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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대환경론의 이해(데이비드 페퍼)

ddolappa 2008. 5. 16.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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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환경론의 이해  데이비드 페퍼 환경학자

  

1. 현대환경론의 정의

2. 환경론자들의 주요 주장

3. 현대환경론의 과제

4. 『성장한계론』 『생존을 위한 청사진』 『작은 것은 아름답다』

5-1. 현대 환경론의 분류

5-2. 현대 환경론의 분류

6. 표 1, 2

  

  

1. 현대환경론의 정의


현시대의 ꡐ환경문제ꡑ에 관한 토의내용이나 기사를 몇 차례 접해보면,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몇몇 환경운동단체들의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된다. 이들은 인공환경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ꡐ자연적ꡑ 상태의 자연환경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관심을 표명하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분명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구동성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의는 다른 환경운동단체와의 토론이 계속 진행되면 곧 사라져버리고 스스로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격렬한 논쟁이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사례로는 마르크스주의 환경운동가들에 대한 프라이(Fry)의 혹평과 중산층 환경운동가들에 대한 북친(M. Bookchin)의 욕설, 그리고 미국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자동차 스티커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ꡒ만일 실업을 당해 배가 고프면, 환경운동가를 잡아먹을지니라ꡓ는 문구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환경문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자연에 대한 보다 슬기롭고 조화로운 태도가 필요하다고 합의한 환경운동가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전혀 없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환경운동가들의 견해차이는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것일 수도 있으나 가끔은 상대방의 의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환경론과 환경운동가들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환경운동의 조류 속에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 노력하는 무리와 이에 반대하는 무리가 동시에 존재하는데, 이들은 때때로 동일한 주장을 내세우면서 혼란을 초래한다.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환경운동가들을 적절히 분류하고자 한 많은 시도가 있었다.


1972년에 출간된 『옥스퍼드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ꡐ환경운동가ꡑ를, ① ꡐ환경론(개인이나 단체의 발전보다 환경문제의 중요성을 더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이론)의 원리를 신뢰하고 이를 널리 알리려는 사람ꡑ, ② ꡐ단순히 환경을 공해와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관심을 갖는 사람ꡑ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1981년에 출간된 존스턴이 엮은 『인문지리학사전』(Dictionary of Human Geography)에는 ꡐ환경론ꡑ을 ꡐ환경론에 관한 관심에서 유래한 이데올로기 및 이의 실행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당분간은 이와 같은 개략적인 정의로도 논리전개에 별다른 불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옥스퍼드사전』에서의 ①항의 정의처럼 ꡐ환경론ꡑ을 ꡐ환경결정론ꡑ(environmental determinism)과 동의어로 착각하는 오류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오류를 그대로 둔다면, ꡐ사회-경제적 개혁이 없이도ꡑ 환경문제가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ꡐ사회-경제적 개혁이 없이는ꡑ 결코 환경문제가 개선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나타내는 극단적 결정론에 걷잡을 수 없이 휘말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오라이어단(OꡑRiordan)의 견해에 따르면 ꡒ환경운동은 공정하고 독점적이 아니며 영원하고도 겸손한 새로운 관념으로 우리들의 정신과 육체를 인도함으로써 좀더 나은 삶의 방식이 가능함을 믿는, 일종의 신념에 기초한 개혁운동ꡓ이다. 그러나 환경운동단체들을 살펴보면 이들 중에는 여러 파벌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변화라면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고 자신이 한번 소유한 자원은 절대로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고집불통도 있다. 오라이어단은 이러한 보수성향 때문에 보통 환경운동단체의 대열에서 삭제되는 단체들도 환경운동의 영역 속에 포함시키는 아량을 보여준다.


오라이어단에 따르면 ꡐ환경운동ꡑ은 몇 개의 모순된 요소―-즉 ꡐ공공의 이익과 이에 대립하는 개인의 자유ꡑ ꡐ국가안보와 이에 대립하는 세계적 공동인식ꡑ ꡐ소수의 권리와 이에 대립하는 다수의 권리ꡑ ꡐ현세대의 권리와 이에 대립하는 후세대의 권리보호ꡑ- -간의 중재를 위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면, 개인적인 소유욕을 바탕으로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려는 극히 이기적인 욕구와 물질보다는 정신을 중시해서 사회?환경적 정의의 실현에 몰두하는 극히 바람직한 가치체계와의 극단적인 긴장관계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ꡐ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의 대립ꡑ은 현대의 환경론에 관한 여러 문헌에서 가장 앞다투어 다루고 있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ꡐ후기산업사회ꡑ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로 등장한 『이콜로지스트』(Ecologist)의 창간호(1970)에도 나타난다. 이 잡지의 표지에는 ꡒ인간과 환경, 생활의 질, 오염, 보전ꡓ이라는 표제가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뒷표지는 의외로 ꡐ범오스트레일리언ꡑ(Pan-Australian) 그룹의 선전광고를 싣고 있다. 이 그룹은 『이콜로지스트』의 시의적절한 창간을 축하하면서, 덧붙여 자신이 선두주자로 성장해나가고 있는 유력한 그룹임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의 급진적인 환경론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이미 이 앞뒷표지의 색다른 주장에 거의 중재가 불가능할 정도의 극단적인 긴장관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긴장관계는 후기 산업사회에만 존재하는 고유한 유산은 아니다. 튜안(Yi-fu Tuan)은 그 증거로, 고대와 중세의 중국 및 지중해 연안국에서 종종 ꡐ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ꡑ에 있어 ꡐ관념적인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실제행동ꡑ이 행해졌음을 든다.


물론 이와 같은 모순을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말로만 환경을 아끼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환경문제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이러한 긴장관계나 모호성 그리고 일말의 위선적 성격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오라이어단의 견해처럼, 환경문제에 대한 올바른 관심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싸움터로 우리를 이끈다. ꡐ빈 병을 어떻게 할 것인가ꡑ라는 간단한 의문을 통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ꡐ지구와 자본주의와 인류의 미래ꡑ 같은 깊은 의문을 통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사고를 진행해나가는 동안에 발생하는 모든 의문과 관심은 ꡐ스스로의 행동과 환경문제와의 관련성ꡑ에 대한 가장 단순한 의문에서 비롯되는 일련의 논리적 도약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2. 환경론자들의 주요 주장


환경문제에 관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심이 시작된 정확한 날짜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손쉽고도 유용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인 ꡐ환경운동의 이정표가 되어온 출판물들이나 사건을 추적ꡑ하는 방법을 통해 현대환경론의 기원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로와 고이더(Lowe and Goyder)는 가장 오래된 국립환경보호운동단체인 영국 하원의 ꡐ공공녹지 및 보도보존협회ꡑ(Open Spaces and Footpaths Preservation Society)가 1865년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했다. 로와 고이더는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변화되는 역사적 발달과정을 추적해서, 급격하게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기를 밝히기도 했다.

그들에 따르면, 1890년대와 1920년대 그리고 1950년대 말과 1970년대 초가 바로 그러한 시기이다. 그런데 이 시기들은 모두 지속된 경제성장의 말기로서 사람들이 고도로 발달된 물질적 가치관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초는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 다른 세 시기와 구별되고 있다. 즉 1970년대 초는 쟁점의 과다출현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이다. 이 관심은 1967~74년 사이 영국과 미국에서 최고조에 달했으나 그후로는 차츰 식어버렸다. 그러나 이 책이 발간된 1984년에 이르기까지도 이 관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 관심이 발생한 원인 중의 하나는, 부유해지고 교육의 혜택까지도 누리게 된 중간층(곧 환경운동의 중추를 형성하게 되는 계층) 사이에서 ꡐ스스로 경험해본 물질적 풍요와 이의 토대인 물질만능주의ꡑ에 대한 환멸이 팽배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질만능주의는 물론 정신적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경험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도 쉽게 정신적 충족감을 얻지는 못한다. ꡐ물질적인 풍요ꡑ와 결코 이를 쉽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ꡐ관념에 대한 추구ꡑ(환경운동 등의)에 대한 대중의 성향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환경문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왜 1970년대 중반 이후에 급격하게 식어버렸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침체는 대중에게 의식주의 해결에 대한 집착의식을 불어넣었는데,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는 심각한 실업문제는 이를 더욱 심화시킨다. 대중적인 관심은 이제 ꡐ환경문제ꡑ를 떠나 오라이어단이 ꡐ국가의 우선적 당면과제ꡑ라 비꼬는 ꡐ경제성장과 고용유발정책ꡑ 및 ꡐ국가안보ꡑ로 쏠리게 된다. 그런데 ꡐ국가의 우선적 당면과제ꡑ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거나 위협을 받게 되면, 위정자들은 자신의 능력은 고려하지도 않고 ꡐ국가의 우선적 당면과제ꡑ에 밀려 단지 3순위로 밀려나버린 ꡐ환경의 질과 생태계의 조화를 되찾으려는 환경운동ꡑ에 자신들의 정책적 과오를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기합리화가 전세계의 모든 인류에게 순조롭게 먹혀들어가지는 않는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게 마련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많은 환경운동들이 대부분 젊은 층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환경운동은 기성세대의 낡은 가치관과 철학에 대한 젊은 세대의 비판과 도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앨러비(Allaby)가 ꡐ진보적 생태주의자들ꡑ(Eco-Activists)이라 부르는 ꡐ환경운동의 지도자들ꡑ 중에는 분명히 중년층도 있고 노년층도 있다. ꡒ인간환경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젊은이들ꡓ이라는 앨러비의 표현처럼, 환경운동에 있어 젊은 층의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환경운동에 지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에를리히(Ehrlich)와 사강(Sagan) 그리고 카프라는 모두 중년층이었다. 또한 러셀이 7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로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1960년대 초의 반핵운동에 앞장서서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했던 일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아마도 초기의 환경운동과 지난 20년간의 환경운동과의 차이는, 지난 20년간의 환경운동이 주로 대중운동의 형태를 취했다는 점일 것이다. 환경문제에 관한 관심은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을 대중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는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의 의식 속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과연 ꡐ대중적 차원으로까지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는가ꡑ는 어느 정도까지는 ꡐ대중매체가 전달하는 위기의식에 대한 대중적 반응의 결과ꡑ에 달려 있다. 그런데 대중적 반응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와는 관계없이 ꡐ오염과 공해ꡑ는 소수의 특정인들만 선택적으로 괴롭히는 문제가 아니라, ꡐ국가와 인종과 계층을 초월해 지극히 민주적(?)으로 모든 인류와 생물을 괴롭히는ꡑ 실로 광범위하고 고질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어쩔 수 없이 대중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일종의 민중저항운동으로 계속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조류는 1950년대 말 영국에서의 치열한 반핵운동을 필두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는데, 현재는 서유럽에서 절정에 달해 있는 평화운동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민중저항운동으로서의 환경운동은 엄청난 재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ꡐ원자탄과 수소폭탄 및 중성자탄 등의, 인류와 환경에 대한 무시무시한 위협ꡑ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지난 수년간의 환경운동을 통해 생태주의자들과 반핵단체는 무기경쟁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롭고 조화로운 관계를 해치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철학을 잉태하고, 다시 이 사회?경제적 구조와 철학은 무기경쟁을 가속화시키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데에 동의했다.


