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세계/미디어의 철학

[스크랩] 재매개의 사례

ddolappa 2008. 5. 16. 04:43

 

재매개의 사례

 

랜햄은 겉보기와 들여다 보기 사이의 긴장: 방송 편집에서의 겉보기와 들여다 보기 사이의 긴장 20세기 예술일반 특히 디지털 표상의 특징으로 간주한다.

 

라이브 생중계 투명성의 비매개

 

클래식 오딧세이의 하이퍼매개 특징

 

김정은의 초콜릿이 재매개하고자 하는 것은? 공연장, 극장식당, 텔레비전 프로그램,

 

디지털 하이퍼매개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예들 가운데 일부가 록음악 제작과 연출의 세계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연”이 록음악의 유의미한 표식이 되었을 때, 초창기 녹음은 투명성의 논리에 집착해 “생”음악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실연 자체가 하이퍼매개 되면서 전기적, 디지털 샘플링, 레이브, 환경음악 등과 같은 기법들이 점차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녹음도 그렇게 되었다. 작품들의 전통적인 음악적 특질들은 점차 사운드의 양이나, 다양성, 시각적 볼거리에 비해 덜 중요해졌다.

 

뮤지컬의 유행은 이러한 하이퍼매개적 미학의 속성의 반영일까?

재목적화와 재매개의 차이점은? 원소스 멀티유즈

 

영화에서 소설을 인정하게 되면 오스틴의 독자들이 기대하는 연속성이나 비매개의 환상을 단절시키게 되는데, 이는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처럼 매끄럽게 영화를 관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내용은 빌려왔지만, 미디어를 전유하거나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성경이나 다른 문학작품에 나오는 이야기를 삽화형태로 그리는 것 역시 단지 이야기 내용만을 빌려오는 것이다. 현대 오락 산업은 그와 같은 차용을 재목적화라고 부른다. 즉 한 미디어가 갖고 있는 속성을 취해서 다른 미디어에서 재사용하는 것이다. .

 

 

다큐멘터리의 재매개 양상은?

 

다큐멘터리의 용어의 유래, 문서를 재매개,

 

선진국 포맷, 60미니츠, 추적 60분, NHK 스페셜-> KBS 스페셜,

다큐멘터리 72시간 -> 다큐멘터리 3일, 노도지만->전국노래자랑

 

 

텔레비전 쇼프로그램, 서커스, 극장쇼,

 

열린음악회-> 야외공연

 

이소라의 프로포즈 ->소극장 공연

 

텔레비전뉴스->라디오뉴스->신문뉴스->공보, 관보-> 편집-> 일기-> 음유시인

 

드라마-> 연극-> 소설->이야기->실제삶

 

토크프로그램-> 인터뷰, 대담-> 빨랫터 이야기, 노변 정담

 

연예정보 프로그램-> 텔레비전 뉴스

 

PD수첩-> 수첩?

감성매거진 행복한 오후-> 잡지

경제매거진 M

TV 책을 말하다->세미나

낭독의 발견-> 낭독회, 문학의 밤

영상포엠-> 그림있는 시집

TV 동화 행복한 세상-> 동화책, 이야기책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백과사전

아침마당->빨랫터, 동네 정자

우주방송국 따따-> 방송국

TV 유치원-> 유치원

하이스쿨->학교

잉글리쉬 카페-> 카페

 

 

 

 

인터넷을 재매개한 방송 프로그램은? 상상플러스,

 

핸드폰은 무엇을 재매개했나? 카메라, 수첩, 손목시계, 오디오, MP3, 편지, 텔레비전,

 

블로그->일기

 

인터넷 카페-> 클럽-> 찻집(카페)

 

 

 

 

 

 

 

 

 

 

 

 

 

 

 

 

 

 

 

2006.10. 발제: 홍경수

 

Jay D. Bolter & Richard Grusin, Remediation Understanding New Media

제 2장 매개와 재매개

 

디지털 미디어는 투명성과 비매개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재매개를 하기도 한다. 디지털 미디어가 실재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실재는 관람자의 경험이라는 관람에서 정의된다. 투명한 디지털 응용체계들은 매개된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실재적인 것에 도달하고자 한다. 디지털 하이퍼미디어는 매개를 다중화함으로써 실재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다중화를 통해 충만감, 즉 경험의 포만감이 창출되며, 이것은 실재라고 간주될 수 있다. 이 두가지 움직임 모두 재매개의 전략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역설이 있다. .

