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C 사상특집 시리즈 - 르네 지라르
문화에 숨겨진 폭력
박정오
힘없는 아이를 빙 둘러싸고 때리는 아이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유태인을 학살한 평상시에는 선량한 시민이었을 독일군인들─희생양에게 가해지는 집단의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반복되는가?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이런 폭력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 없는가? 가장 가까운 가족 내에서도 때로 피를 부르는 폭력이 있으니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해박한 지식에 근거한 명쾌한 설명을 르네 지라르의 후기 저서에서 발견하게 된다.
문학비평가로 출발한 르네 지라르는 초기에는 주로 세르반테스,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스탕달, 그리고 프루스트의 연구에 몰두했다.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의 핵심적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지라르는 문학의 거장들이 남긴 주요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추적하는데, 이때 이미 심리학과 신학같은 문학 외적인 분야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폭력과 성스러움』, 『태초 이래로 숨겨져 온 것』, 『희생양』, 『사악한 인간의 오랜 길』등 ’70년대 이후에 출간된 그의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기의 지라르는 인류학과 종교심리학의 영역으로 관심을 확대하며 문화비평가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마치 프로이트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정신분석의 틀을 확립한 다음 문화 전반을 읽어내는 일로 점점 관심을 확대하였고 이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분석의 중심틀이 되었던 것처럼, 지라르 역시 문학에서 문화로 반경을 확대해갈 때 그 근간에는 ‘욕망의 삼각형’으로 널리 알려진 욕망모방의 이론이 자리하고 있다.
지라르의 욕망모방론을 폭력과의 관련을 위해 간략히 살펴보면, 개개인이 느끼는 욕망이 자발적이고 독창적인 자기만의 욕구 같지만 이런 믿음은 근거 없는 ‘낭만적 거짓’일 뿐이며, 주체인 나는 다른 사람이 이미 선망하는 대상을 갖기 원한다는 것이다. 욕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항상 욕망을 중개하는 모델이 존재하며, 모델의 욕망을 주체는 그대로 모방한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엠마는 낭만적 사랑에 대해 자발적인 욕망을 체험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지만, 그녀의 욕망은 사실 여학교 기숙사에서 읽은 저급한 소설책에 나오는 전형적인 사랑이야기와 여주인공들에 의해 중개된 것이다. 여기서 지라르가 말하는 욕망은 갈증이나 허기와 같은 생물학적 욕구와는 구분된다. 우리에게 결여된 부분을 온전히 갖고 있는 상태, 이런 상태를 상징하는 물건이나 사람을 갖고 싶은 욕망을 뜻한다. 따라서 물을 마시면 해소되는 갈증과는 달리,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엠마는 남편 샤를르를 위시해 자작, 레옹, 로돌프 등 상대를 바꾸어보지만 그녀의 낭만적 사랑에 대한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이렇게 욕망은 모방되며, 삼각관계에서처럼 공통된 대상을 서로 차지하려니까 자연히 경쟁의식과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집단의 구성원은 모두 서로서로 적대감과 증오심을 갖게 되어 엄청난 폭력을 유발할 가능성을 갖는다. 이때 공동체의 파멸을 막기위해 서로에 대한 증오를 한 희생자에게로 돌려, 다시 말하면 모든 문제의 화근을 이 희생자의 탓으로 돌려 폭력을 해소하는 것이 희생의식, 희생제의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라르는 모방욕망이 어떻게 폭력을 낳게 되는지의 과정과 희생제의의 진정한 기능을 다양한 예를 통해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신성한 희생제의의 이면에는 희생물의 살해라는 폭력이 숨어있음을 간파하고 희생제의와 폭력의 관계에 연구의 초점을 두고 있다. 이 분야에 대한 지라르의 공헌은 지대하나, 희생제의에 대한 이전의 연구가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므로 이 주제연구의 흐름을 알아보는 것이 지라르 이론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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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생양 연구의 동향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라르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금기』에 대한 역동적 글읽기에 아예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근친상간과 같은 금기의 문제를 희생문제와 관련짓고, 이 두 문제를 집단폭력에 대한 해석의 도움으로 해결하려한 최초의 장본인이 바로 프로이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금기』에서 당시 활발하게 진척된 민속학과 인류학 자료에 힘입어 원시인들과 정신질환자들 사이의 생각의 유사성을 탐구한다. 토템을 숭배하는 종족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두 법칙은 토템 동물을 절대 죽이면 안되는 것과 같은 토템을 가진 이성과의 성교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가장 오랜 금기로서 프로이트는 이것들이 인간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강한 욕망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만약 토템동물이 아버지를 상징한다면, 이 양대계율은 곧바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 오이디푸스의 두 죄와 일치하게 되고, 이 두 금기사항은 어린 소년이 부모에게 갖는 가장 근원적인 바램이자 욕망이라 볼 수 있다. 의인화된 신들을 숭배하기 이전의 시대에서는 종족의 토템을 정기적으로 잡아먹는 것이 토템숭배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평소에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는 토템동물을 성스러운 의미에서 죽여 전체를 나누어 먹는 것이 토템종교의 큰 특징이다. 여기에 착안하여 프로이트는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종교는 원초적 부친살해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종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아버지와의 갈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지라르는 금기를 처음으로 토템의 희생과 연관시켜 해석한 프로이트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모든 문제를 항상 아버지의 존재로 다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희생양과 폭력의 구조를 보지 못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프로이트의 문제제기는 적절했으나,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려는 생각이 앞서 그릇된 해석을 낳게 되었다는 평가이다.