이러한 운동에서 나타나고 있는 초창기의 선언문과 후기의 선언문 사이의 한 가지 차이를 살펴보면, 1950년대 후반에는 ꡐ평화적인 원자력사용ꡑ만을 요구했으나 1980년대 초에는 상대적으로 극소수만이 이와 같은 주장을 계속하게 되었고, 점차 ꡐ핵에너지와 핵폭탄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ꡑ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중간단계인 1960년대 초와 중반 미국에서는 ꡐ민권운동ꡑ(civil rights protest)이 있었다. 이는 소외계층의 생활수준과 도시환경의 질을 향상시키고 자원의 지나친 불균형분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에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미국 내의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미군이 사용한 ꡐ고엽제ꡑ(defoliant)가 환경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이유로 비판되었으며, 굳이 남의 나라의 전쟁에 참여해 젊은이들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켜야 하느냐는 여론이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물론 베트남전쟁은 표면적으로는 ꡐ자유수호ꡑ를 위한 것이었으나, 첨예한 의식을 지닌 논평가들은 베트남과 엘살바도르, 아프가니스탄과 중동 및 기타 제3세계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개입이 단순한 ꡐ이데올로기ꡑ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이 양대 국가의 경제가 의존하고 있는 제3세계의 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신경질적인 반응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ꡐ도미노이론ꡑ의 법칙에 따라 게임을 즐기는 두 초강대국가의 뇌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극히 이기적인 관심인 것이다.


독자들이 쉽게 수긍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환경운동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는 ꡐ히피즘ꡑ도 미국의 반전운동 그리고 1968년 유럽과 미국에서 극에 달했던 학생운동과 때를 같이해서 등장했다. 이 운동은 조금 색다른 저항운동으로 기존 사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이 운동에도 분명히 환경문제가 개입되는데, 히피즘은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낭만주의운동 및 야생지보호운동(wilderness movement)과 명백한 철학적 연계성을 갖는다. 내시(Nash)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60년대에 등장해 금방 미국사회 전체에 만연된 이 경향은 기존의 가치와 제도에 대한 의심이라고 간략히 표현할 수 있다. 이 새로운 풍조는 젊은 층에서 시작되었는데,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연령별 인구구성을 보면 전체 인구의 절반이 25세 이하였다. 이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미국의 젊은 층은 대공황이나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입지 않은 세대였다. 따라서 기성세대가 의지하던 ꡐ성공과 안정을 중시하는 논리ꡑ는 진부하고 불만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연했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들은 구시대의 유산으로 남겨진 사회 속에서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건한 노선을 택하는 대신에, 구시대의 유산 전체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공공연한 반항을 시도했던 것이다.


1950년대의 젊은 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들은 자신이 그 속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하는 ꡐ세계의 상황에 대한 책임감ꡑ을 느꼈던 것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관습에 대한 거부가 일반화되었고, 정치적 행동주의(특히 소수의 권리와 평화를 존중하기 위한)는 새로운 생활양식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반항이 좀더 비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즉 반항을 통해 세계 공동체의 자유를 추구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자유만을 추구해서 ꡐ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기회ꡑ를 얻는 것으로 만족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평범하게 진행되던 일들이 새롭게 바뀜에 따라 생활양식도 혁명적으로 변해버렸다. 1960년대 최초의 히피족은 샌프란시스코의 하이트애시베리(Haight-Ashbury) 지역과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보통 30세 이하의 가난했던(스스로의 선택을 통한 자발적 가난도 포함해서) 이들은 수염을 기르고 장발을 하였다. 또한 고지식한 기존 문화보다 좀더 활기찬 대안을 창조하고자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유분방한 성생활과 마약과 민속음악과 신비주의에 도취했다. 이들은 ꡐ기술, 권력, 이익, 성장ꡑ이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미국의 전통적 관념에서 과감히 탈피하고자 했다. 따라서 ꡐ중앙집중화, 도시화, 산업화ꡑ 같은 구시대적 유물은 인류의 구세주가 아니며, 오히려 인류를 망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점을 토대로 새롭게 태어난 ꡐ반문화ꡑ(counter culture)는 인공적인 것을 거부하고 야생지역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으며, 야생지역을 자연의 최우위에 올려놓았다. 기존의 문화적 전통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불신하는 히피즘이 ꡐ문명의 희생자이고 성장을 위한 개발의 피해자ꡑ이기도 한 야생지역에 대해 ꡐ반문화ꡑ로서의 가치를 부여한 점은 매우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이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은 산업화에 휩쓸리지 않고 형성된 사회에서는,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에서 존재했었다고 여겨지는 ꡐ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대지와 자연에 대한 인간사회의 긴밀한 연결ꡑ을 다시 한번 시도하고자 하는 두드러진 노력이 존재했음을 상기시켜준다. 이러한 노력은 인간이 산업화과정에서 잃어버린 온유한 성질과 순진무구한 소박함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즉 ꡐ낭만주의로의 회귀ꡑ를 의미하는데, 이는 초기 환경론의 대두 시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로와 고이더는 1890년대에 나타났던 환경문제에 대한 폭발적 관심과 이에 따른 자연관의 급격한 변화에 주목하면서, 이를 계몽주의(인간은 그의 이성과 과학기술을 이용해 자연을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담긴)에서 유래한 이성적이고 진보적인 태도에 의해 나타난 ꡐ빅토리아왕조 말기의 극적인 반전ꡑ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각자 환경운동단체를 설립해 적극적인 환경운동을 전개했던 러스킨(Ruskin)과 모리스(William Morris) 그리고 밀(Mill) 같은 지식인들은 자유경제주의의 낙관론을 거부하면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통한 사회경제적 진보에 대한 비관론을 내세웠다. 그들은 산업화 자체에 의심을 품었으며 초기의 낭만주의자들처럼 산업화로 인해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질서 및 건강과 바람직한 가치관, 그리고 끝내는 자연까지도 파괴될 것으로 여겼다. 산업화의 상징인 도시에 대한 급격한 도덕적?미학적 반발은 도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입법활동과 ꡐ전원도시운동ꡑ 그리고 70년이 지난 뒤의 히피족들이 열렬히 추구했던 ꡐ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도시탈출운동ꡑ으로 이어지면서 결코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비관론에만 몰두해 자포자기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와 비슷하게 모리스 같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추구했던, 중세 소공동체식의 ꡐ유기체적인 유대관계로 결합된 사회ꡑ를 만들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 목소리는 현재에도 유럽과 미국에서 ꡐ새로운 이상적 소공동체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예전에 비해 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운동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ꡐ핵ꡑ과 같은 몇몇 쟁점들은 대중매체가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할 정도로 여전히 주의를 끈다. 또한 레이건이나 대처가 이끄는 보수성향의 정부들이 환경에 해를 끼치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것에 비례해서 환경문제에 관한 더 많은 관심들이 일어나고 있다.


보수성향의 정부들은 냉전의 원리를 이용해 군비지출을 증가시킴으로써 환경문제를 은폐하고, 경제성장우선 정책을 내세워 스스로의 정책적 과오로 인해 발생한 환경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제기되더라도 이를 묵살하는 편리한 논리를 강화했다. 그러나 이 논리에 대한 반발로 비롯된 평화운동에 끊임없이 시달려야만 했다. 특히 ꡐ핵ꡑ문제는 1979년 4월에 발생한 스리마일아일랜드(Three Mile Island)에서의 사고 이후에 반핵 로비에 대한 광범위한 자원을 얻기 시작하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ꡐ가디언ꡑ(Guardian)이라는 환경운동단체는, 1981년 11월에 반핵주의자들이 캘리포니아의 다이아블로 캐니언(Diablo Canyon) 지역의 핵발전소 건설예정지를 실력으로 점령한 이후부터 미국의 ꡐ핵ꡑ산업이 혼란에 빠졌다고 보고함으로써 이미 반핵운동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핵발전소 건설공사는 연기되었고 모든 핵산업은 침체기로 빠져들었으며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비슷한 저항운동과 기타의 경제적 이유로 인해 새로운 핵발전소 건설계획은 자동적으로 억제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통해 우후죽순처럼 각양각색으로 나타나는 ꡐ환경문제와 관련된 주장들ꡑ은 1980년대에는 비교적 체계적인 모습으로 정리되어 등장하게 된다. 이중 몇 가지 쟁점들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우선 미국에서는 ꡐ산성비ꡑ(acid rain)의 확산으로 인한 피해문제가 제기되어서 입법활동을 통해 대기의 질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노력은 전통적인 공업지역내의 자동차산업과 철강산업에 의해 강력하게 제기된 환경기준 완화 요구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산업체들은 환경법에 의한 규제가 국제경쟁력을 약화시켜서 마침내는 산업활동을 위축시키고 경제침체를 초래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또한 서부와 남서부의 야생지역에서의 ꡐ노천광ꡑ(strip mining)과 ꡐ자연환경보존지역의 보호ꡑ 그리고 ꡐ인디언보호구역ꡑ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등장했다. 물론 이 지역에서도 ꡐ산업화ꡑ라는 그럴 듯한 변명하에 야생지역이 파괴되고 있었는데, 석유와 우라늄과 석탄은 국가적 이익을 위해 시급하게 채굴되어야 한다는 명분이 덧붙여졌다. 에드워드 애비(Edward Abbey)가 1975년에 발표한 『몽키렌치 갱』(Monkey Wrench Gang)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ꡐ환경파괴를 막기 위한 자경단원들ꡑ(environmental vigilantes)은, 도처에 흩어져 있는 파괴되기 쉬운 환경에 대한 이와 같은 위협에 처한 환경운동의 좌절과 공포를 잘 묘사하고 있다.