 

1) 하이퍼 매개가 비매개의 성취라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것.... 이머전시 브로드캐스트 네트웍 이라는 음악 cd-rom에는 과잉이라는 개념이 대중음악의 문화를 구성해온 요소가 되었다. MTV의 경우에서처럼 미디어의 과잉은 진정한 경험이 되는데, 이것은 그 경험이 외적 실재와 조응한다는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 그 어떤 것을 지시한다고 느낄만큼 강렬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MTV의 경우, 시청자들은 응시라기보다는 일별을 통해 경험하는데 Bryson 만든 이 구분에 따르면, 일견의 미학을 통해 시청자는 단순히 산물이 아닌 과정, 창작과 관람의 과정 모두를 인지하게 된다. 모던 시각 예술은 외적 세계를 지시하는 것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경험을 관람자에게 제공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모던 예술도 경험의 진정성을 기약하였고, 캔버스에 물감칠하는 과정을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기능적 건축물이나 기계처럼 그것은 행하고 있는 그 모습으로만 보이게 된다.

 

2) 하이퍼매개가 비매개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갖로 투명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그것이 매개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때 조차도 항상 재매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투명한 테크놀�가 자신을 지움으로써 미디어를 개선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우고자 해썬 그 미디어의 기준에 의거해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와이어는 “좀 더 나은 TV 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을 부정하는 비교대상을 긍정한다. 따라서 모든 매개는 재매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이 섬험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같이 확장된 역사적 관점에서 현재의 모든 미디어가 재매개체로 기능한다고 그리고, 재매개는 기존 미디어에 대한 해석 수단도 제공해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선형적 역사가 아니라, 연계의 계보이며, 이런 계보 속에서 보면 오래된 미디어도 새로운 미디어를 재매개할 수 있다. 재매개의 이중 논리는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설명될 수도 있다.

 

* 재매개는 매개의 매개다.

 

탈구조주의자들이 보기에 글쓰기에 선행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상문화에서 매개에 선행하는 것은 없다. 그 어떤 매개행위도 또다른 매개행위들에 의존하며, 따라서 재매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저작에서 “언어적 회귀”와 그가 “미디어화”라 부르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한 바 있다. 제임슨은 포스트 모던 문화의 공간화를 “전통적 예술이 미디어화하는 과정”으로 기술한다. 제임슨이 말하는 전통적 예술의 미디어화는 재매개 과정이며, 여기서 미디어는 문화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서로에, 그리고 선행미디어들에 체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제임슨은 영상 미디어가 과거 언어적 미디어의 지배력에 도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디오가 대표형식인데, 이것의 전체 흐름은 언어적 의미를 구성하는 물리적, 시간적 차이를 위협한다. 비디오는 문학이론이나 언어 이론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파괴한다.

 

제임슨과 마찬가지로 라투르가 보기에 현대이론은 언어와 해석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기호학, 기호론, 언어적 회귀 등 이런 철학들의 목표는 담론을 자연세계와 인간 주체를 접촉하게 하는 투명한 상호매개자가 아니라, 자연이나 사회로부터 독립된 매개자로 간주하려 한다는 것이다. 언러가 의미화주체와 자연 사이의 공간을 채워주는 능동적이며 가시적인 매개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이론은 언어를 문화적 힘으로 고립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는 언어가 다른 미디어, 다른 테크놀로지, 다른 문화적 인공물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투르가 보기에, 현대의 과학기술현상은 인간주체, 언어, 외부사물세계의 상호교차 또는 혼성체로 구성되며 이런 혼성체는 그 구성요소만큼이나 실재적이다. 매개문화의 사건들은 주체, 미디어, 객체의 결합체들로 구성되는데, 이것은 분리된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매개행위에 선행하거나 그것을 넘어 존재하는 것은 없다.