프로이트와 지라르의 근본차이는 욕망을 정의내리는 서로 다른 입장에 있다고 보여진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자연발생적인 것, 즉 탐나는 대상을 보고 주체가 자연스레 느끼는 자발적 산물로 보는 반면, 지라르는 욕망을 중개하는 매체가 있어 그 매체를 모방함으로써 욕망이 생겨난다고 본다. 모방이 먼저이며 진정한 ‘무의식’이라 본다. 지라르의 생각은 프로이트와 근본적으로 다르나 누구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종교의 기원을 탐구하는 연구자이다. 종교의 기저에 집단살해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나 신성화가 합의에서 나온다는 프로이트의 통찰력은 지라르 이론을 전개해나가는데 중요한 지적 자극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프로이트가 이처럼 지라르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나, 엄밀히 말하면 프로이트가 살해에 착안하게 된 것은 인류학 및 민속학적 자료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희생양의 문제를 처음으로 인류학에 소개한 학자는 프레이저(Sir James Frazer)이다. 전세계의 제의형태나 주술, 금기 등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한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의 주된 관심은 국왕 시해에 모아진다. 프레이저의 관점에서 살해의식의 희생자는 우선 왕이거나 식물과 연관 있는 신의 대변인이다. 그의 모델이 되는 희생은 본질적으로 농경의 성격을 띠고 있고 기능상으로는 속죄하는 역할을 한다. 왕국에서 우주는 곧 왕의 몸과 동일시되며 따라서 왕의 살해를 통해 우주는 매번 갱신된다고 믿어졌다. 후대에 와서 풍요제 때 마을사람들에게 사냥되는 동물이나 축제 때 싸워 얻어맞는 젊은이는 늙고 병든 왕을 대신하는 이미지로 의심해볼 수 있다. 축제를 희생양과 관련시켜 연구한 프레이저는 이 분야의 연구에 가장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종교학자 엘리어드(Mircea Eliade)는 프레이저의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켜 사회의 대다수는 시간을 순환구조로 인식함을 지적한다. 시간이 흘러 기운이 고갈될 경우, 정기적으로 에너지를 새롭게 갱신하기 위해 사회는 반드시 축제적인 행사를 열게 된다. 추수 때마다 축제를 벌려, 지난해의 나쁜 것들과 악을 희생양으로 대변되는 한 사람 또는 동물에 모두 실어 그를 축출함으로써 다시금 새로와진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사회는 선거가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새롭게 물갈이한다는 점에서 축제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프레이저의 생각이 의식의 영역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적용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엘리어드는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의 개념을 도입하여 원시인의 의식구조를 설명하려 했다. 신성에서 유리되어 세속화된 현대인과는 달리 원시인은 신성한 것 속에서 살며 그들에게 신성은 곧 권력이었다고 보는 데 대해 지라르는 이러한 견해는 종교에 대한 ‘낭만적’ 시각이라 비판한다. 지라르의 관점에서 신성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폭력을 은폐하고 있고, 모든 종교의식의 근간을 이루는 중추는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2. 폭력과 희생양의 메커니즘
지라르는 제의에는 신성한 희생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실제 살해와 같은 폭력이 행사되는 서로 상반된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데 착안하여 희생과 폭력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신화와 고전에서부터 역사적 사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추적해간다.
개인이든 사회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폭력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폭력의 혼돈상태는 가장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지라르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질서는 차이에 근거해 세워진다. 현대사회는 민주주의란 개념과 더불어 인간의 평등을 열망하여, 개인의 사회적, 경제적 신분과는 무관한 차이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문화질서는 차이에 의해 조직된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차이들이다. 다른 이들에 대해 자신의 위치를 구별짓도록 하는 차이들 말이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근친상간은 가족 안에서의 극단적 차이 말살로 정의될 수 있다. 원시종교나 그리스 비극에서도 폭력적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이의 소멸 때문이다. 친부살해나 페스트의 경우에서처럼 차이들이 붕괴되면, 공동체 자체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혼돈과 위기상황이 초래된다. 왜냐하면 폭력은 엄청난 모방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차별 현상이 일어나면 집단의 구성원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서운 닮은꼴, 즉 분신이 되어 집단폭력을 유발할 가능성으로 가득차게 된다. 모방욕망은 불순한 전염병과 같아서 어떤 제동장치가 없으면 공동체 전체를 파괴할 것이다. 상호간의 폭력,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연쇄살인처럼 차이가 소멸한 곳에는 언제나 폭력의 위협이 있다. 많은 원시사회에서 쌍둥이나 거울에 비친 모습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사회구성원 서로에게 가해질 폭력을 적절히 해소할 방법은 없을까? 서로에게 향해진 폭력의 화살을 만장일치로 한 희생물을 향해 돌리는 것. 이것이 공동체가 필사적으로 찾아낸 해결책이다.