놀랍게도 영국에서는 1981~82년 사이에 제3런던공항을 에식스(Essex)의 스탠드스테드(Standsted) 지역에 건설하기 위한 예비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15년 전의 공식 조사에 의해 이미 이러한 종류의 개발사업이 이 지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정이 내려진 뒤여서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영국 전역으로 자동차 도로망을 확대하고 런던시를 순환하는 외곡도로망을 특별히 재정비하고자 하는 다른 쟁점들과 마찬가지로, 이 제3공항 건설계획은 일관성 없이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정책과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관심에 따라 마치 텔레비전 드라마와 같은 상황을 연출하면서 여러 장소가 검토되고 곧바로 취소되는 해프닝을 계속하였다.


ꡐ프렌스 오브 어스ꡑ와 같이 광범위한 차원에서 환경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는 특정한 쟁점에 대한 개별적이고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데는 소홀했던 경향이 있다. 그러나 특정 쟁점에 대한 개별적인 관심의 끊임없는 등장과 이를 둘러싼 대중적 논의의 전개는 환경운동을 살아 움직이는 활기찬 것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환경론자들의 주요 주장은 ꡐ프렌스 오브 어스ꡑ식으로 전체적인 흐름을 중시하는 부류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특정 쟁점의 해결을 요구하면서 구체적 사례를 중시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나무를 보면 숲을 보지 못하고 숲을 보면 나무를 보지 못하듯이 이 둘을 한꺼번에 포용하는 주장을 내세우기는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다만 숲은 나무로 구성되고 나무는 숲에 의존한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면서 환경운동가들은 스스로의 일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3. 현대환경론의 과제


현대환경론의 전성기를 통해 상당한 관심을 끌고 있는 ꡐ인구와 자원의 비율에 관한 쟁점ꡑ은 이미 1세기 반 전에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를 사로잡았던 주제이다. 맬서스와 마찬가지로 ꡐ신맬서스주의자들ꡑ(neo-malthusians)도 지구 전체라는 시각에서 세계 전반적인 경향인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와 이들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한 자원의 한계로 인해 20세기에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맬서스의 사고방식을 일부 이어받은 가레트 하딘(Garrett Hardin)이라는 신맬서스주의자는 이 문제를 도덕적 차원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신념을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인구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8년에 ?공공목장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우화를 발표함으로써 그의 논리를 대중들에게 피력했는데, 이 우화에는 ꡐ수용력ꡑ(carrying capacity)이라는 생태학적 법칙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우화는 어떤 공공목장의 일부에 몇 마리의 소가 한가롭게 방목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마리의 소가 들어오게 되는데 소의 먹이인 풀의 질이 떨어지지 않고도 최대한의 생산이 가능한 평형상태(즉 수용력의 한계)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만일 한 목동이 다른 목동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딱 한 마리의 소를 몰래 이곳에 더 집어넣었다고 생각해보자.


이미 수용력의 한계에 이른 공공목장에 단 한 마리의 소라도 더 추가된다면, 곧바로 과잉 방목현상이 나타난다. 쉽게 말해 공공목장 자체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열 마리 정도의 소가 근근이 배를 채울 수 있는 정도밖에 풀이 자라지 않는 곳에 열한 마리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풀을 뜯기 시작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풀 자체가 다시는 돋아나지 않는 지경에 이를 것이고, 식량이 사라졌는데 소라고 무사할 수 있겠는가? 『이솝우화』에 친숙한 독자라면, 나귀의 등에 볏짚을 쌓다가 결국은 나귀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는 우화의 ꡐ마지막 볏짚ꡑ(나귀의 목숨을 결정적으로 앗아가버린)과 공공목장을 파괴해버리는 ꡐ마지막 소 한 마리ꡑ에서 비슷한 영감을 떠올릴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비극을 통해서 모든 선량한 사람들이 단 한 사람의 행동(계획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지의 소산으로 흔히 나타나는 행동)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받을 수 있음이 증명된다(우리 속담에도 ꡒ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을 흐린다ꡓ는 말이 있듯이 이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ꡐ미꾸라지ꡑ와 같은 짓을 하게 될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ꡐ윤리적 차원에서의 공공환경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하는 환경교육ꡑ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역자).


그런데 하딘은 이 우화를 통해 ꡒ환경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하는 환경교육의 대중화가 반드시 환경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을 것이다ꡓ라는 결론에는 도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모두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데는 단지 한 사람밖에 필요하지 않고 이 한 사람은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므로 ꡐ대중적 이익에 기초한 자원의 공유는 결코 제대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어ꡑ 마침내는 비극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불행을 피하려면 ꡐ계몽된 소수의 사적인 소유ꡑ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ꡐ대중의 접근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대중의 규모까지도 제한ꡑ하는 길만이 공공의 소중한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하딘의 궤변은 좌익과 우익을 불문하고 모든 환경론자들에게 충격적인 쟁점으로 받아들여졌다. 하딘의 궤변 뒤에는, 자연자원의 착취를 통한 사리사욕의 욕구에 대한 합법화,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부과되는 사회?환경적 손실이 숨겨져 있다. 이 쟁점의 허점을 제대로 짚은 사례는, 새로운 도로건설로 생기는 불이익을 사회?환경적 손실로만 전적으로 돌리지 않고, 이로 인해 재정적 이익을 볼 것이 확실시되는 가장 주요한 기업인 영국 철도청에 그 손실을 어느 정도 부담시킨, 영국의 도로산업의 전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마도 급진적인 환경운동가들은 이 문제가 자원을 개발하거나 이용해서 막대한 이익을 본 사람들이 부당하게 취한 이익을 정당하게 재분배함으로써 해결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하딘은 이 재분배정책에 대해서 강력한 반대의견을 표시했다. 이는 그가 이기주의자들을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며 다만 생물학적 법칙에 따른 실용주의를 철저하게 선호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딘은 또 하나의 우화를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계속해서 대중에게 피력했다. 이 책의 표지그림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우화(1974)에서 그는 살려달라고 외치며 익사해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딱 열 명이 탄 구명선(lifeboat)을 그리고 있다. 이 구명선에는 딱 열 명 분의 음식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으므로, 만일 한 사람이라도 더 이 구명선에 올라타게 되면 어떤 사람도 충분한 자기의 몫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모든 사람이 굶어 죽게 되는 것으로 이 우화는 끝난다.


따라서 이 우화에 의하면 ꡐ수용력법칙의 보편적인 적용에 따라 온정적인 자비를 베푸는 것ꡑ은 ꡐ도덕적 차원ꡑ에서 불가능하게 된다. 이 논리는 곧바로 서구와 제3세계의 관계에 적용되어서 제3세계에 대한 자비적 식량원조에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로 활용되었다. 자신의 식량을 확보하고 구명선에 안주하고 있는 서구인들은 실질적이고 도덕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빈곤의 바다에서 익사해가는 제3세계인들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은 자비롭기는커녕 구명선 자체를 위협하는 무책임한 행동이 된다.


하딘은 이와 같은 이유를 내세워 더 많은 아이들을 낳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려는 국가들(제3세계의)은 이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의무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환경문제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식량자원의 문제가 결코 식량 생산능력의 문제가 아니며 근본적으로는 ꡐ인구과잉ꡑ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맬서스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다시 한번 표했다. 본질적인 문제는 너무 많은 인구에 있는 것이며 식량부족은 이 문제의 존재를 입증하는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The Environmental Fund, 1977).

이와 같은 하딘의 어두운 그림자는 이제부터 살펴볼 파울 에를리히의 대중적 호소 및 영향력을 시의적절하게 지원해주었다. 에를리히는 1969년 영국 생물학회에서 인구성장이 자원고갈을 초래할 것이므로 서구의 생활의 질은 급속하게 저하될 것이라는 극히 비관적인 견해를 발표했다. 그는 항상 지나친 걱정에 시달릴 정도로 민감한 사람이었는데, 유기염화물과 중금속 등의 독성 오염물질이 먹이연쇄를 통해 인체 내에 축적되고 있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자신의 세대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 역시 인구성장을 환경문제의 가장 근본적 원인으로 보았는데, 그는 이의 해결책으로 ꡐ인구성장정지운동ꡑ(Zero Population Growth Movement)을 제창했다.


그에 의하면, 현재의 인구수준을 자발적으로 적절히 유지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므로 강제적인 산아제한정책이나 반(反)인구성장법까지도 동원해서 어떤 민족이나 국가(아마 제3세계)의 인구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배리 코머너(Barry Commoner)라는 환경운동가는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정책을 ꡐ구명선 윤리를 동원한 현대적 야만ꡑ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처사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고 강력하게 반발한 바 있다.


코머너는 1971년에 이와 같은 의견을 제시하면서, 환경문제의 책임이 결코 인구성장에 있지 않으며 다만 현대의 기술지향주의가 갖는 파괴적 성격에 기인하다고 했다. 현대 과학기술은 ꡐ자연ꡑ의 산물들을 자연적인 부패를 통한 생물학적 분해가 불가능한 제품으로 변화시켜, 지구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생물권(biosphere)과 암석권(lithosphere)과 대기권을 온통 독성 잔류물질로 가득 채워놓았다는 것이다. 그후 1980년 코머너는 환경운동의 열기를 타고 레이건에 대항해서 미국 대통령후보로 출마하기도 한 대단히 정치적 인물이다.