 

 

* 재매개는 매개와 실재의 분리 불가능성이다.

 

미디어는 세계내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기능한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실재적이다. 그것의 실재성은 편집과 구성테크닉뿐만 아니라, 셀룰로이드의 조합, 명성이라는 사회적 의미, 오락산업의 경제 등으로 구성된다는 점에 있다. 모던 예술은 우리문화에 매개의 실재성을 인식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모던 회화는 이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표상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은 지시체로서의 실재적인 것이나, 세계를 제거하여, 실재가 그림 그리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외부세계의 표상이 아닌, 세계 내에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제시했다. 모던 회화는 비매개성이 덜하고, 모던 회화가 비매개성을 획득한 것은 매개를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필립 피셔는 “캔버스 표면과 관람자 사이의 공간을 식민화하는 것은 20세기 가장 공격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되어왔다”고 주장했다. 매개체가 실재적인 것은 생산된 대상들이 실재 세계에서 순환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매개행위 그 자체가 혼성체로 기능하고 물리적 대상처럼 간주되기 때문이다. 결국 매개행위에 선행하는 것은 없듯이, 어떤 의미에서 모든 매개는 실재적인 것을 재매개한다. 매개는 실재의 재매개인데, 이는 미디어 자체가 실재적이며 미디어 경험이 재매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 재매개는 개혁이다.

 

재매개라는 말은 복구, 치료, 회복이라는 라틴어 remederi에서 유래한다. 하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를 개혁하거나 개선한다고 우리문화에서 간주되는 것이라 표현하고자 한다. 사진은 회화보다, 영화는 사진보다, 텔레비전은 영화보다 더 비매개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가상현실은 비매개성이라는 약속을 실현해내면서 그런 진보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간주된다. 미디어가 성숙해가면서 하이퍼매개에 대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재매개의 수사는 비매개성과 투명성을 선호한다.

 

또한 재매개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에서 개혁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인터넷이 의사결정과정에 비매개성을 제공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디지털 직접민주주의) 미국의 경우 개혁의 몸짓이 문화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미국문화가 재매개의 전략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재매개는 미디어가 실재 자체를 개혁한다는 의미에서 개혁이다. 이것은 미디어가 단순히 실재의 현상만을 개혁한다는 뜻이 아니�. 미디어 혼성체(기술적 인공물, 수사적 정당화, 사회적 관계 사이의 연계)는 과학의 대상만큼이나 실재적이다. 미디어는 서구적 테크놀로지가 실재를 개혁하기 위해 사용해왔던 방식 그대로 실재를 변형시킨다. 유비쿼터스나 분산 컴퓨팅에 대한 제안들은 디지털 인공물을가지고 “현실을 증강시키며” “분산된 사이버스페이스”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분산컴퓨팅 주창자들은 디지털 미디어의 주창자나, 실무자 모두가 내심 가지고 있는 목적, 즉 재매개된 공간으로서의 세계를 다시 상상하고 이에 따라 개혁한다는 목적을 과장해 표현하고 있다. 수백년 동안 실재의 재매개는 표상테크놀로지 속에 구축되어 왔다. 사진 영화, 텔레비전은 우리문화에 의해 구축되어 우리 문화의 차별성을 구현하고 그 차별성을 우리 실재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왔다. 디지털 미디어는 이런 전통을 따른다.

 

 

 

 

 

 

 

 

 

 

 

 

 

 

 

 

제 3장 재매개의 네트워크

 

 

미디어란 무엇인가?