희생제의는 인간의 근본성향에서 발전한 것으로 내부의 폭력을 잠재우고 원시사회에서 폭발하는 갈등을 예방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희생되는 대체물은 사회전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폭력을 피하려는 의도로 내세워진 대상이다. 이때 인간은 희생양을 죽이는 폭력의 해소과정이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절대적 명령, 그 요구가 치밀할 뿐 아니라 끔찍한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훨씬 더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폭력을 해소한다. 희생양을 죽이는 신성한 의식 뒤에는 공동체가 서로에게 느끼는 증오와 폭력욕구를 적절히 해소하려는 메커니즘이 숨겨져 있다. 여기서 희생양은 꼭 개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지배집단에 대응되는 소수집단도 포함된다. 중세유럽이나 미국의 역사에 나타나는 마녀재판이나 2차대전 때의 유태인 학살도 이러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예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들의 집단이든 희생양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서로에게 느끼는 강한 적대감정들―보통 이것은 철저히 은닉되어 있다―을 모두 떠맡는다. 서로에게 가해질 수 있는 폭력을 희생양에 대한 일치된 폭력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희생제의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재현된다. 사회는 전체구성원을 다 파멸시킬 위험이 있는 이 폭력을 ‘희생시킬 수 있는’ 한 사람에게로 돌릴 방법을 찾게 되고 집단살해에서 이러한 실제이유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는 위기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이렇게 폭력의 배출구 역할을 하는 희생양은 사람일 경우 어떻게 결정되는가? 어떤 존재를 ‘희생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는가? 인간 희생제물로는 전쟁포로나 이방인, 노예도 있지만 아이, 총각, 신체장애자, 그리고 그리스의 ‘파마코스’(pharmakos:도시에서 준비해두고 있던 인간 희생물로서 재앙이 덮쳤을 때, 민심을 수습하고 평화를 되찾기 위해 재앙의 원흉으로 몰아 처형하곤 했다)처럼 인간쓰레기도 있으며, 왕이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희생양은 공동체에 거의 혹은 전혀 소속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아이나 성인식을 거치지 않은 청년은 사회구성원으로 보지 않았고, 노예나 파마코스가 최하층으로 사회집단에서 유리되어 있다면, 왕은 최고의 존재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의 몇몇 왕들처럼 가뭄과 같은 재앙이 계속될 경우 왕 자신이 가장 제의적이고 엄격하게 희생되기도 한다. 위계질서의 최정상에 있던 상징적 존재의 파멸은 하찮은 노예의 희생보다 훨씬 큰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왕실도 사람들의 증오심을 최하층으로 전환하여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므로 사회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형태의 희생양을 만들어내게 된다. 한편 여성들 특히 기혼여성은 사회구성원으로 소속되지 않았지만 제물로 바쳐지는 예는 거의 없었다. 이유는 양쪽 집안의 보복 가능성을 두려워한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마녀로 몰린 여자들이 주로 가족 없이 홀로 마을의 외곽에서 살던 고립된 소외자임을 상기할 때 이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태초 이래로 숨겨져 온 것』에서 지라르는 육체상의 특이성, 특히 불구성이 희생양의 역할을 맡는 신화적 영웅들의 한 특징임을 지적한다. 오이디푸스는 다리를 절며, 야곱 역시 절름발이이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시에 처음 온 이방인이며 불구자로 이 사회의 주변인이며, 또한 동시에 왕의 지위라는 특수성 때문에 집단폭력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희생양의 구비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이 문제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마르티아’(Hamartia:보통 주인공의 성격에서 유래한 판단의 착오 또는 비극적 결함)는 희생양을 향한 집단폭력의 범죄를 최소화하는 시적 방법과 동일하다고 본다. 시인들은 주인공에게 오만과 같은 비극적 결함을 부여함으로써 희생양에 대한 박해의 이야기를 교묘히 위장한다. 기독교의 복음서는 최초로 희생양 예수의 완전한 무죄성을 숨김 없이 드러냄으로써 박해를 위장하고 있는 다른 이전의 텍스트와 확연히 구분된다.
이제까지 보았듯이 지라르는 희생제의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전형화한다. 먼저 공동체의 질서를 이루는 차이들이 소멸할 때 희생을 부르는 위기가 초래된다. 그러면 모방본능으로 폭력이 급속도로 확산될 우려가 생기고 이를 막기 위해 서로를 향한 폭력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소속력이 약한 한 희생양을 향해 만장일치된 집단폭력의 형태를 띤다. 이때 희생양에 대한 집단폭력은 신성한 신의 명령이란 이름으로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 희생양의 살해의식으로 공동체의 갈등은 해소되고 일시적인 평화와 질서를 되찾게 된다.
그리스 비극작가 유리피데스의 『바커스의 여사제들』은 희생제의에 대한 지라르의 주장을 엿보기에 좋은 텍스트이다. 디오니소스의 존재유무는 알 수 없으나, 디오니소스 의식은 역사적으로 존재했었고, 이 의식을 다루고 있는 『바커스의 여사제들』(바커스는 디오니소스의 로마식 명칭)은 축제의 변질되기 이전 모습을 비교적 잘 드러내주고 있다. 우선 디오니소스의 이상한 매력에 매료되어 의식에 불려나가는 무리는 사회의 모든 차이를 벗어난 집단이 된다. 여자는 남자와 같아지고 노예는 귀족과 한데 뒤섞인다. 성과 나이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도 허물어진다. 왕의 어머니인 아가베와 사촌 이노 그리고 많은 여인들이 가정을 버리고 몰려다니며 바커스제를 올린다.
목가적이던 이 여사제들의 방랑은 곧 피비린내 나는 집단폭력으로 변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여자들은 짐승이나 남자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달려든다. 이때 소떼를 남자로 잘못 알고 공격하는데 동물과 사람 사이의 차이도 소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테베의 왕 펜테우스만이 디오니소스의 신성을 부인하며 이러한 광란에 저항한다. 그는 디오니소스를 체포하라는 불경을 범하고 지나친 오만과 자기과신<Hubris(휴브리스)>이란 비극적 결함을 갖는다. 펜테우스는 부하들이 계속 디오니소스를 잡는데 실패하자 직접 나갔다가 광란상태에서 그를 짐승으로 오인한 어머니 아가베와 이모 이노가 이끄는 여신도들에게 무참히 찢겨 죽는다. 이 의식에서 여신도들은 만장일치로 모두 살해에 가담하며, 무기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집단린치를 가한다. 『바커스의 여사제들』은 희생제의에서 보통 숨겨져 있는 집단적 폭력놀이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펜테우스가 희생양이란 점은 그의 불경스러움, 자기과신이란 비극적 결함으로 살짝 은폐되어 있다. 여기서 바커스는 우리 내부에 저마다 잠재해 있는 폭력의 환상적 육화로 볼 수 있으며, 바커스제는 차이의 소멸, 희생위기, 희생양에 대한 일치된 집단폭력 등 폭력의 진행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왜 하필이면 폭력을 행하는 무리를 여신도들로 설정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지라르는 바커스제의 혼란을 거의 전적으로 여자들만의 것이라고 전가시킴으로써 남성의 권위와 존엄을 공고히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추측한다.