그의 선거강령은 ꡒ온갖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파괴적 과학기술을 조절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ꡓ였다. 그러나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다국적기업에 대해 ꡐ자연과 인간의 기본적 요구를 무시한 무자비한 행동ꡑ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과학기술주의에 맞서 외로운 양심선언을 감행했던 그가, 막대한 선거비용이 드는 선거에서 떨어진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다.


어쨌든 그는 1970년대 환경운동의 한 경향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 경향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급진적인 노선을 지향하면서, 환경문제의 원인을 단순한 인구성장보다는 ꡐ보다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모순ꡑ에서 찾으려 했다. 마이클 앨러비(Michael Allaby)의 경우도 1970년대 초반에는 인구성장을 환경문제의 주요인으로 보았으나, 10여 년 후에는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면서 환경문제의 주요인으로 ꡐ자원의 불균형 분배ꡑ를 내세웠다. 그러나 급진적인 환경론자들 모두가 이와 같은 입장을 줄곧 고수하지는 않았는데, 급진적인 성향의 소설가인 존 파울스(John Fowles)는 1982년에 자신의 독창적 사회주의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모든 국가간의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적 갈등의 근원이 되며, 실업문제와 경제문제와 식량문제를 대책 없이 증가시키는 인구과잉은 이제 전 세계에 만연되어 있는 전염병인 것이다.


그러나 잠시 눈을 돌려보면 현대 과학기술주의에 대해 지극히 낙관적 입장을 취해온 사람들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칸(Kahn)과 같은 극단적인 낙천가는 자유시장경제정책을 적절히 활용하면 제한 없는 경제성장의 달성이 가능할 것이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문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예언했다. 코트그로브(Cotgrove)가 ꡐ기술만능주의ꡑ(cornucopian)라 표현한 이러한 과학기술적 낙관론은 환경의 착취를 통해 명확한 기득권을 보장받고 있는 사람들이 환경운동의 장벽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의 이익옹호를 위해 지난 15년간 줄곧 써먹었던 일반적인 정설이기도 하다.


1969년 자연주의자인 프랭크 프레이저달링(Frank Fraser-Darling)도 리스(Reith) 강연회를 통해서 ꡒ물질적인 성장만을 고집하는 가치체계는 수정되어야 하겠지만, 물질적인 성장 그 자체를 모두 다 거부할 이유는 없다ꡓ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는 이 강연회를 통해 등장한 ꡐ경제성장옹호론에 대한 대중적 지지ꡑ를 바탕으로, 일부 환경운동가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런던 제3공항의 입지를 스탠드스테드 지역으로 결정해버렸다. 이에 대응해서 곧바로 환경문제와 관련된 토지이용정책이 과연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각계각층에서 제기되었다.


이 압력에 대응해 영국 정부는 ꡐ제3공항의 필요시기와 적정입지ꡑ(필요 자체에 대한 조사가 결코 아닌)를 결정하기 위한 독자적인 전문조사단을 구성했다. 이 전문조사단의 수뇌였던 로스킬(Roskill)이라는 인물은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모든 환경요소들을 금전으로 환산하고 수학적 방정식을 이용해 특정 장소에 대한 입지의 정당성을 찾는 과정에서 경제적인 비용-편익 분석기법(cost-benefit analysis)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그후 이런 접근의 어리석음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주장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전문조사단의 연구에 의해 얻어진 내용을 보면, 공항건설의 최적지로 버킹엄셔(Buckinghamshire)의 윙(Wing) 지역이 선정될 경우 자동적으로 철거되는 스튜클리(Stewkley) 마을의 노먼 교회(Norman Church)에 대한 보상으로 일만 천 파운드라는 엄청난 가격(보험가격으로 환산된)을 책정하고 있다. 따라서 환경자산에 대한 경제적 평가의 우를 범하느니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훨씬 현명한 처사라는 교훈을 남겼다. 결국 로스킬이 이끈 전문조사단이 최종 적지로 결정한 윙 지역은 정부의 재량에 의해 환경파괴가 훨씬 적게 일어날 것으로 판단되는 해안지역인 매플린샌드즈(Maplin Sands)로 변경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의 변화는, 값싼 내륙의 입지를 제쳐두고 값비싼 해안지역을 택함으로써 ꡐ환경의 질ꡑ이라는 가치가 경제적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어, 일부의 환경론자들은 이를 환경운동의 위대한 승리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또 다른 환경론자들은 진정한 승리는 이 사업계획이 완전히 취소된 1974년에야 비로소 성취되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10여 년에 걸쳐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이 계획이 1979년에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을 때, 커다란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환경문제에 관한 관심은, 1960~70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 환경성(Council for Environmental Quality),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환경과(Department of Environment, 이는 곧 환경운동가들에 의해 ꡐ공해과ꡑ라는 악칭으로 불렸다)가 앞다투어 설립되면서 표면적으로는 공식기구에 의해 흡수되는 듯했다. 그러나 1973년 중동의 오일 쇼크가 서구 경제를 강타한 후에는 경제성장이 더 중요한 목표로 설정되었으며, 1974년에 알래스카의 송유관 공사가 환경운동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를 얻게 되었을 때에는 환경문제의 중요성이 완전히 버림받지 않나 하는 느낌도 생겼다. 한번 이런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북해의 석유를 사용해 경제적 어려움을 덜자는 명분 아래 스코틀랜드의 키숀(Kishorn) 호와 같은 아름다운 호수에 송유관을 건설하자는 계획까지도 아무런 반대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기도 했다.


이쯤 얘기했으면 현명한 독자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는 현대 환경론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전달되었으리라. 혹시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는 무감각한 독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 책을 덮고 자신이 생활하는 작은 공간의 창을 통해 스스로 얼마나 많은 공해를 배출하고 또 흡수하고 있는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라!

 

 


4. 『성장한계론』 『생존을 위한 청사진』 『작은 것은 아름답다』


현대환경론은 『성장한계론』 『생존을 위한 청사진』 『작은 것은 아름답다』라는 세 가지 이정표로 요약될 수도 있다. 『성장한계론』이 근본적인 문제의 범위와 성격을 정의한 것이라면, 『생존을 위한 청사진』은 이 근본적인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변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이를 근본적인 문제의 철학적 근원에까지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아마도 『작은 것은 아름답다』가 남긴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들을 차례로 간단히 살펴보자.


MIT공과대학의 『성장한계론』 연구진은 컴퓨터를 이용해서 현세계의 모델을 만들고자 시도했다. 이 복잡한 모델은 역사적으로 세계의 발달을 이룩해온 ꡐ물리, 경제, 사회적 관계의 모든 인자들ꡑ을 고려해서 이들이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되는 미래의 현상을 ꡐ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객관적으로ꡑ 예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모델은 20세기의 자원이용과 고갈상태, 인구성장, 공해, 소득, 개인별 식량소비 등의 변수들을 지구 전체적 차원에서 함수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는데, 1900~2100년까지의 기간을 대상으로 ꡐ현재 나타나고 있는 여러 관계가 연속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인구성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반해서 자원의 고갈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고 있어, 멀지 않은 장래에 가용자원의 양은 인구성장을 지탱해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인구폭발 현상이 발생할 것ꡑ이라고 예측했다. 이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모델 속에 가변성의 다양한 가정들을 하나하나 입력시키고 다시 이를 종합해서 조작하는 두 단계를 거쳤다.


그런데 이 모델의 가정에 의하면 모든 가용자원은 충분히 이용되고 이중의 75퍼센트가 재순환되며 농업 생산량은 두 배로 증가하고 공해는 1970년대의 25퍼센트 선으로 감소하며 전세계적인 차원에서의 효율적인 산아제한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인구성장과 자원고갈 그리고 공해증가 등의 모든 경우에 있어 인구가 감소하면 산업 또는 농업 생산력이 감소한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비록 모든 가정된 변수들을 컴퓨터 모델에 입력해 조작한 결과, 이 ꡐ지나친 과잉으로 인한 멸망ꡑ이 1세기라는 유예기간을 두고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미래의 지구의 수용력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면서 초과되어버릴 것임이 밝혀졌다.


ꡐ인구성장 억제와 공해의 통제ꡑ ꡐ자원의 재순환ꡑ ꡐ경제성장우선정책의 범세계적인 포기ꡑ ꡐ강대국과 제3세계간의 자원 불균형 분배의 조절ꡑ 등이 효율적으로 수행되어야 ꡐ과잉으로 인한 멸망ꡑ을 피할 수 있는 안정된 세계모델이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 물론 인구 및 경제성장 정지운동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1972년에 이 연구가 발표되었을 때 이는 전세계의 언론을 통해 심각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연구와 비슷한 논조로 작성된 『대통령에게 보내는 2000년대의 지구예측보고서』가 1980년에 발표되었을 때는 별다른 주의를 끌지 못했다. 『성장한계론』은 여러 각도에서 비판을 받았는데, 대다수의 비판은 부정확한 가정과 불완전한 자료가 입력된 결과로 그 현실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모델이 제시하는 ꡐ과잉으로 인한 멸망ꡑ을 피하기 위해서는 범세계적 차원에서의 인구와 경제의 안정상태가 반드시 달성되어야 한다는 일반적 결론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모델에 인간의 뛰어난 창의력을 통한 위기극복 능력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불평을 제시하기도 한다. 즉 인간은 생물학적인 합성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고안품이 아니므로 쉽게 계량화해서 예측이 가능한 한정된 대응책만 내놓는 한심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오라이어단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관념적인 가치와 정치적인 문제들을 컴퓨터에 입력시킨다면, 인간의 자유분방한 정신과 쉽게 계량화할 수 없는 창의성 등은 상당한 정도 손상될 것이다.