미디어는 재매개하는 그 무엇이며, 다른 미디어의 기술, 형식, 사회적 의미를 전유하여, 실재적이라는 명목하에 그것들과 경쟁하거나, 그것들을 개조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다. 하나의 표상형식이 다른 미디어를 거의 또는 전적으로 참조하지 않고 표상적 힘을 갖는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이다. 지난 50년간 디지털 컴퓨터가 이런 “미디어화”과정을 거쳐왔음을 알게 되었다. 1970년대에 워드프로세서가 80년대에는 데스크탑이 등장했고 컴퓨터는 하나의 미디어가 되었는데 이는 그것이 사회경제적 비즈니스 망에 진입하고 타자기를 재매개하여 그것을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중적 미디어에 대한 문화연구(더글라스 켈너의 <미디어문화>는 미디어의 형식적특징, 즉 그 내용과 경제적 사회적 기능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올바르게 보여준다. 재원조달방식이 미국텔레비전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 원인이 아니라, 텔레비전과 같은 테크놀로지의 속성이 형식적, 물질적, 사회적 실천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디어의 한 측면에 초점을 맞출 때에는 항상 그 밖의 다른 측면을 논의에 포함시켜야만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한다. 사회적 경제적 인공물, 이미지들은 영화자체의 맥락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미국에서 이해되는 방식대로 영화라는 미디어를 구성하는데 참여한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경제적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구현하거나 전파하며, 우리는 일차적으로 미디어를 연구해 그런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그것에 저항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미디어의 형식적 특성이 사회, 경제적 의미를 반영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사회적 경제적 특면이 형식적 기술적 특성을 반영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재매개의 물질적, 경제적 차원들

 

각각의 새로운 미디어는 가능한 한 기존의 것을 대체하거나 보완함으로써 경제적 위치를 찾아야 하며, 따라서 대중적 수용과 그에 따른 경제적 성공은 새로운 미디어가 기존미디어들이 주던 경험을 개선한다는 인식을 소비자들에게 심어줄 때만 가능하다. 동시에 종사자들의 경제적 성공도 새로운 미디어가 획득한 지위에 의존하게 된다. 오락산업이 재매개를 재목적화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경제적 차원이 사회적, 물질적 차원과 구별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화책 시리즈는 실사영화, 텔레비전 만화로, 비디오 게임으로, 장남감세트로 재목적화된다. 재목적화된 내용은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모조품인 종합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 재목적화를 미시경제적 차원에서 소재와 관행의 개조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기술자와 제작자는 사진과 무대연극의 관행 두가지를 재매개했고, 컴퓨터그래픽의 그림그리기 프로그램은 페인트브러시, 에어브러시, 칼라팔레트, 필터와 같은 육필회화 기법으로부터 이름을 차용했다.

 

사회적 차원

 