3. 금기와 희생제의
바커스제에서 보여지는 환각상태와 같은 광기와 폭력은 사실 평소에는 철저히 금기시되어 온 것들이다. 폭력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원시사회는 갖가지 금기를 설정해놓았던 것이다. 지라르는 모방이론을 근거로 이러한 금기와 제의는 문화를 구성해온 두 축이라 확신한다. 이 두 축의 공통분모는 모방하려는 본능인데, 이때 매우 역설적인 점이 내포되어 있다. 첫 번째 금기의 경우, 폭력을 낳는 모방을 철저히 금한다면, 제의를 행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이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모든 모방을 삼가라는 것이 금기의 명령이라면, 반대로 위기를 종식시킨 사건을 되풀이하라, 본래의 희생자와 대체된 새로운 희생자를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제의의 명령이다.
모방성이 강한 폭력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엄격히 금지된다. 금기는 사회의 몰락을 가져올 일반적인 갈등, 싸움을 막으려는 절박한 필요성과 깊이 얽혀있다. 여성의 월경은 폭력에서의 피를 환기시키므로 많은 원시사회에서 터부시되고, 차이를 소멸시키는 거울, 쌍둥이들도 폭력을 불러올 수 있는 불길한 대상으로 꺼리게 된다. 친부살해, 근친상간 등을 철저히 금기시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지적처럼 금기로 묶어둔 것은 사실 인간이 가장 하고 싶은 것으로, 그대로 두면 파멸을 가져오므로 철저히 막는 구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막기만 하면 물은 넘쳐나게 마련이므로 적절한 해소방안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원시사회는 평소에는 엄격히 금했던 것을 제의에서는 자발적으로 포기한다. 폭력의 충동은 적절히 해소되지 않으면, 넘쳐흘러 가까운 주위에 재앙을 불러올 때까지 계속 축적된다. 유리피데스의 『메디아』에서 제이슨의 외도에 화가 치민 메디아는 증오의 진정한 대상이 손이 미치는 영역 밖에 가 있자, 자기 자식들을 대신 증오의 제물로 바친다. 폭력의 원초적 속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희생제의는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하나의 희생자를 대가로 폭력의 해결책을 찾고,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좋은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힘쓴 것이다. 이처럼 제의의 가장 긍정적 역할은 ‘폭력으로 폭력을 잠재우는’ 기능에 있다.
지라르는 희생제의가 일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것은 특히 사법제도가 부재하는 사회, 그래서 복수의 위협을 계속 받는 사회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인다. 사법제도는 복수를 합리화하면서 복수를 카타르시스와 같은 치유의 기술로 만들고 부차적으로는 폭력의 예방책이 되게 한다. 사법제도와 희생제의는 결국 같은 기능을 하는데 효력에 있어서는 사법제도가 앞선다. 그런데 사법제도는 거대한 정치 권력과 관련되어서만 존재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사법제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정치와 결탁하여 제대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지라르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은 항상 발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후기 구조주의 비평가들의 난해하고 복잡한 글과는 대조적으로 지라르의 글과 생각은 비교적 명쾌하다. 그러나 단계별로 도식화할 수 있는 그의 사상체계에는 틈새가 없지 않다. 우선 욕망은 모방되고 따라서 삼각형의 경쟁관계와 갈등을 유발한다는 그의 가설에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이 가설이 무너지면, 지라르의 폭력에 대한 생각도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두 번째는 희생제의로 이르는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느끼던 상호간의 폭력이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한 일치된 폭력으로 옮아가는지 그 이행과정이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라르는 주로 다양한 문학텍스트에서 희생양의 메커니즘을 보고 설득력 있는 예로 제시하지만, 스스로도 자기의 관심이 선택적이며, 자신의 가설을 입증해줄 텍스트에 한정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자신의 가설입증에 집착했다고 지라르는 비판했지만 그 역시 비슷한 결함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행동양식 속에 내포되어 있는 자기기만적인 요소를 문화의 기원에서부터 파헤치려는 열정적 노력과 천재적 통찰력 또한 두 석학에게 공통된다.
폭력으로 폭력을 다스리는 것이 희생제의라는 지라르의 분석은 그러면 인간에게서 폭력은 제거될 수 없으며 단지 넘치려는 물을 잘 관리해 흘려보내듯이 교통정리할 수 있을 뿐인가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나 신화에 은폐된 인간의 허위의식을 들추어내 해체하고, 문화의 뿌리에서부터 숨겨진 폭력의 실체를 발견하려는 지라르의 노력은 분명 인간의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인식과정이며 한 단계 더 진전된 성과이다. 또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소속력이 약한 이방인, 소외자에게 집단폭력으로 개개인의 증오심을 해소하는 군중심리에 대한 지라르의 통찰력은 요즈음의 영화, 문학텍스트뿐 아니라, 사회, 정치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분석틀이 되고 있다.
글쓴이소개: 박정오
1958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및 석사와 파리 제7대학교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논문으로 「포크너 소설의 신화방법론 연구」와 역서 뤼스 이리가라이 『나, 너, 우리』가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재직중이다.