또한 과학기술주의를 신뢰하는 낙관론자인 매독스(Maddox)는 ꡐ그 보고서ꡑ 자체가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일축해버렸다. 그는 이 이론의 지나치게 어둡고 운명론적인 색채가, 스스로가 규정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진보적인 공동체 결성의지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비난했다. 골럽(Golub)과 타운센드(Townsend)는, 이 연구를 최우선적으로 지원해왔으며 ꡐ서구의 산업자본가와 다국적기업을 위한 집단ꡑ인 로마클럽이, 이 연구를 통해 미래에 대한 불길한 징조를 세상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함으로써 세상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초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다국적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도록 유도했다고 비난했다. 로마클럽이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다국적기업은 어차피 초국가적인 경제기구이므로 ꡐ지구적 차원에서의 위기ꡑ를 강조한다면 각국에서 부과되는 귀찮은 사업적 제약에서 벗어나 더욱 편안하게 이윤추구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다루게 되므로 이제는 『생존을 위한 청사진』으로 넘어가자.


생태학자들이 주로 제시하는 ꡐ청사진ꡑ 역시 환경문제에 관한 오랜 논의를 거쳐 완성된 것이다. 환경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비현실적이고 스스로 주장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현실적 방법론의 제시에는 소홀하다는 비판과는 대조적으로 『생존을 위한 청사진』은 상당한 수준의 현실적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즉 미래 영국 사회의 모델을 목표가 달성되어야 하는 정확한 시간표까지 첨부해서 발표함으로써 상당한 현실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지방분산화 및 소공동체우선주의에 기초해 큰 폭으로 변화될 도시와 농촌사회의 미래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생존을 위한 청사진』은 민족경제에 입각한 자급자족의 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한 까닭에 인구성장을 지나치게 소홀히 취급한 예측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현재 인구 수준의 절반 가량인 당시의 인구를 거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용했었다), 바람직한 미래사회를 위한 궁극적 목적으로 ꡐ생태계 파괴의 극소화ꡑ ꡐ에너지와 자원의 절약ꡑ 등을 설정하는 현명함을 보였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자면, 일반대중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하향조정될 수밖에 없어 상당한 진통을 초래할 사회?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했으므로, 청사진이론은 어쩔 수 없이 교육이나 기타의 수단을 통해 일반대중에게 이와 같은 목적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사회체계의 창조에 몰두해야 했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ꡐ생활수준의 저하ꡑ에 대한 주요 보상으로 ꡐ질적인 생활수준의 향상ꡑ을 들고 있는데, ꡐ질적인 생활 수준의 향상ꡑ은 인간 상호간의 그리고 인간과 자연간의 조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도시와 농촌환경도 개선되어야 하고 ꡐ작업의 질적 수준ꡑ도 향상되어야 하는데, 이는 ꡐ대규모 생산라인 체계와 노동의 분업에 따른 비인간적 생산양식ꡑ이 포기되고 좀더 창조적인 요소가 생산과정에 투입되어 활기를 불어넣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 물질만능주의를 강요한 기존 가치체계를 재조정해서 ꡐ삶의 정신적인 측면ꡑ을 높이 평가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친구들과 더 깊은 인간적 관계를 맺게 될 것이며 그들의 재능을 더욱 완전하게 발휘하면서 창조적인 일과 여가를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변화된 사회에서는 성 차별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므로 남성이나 여성 어느 하나가 열성종으로 취급되지도 않으며 여성이 사회의 종속적인 구성요소로 인식되지도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적절하게 사용되는 기술과 천연자원의 효율적 재순환에 의해 현재의 새로운 기술은 덜 해로운 기술로 대체되고(유기질비료가 화학비료를 대체하고, 생물학적 해충구제법이 인공살충제를 대체하는 등), 공해를 발생시키지 않는 새로운 스타일의 경성 에너지자원이 사용될 것이며 효율적인 에너지 보전계획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위와 같은 모든 것은 소규모 공동체에서 그 실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며, 이 소규모 공동체내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의 사회를 직접 통제함으로써 더욱 더 충만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직접 대할 수 있도록 충분히 소규모로 지방화된 정부에 대해 명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또한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ꡐ생태계에 대한 악영향ꡑ도 최소화될 것이다.


『생존을 위한 청사진』은 이상론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변화단계를 구성하는 각 프로그램의 정확한 내용과 일자, 그리고 변화되는 지역구조의 정확한 규모를 극히 구체적으로 상술하고 있다. 그런데 거의 완벽하게 보이는 이 ꡐ청사진ꡑ에도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성실하게 노력하고 서로간의 사랑만 유지하면 금세 집도 장만하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신혼부부의 청사진이 사회구조적인 모순의 벽에 부딪혀서 서로간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탓하는 ꡐ칼로 물베기ꡑ 싸움으로 종종 나타나듯이, 『생존을 위한 청사진』이 그린 설계와 현실은 거리가 있는 것이다. 분명히 ꡐ청사진ꡑ에는 개인적인 행복과 보람, 공공의 이익을 위한 기술과 사회에 대한 엄격한 통제, 창조적인 교육과 예술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특히 정신적인 측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강조가 인간사회의 일상적인 문제보다는 생태학적인 법칙을 절대적이고 우선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토대 위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생존을 위한 청사진』에 의해 구성되는 미래사회는 꼭 사회정의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나타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생태학적인 법칙에 따르는 구조로 구성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즉 최종적으로 구현되는 ꡐ청사진이 보여주는 미래사회ꡑ가 현사회보다 좀더 사회정의에 가까운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결과는 생태학적 법칙의 표현을 추구하는 주요 목적에 비해 극히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고 꼭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ꡐ청사진ꡑ의 내용이 『에코토피아』(Ecotopia, Callenbach, 1978)라는 소설로 각색되어 나타나자 ꡐ1999년을 기점으로 생태학적 법칙의 구성요인 및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이 신비로운 국가체제ꡑ가 과연 사회주의 이상국가인지 아니면 파시즘에 근거한 ꡐ디스토피아ꡑ(dystopia) ꡐ인지를 묻는 격렬한 논쟁이 뒤따랐다. 지방자치제의 실현에 따라 지방의회에 진출하고자 하는 정치 지망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제 이 절의 마지막 주제를 살펴보자.


프리츠 슈마허(Fritz Schumacher)의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약간은 추상적인 관념이다. 슈마허는 우선 현대인의 자연관의 철학적 성격 및 결함을 철저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현재 주류를 이루는 철학적 가치체계들을 면밀히 조사해서는 이들이 어떻게 경제학적인 가치로 전환되어 나타나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경제문제가 관념적인 가치체계에 의해 철저하게 구속된다는 것을 밝혀내고, 결코 경제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구식 가치체계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한 우리들에게 현재의 경제체계를 대신할 새로운 이상적 체계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모든 사례들에 대한 보편적인 적용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던 경제법칙들이 사실은 그렇지도 않음을 지적해주었다. 새 형태의 경제체계에 따라 새로운 국가적 가치와 목적이 부여된다면, 슈마허가 주장하는 ꡐ불교경제학ꡑ(Buddhist economics)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계를 사용하고 인간의 노동력을 투입해 어떤 형태의 일을 성취하고자 한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우리의 방식이 ꡐ경제적ꡑ인가의 판단기준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경제적 가치체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상이해지므로 가치체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목적이 ꡐ자본축적을 통한 이윤추구ꡑ에 있다면 생산과정에서의 인간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는 일은 ꡐ경제적ꡑ인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이 ꡐ보람 있고 행복한 삶ꡑ에 있다면 이윤추구보다는 ꡐ고용기회 창출ꡑ이 훨씬 더 경제적일 것이다.


슈마허는 『생존을 위한 청사진』에서도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핵심요소로 들고 있는 ꡐ행복을 주는 일의 필요성ꡑ에 대해 언급하면서,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일을 위해서는 ꡒ과학기술주의를 배경으로 한 자본집중적인 현대기술이 그 자체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ꡓ는 그릇된 ꡐ가치관ꡑ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반대중이 쉽게 소유하고 간편하게 다룰 수 있으며 수작업과도 조화가 가능한 간단한 기계의 발명을 장려했는데, 이를 통해 작업과정이 부분적으로만 기계화되어 여전히 인간노동력의 가치가 존중되는 생산양식을 도출하려 했다. 결국 그는 고전경제학의 꿈인 ꡐ노동의 분업과 생산라인의 기계화ꡑ라는 경제철학과 결별했는데, 이와 같은 새로운 경제철학은 서구 및 제3세계에서 상당한 환영을 받아 이런 유의 진보적 경제체계의 실험적 시도가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슈마허의 유작인 『보람 있는 일』(Good Work, 1980)은 이와 같은 그의 이론체계를 집대성한 책으로 서구사회와 제3세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5-1. 현대 환경론의 분류


 

현대환경론과 환경운동가들의 이해를 위해서 여러 종류의 분류가 시도되어왔는데, 여기에서는 그중 대표적으로 자주 사용되면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다음의 세 가지 정도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 유형은 환경운동의 초창기에 나타난 사고방식이나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한 분류방식이다. 이는 환경론자들의 신념체계에 초점을 맞추어서 환경론을 크게 ꡐ기술지향주의ꡑ(technocentrism)와 ꡐ생태지향주의ꡑ(ecocentrism)로 구분한다.


둘째 유형은 사회과학적 이론에 의한 분류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환경문제에 관한 의사결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는 환경론을 기능주의에 기초한 다원론과 이에 대립되는 마르크스주의에 급진적 견해로 크게 나누고 있다. 이와 같은 분류는 현대 환경운동의 성장과정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도 제시해주는데, 샌드배치(Sandbach)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셋째 유형은 인간의 자연관에 따른 근본적인 철학적 입장을 기준으로 한 분류이다. 이는 코트그로브 교수가 제안한 바 있으며 직접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를 통해 발표한 분류이다. 여기에서는 환경론이 ꡐ결정론ꡑ(determinism)과 ꡐ자유의지론ꡑ(free will philosophy)의 양극으로 나뉜다.