물질적 관행의 재매개는 사회적 질서의 재매개와 분리될 수 없는데, 일차적으로 이것은 새로운 미디어의 실무자들이 기존 미디어에 일하던 사람들의 지위를 그대로 이어받고자 하기 때문이다. 영화스타는 예술가로, 감독은 작가로간주되고 싶어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사진의 지위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회화와의 경쟁에서 사진가들이 예술가로 간주되기를 바랐다면, 다른 사진가들은 사회역사가, 자연과학자라고 주창했다. 이들의 내적 불일치는 미디어의 물질적 형식적기반, 그리고 사진이 수행한 재매개의 사회적 의미 두가진에 대한 것이었다. 한편 관람자는 사진가의 역할로 개조되어 갔다. 재매개의 두가지 논리는 실무자들뿐만 아니라, 관람자들에게도 사회적 차원을 갖는다. 비매개의 두가지 의미는 인식론적인것과 심리학적인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인식론적 의미에서 비매개는 투명성이다. 심리학적의미에서 비매개는 미디어가 사라지고 대상이 제시된다고 관람자가 느끼는 것, 자신의 경험이 그에 따라 진정한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을 말한다. 하이퍼매개도 인식론적의미에서는 불투명성이지만, 심리학적의미에서는 관람자가 미디어속에서 그것에 대해 갖게되는 경험이다. 경험의 진정성에 소구한다는 것은 비매개 및 하이퍼매개의 논리를 결합시켜주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소구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데 개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집단이 진정한 것에 대해 다양한 정의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퍼 매개의 경험은 해당미디어의 사회적 구성에 의거하기도 한다. 즉 무대위의 록연출은 하이퍼매개된 이벤트인데ㅡ 미디어가 잊혀지고 지워진다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것이 투명하다고 해석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미디어자체와의 비매개적 관계 속에들어가게 되면, 록 팬들은 진정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은 비매개와 하이퍼매개의 논리를 둘러산 사회적 논쟁의 중요한 예를 제공한다. 니엡스, 다게르, 탈보트 등은 자신의 새로운 미디어가 비매개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의 사회적 구성을 통제하고자 했다. 논쟁결과 사진이 진정으로 세계를 포착한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졌는데, 디지털 사진은 비매개성에 대한 그런 주장에 다시 도전하고 있다. 한연구에서는 아프리카의 피험자에게 원근법적 회화, 사진,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피험자들은 처음 보았을 때 이미지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몇 번을 본 뒤에는 쉽게 이미지를 다룰 수 있었다. 이 실험을 통해 매개의 사회적 측면이나 기술적 측면 어떤 것도 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구나 아프리카의 피험자 모두 이미지속의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내적인 시각체계를 활용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비매개와 하이퍼매개의 사회적 차원은 형식적 기술적 차원만큼이나 중요하다. 전자를 평가하기 위해 후자를 평가절하할 필요도 없고, 기술적 심리학적 차원들을 사회적 차원으로 환원할 필요도 없다.

 

재매개 시대의 예술작품

 

재매개의 정치적 차원으로 논의하기 위해 벤야민의 “기술적 재생산시대의 예술작품”을 생각해보자. 벤야민은 테크놀로지가 대중예술을 지향하는 새로운 유형의 정치적 또는 혁명적 잠재력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잠재력은 위험스러운 것일수도 있다. 기계저 재생산의 테크놀로지가 정치적인 힘을 갖는다는 벤야민의 주장은 오늘날 새로운 미디어 특히 인터넷이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일부주창자들의 주장속에서 반대입장으로 다시 제기된다. 예로 존 페리 발로의 “독립선언”에 담긴 주장 즉, 사이버스페이스는 산업자본주의의 법칙들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새로운 정치영역이며, 새로운 정치질서는 우리의 감시하에 있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 벤야민은 영화가 보다 복잡한 동학 속에서 대중수용자를 교육시킨다고 생각한다. 벤야민은 영화테크놀로지 또는 기계저 재생산 일반이 예술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거리를 단축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예술 작품의 아우라를 파괴시킨다는 주장으로 시작된다. 한편으로 벤야민의 기계적 재생산 개념은 미디어에 대한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경우, 관람자가 영화의 매개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자극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면들이 빠르게 이어짐에 따라, 주의가 분산되기도 한다고 기술한다. 이런이유 때문에 벤야민은 영화관람과 회화관람을 대비시킨다. 회화관람자는 마치 미디어가 사라진 것처럼 작품속에 빠져든다. 영화에 의해 제공되는 비매개성은 미디어에 대한 매혹, 즉 매개경험에 대한 인정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 그런 비매개성일 것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화가와 카메라 맨은 다른 기법을 실천하고 있다. “화가는 작품속에서 실재로부터 자연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카메라 맨은 실재의 망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다. 화가의 그림은 전체적인 것이고 카메라맨의 그림은 새로운 법칙하에 조합되는 다중적 조각들로 된다. 또한 기계적인 장비를 통해 실재에 완벽히 침투함으로써 모든 장비로부터 자유로운 실재의 한 측면을 영화가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작품에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매개를 통하지 않고, “모든 장비로부터 자유로운 실재의 한 측면”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정치적혁명은 그와같은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믿고 있는 것 같다. 미디어와 매개과정이 보다 공공연히 인정되고 평가되는 오늘날의 우리 시대와 같은 시기에 심미적 목적과 정치적 함의는 다른 것 같다. 오늘날 예술작품은 “매개나 재매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실재의 한 측면”을 제공한다면, 그와 동시에 새로운 미디어는 바로 “모든 매개로부터 자율로운 실재의 한 측면”을 제공하고자 한다. 따라서 재매개는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항상 다른 미디어 형식 속에서 그 아우라를 개조한다.