문화에 숨겨진 폭력
박정오
힘없는 아이를 빙 둘러싸고 때리는 아이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유태인을 학살한 평상시에는 선량한 시민이었을 독일군인들─희생양에게 가해지는 집단의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반복되는가?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이런 폭력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 없는가? 가장 가까운 가족 내에서도 때로 피를 부르는 폭력이 있으니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해박한 지식에 근거한 명쾌한 설명을 르네 지라르의 후기 저서에서 발견하게 된다.
문학비평가로 출발한 르네 지라르는 초기에는 주로 세르반테스,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스탕달, 그리고 프루스트의 연구에 몰두했다.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의 핵심적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지라르는 문학의 거장들이 남긴 주요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추적하는데, 이때 이미 심리학과 신학같은 문학 외적인 분야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폭력과 성스러움』, 『태초 이래로 숨겨져 온 것』, 『희생양』, 『사악한 인간의 오랜 길』등 ’70년대 이후에 출간된 그의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기의 지라르는 인류학과 종교심리학의 영역으로 관심을 확대하며 문화비평가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마치 프로이트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정신분석의 틀을 확립한 다음 문화 전반을 읽어내는 일로 점점 관심을 확대하였고 이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분석의 중심틀이 되었던 것처럼, 지라르 역시 문학에서 문화로 반경을 확대해갈 때 그 근간에는 ‘욕망의 삼각형’으로 널리 알려진 욕망모방의 이론이 자리하고 있다.
지라르의 욕망모방론을 폭력과의 관련을 위해 간략히 살펴보면, 개개인이 느끼는 욕망이 자발적이고 독창적인 자기만의 욕구 같지만 이런 믿음은 근거 없는 ‘낭만적 거짓’일 뿐이며, 주체인 나는 다른 사람이 이미 선망하는 대상을 갖기 원한다는 것이다. 욕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항상 욕망을 중개하는 모델이 존재하며, 모델의 욕망을 주체는 그대로 모방한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엠마는 낭만적 사랑에 대해 자발적인 욕망을 체험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지만, 그녀의 욕망은 사실 여학교 기숙사에서 읽은 저급한 소설책에 나오는 전형적인 사랑이야기와 여주인공들에 의해 중개된 것이다. 여기서 지라르가 말하는 욕망은 갈증이나 허기와 같은 생물학적 욕구와는 구분된다. 우리에게 결여된 부분을 온전히 갖고 있는 상태, 이런 상태를 상징하는 물건이나 사람을 갖고 싶은 욕망을 뜻한다. 따라서 물을 마시면 해소되는 갈증과는 달리,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엠마는 남편 샤를르를 위시해 자작, 레옹, 로돌프 등 상대를 바꾸어보지만 그녀의 낭만적 사랑에 대한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이렇게 욕망은 모방되며, 삼각관계에서처럼 공통된 대상을 서로 차지하려니까 자연히 경쟁의식과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집단의 구성원은 모두 서로서로 적대감과 증오심을 갖게 되어 엄청난 폭력을 유발할 가능성을 갖는다. 이때 공동체의 파멸을 막기위해 서로에 대한 증오를 한 희생자에게로 돌려, 다시 말하면 모든 문제의 화근을 이 희생자의 탓으로 돌려 폭력을 해소하는 것이 희생의식, 희생제의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라르는 모방욕망이 어떻게 폭력을 낳게 되는지의 과정과 희생제의의 진정한 기능을 다양한 예를 통해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신성한 희생제의의 이면에는 희생물의 살해라는 폭력이 숨어있음을 간파하고 희생제의와 폭력의 관계에 연구의 초점을 두고 있다. 이 분야에 대한 지라르의 공헌은 지대하나, 희생제의에 대한 이전의 연구가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므로 이 주제연구의 흐름을 알아보는 것이 지라르 이론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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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생양 연구의 동향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라르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금기』에 대한 역동적 글읽기에 아예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근친상간과 같은 금기의 문제를 희생문제와 관련짓고, 이 두 문제를 집단폭력에 대한 해석의 도움으로 해결하려한 최초의 장본인이 바로 프로이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금기』에서 당시 활발하게 진척된 민속학과 인류학 자료에 힘입어 원시인들과 정신질환자들 사이의 생각의 유사성을 탐구한다. 토템을 숭배하는 종족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두 법칙은 토템 동물을 절대 죽이면 안되는 것과 같은 토템을 가진 이성과의 성교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가장 오랜 금기로서 프로이트는 이것들이 인간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강한 욕망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만약 토템동물이 아버지를 상징한다면, 이 양대계율은 곧바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 오이디푸스의 두 죄와 일치하게 되고, 이 두 금기사항은 어린 소년이 부모에게 갖는 가장 근원적인 바램이자 욕망이라 볼 수 있다. 의인화된 신들을 숭배하기 이전의 시대에서는 종족의 토템을 정기적으로 잡아먹는 것이 토템숭배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평소에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는 토템동물을 성스러운 의미에서 죽여 전체를 나누어 먹는 것이 토템종교의 큰 특징이다. 여기에 착안하여 프로이트는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종교는 원초적 부친살해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종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아버지와의 갈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지라르는 금기를 처음으로 토템의 희생과 연관시켜 해석한 프로이트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모든 문제를 항상 아버지의 존재로 다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희생양과 폭력의 구조를 보지 못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프로이트의 문제제기는 적절했으나,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려는 생각이 앞서 그릇된 해석을 낳게 되었다는 평가이다.
