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시간질서는 더이상 무의미…
史는 죽었지만 史學은 확대된 지평 얻어
|
이런 생각은 전문 역사가들에게도 당연시되어 왔다. 그들은 항상 기억보다 역사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해왔다. 기억은 너무 개별적이어서 자의적이고 산만하며, 너무 원초적 감정에 빠져 있어 변덕스럽고 신뢰성이 없다. 이런 보잘것없는 기억이, 그보다 훨씬 월등한 역사의 ‘식민통치’를 받는 것은 너무나도 정당한 일이었다. 오래도록 기억은 역사의 강고한 질서에 편입된 채 일차 원료의 공급처로 착취당해왔다.
그러나 20세기 말엽부터 기억은 역사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무엇보다 역사라는 대제국의 권력이 큰 폭으로 하강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역사가 그간 누려온 권력의 비밀은 집단적 정체성이라는 큰 자산을 보유한 데 있었다. 역사는 나름의 논리적 질서-‘역사적 시간’-를 구축함으로써 인간 삶의 근거와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시대의 이른바 ‘세계화’ 물결은 기존의 집단정체성을 크게 침식했다. 민족, 국가, 계급 등과 같은 전통적 집단에 대한 긴밀한 유대감은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역사는 기껏해야 ‘문화재’의 형태로 존속하게 되며 급기야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관광상품으로 전락한다. 또한 새로운 전자매체의 급속한 발전도 이러한 추세에 가세하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의 출현을 통해 무제한의 시·청각적 이미지들이 범람하게 되자 이러한 ‘가상현실’ 앞에서 역사는 종래의 신성한 권위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역사는 일종의 오락거리가 되어버렸다.
흔히 ‘탈(脫)역사(posthistoire)’라고도 표현되는 이러한 역사의 약화 추세는 기억의 부흥을 위한 호조건을 형성했다. 그간 공적인 성격을 띠어왔던 ‘보편사(History)’가 다양한 미시적 영역의 ‘역사들(histories)’로 분할됨에 따라 이제 남게 된 것은 개개인이나 개별집단의 주관적 체험들뿐이다. 이러한 큰 변화는 진지한 역사가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더 이상 기억을 역사의 이름으로 ‘착취’하지 않고 대신 양자의 본원적 관계에 대해서 처음부터 다시 성찰해보고자 했다.
그 선구적인 예가 프랑스에서의 ‘기억의 터(lieux de memoire)’ 연구이다. 이것은 역사가 피에르 노라(Pierre Nora)가 기획하여 1984년부터 1992년까지 발간한 총 7권의 대저작을 필두로 이루어졌다. ‘기억의 터’는 프랑스인이 자기 민족에 대해 지니는 모든 종류의 기억을 총망라하고 있다. 여기에는 파리의 팡테옹,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삼색기, ‘자유-평등-박애’의 구호나 나폴레옹 법전, 또는 19세기 역사가 라비스의 저서 ‘프랑스사’ 등 다양한 차원의 기억이 백과사전처럼 두루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작업이 필요했을까? 그것은 종래의 민족사적 관점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과거는 어렴풋한 기억으로서만 존재한다. ‘기억의 터’라는 용어에서 ‘터(lieux)’란 구체적 장소를 지칭한다기보다는 기억의 어렴풋한 흔적을 암시하는 메타포에 가깝다. 노라가 기획한 이 대저작은 역사가들이 기억의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놀라운 저작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이미 1920년대에 프랑스의 사회학자 모리스 알바시(Maurice Halbwachs)가 제시한 ‘집단 기억(memoire collective)’ 이론이었다. 그에 따르면 기억이란 개인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인 것으로서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억은 항상 특정한 집단에게만 유효할 뿐이며 보편성과는 거리가 멀다. 알바시의 이론에 의지한 ‘기억의 터’ 연구는 한 민족의 집단기억이 사회적으로 구축되는 과정을 밝혀냄으로써 ‘민족사’ 이후의 대안적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프랑스 역사학계의 이러한 연구는 독일 역사학계에 창조적으로 수용되었다. 독일에서는 프랑스에 비해 좀더 안정적으로 장기간 지속되는 기억의 형태에 주목했다. 이러한 연구는 문화과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과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 부부가 제시한 ‘기억문화(Erinnerungskultur)’ 개념에 크게 힘입었다. 이에 따르면 한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형식이 필요하다. 상징(물), 도상, 묘비, 사원, 기념비 또는 제의와 축제 등이 없으면 기억은 오래 전승되지 못한다. 이러한 이론에 근거한 독일의 ‘기억문화’ 연구는 기억이 전승되는 형식을 규명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기억을 놓고 벌이는 사회·정치 투쟁의 과정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건짓는 문화적 가치체계, 특수한 기억을 매개로 결속된 ‘기억공동체’ 그리고 기억의 예술적 형상화 및 그 매체 등이 주요 대상으로 포함된다. 결국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분명해진 점은 일견 기억보다 우월해 보이던 역사도 실은 포괄적인 ‘기억문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문화이론가 호이센(Andreas Huyssen)은 그의 유명한 저서 ‘황혼의 기억들’에서 근간에 만연해 있는 ‘기억에 대한 강박증적인 몰두’가 시간개념의 와해로 말미암은 일반적인 위기의 증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기억은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시해 온 시간질서-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상 역사적 시간이란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즉, 그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체험에 근거를 둔 근대적 ‘기억문화’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제 ‘탈역사’라는 새로운 기억문화에서 각 개인 및 특정 집단은 더 이상 역사라는 공식적 시간질서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을 영위하고자 한다. 따라서 역사학은 시간영역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특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가 반드시 역사학을 위축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기억에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역사학은 혼란스러워진 것이 아니라 보다 확대된 지평을 얻게 되었다. 이미 프랑스와 독일의 예가 보여주었듯이, 역사가들은 그간 ‘숭고한’ 역사에 짓눌려왔던 다양한 목소리들에 귀기울이고 있으며 한 사회의 올곧은 집단기억을 형성하는 데 자신의 학문이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역사의 죽음은 결국 의미 있는 희생이었다. 이제 역사가들은 역사의 폐기물 더미 위에 다시금 기억의 새싹이 돋아남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
전진성 교수는 현재 부산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려대 사학과 및 동대학원을 거쳐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역사이론, 독일 사학사 및 문화사 등이며 최근에는 과거를 재현하는 다양한 매체에 관해 연구 중이다. 저서로는 ‘보수혁명’(책세상), ‘박물관의 탄생’(살림) 등이 있다.
'삶, 사람들 그리고 우리 > 읽을거리, 생각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시민불복종 : 법에 있어서 실천이성의 실현을 향하여! (0) | 2008.05.16 |
---|---|
[스크랩] 현대환경론의 이해(데이비드 페퍼) (0) | 2008.05.16 |
[스크랩] [조선화두6]자유주의냐 공동체주의냐 (0) | 2008.05.16 |
[스크랩] [조선화두5]새로운 제국의 탄생 (0) | 2008.05.16 |
[스크랩] [조선화두4]유전공학, 딜레마와 해법 (0) | 2008.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