 

기술결정론

 

20년 전에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이 “본질적으로 내적인 연구개발과정을 통해 발견될 수 있으며, 이것은 이제 사회변화와 진보의 조건을 만들어준다”는 인식을 비판하는 유력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존 페리 발로와 같은 사이버스페이스 주창자들은 인터넷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줄 것이라고 신뢰하고 있는 반면, 보수적인 정치가들은 인터넷자체가 새로운 형식의 음란물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윌리엄스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은 기술결정론이 포스트모던이론과 문화연구에 의해 거부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라는 것을 거의 모든 역사가, 사회과학자, 인문학자에게 확신시켜주었다. 윌리엄스는 맥루한의 “인간의 확장”이라는 개념을 비판하는데, 맥루한이 미디어를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추상화시켰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이해>에서 맥루한은 미디어가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말하는데, 그는 오늘날 기술결정론의 대중적 버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맥루한은 미디어와 문화적 인공물들 사이에 내재적인 조응관계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맥루한이 말하는 조응관계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하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를 재매개하는 방식들을 잘 지적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종 재매개는 미디어를 동반하는 사회적 실천들과 관련된다. 즉, 우리는 맥루한의 결정론에 반대하면서도 다양한 미디어들의 재매개능력에 대한 그의 분석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윌리엄스의 비판이 보여주는 다른 반쪽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결정된 기술”론도 인간과정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일면적 일방적 버전을 보여준다고 윌리엄스는 경고했다. 그는 “결정은 실재적인 사회적 과정이지만, 결코 전체적으로 통제를 가하는, 즉 전체적으로 예측력을 갖는 일련의 원인들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회적 힘이 “한계를 설정하고 압력을행사하지만, 결과를 전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기술결정론과 결정된 기술론 모두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사회적 힘과 기술적 형식을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이라고 간주하고자 한다. 디지털테크놀로지 자체를 기술적, 물질적, 경제적 요인들의 혼성체로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상현실은 우리 문화가 새로운 미디어 일반에 연계시켜온 주관적 관점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디지털 표상테크놀로지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한 측면이 원인이나 결과라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디지털미디어가 기존 미디어에 “도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테크놀로지가 고립된 것으로 간주하는 기술결정론의 수사다.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문화적 변화를 야기하는 힘은 개인과 사회집단의 통제속으로 들어오는, 그리고 그런 통제에서 나오는 형식적, 물질적, 경제적 논리들의 상호작용속에 위치해있다고 본다. 우리는 재매개의 두가지 논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적 응시의 재매개

 

르네상스 선형원근법 이론을 보여주는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은 남성장인이 그의 여성모델을 대상으로 수학적으로 해부하는 모습이 담긴 뒤러의 목판화다. 이 이미지에서 미술가의 비매개에 대한 욕망은 그의 임상적인 응시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여성대상을 소유는 아니더라도 분석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것처럼보인다. 알베르티의 창에서 시작된 투명성의 개념은 그 자체로 성차를 드러내는 개념일지 모른다. 마틴 제이는 알베르트의 기술적인 원근법이 데카르트의 철학적 이원론과 결합되어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를 만들어냈다고 본다.에블린 폭스 켈러와 크리스틴 그론트토프스키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시각의 특권화, 서구남성중심적 과학과 연관시킨다. 루스이리개레이에 따르면 그 논리에서 결여되어있는 것은 “여성의 욕망이다.”