그런데 위의 분류를 사용하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의사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어떤 성향의 환경론자라 하더라도 그 나름의 독창적인 색채를 띠고 있어, 생태지향주의자라 해도 그의 주장에는 다원주의와 결정론을 옹호하는 듯한 내용이 담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위의 분류방식들은 결코 자신의 입장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완고한 상호배타성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환경운동단체는 생태지향주의와 기술지향주의를 동시에 포용하는 매우 모호한 경향을 나타낼 수 있으며, 기술지향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도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을 동시에 지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므로 세계를 자로 재듯이 양분해서는, 기술지향주의를 ꡐ신ꡑ처럼 모시는 전문직업인 및 행정관료들의 세계와, 이에 대항하는 환경운동가들의 세계로 구분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현실적으로 양 진영의 경계는 모호할 때가 많으며, 사실상 우리들 각자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경계선을 넘나들며 시류에 추종하는 교활함을 종종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 코트그로브 교수가 주장하는 철학적 분류의 경우에 있어, 우리는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을 각각 ꡐ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판단기준ꡑ으로 보는 객관성을 잃고 ꡐ이 둘을 합한 새로운 판단기준ꡑ을 주관적으로 만들어내서는 모든 사례에 적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또한 결정론이나 자유의지론의 어느 한 방향이 결국 어느 한쪽으로 기울 것이라는 편견도 있을 수 있다.


앞에서 고찰했던 제반 사항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첫번째 분류방식에 대해 더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분류방식에 의해, 독자들은 환경문제에 관한 토론에 임했을 때 상대방이 생태지향주의적인 인물인지 아니면 기술지향주의의 신뢰자인지를 비교적 명확하게 가려내서 적절한 토론을 진행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의 분류방식은 환경론을 둘러싼 사고의 흐름에 관한 역사적 사례들을 어느 정도 훑어본 뒤에 좀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므로, 지금은 피상적인 정의로만 만족하기로 하고 나중에 더 깊이 살펴보기로 하자.

둘째와 셋째 분류방식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대상이 아니고 대중매체나 일상적인 토론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이에 대한 논평도 편파적인 경향을 띠기 쉽다. 그 일례로서는 대다수의 환경운동가들과 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기술지향주의자들은 서구사회를 다원주의에 기초한 민주적 구조내에서 파악하려는 전통적 견해에 동의하겠지만, 이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여전히 대중적인 지지와 이해를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편견은 조금씩 고쳐서 되도록 객관적인 고찰이 가능해지도록 모든 독자들이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또한 편견을 정반대로 고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ꡐ논리의 대전환ꡑ이 필요하다면 이 책에서는 과감히 이러한 시도도 감행해봄으로써 독자들의 편리를 돕고자 한다. 자 이제 현대환경론의 이해를 위해 첫번째 분류를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1) 기술지향주의와 생태지향주의

 

오라이어단은 기술주의 환경론과 생태주의 환경론, 또는 기술지향주의와 생태지향주의로 불리는 두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는 생태지향주의적인 현대환경론의 기원을 ꡐ초자연주의ꡑ(transcendentalism)라는 철학적 사조에서 찾았다. ꡐ초자연주의ꡑ는 인간이 유용성만을 고려해 맺고 있는 자연과의 단순한 관계가 자연을 경외하는 관계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ꡐ신의 피조물간의 민주화ꡑ를 부르짖었던 사조이다.


이대로 하자면, 인간은 자연을 단순한 쾌락의 도구로 더 이상 학대해서는 안되며, 자연은 생물학적인 생존권을 갖는 엄연한 인격체(?)로 격상되므로, 인간과 자연은 일종의 윤리적 관계(때로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도 되는)로 맺어지게 된다. 이 관계는 흔히 ꡐ생물윤리ꡑ(bioethic)라는 용어로 지칭되는데,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적이라 할 정도의 자연에 대한 믿음과 경외사상을 나타낸다. 이는 내일 당장 지구상의 온 인류가 멸종되더라도 지구상에 그외의 여러 생명체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지구는 충분한 의미와 목적을 계속 갖고 있으리라는 조금은 이상한 지구영속론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에 있어 필수적인 존재는 아님에 반해 자연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존재이다. 생태지향주의자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다.


대자연의 위대한 힘은 인간을 숭고하거나 천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과 맞서 싸우라고 부추길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문명에 시달려 애처로운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은 대자연의 위대한 힘이 펼쳐 있는 야생지역을 찾음으로써 정신적?감정적?신체적 도움까지도 받아야 할 정도로 대자연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생물윤리라는 가치체계에 있어 생물학적 또는 경제적 정당화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생태지향주의는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측면도 갖고 있다. 즉 생태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인간은 결코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므로, ꡒ인간이 자연생태계에 미치는 직접 또는 간접의 영향은 반드시 그에게로 되돌아온다ꡓ고 하는 생태지향주의의 주장이 증명된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유형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법칙에 순리적으로 따름으로써, 자신이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전체 생태계와의 조화를 통한 안정에 기여해야만 한다.


생태지향주의의 과학적 근거가 되는 이론들은, 이외에도 이미 앞에서 언급한(하딘의 두 우화를 통해) ꡐ수용력 이론ꡑ을 비롯해 사회?경제적인 현상에까지도 적용이 가능한 ꡐ개체군의 규모와 변화에 관한 여러 법칙들ꡑ과 ꡐ체계에 관한 이론ꡑ(종다양성은 안정성의 기준이 된다는 등) 그리고 ꡐ열역학법칙이론ꡑ(흔히 엔트로피의 법칙이라 불린다)들이 있다.

요즈음은 하루가 다르게 생태학자들에 의해 체계에 관한 새로운 용어와 법칙을 다룬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언어의 혼돈을 초래할 지경이다. ꡐ성장의 한계ꡑ(limits), ꡐ자급자족ꡑ(self-reliance and self-sufficiency), ꡐ소규모생산 위주ꡑ(small-scale production), ꡐ악영향이 적은 기술ꡑ(low-impact technology), ꡐ자원의 효율적 재순환ꡑ, ꡐ인구 및 경제성장정지운동ꡑ 등등 이미 우리들에게 친숙한 이러한 용어들은 생태지향주의를 나타내는 기본어휘로서, 앞에서 살펴본 『성장한계론』과 『생존을 위한 청사진』 그리고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환경운동의 주요 주장에 의해 널리 보급된 것들이다. 『생존을 위한 청사진』과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외관상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생태지향주의적 주장이나, 『성장한계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술지향주의적이기도 한 양면성을 갖고 있으므로 적용상에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생태지향주의 자체도 모두 동일한 성향을 보이는 동질적인 요소들로만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오라이어단은 생태지향주의를 정치적인 기준에 의해 ꡐ보수적 생태지향주의ꡑ와 ꡐ진보적 생태지향주의ꡑ로 구분한다. ꡐ보수적 생태지향주의ꡑ는 ꡐ성장한계론ꡑ과 ꡐ구명선윤리ꡑ를 포용하며, 주로 성장억제학파와 생태적 계획가들 그리고 생활환경의 쾌적성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받드는 논리이다. 이에 대해 진보적 생태지향주의자들은 주로 급진적인 행동주의자들로, 계몽을 통해(혁명이나 혼란이 아닌) 개인이나 사회조직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에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환경교육가와 시민들로 구성된다. 코트그로브도 이와 유사한 구분을 하고 있다. 그는 ꡐ신환경론자ꡑ(new environmentalists)와 ꡐ보수주의자ꡑ(conservationists)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조사한 자료에만 집착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타당성만을 고집하는 완고한 환경론자들을 보수주의자로 분류했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이미 각광받기 시작한 기술지향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국내에서 일찍이 환경문제에 눈뜨고, 1973년 서울대학교에 환경대학원이 설립된 이후 기술지향주의에 근거한 서구식 개발에 대한 합리화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추구되어왔다. 최근에는 원자력발전소의 건설과 같은 사소한 개발사업에도 주민들의 반대가 격렬하게 쏟아질 정도로 민중론적 차원에서의 환경운동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아나가는 것 같기도 하나, 아직도 대중이 환경문제를 보는 시각은 완전하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그 동안 발생한 환경문제에 대한 ꡐ무작위의 죄ꡑ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역자들을 포함한 환경대학원 졸업생들과 민주시민 여러분에게 기술지향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심을 촉구한다.―역자)


기술지향주의 역시 환경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환경문제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함에도 동의한다. 다만 그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와 방법론에서 생태지향주의와 ꡐ전혀 다른ꡑ 차이를 보일 뿐이다. 기술지향주의는 신고전주의 학파의 경제적 합리주의를 토대로 발생한 명백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다. 따라서 ꡐ경제적인 법칙과 상응하는 자연과학의 법칙ꡑ을 동원한 객관적 분석에 의해 환경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ꡐ환경관리주의ꡑ의 능력과 효율성에 대한 철저한 신념을 고수한다.


