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세계/미디어의 철학

[스크랩] 미디어論의 예언자 마샬 맥루한

ddolappa 2008. 5. 16. 04:44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유명한 테제를 남겼다. 메시지란 어디까지나 미디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내용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일반 상식에 도전하여, 메시지란 그것을 전달하는 미디어의 테크놀로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사실상 사람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메시지의 내용보다도 오히려 미디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맥루한의 비유에 따르면 철도와 기차는 미디어이고 그 기차가 실어 나르는 승객이나 화물은 메시지이다. 그리고 기차가 실어 나르는 내용물보다는 철도가 가설되고 기차가 달리는 것 자체가 사회를 변화시킨 동력이라는 설명이다.

 

 

미디어論의 예언자 마샬 맥루한




김정탁 /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장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 McLuhan(1911∼1980)

· 1911년 7월 캐나다 서부 앨버타주 애드먼턴에서 출생.
· 1928년 캐나다 마니토바 대학에 입학,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나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국 엘리자베스1세 시대 시인 토마스 내시의 수사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 1939년 미국 텍사스 출신 여배우 코린 루이스와 결혼. 나이 66세인 1977년 우디 앨런 감독의 《애니 홀》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함.
· 엔지니어 지망생이었던 그는 71년 그의 조카와 함께 속옷에서 오줌 냄새를 제거하는 물질을 개발한 발명가이기도.
· 인류학자 에드먼드 카펜터와 공저한 《커뮤니케이션의 탐구》(1960년) 이후 《구텐베르크 은하》(1962년) 《미디어의 이해》(1964년) 《지구촌의 전쟁과 평화》(1968년) 《교실로서의 도시: 언어와 미디어의 이해》(1977년) 등의 저서가 있다. 사후에도 《커뮤니케이션 저널》 1981년 여름호가 〈맥루한 특집〉을 한 데 이어, 《맥루한 서신》(1987년) 《미디어의 법칙: 신과 학》(1988년) 《지구촌》(1989년) 《맥루한 요론》(1995년) 등의 책이 이어졌다. 이 중 몇 개 책은 그의 아들 에릭 맥루한에 의해 편집, 출간된 것이다.


들어가는 말

캐나다 출신의 저명한 커뮤니케이션 학자 맥루한M. McLuhan은 급속하게 발전하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람이다. 인간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왜곡시켰던 미디어로서 인쇄기를, 그리고 인쇄기에 의해 왜곡된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미디어로서 텔레비전으로 규정했다. 그의 이런 극단적 표현은 텔레비전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뉴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초래할 변화에 대해 가장 앞장서서 예견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데 있어 가장 강력한 수사로서 작용한다.

사실 맥루한은 자신이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도 세인의 관심을 크게 모았지만 그 당시에도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이 없지 않다. 맥루한의 대표적 저서인 《미디어의 이해-인간의 확장》이 1964년에 출판되었을 때 미국의 대학생들이 이 책을 성경 다음으로 많이 지니고 있다고 할 정도로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 이 책에서 발견되는 번뜩이는 그의 발상은 당시 대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1980년의 마지막 날 죽었을 때 캐나다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재직했던 토론토 대학에 국비로서 〈맥루한연구소〉를 설립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맥루한의 미디어론은 아직까지도 신비한 종교의 교리처럼 이해되어 오고 있는 측면이 많다. 게다가 그를 믿는 사람에게는 불변의 진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한낱 궤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의 뛰어난 통찰력은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에게조차 아직도 제대로 커뮤니케이션 되지 못한 측면이 많다.

그런데 1960년대 미국의 저항문화 속에서 잠시 피었다가 사라졌던 맥루한의 통찰력은 21세기 벽두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멀티미디어의 디지털 문화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오늘날 멀티미디어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예외 없이 맥루한의 주장으로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주장했던 내용의 대부분이 1964년 당시 보다 지금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하다"는 평가마저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디자드W. Dizard는 "맥루한은 멀티미디어를 실현시키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기술, 경제, 그리고 정치력의 융합에 의한 정보 및 지식혁명의 시대에 대한 예견을 30년이나 앞서 예견함으로서 오히려 인정받지 못한 학자였다"고 아쉬워한다. 게다가 울프T. Wolf는 "만약 맥루한의 주장이 옳다면 맥루한은 뉴턴,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파블로브 이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일 것이다"고 주장했는데 오늘날 세상은 맥루한의 예언대로 변해오고 있다.

