륙을 정복한 권력층은 천상에 대규모 ‘투자’를 함으로써 저승마저 ‘식민지화하려’ 했다. 사후 유언장을 통해 망자를 위한 미사가 1000번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고, 종교적 기부행위가 ‘좋은 죽음’이라는 이름 아래 심심치 않게 이뤄졌다.

이같이 ‘불멸의 영혼’을 추구하는 문화는 가톨릭에서 ‘주의 기도’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기도문인 ‘성모송’(아베 마리아) 2부에 ‘좋은 죽음’을 위한 기도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현대에도 맥을 잇고 있다.

아리에스가 명명한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은 16세기 이후 바로크 시대에 꽃피운다. 공동묘지가 생활 터전에서 멀어지면서 죽음은 더욱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여겨졌으나, 죽음에 대한 기이한 호기심과 ‘사랑’(?)이 일어났다. 죽음에 대한 고통이 한계를 넘어서면 적어도 감각적인 면에서는 쾌락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당시의 믿음 때문.

인체 해부학 열풍이 ‘과학적 사랑’이었다면, 성자들의 잔혹한 순교 장면을 그대로 옮긴 그림은 ‘종교적 사랑’이었다. 또 죽은 자들과의 연애담을 담은 문학이나 시신을 묘한 관능성으로 묘사한 그림은 ‘문화적 사랑’이었다.

아리에스는 서구인들이 죽음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야생성을 극복하고자 합리주의를 싹틔우고 과학을 탄생시켰으며, 기술의 진보를 이뤘다고 주장한다. 죽음에 항상 대비하고 계획해야 한다는 생각에 세계를 합리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현대성’이 그 실마리를 보인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욕구가 분출한다. 아리에스는 이를 가리켜 ‘타인의 죽음’이라 부른다. 자신이 사랑을 쏟았던 특별한 존재인 ‘타인’을 잃는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대신했다. 죽음은 슬퍼해야 하는 대상보다는 모두가 바라는 순간으로서 찬양의 대상이 됐다. 지금도 몇몇 연애소설에서 드러나듯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을 천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발상은 당시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같은 소설이나 격정적인 시들로 나타났다.

어렸을 때 자신의 시신을 둘러싸고 슬퍼할 부모형제를 떠올리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면, 이는 낭만주의 시대의 전통이 이어진 탓이다. 또 인터넷 자살 사이트나 톱스타의 죽음에 따른 팬들의 연쇄 자살소동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현대는 이 같은 낭만주의적인 ‘위선’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현대사회는 죽음은 추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따라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도 그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죽는 순간까지 알리지 않는다. 죽음이 일상에서 거세돼 볼 수 없게 된 이 현상을 두고 아리에스는 가깝게 길들여져 있던 죽음이 멀어져 간다는 이유로 ‘죽음의 역전’이라 부른다.

현대 사회는 사방이 막힌 병원의 병동에 시신을 격리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냄새와 흔적까지 없앤다. 또 은폐된 시신은 감쪽같이 처리된다.

결국 죽음은 중세의 사제, 바로크 시대의 해부학자,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 현대의 의사가 그 마지막 처리를 맡으면서 다양한 변신을 거듭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할까. 아리에스는 “죽음을 행복의 개념과 조화롭게 만들어야 한다. 사회는 개인의 생물학적 전이(죽음)라는 사실에 의해 지나치게 타격을 받아서도, 지나치게 비통함에 잠겨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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