프로이트와 지라르의 근본차이는 욕망을 정의내리는 서로 다른 입장에 있다고 보여진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자연발생적인 것, 즉 탐나는 대상을 보고 주체가 자연스레 느끼는 자발적 산물로 보는 반면, 지라르는 욕망을 중개하는 매체가 있어 그 매체를 모방함으로써 욕망이 생겨난다고 본다. 모방이 먼저이며 진정한 ‘무의식’이라 본다. 지라르의 생각은 프로이트와 근본적으로 다르나 누구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종교의 기원을 탐구하는 연구자이다. 종교의 기저에 집단살해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나 신성화가 합의에서 나온다는 프로이트의 통찰력은 지라르 이론을 전개해나가는데 중요한 지적 자극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프로이트가 이처럼 지라르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나, 엄밀히 말하면 프로이트가 살해에 착안하게 된 것은 인류학 및 민속학적 자료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희생양의 문제를 처음으로 인류학에 소개한 학자는 프레이저(Sir James Frazer)이다. 전세계의 제의형태나 주술, 금기 등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한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의 주된 관심은 국왕 시해에 모아진다. 프레이저의 관점에서 살해의식의 희생자는 우선 왕이거나 식물과 연관 있는 신의 대변인이다. 그의 모델이 되는 희생은 본질적으로 농경의 성격을 띠고 있고 기능상으로는 속죄하는 역할을 한다. 왕국에서 우주는 곧 왕의 몸과 동일시되며 따라서 왕의 살해를 통해 우주는 매번 갱신된다고 믿어졌다. 후대에 와서 풍요제 때 마을사람들에게 사냥되는 동물이나 축제 때 싸워 얻어맞는 젊은이는 늙고 병든 왕을 대신하는 이미지로 의심해볼 수 있다. 축제를 희생양과 관련시켜 연구한 프레이저는 이 분야의 연구에 가장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종교학자 엘리어드(Mircea Eliade)는 프레이저의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켜 사회의 대다수는 시간을 순환구조로 인식함을 지적한다. 시간이 흘러 기운이 고갈될 경우, 정기적으로 에너지를 새롭게 갱신하기 위해 사회는 반드시 축제적인 행사를 열게 된다. 추수 때마다 축제를 벌려, 지난해의 나쁜 것들과 악을 희생양으로 대변되는 한 사람 또는 동물에 모두 실어 그를 축출함으로써 다시금 새로와진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사회는 선거가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새롭게 물갈이한다는 점에서 축제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프레이저의 생각이 의식의 영역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적용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엘리어드는 신성함과 세속적인 것의 개념을 도입하여 원시인의 의식구조를 설명하려 했다. 신성에서 유리되어 세속화된 현대인과는 달리 원시인은 신성한 것 속에서 살며 그들에게 신성은 곧 권력이었다고 보는 데 대해 지라르는 이러한 견해는 종교에 대한 ‘낭만적’ 시각이라 비판한다. 지라르의 관점에서 신성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폭력을 은폐하고 있고, 모든 종교의식의 근간을 이루는 중추는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2. 폭력과 희생양의 메커니즘
지라르는 제의에는 신성한 희생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실제 살해와 같은 폭력이 행사되는 서로 상반된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데 착안하여 희생과 폭력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신화와 고전에서부터 역사적 사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추적해간다.
개인이든 사회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폭력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폭력의 혼돈상태는 가장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지라르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질서는 차이에 근거해 세워진다. 현대사회는 민주주의란 개념과 더불어 인간의 평등을 열망하여, 개인의 사회적, 경제적 신분과는 무관한 차이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문화질서는 차이에 의해 조직된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차이들이다. 다른 이들에 대해 자신의 위치를 구별짓도록 하는 차이들 말이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근친상간은 가족 안에서의 극단적 차이 말살로 정의될 수 있다. 원시종교나 그리스 비극에서도 폭력적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이의 소멸 때문이다. 친부살해나 페스트의 경우에서처럼 차이들이 붕괴되면, 공동체 자체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혼돈과 위기상황이 초래된다. 왜냐하면 폭력은 엄청난 모방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차별 현상이 일어나면 집단의 구성원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서운 닮은꼴, 즉 분신이 되어 집단폭력을 유발할 가능성으로 가득차게 된다. 모방욕망은 불순한 전염병과 같아서 어떤 제동장치가 없으면 공동체 전체를 파괴할 것이다. 상호간의 폭력,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연쇄살인처럼 차이가 소멸한 곳에는 언제나 폭력의 위협이 있다. 많은 원시사회에서 쌍둥이나 거울에 비친 모습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사회구성원 서로에게 가해질 폭력을 적절히 해소할 방법은 없을까? 서로에게 향해진 폭력의 화살을 만장일치로 한 희생물을 향해 돌리는 것. 이것이 공동체가 필사적으로 찾아낸 해결책이다.
