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성스러움: La violence et le sacre
by Rene Girard , 1973
"인간의 욕망 자체에는 전염병 같은 본질적 모방 경향이 내재해 있으며, 이는 타인에 의해 촉발되거나 강화된다. 특히 자신이 할 수 없는 폭력을 숭배하고 모방한다."
"짝패의 갈등이 통제되지 않을 경우 영원한 상호 폭력의 악순환으로 빠지게 되는데, 그 악순환을 끊기 위해 인류가 도입한 문화적 장치가 '희생제의'다. 사회의 반목과 불화가 위험수위에 이를 때 특정한 대상을 지목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내부의 화평을 끌어내는 것이 희생제의라는 집단적 폭력 행위다. 희생물은 궁극적으로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성스러운 존재로 신격화된다. 희생제의는 희생자 처지에서 보면 집단 폭력이지만, 가해자 처지에서 보면 성스러운 행위다. 이런 현상은 인류의 모든 문화적 텍스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Rene Girard(1923~, 프랑스 아비뇽 출생)의 {폭력과 신성함}은, 인간 사회 안에 잠재태에 머물고 있는 폭력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공하는 중요한 저서이다. 그가 그의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희생제의>, 그리고 여러가지 문화.사회적인 장치들에 대한 그의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논지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욕망이론>을 거칠게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르네 지라르는 문학 비평에서 출발하여, 제의-종교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인류학으로 지평을 확대시켜 간 프랑스의 학자이다. 그의 초기 저작은, 중요한 서구 작가들의 소설 속에서 인간이 대상을 욕망하는 방식을 분석하여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 바쳐진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되어지는 대상 사이에 끼어 있는 제3자(매개자)를 통해서 욕망한다. 그 제3자는 욕망하는 주체가 욕망하는 것을 똑같이 욕망하는 욕망의 경쟁자이기도 하다. 경쟁자는 어떤 대상을 욕망함으로써, 그 대상이 욕망할만한 것이라는 것을 욕망주체에게 알려준다. 이 경쟁자는 욕망이 대상이 욕망할만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의미에서 욕망의 典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욕망의 실현을 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욕망 주체는 자기 스스로 대상을 욕망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이렇게 제3자의 개입을 통해 욕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욕망은, <자발적 욕망>이 아니라, <비자발적 욕망>이다. 욕망은, 제3자의 욕망을 베낀 욕망, <모방된 욕망>이다. 따라서 욕망의 현상은 욕망 그 자체의 현상이 아니라 <욕망모방>의 현상이다. <욕망모방>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이것이 지라르의 유명한 <욕망의 삼각형>의 기본 구조이다.
그런데, 욕망주체와 욕망매개자 사이의 관계가 가까울 때, 질투와 선망, 원망 따위의 미묘하고 부정적인 갈등이 생겨나는데, 이처럼 욕망주체와 나무나 가까워서 거의 욕망주체 자신과 혼동되는 욕망의 매개자를 지라르는 짝패(分身)라고 부른다. 이 짝패는 사회 여기저기에서 이런저런 원인으로 발생하여 집적되어 터져나올 것만 기다리고 있는, 지라르가 본질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원초적 폭력의 생산자가 된다. 현대사회처럼 개인과 개인 사이의 차이가 점점 더 없어져 가는 사회에서 짝패 갈등의 발생 빈도는 어느 사회에서보다도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욕망이 모방되듯이 폭력도 모방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멀리 갈 필요조차 없다. 어떤 요건이 형성될 때, 무시무시한 집단적 광기로 발전하는 인간의 폭력적 성향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가장 긴급한 사안인 5.18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행태를 떠올려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지라르에 의하면, 인간 사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도 같다. 인간은 잠재워진 폭력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라르는 인간이 어떻게 그 폭력을 잠재우고 사회를 이끌어왔는가를 살펴보다가, <희생제의>라는 종교제도(사실은 사회적 용도가 훨씬 더 강한 사회제도)에 착안한다. 지라르가 문학비평에서 사회인류학으로 옮기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이 제도에 대한 전통적인 신학적(신의 분노를 잠재우고,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와해된 질서를 주기적인 제의를 통해 바로잡는다는) 해석과, 레비-스트로스 류의 과학적(희생은 현실적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단순히 <거짓>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해석을 모두 지양하고,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펼쳐나간다.
그는 <희생제의>는 명백한 사회적 기능을 가지는 폭력의 예방책이었다는 것을 밝혀 보인다. 그에 의하면, <희생>을 요구하는 <신성함>은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 각자가, 또는 인간 공동체가 그것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無知한 어떤 <원초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원초적 사건은 따라서 <살인>으로 기억된다(카인과 아벨의 경우를 상기해 볼 것). <신성함은 폭력이다>. <희생제의>는 <신성함-폭력>을 다스려 온 방식으로서, 고대인들은 사회 전체를 급기야 완전히 와해시킬지도 모르는 폭발력을 언제나 갖추고 있는 그 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을 <희생>제도를 통하여 섬세하게 발달시켜 왔다. <희생제의>는 그 폭력에 대항하여 전면적인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위험하다), 그것을 미묘한 방식으로 따돌린다. 요컨대 속여넘기는 것이다. 이 속임수의 근본적 기술은 <대체>의 원칙이다. 즉, <희생될만한 것>을 골라내어, 사회 전체에 떠도는 일체의 폭력의 개연성을 미리 그 <희생물>에게로 떠넘기는 것이다. 그런 독법으로 읽을 경우, 예수의 희생은 종교적인 의미보다도 사회.정치적인 의미를 더욱더 가지게 된다. 즉, 그는 당시 유태사회의 제반갈등이 집중된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지라르가 <희생>에 대한 연구를 통해 드러내보이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영원히 <신성함>에 대한 무지를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턱대고 신을 믿거나, 또는 신의 부재를 주장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더욱, 그가 경계하는 것은, 목적없이 계속 내적 기교만 교묘하게 다듬어가고 있는 <해석학>의 위험이다. 해석학은 점점더 교묘해지면서 비현실적이 되고, 난해한 말이 되어 신랄한 <논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말하자면, 공동체 상호 간에 폭력 모방이 일어나듯이, 해석과 해석 사이에 상호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폭력을 해결하기는커녕 폭력을 끌어들일 뿐이라고 지라르는 생각한다. <본질적 폭력>은 이처럼 역사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지식의 측면에서도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인간의 본능이 야수적이라는 소박한 의견으로 인간의 부정적 현상을 진단하기에는 인간이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너무나 복잡해져 버렸다. 폭력은, 이미 매우 교묘한 형태로, 도대체 그것을 대항해서 어느 지점에 전선을 구축해야할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변질되어 버렸다. 나 스스로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을 현대인 각자는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인간존재의 어느 지평에서는 아직도 분명히 유효하다. 그러나, 지라르의 견해 역시, 매우 실질적인 차원에서 분명히 경청할만하다. 아직도 군화발에 짓밟혀 죽어간 많은 망령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1995년 한국사회에서, 지라르의 {폭력과 신성함}은 꼼꼼한 독서를 요구하는 중요한 책들 중의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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