물론 맥루한을 한 마디로 정의하거나, 또 단편적으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경력이 문학비평에서 문화비평으로, 미디어 이론가에서 전자시대의 예언가로 여러 국면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지식은 문학, 예술, 철학, 종교, 철학에서 고전, 언어학, 심리학, 경제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많은 인용과 경구 형식의 결론 등 그의 글 쓰는 스타일이 학문에서의 통상적인 글쓰기와 크게 달라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이 때문에 맥루한이 제기한 문제들은 학계의 진지한 관심을 받기보다는 지구촌(글로벌빌리지)라는 새로운 시대를 예견한 사람으로서, 또 미디어 변화가 사회변화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 기술결정론자로서 주목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조차도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를 구분한 학자 정도로서 맥루한을 이해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우리들의 삶의 깊이와 넓이에 있어 일종의 문명사적 전환을 예고하기까지 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이미 불투명하게 전개 된지 오래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을 설명하고, 또 그 곳에 정당성을 부여하던 미래 예측의 잣대가 점차 그 유효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처럼 불투명한 상황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전망을 필요로 하는데 이런 필요가 맥루한에 대한 재평가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 "지구촌" 등 맥루한이 던지는 수사들을 의미 있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현실과 그 수사들을 표면적으로 연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토해낸 수사들의 근저에 깔려 있는 맥루한의 사상적 기반을 탐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맥루한이 언급했던 '지구촌'은 원천적으로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수사이다. 이런 취지에서 이 말은 세계 언론들에 의해 크게 증폭되었다.

이 때문에 '지구촌'은 지구가 하나의 생활권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자리잡았다. 그렇지만 지구촌의 원래 의미는 지구적 차원의 원거리 소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촌이란 그런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넘어서 새로운 담론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전자적 매개의 커뮤니케이션은 상징적 소통의 구조와 그 토대를 이루는 조건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멀티미디어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미디어의 발명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발명된 미디어가 인간 커뮤니케이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다. MIT 대학교 부설 "미디어 랩" 소장 네그로폰테N. Negroponte도 이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들에 의해 수행되는 연구가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죽은 맥루한을 학문의 관에서 다시 끄집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을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라는 하부구조의 엄청난 변화 앞에 무기력하게 대처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학 내지는 미디어학을 새롭게 복원하는 길이라고 본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 이것은 맥루한 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은유일까? 아니면 하나의 사실일까? 아니면 하나의 도그마일까? 아니면 하나의 명제일까? 아니면 하나의 이론일까? 아니면 하나의 계시일까? 이처럼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경구는 매우 논쟁적이다. 그렇지만 맥루한이 이 경구를 무슨 의미로 말했는지를 이해해야만 그의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을 수 있다. 맥루한이 이 경구에 얼마만큼의 애착을 가졌느냐 하면 자신의 묘비명을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로 유언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맥루한은 테크놀로지를 인간의 확장,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 기능의 확장으로서 파악했다. 그런데 테크놀로지가 일으킨 개인적 사회적 결과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도입하는 '새로운 규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바로 이것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경구가 함축적으로 의미하는 바다. 맥루한에 따르면 "어떤 테크놀로지의 메시지는 그것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도입되는 규모나 속도나 패턴의 변화"라고 밝히고 있다. 그것이 인간 행위의 규모와 형식에 꼴을 주고, 또 제어하기 때문이다. 이를 전자시대의 술어로서 표현하면 "모든 테크놀로지는 총체적으로 새로운 인간 환경을 점진적으로 창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테크놀로지라도 그 '메시지'가 인간과 관계하면 그것에 의해 척도가 바뀌거나 진도가 달라지거나, 또 기준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철도는 달리는 일, 수송하는 일, 또는 차륜 선도를 인간사회에 끌어들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철도가 인간 사회에 들어오면 전혀 새로운 종류의 도시나 일이나 레저를 낳고, 나아가 종래 인간의 기능을 촉진하고 또 규모를 확대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철도가 통과하는 것이 열대지역이든 한냉지역이든 상관없으며, 또 철도라는 미디어가 운반하는 것과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관계가 없다.