희생제의는 인간의 근본성향에서 발전한 것으로 내부의 폭력을 잠재우고 원시사회에서 폭발하는 갈등을 예방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희생되는 대체물은 사회전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폭력을 피하려는 의도로 내세워진 대상이다. 이때 인간은 희생양을 죽이는 폭력의 해소과정이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절대적 명령, 그 요구가 치밀할 뿐 아니라 끔찍한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훨씬 더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폭력을 해소한다. 희생양을 죽이는 신성한 의식 뒤에는 공동체가 서로에게 느끼는 증오와 폭력욕구를 적절히 해소하려는 메커니즘이 숨겨져 있다. 여기서 희생양은 꼭 개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지배집단에 대응되는 소수집단도 포함된다. 중세유럽이나 미국의 역사에 나타나는 마녀재판이나 2차대전 때의 유태인 학살도 이러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예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들의 집단이든 희생양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서로에게 느끼는 강한 적대감정들―보통 이것은 철저히 은닉되어 있다―을 모두 떠맡는다. 서로에게 가해질 수 있는 폭력을 희생양에 대한 일치된 폭력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희생제의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재현된다. 사회는 전체구성원을 다 파멸시킬 위험이 있는 이 폭력을 ‘희생시킬 수 있는’ 한 사람에게로 돌릴 방법을 찾게 되고 집단살해에서 이러한 실제이유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는 위기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이렇게 폭력의 배출구 역할을 하는 희생양은 사람일 경우 어떻게 결정되는가? 어떤 존재를 ‘희생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는가? 인간 희생제물로는 전쟁포로나 이방인, 노예도 있지만 아이, 총각, 신체장애자, 그리고 그리스의 ‘파마코스’(pharmakos:도시에서 준비해두고 있던 인간 희생물로서 재앙이 덮쳤을 때, 민심을 수습하고 평화를 되찾기 위해 재앙의 원흉으로 몰아 처형하곤 했다)처럼 인간쓰레기도 있으며, 왕이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희생양은 공동체에 거의 혹은 전혀 소속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아이나 성인식을 거치지 않은 청년은 사회구성원으로 보지 않았고, 노예나 파마코스가 최하층으로 사회집단에서 유리되어 있다면, 왕은 최고의 존재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의 몇몇 왕들처럼 가뭄과 같은 재앙이 계속될 경우 왕 자신이 가장 제의적이고 엄격하게 희생되기도 한다. 위계질서의 최정상에 있던 상징적 존재의 파멸은 하찮은 노예의 희생보다 훨씬 큰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왕실도 사람들의 증오심을 최하층으로 전환하여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므로 사회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형태의 희생양을 만들어내게 된다. 한편 여성들 특히 기혼여성은 사회구성원으로 소속되지 않았지만 제물로 바쳐지는 예는 거의 없었다. 이유는 양쪽 집안의 보복 가능성을 두려워한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마녀로 몰린 여자들이 주로 가족 없이 홀로 마을의 외곽에서 살던 고립된 소외자임을 상기할 때 이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태초 이래로 숨겨져 온 것』에서 지라르는 육체상의 특이성, 특히 불구성이 희생양의 역할을 맡는 신화적 영웅들의 한 특징임을 지적한다. 오이디푸스는 다리를 절며, 야곱 역시 절름발이이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시에 처음 온 이방인이며 불구자로 이 사회의 주변인이며, 또한 동시에 왕의 지위라는 특수성 때문에 집단폭력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희생양의 구비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이 문제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마르티아’(Hamartia:보통 주인공의 성격에서 유래한 판단의 착오 또는 비극적 결함)는 희생양을 향한 집단폭력의 범죄를 최소화하는 시적 방법과 동일하다고 본다. 시인들은 주인공에게 오만과 같은 비극적 결함을 부여함으로써 희생양에 대한 박해의 이야기를 교묘히 위장한다. 기독교의 복음서는 최초로 희생양 예수의 완전한 무죄성을 숨김 없이 드러냄으로써 박해를 위장하고 있는 다른 이전의 텍스트와 확연히 구분된다.
이제까지 보았듯이 지라르는 희생제의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전형화한다. 먼저 공동체의 질서를 이루는 차이들이 소멸할 때 희생을 부르는 위기가 초래된다. 그러면 모방본능으로 폭력이 급속도로 확산될 우려가 생기고 이를 막기 위해 서로를 향한 폭력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소속력이 약한 한 희생양을 향해 만장일치된 집단폭력의 형태를 띤다. 이때 희생양에 대한 집단폭력은 신성한 신의 명령이란 이름으로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 희생양의 살해의식으로 공동체의 갈등은 해소되고 일시적인 평화와 질서를 되찾게 된다.
그리스 비극작가 유리피데스의 『바커스의 여사제들』은 희생제의에 대한 지라르의 주장을 엿보기에 좋은 텍스트이다. 디오니소스의 존재유무는 알 수 없으나, 디오니소스 의식은 역사적으로 존재했었고, 이 의식을 다루고 있는 『바커스의 여사제들』(바커스는 디오니소스의 로마식 명칭)은 축제의 변질되기 이전 모습을 비교적 잘 드러내주고 있다. 우선 디오니소스의 이상한 매력에 매료되어 의식에 불려나가는 무리는 사회의 모든 차이를 벗어난 집단이 된다. 여자는 남자와 같아지고 노예는 귀족과 한데 뒤섞인다. 성과 나이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도 허물어진다. 왕의 어머니인 아가베와 사촌 이노 그리고 많은 여인들이 가정을 버리고 몰려다니며 바커스제를 올린다.
목가적이던 이 여사제들의 방랑은 곧 피비린내 나는 집단폭력으로 변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여자들은 짐승이나 남자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달려든다. 이때 소떼를 남자로 잘못 알고 공격하는데 동물과 사람 사이의 차이도 소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테베의 왕 펜테우스만이 디오니소스의 신성을 부인하며 이러한 광란에 저항한다. 그는 디오니소스를 체포하라는 불경을 범하고 지나친 오만과 자기과신<Hubris(휴브리스)>이란 비극적 결함을 갖는다. 펜테우스는 부하들이 계속 디오니소스를 잡는데 실패하자 직접 나갔다가 광란상태에서 그를 짐승으로 오인한 어머니 아가베와 이모 이노가 이끄는 여신도들에게 무참히 찢겨 죽는다. 이 의식에서 여신도들은 만장일치로 모두 살해에 가담하며, 무기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집단린치를 가한다. 『바커스의 여사제들』은 희생제의에서 보통 숨겨져 있는 집단적 폭력놀이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펜테우스가 희생양이란 점은 그의 불경스러움, 자기과신이란 비극적 결함으로 살짝 은폐되어 있다. 여기서 바커스는 우리 내부에 저마다 잠재해 있는 폭력의 환상적 육화로 볼 수 있으며, 바커스제는 차이의 소멸, 희생위기, 희생양에 대한 일치된 집단폭력 등 폭력의 진행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왜 하필이면 폭력을 행하는 무리를 여신도들로 설정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지라르는 바커스제의 혼란을 거의 전적으로 여자들만의 것이라고 전가시킴으로써 남성의 권위와 존엄을 공고히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추측한다.