환경관리주의는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의사결정과정에서 대중의 참여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과학?경제 전문가의 권위 있는 의견만을 존중한다. 언뜻 보아서 이러한 사고가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의 합리주의는 오라이어단의 지적처럼, 때때로 극히 조야하고 비합리적인 맹목적 신앙(즉 성장에 대한 맹목적 신념과 경제성장 위주의 정책에 대한 무비판적인 지지 및 자본주의의 무한한 진보 능력에 대한 고집스런 맹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 신앙으로 인해 상당한 물질적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명백하게 편견을 보이는 주관적 태도는, 그들이 주장하는 합리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정말로 객관적인 전문가 입장에서의 개발사업에 대한 비용-편익 분석이 이루어졌다면 콩코드 비행기 같은 초음속 제트여객기는 이 세상에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며, 1979년에 집권한 영국 보수당정부에 의해 핵발전소 건설계획도 추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방면의 전문가들에 의해 행해진 ꡐ핵에너지 및 고속 교통수단의 필요성ꡑ에 관한 경제적 예측의 대부분이, 이 두 가지 시도가 미래의 영국 사회에 나타날 수요감소 추세를 감안하면 모두 지나친 투자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기술지향주의는 양면성을 지닌 매우 복잡한 개념이다. 오라이어단은 ꡒ기술지향주의라는 놈은 그 합리적인 얼굴 뒤에 비합리성을 감추고 권위적인 몸짓 뒤에는 늘 자존심이 결여되어 있는 모순투성이의 동물이다ꡓ라고 말한다. 따라서 낙천주의의 탈을 벗겨내기만 하면 선천적인 불안에 떨고 있으며 줏대도 없고 매사에 발뺌부터 하려는 기술지향주의의 약점인, 자신감의 결여와 부주의(곧잘 실수로 이어진다)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1978년에 나온 ꡐ컴벌랜드(Cumberland) 지방의 핵발전소 폐기물 재처리ꡑ에 관한 윈드스케일(Windscale) 조사보고서에 대한 영국핵연료회사(British Nuclear Fuels Ltd.)의 반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보고서는 ꡒ핵폐기물의 재처리가 적절하고 엄격한 주의만 기울여진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ꡓ고 했는데, 이에 대해 핵발전소에 대한 관리책임이 있는 영국핵원료회사는 핵폐기물의 유출을 겁내고서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뒤에 발간된 한 보고서는 이미 수년 전에 핵발전소 주변의 토양으로 유출된 방사능 찌꺼기를 확인함으로써 영국핵원료회사의 관리상의 무능력을 입증한 바 있다. 그리고 1983년에는 더 이상의 유출을 걱정해서 회사의 경영 전반에 대한 정부 입법에 의한 규제가 고려되기도 했다. 또한 1979년에 발생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스리마일아일랜드에서의 핵발전소 사고는 기술지향주의의 속성인 부주의성과, 대충 사건을 얼버무려 발뺌하려는 부도덕성을 잘 나타내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기술지향주의가 반드시 환경악화를 옹호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기술지향주의는 환경악화를 반대한다. 단지 ꡐ사실상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악화ꡑ에 대해 ꡐ효율적 환경관리ꡑ(불가피한 현대의 산업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깨끗이 청소해주는)라는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포기할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고쳐 쓸 수 있는 것은 고쳐서 어떻든지 결국은 살 만한 환경으로 되돌릴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할 뿐이다. 따라서 기술지향주의는 환경보존보다는 ꡐ인간의 경제적 요구ꡑ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생물윤리로 지칭되는 자연의 생존권을 묵살해버린다. 생태지향주의와는 달리 ꡐ단기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단기적 계획ꡑ을 중시하는 기술지향주의는 자동적으로 2000년 이후의 시간들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기술지향주의 역시 생태지향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두 동질적인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지는 않은데, 크게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구분된다. 보수적 기술지향주의는 성장의 신화를 신봉하며 기술적?정치적?환경관리적 낙관론을 지나칠 정도로 내세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보적 기술지향주의는 균형을 전제로 한 물질적 풍요를 중시하는 경제원칙을 배경으로 하며 조심스러운 사회개혁주의와 중재주의를 내세운다.


이와 같은 분류는 표 1과 같은 오라이어단의 구분도에 의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있다. 보수 또는 진보라는 정치적 전문용어의 성격이 단순한 네 구분에 의해 상당히 약화된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두 용어의 성격이 알아볼 수 있게 표현되어 있다. 기술지향주의와 생태지향주의를 대립시키는, 이러한 도식적인 환경론의 이해는 현대환경론의 여러 주제에 대한 거의 모든 논의를 통해 현저하게 ꡐ공식적ꡑ인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델 세스토(Del Sesto)는 ꡐ핵에너지의 이용에 관한 중재위원회ꡑ(Joint Committee on Atomic Energy)가 주최한 1973년과 1974년의 의회청문회(원자로의 안전문제를 주로 다룸)에 제출된 친핵 또는 반핵 진영의 보고서를 분석해보고는, 이 보고서에 나타난 다양한 성격과 주장들을 대립되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로 쉽게 분류해냈다. 친핵 로비는 곧 기술지향주의이며, 반핵 로비는 명백한 생태지향주의라는 구분이 가능했던 것이다(표 2 참조).



5-2. 현대 환경론의 분류


2) 기능주의에 기초한 다원론과 마르크스주의

 

오라이어단의 분류에 의해 현대환경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의 분류에 대해 살펴보자.


샌드배치의 정의에 따르면, 기능주의에 근거한 다원주의자들은 ꡐ끊임없는 개혁을 통해 사회?경제 체계의 점진적 변화를 성취하려는ꡑ 사람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회체계를 완전히 뒤집어엎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로 정의된다. ꡐ기능주의ꡑ(functionalism)는 자연과학에서의 체계이론에 필적하는 사회과학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는 사회적 문제가 사회체계의 불균형이나 기능 고장에 연유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능 고장이나 불균형에 의해 사회체계 전체에 대한 압력이 나타나게 되고 이에 대응해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압력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압력단체가 다수의 횡포(정치적 압제)를 부림으로써 나타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이익집단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으므로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는 적절하게 사회체계 속에 융해되어서 전체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는 적절히 조절된다. 따라서 모든 이해집단의 민주적 경쟁을 통해 사회의 점진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환경문제의 개선을 위한 의사결정과정에도 이같은 다원성(여러 목소리)이 반영되어, 대개의 경우 생태지향주의와 기술지향주의 양대 진영간의 절충과 타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샌드배치는 ꡒ기능주의자의 질서 있는 세계에서는 사회적 이해관계의 대립이란 사실상 거의 없으며, 다만 전체적인 합의에서 벗어나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ꡓ라고 주장한다.


샌드배치는 계속해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사회체계 내에서의 사회적 변화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질서에서 탈선하는 긴장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환경문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환경론자들의 근심?걱정이 어느 정도 적절히 조절되어 새로운 전체적 합의에 이르는 미래사회가 제시되는 것이다.


즉 기능주의 모델이 다원론적 형태로 변화됨에 따라 환경문제는 ꡐ입장이 제각기 다른 이해집단간의 갈등ꡑ에서 생기는 것이 되고 만다. 이해집단간의 이익과 이를 추구하기 위한 압력들이 충돌하는 현상은 매우 복잡한데, 샌드배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원주의에 따르면 어떠한 지배적 집단을 향한 편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정권 획득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선거라든지 사법적 규제 등의 다양한 민주적 메커니즘을 통한 ꡐ다수의견의 반영 및 감시ꡑ에 의해 적절히 통제된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차원에서의 인식상의 일치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체적인 합의를 중시하는 이 경향은 기능주의와 다원주의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샌드배치는 더 나아가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대중매체를 통한 의도적 강요와 이에 편승한 유행을 통해 이미 확고한 전통적 지혜로 받아들여졌듯이, 다원주의 역시 코트그로브의 표현대로 ꡐ현시대의 지배적 패러다임 밑에서ꡑ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곧 당연시될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ꡐ지배적ꡑ이라는 표현은 통계적 의미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산업사회의 지배적 이익집단에 의해 채택되고 있음을 의미하므로, 다원주의 자체가 시장경제주의라는 제도 자체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는 비판을 샌드배치는 덧붙인다. 다원주의가 다시 정치?경제적 중립을 회복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를 바라며 이제는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다원주의와의 차이점을 위주로 간단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앞으로의 원활한 논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환경문제가 자원(지역적 쾌적성 같은 추상적인 것까지도 포함)을 소유한 계급과 이의 소유를 원하는 계급간의(즉 앞에서 살펴본 하딘의 구명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궁핍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구명선에 올라타기를 애타게 바라는 사람들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자원을 소유한 사람들은 지배계급이며 자본가들이고 이를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노동력 외에는 팔 것이 없는 무산계층이다.


이런 식의 모델은 국제적인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데, 자원 소유라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익집단은 곧 선진 경제강국이 될 것이며 스스로의 자원수요와 물질환경의 개선을 위해 선진국들의 이익을 점차 위협하고 있는 집단은 제3세계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불가피한 대립은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내적 모순의 결과이므로, 다원론자들이 주장하는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통해서는 결코 환경문제가 해결될 수 없으며 오직 사회체계 전부를 한꺼번에 뜯어고침으로써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다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민주적 토론의 힘(민주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정한다. 현사회의 실질적인 지배계급인 산업자본가들은 현시대의 지배적 논리에 대항하는 소수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지배적 논리를 훌륭히 대체할 만한 대안이 존재함을 다수의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 또한 철저히 통제함으로써, 사회발전을 위한 토론의 성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수단을 갖고 있으므로, 사실상 다원론자들의 주장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통제는 소련과 같은 국가자본주의 체계를 갖는 국가에서는 직접적이고 명백한 억압과 박해에 의해 행해지며(1982년 9월의 『가디언』지에는 모스크바의 반체제 평화운동단체 회원이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된 사건을 보도했다), 개인자본의 이익에 의해 지배되는 서구세계에서는 좀더 간접적인 방법 즉 자본가의 입김을 통한 언론매체의 통제와 교육과정에 대한 정부의 압력(영국의 경우 1982년 8월 공개대학의 ꡐ정치경제학ꡑ 강좌가 교육 및 과학성에 의해 탄압되었으며, 국내의 여러 대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례가 있었다)에 의해 행해진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토론의 힘을 결코 믿지 않으며, ꡐ사람들이 자연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자연파괴 행위가 곧 중지될 것ꡑ이라는 생태지향주의자들의 일반적 신념에도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환경문제를 다루는 토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에 한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탄광의 광부들은 핵에 대해 반대하게 마련이며 핵과학자들은 핵에 대해 반드시 찬성한다는 것이다. 핵을 반대하는 사람이나 찬성하는 사람 모두가 자신의 주장이 ꡐ객관적ꡑ이며 상대방의 의견보다 논리적으로 우월하다고 내세우는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은(물론 마르크스주의자 이외의 환경론자들도 대부분 이 이론에는 동의한다) 이 현상을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는 명백한 행동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제는 현대환경론의 철학적 분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3)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앞에서는 오라이어단, 샌드배치, 슈나이버그, 코트그로브 등의 연구경향을 따라, 점차 증가하는 환경문제의 원인과 이의 사회적 인식 및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대응에 나타나는 특정 집단들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체계론을 통해 현대환경론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모든 분류의 형태와 수준 그리고 이데올로기 밑에는 근본적인 철학적 배경이 존재한다. 이를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ꡐ결정론ꡑ과 ꡐ자유의지론ꡑ을 기준으로 한 분류의 목적이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에 토대를 둔 모든 이론들을 전부 다 이해하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환경론의 이해라는 우리의 주제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이유로 우리를 손짓하고 있으므로,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에 포함된 몇몇의 이론적 윤곽을 간단히 이해하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할 것 같다.