따라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경구는 미디어가 인간, 사회 및 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까지 연장할 수 있다. 사실 미디어의 내용이나 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들이 인간관계에 틈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오히려 미디어의 '내용'은 우리가 미디어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따라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맥루한의 개념은 미디어 메시지의 내용이라는 측면에 관심을 두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방영된 내용에 어떤 반응을 행사하는 가를 연구한 보통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자의 경향과는 반대되는 입장, 즉 미디어 결정론적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커뮤니케이션 내용에만 정신이 팔려왔다. 즉 커뮤니케이션 내용만 강조하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지각조차 못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들이 일으키는 혁명적 변화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미디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내용이 미디어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일반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은 메시지 내용이라는 측면에 관심을 두면서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방영된 내용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 가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맥루한은 미디어와 메시지의 관계를 결코 이분법적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맥루한은 미디어와 메시지의 동일성, 즉 미디어와 메시지는 분리될 수 없다고 가정했다. 그에 따르면 메시지란 '도둑이 마음의 개를 혼란시키기 위해 던져 주는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연장extention이기 때문에 육신과 정신을 분리할 수 없듯이 미디어와 메시지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맥루한의 이런 주장은 記意signified에 대한 記表signifer의 우위를 내세우는 기호학자들의 주장과 흡사하다. 기호학자 바르뜨R. Barthes에 따르면 이 시대를 기표만이 존재하는 시대로 보았다. 그만큼 기의보다는 기표가 활개친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디어와 메시지의 관계도 기표와 기의의 관계와 흡사하다. 즉 미디어가 메시지를 담는 그릇이라면 기표도 기의를 담는 그릇이다. 보들리야르J. Baudrillard도 미디어가 매개하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바로 미디어가 구현하는 형식적 코드라고 지적한바 있다.

오늘날 미디어는 의미의 중립적 전달자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인간의 의식, 그리고 사고를 형성하는 의미생성의 중요한 한 과정으로서 작용한다. 이는 미디어가 인간 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며, 그 자체가 의미 분석의 핵심적인 텍스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맥루한도 미디어가 자신의 언어와 문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미디어는 그 자체로서 기능하지 않고,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인류가 살아왔던 각각의 시대를 살펴보면 그 시대마다 인간이 미디어를 통해 입수하는 정보형태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할 때마다 그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새롭게 수용해 왔다. 이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재현 내용을 전달할 뿐 아니라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간에 새로운 言說의 조립품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개인, 사회, 기계라는 범주를 상호중첩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재 기능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맥루한이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하나의 언어로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맥루한은 언어가 그것의 문법을 갖고서 인간의 지각작용에 간섭하듯이 미디어 테크놀로지도 어떤 문법에 의해 미디어 테크놀로지 사용자의 지각작용에 효과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즉 문학에서처럼 미디어론에서도 형식(미디어)과 내용(메시지)의 관계는 중요한 문제라고 보고, 메시지 내용보다는 메시지가 소통되는 방식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원시시대 인간은 언어라는 기능적 미디어를 만듦으로서 낮았던 자신의 지능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 결과 인간은 다른 포유류와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미디어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 유형,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까지도 바꾸었다. 이것은 미디어가 사람의 오감 사이의 균형을 변화시키면서 어느 하나의 감각을 으뜸으로 만들면서 정보에 대한 사람의 감각과 사고와 행동을 바꾼 결과이다. 즉 새로운 미디어가 새로운 감각의 균형을 낳고, 또 새로운 감각 균형은 새로운 환경을 낳으며, 이로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관계도 새롭게 인식한다.

그러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문구는 맥루한이 자신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I don't explain - I explore) 것이라고 한 자신을 옹호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한가지만을 제시하지 않고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대부분의 해석들이 주장하는 미디어 결정론적인 의미만을 단순히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지 않는다.


근대성 비판

맥루한의 대표저인 저서는 1962년에 쓰여진 《구텐베르크 은하계》와 1964년에 쓰여진 《미디어의 이해》이다. 그런데 맥루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체로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 이후의 전자미디어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맥루한의 한쪽만을 조망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 기대 못지 않게 인쇄술에 대한 그의 비관적 평가가 맥루한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열쇠이다. 바로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맥루한은 인쇄술에 의해 인간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맥루한은 인쇄술에 대한 비관적 평가를 모더니티와 연관해서 비판하고 있다. 이 비관적 평가는 구어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변화, 특히 인쇄에 의해 강화된 근대 문자문화에 대한 못마땅함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물론 그 못마땅함의 핵심은 활자화된 문자, 즉 인쇄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의 생명력이 상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근대인간의 소외를, 또 근대문화의 획일성을 잉태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전자미디어는 커뮤니케이션의 상실된 생명력을 복원해줄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낙관적 기대의 근거이다.