 

영화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가장 강력하고 일관되게 남성적 응시를 비판한 미디어다. 로라 멀비는 “남성의 응시의 대상이 되는 실제 여성의 이미지는 그런 주장을 표상의 맥락과 구조속으로 심화시킴은 물론 선호되는 영화형식- 환각적 내러티브영화 속의 가부장적 질서가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라는 또다른 층위로 나아가게 한다. 이런 상호작용 층위들 가운데 어떤 것도 영화의 내재적인 것은 아니지만, 바로 영화형식 속에서 시선의 강조점을 이동시킬 수 있는 영화의 가능성 대문에 그것은 완벽하고 아름다운 모순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영화는 여성이 시선의 대상이 되어 스펙터클 자체 속으로 통합되는 방식을 구축해낸다...영화적 코드는 응시, 세계, 대상을 창출해냄으로써 하나의 환영적 컷을 욕망의 수단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멀비가 말하는 욕망은 비매개의 욕망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한데, 이것은 여성을 소유하거나 어쩌면 파괴하고자 하는 남성의 욕망이 된다. 영화는 관점을 변경시킬 수 있기에 스트립쇼와 연극을 재매개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재매개덕분에 친숙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새로운 길을 영화가 제공하고 있다고 멀비는 주장하는 셈이다.

 

영화나 다른 투명성의 비매개 테크놀로지들은 성차를 드러내는 시선형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영상미디어는 완벽한 투명성을 획득하기 위해 비매개에 이르는 다른 길을 추구할 수 있다. 텔레비전의 비매개성 주장은 그것의 투명성뿐만 아니라, 사건을 라이브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컴퓨터게임이나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의 비매개성은 상호작용성 때문에 가능한 것같다. 상호작용성은 비매개성에 대한 가상현실의 주장가운데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이퍼매개성을 통한 비매개성의 경우, 미디어를 선형원근법으로 들여다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미디어의 표면이나 미디어의 다중성을 보는데, 이것은 컴퓨터 화면의 윈도들이나, 콜라주와 사진몽타주의 분절화된 요소들 속에 나타난다. 이런 비매개성은 여성적 형식이나 다른 형식들을 통제하거나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반하는 것도 아니고, 일관되게 성차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크리스티앙 메츠와 로라멀비가 제시한 모델에서는 영화가 고립된 미디어로 간주된다. 그들은 관람자의 영화경험을 일종의 강제된 고립이라고 이해한다. 남성관람자에게조차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미디어에 대한 매혹은 관람경험에 거리를 두게하고 관람경험을 틀지우게 한다. 관람자는 비매개에 대한 욕망과 미디어에 대한 매혹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이러한 거리두기와 틀지우기는 어두운 극장안의 관람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같이 고립된 경험에 앞서거나 뒤따르는 다른 모든 형식속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극장로비에서 모니터를 통해 영화를 미리보는 것, 예고편이나 영화스틸사진, 월드와이드웹의 정보 등이 있다.

 

남성적 응시가 전적으로 통제와 소유의 행사라면, 끊임없이 서로를 재매개하고, 이에따라 그 어떤 표상테크놀로지도 자신을 완벽하게 지울수 있다는 믿음이 헛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현대영상미디어에서도 그런 응시가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우리는 이성애적인 남성적 시선을 드러내는 선형원근법도 하이퍼매개에 의존하며, 하이퍼매개는 세계를 보는 비자연적인 방식이라고 규정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비자연적인 표상양식들의 총합인 하이퍼매개는 선형원근법의 비매개성을 정당화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이퍼매개는 투명성의 테크놀로지가 아무리 엄격하게 그것을 배제시키려해도, 항상 모든 시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투명성은 하이퍼매개를 필요로한다.

출처 : 홍경수 피디의 방송생활
글쓴이 : kyung-soo ho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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