생태학이나 기타의 사회과학 분야에서 무척 강력하게 대두되어온 ꡐ환경결정론ꡑ의 전통은 과학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ꡒ환경이 모든 인간행동을 규정한다ꡓ는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통상 기후, 토양, 지형 같은 물리적 요인에 의해 정의되는 환경이야말로 인간(개인이건 집단이건)의 행태와 경제행위 및 사회조직 그리고 심지어는 생리적 측면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글라켄(Glacken)은, 기원전 5세기에 ?대기, 물, 그리고 장소(Airs, Waters and Places)라는 논설을 통해 환경결정론적 입장을 처음으로 표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히포크라테스로부터 19세기에 현저하게 발전된 이론으로 대두된 환경결정론의 철학적 입장을 역사적으로 추적했다. 초기의 환경결정론은 인간의 건강에 대한 지형과 기후의 영향이 강조되었으나, 19세기에는 더욱 다양하게 발전해서 자연자원(특히 식량자원)의 한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인구규모의 제한 또는 다위니즘의 영향 아래 어떻게 자연법칙에 의해 인간의 위치가 결정되는가 하는 포괄적 문제까지도 다루어졌다. 현대의 생태학적 철학은 인간의 위치를, 자연 속에 존재하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의존하고 그 법칙에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명백하게 정의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ꡐ실존주의ꡑ 같은 자유의지론적 철학은 인간의 실존과 자연의 객체적 존재를 명백하게 대립시켜서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의식과 자유의지라는 혜택을 부여받게 되므로 이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 객체들로 구성된 이질적인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유리시킨다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개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데, 인간은 그 개성과 독창성으로 인해 자연과 구별되므로 어떤 과학적 체계의 보편적 법칙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근본적인 선택의 자유를 갖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자유에는 자연과 함께 하거나 또는 이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자유까지도 포함되는데, 물론 자연을 거스르는 행동이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행위 그 자체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힘(자연법칙이나 경제법칙 또는 ꡐ신ꡑ과 같은 형이상학적 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거나 이에 의해 크게 제약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다.


튜안은 사르트르적 실존주의의 입장을 취해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다른 존재들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를 미래에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자연과 달리 자연법칙에 의해 일괄적으로 지배되지는 않으므로 그의 운명에 따라 그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도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각 개인이 본성적으로 독특한 개성을 갖는다는 사실에 더해서, 물리적 환경과 관련된 행위 및 물리적 환경의 가장 중요한 속성을 파악하는 ꡐ개인적 또는 문화적 편차ꡑ가 엄청나게 다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이 갖는 의도의 다양성과 독립성이 자동적으로 강조되는데, 이러한 사고는 현상학을 기초한 ꡐ후설(Husserl)의 실존주의ꡑ로 우리를 이끈다.


그는 자연계에 대한 인간의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자연을 알고자 한다면 이에 대한 인간의 의식과 의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하며 자연을 기계적인 객체들의 외적인 표현으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만일 인간이 자연환경의 어떤 부분을 의식할 수 없다면, 이는 어떤 의도나 목적에도 반영될 수 없으므로 이 자연환경의 일부분은 사라져버리게 되는데, 적어도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ꡐ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ꡑ 자연의 일부분은 ꡐ존재하지 않는ꡑ 것이 되므로 그 상대적 존재의미조차도 소멸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의 관계가 결여된 자연은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또는 권리)가 소멸되어 인간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상대적 가치로 변화된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이라는 상반되는 철학적 입장에 요약된 ꡐ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도의 차이ꡑ에 대한 논의는 현대환경론의 생태지향주의적 또는 기술지향주의적 기원에 대한 역사적 조사과정에서 다시 계속될 것이다. 이 주제는 깊은 관심을 갖고 다시 다루게 될 것이나, 우리는 ꡐ기술지향주의와 생태지향주의ꡑ 그리고 ꡐ결정론과 자유의지론ꡑ이라는 도식적인 구분법 사이에 결코 단순한 대응관계만이 성립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기술지향주의와 생태지향주의는 모두 자유의지론적 성향과 결정론적 성향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태지향주의가 결정론 쪽으로 기울기는 하지만 ꡐ인간 개성의 중요성ꡑ 및 ꡐ인간의 자연에 대한 감정적?비과학적?형이상학적 관계와 경험ꡑ 역시 강조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기술지향주의가 자연과 유리되어 자연 위에 군림하는 행동의 자유를 강조하지만 이 자유가 ꡐ실재자연의 객관적인 법칙에 대한 면밀한 연구ꡑ와 ꡐ이 법칙 내에서의 인간의 이용능력의 한계ꡑ 내에서 가능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6. 표 1, 2


표 1 생태지향주의와 기술지향주의


환경론


- 생태지향주의 - 진보적 생태지향주의(Deep Ecologist)/ 보수적 생태지향주의(Self-reliance soft-technologists)

- 기술지향주의 - 진보적 기술지향주의(Environmental managers)/ 보수적 기술지향주의(Comucopians)



진보적 생태지향주의

 

(1)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자연은 본질적으로 중요

(2) 생태학적으로 법칙이 사회와 인간을 지배

(3) 생물윤리증시 -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종과 독특한 경관의 보존을 강조

(4) 현대의 대규모 집약형 기술 및 이에 따른 엘리트 전문가의 요구를 부정. 중앙집중적 국가권위. 비민주적 제도와 기구를 비판

(5) 물질만능주의는 그릇된 것이며, 경제성장은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 사람들의 근본적 요구를 채워주는 쪽으로 획기적 전환을 해야 함


보수적 생태지향주의

 

(1) 소규모 공동체를 통한 공동체의 단일성 회복. 주거와 직업 및 여가의 분리현상 해소

(2) 개인 및 공동체의 발전을 통한 일과 여가 개념의 통합

(3) 공동체의 공공행사에의 참여 중시. 소수의 권리 보호에도 계속적 교육 및 정치적 기능에 의해 이루어짐


진보적 기술지향주의

 

(1) 경제성장 및 자원 개발은 다음과 같은 단서 하에 가능

① 세금, 벌금 등을 통한 경제적 불균형 재조정

② 최소한의 환경권에 관한 법칙 권리 보장

③ 사회․환경적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

(2) 각 이해집단 간의 일치감을 찾는 순수한 연구와 폭넓은 토론을 위해. 대부분의 새로운 개발계획 평가기법 및 결정검토과정을 인정


보수적 기술지향주의

 

(1) 인간은 어떤 경우의 정치적 과학적․기술적 어려움도 극복한다고 믿음

(2) 성장이라는 목적 자체가 개발 계획 평가 및 정책 형성의 합리성을 규정

(3) 세계 인구의 운명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인간능력에 대한 낙관론

(4) 과학 기술 전문가는 경제성장. 대중의 건강과 안전에 대해 훌륭한 조언을 한다는 믿음

(5) 개발계획 평가나, 정책검토 과정에 있어 대중참여나 장시간의 토론은 무의미하다는 믿음

(6) 성장의 산물인 경제적 풍요와 이를 위한 의지에 의해 모든 장애가 극복될 수가 있다는 믿음



표 2 핵 이데올로기


1. 진핵 로비의 의견

1) 평화적 사용을 통한 이익

(1) 생활 수준의 향상을 가져옴

(2) 경제성장에 도움이 됨

(3) 재정적 이익이 됨

(4) 무한한 에너지를 제공함

(5) 에너지난을 해소함

(6) 평화적 사용은 군사적 사용을 위축시킴


2) 과학기술을 통한 문제해결

(1) 핵에너지에 관련된 정치적․가치체계적 쟁점은 과학기술로 해결가능함

(2) 과학기술로 핵에너지에 관련된 모든 실질적 문제의 해결이 가능함


3) 반대파에 대한 비난

(1) 사실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왜곡하고 있다

(2) 지나친 과장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3) 개인적인 공격도 서슴지 않는 비열함을 보인다

(4) 전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

 


2. 반핵 로비의 의견


1) 미래세대에 대한 나쁜 유산

(1) 도덕적으로 나쁜 것임

(2) 전체주의적 경찰국가로 사회를 유도함

(3) 핵물질을 악용한 파괴 및 테러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함

(4) 핵전쟁을 유발함

(5) 과학기술로는 핵에너지로 인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


2) 중앙집중화 방지 및 정치적 책임 강조

(1) 핵에너지 의사결정권은 소수에 의해 독점되어서는 안 됨

(2) 현재의 의사결정 과정은 그릇된 것임

(3) 핵에너지 규제는 정치적 책임감을 더욱 강조해아 함

(4) 규제 과정은 시민단체의 의견을 더욱 넓게 수용하고, 이 과정에서의 대중 참여 또한 더욱 확대되어야 함

(5) 환경영향이 낮은 안전한 기술적 대안이 오히려 더 나음


3) 반대파에 대한 비난

(1) 사실을 왜곡해 진실을 감춘다

(2) 개인적인 공격도 서슴지 않는 비열함을 보인다

(3) 대중을 속이려는 음모이다

(4) 전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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