이런 기대는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도 충분히 논의되고 있는데 《미디어의 이해》에서는 이 기대를 보다 단순 명료한 형태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미디어의 이해》만으로 맥루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맥루한에 따르면 인쇄미디어에 대한 비판과 전자미디어에 대한 낙관은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근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맥루한은 이를 "미디어가 지닌 구조화된 힘"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미디어에 대한 이해 없이는 문화 변동에 관한 설명이 불가능하고, 이는 그 동안 모더니티modernity 혹은 근대에 대한 많은 논의에서 미디어 차원이 배제되었음을 비판하고, 미디어의 중요성을 새삼 역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그의 입장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지적 전통인 문학이론이나 예술이론 등의 인문학적 통찰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보여주는 많은 인용과 주제들, 또 그의 독특한 글쓰기 등은 이런 영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특히 엘리엇T. S. Eliot, 파운드Ezra Pound, 조이스James Joice 등의 상징주의 문학가들이 모더니티에 접근하는 방식과 곰브리치E. H. Gombrich의 원근법적 재현 예술에 대한 비판 등을 장황하게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맥루한이 모더니티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 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맥루한은 인쇄 미디어의 관련 속에서 이들을 해명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맥루한이 모더니티에서 감지했던 것은 비인간화의 문제이다. 이것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커뮤니케이션이 부재하게 된 이유라고 보았다. 그것은 시각이 인간의 감각 중 가장 非인간적인 감각인데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말에서 문자로, 또 인쇄로 넘어가면서 점점 더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에서 멀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인간 감각의 최초의 외화라면 문자는 말의 외화, 또 인쇄는 문자의 외화이다. 이런 외화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 커뮤니케이션은 더욱 명료화되었다.

그러나 말보다는 문자로, 문자보다는 인쇄로 미디어의 형태가 이행되어 오면서 명료화가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중심적 가치로 자리잡았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0과 1로 환원되는 디지털 논리로 대치되고 있다. 한마디로 명료화가 낳은 비극이다. 이제 근대의 인간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이 원래 지니고 있던 풍부함과 생명력은 여러 차례 걸러짐으로서 근대 사회에 있어서 인간은 생명력을 상실한 화석화된 커뮤니케이션과 문화만을 갖게 되었다. 이 화석화된 커뮤니케이션과 문화를 맥루한은 모더니티의 성격으로 보았다.

원래 시각화한 것은 그것이 자리잡고 있던 곳에서의 그 의미를 상실하고, 표면만이 떠오른다. 아니면 원래 지니고 있던 입체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평평한 이차원적인 것으로 변형된다. 그 과정에서 상실된 것이 깊이다. 이런 입장에서 맥루한은 근대사회를 표면만 비추는 '照射光light on'의 사회라고 평가했다. 그것은 '透過光light through'이 지나갈 깊이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투과광이 비춰주는 존재 전체의 공명도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는 어둠 속으로 그 깊이가 가라앉아 버렸다. 맥루한이 되살리고 싶어한 것이 바로 이런 깊이였다고 보인다. 맥루한은 이와 관련해서 동굴화에 대한 기디온Giedion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이 영원한 밤의 세계에 나타난 전기광선의 빛은 원시시대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그 이상으로 파괴하는 것은 없다. 나무의 송진이나 동물의 기름을 태우는 작은 돌 등잔은 동굴화의 선과 색을 그저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게 비출 뿐이다. 이런 약하고 가벼운 빛은 주술적 힘을 갖고 있다. 도안의 선과 표면의 색채는 강한 광선 아래서는 그 농도가 약화되거나 혹은 어떤 때는 아주 상실되기도 한다. 오직 희미한 불빛 아래서만 그림의 훌륭한 결이 그들의 거친 배경 위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이 글을 인용함으로써 맥루한은 의식의 차원 저 아래 침잠 되어 있는 무의식, 문자에 의해 소외된 의미, 그리고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윤곽과 이미지로서 구성된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이 원래 사물이나 현상 본래의 모습은 희미하지만 전체 모습을 파악하고자 했던 인간커뮤니케이션의 原流가 아니었던가. 문자와 인쇄술을 통해 강조된 커뮤니케이션의 명료화가 인간의 모습을 굴절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인간의 모습을 '합리적'이라는 수식어 속에 묶어 두었던 것이다.

출처 : o_osimi
글쓴이 : sim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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