3. 금기와 희생제의
바커스제에서 보여지는 환각상태와 같은 광기와 폭력은 사실 평소에는 철저히 금기시되어 온 것들이다. 폭력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원시사회는 갖가지 금기를 설정해놓았던 것이다. 지라르는 모방이론을 근거로 이러한 금기와 제의는 문화를 구성해온 두 축이라 확신한다. 이 두 축의 공통분모는 모방하려는 본능인데, 이때 매우 역설적인 점이 내포되어 있다. 첫 번째 금기의 경우, 폭력을 낳는 모방을 철저히 금한다면, 제의를 행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이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모든 모방을 삼가라는 것이 금기의 명령이라면, 반대로 위기를 종식시킨 사건을 되풀이하라, 본래의 희생자와 대체된 새로운 희생자를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제의의 명령이다.
모방성이 강한 폭력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엄격히 금지된다. 금기는 사회의 몰락을 가져올 일반적인 갈등, 싸움을 막으려는 절박한 필요성과 깊이 얽혀있다. 여성의 월경은 폭력에서의 피를 환기시키므로 많은 원시사회에서 터부시되고, 차이를 소멸시키는 거울, 쌍둥이들도 폭력을 불러올 수 있는 불길한 대상으로 꺼리게 된다. 친부살해, 근친상간 등을 철저히 금기시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지적처럼 금기로 묶어둔 것은 사실 인간이 가장 하고 싶은 것으로, 그대로 두면 파멸을 가져오므로 철저히 막는 구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막기만 하면 물은 넘쳐나게 마련이므로 적절한 해소방안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원시사회는 평소에는 엄격히 금했던 것을 제의에서는 자발적으로 포기한다. 폭력의 충동은 적절히 해소되지 않으면, 넘쳐흘러 가까운 주위에 재앙을 불러올 때까지 계속 축적된다. 유리피데스의 『메디아』에서 제이슨의 외도에 화가 치민 메디아는 증오의 진정한 대상이 손이 미치는 영역 밖에 가 있자, 자기 자식들을 대신 증오의 제물로 바친다. 폭력의 원초적 속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희생제의는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하나의 희생자를 대가로 폭력의 해결책을 찾고,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좋은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힘쓴 것이다. 이처럼 제의의 가장 긍정적 역할은 ‘폭력으로 폭력을 잠재우는’ 기능에 있다.
지라르는 희생제의가 일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것은 특히 사법제도가 부재하는 사회, 그래서 복수의 위협을 계속 받는 사회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인다. 사법제도는 복수를 합리화하면서 복수를 카타르시스와 같은 치유의 기술로 만들고 부차적으로는 폭력의 예방책이 되게 한다. 사법제도와 희생제의는 결국 같은 기능을 하는데 효력에 있어서는 사법제도가 앞선다. 그런데 사법제도는 거대한 정치 권력과 관련되어서만 존재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사법제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정치와 결탁하여 제대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지라르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은 항상 발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후기 구조주의 비평가들의 난해하고 복잡한 글과는 대조적으로 지라르의 글과 생각은 비교적 명쾌하다. 그러나 단계별로 도식화할 수 있는 그의 사상체계에는 틈새가 없지 않다. 우선 욕망은 모방되고 따라서 삼각형의 경쟁관계와 갈등을 유발한다는 그의 가설에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이 가설이 무너지면, 지라르의 폭력에 대한 생각도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두 번째는 희생제의로 이르는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느끼던 상호간의 폭력이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한 일치된 폭력으로 옮아가는지 그 이행과정이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라르는 주로 다양한 문학텍스트에서 희생양의 메커니즘을 보고 설득력 있는 예로 제시하지만, 스스로도 자기의 관심이 선택적이며, 자신의 가설을 입증해줄 텍스트에 한정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자신의 가설입증에 집착했다고 지라르는 비판했지만 그 역시 비슷한 결함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행동양식 속에 내포되어 있는 자기기만적인 요소를 문화의 기원에서부터 파헤치려는 열정적 노력과 천재적 통찰력 또한 두 석학에게 공통된다.
폭력으로 폭력을 다스리는 것이 희생제의라는 지라르의 분석은 그러면 인간에게서 폭력은 제거될 수 없으며 단지 넘치려는 물을 잘 관리해 흘려보내듯이 교통정리할 수 있을 뿐인가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나 신화에 은폐된 인간의 허위의식을 들추어내 해체하고, 문화의 뿌리에서부터 숨겨진 폭력의 실체를 발견하려는 지라르의 노력은 분명 인간의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인식과정이며 한 단계 더 진전된 성과이다. 또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소속력이 약한 이방인, 소외자에게 집단폭력으로 개개인의 증오심을 해소하는 군중심리에 대한 지라르의 통찰력은 요즈음의 영화, 문학텍스트뿐 아니라, 사회, 정치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분석틀이 되고 있다.
글쓴이소개: 박정오
1958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및 석사와 파리 제7대학교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논문으로 「포크너 소설의 신화방법론 연구」와 역서 뤼스 이리가라이 『나, 너, 우리』가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재직중이다.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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